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4권 (30)
17 덜미
"불이나 써 바. 캉캄헣게. 불 쓰고 말히여. 일어나 앉어서."
정작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말을 어금니로 눌러 옥문 채로, 목소리를 차악 낮추
어 옹구네는 말했다. 마디마다 똑똑 끊어 가며 찰지게 다잡는 음성이다. 그것은
지금 옹구네의 머리꼭지까지 분이 받쳤다는 표시다. 부아통이 터지거나 누구하
고 싸울 일이 생길 때, 다른 사람 같으면 우선 앞 뒤 없이 흥분하여 있는 대로
악을 쓰기 쉽고, 그러다 자칫 상대방의 머리 끄뎅이나 멱살을 쥐어틀며 뒤엉키
게 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그네는 결코 그러는 법이 없었다. 성질이 화덕 같
아 열이 많은 옹구네가 씨근씨근 분을 못 이겨 낯바닥이 벌겋게 달아오르면 그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왠지 주춤해지는데, 드디어 익어 터지게 화가 치밀면 그네
의 얼굴에는 붉은 쇠에 놀디 돋아나는 것처럼 푸릿푸릿한 기색이 일순에 번진
다. 그럴 때 옹구네는 눈시울을 차악 내리깔아 깎은 손톱같이 뜨는 것이다. 그
리고는 혀 끝에 찰진 힘을 주며 차근차근 상대방을 말아 감듯 따지고 들었다.
그 기세는 암팡지고 빈틈이 없어 이상하게도 온몸이 터럭을 곤두세우고 길길이
날뛰거나, 입가에 게거품을 허옇게 무는 것보다 더 사람을 질리게 하였다.
"그노무 여편네 쌧바닥에는 기양 찹쌀풀을 멕잉능갑드라고."
한 번은 무슨 일로 멋모르고 옹구네 비위를 건드렸다가 그만 나이 대접도 못 받
고 납작하게 몰린 공배네가, 날이 저문 뒤에야 숨을 가라앉히고는 평순네한테
그렇게 말했었다.
"소진쟁이가 따로 없등만, 하앗따아, 옹구네 말 잘허데요이. 이런 사람은 부애
가 나면 말이고 머이고 막 뒤죽박죽 범벡이 되야서 무신 소리 나오도 않든디.
그 사람은 어뜨케 된 사램이 성질은 조우때기에 불붙은 것맹이로 화르르으 험서
나. 막상 따지고 달라들 때는 그렇게 조단조단 이 잡디끼 서둘도 안허고 지 헐
말을 다 허드라고요. 아까도 봉게로. 아이고. 나 그런 사람 무섭데."
평순네는 꼭 공배네 편역을 들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것이어서 말
끝에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었었다.
"아, 자기는 부애가 나면 날수록 말을 더 잘헌다고 지 주딩이로 안그러등게비?
그렁게 같이 싸우든 사램이 주먹쥐고 달라들어 패 쥑일라고 허다가도, 그 예편
네, 새파런 낯색에 꼼짝도 안허고 서서 텍아리를 배톨침허고 지 헐 소리 찹,
찹, 허고 있으먼, 성질 급헌 사람은, 어흐기흐, 그걸 쥑이도 못허고 살리도 못
허고, 그 주먹으로 기양 지 가심팍에 북을 치잖이여? 북을."
"누가 그 말을 당해 낼 거이요잉?"
"말도 말이지만."
"질기고 징허제. 성질머리가 그렁에 그렇게 일찌거니 즈그 서방도 잡아먹었능가
아."
무심코 말을 뱉던 평순네는 아차 싶어 더 무어라고 꼬리를 잇지 않았다. 아무리
본인 없는 데서 안 듣게 한 것이지만 모진 말일 때문이었다. 그런 옹구네도 춘
복이한테만큼은 그 동안 눈길 한 번 치뜨지 않았었다. 치뜨다니. 오히려 누가
보아도, 그 앞에서는 공연히 몸을 움질거리며, 가무잡잡 볕에 탄 얼굴의 눈자위
에 당홍색을 볼글홈이 머금은 채, 아닌 척 할깃할깃 곁눈질을 하는 양이, 공배
네 말대로
"지 처지는 생각도 안허고, 자시끄장 있는 년이 염치도 없이 넘으 숫총각을 넘
보고 찌웃대는 꼬라지."
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할 만했다. 남이 보는 데서도 그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네가, 남이 안 보는 한밤중의 농막 안에서야. 춘복이의 농막은 무어 굳이 '집'
이라고 할 것도 없게 옹색하였다. 반촌 매안에서도 민촌 고리배미에서도 후미지
게 떨어져 외따로 박힌 산촌 거멍굴.
