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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亂中日記 (人名 解說)

카지모도 2021. 1. 5.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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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해설

 

 

<*편집자 주 : 《난중일기》에 언급된 인물들과 더불어, 충무공 생존 시기의 주요 인물을 선정하여 수록했다.>

 

 

가안책 賈安策 | 무신으로 임진왜란 2차 출진 때 이순신 휘하에서 한후장을 맡아 당포 해전에서 왜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28)에 금갑도 만호가 되었다.

 

권율 權慄 1537~1599 | 명장으로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82년(선조1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전라도사, 예조정랑, 호조정랑을 거쳐 1591년(선조24)에 의주 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로서 일본군과 싸우다 패했으나 그 뒤 남원에서 의용군을 소집해 왜군의 정예 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했다. 이어 수원의 독왕산성과 고양의 행주산성에서 큰 승첩을 거두어 도원수가 되었다. 임진왜란 7년간 군대를 총지휘하며 이순신과 함께 큰 전공을 세웠다. 1604년(선조37) 선무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권준 權俊 1541~1611 | 문신 겸 무신으로 안동 사람이다. 일찍이 문과에 합격해 순천 부사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중위장이 되어 당포, 한산 등 여러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원균, 배설의 뒤를 이어 경상수사를 지냈으며, 후에 선무삼등공신에 책록되고 안창군으로 봉해졌다.

 

김귀영 金貴榮 1519~1593 | 문신으로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본관은 상주(尙州)다. 1547년(명종2)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부제학, 대제학을 거쳐 1581년(선조14) 우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영중추부사로서 임해군을 배종하여 함경도에 피란했다가 왕자와 함께 적군에게 잡혔다. 적장 가토에게 넘겨져 그의 강요로 조정에 강화를 주장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희천으로 유배되어 가던중 죽었다.

 

김득광 金得光 | 무신으로 1592년(선조25) 보성군수로 이순신 휘하에서 전쟁에 참여했고 1601년(선조34) 훈련원첨정, 1606년(선조39) 군기사부정으로 봉직하면서경성 수어 대책을 건의했다.

 

김성일 金誠一 1538~1593 |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1)에 증광문과에 급제했고 장영, 부제학을 역임했다. 1590년(선조23) 통신부사가 되어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김성일은 그때 왜의 무례함을 보면 이를 방치하지 않고 엄히 꾸짖었기 때문에 일본 접반사들은 김성일을 무척 두려워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가 김성일의 정세 보고가 성실치 못한 죄를 국문하려 했으나 좌의정 유성룡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경상우도 초유사가 되고 의병 초모에 진력했다. 이내 순찰사가 되어 국사에 진력하다가 1593년(선조26) 진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문충(文忠), 저서로 《학봉집(鶴峰集)》 등이 있다.

 

김수 金睟 1547~1615 | 문신으로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본관은 안동이다. 1573년(선조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직제학, 승지,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1591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래가 함락되자 거창으로 도망갔다. 뒤에 중추부부사, 우참찬을 거쳐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중추부영사에 이르렀고, 훗날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병사했다.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김완 金浣 1546~1607 | 무신으로 자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이다. 영천에서 태어났다. 1577년(선조10) 무과에 합격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사도첨사로서 옥포·당포싸움에서 우척후장, 한산·부산싸움에서는 척후장으로 활약했다. 1597년(선조30)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조방장으로 싸우다 패전해 왜적에게 붙들리어 일본까지 사로잡혀 갔다. 그러나 적의 소굴을 벗어나 도망해 돌아오자, 순찰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한 것이나, 협박을 당해도 굽히지 않는 굳센 뜻은 다 가상한 일이라” 하고 조정에 장계해 다시 진중에 있게 되었다. 1601년(선조34) 함안군수에 제수되고, 1606년 원종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선조40) 병사했다.

 

김응남 金應南 1546~1598 | 문신으로 자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 본관은 원주(原州)다. 1568년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예문관, 홍문관 정자에 등용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평안도로 피란할 때 그를 호종하여 후에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접무사로 영남에 내려갔다가 풍기에서 병을 얻어 사직했다. 1604년 호성이등공신에 책록되어 원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이순신은 김응남을 현신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나대용 羅大用 1556~1612 | 무신으로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 본관은 금성(錦城)이다. 1583년(선조16)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를 지냈다.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막하에 군관으로 들어가 거북선 건조에 참여하고, 1592년 (선조25) 옥포 해전에서 유군장을 맡아 적을 무찔렀고 사천 해전에선 적탄에 왼쪽다리를 맞았음에도 분전해 크게 이겼다. 1598년(선조31)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힘껏 싸워 적의 포위를 풀었다. 뒤에 경기수사를 지냈다.

