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빛 그늘 -3- (1,4,3,3)
-잡설-
<갈매빛 그늘> -3-
2007년 12월 8일
아버지의 할아버지, 곧 내 증조부.
李圭直(이규직).
生年은 모르겠고 1941년 12월 13일 歿하셨다.
이 어른의 부친(나의 고조부)의 동상이 경상남도 진영읍에 있었다.
양복차림의 청동 입상.
19세기 말이라던가, 수리조합을 만들어 그 고장 농업경영에 기여를 하여 주민들이 그 공이 고마워 세웠다는데. 글쎄 옛 원님네들 임기 마치고 물러가면서 제 공덕비 스스로 만들어 세우듯 그런것이었지 않나 싶다.
지금도 동상을 배경으로 찍은 웃대의 여러 사진들은 집안의 자랑꺼리로 회자되곤 하는데, 일제말기 이른바 대동아전쟁때 쇠붙이 공출 당하여 지금은 비석만이 남아 있다.
본관은 慶州. 白沙派
백사파라고 모두 양반이랴.
나는 우리집 족보라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조말(李朝末)의 양반첩은 이리저리 사고 팔기도 하였다는걸..
자라 오면서 이모저모 들어 종합해 보는바, 구왕조 말 세리(稅吏)등으로 한 재산 이루었다는 등등..
축재의 그 과정에 苛斂誅求(가렴주구) 없었으랴.
부자였을지언정 근본은, 골기 삼엄한 사대부라던가 등 꼿꼿한 양반 내력은 아니었을 것이라는게 내 짐작이다.
자라 오면서 문기(文氣)를 억압하는 듯한, 관념의 몽롱함을 멸시하면서 어디까지나 실익의 가치를 우선 순위에 두는듯한 가풍.
사춘기의 나는 할아버지 앞에서 감히, 문학이나 예술 어쩌구의 진로는 입도 뻥끗하지 못할 그런 분위기...
그러고 보니 아무도 없구나.
백여명이 훨씬 넘을 그 어른의 직계 비속들.
빈부의 양태 그야말로 양극화이고 생업 또한 다양하기 그지없지만 그 누구도 문화 예술 쪽의 인사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수 없다.
하다못해 운동선수 하나 없다.
죄 금융이라던가 회사라던가 의사짜리가 판을 친다.
아니면 나와 같은 가난뱅이이거나.
아아, 가난뱅이라서 그나마 쬐끔쯤 아름다움을 꿈꿀수 있다는.
이것만이 내 증조부께 바치는 작금의 나의 술잔이노라.
내 증조모의 함자는 金貞太.
오늘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