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공지영3 <인간에대한예의.절망을건너는법.동트는새벽> (1,4,3,3,1)

카지모도 2020. 1. 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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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공지영]]

<인간에대한예의> <절망을건너는법> <동트는새벽>

 

 

<인간에 대한 예의>

-공지영 作-

 

***동우***

2015.04.13 04:29

 

1980년대를 회상하는, 이른바 공지영의 후일담 문학에서는 늘 시대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혼자만 빠져나왔다는 자괴감이 짙게 배어있다.

시대의 가열한 쪽보다 열무싹 같은 아름다움이 알싸하게 전해오는 쪽의 그녀의 문학을 나는 좋아한다.

그래서 치열한듯 한 그녀의 앙가주망이 나는 오히려 애잔할 때가 없지 아니하다.

 

<그들은 우리들의 이십대가 고스란히 놓인 1980년대, 내가 죽고만 싶어, 죽고만 싶어, 하고 중얼거리며 죽지 못하고 빠져나온 1980년대의 한 길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달리다가 고꾸라졌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꾸라진 그들을 두고 나 혼자 달려나와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와버렸다는 생각, 그래서 어두운 곳만 보면 혹시 여기에 그들의 주검이 파랗게 누워 있는 건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민자와 권오규.

작가는 두 영혼을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주인공은 이민자에게 매혹되기는 하였지만 권오규를 선택한다.

권오규의 파괴된 삶에 대한 연민때문인지 자괴감에서 우러난 감상때문인지 혹은 그의 헌신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지..

 

이민자, 단독의 존재 속에 깃들어 있는 존재론적 사유와 무한한 자유의 정신.

 

<앙상하게 마른 그녀의 품에 안기면, 저어 산다는 게 뭐지요, 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러면 그녀는 그저 나의 머릴 쓰다듬어주고, 그러면 나는, 그래요 살고 싶어요,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랬다. 그녀에게는 분명 어떤 힘이 있었다. 뭐랄까,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만한 사람이 가지는 어떤 힘...>

 

권오규, 시대와 인간이라는 관계에다 스스로의 실존을 종속시켰던 이념.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사람.

 

<나는 잠시 난간에 두 손을 짚고 너무 늙어버린 노인처럼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으로 열무싹 이야기를 좀더 해야겠다. 이민자의 통나무집을 나서면서 내가 느꼈다는 열무싹 같은 슬픔이라는 것은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슬픈 거면 슬픈 거고 열무싹이면 싹이지 열무싹 같은 슬픔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민자를 결코 권오규만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실은 더 매력있고 더 재미있는 시간을 내게 내주었지만, 권오규의 동생은 지루했고, 권오규는 내가 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나는, 미안하다, 나는 그들의 지나온 삶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팔십년대에 이십대를 고스란히 보냈듯 그들이 보냈던 이십대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 삼십대가 다가오듯이 그들의 삼십대와 그들의 사십대를 시궁창 냄새가 풍겨오는 듯한 우리의 정치사와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제 정말 열무싹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다. 이건 정말인데, 나는 오늘 아침에 먹다 남은 차찌꺼기 모은 것을 그 열무싹이 뿌리 내린 흙에 뿌려주고 그것을 다른 흙으로 덮었다. 땅이 너무 척박해서 그것이라도 비료를 주어야겠기에... 나는 빌었었다. ...날씨가 더 무더워져서 이 차찌꺼기들이 빨리 썩기를, 썩어문드러져서 거름이 되기를... 나는 그걸 바라면서 아직 차가운 봄하늘을 올려다보았었다. 그들이 썩지 않으면 그들은 열무싹과 아무 상관이 없을 테니까... 파릇파릇한 어떤 싹도 틔울 수 없을 테니까... 그저 막막하기만 하던 권오규의 기사 첫머리가 그제서야 내 머리에 떠올랐다. 여기,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열무 싹같은 슬픔이 왜 없을까.

세월따라 슬픔은 얼마든지 수사(修辭)될 수 있지 않을까.

폭포같은 슬픔의 때가 있고 새싹같은 애잔한 슬픔의 때가 있을 것이다.

이민자의 슬픔과 권오규의 슬픔을 확연하게 갈라져서 한살이의 삶을 규정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에 대한 예의'가 어디 관계에 있어서 뿐이랴.

밖을 향한 연민이 있는가 하면 내면을 향한 연민도 없지 않다.

실존에 대한 예의라는 것도 있을법 하지 않은가.

 

레닌이 묻는다. '무엇을 할것인가'.

삶이 대답한다.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연민의 레토릭일지라도. ㅎ

 

서승(홍애님 블로그에 '옥중 19년' 연재) 서준식('옥중서한') 오현우(오래된정원) 권오규 같은 이들.

자신의 생명을 소진시켜 가면서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사람들.

