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거기서는 사람들이
1. 종이꽃 그늘
영산백 흰 꽃이 투명한 모시빛으로 소담스럽게 핀 암자의 뒷마당 그늘진
곳에서, 놋대야만한 단지 뚜껑에다 연분홍 물감을 풀어놓고, 한 장 한 장
백지를 담가 흔들며 물을 들이고 있던 호성암 암주 스님 도환은, 인기척을
듣고 문득 고개를 돌린다.
"아니, 이분이 누구십니까."
주르르 분홍물이 떨어지는 한지를 양손으로 맞잡아 올리면서 도환이 반갑
게 일어선다. 도환은 아직 사십이 채 안된 모습이다.
"초파일이 가까워서 바쁘시구만요."
강호는 물들여 널어 놓은 색지를 가리켜 눈짓한다.
"그늘에 말려야 빛이 안 바래거든요."
금방 건져낸 연분홍 한지를 널판자에 펼치는 도환의 말에 강호가 웃는다.
"이상하게도 안 변해야 할 것들은 꼭 그늘에서 말리지요?"
"그늘... 그것 참 좋은 것입니다."
"관목도 그렇고, 거문고 만들 오동나무도 그렇고, 집 지을 서까래 기둥목도
그렇고. 이런 종이 한 장까지도."
"그것뿐입니까? 아, 저 판소리에서도, 또랑또랑한 목은 별로 치고 소리에
그늘이 있어야 심금을 울리는 깊은 맛이 오묘하게 우러난다지 않아요?"
"세상 이치가 묘할 따름입니다."
강호는 저 혼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하던 일이라서 내처 해야겠는데 어쩌나. 산책이라도 잠깐 하시겠습니까?
신록이 좋아 이리저리 거닐 만하실 겝니다만."
도환이 미안한 낯빛을 짓는다.
"아니요. 구경은 여기서 하지요.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닌데요. 먹장삼
의 스님이 꽃물 들이는 것도 보기에 좋습니다."
초파일 관등에 수수백 등 수수천 등 공중에 매달아 밝힐 등불을 넉넉히 쓰
려면, 지금부터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연꽃등을 만들어야 하리라.
부처님은 그 많은 중생의 소원들을 다 어찌하시랴는고.
고대광실 치솟은 대갓집의 처마끝에 매달린 소원부터, 시궁창 속에서 가슴
이 벌어지는 나무토막의 진액이 토해 내는 소원에 이르기까지. 사바 예토
의 진흙밭에 연꽃같이 피는 소원의 등불들을 부처님은 일일이 다 살피실
수 있을까.
아니면 이처럼 손끝 밝은 스님의 정성을 빌려야만 무명의 중생들 소원은
부처님 곁에 좀도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일까.
도환의 종이꽃 만드는 솜씨는 인근이 모두 알고 탄복하는 바였다.
꽃이라면 계절 따라 산천에서 저절로 피었다 지는 것이 으뜸이련만, 종이
로 만든 지화에는 생화로도 못 당할 인간의 지극함이 깃들어 있어, 불당에
서는 부처님께 온 마음의 향기를 바치는 정성이 되고, 굿당에서는 원혼의
넋을 달래며 신을 울리는 해원이 된다. 그리고 인간사의 큰일인 혼인 때는
초례청에 잔치꽃으로 쓰이고, 죽으면 상여에 색색깔로 물들인 종이꽃을 덮
어서 마지막 가는 길의 서러움을 휘황하게 치장하였다. 그리고 이 꽃보다
더 고운 내세를 받으라고 빌어 주었으니, 사람의 심정 담은 것으로 이만한
지물이 다시 있을까.
"절에서는 지화를 쌀, 과일, 차, 등, 향과 더불어 여섯 가지 지극한 공양으
로 보아서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도환이 말했다.
그러나 이 종이꽃은 아무나 만들 수가 없었다.
꽃일이 까다로운 때문이었다.
도환 스님은 상좌 때부터 배운 연봉과 연꽃, 설중화, 오색등화, 불봉화 같
은 꽃들을 생화보다 곱고도 섬세 선연하게 지어내는지라, 늘 사람들을 경
탄하게 하였다.
