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1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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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방이 봉단의 옆으로 와서 너무 가까이 붙어 앉으려고 하니 봉단이는 말이
없이 몸을 움직이어 조금 사이를 비키었다. 김서방이 면구스러울 만큼 봉단의
얼굴을 들여보다가 “하룻밤 새 환형이 되었구려. 이리 좀 누우.” 하며 자기의
무릎 아래를 가리키니 봉단은 잠깐 머리를 흔들어 싫다는 뜻을 보이고 입을 열
어 나직한 목소리로 “장독이나 없으세요?” 물으며 양미간을 곱게 주름잡는다.
김서방은 장독이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여보, 내가 말씨를 조
심 아니해서 그런 봉변을 한 것이 아니오. 동고리만 받고 다른 말이 없이 가라
기에 그대로 오려다가 남이 주는 쌀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장모에게 구박받을
것이 생각나서 쌀 말을 하였었소. 말을 하나마도 쌀을 주지 않느냐고 넌지시 하
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것이 죄목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분분이 발명하며 봉단을 돌아보니 봉단이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윗니로 아랫
입술을 지그시 물고 있는데, 눈물 방울이 옷깃에 떨어진다. 김서방이 얼마 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내가 당하는 것은 나의 팔자니까 하릴이 없지마는 이래저
래 어린 안해의 맘을 상하게 하니 사내 쳇것으로 염의가 없어.”혼잣말하듯이
말을 하며 봉단의 턱 고인 손을 만지려고 하니 봉단이는 살그머니 손을 옆으로
치우면서 김서방을 돌아보고 “어디로 갈 생각은 마세요.” 당부하는데 말보다
도 그 눈이 더 은근히 당부한다.
이때 밖에서 큰기침 소리가 나더니 주팔이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해가 점
심때가 기울었다. 집에 가봐라. 그리고 굶는 것이 장사가 아니니 밥을 먹도록 해
라.”말하니 봉단이는 “녜.” 대답하고 슬며시 김서방을 돌아보며 “가겠어요.
”하고 일어섰다. 김서방이 봉단의 뒤를 따라나섰다. 봉단이가 “고만 들어가세
요.”말하면 “들어가지.” 대답하면서도 차츰차츰 따라왔다. 아랫말서 거의 중
간이나 넘어왔을 때 봉단의 어머니가 멀리서 휘적거리며 내려오는 것이 봉단의
눈에 뜨이었다. 봉단이가 “저기 오는 이가 어머니 아니라고?” 하며 손가락으
로 가리키니 김서방이 “그렇구면. 잠깐 어디로 비켰다가 지나가신 뒤에 갑시다
그려.” 하여 내외 두 사람이 사잇길로 빠져서 시냇가로 나왔다.
버들잎은 이미 떨어졌고 시냇물은 보기에도 차도록 맑아졌다. 가을 여편네의
집안일이 바쁜 까닭인지 빨래꾼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 내외가 맘놓고
어깨를 겯고 시냇가로 올라오다가 처음 대면하던 빨래터에 와서 김서방이 봉단의
손목을 쥐며 “여기가 우리에게 연분이 깊은 곳이라 잠깐이라도 앉았다 갑시다
그려.” 말한즉 봉단이도 싫다고 아니하여 언덕 위 풀밭의 양지바른 곳을 골라
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첫째로 김서방의 눈이 가는 곳은 봉단이가 잎사귀
를 따던 버들가지다. 가지는 전과 같이 늘어졌으나, 성하던 잎사귀는 지금 다 떨
어지고 다만 누른 잎새 하나가 매달려서 가는바람에도 지금 곧 떨어질 것같이
한들한들한다.