 

배응록 裵應祿 |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의 군관이었는데, 첫 출전에서 참퇴장을 맡아 도망가는 왜적 장수의 목을 베는 등 왜적과 싸울 때마다 크게 이겼다.

 

배흥립 裵興立 1546~1608 | 무신으로 자는 백기(伯起), 시호는 효숙(孝肅),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1572년(선조5)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때 조방장으로 참전해 세운 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흥양현감으로 있을 때 전함을 미리 건조하여 전란에 큰 도움이 되었고,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한 원균의 뒤를 맡아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때는 선등(先登)의 공을 세웠으므로 이순신은 특히 그를 공신으로 천거하였다.

 

변존서 卞存緖 | 무신으로 훈련원봉사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순천대장, 좌부기전통장으로 활약해 여러 번 공을 세웠다.

 

서익 徐益 1542~1587 | 문신으로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헌(萬竹軒), 본관은 부여(扶餘)다. 1569년(선조2)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1583년에 군수(郡守)가 되었으며, 이어 종부사첨정으로 순문관이 되어 북방에 파견되었다. 1585년(선조18) 의주 목사 때 탄핵을 받은 이이를 변호하다가 파면되었다.

 

선거이 宣居怡 1550~1598 | 무신으로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1569년 선전관이 되었고, 이듬해 무과에 급제했다. 이순신이 1578년(선조11) 함경도 경흥군 조산보만호로서 녹둔도 둔전관을 겸했을 적에 병사 이일의 군관으로 있었다. 이때 이일이 이순신을 죽이려 하자 그를 붙들고 눈물을 지으며 위로했다. 함경도 북쪽 변방에서부터 이순신과 같이 활약하다가 1583년 39세에 남쪽으로 내려와 거제현령이 되었으며, 다시 성주 목사와 전라수사를 거쳐 임진왜란 첫 무렵에는 전라병사로서 권율과 함께 행주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95년 9월 14일 이순신과 서로 헤어질 당시 충청수사로 있을 때인데, 이순신이 그와 헤어짐을 아쉬워한 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도와 둔전하는 일과 경리 일에 협력했고, 다음 해인 1596년(선조29)에는 황해병사로 있다가 중풍으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송대립 宋大立 1550~1597 | 무신으로 자는 신백(信白),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흥양(興陽)에서 태어났다. 1594년(선조27)에 무과에 합격해 훈련부정이 되었는데, 공적이 있어 곧 훈련정으로 승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립, 희립, 정립 세형제가 같이 의병을 모아 일어섰다. 이순신이 감옥에서 나온 뒤 도원수에게 추천해 창의별장이 되었고 정유재란에서 전공을 세웠다. 흥양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무찔렀으나 복병(伏兵)을 만나 전사했다. 뒤에 병조참의를 추증하고 선무원종에 참록되었다.

 

송성 宋晟 | 무신으로 자는 명수이다. 여산 사람으로 군수 송안형의 아들이다. 1592년에 무과에 급제해 이순신의 군관으로서 전략을 세우는 데 참여했으며, 당포 해전과 부산포 해전에서 적선을 많이 부수었다. 뒤에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송희립 宋希立 1553~? | 무신으로 본관은 여산, 자는 신중(信仲)이다. 증참판 송관의 아들로 1592년에 지도 만호로서 형 대립, 아우 정립과 함께 세 형제가 이순신의 부하가 되었다. 홀어머니가 있었지만 “집안일보다 나랏일을 먼저 돌봐야 한다”며 자식들을 전쟁터에 나서게 했다. 이순신이 처음 출전을 위한 회의를 열었을때 정운과 함께 출전을 강력히 주장한 의인이다. 7년 전쟁을 이순신과 시종 같이 했으며, 마지막 노량 해전에서 도독 진린이 적에게 포위되자 달려가 구하다가 탄환에 맞아 넘어졌다. 배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외치자 다시 일어나 상처를 붙들고 계속 싸웠다. 《호남동순록》에는 이순신이 마지막 적탄에 맞았을 때 “송희립이 북채를 받아 쳤다”고 적혀 있다. 뒤에 전라좌수사가 되었으며, 사후에 승주 충무사에 배향되었다.

