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모도 2016. 6. 16.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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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14 1987. 2. 10 (화)

오늘,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육신의 옷을 입혀 세상에 내보내신지 14,614일째의 날이다.
'야훼의 밤'에서 읽은 김교신선생님의 흉내이지만 그 분께서 허락하신 유한한 생명의 길이를 늘 각성시키는 절묘한 방법이 아닌가.

햇수로 40 년 하고 4일째, 일만사천육백십사일.
20,000일째가 아마 만 54세때의 여름쯤일까?
21,900일째쯤이 아마 환갑일 것이다.
늘 생각하라. 네게 주신 년수가 감히 60이라면 너는 이미 67%의 기한을 소진해 버린 것이다.
또한 깊이 묵상하기를..
20,000일째의 날이 어머니나이 여든둘이 된다는 사실을.
어머니께도 시간이 없음을.

내가 그 분을 깨달아 환희에 떨게 된 순간이 작년 여름. 성경을 읽다가 어디 쯤이었는지는 기억할수 없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었을까.
어거스틴의 로마서 13장처럼 그 대목은 기념비적인 것일텐데 그것을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구나.
그러나 나는 순간적으로 엄습하여 나의 영혼을 사로잡는 힘이 있음을 육신이 느끼고 정신이 또한 감지하였다.
그 몽롱한 절망감 속에서 나는 알았다.
길이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놀라움의 길이 있었던 것이다.
말항수 없이 부드러운 위로의 길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제게 문득 보여주신 그 생명의 길, 그것만으로도 어둠침침한 미망의 내 생존에 환한 빛을 비추이신 것입니다.
벌레와 같이 꿈틀거릴뿐인 존재에 뜻을 주시고, 이유를 주신 것입니다.
일별하여 주신 당신의 이 하찮은 피조물에게 그 뜻을 거두지 마옵소서.
불면과 음란함과 술취함과 가족사랑의 고상함과 더욱 따뜻함이 모자람과, 온갖 시기와 또한 온갖 일상의 죄악들이 당신이 주신 시련이게 하시어, 그것까지도 선택받은 은총으로서 조건이게 하소서.

어제 밤 아티반 2알.
오늘부터 일기쓰기를 멈추지 않으리라.
이것이 내 신앙의 약속이다.

"나는 강한떡이다.자라나라! 그리하면 먹을 것이다. 네가 나를 네 육신 속에서 음식처럼 변형시킬수 없고 도리어 네가 내속에서 변화할 것이다."-어거스틴 고백록 -

"소시에 즐거운 것, 숭고한 것, 참된 것을 그 분안에서 찾지 않고 그 분의 피조물 안에서, 내 안에서, 그리고 다른 사물 중에서 찾아 헤맨 것이 죄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고통과 미몽과 잘 못된 길에 빠졌습니다." -어거스틴 고백록-

14615 1987. 2. 11. (수)

회색 수면, 아티반 1알 먹다.
불면의 밤 후에 나타나는 그 상태.
찌뿌드드, 불쾌감, 무엇에 짓눌리는듯한 기분.
불면- 청해도 청해도 잠은 오지 않고 오히려 점점 정신은 더욱 또렷해저가는 상황과의 투쟁.
잠은 자고 있으나 정신은 깨어 있는 상태, 이 때 외부에서 보면 분명히 수면 속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이리라.
지난 달까지 수개월간 수면제없이도 견디어 왔거늘, 초기의 신앙에의 감동으로 불면증따위는 충분하게 견디어 낼수 있었는데 이제 성경지식, 교리지식, 신학지식이 더 늘었다고 하는 지금이 오히려 불면의 싸움에서 지고있은 꼴이니.
믿는다. 불면증은 반드시 치료된다. 그 분께서 치유하여 주실 것이다. 그 분의 계획을 내가 억만분지 일이라도 헤아릴수 있으랴마는 나는 나대로 노력해야 하리라.

첫째, 아티반 복용을 끊어야 한다.
둘째, 술을 삼간다.
셋째, 불면으로 인한 감정의 조야한 상태를 나타내서는 안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러나 나의 심령은 너무나 부요하다. 무척이나.
부요하다는 것은 혼돈이다.
단순한 것이 가난한 것일텐데 나는 복잡하다.
심령이 가난해 질 때까지 이토록 지저분하고 혼돈스런 영혼을 그 분에 맞추어 고양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메타포화하여 크리스찬의 순례행렬에 등장하는 사람들. 그 중 나는 무지나 수다장이 둘중 하나일 것.

