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 亂中日記 (리더십의 원천을 찾아서-上) -김종대-
리더십의 원천을 찾아서
김종대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편집자 주 : 이 글은 충무공 평전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에 수록된 것으로, 이순신 아카데미와 저서를 통해 충무공의 리더십을 전파하고 있는 김종대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님의 동의를 얻어 수록하였음을 밝힙니다.
1. 머리에
가.
이순신 일대기를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기를 수없이 하다 보니 세상에서 흔히 거론되는 선공후사, 솔선수범, 유비무환, 신상필벌, 진인사대천명, 애국, 소통, 창의, 개척 정신, 용기 등의 이순신의 각종 리더십들이 모두 다 부분적으로 타당성 있는 이순신 리더십의 필수 내용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각 내용의 리더십들은 각각 독자적으로 발현했던 것인지, 아니면 어떤 연관성을 갖고 발현되었던 것인지, 연관된 것이라면 그 상호관계는 어떠한지, 이에 관해 나는 지속적인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나의 이순신 공부는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연마하는 과정이었고 연마의 방법은 ‘왜 선공후사 했을까? 왜 솔선수범 했을까?’라는 개개의 리더십 조목에 대한 원인을 찾고, 원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또 그 답에 대한 원인을 찾아 끝까지 의문을 가져가 보는 것이었다.
이 같은 연마의 결과, 지금까지 우리가 찾아낸 이순신의 각종 리더십들은 그 밑바탕에 감추어진 뿌리가 있고 이들은 그 원천(源泉)에 바탕하여 사태의 종류와 변화에 따라 적절히 발현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젠 이를 글로써 나타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짧고 좁은 안목으로 그의 리더십을 표현해 내는 데는 필경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잘 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분히 나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음도 자인한다. 그래도 남 먼저 그 일대기를 수없이 읽고 그에 관한 글과 책 쓰기를 수십 년간 해 온 사람으로서 독자들과 이순신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느껴 그의 리더십들의 뿌리를 캐 보려는 만용을 부리고 말았다.
나.
이순신 리더십의 원천을 파악함에는 다음의 두 측면에서 접근해 봄으로써 그 이해가 용이했다.
첫째, 영웅의 리더십은 그가 한 말, 그가 쓴 글, 그가 한 행동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찾아낼 수 있는 것이지만 특히 그 중에서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중요한 일을 당했을 때 집중적으로 그리고 확연히 드러나게 되므로, 영웅이 겪은 어렵고 중요한 고난의 시기에 포커스를 맞추어 보면 찾고자 하는 리더십의 원천을 한결 명확히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순신의 리더십들도 그가 가장 역경 속에서 치러 기적적 승리를 일군 명량 해전을 전후해 그가 한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을 통해서 그의 리더십의 원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명량 해전 전후사 만큼은 간략히 살펴본 뒤 그 리더십의 뿌리를 찾아가 보겠다.
둘째, 영웅과 대비되는 특정 인사가 있다면 그를 등장시켜 이들을 비교해 봄으로써 찾고자 하는 영웅의 리더십의 원천을 쉽게 파악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이순신의 리더십 원천 탐색도 그를 원균, 진린 등과 대비시켜 보는 방법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같은 시대를 살며 같은 일을 하면서 서로 경쟁하다 사라진 원균만큼 이순신의 리더십을 드러나게 해 주는 동시대의 인물은 드물다. 그러므로 이 글의 배후에는 자연히 패장 원균이 은연 중 대비되고 있다.
다.
흔히들 이순신이 싸울 때마다 승리하게 된 이유를 왜(倭) 수군에 비한 조선 수군의 우월성, 즉 물적으론 거북선, 판옥선 등 전선의 우월성과 탁월한 포격술을, 인적으론 조선 수군의 전통, 용감함과 애국심 등을 꼽는다. 또는 학익진과 같은 그의 전략전술의 탁월함을 꼽기도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전투에서의 승패는 눈에 보이는 조건과 눈에 보이지 않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인데 통상은 외견상 보이는 조건만으로 승리의 원인을 규명해 보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객관적·과학적으로 분석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리해서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객관적 승리 요건을 모두 갖추고도 패했고,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외관상 이길 수 있는 조건은 하나도 없었건만 승리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원균은 이순신이 완벽히 준비해둔 인적·물적 전력을 인수하고서도 왜 완패했으며 이순신은 원균이 패전한 뒤 남은 찌꺼기 병력만 갖고서도 왜 완승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묻고 또 묻는 것이 이순신 리더십의 원천을 찾아가는 핵심적 방법이라고 본다. 이 방법으로 이순신 리더십의 뿌리를 캐다 보면 우리는 자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지휘관 이순신의 내면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답을 찾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2. 명량 해전 전후사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된 지 1년 2개월 만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해 4차례나 경상 바다로 원정을 나가 모두 대첩을 거둔다. 이듬해는 한산도로 이진하며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강화 정국을 맞아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4년 가까운 기간 동안에는 군비를 강화하며 서해로 가려는 왜군의 뱃길을 봉쇄한다.