 

신각 申恪 ?~1592 | 무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영흥 부사를 거쳐 1587년(선조20) 경상도 방어사로 나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을 수비하기 위해 중위대장이 되었다. 이어 도원수 김명원의 부원수로서 한강싸움에서 패한 후 유도대장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함경남도 병사 이혼(李渾)의 원군을 만나 전열을 수습한뒤, 양주 해유령에서 적병을 대파했다. 이때 한강 패전 후 임진강에 도피해 있던 도원수 김명원이 신각을 명령 불복종 죄로 몰아 무고하게 참형했다. 이날 오후 양주에서 신각의 승첩보가 도착하자 참형을 중지시키기 위해 다시 선전관을 뒤따라 보냈으나, 이미 참형된 뒤였다.

 

신립 申砬 1546~1592 | 무신으로 자는 입지(立之), 본관은 평산이다. 1567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진주 판관을 역임했다. 1583년 온성 부사가 되어 이탕개를 격퇴하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에 임명되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북상해오는 적군을 막다가 대패해 부하 장수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해 자결했다. 신립은 평소부터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평판을 들었고, 미래의 국가 위기에 대처할 경륜과 지혜가 없이 허명만 높았다고 유성룡은 평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신호 申浩 1539~1597 | 무신으로 자는 언원(彦源), 시호는 무장(武壯)이다. 1567년 (명종22) 29세에 무과에 합격한 후 함경도 조산만호, 도총부도사를 지냈다. 1590년부터 다음 해까지 낙안군수를 지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승진되었고, 1595년에는 조방장이 되었다. 1597년 남원이 포위되자 끝까지 남원을 보전하기 위해 병사 이복남 등과 힘을 합해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뒤에 원종일등공신에 책록되고,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심유경 沈惟敬 ?~1597 | 중국 명나라의 신하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자청해서 조선, 일본, 명 3국 사이에 강화회담을 맡아 진행했다. 이때 적장 고니시와 짜고 농간을 부림으로써 1597년 결국 일본군이 재차 침범하는 정유재란을 초래했다. 후에 비리가 폭로되어 엄형에 처할 뻔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에 의해 겨우 구제되었다. 또다시 일본과 평화 교섭을 진행했으나 이것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을 기도했다. 하지만 경상남도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안위 安衛 1563~? | 무신으로 자는 대훈(大勳), 순흥 사람이다. 힘과 용기가 있었고 무예를 겸비하였다. 임진년 무과에 올라 대동찰방이 되고 정유년에 이항복의 추천으로 거제현령이 되어 명량 해전에서 충무공을 따라 싸워 공을 세웠다. 충무공의 장계에 의하여 전라병사로 승진하고 선무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어영담 魚泳潭 1532~1594 | 무신으로 자는 경유(景游),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1564년(명종19) 무과에 합격한 뒤로 영남과 호남의 여러 진을 두루 다녀 물길이 험하고 순탄한 것과 멀고 가까움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1592년 광양 현감으로 이순신의 휘하에 있으면서 5월 4일 처음으로 출전할 때 길을 향도했고 전투 때마다 큰 공을 세웠다. 군량을 준비함에도 깊은 지혜와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종자 곡식과 백성 구급용 곡식을 따로 간직해 두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를 장부에 기록하지 않은 것을 어사 임발영이 잘못 알고 조정에 그의 파면을 청해 백성과 이순신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파직되었다. 후에 이순신이 다시 청해 조방장으로 삼았으나 뜻밖에도 유행병에 걸려 한산도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치적 禹致績 ?~1628 | 무신으로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골 장정 수백 명을 모아 왜적이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와 영등포 만호가 되어 왜적과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난 뒤에는 스스로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고 산수간에서 여생을 마쳤다.