"일찌기 죄를 범한 일이 절대로 없는 사람만이 획득할수 있는 義를 내가 획득하지 못하는한, 나 자신의 義라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고 온 세상이 가진 義로도 나를 구원할수 없다."
오,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어쩔수 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누가 이 사망의 늪에서 나를 건져 내 줄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라.

14616 1987. 2. 12. (목)

마냥 따뜻한날씨에 봄비같은 촉촉한 비가 잠시 내리다.
어제는 술탓인가, 모처럼 편한 잠이루었는데, 그만 찾아온 감기.
성서의 성구들을 암기하여 읊는다는 것은 즐거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5장부터 7장까지 암기.
빌립보서 2장과 3장 암기.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양식이나 삶의 태도를 말한다.
모든 생활을 관통하여 흐르는 것이 기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엘로힘 (ELOHIM)- 전능하신 하나님,창조의 하나님, 강하신 하나님, 두려운 하나님.
엘 샤다이 (ELSHADDAI)- 모든 권세의 하나님, 만물이 경배하는 하나님.
야웨 (YAHWEH)- 은혜의 하나님, 신뢰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불변의 하나님.

오늘은 보름.
둥글고 둥근 달이 떴다.
참, 주님의 세계는 아름답기도 하지.
창조시의 모든 피조물은 얼마나 깨끗하고 얼마나 순수하고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J가 오곡밥을 하여 英이를 시켜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는 그 행위가 나를 말할수 없이 기쁘게 한다.
선한 교제와 서로에 대한 사랑. 주님 안에서 코이노니아의 아름다운 즐거움.

나의 하나님. 비옵건데 모든 가족을 인도하시어 선한 관계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갖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고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주님의 기쁨을 충만케 하기를 비옵니다. 아멘.

'로마서 15장''시편 8편'몇번이나 거듭하여 읽는다.

14617 1987. 2. 13. (금)

주님. 어제의 편한 잠 감사하옵니다.
청순한 새벽. 기도드린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온통 사랑하라는 전신을 울리는 음성에 휩싸여 그 감동에 젖는다는 것은 얼마나한 행복인가.

주님이 늘 함께 하는 아이, 열한살에 병으로 죽은 프랑스의 어린 소녀'마칠드 로와'의 시 '벗'.

"내 목이 아플 때
저 아이의 목도 아프다.

내가 밤에 기침을 할 때
저 아이도 깨어 기침을 한다.

내가 엄마에게 꾸중을 듣고 울 때
저 아이도 나와 함께 울고 있다.

석양에 비치는 내 그림자처럼
저 아이는 항상 나하고 같이 있다."

하루 일상의 시작.
이 건조한 일상이 주님의 말씀으로 풍성하기를.
나의 아내, 아이들, 어머니, 형제, 친지... 간구하는 대상의 Priority를 확대하여 모든 이웃, 모든 인류를 사랑하게 되기를.
이 메마르고 삭막한 세상, 이 세대에는 더욱 그리스도가 진리일 뿐이다.

14618 1987. 2. 14 (토)

86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 및 후보작 읽다.
시대의 모순과 아픔, 그리고 그를 극복하려는 작품들, 그 리얼리티를 접할 때에는 돌연 누선이 자극되고 심장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등 격정과 감동이 밀려온다.
그러나 내게 그것들은 어떤 의미로 작용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일까?
나는 진정 시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고 있는가?
그나마 나는 과연 참여치 못하는 방관자적 무능에 대하여 수치스러운 느낌이나마 가지고 있는가?
아, 아니다. 아니다.
나는 한갖 한 마리의 감상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헤겔과 아우구스티누스, 관념론적 역사관과 기독교적 역사관, 역사과정의 추진력으로서의 이성과 드라마와 같은 하나님의 뜻, 논리적인 여사발전과 목적론적인 역사의 흐름.-

나의 하나님. 만유를 창조하시고 만유 속에 계시며 만유를 당신의 뜻대로 이끄시는 나의 하나님.
인간은 다만 당신께서 빚으신 흙덩어리일뿐.
오로지 당신만이 영원하시며, 완전하시며, 절대적인 의미이십니다.
주님.
저에게 당신의 뜻으로 너는 존재한다는 말씀을 들려 주소서.

