"들렀다 가지 뭐. 잠깐."
"율촌형님 근력이 이번 설 쇠고는 눈에 띄게 노인 되셨드마는."
"하루가 무섭지. 인제부터야. 무슨 기가 맥히게 좋은 일이나 생긴다면 또 모를
까. 크는 어린애 오뉴월 하루 햇볕이 무섭듯이 나이 자신 노인네 하룻밤새가 무
서운 법 아닌가. 거기다가 근심이 댓진같이 꽉 차있는데……."
"청암백모님 상당허시고는 그만."
"초상도 초상이지만. 집 나가서 안 오는 자식을 두고 그것도 참 여느 자식허고
같은 아들인가. 잠이 올까 밥이 넘어갈까 그 정황을 생각허면 내가 도무지 죄
지은 것 같어서. 그 형님한테 어디 몸 둘 바를 모르겄네. 정말로."
수천댁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무겁게 가라앉은 한숨을 토했다.
"그리 된 일이 형님 탓인가요. 무어. 자식도 품안에 자식이지. 다 큰 아들이 생
각 있어 허는 일을 부모라고 어찌 맘대로 헐 수가 있어야지요. 생각해 보면 형
님이나 율촌형님이나 똑같은 입장이신데. 그래도 어디 가 있든지 혼자 가 있는
것보담은 저희 종형제 같이 있을 터이니 한결 낫지요. 사실 또 여기 있대서 편
안한 세상도 아니고. 징병 때문에 모다 저 난린데."
"그나저나 마적떼가 되었는가. 동냥치가 되었는가."
"젊어 한때 바람이겄지 평생 그럴라고요? 부모 여기 계시고. 제 자식들 여기
서 크고. 저만 기다리는 제 처 여기에 있는걸."
"그런 것 아는 놈이 이러고 소식 한자 없겄는가? 중정이라고는 솔잎 끄터리만
큼도 없으니. 그렇게 독허게 제 생각만 허지."
"인제 곧 무슨 소식이 있겄지요. 설도 쇠고 했으니."
"그믐에 안 온 놈이 설 쇠었다고 와? 아. 갈라면 혼자나 가지 왜 넘의 집 종
손은 끌고 가아. 글세. 명색이 형이라는 위인이. 아무리 종항간이라지만 친동생
한가진데. 그래 헐 짓이 없어서 도망을 같이 가? 야반도주를? 설령 동생이 그러
자 허드라도 형이 말리는 것이 도리지. 이거는 거꾸로. 이런 노릇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참말로 면구스러워서. 형님이 나한테 내놓고 그러시든 않지마는 나만 보
면 꼭 그 말씀을 허실 것만 같어 조마조마……허네. 내가 강모 그리 된 것이 부
랑배 형을 둔 탓이라고……."
수천댁의 음성이 속에서 치받으며 격해졌다. 오류골댁은 수천댁이 말은 저렇
게 하지만 속으로는 아들 강태가 하루아침에 만주로 가 버렸다는 소식에 입술이
거멓게 변색될 지경으로 놀란 뒤. 아직도 푸르둥둥 제 색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네의 애간장도 그렇게 멍들어 질린 빛으로 상하여
버렸으리라는 것도. 그리고.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 견디어 야속한 마음에 원망까
지 얹혀서 울컥 토해 내는 말이라는 것도 그네는 짐작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지
금 한 말들을 오류골댁이 율촌댁한테 대신 전해 주어. 율촌댁의 심기를 조금이
라도 누그럽게 만들고자 하는 저의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왜 그런 말씀을 허셨던고. 청암 백모님 생전에 봐라. 인제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다. 그러셨다드마는 그 말이 안 맞겄는가. 시방 같으면. 누
구 풀 뽑을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두부모같이 희고. 반듯하고. 부드러운 흙이 도탑게 다져진 마당을. 청암부인은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이른 새벽 푸른 미명에 앞뒤로 구석구석 돌아보고 어제
없던 풀이 돋아나 있으면 비록 눈꼽재기만한 것이라도 반드시 손수 뽑았다.
"마당에 풀 나게 허지 마라. 오죽 게으르고 오죽이나 의젓잖으면 사람 사는 집
마당에 풀이 나리. 이러고도 얼굴을 들어? 낯부끄럽게."