 

원균 元均 1540~1597 | 무신으로 자는 평중(平仲), 본관은 원주(原州)다.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가 되어 오랑캐를 토벌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령부사로 승진했으며, 이어 종성부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박홍(朴泓)이 이끄는 경상좌수영군이 일본군과의 교전도 없이 궤멸되고, 그가 관할하는 경상우수영의 장병들도 대부분 흩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원균은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해 함께 옥포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공으로 조정에서 이순신에게는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그에게는 1품계 아래인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내리면서부터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으며, 1593년 8월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에 이순신이 임명되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1594년 충청병사, 얼마 후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임되었다. 이후 조정에서 그를 수사로 재임명하자는 논의가 있던 중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자 1597년 1월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 적선의 진로를 저지하려고 전 병력을 이끌고 출격했다가 왜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칠천도에서 전멸했다. 이순신, 권율 등과 함께 선무일등공신으로 책록되고 원릉군(原陵君)으로 추봉되었다.

 

유성룡 柳成龍 1542~1607 | 문신으로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운암(雲巖),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임진왜란 중 민정(民政)·군정(軍政)의 최고 관직을 지내면서 전시 조정을 이끌었으며, 전쟁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 왕조를 재정비, 강화하기 위한 응급책으로서 각종시무책(時務策)을 제기했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1591년 권율과 이순신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했다. 또한 제승방략의 분군법(分軍法)을 예전처럼 진관제도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도체찰사의 직책을 맡았다. 1594년 〈청훈련군병계(請訓練軍兵啓)〉, 〈청광취인재계(請廣取人才啓)〉,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 등을 올려 전시 대책과 시무책을 건의했다. 그 뒤에도 4도 도체찰사가 되어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군병을 교련하는 등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교섭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군비보완에 힘썼다. 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한 것이 문제가 되어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듬해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해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당했다. 1600년(선조33)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1604년 호성이등공신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서애집》과 《징비록》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유정 劉綎 ?~1619 | 명나라 신종 때 무신으로 강서성(江西省) 출생, 자는 성오(省吾)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원병 5,000을 이끌고 조선에 와서 싸웠다. 본국으로 돌아간 후 1619년(신종47) 조·명 연합군이 요동 살이호에서 후금 군사와 싸울 때 전사했다.

 

유형 柳珩 1566~1615 | 무신으로 자는 사온(士溫), 호는 석담(石潭),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의 휘하에서 활약했고, 의주 행재소에 가서 선전관이 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해 남해현감이 되었으며, 정유재란 때 이순신 지휘 아래 전공을 세웠고 명나라 제독 진린을 곤경에서 구했다. 마지막 노량 해전에서는 탄환을 여섯 군데나 맞았음에도 활을 놓지 않고 적선에 돌진해 싸우는 등 전공을 세워 부산진첨절제사에 특진되었다. 유형은 특히 이순신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이 지극하여, 충민사 대첩비 건립공사가 지연되자 죽을 때 유언으로 “충무공의 비가 서지 않거든 내 무덤 앞에도 세우지 마라”고까지 했다. 뒤에 경상우수사, 제5대 삼도수군통제사, 충청병사, 함경북도병사, 경상도·평안도·황해도병사가 되었다.

 

윤두수 尹斗壽 1533~1601 | 문신으로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이순신보다 12세 위고, 근수(根壽)의 형이다. 전라·평안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러 당파싸움으로 회령에 귀양 갔다. 임진왜란을 당해 선조가 다시 불러들여 개성에서는 우의정, 평양에 가서는 좌의정이 되었다. 갑오년에 세자 광해군를 따라 남으로 내려와 삼도체찰사를 겸했다. 전쟁이 끝날 때에는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전쟁 중 대신으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이순신과의 관계는 좋지 않아 해로운 존재였다. 그것은 그가 서인의 위치에서 동인인 유성룡과 항상 대립했기 때문이다.

 

윤선각 尹先覺 1543~1611 | 문신으로 자는 수부(粹夫), 호는 은성(恩省)·달천(達川),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568년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1592년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왜병이 침공하자 이를 막아 싸웠으나 패전해 파직당했다. 1594년 충청도순변사로 다시 기용되어 병조참판을 거쳐 1609년(광해군1)에 공조판서를 지냈다.