14619 1987. 2. 15 (일)

오륙층되어 보이는 건물의 옥상.
흰 체육복을 입은 남학생들과 여학생들.
어깨동무를하고 하나둘씩 꽃잎처럼 뛰어 떨어저내린다.
무슨 마스게임이라도 하듯이.
땅에 부딪처 수박처럼 깨어지는 머리통들. 퍽! 퍽!
정말 꽃잎처럼 꽃잎처럼 떨어져 죽어간다.
계속 이어서 그들은 꽃잎처럼 뛰어 떨어진다.
진압하러 주위를 포진한 경찰들도, 군중들도 숨소리 하나없이 이토록 처절한, 찢어지도록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울고 있었다. 소리없이 그저 눈물만 펑펑 쏟으며 울고 있었다.
너무나 생생한 새벽무렵의 꿈.

그들은 꽃잎의 아름다움으로 얘기하고 있었을까.
맨 몸의 목숨으로 소리치고 있었을까.
그토록 조용하게 떨어져 내리던 그들, 젊디 젊은 남녀.
폭력과 거짓언어와 독선과 부정직의 그 완강한 빙벽을 향하여 진실의 몸짓으로 얘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목숨으로 얘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생생한 꿈,
잠이 깬 후 그 영상의 액추어리티에 한동안 가만히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주님. 인간이란 그다지 완고한 것입니까.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 어찌 그토록 오만할수 있다는 것입니까. 무엇이 인간들을 그토록 오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무슨 절대적인 진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는 것입니까. 그 완고한 오만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 순수한 이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폭력입니까. 주님. 주님의 그 오묘하고 원대한 뜻에 의하여 예정하신 그 이루어짐말고 이 땅, 모든 영혼에 주님의 사랑을 만나처럼 내려주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평등 보편의 절대구원이란 없는 것입니까. 반드시 예정과 선택에 의한 것이어야만 합니까.

예수님에 대한 田川(다가와)의 해석.
영혼 구원의 측면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민중의 지도자, 반골로서의 반항아로서의 예수님.
이건 지금 또 하나의 도그마로서 사이비 신앙인을 지배하고 있다.
건조한 예수.. 역사 속의 예수..
진실은 그렇지 아니하다.
삼위일체의 일위이신 하나님 예수님이다.

주님.
사랑하는 나의 주님.
주님의 지혜를 조금만 엿보게 하여 주소서.
나로 하여금 거짓장이,외식하는 자, 위선자, 자아도취자, 무례한자가 되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소거.
오직 주님. 당신만이 진리일 뿐입니다.

14620 1987. 2. 16 (월)

새벽.
어떤 때는 감동적인 기도가 되는가하면 어떤 때는 매우 메마른 기도가 되는데 오늘은 후자이다.
기도는 고백하는 것인가, 구하는 것인가, 허덕임인가, 비명인가.
아마 모두를 포괄하는 그 무엇....