특히나 사월 초파일이면 물오르는 수목들의 엽엽 푸른 잎사귀 그늘 속에
서, 금방이라도 벙글어져 피어날 듯 탐스럽고 어여쁜 연꽃 등이 호성암 앞
뒤뜰은 물론이요, 노적봉 중턱을 수놓으며 밝혀질 때, 유한한 인생의 발원
이 무한하신 법력에 황홀하게 이르는 것을 실감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는 청암부인 상을 당하였을 때, 여러 밤을 새우며 꽃상여 꾸밀
연꽃과 연봉을 정성껏 만들어 부조하였다.
꽃 만드는 손이어서 그러한가, 도환은 손이 고왔다.
그리고 중키 넘어 호리한 몸집이며 얼굴 모습도 단아하고 맑은 쪽이었는
데, 눈매만은 뜻밖에도 매눈이어서, 웃을때는 얼핏 잘 모르겠지만 무엇인가
를 집중적으로 생각할 때보면, 그 빛이 내리꽂을 듯 날카로웠다.
"도환이가 속가에 있었더라면 아마 한량이 되었을 게다. 그 가녈가녈한 몸
에다가 꽃 만지는 솜씨 좀 봐라. 영락 없지. 귀신이 감겨들게 생기잖었냐.
헌데 그가 기방이 아니라 승문으로 간 것은 오로지 그 눈 하나 때문이야."
도환을 두고 조부 이헌의는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유가에서는 본디 승려들을 쳐 주지 않았지만, 안부인들은 그와 또 달라서
공양미와 불전들을 꽁꽁 챙겨 들고 일만 있으면 때마다 절로 갔는데, 매안
에서도, 고리배미에서도, 거멍굴에서도, 호성암은 너나없이 찾아가는 곳이
었다.
암주 스님 도환이 이 호성암으로 온 것은 몇 년 전이었다.
호성암의 본사는 범련사였는데, 그 큰절까지는 제법거리도 있었지만, 그보
다는 웬일인지 이 암자는 어떤 절에 속한 말사가 아니라 저 홀로 생겨난
것처럼 여겨지고 친숙하여서, 매안 인근 부녀들은 범련사보다 호성암으로
곧잘 불공을 드리러 가곤 하였다.
"호성암 부처님의 가피력이 크시다."
는 말도 입에서 입으로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서게 된 유래가 어디 예사로운가? 이 세상일에
인연 없는 일은 없지만, 맨 처음에 호성암 세운 연이 바로 보은이었으니."
불은도 깊다는 것이다.
"사연인즉."
옛날 옛적 어느 시절에, 이름 높은 도승이 이 나라 강토를 두루 주유하며
다니다가 발길이 드디어 남원땅에 이르러, 매인 데 없이 훨훨 산천 경개를
구경하던중. 하루는 걸음 따라 사동방의 한 골짜기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는 오랜 수행의 길을 떠난 스님이었기에 정처는 없었으나 어디로 가든지
산 넘고 물을 건너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게 되면
"아, 이곳에 절을 세우면 참 좋겠구나."
감탄하며 간절히 발원을 하였다.
"부디 소승이 부처님께 절을 한 칸 지어 바치는 인연을 짓도록하여 주소서."
그러나 정처 없이 떠도는 거러지 도승에게 엽전 한닢 거저 주는 사람이 없
는지라. 마음만 가득할 뿐 뜻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가슴속에다가만 절을
담고 다니며 사동방의 노적봉 골짜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로구나. 정기가 빼어나고 풍광 또한 수려하여 과시
명승인데, 여기다가 절을 세울 수는 없을까. 할 수만 있다면 꼭 그리하고
싶다마는. 아, 내 지금껏 다녀 본 곳 중에서 이토록 마음을 사로잡는 곳은
처음이며 이만큼 웅혼하고도 자애로운 산자수명을 본 일이 없도다."
도승은 발심이 가득하여 전후좌우를 둘러보며 산세 풍경에 흠뻑 취하였는
데, 이 웬일인가, 난데없이 집채만한 호랑이가 나타나 도승앞에
"어흐응."