 

이경록 李慶祿 1543~1599 |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576년(선조9)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었고, 그 뒤 호조좌랑, 하동 현감, 고성 현감 등을 거쳐 경흥부사가 되었다. 이순신과는 무과 동기생이다. 이순신이 녹둔도의 둔전관이던 시절 상사인 경흥 부사로 있었는데,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이순신과 함께 백의종군하게 된다. 1596년 2월 13일 일기에 이순신은 ‘제주 목사에게 청어, 대구 화살대, 건시,삼색 부채 등을 보냈다’고 적고 있는데, 그때의 제주 목사가 바로 이경록이었으니, 두 사람의 우정은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광 李洸 1541~1607 | 문신으로 자는 사무(士武), 호는 우계(雨溪),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567년(명종2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4년(선조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관찰사로 발탁되어 충청 관찰사 윤선각, 경상 관찰사 김수와 함께 왜적에 맞서 싸웠으나 용인싸움에서 참패했다. 그 문책으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했고, 그후에도 패전해 벽동으로 유배되었다가 1594년에 석방되어 고향에 가서 살았다.

 

이기남 | 무신으로 자는 대윤, 도승지 이사관의 아들이다. 광산 사람인데 순천에서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따라가 견내량 해전에서 왜적선 한 척을 깨뜨리고 적의 머리 일곱을 베었으며, 포로들을 도로 찾아온 공로로 훈련첨정에 임명되었다. 도양장에 감농관으로 가서 일을 보았다. 뒤에 선무원종에 참록되었다.

 

이몽구 李夢龜 1554~? | 무신으로 호는 석계이며,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능주에서 이시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순신이 부임할 당시부터 좌수영 본영의 우후(수사를 보좌하는 정4품의 외관직 무관, 요즘의 참모장에 가깝다. 수사 유고 시에는 군사 전반을 우후가 다루었다)로 있으면서 이순신을 도와 5년간 전쟁을 치렀다. 처음 출동 때는 유진장이었으며, 2차 출동때인 5월 29일에는 좌별도장으로서 왜적선 12척을 무찔렀고, 6월 2일에는 당항포에 이르러 금단선 1자루를 찾아 빼앗았는데, 그것은 도요토미가 왜장수 카메이 코레노리에게 준 부신물(符信物)이었다. 정유재란으로 원균이 패망할 때 군기를 옮겨 싣지 않은 잘못을 물어 이순신이 곤장 80대를 때리자 이함의 참소로 도피했다. 1605년(선조38) 선무원종삼등공신, 정3품 절충장군에 책록되었다.

 

이봉수 | 무신으로 자는 덕로, 호는 석계. 경주 사람으로 호조참판 이동명의 아들이다. 이순신의 휘하에서 중요한 나루터에 철쇄를 비치하고, 높은 봉우리에 망대를 설치했으며, 염초를 만들어 군용으로 공급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당포, 석포, 사량포 등지의 싸움에서 연달아 왜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나중에 판관에 임명되었으며, 뒤에 선무원종에 참록되었다. 1635년(인조13)에 형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분 李芬 1566~1619 | 문신으로 자는 형보(馨甫), 호는 묵헌(默軒)이며, 이순신의 맏형 희신의 셋째 아들이다. 전쟁이 나자 성천으로 피난하여 그곳 부사였던 정구(鄭逑)에게 글을 배웠고, 정유년에 충무공에게 와서 군중 문서를 맡아보며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외교 방면의 일을 보았다. 위인이 총명하고 교제에 능하여 조·명 장병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문과(文科)를 치러 벼슬은 형조정랑에 이르렀고,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던 일도 있었다. 이순신의 행록을 글로 남겼다.

 

이설 李渫 1554~1598 |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증호조참판 이언간의 아들이다. 양성 사람으로 1579년(선조12) 무과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 나대용과 함께 거북선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좌별장으로 부산 해전에서 큰 공로를 세웠고,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사했다. 뒤에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책록되고, 통제사에 추증되었다.

 

이수광 李晬光 1563~1628 | 실학사상가로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본관은 전주다. 1585년 별시문과의 병과로 급제한 이후 조선왕조에서 가장 다사다난했던 선조와 광해군, 인조의 3대에 걸쳐 44년 동안 대사성, 대사헌, 도승지, 이조판서, 공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일종의 백과전서로 유명한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썼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지봉유설》 제1천문부에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은 우연히 그 사람이 벼락에 맞았을 뿐이지 벼락이 뜻이 있어 그 사람을 때린 것이 아니다”라는 실학적 견해를 표명해 쓴 점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으나 황간에서 패한 뒤 의주로 가 왕을 호종하였고,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을 깊이 흠모하였다.