1597년(선조 30) 2월 26일 안팎의 모함으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고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모함으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왕은 기어이 그를 사형시키려고 한다. 신하들의 간청으로 사형은 면하나 통제사 직책은 사라지고 계급 없는 군인이 되어 백의종군한다. 그의 뒤를 이어 새 통제사가 된 원균은 7월 16일 칠천량 바다에서 이순신이 5~6년간 양성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고 자신도 전사한다. 왕은 할 수 없이 백의종군 중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한다. 부임할 곳이 적에게 이미 빼앗겨 없는 상황, 거느릴 군사도, 써야 할 병기도, 전선도, 대포도 그리고 애써 창제한 거북선마저도 모두 불타 없어진 뒤였다. 그래도 그는 거부하지 않고 재임명 교서를 묵묵히 받는다. 수백 리 길을 돌아다니면서 패잔병을 긁어 모으고 흩어진 무기를 찾아낸다. 적을 피해 도주했던 12척의 전함도 찾아낸다. 그 와중에도 피난민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위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라에서는 수군이 이미 무력해졌다고 판단해 그를 육군에 들어가 싸우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으니 싸워볼 만하다는 사자후로 수군 폐지론을 잠재운다.
명량은 그가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는 막다른 곳. 그는 이곳을 사생결단의 장소로 잡았다. 적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병력으로 싸워 이길 만한 장소는 그곳뿐이기도 했다. 13 대 133의 전투. 12척만으로도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통제사로 복직한 지 겨우 40일 만에 준비 없이 치러야 하는 전투. 긁어모은 패잔병과 승승장구하며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침략군과의 전투. 그리하여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던 전투. 겁이 나서 뒤처지는 장병들을 달래고 꾸짖어 가며 참담한 심정으로 치룬 전투. 그러나 9월 16일 전투가 끝났을 때, 조선 판옥선 13척은 모두 온전했고 적은 반 이상이 깨어지고 도주함으로써 소수패잔병들이 다수의 승승장구하던 적에 완승을 거둔 기적의 전투였다. 이순신 스스로도 하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길 수 없는 전투라 했고, 명나라 장수들도 이 전투의 승리는 기적이라 찬탄했다.
그런데도 왕은, 이순신 수하의 장수들은 이순신의 보고에 따라 모두 승진 포상을 하면서 정작 대장인 이순신은 포상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자신이 포상 받지 못한데 대하여 서운하다는 말 한 마디 남기지 않는다.
결국 이 전투로 조선 수군은 다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왜적은 정유재란에서도 서해를 넘볼 수 없었다.
3. 이순신의 각종 리더십과 그 원천의 탐색
이순신 리더십을 공부하는 것이 어떤 뜻인지를 먼저 말해 두는 것이 순서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순신은 자기 삶의 목표를 이루어낸 성공한 사람이다. 성공했다는 것은 목표를 향해 가면서 실패에 빠질 위기에 봉착했을 때마다 이를 잘 극복해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리더십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 안팎의 온갖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면서 결국에는 목표한 바를 이루어 성공했는지, 그 방법과 까닭을 공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순신의 성공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순신이 아니라도 성공한 사람은 많고, 그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성공법이 있을 수 있듯이 이순신에게도 그만의 성공법이 있다. 이는 이순신처럼 살았기에 성공하는 법이기도 하고, 이순신처럼 살아도 성공하는 법이기도 하다.
이 법은 이순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 속에 박힌 그의 핵심적 가치들을 추출해 그 가치들이 그의 성공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그 회로를 관찰해 봄으로써 분명해질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찾는 공부법이야말로 이순신 리더십의 원천을 탐색하는 핵심작업이다.