주님. J를 고상한 인격과 고상한 말씨로 주님게 무릎을 꿇는 경건한 여성으로 인도하시기를, 어머니를 모든 일상의 순간순간에 주님으로 인하여 복락된 여생이 되게 하시기를, 그러하기 위하여 나부터 스스로 마음에 사랑이 넘치고, 오래 참고, 범사에 감사하며 스스로의 벽을 허물수 있는 능력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 그대의 죽음은 곧 닥쳐오리라. 오늘 이 세상에 있던 사람이 냐일이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금방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오늘이 이 세상에서 그대의 마지막 날인 것 처럼 여기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처리하여야 한다. 아, 비통할지어다. 오래 산다는 것이 우리의 삶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죄를 더 크게 만들기 일쑤이니 말이다. 오, 이 세상에서 하루라도 완벽하게 살아 보았으면! 언제든지 죽을 시간을 목전에 두고 있고 매일같이 죽음을 예비하는 자는 행복하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마으며 -전 7:1)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임종을 보면 그대도 똑같은 길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아침이 되거든 저녁때에 그대가 죽을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라. 그리고 저녁 때가 되면 그대가 이튿날 아침에 살아있다고 다짐하지 말라. 그러므로 언제나 죽음에 대하여 예비하라. 그리고 죽음이 예비되어 있지 않은 그대를 앗아가는 일이 없도록 삶을 영위하라. 정말로 슬기롭고 행복한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있어서의 자기의 삶과 똑같은 삶을 평소에 영위해 나가는 사람이다. 이 세상을 철저히 경멸하고 덕을 훌륭히 실천하는데에 열성을 다하고 규율을 준수하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회개하고 기꺼이 복종하고 자기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위해 어떠한 환난도 끈기있게 참아가는 것이 우리가 행복하게 죽게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친구와 친척에게 의뢰하지 말며 그대의 영혼을 구하는 일을 뒷날로 미루지 말라. 사람들은 그대가 알고있는것보다 더 빨리 그대를 잊으리라. 바로 지금이 아주 귀중한 때요, 바로 지금이 은총을 받을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을 받을 때이다. 그러나 슬프다! 그대는 지금 장차의 영생을 위하여 힘써야 할 때인데도 이 세상에서 너무 한가롭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사랑하는 이여! 만약 그대가 평소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염두에 둔다해도, 얼마나 큰 위험에서 벗어날 것이며 얼마나 큰 두려움에서 해방될 것인가. 그러므로 이제, 죽음의 시간에 두렵기 보다는 오히려 즐거울수 있도록 현재의 삶을 영위하라. 이제 그대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삶을 시작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외면하라. 이제 그대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유롭게 살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멸시하는 법을 배우라. 이제 그대는 죽음에 임하여 확신을 갖기 위하여 회개로서 육신을 징계하라. 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단 하루의 삶을 자신할수 없으면서도 어찌 오래 사려고 생각하는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눅 12:20) 사람의 생명은 그림자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대가 죽는다면 누가 그대를 기억할 것이며 누가 그대를 위하여 기도할까. 사랑하는 이여, 행동하라. 무엇을 할수 있던지간에 그것을 즉시 실행하라.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또는 죽은 후에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 자신을 위하여 영원한 부를 축적하라. 그대 영혼을 RNK는 것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에 관한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말라. 이 세상에서는 마치 나그네요 행인인 것처럼 지내면서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이 세상사에 전혀 상관하지 말아라. 그대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서 하나님을 향해 두도록 하라. 이는 이 세상에서 그대가 거할만한 도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날마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탄식하고 애통하여, 죽은 후에 그대의 영혼이 지복을 누릴 자격을 가지고서 주께 나아갈수 있도록 하라. 아멘." -토마스 아 캠피스-

무릇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라는 것. 그 가치를 위하여 어떤 형의 인간이 된다는 것.
쾌락주의자, 염세주의자, 식도락가, 여성숭배자, 현실주의자, 공리주의자, 행동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개혁가, 운명론자, 개량주의자, 진보주의자, 보수주의자, 개혁주의자, 빈곤주의자, 황금주의자...
그것은 만일 죽음뒤에 아무 것도 없는, 절대 무로서 단지 1회적인 삶으로 소멸하는 것이라면 아주 조금의 가치가 있을지언정.
그것은 무가치한 것. 이런 명제에 온 영혼을 기울여 생명을 걸고 헌신하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다.
영원한 가치의 본령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세계이다.

14621 1967. 2. 17 (화)

숙직근무. 술 취하다.
술취하지 말라는 성서의 덕목. 술을 마신다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고 술취하는 것을 금하는 것일게다.
술이 취하면 의식이 마비되어 영혼을 더럽히기 때문일 터인데..
술 취함으로서 유발되는 정신의 피폐함- 허영,공갈,과장,허세,감상,거짓관용,위선 또는 위악, 자기도취....
확실히 이런 부정적인 덕목은 술취함 속에 있기 마련이다.
독작은 조금 덜 할까?
그러나 작취미성의 다음날 경건함은 많이 사라져버리고 진한 부끄럼을 남기는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변명....
술마시기.. 견디고 살아가기 위한 순간적 고양되는 감정이 필요함...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성 프란시스코와는 배리되는 것인지.

죄의식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알고있고, 우리가 자책할수 있는 죄의식이라는 것. 그것은 우리가 경험했고, 주위에서 감득할수 있으며, 역사에서 배워 온 간접지식, 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윤리의식으로서 우리가 이해가능한 법위 내에서의, 그 보편성에 비교하여 느끼는 죄의식.
'그것에 비하면 이쯤은 죄가 아니다.'는 자의적인 변명이나 자기합리화가 가능한 죄의식...
아, 그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키재기식의 죄의식 기준인가.
지극히 왜소한 人間群을 떠나서, 나를 떠나서 저 맑은 공간으로 상승하여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볼 때 그 죄의 엄청남은 어떠하겠는지..
원죄라는 것은 이런 것?
모르겠다.
죄를 그런 차원에서 느끼고, 그 죄의 무게를 고통스럽게 느낄수 있는자가 비로서 그리스도를 껴안을수 있는자가 아니겠는지.
죄의식이 아닌 죄에 대한 무지함....
그것이 바로 죄가 아닐까. 내가 지금 그렇듯이.
아, 나는 무엇인가. 머리 속에서 알고 있는 죄일지언정, 심장으오 내 온 존재가 그 무게 때문에 진정 괴로워 하고 있는가?
아, 어쩌면 지금 내 신앙의 태도는 매우 잘 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신앙의 스승과 동지가, 신앙의 환경이 필요하다.
주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주님의 그 발끝을 놓지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놓지면 나는 죽나이다.

