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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35)

카지모도 2024. 8. 16.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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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연이 허방하게 불티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에 불 그림자

가 주황으로 일룽였다. 그러나 아까워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이 대보

름날 밤이면. 집집마다 멀리 날리어 앞으로 다가올 액을 미리 막으려는 액막이

연을 띄우는 것이었다. 마치 소복을 한 듯 아무 색도 입히거나 칠하지 않은 백

지의 바탕이 소슬한 흰연에다 섬뜩하리만큼 짙고 검은 먹빛으로

"액"

"송액"

"송액영복."

을 써서. 갓 떠오르는 새 달의 복판으로 날려 보내는 이 액막이 연은 얼음같

이 푸르게 비추는 정월의 달빛 속에 요요한 소지처럼 하얗게 아득히 올라갔다.

얼레에 감긴 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있는 대로 모두 풀어 그 연을 허공에 놓

아 주었다.

멀리. 저 멀리 더 먼 곳으로 날아가라고.

"강실이 저것이 올해 신수가 영 안 좋다고. 당골네가 무슨 소리를 허드마는.

몸이라도 어디 성찮을까 걱정이 되니. 거기서 허라는 굿이야 말대로는 다 헐 수

없는 일이지만 제웅이나 하나 띄워 줍시다."

오류골댁은 매안으로 올라와 신수를 짚어 주던 당골네 백단이의 말이 마음에

걸려. 기응에게 며칠 전부터 말을 해 두었다. 제웅은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

어 액막이로 쓰는 허수아비다.

"드는 삼재보다 나는 삼재가 더 무선 거인디. 애기씨는 재작년에 삼재가 들으

와. 작년에는 쉬는 삼재. 올에 인자 나강만요. 나가는 삼재는 뒷발질로 차고 나

가는 거이라. 재앙이 많이 불고 탈도 많은 법인디. 애기씨가 올에 죽을 수가 들

어서 산에 가도 놀래고. 물에 가도 놀래고. 가마안히 집안으 들앉어 있어도 무단

히 퉁 놀래서. 가심이 밑빠진 것맹이로 내리앉어. 아이고 내가 왜 이런다냐. 내

가 살라고 이런다냐. 죽을 라고 이런다냐. 세상 사람 아무도 몰라도 나는 나 혼

자 앉었으먼 꼭 기양 사그르르 숨을 놓고 죽을 것만 같은디. 어머이도 그 속을

모리고 아부지도 그 속을 모리고. 천지신명 일월성신한테나 빌어 보끄나. 한숨으

로 안개가 찌여 앞을 보아도 캄캄허고 뒤를 보아도 낭떠러지라. 애기씨가 어디

사람한테 놀랜 일이 있었능가. 자꼬 사람 애가 찌여 뵈이네요잉. 안 그러먼 앞으

로 놀랠 일이 있을랑가.

애기씨 신수가 나이 아직 젊어서 넘들이 보머는 꽃다운 이팔 청춘. 꾀꼬리 날

고 버들이 춤 춘다는 호시절이지마는 속이 삭어 비어 부러서. 바람 들어 썩은

부시맹이로 씨커멓게 비치네요. 왼갖 매디 삭신은 팔십 노인도 이만허든 안헐

거인디. 손을 들어 머리 빗기도 힘이 들고 앉은 자리서 돌아앉기도 힘이 드니.

아니 애기씨가 왜 이러까아. 운수가 이럴 때는 접시물도 조심허고. 넘의 말도 조

심해야 해요오. 기양. 오다가다 무신 말 한 마디만 비끗해도 무단히 오해 사고.

사단이 나는 거인디요잉. 망신살에 구설수가 들어 놨이니.

신수 괘가 그렇다 그거이제 머 꼭 그런 일이 생길라등가요 머. 넘들 같으먼

이럴 때 굿을 꼭 해 주라고 그러겄는디. 애기씨 아직 혼인도 안 허신디다가 벌

어지게 굿허고 어쩌고 허먼 참말로 머이 씌었는가. 구설에 오르내링게. 어디 헛

일 삼어서 제웅이나 하나 띄워 보내 보시지요. 이 달 정월 보름날에 연 끄터리

다가 조그막허게 맨들어 달어서 돈 한닢 짬매 갖꼬. 훠어이 훠어이. 먼 디로 가

라고 날려보내 보서요. 제웅속으다가 생일 생시 써서 넣고. 이름 쓰고요."