가. 애국심으로 충만한 삶
나라 사랑이란 국토와 국민과 사직을 사랑하여 나라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에 앞세우는 마음가짐을 이름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기가 태어나 자라고 죽을 이 나라의 땅을 사랑했고, 함께 살아가는 이 나라 동포를 사랑했다. 이 같은 국토와 국민에 대한 그의 사랑은 생사 간에 일관되었다. 이 지극한 나라 사랑은 그와 국민을 소통시켜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마침내 기적적으로 구국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먼저 그의 국토 사랑에 대해 보겠다.
웅천에 진을 구축한 왜적 진영 가까이 가지 말라는 명나라 도사 담종인의 패문에 대해 “거제, 웅천이 다 우리 국토인데 우리더러 왜의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고 당당히 따진 것을 보거나, 한산도 곳간에 따로 벼 500섬을 준비해 놓고 “왕이 압록강을 넘을 형편이 되면 서해로 올라가 왕과 더불어 죽기로써 싸워 국토를 지켜야 하고, 그럴 수 없을 때에는 군신이 서로 안고 이 땅에서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국토 사랑을 나라 사랑의 출발점으로 보는 그의 자주적 애국심을 쉽게 읽을 수 있다.
또 그는 백성을 사랑했다. 그의 글 속에는 한결같이 전란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의 아픔이 언급되고 있다. 먹을 것이 없어 떠도는 피난민들에게 노획한 쌀, 옷, 베를 나눠 주고 위로하며 혹은 수백 명에게 살 수 있는 장소까지 마련해 주고, 바쁘게 길을 가다가도 피난민 행렬을 마주치면 말에서 내려 일일이 손을 잡아주며, 지혜롭게 잘 숨어서 적에게 잡히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싸움을 할 때에 적선을 남김없이 다 파괴해 전공을 높일 수 있었지만 궁지에 몰린 적들이 혹시 우리 백성들을 해칠까 봐 도망갈 배 몇 척은 남겨두었다는 얘기, 명량 해전 전에 백성들을 먼저 전장에서 피난케 한 얘기 등은 그에게 전쟁의 목적이 백성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일화다. 그의 이 같은 백성 사랑은 가족 사랑, 부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는 누구 못지않게 가족을 사랑했다. 자식들을 사랑했고, 아내를 사랑했으며, 의지할 곳 없는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챙겨주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를 진중에 모셔 놓고 조석으로 문안을 드려가며 효를 다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나아가 부하 장졸들에 대한 사랑도 뜨거웠다. 부산 해전 중 정운 장군을 잃고는 애통해한 데에 머물지 않고 위에 포상 장계를 올리고 사당까지 지어서 나라를 위해 죽은 자에 대한 최상의 예우를 해 주었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항상 군졸들이 세운 공을 빠뜨리지 않고 위에 보고했으며, 혹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다치면 극진히 치료해 주었고, 죽으면 반드시 제사를 올리고 유족들을 위로했고, 유행병으로 죽은 군졸들까지 제사와 뒷일의 처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같은 가족, 부하, 백성에 대한 그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그의 품성에 사랑으로 충만한 어진 심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순신의 가족 사랑은 자연스럽게 부하 사랑, 백성 사랑, 나라 사랑으로 이어지며 상호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순신에게서 나온 각양의 사랑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천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의 사랑에는 하나로 순수해서 계산된 두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주권 사랑에 대하여 본다. 주권에 대한 사랑은 통상 통치자에 대한 충성심으로 나타나는데, 이순신에게 있어 충성의 대상은 통치자인 왕이 아니라 오로지 사직 즉, 국가였다. 그의 삶은 철저히 탈정치·비정치적이었다. 참군인은 정치권을 기웃거려서는 안된다. 군인이 정치에 눈을 뜨면 그가 맡은 국가적 책무가 개인의 정치적 욕구에 따라 왜곡되고 경시됨으로써 본연의 소임을 다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직 나라뿐이었다. 왕이나 대신들이 가진 정치권력은 안중에도 없었다. 물론 그가 바친 충성의 추상적 대상으로 왕이 자주 등장하기는 한다〔무릇 남의 신하 된 자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길이 없다는 등〕.