김서방은 손으로 그 잎새를 가리키고 봉단을 돌아보며 “전날 그 잎새는 당신
의 근본을 드러낸 것이 아닐지라도 오늘날 저 잎새는 나의 신세를 그려낸 것이
다. 당신은 부모가 있고 친척이 있고 또 나중에...”하고 말을 그쳤다가 다시 이
어서 “당신에게는 나 하나 있고 없는 것이 대사가 아니지만, 나는 그렇지 아니
하여 당신에게서 떨어지면 다시 붙을 곳이 없는 사람이오.” 신세를 한탄하니
봉단이가 성낸 눈초리로 김서방을 흘겨보며 “당신이 말이요, 무어요? 당신이
그런 말을 진정으로 한다면 나는 당신을 잘못 믿었소.” 하고 입술을 악물었다
가 다시 김서방의 얼굴을 치어다보며 “당신이 나를 못 믿으시는 게지? 사람의
맘을 몰라주어도 분수가 있습네다.” 하고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울음을 내놓
았다. 김서방이 처음에는 어찌할 줄 몰라서 어리둥절하다가 나중에는 울지 말라
고 봉단의 어깨도 흔들고 봉단의 얼굴을 치어들고 옷소매로 눈물도 씻겨 주었
다.“내가 말을 잘못했어. 울지 말고 내 이야기나 좀 들어주어.” 하여 봉단의
울음을 그쳐놓고 김서방은 자기의 근본과 신세와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데 자기
가 김서방이 아니요, 이교리인 것은 물론 말하고 자기가 다른 안해가 없는 것도
빼지 않고 말하였다. 김서방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는 봉단이는 “좋은 세상이
되면 다시 나가실 수 있겠지요?” 물어서 “암, 그렇지.” 하는 김서방의 대답을
듣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김서방에게 향하여 시름없이 묻는다.“대
체 양반도 없고 백정도 없는 세상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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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동안 김서방이 말이 없이 앉았다가 두 다리를 뻗고 두 팔을 벌리고 기지
개를 켜더니 한 팔을 봉단의 무릎에 감고 비슷이 누웠다. 봉단이가 손으로 김서
방의 머리를 긁어주며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팔이 감긴 무릎을 가
만히 흔들면서 “여보세요, 좀 일어나 앉으세요. 인제는 내 이야기를 들어 주세
요.” 정이 듣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니 김서방은 “무슨 이야기?” 하며 벌떡
일어 앉았다.
봉단이는 무릎을 도사리고 얼굴빛을 고치고 나서 “당신이 녹록한 사나이가
아닌 것은 미리부터 짐작한 바이지마는 삼한갑족의 양반인 것만은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줄을 미리 알았더면 뒷일을 한번 더 생각하였을 것인데, 그리 못
한 것이 당신에게 속은 셈입니다. 당신은 잠시 액화를 면하시려고 만리 전정을
생각지 않으실 리가 없으셨겠지요? 좋은 세상이 되는 날에는 백정의 사위가 우
세거리요, 망신거리지요? 그때 나를 어찌하실 생각이세요?” 봉단이가 한 마디
묻고 김서방의 눈치를 엿보고 두 마디 묻고 김서방의 얼굴을 살핀다.
김서방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나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나 들려준다구.”
하고 힘없이 팔을 들어 봉단의 어깨에 깊이 걸치며 “남편에게 좋은 세상이면
안해에게도 좋을 것이고 안해에게 좋지 못한 세상이면 남편에게도 좋지 못할 터
이지.” 하며 걸친 팔의 손가락 등으로 봉단의 볼을 간지르듯 문지르니 봉단이
는 가만히 그 팔을 잡아 어깨에 내려놓으며 “서울 양반에게 좋은 세상이 시골
백정의 딸에 좋을지는 누가 알아요? 도리어 좋지 못할는지도 모르지요.” 하고
긴 한숨을 짓는다.
김서방이 정색하며 “여보!” 불러놓고 잠깐 동안 말이 없다가 맘에서 우러나
오는 듯한 말로 “장래의 좋은 세상이 올는지 말는지 지금으로는 모르는 일이거
니와 설혹 온다손 잡더라도 그대를 버리고 나 혼자 누릴 생각은 없소. 저기 하
늘이 내려다보시오.” 하며 손을 위로 치어들어 하늘을 가리키니 봉단이는 김서
방의 얼굴을 이윽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하늘보다도 당신을 믿습니다.” 말
하는데 새침하던 얼굴에 웃음이 떠돌았다. 김서방이 다시 정색하며 아까와 같이
“여보!” 불러놓고 한참 동안 말이 없으니 봉단이는 김서방이 무슨 말을 하려
나 의심스럽게 생각하며 그 입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김서방이 한번 점
잖게 기침하고 나서 입을 열어 말한다. “장모가 당신을 낳지는 못하였을 것이
고 토하여 놓은 모양이야. 그러한즉 장모는 토끼로다.” 하고 껄껄 웃으니 봉단
이는 말을 기다리던 보람이 없어졌다. “실없으시기도 하시오.” “내가 다른 사
람에게 실없는 소리 하는 것을 언제 들어보았나?” “내게 실없으신 건 체모 손
실 아닌가요?” “어린 아해에겐 실없은 소리 좀 해도 괜찮은 법이야.” 김서방
은 너털웃음을 웃고 봉단이는 상글상글 웃었다. 내외가 해 가는줄도 모르고 웃
고 지껄일 때, 앉은 뒤에서 사람의 발짝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놀라서 일시에
뒤를 돌아보니 주팔이가 온다. 봉단이가 일어서며 김서방도 따라 일어섰다.