 

그렇다고 개념없이 한 시대를 살아온 나와 같은 쫌팽이, 하물며 이제는 브루주아 폼을 잡고 사는 왕년의 투사 저 '강선배' 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은 아닐터.ㅎ

 

***야초***

2015.04.13 23:24

 

동우님.

치열하였던 한 시절이 떠오릅니다.

이제 늙은 가슴에 식지않은 재 한웅큼 있을런지요.

언제나 감사~~

가져갑니다!

 

***동우***

2015.04.14 14:05

 

한시절 言路에서 정면으로 시대를 헤쳐나오신 야초님의 가슴이야 어련하실라구요.

감사~~

얼마든지!

 

 

<절망을 건너는 법>

-공지영 作-

 

***동우***

2016.04.21 04:13

 

공지영(1963 ~ )의 '절망을 건너는 법' <1991년 발표>

 

이 소설에서.

피폐한 농촌의 현실이라거나 사회에 만연한 보수적인 여성관과 성적편견이라거나에 대한 소리가 들리걸랑 귀를 닫읍시다.

공지영의 어떤 경향성이 다소 눈에 띄더라도 눈을 감아줍시다.

 

<나는 갑자기 불행 앞에서 그녀가 그토록 행복 해 할 수도 있는가 하는 따위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들르든 그렇지 않든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행복했던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이 꿋꿋했던 것이다. 절망 따위의 말 같은건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관념으로, 혹은 기분으로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는 것.

그런 것만 봅시다.

 

순간적으로 포착된 절망은 아득하고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웃고있는 사람이 언제나 행복한 건 아니듯이 울고있다고 언제나 슬픈 것은 아닐겁니다.

 

그 어디에나 있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나를 찾아 나설때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십시오. -공지영의 다른 소설-

 

 

<동트는 새벽>

-공지영 作-

 

***동우***

2017.07.04 00:13

 

'동트는 새벽'은 1988년에 발표한 '공지영(1963~ )'의 데뷔작입니다.

 

듣건대, 연대시절의 공지영은 적극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앙가주망은 후에 구로공단 위장취업등으로 발현되기도 하였는데 이 소설은 그 경험적 진실이 녹아 있지 싶습니다.

 

공지영이 1990년대 末에 발표한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를 포스팅하려다가 이 소설 파일이 눈에 띄어 먼저 올립니다.

저 순정한 연대의식과 '아무도 없는 모스끄바'...

세월... 10년의 간극.

 

나중 지껄이기로 하고.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동우***

2017.07.05 07:29

 

공지영에게는 한시대 부당한 것을 향하여 싸웠던 사람들에게 모종의 죄의식같은게 분명 있습니다.

그녀의 첫 장편소설 고등어를 읽으면서 짙게 느꼈더랬었지요.

어떤 평론가는 회고담 문학이라거나 자기반성문학으로 말하기도 하였습니다만. (폄훼하는 어조가 아닌..)

 

<일학년 봄날,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하던 그 교정에서 느닷없이 솟구쳐올라 터지던 최루탄 소리. 끌려가던 선배들... 그 무렵 정화는 과선배에게서 책을 한권 선물받았다. 책갈피마다 선연한 핏자국들. 함성소리, 총소리, 눈물겹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다독이던 광주의 위대한 시민들. 도서관 한모퉁이에 앉아 터져나오는 통곡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날 이후 정화는 날마다 허물을 벗는 세상을 보았다.>

 

구로공단의 여공으로 위장취업한 여대생과 노동자 순영이.

그들의 순정한 연대의식.

 

새시대, 동트는 새벽입니다.

 

<정화와 순영은 손을 잡았다. 침침한 보호실의 어두운 벽만 보였지만 그들은 들을 수 있었다. 새벽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새벽이, 찬란한 새벽이 동터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방관이라기보다 냉담(무식함)에 가까웠던 내게는 저와 같은 미안함이거나 연대의식 같은건 그닥 만져지지 않는군요.

시대적 에피스테메(인식? 개념?) 없이 살아왔던 쁘띠 브루주아의 한계일테지요.

그보다 내게는 이쁜듯 애린한 공지영의 감수성이 좋습니다.

 

이 소설 발표후 10년도 훨씬 넘어 쓴 공지영의 소설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

텅 비어버린 혁명의 수도, 세월에 슬리는 마음들이 꽤 쓸쓸하답니다.

 

며칠 후 올립지요.

 

다음은 이 소설집, 작가의 후기입니다.

 

+++

태어난 이래 대통령의 이름이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나라에서 자란 내게 대학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거기엔 이미 유신시대의 암울한 평화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피난민처럼 보따리를 싸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내 괴나리봇짐에는 하고 싶은 말들이 아직 외피를 쓰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감히 그 보따리를 풀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문학이라니. 그랬다. 문학이란 그때 참으로 하찮고 우스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글을 하나 발표하고 나면 나는 씩씩한 투사들에게 비웃음의 표적이 되곤 했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옆자리의 동료가 하나씩 사라져버렸던 아픔에 비하면 사실 그런 비난들을 견디는 것쯤은 참으로 쉬웠다.