그러나 그가 위에 바친 충성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기 출세를 위한 사욕에서 충성심을 발휘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왕에게 바친 충성에는 한 점 비굴함도 찾아볼 수 없으며, 또 그가 전념한 것은 왕의 사적(私的) 일이 아니라 오직 바다를 지키는 나라의 공적(公的)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사랑, 충성의 진정한 대상은 통치자라기보다는 국가임을 간파해 내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
이처럼 이순신은 평생을 두고 국민·국토·사직에 지고의 사랑을 바치고, 충성을 다함으로써 마침내 국토와 국민과 나라를 구해 내는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나. 정성 일념의 삶
이순신은 지극히 정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불성무물(不誠無物)’이란 옛말이 있듯이 정성이 없으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없다. 이순신에 있어서도 정성이야말로 그 성공의 요체다. 이순신의 정성스러움은 일이 있기 전에는 철저히 준비하는 것으로, 일이 있을 때에는 목숨을 걸고 그 일에 전심전력하는 것으로, 일이 끝나면 결과야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1) 일이 있기 전에는 철저하게 준비한다〔유비무환〕
‘성즉명(誠則明)’이란 옛말이 있듯이 정성이 지극하면 미래를 볼 수 있다. 이순신은 지극히 정성스러웠기에 나라의 앞날에 환란이 있을 것을 미리 내다보았다. 이순신이 환란을 예측한 것만으로 구국의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예측과 안목을 기초로 위기를 극복해 낼 완벽한 준비까지 마쳐야 위기를 극복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예측만 했지 준비를 못했다면 이는 점쟁이일 뿐 정성스런 지도자가 아니다. 전쟁에서 준비란 상대방의 전력에 대비한 준비를 의미하므로, 유비무환의 정신 속에는 적을 가볍게 보지 않는 정신이 내포되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같이 유비무환 정신으로 무장된 그는 무슨 위기가 발생 때면 항상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는데 이 말에는 적의 전력까지 미리 알고 적을 깰 준비를 다 해 놓고 있다는 뜻을 포함하는 말이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그는 철저하게 전란에 대비했다. 각종 정보를 통해 왜의 사정을 면밀히 파악했고 유성룡이 보낸 《증손전수방략》도 감탄하며 연구했다. 경상도 수사나 병사들이 모두 전쟁 준비를 외면하고 안일한 세월을 보낼 때 오직 그만이 나라의 변란을 예견, 훈련하고 또 준비했다. 준비하지 않은 장수는 위기를 당하면 두려움에 빠져 도주하려고만 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경상좌·우수사, 경상좌병사 모두가 도주한다. 심지어 왕도 도주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난리를 미리 예견하고 준비해 왔기에 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백 리 경상도 바닷길로 원정을 나가 다른 장수가 버리고 간 우리 바다를 되찾는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고 나서도 1년 2개월간 쉼 없이 정성을 다해 준비했다. 그랬기에 전쟁 발발 하루 전에 거북선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첫 옥포전뿐 아니라 다른 어떤 전투에서도 항상 용의주도하게 뱃길, 물길, 적의 주둔 상태와 전력 규모, 지형지세 등을 소상히 조사했고, 그에 따른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4대 승첩이 가능했다. 울돌목을 명량 해전의 장소로 준비한 것이 명량승첩의 큰 이유가 되었으며, 7년간 전대를 풀지 않고 긴장 속에서 온갖 준비를 마쳤기에 왜적과 싸운 전쟁에서 백전백승할 수가 있었다.
유비무환 정신으로 한 이 같은 준비들은 이순신이 평소 자기관리와 공부에 철두철미하여 향후 닥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평소 실력을 쌓아놓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평소 실력을 쌓아갔을까.
이순신은 결혼하기 전에는 물론이고, 결혼 후부터 첫 관직에 나아간 10년 동안 끊임없이 무술을 연마하고 병서를 공부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황금 같은 10년의 청장년 기간에 그는 치열한 정신수양으로 마음공부를 했고, 이를 통해 인격과 창의적 지혜를 갖추었으며, 흔들리지 않는 인생관, 사생관, 국가관을 확립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순신을 본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을 깊은 수행을 쌓은 선비로 묘사하고 있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의심 없이 명백하다고 본다.