 

이순신 李純信 1554~1611 | 무신으로 자는 입부(立夫), 시호는 무의(武毅)이며, 전주 사람이다. 종실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1578년(선조11)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온성 판관, 의주 판관등을 거쳐 혜산진 첨절제사가 되어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냈다. 뒤에 방답첨사로 기용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중위장·전부장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 당포, 한산도, 부산포 해전 등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이순신의 막하에서 중위장으로 노량 해전에 참가해 이순신이 전사하자 대신 전군을 지휘했다. 선무삼등공신에 녹훈된 뒤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인조 때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억기 李億祺 1561~1597 | 무신으로 자는 경수(景受), 본관은 전주,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에 올랐다. 경흥 부사로서 함경도에 가서 1581년 오랑캐 울지내, 니응개를 막았고, 1586년(선조19) 울마치를 베고 선정을 베풀었다. 뒤에 순천 부사를 거쳐 전라우수사가 되었으며, 1592년에 이순신과 연합해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이 통제사가 된 후에는 그의 휘하에서 가장 신임받는 장군으로 활약했다. 그 후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자 이항복, 김명원 등과 함께 그의 무죄를 주장해 구명에 앞장섰다.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뒤에 선무이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완흥군에 봉해졌다.

 

이언량 李彦良 ?~1598 | 무신으로 자는 충민(忠敏), 본관은 개령(開寧)이다. 증병조판서 개령군 이익수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21)에 무과에 합격해 훈련원첨정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나대용과 더불어 이순신을 도와 거북선을 만들었고, 거북선 돌격장으로 맹활약했다. 옥포, 당포, 견내량, 부산포, 당항포싸움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 앞장서서 적선을 헤아릴 수 없이 쳐부수었다. 그 공으로 훈련원수부, 초계 군수, 부호군으로 승진했다. 1598년 노량 해전에서 명나라 도독 진린의 배가 적선에 포위되자 돌입해 구해 내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뒤에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참록되었다.

 

이영남 李英男 ?~1598 | 무신으로 1588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1590년 율포 만호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원균이 도망하려는 것을 보고 옥포 만호 이운룡과 함께 이를 꾸짖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는 일을 했다. 그 뒤로 모든 장수가 합력해 적을 무찌르는 속에 그는 항상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정유재란 때 가리포 첨사로 조방장을 겸임했고, 명량 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1598년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뒤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이완 李莞 1579~1627 | 무신으로 자는 열보(悅甫)이며, 이순신의 맏형 희신의 넷째 아들이다. 시호는 강민(剛愍)이다. 1599년(선조32) 무과에 급제해 의주 부윤을 지냈으며, 1598년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종형인 회와 함께 유명을 받들어 발상하지 않고 진중을 지휘하고 싸움을 독려해 대첩을 거두었다. 1623년(인조1) 46세에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을 토벌한 공로로 가선대부에 승진되었다. 정묘호란 때 싸움에 패해 무기고에 불을 지른 후 불 속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운룡 李雲龍 1562~1610 | 무신으로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1585년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옥포 만호로서 원균의 휘하에 있었는데, 원균이 전선을 버리고 도망가려 하자 항의하며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자고 주장했다. 옥포 해전 이래 남다른 공로를 세워 원균의 부하로는 드물게 이영남과 함께 이순신의 신임을 받고 동지가 되었다. 1593년에는 용천 현감이 되었고, 당항포싸움에서는 우척후장으로 활약했다. 1594년에는 웅천현감, 1596년에는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가 되었고, 1597년에는 육군으로 전출되어 영천의 창암 등지에서 접전했다. 1598년에는 도요토미가 죽은 것을 알고 도망가는 적을 막으려고 후퇴하다가 도리어 모함을 입었는데 체찰사 이덕형의 변호로 무사했다. 이순신도 이운룡을 깊이 신임했으며, 더욱이 이덕형은 그를 휘하에 두고 일을 시켜본 연후에 ‘남도의 주인공’이라고 칭찬했다. 그 뒤에 다시 수사로 복직되었는데, 어머니의 급한 병을 듣고 자리를 비운 것이 문제가 되어 당시의 통제사 유형에게 문책을 당한 일이 있었다. 식성군에 겸해 도총부 부총관, 포도대장, 화기제조도감, 비변사 당상관이 되었다. 또 함경병사가 되어 북쪽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고, 1605년(선조38)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이순신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모함을 입어 충청수사로 좌천되었다가, 1610년(광해군2)에 집으로 돌아와 종기로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선무삼등공신에 책록되고 뒤에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이원익 李元翼 1547~1634 | 문신으로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9년 23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조판서로서 순찰사의 일을 겸해 보았다. 1593년에 이여송이 평양을 칠 때 같이 참여했고, 전후 계속해 전쟁의 수고가 크다 해 숭정(崇政)을 주었다. 1595년에는 우의정이 되었고 영남에 본부를 둔 사도체찰사를 겸했다. 이순신과는 나이도 비슷하고 서로가 그 인격을 존중했으며, 이순신이 옥에 갇힐 때는 장계를 올려 그의 무고함을 역설했다. 이순신은 출옥해 원수부로 갈 때인 1597년 5월 20일 일기에 ‘체찰사 이원익이 내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군관을 보내더니 조금 있다가 또 군관을 보내어 조문하고 저녁에 만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내가 어두울 무렵 찾아가 뵈오니 체찰사도 소복을 입고 접대한다’라고 썼다. 전쟁이 끝난 뒤 좌의정, 광해군 때는 영의정이 되었고, 광해군에 의해 귀양 갔다가 인조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했다.

