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3권 (1)
제 1장 국상
1
동궁의 외삼촌인 윤임은 중전을 곱게 생각지 아니하고 중전의 오라버니 되는
윤원로, 윤원형 형제는 동궁을 미워하여 처음에 알력이 두 윤가의 집에서 생기
며부터 차차로 유언비어가 세상에 돌기 시작하고, 마침내 시비의론이 조정에까
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 영남 예안 사람 이황이 서소문 안에 와서 우거하며
교리 벼슬을 다니는 중이었는데, 어느 날 수찬 임형수와 지평 정희동이 각각 이
교리를 찾아왔다가 서로 만나게 되어 주인, 손 세 사람이 고금치란을 말하던 끝
에 윤가 알력이 미치었다. 임수찬이 소매를 걷어치며 “그것이 하등 큰일이기에
조정에서까지 의론이 분분하단 말인가? 한두 놈에게 형장 맛을 알리기만 하면
곧 지식될 것이니. ” 하고 말하니 한두 놈이라고 하는것은 원로 원형 형제를
가리키는 의미라 정지평이 고개를 흔들며 “아니, 그래서는 아니 되네. 두 윤가
의 알력이 사사 원수로 나온 것이 아니고 국가에 관계가 있는 일인즉 먼저 교란
한 죄로 두 윤가를 함께 탄핵하고, 그 다음에 분규의 공사를 갈라서 별로이 다
스려야 할 것일세. ” 하고 말하는데 말소리와 기색이 함께 씩씩하였다. 단정하
게 앉았던 이교리가 잠깐 자리를 움직이어 앞으로 나앉으며 “원룡의 말이 공평
한 말일세. ” 하고 임수찬을 바라보니 임수찬이 “자네들이 대소과 모두 동년
이라고 동년의를 차리어 편을 드는 모양일세그려. " 하고 껄껄 웃었다. 이교리가
“실없는 사람. ” 하고 온자하게 웃고 나서 얼굴빛을 고치고 “동궁의 사속이
없으신 까닭으로 외간에 유언이 많이 생기는 모양이니 이것이 우려할 바이 아니
겠나?” 하고 두 사람을 돌아보니 정지평이 옷깃을 고쳐 여미며 “동궁께옵서
성덕이 갸륵하옵셔서 대전께 효성이 극진하시고 대군께 우애가 돈독하신 터인
즉, 동궁께서 만일 장래에까지 사속이 없으신다면 대군으로 세제를 책봉하실 터
이지 무슨 우려가 있겠나. ” 하고 말하여 이교리는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임수찬은 “원룡의 말이 옳은 말일세. 나는 동년의가 없지만 옳은 말이야. 옳다
고 아니할 길이 있나. ” 하고 번듯이 드러누웠다. “사수의 실없는 것도 병이
야. ” 하고 정지평이 이교리를 돌아보는데 “병인지는 모르나 잘하는 일은 아
니겠지. ” 하고 이교리가 빙그레 웃으니 “자네들이 나를 어찌 알고 잘하고 못
하는 것을 말한단 말인가?” 하고 임수찬이 누운 채로 고개를 모로 돌리어 이교
리를 향하여 “경호. ” 하고 먼저 그의 자를 불러놓고 말하였다. “자네가 사나
이 대장부의 행사를 알겠나?” “자네는 아는가?” “암, 내야 알다뿐이야. ”
“알거든 어디 말해 보게. ” 임수찬이 벌떡 일어 앉아서 “눈이 산중에 가득히
쌓인 때 백근 강궁을 팔에 메고 천금 보도를 허리에 차고 철총마를 칩떠 타고
산골로 달려들어갈 제 앞에서 큰 돝이 튀어나와 어디로 갈지 몰라서 함부로 뛰
는 것을 대살에 쏘아 누이고 말에서 내려와서 칼로 참나무를 베어젖혀 화톳불로
놓고 긴 꼬챙이로 돝고기를 구워 가며 술을 마시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한 뒤에
얼굴을 치어들면, 어느 동안 눈이 시작하여 면화 같이 눈송이가 술 취한 얼굴에
선득선득 떨어지는 맛이라니. 자네들 같은 고리삭은 선비로야 꿈엔들 맛볼 수가
있나? 자네들 장기란 것은 말하자면 조충소기이지. ” 하고 거침없이 크게 웃으
며 무릎을 치니, 이교리와 정지평은 서로 돌아보며 웃었다. 말이란 것이 날개는