행세 없는 이곳 시커먼 근심바우 아래 웅기중기 이마를 맞대고 있는 백정 택주
네 붙이들 몇 집과, 길 건너 저만큼 동산 기슭에 대나무 시퍼렇게 울을 두른 당
골네 푸네기 서너 집, 그리고 그 두 무더기 여남은 가호 사이를 가로지른 길 한
켠에 오물오물 모여 앉은 옹구네와 평순네 또 공배네 집들을 한 소쿠리 속이라
본다면. 농막은 그들에게서도 더 휘엇하게 벗어나, 도닥도닥 기워 붙인 채마밭
몇 뙈기를 남루하게 펼치고 앉은 산밑의 바람받이 한 구석에 저 혼자 웅크리듯
구부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얼기설기 얽어 놓은 둥주리나 한가지였다. 꼬막
껍데기 영락없이 골골이 줄이 패인 초가지붕은, 몇 해를 두고 갈아 잇지 못하여
누른 빛이 재색으로 삭아 버린 지 오래인데, 비딱하니 틀어진 소나무 기둥에,
금이 가고 갈라진 황토 흙벽이, 누렇게 바랜 창호지 지게문짝 하나 눈구녁처럼
달고 있는 이 농막은 얼핏 보면 꼭 빈 집 같았다. 늘 비워 놓은 때가 많은 탓이
기도 하겠지만 사철 뭉뭉한 흙내가 습하게 차있는 됫박만한 방안에는, 횃대 하
나 덩그렇게 걸려 있을 뿐, 시늉 갖춘 세간살이는 물론이고,이부자리 하나 변변
한 것이 없었다. 이른 새벽 장닭이 홰치는 소리에 눈을 뜨면, 부스스 대가리 털
어 내며 푸르스름 동이 트는 고샅으로 나와, 그때부터 하루 온종일 놉으로 간
일판에 엎드려 있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으레 공배네
오두막이 들리어 한술 밥을 떠먹고는, 밤이 이슥하면 휘적휘적 찾아드는 농막인
지라, 이름 붙일 가재 도구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는지도 몰랐다. 그런
중에도 입심만큼이나 손끝이 야무진 옹구네가, 어느 틈에 뜯어내 탕탕 방망이질
하고 빨아서 가슬가슬 풀먹이어 시친 이불과 요대기는, 비록 개 혁바닥같이 얇
은 것이었지만 깨끔한 느낌을 주었다.
"아니 지껫잇 거이 무신 마느랜가. 아조 인자 내놓고 들어앉을랑게비. 택도 없
이. 아니 어따 대고 이불 빨래여. 이불 빨래가. 참말로 벨일을 다 보것네이. 아
이고."
지난번, 공배네는 이 이부자리 모양새를 보고 혼자서 기가 막혀 혀를 찬 일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기른 정이 자식 못지않은지라. 거처만 따로 하고 있을 뿐
끼니며 옷가지 빨래거리 잔손 가는 일들은 틍이 나는 대로 공배네가 마음써 주
는 것이 당연하여, 그날도 그네는 농막으로 갔던 것이다. 깡추위에 얼어붙어 저
절로 쩌억 쩍 갈라지는 개울물이 허옇게 배를 뒤집고 있는 동짓달. 아무래도 설
을 쇠려면 묵은 이불 호청이나마 새로 빨아 끼우는 것이 궁색한 살림 중에서도
해야 할 일이었기에, 공배네는 자기 집 것들을 뜯은 김에 춘복이 것도 생각이
나 그곳에 들른 것이었다. 기운이 예전 같지 않는 그네가 곱은 손을 잔뜩 오그
리고 팔짱을 낀 채로 농막 안에 들어섰을 때, 춘복이는 집에 없었다. 그리고 빈
방의 컴컴한 구석지에 풀냄새도 아직 가시지 않은 호청을 보란 듯이 하얗게 끼
워서 개켜 놓은 이불과 요대기를 보게 되었으니. 공배네는 어기가 찰 수밖에 없
었다. 그것은 묻지 않아도 옹구네 솜씨가 분명하였고, 지금까지 공배네 아니라
면 춘복이한테 그런 일을 해 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마치 제 것인 양
이불 뜯고 요를 뜯어.
"정셍이 뻗쳤제. 열녀가 나겄네, 동지 섣달 얼음 구뎅이에 가서, 뻘겋게 얼어
터진 손구랙이 떨어져 나가게 시린 물에 손 당구고, 이불 빨래같이 거역시런 것
을 마다 않고 했응게."
꿈에라도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도 뻔뻔스러운 짓거리라 비
위가 다 돌렸다.
"오살 노무 예편네, 손목뎅이를 기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