14622 1987. 2. 18 (수)

구일산업 원양어선 진수.
동원303,304호 출항.
동원 303호 선장에게 선상기도회 편리 보아주다.
그런데 그 극진한 고마워함이란.
크리스찬은 우선 이런 덕목에서도 아름답다.
예전같으면 그저 하는 인사, 혹은 교인의 위선쯤으로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고마워하는 자세에서 말할수 없는 진정을 느낄수 있다.
크리스찬의 덕이란 어찌하여 고상하게 나타내어질 수밖에 없는가 생각하여 본다.
행위라는 것, 선하고 덕성스러운 행위 자체는 그의 영혼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을터인데, 그는 예정에 의하여 선택받은 영혼이므로.
그렇지만 그는 변화될 수밖에 없다.
선택받았다는 의식이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하리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에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 앞에 비추이게 하라. 저희가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나의 급한 성격, 예리한 신경, 상대의 반응에 따른 자의식적인 대응... 나는 이런 덕목을 쌓기에 아직도 요원할 뿐이다.

아, 나는 어찌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 분이 나를 예정하여 선택하셨다는 확신의 희열에 떨수 있을것인가?
만일 그 확신이 영원히 오지 않는다면 나의 신앙은 엉터리이다.
천로역정의 '희망'과 같은 안내자, '용감'과 같은 안내자는 없는가?
여러 서적과 기독교방송의 청취등에서만 쌓아지는 나의 신앙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예수를 사랑한다. 죄의 고통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다. 기독교의 교의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신앙인이 되고 싶지 교회인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이것은 우찌무라 간죠의 영향일 것.
우찌무라 간죠, 우찌무라 간죠, 아 우찌무라 간죠선생님. 이 시대에 당신이 계셨으면.
'야훼의 밤'을 쓴 소설가 조성기씨는 어쩌면 그런 그룹을 운영하고 있을는지.
그에게 편지할 생각이 든다.
김교신 전집도 구하여 읽고 싶다.

봉급.
경조금이랑 세금이랑 많이 떨어져 나갔다.
엄청난 적자, 어떻게 메꾸어야 할지 막연하다.
그러나 더욱 걱정스런 가정 하나.
십일조.... 십일조의 교리는 지켜야 한다는 긍정에 이르렀을 때 어떠한 경우라도 그를 준행할수 있을까? 어떠한 경우라도...
"너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것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14623 1987. 2. 19 (목)

눈물로 기도.
새벽의 청정함속에 잠겨서 주님께 기도드리는 이 시간은 커다란 축복이다.
주님께 자복하여 간구한다.
스스로 주위에 쌓아놓은 교만의 벽, 열등의 벽. 어머니에게 진실한 사랑과 효를 드릴 기회를 줍시사고 간구하는 것으로 위장한 기실 오히려 어머니로부터 그것들을 받고 싶은 욕망, J의 고상한 인격과 고아한 말씨와 고결한 품성을 갖춘 주님의 사람이 되도록 간구하면서 기실 나 자신부터 그녀에게 그렇게 대하지 못하면서 바라기만하는 나의 비열한 이기주의,아이들에게 내 기분상태에 따라서 일관성없이 대하는 아비짜리의 훈육, 형과의 교통없음이 나 스스로의 벽때문임을, 그 속에는 어머니를 향한 시기심 또한 없지 않음을, 부유함에 대한 선망이 일종의 열등감이 되고 그것이 한층 친지들에 대한 자의식으로서의 벽쌓기임을, 육체의 욕망, 술취함을,...
세상을, 육체를, 땅의 일을 두려워 말게 하소서.
오직 두려워 말게 하소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흠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본능이 되고, 이것이 실존이 되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소리내어 읽다.
두시간여 기도.
쏟아지는 눈물은 주님의 응답이다.

14624 1987. 2. 20 (금)

어제 과원들 데리고 회식.
술 취하여 집에 돌아오다.
작취미성의 아침.
아, 경건의 상실이 너무 크구나.