없지만 날아다니기를 잘하는 것이라 서소문안 이교리 집에서 세 사람의 이야기
한 말이 윤원로, 윤원형 형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형제 두 사람이 조용히
앉았을 때 원로가 “임형수란 자가 우리에게 현장 맛을 알려야 한다니 민망스럽
지 아니하냐?” 하고 임수찬을 미워하여 말하니 원형은 “정희등 말대로 한다면
윤임이나 우리나 모두 큰일나겠소. ” 하고 정지평을 꺼리어 말하였다. “이것저
것 할 것 없이 일이 우리의 꾀대로 되기만 하면 조정에 우리를 걸어 말할 자가
없다. 임형수같이 거센 체하는 자도 우리네 집 문간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 “임형수, 정의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이황이 같은 사람도 붙잡아 내 사람을
만들기만 하면 좋을 것이지요. ” “어디 두고 보자꾸나. ” 하고 원로, 원형 형
제가 서로 바라보며 의미 있이 웃었다.
2
이때 왕비는 연세가 사십에 가까웠으나 왕의 은총을 오로지 받고 지내는 중이
라, 왕비에게 이롭지 못한 말이 왕의 귀에 들어갈 길이 없으므로 왕비의 언어동
작이 왕의 보고 아니 보는 것을 따라 두 사람같이 판이하건마는, 왕은 이것을
알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왕은 왕비를 재덕이 겸비한 양으로 여기어 팥으로 메
주를 쑨다 하더라도 그 말을 옳게 들을 만하였다. 어느 날 윤원로, 윤원형 형제
가 곤전에 승후하고 나가더니 그날 밤에 왕비가 잠이 든 대군을 앞에 뉘고 들여
다보며 눈물을 흘리는데 왕이 내전에 들어오다가 눈결에 이것을 보고 괴상히 생
각하여 우선 대군 옆에 와서 그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잘 자는군. ” 하고
다시 왕비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 동안 눈물은 거두었으나 분위에 아롱진 자국이
남아 있어 눈물을 흘린 표적이 완연히 보이었다. “무슨 까닭에 눈물을 흘렸소?
” “아닙니다. ” “아니라니? 무슨 까닭이 있겠지. ” “아닙니다. ” “무슨
말이든지 속이지 말고 말을 하시오. ” “자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홀저에
불쌍한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온가 싶습니다. ” “왜 불쌍하기는?” “죄없는
것이 저의 명에...” 하고 왕비의 말에 뒤가 없었다. “저의 명에 어째?” 하고
왕이 한참 동안 입맛을 다시더니 “동궁이 우애가 극진하니까 대군은 걱정이 없
소. ” 하고 왕비를 위로하듯이 말하였다. 왕비는 고개를 가로 흔들며 “동궁이
우애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만, 대군의 장래는 안심할수 없습니다. 말씀 아뢰기
가 황송하오나 마마께서 우애가 부족하셔서 진성군에게 후명을 내리시고 영산군
에게 찬배지전을 내리셨습니까? 마마같이 갸륵하신 우애로도 동기를 보전하지
못하셨으니 동궁이야 당초에 믿을 수가 있습니까? 인약한 동궁이 고의로 대군을
어떻게 하지는 않겠습지요만 뒤에 권신이 있어 대군을 모해하려고 삼사를 충동
하고 나종에 정부 육조까지 들끓게 나서게 하면 동궁이 어찌하지 못하고 좇을
것입니다. ” 하고 말을 한동안 끊었다가 다시 이어 “대군을 성취시켜서 손이
나 뒤에 끼치게 되면 한이 없겠습니다만, 저것이 언제 자라 성취하게 됩니까?”