뽑은 풀을 노복들한테 보이며 마룻대가 우렁우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벽력같
이 꾸짖어 호령을 하면. 종들은 등골에 식은 땀이 흘렀다. 그리고는 불불불 기다
시피 그 앞에서 물러나 그야말로 개미 눈꼽만한 것이라도 풀이라고 돋아나 있으
면 놓지치 않고 뽑아 냈던 것이다. 솟을 대문 옆에 하늘로 치솟은 은행나무 우
람한 둥치며. 중마당 안의 매화 고목 늙은 줄기가 반이나 말라 버린 듯 거멓게
웅크리고 있더니만. 홀연 거기서 한 가지가 길게 벋어 나와 옥골빙자를 겨울 달
빛 아래 드러내는 풍운. 그리고 안마당 화단에 봄이면 흐드러진 떨기로 피어나
는 모란과 작약의 희고 붉은 꽃무리와 뒤안의 감나무들. 후원의 대숲. 그 푸른
그림자가 바람에 일렁이며 드리우는 그늘.
이런 것들이 집안을 에우고 있는 속에. 언제나 찬지게 탄탄하고 장판같이 정갈
하여 네 귀퉁이 날이 선 이 마당을 두고 사람들은
"맨발로 딛기에도 아까운 마당."
이라고 하였다.
"마당 쓸 때 집안에 먼지 내지 말아라. 비단 치마 방바닥 스치듯이 가벼웁게
빗자루 다루면서도. 검부라기 티 떨어진 것까지도 말끔히 쓸어 내야 한다."
"마당을 쓸 때는 안에서 바깥쪽으로 빗자루질 하지 말하라. 복 나간다. 바깥에
서 안쪽으로 쓸어 들여라. 그런 것도 다 정성이니."
"너무 깨끗이 한다고 흙 패이게 쓸지 말아라. 돌자갈 드러난다."
고 청암부인은 말했다.
이 마당에는 이따금씩 기다란 대빗자루를 손에 쥔 손님이 아무도 모르게 찾아
들곤 하였다. 그는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참이나 있어야 하는 신새벽 검푸른 꼭
두에. 이 집의 마당쇠보다도 먼저. 가지고 온 빗자루로 조심스럽게 소리 없이 한
쪽부터 마당을 쓰는 것이었다. 그 손님은 때로 문중의 무세한 일가이기도 하였
고. 또 아랫몰 가난한 타성이기도 하였다. 이윽고 천지가 푸르스름 어둠을 풀어
내며 동이 틀 무렵. 새벽 이내 자욱한 큰사랑 안에서
"어흐음."
이기채의 카랑카랑한 큰기침 소리가 나고. 이어서 놋쇠 재떨이에 장죽 두드리
는 새된 소리가 딱. 딱. 딱. 들리면 화드득 놀란 노복과 머슴들. 그리고 계집종들
이 저마다 이불을 개는 둥 마는 둥 황급히 눈을 비비며 튀어 나왔는데. 마당쇠
는 재가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해 놓은 손님이 빗자루를 세워들고 마당 한쪽에
쑥스러운 기색으로 오두마니 서 있는 것을 그때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마
당쇠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곧바로 청암부인에게로 가서
"마님. 아무 아무가 오늘 아침에 마당을 깨끗이 쓸어 놓았습니다."
하고 고하였다.
"알았느니라."
청암부인의 대답은 그뿐이었다. 손님은 그 대답에 송구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
며 고개를 숙이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부인은 광으로 가서 자루에 쌀이나 보
리 혹은 다른 곡식을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담아 내. 그가 타성 같으면 직접 가
지고 가게 주었고. 문중의 일가라면 마당쇠한테 가져다 드리라 시켰다. 그러니까
그 곡식이 마당 쓴 값이라고나 할까. 집안에 양식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게 되
면. 가난한 가장은 그렇게 빗자루 하나 들고 그 마당으로 찾아가. 성심껏 쓰는
것으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였으며. 청암부인은 그 정경으로 모든 것을 짐작하
고 두말없이 곡식을 내주었던 것이다.
"신새벽에 귀설은 빗자루 소리 들리면. 오늘은 또 누가 와서 마당을 쓰는고 싶
더니라. 인제 후제 내가 죽더라도 그렇게 이 마당 찾는 사람을 박대허지는 말어
라. 그것이 인심이고 인정이다. 이 마당에 활인 복덕이 쌓여야 훗날이 좋지. 태
장 소리 낭자허먼 안택굿도 소용이 없어. 집안이 조용허지를 못헌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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