이같이 이순신은 수양을 통해 자신을 이기는 큰 힘을 얻었다. 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자신을 이기는 큰 힘을 얻었고 이 큰 힘을 얻기까지 이순신은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2) 일을 당해서는 그 일에 목숨을 걸고 전심전력한다
다음으로 그는 일을 당해서는 항상 지극한 정성으로 오직 그 일에만 몰입했다. 이순신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전심전력한다는 것은 ‘죽음으로써’ 최선을 다함을 뜻한다. 세상에서 목숨을 거는 것보다 더 최선을 기하는 것이 무엇이 있으며, 명(命)을 떼어놓고 나오는 군대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는 항상 최악의 조건에서 출발한다. 임진년의 4차례에 걸친 전투만 보더라도 그는 왜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함대로, 그것도 수백 리 먼 뱃길로 원정 나와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명량 해전에서는 12척 전함과 패잔병을 모아 그 10배가 넘는 적의 정예병과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어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기적을 이룰 수가 있었을까?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자면 일에 임하는 그의 정신자세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임진년 첫 해전 출전에 앞서서는 그는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원컨대 한번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즉시 범의 소굴을 바로 두들겨…” 명량 해전에 앞서서 조선 수군 폐지론이 나올 때에는,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우면 아직도 할 수 있습니다. 전선이야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 하리이다”라 하였다. 명량 해전을 당해서는 다음과 같이 장수들을 독려하였다.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너희 여러 장수들은 오늘 살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이러한 말들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죽음으로써 전심전력하면 반드시 뜻을 이룰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있었다. 또 마지막 노량 해전 몇 시간 전에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라며 저 유명한 최후의 선상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적의 총탄에 맞아 숨이 넘어갈 때도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말라”고 당부한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순신이 만 가지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이 오직 지성으로 매사에 임하고,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죽음에 이르러서도 이 정신자세가 오직 구국에 집중되어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4척이 있으면 24척으로, 12척이 남았을 땐 12척으로, 죽기로서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가운데에서 백전백승의 기적은 이루어졌다.
3) 일이 끝나면 그뿐, 결과야 어찌되어도 괘념하지 않는다
지극히 정성스러운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을 끝내면 지나간 일을 다시 되짚어 앞날의 발전에 참고로 삼을 뿐, 이미 끝나버린 일이 초래할 결과를 두고 염려하지 않는다. 이순신도 오직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털끝만큼의 사심도 없이, 매사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에 일이 끝나고 나서 나타날 결과에 대해서는 그냥 기다릴 뿐 일체 괘념하지 않았고, 남들이 그 결과를 두고 무어라 얘기할 것인지에 대해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 그대로 그는 그 일, 그 일에 최선을 다하기만 한 것이다. 첫 출전에 앞서 임금에게 보낸 글의 말미가 이러하다.
“성공과 실패, 날쌔고 둔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미리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도 그는 “이는 오직 하늘이 도운 것이다”라며 결과에 초연한 자신의 담담한 심경을 일기에 썼을 뿐 상을 내리지 않는 선조에 대해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 전투에서나 적선 몇 척을 쳐부수고 잘 싸우면 조정에서 무슨 훈장이나 상을 내릴 것이며, 잘못 싸우면 무슨 벌을 줄까 하는 등의 이불리(利不利)에 관한 사전 계산을 추호도 한 바가 없다. 공과와 상벌을 미리 계산하는 마음에는 사심(私心)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오직 공심으로 최선을 다한 이상 이로운 결과가 와도 좋고 불리한 모함이 따라도 좋았다. 최선을 다해 싸웠는데도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 또 밝지 못한 군주를 만나 음해를 받으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백의종군인들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죽음인들 받아들이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일념(一念)으로 싸워 나라를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이순신이 만약 이러한 신념없이 공을 탐하고 이에 연연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며, 구국의 목표 또한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최선을 다해 정성 일념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는 결과 따위에는 괘념하지 않아도 좋을 심리적 평화와 희열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 기쁨은 실로 사심없이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만 하늘이 내리는 한없는 위로일 것이다. 이순신에게도 하늘은 한없는 위로를 주었다. 그랬기에 그는 주위의 평판에 흔들림이 없었고, 벼슬이 높아도 넘치는 바가 없었으며, 벼슬을 빼앗겨도 원망과 타락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구국을 목표로 삼아 살아가되 그릇된 길로는 가지 않았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직 바른 방법과 수단으로써만 구국의 목표를 이루어 냈다. 목적이 아무리 좋다 해도 부정한 방법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 진실을 가장해 꾸밈과 꼼수를 쓰지 않았고, 옳고 바른길이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갈 뿐 좌고우면하면서 휜 길을 가지 않았으니, 그가 나아가는 길은 오직 바른 정의의 외길 하나였다. 이순신의 성공이 이 같은 정의에 바탕했기에 그의 성공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정의의 외길을 갔다는 것은 그가 매사를 원칙에 따라 처리했지 이런저런 이유로 예외를 만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사의 눈치를 보아 예외를 만들고,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예외를 인정하고서는 바른길로 갈 수가 없다. 그 당시로는 괴롭고 힘든 길이었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이 그를 무너지지 않는 승리자이자 영원한 승자로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순신을 배우고 본받자는 것도 그가 걸어간 위기극복의 길이 오직 바른길이었고, 바른길을 가고서도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훈련원에서 봉사직에 있을 때 직속상관인 서익의 강압적 인사 요구에 법과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또 발포 만호 시절 직속상관인 수사가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만호영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가려 할 때에도 공물을 사사로이 처분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또한 금오랑이 조대중의 집을 수색했을 때 압수물품 가운데 이순신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혹시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괜한 오해를 사전에 미리 차단하기 위해 금오랑이 편지를 빼내 주려 하자 이순신은 공물을 사적으로 처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금오랑의 호의를 거절한다.