하고 화가 박두한 것같이 말하고 눈에 다시 눈물을 머금으니 왕은 잠자코 앉아
서 옛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 이튿날 동궁에서 오시 문안을 들
어왔을 때 왕은 대전에서 대군을 무릎 위에 앉히고 “네가 공주로 낳았다면 걱
정이 없을 것 아니냐?” 하고 한숨을 쉬며 왕비를 돌아보는데, 동궁은 죄도 없
이 황송한 맘을 못이겨하다가 대군의 장래를 걱정하는 대전 맘을 위로하려고 “
신의 나이 삼십이 가깝도록 사속이 없사와 불효 막대하오나 대군이 있으므로 종
사의 걱정은 없사외다. ” 하고 말씀을 아뢴즉, 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
이고 왕비는 곱지 않은 눈으로 동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있다가 동궁이 퇴
출한 뒤에 왕비가 “지금 동궁의 말이 진의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듣사온즉 세상에 유언비어가 없지 않다는데 동궁부터 대군을 의심하는 모양인
즉, 잘못하면 모자가 함께 종사에 큰 죄인이 되고 말 것이올시다. 애매한 죄명을
쓰고 세상을 마치느니 진작 다른 도리를 생각하여 청백한 것이나 세상에 알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마마께서는 부득이한 사정을 통촉하옵시니까 단견을 용서하실
줄로 압니다. ” 하고 대군의 모자가 함께 자처라도 할 어운을 보이며 목메인 말소
리로 왕의 심사를 동았다. 그날 궁중에서 큰 사단이 생기었다. 왕이 동궁에게 선
위한다는 전교를 내리어서 동궁이 맨머리 맨발로 내전 문밖에 뛰어와 엎드려서
전교 거두기를 청하는데, 그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그때 동궁의 억색
하여 하는 모양을 보고 궁인들 중에는 남 모르게 눈물을 흘린 사람이 한두 사람
이 아니었었다. 여러 시각 동궁이 울고 엎드려 있은 뒤에, 대전에서 동궁을 가긍
하게 여기는 맘이 나서 선위 전교를 도로 거두는 처분을 내리었다. 이리하여 이
큰 사단은 궁중에서 그치고 조정에까지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3
윤원로, 윤원형이 중전을 사이에 놓고 대전의 맘을 흔들어서 동궁을 이롭지
못하게 할 뿐이 아니라 두고두고 갖은 흉계를 다 써서 동궁을 해치려고 하였다.
어느 해 정월달 일이다. 아닌밤중에 동궁 침전에 화재가 났다. 궁인 하나가 오줌
누려고 일어났다가 창문이 너무 일찍이 밝은 것을 괴상히 생각하여 밖에 내다보
았더니 이때 불이 벌써 동궁 침전에 돌아 붙었었다. 그 궁인이 정신없이 “불이
야, 불이야!” 하고 큰소리를 질러서 이 방 저 방 여러 방에서 궁인들이 모두 놀
라 일어났다. 궁인들은 곤히 자던 끝에 갑자기 경겁하여 거지반들 어찌할 줄을
몰랐었다. 동궁께 문안 가려고 황망히 머리에 첩지를 얹고 단속곳 바람으로 나
오다 들어가는 궁인이 없을까, 패물 궤짝을 안고 쩔쩔매는 궁인이 없을까, 무수
리 부르느라고 악쓰듯 소리만 지르고 앉았는 궁인이 없을까, 수내인, 암내인이
손길을 맞잡고서 대를 내리듯이 떨고 있지 아니할까, 우스운 거동이 한둘이 아