 

이응화 李應華 | 무신으로 전에는 첨사였다가 임진왜란 당시 방답진에 귀양 살고 있었는데, 이순신이 참퇴장으로 발탁함으로써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일 李鎰 1538~1601 | 무신으로 자는 중경(重卿),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1558년(명종13) 무과에 급제해 전라도 수군절도사와 함경도 경원 부사를 지냈으며, 1586년 회령부사로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 순변사로 상주, 충주전투에서 패전했다. 임진강·대동강 방어전에 참전했고 1593년 평양 수복전에도 참전했으나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한양 수복 후 훈련도감 좌지사, 충청·전라·경상 삼도도순변사를 지냈다. 1600년 함경남도 병사가 되었으나 죄를 짓고 소환도중 정평에서 병사했다. 이일과 이순신은 끝까지 별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난중일기》1595년 1월 21일자에 ‘순변사 이일의 처사가 극히 형편없고 나를 해치려고 무척 애쓴다고 하니 우습고도 우습다’고 적고 있다.

 

정걸 丁傑 1514~1597 | 무신으로 증참판 정승조의 아들이다. 자는 영중(英中), 호는 송정(松亭),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판옥선과 화전, 철익전, 태총통 등 여러가지 군기를 만든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다. 1544년(중종39) 무과에 합격했으며, 1557년(명종12)에 형 준과 함께 이준경의 휘하에 들어가 달량싸움에서 왜선을 쳐부수었다. 1587년에 부안 현감으로 있었는데, 때마침 함경도 은성에서 오랑캐가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은성 부사로 임명하고 방어하게 해 큰 공로를 세웠다. 1592년 이순신의 휘하에 조방장으로 있을 때 부산에 있는 적의 소굴을 없애버리자고 건의해 같이 나가 공로를 세웠고 이로 인해 충청수사가 되었다. 그 당시 권율이 행주에서 싸우다가 화살이 다 되어 큰 곤경에 빠지자 화살을 한 배 가득 싣고 가서 그것으로 승첩을 얻게 되었다. 여러 가지 무기를 고안해 내어 적을 미혹케 했기 때문에 왜적들이 늘 그의 이름을 무서워했다. 뒷날 선무원종공신에 참록되었다.

 

정경달 丁景達 1542~1602 | 문신으로 자는 이회(而晦), 호는 반곡(盤谷), 본관은 영광이다. 1570년(선조3)에 문과에 합격했다. 1592년에는 선산 부사로서 군병을 모으고 군량을 거두어 경상 감사 김성일과 병사 조대곤 등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선산 금오산 아래서 왜적과 싸워 큰 승첩을 거두었다. 이때 도체찰사 유성룡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그를 표창하게 했다. 김성일의 제청으로 의병도 대장이 되고, 강덕룡·정기룡·이해 등 여러 의병과 함께 죽령 아래 진을 치고 왜적과 싸워 여러번 이겼다. 그러나 모략을 입어 잠깐 장흥 고을에서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3년째 되던 1594년 이순신의 특청으로 통제사 종사관 겸 삼남독발사가 되어 도원수 등에게 연락하는 일, 관하 여러 고을로 순행해 군병 독려, 군량 조달하는 일, 둔전과 목장을 보살피는 일 등에 진력했다. 1597년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도체찰사 이원익과 유성룡, 이항복, 선조에게까지 이순신의 인격이 고상하고 백성이 모두 그를 의지하는 실상을 들어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전쟁이 끝난 뒤 선무원종공신으로 참록되었다.