“이것이 무슨 잣들이야!” 주팔이가 말하며 내외 앞에 와서 “한참 찾았다.
에, 이 사람.”하고 김서방을 보거 웃더니 봉단이를 바라보며 “너의 어머니가 너
를 찾아오셨기에 와서 다녀갔다고 말했더니 집에도 오지 않았고 길에서도 만나
지 못하였다고 하시고 돌이의 잡에까지 가셨었다. 나는 거기 아니 갔을 것을 짐
작하지마는 아는 체하기가 어려워서 아무 말씀을 아니했었다. 거기 가서 허행하
시고 오시는 길에 다시 내게 들르셔서 한걱정을 하시기에 내가 너를 찾아 보낼
것이니 염려 마시라고 말씀하여 어머니를 집으로 가시게 하고 이리저리 찾아나
선 길이다. 얼른 집으로 가거라. 너무 늦었다. 그리하고 나로서 너에게 어머니를
속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만 김서방 만났단 말은 어머니께 하지 마라. 어머니가
더 역정이나 내시면 너만 더 괴로울 것이다. 머리가 아파서 잠깐 냇가에 와서
바람쏘였다 하려무나. 어서 가거라. 내일 아침때 내가 올라가마.” 주팔이가 봉
단이를 좇아보내다시피 돌려보낸 뒤에 김서방의 어깨를 치고 “치골 노릇 작작
하고 다니소.” 웃으면서 김서방과 함께 아랫말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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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때가 지난 뒤다. 김서방이 시름없이 앉았는 것을 주팔이가 딱하게
여기어서 “쓸데없이 걱정하고 앉았느니 나와 같이 마을 가세.”하여 김서방을
끌고 나서려고 하니 김서방은 “뉘 집에를 가?” 하고 갈 생각이 적은 모양을
보이었다. “돌이 아버지의 고담이라도 들으러 가지.”, “내가 여기 와서 있는
것을 돌이네 집에서 알면 장모도 알게 될걸.” “속이려 한들 길래야 속일 수가
있나? 그러고 내일 아침에는 내가 형님과 형수를 가서 보고 말하려는 작정인즉
지금 돌이 집에서 안대야 밤중에 고자질하러 갈 사람은 없을 게니 염려 마소.”
김서방은 마침내 주팔에게 끌리어 돌이 집에 놀러왔다.
돌이는 일지의 집으로 놀러가고 돌이 아버지가 혼자 방에 누웠다가 두 사람을
보고 반색하며 앉아라, 저리 앉아라, 홀아비 늙은이가 긴긴 밤에 심심하여 죽겠
는데 잘들 왔다, 반갑다, 고맙다, 한바탕 호들갑을 떨고 나서 김서방을 바라보고
“아까 누이가 잠깐 왔었는데 무어 쫓느니 쫓았느니 하기에 말이 되느냐고 조만
히 타일러 보냈지만, 워낙 길들지 아니한 생마(生馬)같아 콧등이 여간 세어야지.
” 하고 주풀이를 돌아보며 “자네 말은 어렵게 여기는 터이니까 자네가 말 좀
하게.” 하고 다시 김서방을 바라보며 “콧등이 센 깐으론 뒤는 싹싹한 사람이
지. 저 사람이 말이나 하면 무어 일없이 되지그려” 하고 허허허 웃음을 내놓았
다.