단순함,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어렵게 이해한다. 지극히 단순한 것을.
마음이 가난한 자는 단순하다.
단순한 것은 아름답다.
단순한 것이 거룩하다.
백도기의 소설.
책상과 돼지가 있다.
책상을 보고 단순한 자가 말한다.
"저것은 책상이다."
복잡한 자가 말한다.
"그렇게 단정지을수도 없지. 그것도 발이 넷있지만 돼지도 발이 넷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돼지일수도 있는거야."
책상은 책상이고 돼지는 돼지다.
책상도 다리가 넷이고 돼지도 다리가 넷이다.
그러므로 착각할수도 있다. 착각은 자유에 속한다.

책상을 책상이라고 말할수 있은 사람이 용기있는 시대. 이 시대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다.
정치가,지식인,재벌,관리,종교인...
이 시대에는 스스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존경할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보다 쉽지않을까? 단순한 사람이 더 범부범부일테니까.

14625 1987. 2. 21. (토)

봄날씨처럼 따스하다.
하늘은 잔득 찌푸렸는데.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
소설가적 상상력으로서의 요한복음, 사도행전.제자들의 배신, 자기회오에서 그리스도라는 개념의 탄생. 성서무오설은?

14626 1987. 2. 22 (일)

이틀동안 경건을 잃었다.
새벽.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게 하여 주소서.
내 죄의 무게를 느끼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나를 자유케 하소서.
갈보리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고 체험하게 하소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죽음 안에서 그와 하나가 되어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이기신 당신의 승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보혈을 통하여 나로 하여금 정복자 이상이 되게 하소서." -H.G의 기도-

하이델 베르크 신앙문답.
<문>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답> 내가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도 이미 나의 것은 아니고 몸과 영혼으로 하여금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사랑스럽게 군다해도 그 사람도 역시 연약하고 죽을 목숨이니 과도히 의뢰할바가 못되며, 또 어떤 사람이 간혹 우리를 거스린다 할지라도 과히 언짢아 말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라. 만물은 모두 지나가 버린다. 그대도 또한 그것들과 더불어 지나가 버린다. 예수와 진리를 사랑하는 자, 참다운 내적 기독교도 그리고 절제없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자는 자유로이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할수 있고 정신적으로 자신을 극복할수 있으며 즐겁게 안식을 취할수 있다." -토마스 아 캠피스-

14627 1987. 2. 23 (월)

인간은 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다.
한마음의 상태를 영원히 시종여일하게 간직할수 있겠는가. 도저히 그러하지 못하리라.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한번 먹은 마음을 죽을때까지 가지고 있을수 없다. 생각과 환경과 조건이 가변이면 그 마음도 변하게 마련이다.
생각과 환경과 조건이 시종여일한 것. 예수 그리스도.
지속적인 감동의 상태.

CBS의 간증프로 '새롭게 하소서'.
여러 유형의 사람들의 거듭난다는 것.

英이- 전학년 1등.
俊이- ALL 秀.
주님. 감사합니다. 내 아이들을 주심을.

14628 1987. 2. 24 (화)

온통 성프란시스코로, 온 누리가 성프란시스코의 정신으로 넘친다면.
이 시대의 전인류가 성프란시스코를 숭앙하고 그의 덕을 지고의 가치로 삼을수 있다면.

'나의 주인, 당신께 찬미를. 병의 자매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매섭고도 좋습니다. 병의 자매는 사람을 가련하게 여겨서 영혼이 육신을 빠져 나가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 심지어 죽음까지도 찬미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한 동정심은 아닙니다. 단순한 친절도 아니지요. 동정에는 두사람이 관계되어 있어요. 하나는 고통받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동정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친절에도 두 사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지요. 허지만 사랑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있습니다. 두사람이 합하여 일심동체가 되며 떼어 놓을수 없는 것이지요. 나와 너라는 말이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어릿광대, 하나님의 작은 거지. 프란시스코.
가난, 평화, 사랑- 그 밖에는 없어요. 형제들... 가난, 평화, 사랑. 내 옷을 벗겨주오. 형제들. 벗겨서 나를 땅에 뉘어주오. 나는 땅을, 땅은 나를 느낄수 있도록 뉘어 주시오.'

임종시에 사람들이 슬퍼하자 성프란시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이 인생이 정말 그렇게 달콤하다고 생각하나요? 영생의 믿음은 어딜 갔나요? 그렇게 얄팍한 것인가요? 바로 문 뒤에 서 있는 죽음의 형제여, 인류를 용서하시오. 사람들은 당신의 그 고상한 말 뜻을 이해 못하는군요. 그러니까 그들은 당신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아, 그는 범신론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들까지도 자신과 같이 사랑할수 있는 것이다. 결코 샤먼의 세계처럼 모든 사물에 신격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똑같은 형재로서 사랑한 것이다.
성프란시스코는 자신의 육체를 나귀라고 부른다.
'나의 형제 나귀여. 나의 형제인 나귀여. 나를 용서하시오. 너무나 그대를 학대했소.'