 

정언신 鄭彦信 1527~1591 | 문신으로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본관은 동래(東萊)다. 1566년(명종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1579년에는 우부승지에서 함경도 절제사가 되었다. 1583년 이탕개가 쳐들어오자 함경도 순찰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이순신, 신립, 김시민, 이억기 등 쟁쟁한 무관들을 막하로 거느려 적을 격퇴했다. 1584년에 우의정이 되었으나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로, 다시 갑산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죽었다.

 

정운 鄭運 1543~1592 | 무신으로 자는 창진(昌辰),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훈련참군 정응정의 아들이다. 1570년 무과에 합격해 훈련원봉사, 웅천 현감, 해주 판관 등을 지냈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미움을 받아 수차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 만호로서 직속상관인 이순신에게 달려가 나가 싸울 것을 극력으로 주장했다. 옥포, 당포, 한산 해전 등에서 늘 선봉에 서서 큰 공로를 세웠으며 부산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순국했다. 그가 죽자 적들이 “정 장군이 죽었으니 이제 쉽다”고까지 한 것을 보면 적들이 그를 무척 무서워 했었음을 알 수 있다. 뒤에 병마절도사에 추증되고 다시 병조참판에 가증되었다.

 

정탁 鄭琢 1526~1605 | 문신으로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13)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참판, 우찬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고, 1594년에 우의정, 1600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호성이등공신에 책록되고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박학다식해 경사 외에 천문, 지리, 상수, 병법까지 정통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 명장들의 뒷받침이 되어 그들 모두 큰 공을 세우게 했다. 특히 이순신이 무함을 당해 하옥되었을 때는 극력으로 신구해 죽음을 면하게 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조헌 趙憲 1544~1592 | 문신, 학자, 의병장이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고, 본관은 백천(白川)이다. 1567년(명종22)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1575년(선조8) 호조·예조좌랑, 경기도 통진 현감, 전라도 도사를 거쳐 1582년(선조15) 보은 현감을 지냈다. 호를 후율이라 할 만큼 율곡을 경모했다. 1589년 동인의 전횡을 규탄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길주로 유배되었고,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서 일본 사신 겐소 등을 목 벨 것을 상소했다.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했으나, 청주성 수복 후 금산성 공격전에서 중과부적으로 함께 싸운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진무성 陳武晟 1566~? | 자는 사규(士赳),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여주 사람으로 증참판 진인해의 아들이다. 27세에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군관으로 있으면서 당포 해전 때부터 공로를 세우기 시작해 용맹을 드날렸다. 특히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되기 직전 진주가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적의 동태를 탐지하여 적을 패퇴시키는 데 크게 공을 세웠다. 이순신이 옥에 갇힌 동안에는 원균 휘하에서 지내다가 한산진이 무너질 때에 홀로 화공으로써 적선에 맞섰으나 대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34세에 무과에 합격했으며, 유원첨사에 임명되었다가 경흥 부사, 통제영우후, 구성 부사를지냈다. 1647년에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참록되었으며, 호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최대성 1553~1598 | 무신으로, 자는 대양(大洋)이며, 1592년에 이순신의 군관으로서 첫 출동 때 한후장으로 활약해 적선을 사로잡았다. 1597년에는 송대립 등과 함께 예교전투에서 이겼으며, 보성 안치 아래에서 왜적과 싸울 때 100여 명을 무찌르고 기진맥진한 끝에 적탄에 맞아 두 아들 언립, 후립과 같이 전사했다. 뒷날 영조 때에 이르러 정려를 세우고 참의에 추증되었다.

 

황석공 黃石公 | 중국 진나라 말의 은사(隱士), 병법가(兵法家)이다. 장량에게 병서를 전해준 노인으로, 장량은 이 병서를 읽고 한나라 고조의 천하 통일을 도왔다. 황윤길 黃允吉 1536~? | 문신으로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1561년(명종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585년 황주 목사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도요토미를 접견하고 이듬해에 귀국해, 장차 일본이 내침할 것이므로 대비해야 한다고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