울부짖으며 치솟아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지러지게 놀랐다. 호랑이는 네 발을 공중으로 치켜들어 활짝 벌리
더니 덮치듯이 도승한테로 달려들었다.
하마터면 기절할 뻔하였으나 그래도 오랜 세월 수도한 보람이 있어, 이미
속세를 떠나 정진하는 나를 설마한들 해치지야 않겠지.
진정하여 생각하며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너는 어이하여 산에 홀로 가는 중을 해치려 하느냐?"
도승은 위의를 가다듬고 짐승을 대하여 엄숙하게 물었다.
이에 호랑이는 시뻘건 입속이 목젖까지 다 보이도록 커다랗게 벌리어 으르
렁거리었다. 그 아가리는 어찌나 컸던지 스님을 통째로 삼키고도 남을 만
하였다. 더욱이나 그 아가리는 지금 막 무엇을 잡아먹었는가 비린내가 등
천을 하는데, 온통 생피로 범벅이 되어, 벌리고 있는 그 순간에도 뚝뚝 핏
물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배가 고프다면 내 몸을 보시할 수도 있다만, 너는 지금 막 짐승을 잡아먹
은 모양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나를 먹으려 하느냐?"
도승은 최후를 각오하고 다시 물었다.
(이것이 내 업연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로다.)
그러자 호랑이는 그 큰 아가리를 더욱더 찢어지도록 벌리면서 아후아으응,
스님을 냉큼 덮쳐서 집어삼킬 것처럼 바싹 다가들었다.
그때 스님은 놀랍게도 다가든 호랑이한테 살기가 없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
"할말이 있느냐?"
이에 호랑이는 껌벅이던 눈에서 눈물을 주루룩 흘리더니, 무엇인가 애원하
는 목짓으로 자꾸만 제가 벌릴 수 있는 한 아가리를 짜악, 벌리었다.
스님은 그의 입속에 무슨 변이 생겼는가, 고개를 들이밀다시피 하고는 호
랑이 아가리 속을 살펴보았다. 스님의 눈앞에 날카로운 이빨이 피묻은 기
둥들처럼 즐비한데도 스님은 두렵지 않았다.
(절을 세워 중생을 제도하려는 서원도 중요하다마는, 눈앞의 짐승이 처한
난관 하나 풀어 주지 못한다면, 내 눈에 안 보이는 세세 생생 중생들의 앞
길을 어찌 열어 줄 수 있으랴.)
어디 보자아.
스님은 두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 목젖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저 안쪽에 희뜩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어금니 깊숙이 박힌
짐승의 뼈가 부러져 목젖 쪽으로 날카롭게 뻗친 것이었다.
"너 이 고기뼈를 빼 달라는 것 아니냐?"
스님이 물으니 호랑이는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아앙 벌린 채 울먹이며 고
개를 끄덕였다. 호랑이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애기 같았다.
"그럼 잠깐만 참아라. 내가 곧 시원스럽게 뽑아 주마."
그는 법장과 염주를 왼쪽 손으로 몰아 쥐고, 바른팔 옷소매를 걷어 올린
다음, 손을 호랑이 입속으로 쑤욱 집어넣어 어금니에 박힌 짐승뼈를 있는
힘껏 흔들었다. 아차 자칫 잘못해서 호랑이가 덜컥 아가리를 다물어 버리
기라도 하면 팔뚝이 송두리째 잘리어 달아날 판이었지만, 스님은 측은지심
이 가득하여 이 짐승의 뼈다귀를 뽑아내 주려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쉽
지 않아서 진땀이 났다.
아픔을 못 이긴 호랑이가 고개를 뒤틀며 으르렁댔다.
어이쿠.
스님은 흠칫했다.
야, 이것 봐라. 됐다.
진땀 범벅이 된 도승은 드디어 피투성이 뼛조각을 나뭇가지같이 빼내어 호
랑이한테 보여 주니. 호랑이는 그제서야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고는 일어
서서, 피 떨어지는 입술을 씻으며 도승에게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어 큰
절을 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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