이순신은 원칙주의자였고 오직 바르고 항상 정직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꾸미거나 남의 눈치를 보아 가면을 쓴 일이 없었다. 체면 때문에 없는 것을 과대포장한 일도 없고, 상사나 동료·부하들 어느 누구에게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쉽게 동료와 부하들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으며, 어려운 사정도 잘 정리할수 있었다. 또 꾸며대는 비용을 들이지 않았기에 불리한 싸움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승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순신이 정의와 승리를 어떻게 연관 지어 생각했는지, 또 임진전쟁을 정의와 불의의 관점에서 어떻게 정리했는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수가 국운을 걸고 전투를 치뤄 승패를 결정함에 있어 결정적 작용을 하는 중요한 정신자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첫째, 삼국시대의 김유신과 같이 정의가 불의와 싸우면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우리는 왜국에 아무런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왜국은 자신들의 가당찮은 욕심을 채우려고 이 나라를 짓밟고 수많은 백성을 살해한 천인공노의 죄악을 지었으므로 사악한 쪽은 그들이며 우리는 바르다는 확신을 가졌다. 따라서 이순신 군대는 정의의 군대로서 하늘이 도와줄 것이므로 사악한 왜적과 싸우면 반드시 이기게 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그 신념으로 생사를 초월하는 단결을 이루어 마침내 승리한 것이니, 이순신은 정의의 길이 곧 승리의 길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다. 자력의 삶
이순신은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나더라도 그 문제를 풀 주체는 자신이며, 풀 수단은 자기가 가진 정신적 자주력과 물질적 자립력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위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제힘으로 세상을 살아 쓰이면 죽기로서 충성을 다하고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살면 족하지, 권세 있는 남에게 아첨하고 의지하여 뜬 영화를 구하지는 않겠다”고. 그는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닥쳐온 위기를 극복하려 했고, 설정한 목표를 이루려 했다. 자기에게 부여된 책임을 제힘만으로 완수코자 하는 이 자력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주인 정신이요, 자주정신이며, 자립정신이다. 이순신의 성공이 이같이 그의 자력에 바탕했기에 그의 성공은 자기의 것이었고 남의 것이 되지 않았다.
제힘〔자력〕이란 자신의 실력을 말하며 실력은 신념을 낳는다. 이순신은 허세나 타력이 아닌 오직 자신의 실력만으로 신념에 찬 행동을 했기에 온갖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그 목적한 바를 이룰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공은 그의 것이 되었다. 그는 결코 아첨으로 당파에 기대거나 남의 힘에 의존해 자신의 목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소극적으로 배경〔속칭 ‘백(back)’〕에 의지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배경을 거부하고 살았으니 그의 자력정신은 순일하기 그지없었다.
유성룡이 어느 날 파면되어 쉬고 있던 이순신에게, 이조판서 이율곡이 한번 보자고 하니 만나 보라고 권했다. 이순신은 같은 덕수 문중이라 만나볼 수도 있지만 그가 인사권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또 병조판서가 이순신의 화살통을 탐내어 달라고 하자 서로의 이름을 더럽힐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고, 다른 병조판서는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어 그를 사위로 삼으려 했으나 이 또한 거절했다. 파면에서 벗어나 복직해야 하는 너무도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오직 스스로, 자신의 실력으로, 자기 힘으로만 일어서려 했다.
이순신의 이 같은 주인 정신, 자주·자립정신은 젊은 시절을 지나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전라좌수사가 되어 거북선을 창제하고 전쟁 준비를 할 때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군비를 확장할 때도, 정유재란이 나고 전멸한 조선 수군을 재건할 때에도, 그는 권세 있는 자에 아첨하거나 남〔조정〕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고 제힘으로 그 힘들고 거대한 일들을 일구어낸다.
만약 이순신이 자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아첨으로 남의 힘을 이용해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을 풀어가려 했다면 그는 자신의 성공을 그 남에게 바쳐야 했을 것이니 그다운 값진 성공을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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