나를 비판하던 그들의 말은 옳았고 가끔씩 터져나오던 감정의 반박들은 내 어설픈 양심이 막아버리곤 했다. 재능으로 가득 찬 자신의 펜대를 꺾고 그 싸움의 한복판으로 달려나가던 선배들의 모습은 참으로 눈부신 것이었다. 나는 잔뜩 주눅이 든 채로 날마다 내게 같은 질문을 반복해 던졌다.

-젊은 날의 김지하같이 혹은 전태일같이 살지도 못하면서 쓰는 네 글이 도,대,체,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노승에게 목침으로 후려맞은 땡초처럼 나는 화두를 짊어지고 떠돌았다. 글은 그 사람이 산 만큼만 써진다는데 나는 내 삶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민이 깊어갈 무렵엔 이미 학생도 아니었고 직장도 없었다. 시나 소설을 쓰겠다던 생각은 팽개쳐버린 지 오래되어서 밤마다 식은 땀을 흘리며 일기나 써대곤 했다. 그 무렵의 일기장 속에서 나는 날마다 삶과 죽음, 광기나 일상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하는 여자의 눈이 마주치곤 했다.

그리고 어느날은 버림받은 듯이 엎드려 우는 그 여자의 몰골이 혐오스러워서 마지막 남은 것까지 버리기로 작정했다. 그것은 글이었다. 언젠가 장편을 들고 찾아갔던 출판사에서 받은 비판 때문에 6개월 동안 글씨라면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던 기억도 물론 버렸다. 그것들을 붙들고 있는 동안 나는 황폐해져버릴 것이라는 위기감이 내 속에서 팽배해진 무렵이었다.

아마도 나는 그러고 나서야 진정으로 내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평소 슬그머니 경멸하던 이웃집 젊은 여자와 수다도 떨었고 직장에 들어가 승진 때문에 고민하던 친구들이나 선을 볼때마다 번번이 퇴짜를 맞은 사촌의 이야기에도 열을 내며 끼여들었다. 현장으로 떠나 제 몸에 불을 지른 후배의 초상술을 마시고 밤새 주정하는 친구의 오물을 치워준 기억도 있다. 지레 유치하도고 단정했던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나와 같은 고민을 발견하게 되었고 지금은 묻어버린 그들의 이상의 편린을 엿보기도 하면서 나는 소설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나와 함께 사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끔씩 먼저 데뷔해서 화려한 처녀작을 출간한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 그들의 성취에 질투심이 솟기도 했지만 또다시 습작시절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대로 나는 그런 삶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아래 계속-

 

***동우***

2017.07.05 07:30

 

-위에서 받음-

 

그러나 그 평화도 곧 끝이 나고 말았다. 어느날인가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일어나 나는 미친 듯이 타이프를 두드려댔다. 발표하겠다든가 안하겠다든가 하는 생각도 없었다. 내 목구멍까지 차오른 듯한 그 무엇을 뱉어버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몽유병 환자 같은 몰골을 하고 하루 밤낮 동안 내내 그 일을 하고 보니 한 편의 소설이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으며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사춘기를 끝내고 줄곧 분열되었던 내의식이 처음으로 화해의 악수를 했다.

나는 그후로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살려는 사람이 되었다. 적어도 나는 더 이상 어설픈 고뇌의 흙탕물에 나를 던지지는 않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났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동독이 낫과 망치를 시세보다 비싼 값에 팔아 서독 마르크화를 샀으며 소련은 맑스와 레닌의 저작물들을 박물관의 먼지 속으로 들여보낸다고 발표했다. 세계가 그 이야기로 들끊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먼 나라의 일이었다.

변화는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왔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죽어 아스팔트 위에 고꾸라졌을 때도 문학은 영원한 것을 테마로 잡아야 한다고 내게 충고하던 교수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접경선의 변화에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변화는 시작된 것이었다.