니었다. 조금 정신들을 차리면서부터는 여러 궁인이 각각 자기의 물건을 들어내
느라고 부산하여 동궁 침실에 와서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밤에 정귀인이란
이가 동궁을 뫼시고 자다가 놀라 일어나서 급히 의복을 입고 문을 열려고 한즉
침실 덧문의 바깥고리가 걸리었었다. 정귀인이 안복도로 난 문을 열고 나와서
침전에서 떨어져 있는 별채 궁인의 방으로 동궁을 뫼시어 오고, 그 다음에 또
세자빈 박씨를 뫼시어 오게 하고 귀인이 다시 동궁 침실에 가서 의관이며 서책
이며 그외 동궁의 손그릇을 들어내고 끌어내고 하였다. 이리하는 동안에 앞뒤에
서 난간이 타고 기둥이 타고 석가래가 탔다. 눈 위의 매운 바람이 불 기세를 도
와서 동궁 침전 전체가 불 속에 싸이며 화광이 충전하게 되었다. 위에 대전, 중
전이 밖에 나서고 아래 별감, 무감 들이 줄달음을 쳤다. 궁중 상하가 물끓듯 하
였다. 궐내에 숙위하던 위장과 부장들이 숙위 군사들에게 걸낫, 도끼 등속을 들
리어 가지고 황황히 쫓아들어왔을 때는 기왓장이 불에서 튀어 사람이 근처에 섰
기가 어려웠다. 물그릇을 뻔질 날라다가 불에 끼어얹어서 연채에 옮겨붙지 못할
만큼 불 기세를 줄이었으나, 침전 한 채는 고스란히 태워버리고 말게 되었다. 대
전에서 동궁의 안부를 몰라서 친히 동궁에 동가하려 한즉 중정이 “동궁이 중합
니까, 종사가 중합니까? 마마께서 화염 중에 돌아가신다니 말씀이 아니 되옵니
다. ” 하고 이유를 붙여 가며 말리어서 대전에서 발을 구르고 섰을 때 동궁이
정귀인을 데리고 들어와서 문안을 여쭙고 뒤미처 세자빈 박씨가 들어와서 문안
을 드리었다. 동궁이 정귀인에게 힘본 것을 대강 사뢰니 대전에서는 “신통하다.
” “기특하다. ” 하고 칭찬을 마지 아니하고 중전은 “고 계집, 몸이 재게 생
겼다. ” 하고 칭찬 비슷이 말하였다. 이 화재가 어디서부터 난 것은 궁중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 놈의 짓이지 무어. ” 하고 수근거리는 것은 원로
하나를 지목하는 말이고 “그놈들의 흉계야. ” 하고 속살거리는 것은 원로, 원
형 형제를 함께 지목하는 것이었다. 궁중의 지목이 원로, 원형 형제에게 돌아가
는 것을 대전에서는 알지 못하여 까닭없는 불이라고 귀화인가 하는 중전의 말을
옳게 여기었다. 며칠 뒤에 동궁에서 시강원 제신에게 하서하였는데, 대개 뜻이
아래와 같았다. “덕 없는 사람이 외람히 동궁에 있게 된 까닭으로 하늘이 벌을
내리어 조종조부터 백여 년간 전래한 집이 하룻밤에 재가 되었는데, 위로 성심
을 경동케 하고 아래로 백료를 황황케 하였으니 이러한 변은 전고에 없는 바라.
내가 자책함을 마지 아니하나, 실로 변에 대하야 처신할 바를 잘 알지 못하니
여러 요관들은 여러 빈사와 같이 의론하야 밝히 교도하여 주기를 바라노라. ”
동궁 생각에는 조종조로부터 전래하는 집을 태운 것이 자기의 부덕 소치라고 하
여 세자위를 사양할 맘이 났었다. 경선히 말하기가 어려워서 시강원 관원에게
그대로 범범하게 처신할 도리를 하문하게 된 것이다. 이때 동궁의 생각을 빌밋
하게라도 안 사람은 화재 후에 하교로 동궁을 더욱 가깝게 뫼시는 정귀인뿐이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