성 프란시스코는 마태복음의 그 분이다.
바로 예수님이 산등성이에서 참으로 시적으로 설파하신 산상수훈의 그 사람이 바로 프란시스코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렇게 읽으련다.
그러고 나니 산상수훈의 이해는 얼마나 쉬워지는지.

더욱 깊이 묵상하여야 한다.
피상적인 것을 뚫고 그 안에 숨겨진 오묘한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
조금만 느끼고 나서 추론하여 다 알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교만이여, 외식하는 정신이여. 자기도취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마리 벌레여.
나는 더욱 더 깊이, 더욱 더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여야 한다.
이토록 위선덩어리. 얼마나 싫은 놈인가, 얼마나 징그러운 놈인가, 나란 놈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할텐데.
주님.
구원하소서.

14629 1987. 2. 25 (수)

매우 복잡한 꿈.
출연진- 나,J, 어떤 전도사 아주머니, 거인 해적. 커다란 배, 전쟁....

목욕물 데워진단다. 이러한 일상의 신변잡사에 애 태우는. 조그만 불편도 참지 못하고.
과연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이라면 그것을 기쁘게 견디어 나갈수 있을겐가? 한심한 놈.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의지로 견디는 것이 아닐것이라는 자위가 있다. 고난을 주시면 또한 그것을 견디어 낼 능력도 주신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웃이 누구인가?
원수가 바로 이웃이다.
그리고 사랑은 동정이나 친절이 아니다. 더욱 적극적인 것. 성프란시스코와 같이.
투쟁이다. 투쟁하여 쟁취하는 고귀한 자유, 진정한 자유로의 회복이다.

*기도에 대하여.
1)기도는 나를 위하여 놀라운 일을 한다.
2)기도는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3)기도는 주님의 뜻을 파악할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다.
4)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5)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6)기도는 하나님께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도의 요소에 대하여.
기도의 요소는 찬양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바카라, 힘노스...
신자와 불신자가 다른 것은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처리하며 그것을 통하여 무엇을 얻는가에 대한 태도이다.
찬양에 관한 시편을 암기하라.
시편-111,112,113,146,148,149,150.
주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깊이 들이 마시고 프란시스코처럼 춤을 추어라.

내가 지금 주님을 찬양해야 할 최소한의 이유 6가지.
-나의 기도할수 있는 새벽 방.
-내 가족들, 어머니, 형제들, 친척들, 친지들의 존재
-책과 음악을 사랑할줄 아는 마음
-이제 곧 동이 트면 보일 창 밖의 아침바다.
-이제 곧 할수 있는 아침 목욕.
-선택받은 기쁨.

지금 곧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온갖 미물이며, 저 우주의 온갖 물질이며, 블랙 홀이며, 미지의 땅 속 원소들이며, 혈관 속의 극미한 미생물이며, 짐승의 두뇌에 숨겨저 잇는 그 본성의 세포조직이며, 인간 내면의 어느 구석 무의식의 세계며, 잠재의식의 편린이며, 리비도까지..
그들을 있게 하시고, 생성되게 하시고, 원대한 뜻 속에 움직이게 하시는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
모든 것들의 하나님.
찬양하라. 경배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내 삶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그 분이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해서이다.

14630 1987. 2. 26 (목)

에리히 프롬.
정신분석가,철학자,프랑크푸르트학파, 신프로이트주의.
그가 쓴 '정신분석과 종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게 꽤 어필한다.
내 부박한 신앙에 그것은 독이 될 수 있음에도.

"그들은 행복과 진리,정의,사랑,소명을 바칠 대상을 갈구하고 있다. 우리는 그 아들 딸들에게 그들의 갈구를 만족시켜줄수 있을것인가?
그러나 그들만큼이나 우리도 무력해 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우리는 그런 문제자체를 제기하는 것조차 이미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대답해 줄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굳건한 기초위에 우리들의 인생이 근거하고 있는척하면서 우리에게는 결코 떠나지 않는 근심과 불안 혼란의 그늘을 짐짓 모른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종교로의 복귀가 그 해답이 된다. 그러나 이 복귀는 신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회의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이며 신앙심에서가 아니라 보호를 찾아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정신분석과 종교-

나는 어떤 논리의 추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가? 아니다. 나는 어떤 절망의 감정에서 구원의 모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던가.
어떤 숨어있던 본능이 고개를 내밀 듯이, 나는 그것을 피조물의식이라 부르고 싶다.
성경을 읽었을 때 문득 영혼을 울리는 숨어있던 기억의 회복, 아마도 이런걸 집단무의식이라고 해도 되는지..
실존적 고뇌의 도피처로서, 자기합리화의 도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니다.
차츰 궁구하여 보자.