얼마 뒤에 주팔이가 이야기나 한자루 하라고 늙은이에게 청한즉 “이야기를
하라, 무슨 이야기를 하나? 우리 조상 이야기나 김서방에게 들려 줄까? 주팔이
자네는 귀에 젖도록 들은 이야기라 재미가 없을걸.” 하고 늙은이는 또 허허 웃
었다. 주팔이도 웃으면서 ‘나 아니 들은 이야기가 무어 있겠소. 아무 이야기나
하시오. 보물이나 또 한번 구경합시다그려.“하니 늙은이는 “자네가 이야기에
쐐기나 치지 말게.”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본래 강원도 통천(通川)사람으로 우리 증조할아버지 때에 북도 경성
(鏡城)으로 이사 가서 가근방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몇대를 살아오다가 우리 아
버지가 함흥으로 이사를 왔어. 함흥 올때 나는 나이 열살 안이었고 봉단 어머니
는 낳기 전이니까 한 오십 년 가량이나 되었지. 그까짓 햇수는 따질 것이 없고
경성으로 이사 간 할아버지의 아버지 되는 고조 할아버지 때 이야기가 정작 이
야기야. 우리 고조할아버지는 터지게 잘났던 것이야. 말 잘 타고 활 잘 쏘고 한
끼에 대되 밥을 먹지 않으면 출출하다고 했다니까 기운도 장사던 것이야. 이 할
아버지가 통천서 살 때 최장군이란 이하고 이웃해서 살았는데 젊었을 때부터 정
분이 여타 자별하게 지냈던 것이야. 최장군이 유명한 장군이 되어서 경상도 합포(合浦)로 벼슬살이를 가게 된 때 그 부인이 태중이라 따라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는데, 부인은 그 뒤에 사내아기를 낳고 곧 산후더침으로 작고를 했었어.
최장군이 이 소식을 듣고 그 아기를 길러 달라고 우리 할아버지에게
부탁하니까 평일 정분에 싫달 길이 없어서 그 때 돌이 갓 지난 우리 증조
할아버지의 젖을 노나 멱여 가며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길러냈는데
이 아들이 그 아버지보다도 더 유명한 최장군이 된 사람이야. 이 아들
최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고 활을 잘 쏘고 해서 우리 할아버지와 같이 사
냥을 다니는데 토끼 노루 할 것 없이 닥치면 놓치지 않더라지. 그중에 놀라운
일은 열서너 살 되었을 때 하루 혼자 활을 메고 나가더니 얼마 뒤에 돌아와서
무슨 검은 줄이 있는 누런 짐승 하나를 잡아놓았다고 해서 여러 사람이 무엇을
잡아놓았나 하고 따라가서 본즉, 큰 송아지만한 호랑이 한 마리를 한 살에 쏘
아넘겼더라지. 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두 놀랐더래. 그게 누구든지 놀랄 일이 아
니야? 최장군이 아이 적에 쓰던 활이 지금도 우리의 집에 있지. 우리 집의 보물이
야.” 하고 늙은이는 일어서서 시렁 위에 얹은 궤 하나를 들어 내려서 뚜껑을
고이 열고 종이로 싼 활을 모시듯 들어내서 싼 종이를 펴고 김서방을 보이면서
“이것이 우리 집의 보물이야.” 말하였다.
이때껏 ‘그러세요, 그러세요’ 하며 이야기만을 듣고 있던 김서방이 “그 최
장군이 최윤덕(崔潤德) 최정승이구려.” 말한즉 늙은이가 최장군의 이름을 어찌
다 아느냐고 놀라며 서울 사람이란 다르다고 칭찬하고서 “그래 우리 할아버지
가 불원천리하고 그 아버지 최장군에게로 데려다 주었었는데, 뒷날 아들 최장군
은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서 대공을 세운 일까지 있었다데. 이 최장
군이 병마절도사로 경성 와서 있을 때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경성으로 이사를 갔
던 것이야.”
이때 방문이 열리며 돌이가 들여다보고 “손님도 오고 조상남도 나오셨군.”
하더니 방으로 들어와서 “조상님은 뫼셔놓고 손님하고 엿이나 잡수시오.” 하며
얻어가지고 온 엿봉지를 풀어놓았다. 이리하여 늙은이의 이야기는 중간에 그치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