너무 단호해서 차라리 숭고하게 보였던 이론가들의 초조한 모습과 술집에서 마주치는 일도 점점 늘어났다. 노동문학을 하겠다고 떠났던 친구는 폐병을 얻어 먼 남쪽으로 요양을 갔고 알지 못하던 선진이론을 늘어놓아 날 자주 감동시켰던 동료 하나는 쓰던 소설을 팽개치고 쾌락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론으로 밥을 먹고 사는 듯했다. 존재와 의식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지난날을 가볍게 청산한 그는 아무런 갈등도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그는 비로소 존재와 의식을 합치시킨 것이었다.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청산하지 못해 발버둥치던 그는 이제 편안해 보였다. 그는 내게 이제 민족이나 민주 자 들어가는 글씨만 보아도 구역질이 난도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는 우리의 사상이 자신들을 억압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거 보라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불행히도 세계정세에 어두운 나는 그들의 고뇌에 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혼란스레 혹은 편안하게 만들었던 그 나라들의 지나간 영광과 오늘의 오욕은 내게서는 한낱 예시에 불과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예전의 나를 고뇌하게 만들었던 것은 맑시즘의 도덕적 동기와 과학적 탐구방법이었고 그것을 가지고 정의로움에 제 목숨을 바쳤던 이 세계 많은 젊은이들의 치열한 삶의 과정들이었으며 그에 반비례해서 부끄러운 이 나라 현실의 어처구니없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나는 내 문학소녀적 환상을 박살내며 나를 키운 작가 확성영과 시인 박노해가 찬 감방에 기댄 채 이 불임의 계절을 보내는 한, 더구나 망월동 묘비앞에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들의 흐느낌이 멈추지 않는 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만 했다. 우리가 싸운 것은 알량한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와 구조가 안고 있는 모순 때문이었다. 이념은 수정되거나 혹은 사라지지만 보다 나은 인간들의 삶을 향한 인간들의 순수한 열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애초부터 작가라는 것, 더 나아가 예술가라는 것은 바로 이런 부채를 제 등의 혹으로 짊어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얼마전 소설가가 되겠다고 원고보따리를 싸들고 온 후배에게 나는 정말 사회과학적으로 비판을 해서 돌려보냈다. 그는 어쩌면 내가 그랬던 것보다 더 오래 글씨라면 단 한 자도 쓰지 못할 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글에 혹독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내 씩씩한 동료와 선배들을 이제서야 진정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문학에 무지했던 것이 아니라 삶이 소중한 것을 알았던 것이고 그럴듯한 작품보다는 진실을 찾아가려는 사람들끼리 손잡는 것이 훨씬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글을 쓴다는 것 역시 이 시대의 모든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회 모든 구성원들에 대해 책임을 동반한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내가 싸울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내 선배들이 내게 겨눴던 그 비판의 칼날을 내 자신에게 들이댈 것이다. 철이 지난 유행가를 바르자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나는 그들의 실패와 좌절을 배우기 위해 교활하게 노력할 것이고 이땅의 아픔들에 순결하게 귀기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모든 선입견들을 배제한 채 현실을 탐구해나가려 한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현실주의에 동의하지만 그 뜻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여러 가지 시도도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서는 공상과학적인 요소가 등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론이 과학적 방법이라는 틀에 발목을 잡힐 가능성이 많은 반면 창작이라는 것은 상상력 속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탐미주의자가 될 생각인데 내가 쓴 두 권의 장편소설의 제목에 아름다운 이라는 형용사가 들어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즉 인간이 가진,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어떤 생물도 가지지 못한 아름다움에 천착할 것이다. 배가 고프면서 제 이웃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움, 하나밖에 없는 제 생명이 아득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갈 것을 알면서 도청에 뛰어들었던 시민군의 아름다움, 고문을 받으면서 동료의 이름을 불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쓰고 싶다. 우리들의 조상들이 동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수천만년 동안 몸부림쳐 진화한 결실을 새삼 스스로 인식할 때 우리들은 스스로 존엄해지지 않을까.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들을 그러한 역사적 사회적 의미의 복판에 가져다 놓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것이 우리와 함께 나누어야 할 역사적 사회적 의미인가에 대해 계속 고민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가의 몫이며 또 능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작가라는 것, 적어도 전업작가라는 것은 다른 이들이 이상을 포기하고 일상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을 담보로 비일상적 직관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라고 문단에 얼굴을 내민 지 5년 만에 첫 창작집을 내면서,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잠을 설쳤다. 언제나 처음 이라는 것은 늘 신선하고 새롭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대학 4학년 때인가 처음으로 소설이라는 걸 써서 교내문학상에 응모했을 때, 선뜻 뽑아주시며 칭찬을 해주셨던 이선영 교수님께 무엇보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물론 선생님은 다 잊으셨겠지만, 작가로서의 내게 회의가 들때마다 선생님의 칭찬의 말씀이 큰 힘이 되었다. 이 세상에 비바람 치는 곳이 있으니, 작가는 그리로 가라 고 아프게 격려해주셨던 염무웅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막내딸이 소설가라는 걸 언제나 자랑스러워하시는, 그저 내가 옳은 길을 가기만을 바라시는 나의 부모님들게 감사드린다. 부족한 재능으로 이땅에서 글을 써서 먹고 살려는 나의 책무와 기쁨이 부끄러움으로 변하지 않도록 그러므로 나는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1994년 6월 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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