당골네는 그러고도 무슨 자잘한 말들을 더 하였으나 하나같이 불길한 것들이어

서 오류골댁은 그것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었다.

"꼭 사람 조심을 허세야 쓰겄는디요."

당골네 일어서면서도 당부하였다.

"어디 문밖 출입이라고 허는 사람이어야 말이지. 누구를 조심해야 허는고. 그

저 맨날 보는 제 부모말고는 어디 누구 말허고 지내는 사람도 없는데."

"운수가 그러시다는 거이지요 머."

"알겄네. 조심해서 가소."

오류골댁은 마음이 수수하여 배웅도 대강 하고는 그 길로 지푸라기부터 챙기

러 갔다.

정초에는 으레 매안으로 올라와 세배를 도는 당골네한테 강실이 혼처는 어디

서 나겠으며. 언제쯤이나 혼사가 이루어지겠는가 물어 보려 했던 것인데. 말이

씨 되면 어쩔꼬 싶은 마음이 드는 말만 골라 듣고나니. 심정이 뒤숭숭하여 며칠

간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보름날이 되었던 것이다. 강실이도 그

제웅이 달린 액막이 연을 보았다.

귀신의 낯빛으로 허옇게 질린 연의 이마에 꼭두서니 홍꼭지 대신에 검은 글씨

로 '액'이라 써 놓은 것이 달빛을 받아 더욱 귀기를 띠는데. 꽁지에 매단 지푸라

기 허수아비 제웅은 손가락 길이보다 조금 더 컸지만 백지로 얼굴을 씌워 감은

데다 눈이며 코며 입술이며 검은 붓으로 그려 넣은 것이 강실이를 철렁 놀라게

하였다. 저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를 대신하여 멀리 허공으로 죽으러 가는가.

제웅은 시늉으로 그린 눈을 부릅뜨고 강실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허새비

의 고리 눈빛이 표창같이 그네의 가슴을 뚫고 복판에 꽂힌다. 무서웠다. 그것이

단순한 허새비가 아니라. 정말로 무슨 넋이 스며들어 자신의 혼을 빼 가는 것도

같았다. 매달고 있던 나락 모가지가 다 잘려 버린 지푸라기 몇 올을 이리 엮고

저리 결어 만든 제웅의 마른 가슴 갈피에다 생일 적고 생시 적어. 몇 번이고 접

어서 조그맣게 찔러 넣은 백지는 이제 한낱 종이 조각이 아니라 강실이의 혼백

이 되었으며. 제웅 또한 한낱 지푸라기 인형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 강실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그 허새비 인형이 실제 강실이

고. 그것을 보고 섰는 강실이가 오히려 허옇게 껍데기만 남아 사람 시늉하고 있

는 허새비인 것만 같았다. 그네의 신수에 낀 액운만을 뽑아 내어 허새비 속에

담아서 멀리 멀리 날려보내 버리고자 하는 일인데. 그런 일들이 오히려 그네에

게는 소름이 돋도록 불길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이름을 가슴에 품은 지푸라기 허새비 제웅이 자신의 액을 안고. 연에

매달리어 홀로 아득한 허공을 흘러흘러 가듯이 그네는 독하고 서러운 이름 하나

를 가슴에 에이게 꽂은 채로 허새비처럼 이미 무게도 부피도 없이 자욱하게 한

숨을 타고 떠오르고 있었다.

액막이 연은 내장까지 푸르게 비쳐들어 그 영령한 물 소리로 채우는 달빛을

받으며 달집이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가 저만치서 일룽이는데. 허어옇게 소리도

없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넋의 흰 그림자 같았다. 연 꽁지에 매달린 제웅

의 조그만 몸뚱이가 고적하게 깟닥깟닥 흔들리고. 저 아래 어디만큼에서인지 풍

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제웅은 그 풍물에 장단을 맞추는 것처럼도 보인

다. 아니면 가겠노라는 무슨 인사의 시늉처럼도.

강실이는 달빛 속에 서서 멀어지는 연꼬리의 제웅이 그 엄지손톱만하던 창호

지 낯바닥에 그린 고리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같아. 흰 소름이 등

을 훑어 내리는 한기에 몸을 후르르 떨었다. 기응은 얼레에 감긴 무명실을 풀고

풀었다.

오류골댁은 두 손을 맞잡아 가슴에 모두고 낮은 소리로 "멀리 멀리 갑소사. 아

조 먼 데로. 머언 데로 가십소사." 흰 연을 우러르며 중얼거리듯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