3월 1일 할아버지 기일.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실까? 근엄한 표정이지만 눈매는 어딘가 피에로같이 천진하셨던.
아버지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李東雨.
나의 아버지는 어떻게 사시다가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어느 땅에서 고독하게 숨을 거두셨을까?
두어장 남아있는 사진에서 본 그 눈매는 할아버지를 닮고, 내 눈매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는데.
이 닮은 당신의 핏줄이 그리워서 얼마나 절절한 고독 속에서 돌아가셨을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셨으니 내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실까?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곳에서도 나는 아버지를 구원할수 없을까.
할아버지...아버지...나...俊이...俊이의 아들...

14631 1987. 2. 27 (금)

오늘 심사분석보고.
17개 부서의 보고회.
생산관리부,조선부,조기부를 총괄하여 브리핑하다.
사장, 전무에게 지적 당하지 않은 오직 하나의 브리핑이었다. 낮고 신중한 억양, 논리적 어순, 기승전결의 전개등 브리핑의 노하우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
그러나 대선조선- 가족회사의 시스템, 아부가 힘이 있는가하면 일종의 냉정함이 지배하고.
새벽의 경건함과 출근 후의 살벌한 메마름과는 얼마나 극과 극의 다른 세계인지. 그러나 내가 맡고 있는 부서는 그나마 나은 편, 현업부서의 그 분망함, 스트레스등은 지독하다. 조선소라는 현장의 물리적 정신적 압박..
관리부 차장으로 승진하여 검사과까지 맡게 된다면?
년전 검사과장을 역임했을 적 그 분방한 과업들을 생각하면 끔찍한데.
이른바 technical business- 쥐뿔만한 권력가인 선급 검사관들, 관청사람들, 선주들, 생산의 현업부서의 사람들과의 임기응변과 공갈과 거짓말과 허세와 매일 저녁 정치성음주와. 이런 것들이 일상적인 과업이 되어 나는 기독교적인 경건함을 유지할수 있을것인가?
아, 도저히 자신없다.
그것을 피하던가, 회색 크리스찬이 되던가..
이러한 가능성, 예측만으로도 일어나는 갈등구조, 다시 한번 부박하기 그지없는 나의 신앙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무교회주의는 강한 사람들만의 영역이고 나는 교회가 필요하다.
나와 같이 약한 인간은 조직의 힘, 환경의 힘으로 속박당하는 것이 필요하다.
에클레시아- 이 굳건한 구속을 위해서 회중의 모임은 중요하지 않을까.

서울대학교 졸업식.
총장이 치사하는데 모두 등을 돌리고 돌아 앉아 버린 졸업생들.
그 등판에 대고 끝까지 치사를 읽어나가는 총장.
곧이어 운동가요를 부르며 퇴장하는 무리의 뒤쪽에서 치사를 읽는 문교부장관.
참 딱한 모습이다.
그들을 솔깃하게하는 임기응변의 재치라도 있었을법한데.

민주화-
나라의 근본이 민주화된다면 나의 회사도 민주화되고..
우리 미들클라스가 진정한 동기부여에 의하여 힘차게 뛰는 사회....

14632 1987. 2. 28 (토)

새벽.
무릎 꿇고 엍드려 기도.
단순한 기도를 할수 있음이 기쁘다.
J와 어머니와 아이들과 형제와 모든 가족 친척들이 주님을 영혼으로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쁨에 충만하여 모든 마음의 벽을 허물어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이루사..
회사의 회장님께서 완고함을 버리시고 종업원의 어버이같이 그들의 복지를 생각하고 가족같은 사랑의 회사가 되사...
이 나라의 민주화, 모든 질곡과 폭력과 거짓언어와 핍박하고 핍박받는자 없는 나라를 이루사..

꽃샘추위.
J는 말한다.
"우리집 보일러 고장인줄 하늘이 아는 모양이지?"
나는 말한다.
"찬 물로 목욕하는것도 연단이야, 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