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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41)

카지모도 2024. 6. 2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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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동계와 남평

 

불용재위명봉관 불수절작조어간 천화백초조령후 유향분분설리간

그 마디 잘라 내어 진기한 피리도 만들지 않고 모름지기 물가의 낚싯대도 만들

지 않고 천 송이 꽃 백 가지 풀 다 시들어 사라진 뒤 푸른 댓잎 분분히 날리는

눈 속에 그대로 두고 보리

매안의 이씨 문중에서 항렬과 연치가 가장 높고도 학덕이 있어 문장으로 받드

는, 동계어른 이헌의의 큰사랑방 벽에는 몇 줄 화제가 쓰인 서화 한 폭이 걸려

있다. 설한 풍족이다. 이것은, 여러 해 전에 고희를 맞이한 이헌의에게 대여섯

살 수하인 재종 이징의가 축수 인사로 보낸 그림이었다.

"남평은 풍족이 일품이라. 이 사람의 대는 이상하게 박토에 뿌리를 박은 것같

이 까칠하면서도 그 늙은 마디와 갈라진 노엽에 메마른 힘이 있다."

하며 몹시 마음에 들어 한 이헌의는 이 대를 족자로 만들어 걸었던 것이다. 담

묵을 머금고 동절의 하늘이 스산하게 빗기어 걸린 화폭에, 추위를 오히려 멸시

하는 의취로 시린 바람 소리를 솨아아 푸르게 일으키는 댓이파리 엽엽의 창연한

서슬은 몇 점 눈발에 더욱 소쇄한데, 그 옆에는 굼틀굼틀 넘놀던 구름이 잠시 웅

크려 머문 것 같은 바위 하나가 대나무와 벗을 하고 있었다. 예전의 시인들은

그돌을 일러 운근이라 하였으니, 돌은 곧 천지의 골인데 거기에 또 기가 들어 있

는 것을 이르는 말이리라. 죽석창윤. 이 대바람 소리의 물살에 번거로운 속진이

일시에 씻기어 방안까지 청한하게 하는 풍죽을 보며

"백거이는 죽심이 공공하여 이로 말미암아 도를 얻는다 했고, 다른 이는 대를

일러 종일허심 대봉래라, 종일 마음을 비워 놓고 봉황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했

는데, 남평의 대를 보고는 무얼 읽을꼬?"

이헌의가 말했을 때,

"거 뭐 읽을라고 해쌓지 말라고 안 씌어 있습니까? 거기."

이징의는 아주 무심히 자기 그림을 기웃 넘겨다보면서 한 다미 툭 떨구었다.

"대체 그렇구만."

족자를 손에 든 이헌의는 웃었다. 만일 다산의 말대로라면

"선비의 방안에 서화는 조촐하게 한두 폭을 걸어 두는 것이 좋은데 결코 풀칠을

하여 벽에다 붙여 버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심히 사람의 눈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며, 양쪽 벽에 대칭으로 맞보게 거는 거 또한 아주 속된 것이니 삼가야 한

다. 그리고 그림은 때때로 바꾸어 걸어야 한다. 춘, 하에는 추, 동의 경을 보

고, 추, 동에는 춘, 하의 경을 보아야 하느니, 그리고 산에 들어 있을 때는 흐

르는 물을, 물가에 거할 때는 웅숭 깊은 산의 도량을 그림으로 본다면, 바야흐

로 그 심서를 조화롭게 하여 신기가 편안하리라."

하겠지만, 겨울이 깊어 이윽고 정월이 다가와도 그는 이 그림을 다른 것으로 바

꾸지 않았다. 병풍과 족자에 대해서는 말한 정약용은

"반드시 품격 있는 서화의 가품으로 꾸미는 것이 옳은즉, 진채는 담채만 같지

못하고, 담채는 또 단묵만 같지 못하니, 마땅히 상격의 것으로 항상 머리맡에

풀냄새 그윽한 병풍과 족가를 갖추어 두면, 능히 안목을 기른다."

고 하였다. 과연 알록달록 빛깔이 짙은 진채화나 청록산수 물감을 입힌 그림보

다는 붓 한 자루에 검은 먹의 짙고 옅음만으로, 허리가 휘어지게 부는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정연하게 꿋꿋한 풍족의 기세와, 비를 맞아 아래로 촉촉히 처진 우

죽, 맑은 날 볕발에 명랑하고 깨끗한 청죽,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어 젖은 만추

의 노죽, 오래 눈이 쌓여 가지가 눌린 비백의 설죽, 그리고 달빛 아래 전아한

봉죽이며, 연기에 잠긴 대, 구름에 싸인 대, 빙성의 한고에 초연한 기개를 떨치

는 노죽과, 용손이라 하는 죽순에서 이제 막 껍질을 벗고 혀를 내미는 유죽이

뻗치고, 뒤집어지고, 나지막이 처지거나 높이 솟아 소슬한 자태와 기분이 빛깔

을 절묘하고 역력하게 그리어, 그 마디와 가지와 모든 잎을 다 살아나게 하는

묵죽이야말로 선비의 방에 맞다 할 것이었다.

"자칫해서 대나무 마디를 그린다고 뼈다귀처럼 해 놓든지, 이파리를 친다고 우

물 정짜로 포개 놓든가 잠자리 모냥으로 그리는 것은 못쓰지. 또 사람의 손가락

을 쩍 쩍 펼친 식이 돼서도 안되고, 또 까딱 대를 친다고 도엽같이 허기 쉽거

든, 아니면 버들잎처럼 허기도 쉽고, 그러면 또 못써, 허나 꺼리는 것이 많다고

주눅이 들면 더 안되지. 붓을 들 때는 겁을 내서는 안돼. 처음에는 힘을 들여

붓을 누르고 후에는 힘을 늦춰 붓을 떼되, 단번에 기세 있게 그려야 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저 패필이 쌓여 산데미가 되도록 익힌다면 어느 날 홀연 절

품이 나오게 되리니. 오직 심중에 새기고 근공 정진할 밖에 다른 길이 없다. 나

는 대를 칠 때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글씨로 쓰는 것이다. 그러

니 이 댓잎은 획이지. 획. 글씨를 알아야 대를 쳐."

이징의는, 서화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르곤 하였다.

"나는 궁거한 벽학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