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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8권 (25)

카지모도 2025. 2. 2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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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숨을 맨 처음 이 땅에 부른 자 누구인가.

이제 훗날 제군들이 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 보면, 나의 말이 실감나리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만주 벌판에, 여기서도 저기서도 우리나라 초가지붕 앞냇물 뒷동산에 안

기어서 달큰한 흙냄새 맡으며, 외갓집 큰집 안마당같이 낯익은 토질에다 고추, 참깨, 해

바라기, 오이, 가지 기르는 풍경을 실제로 보면, 여기는 확실히 우리 땅이었다.

는 것을 뼈가 저리게 절감할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고 저도 모르게 토로하고 말 것이다.

공기의 켜 속에 스민 우리 조상의 고함 소리와, 흙 속에 스민 우리 선조 땀내음이 상기

도 살아서, 살냄새처럼 체온으로 끼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무심히 당연한 듯 써 온 삼국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허구요,

어불성설이요, 지배자의 논리, 횡포였다.

그러나 신라는 남고, 고구려와 백제는 사라졌다.

제군들이여. 나는 여전에 홀로, 해가 지는 부안의 변산 바닷가 주류성에 다녀왔다.

백제의 해풍에 삭은 주류성 흔적, 마지막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지 다 굶어서 비참하게

죽었다 하는 성벽 아래, 무너진 돌무더기, 눈물이 굳은 것처럼 이리저리 발길에 채이는

그곳에 갔던 것이다. 그 돌무더기 틈바구니, 바스라지고 있는 돌의 어금니에는 아직도 백

제의 시간이 고여 있었다. 함성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석양이 스며들고 있는 돌멩이 하나를 뒤집어 보다가 울었다.

아직도 습습하게 이뿌리처럼, 햇빛 없는 돌밑에 박혀 있는 백제의 온도. 그 축축한 흙

내는 백제의 숨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저 끝없는 파도 소리.

풍화.

나는 거기서, 그 중 백제같이 생긴 돌덩이 두 개를 주워, 내 시린 가슴에 품고 돌아왔

다.

아직 감히 나는 그 돌에 단 한 자 내 마음도 쓰지 못했다. 이제 훗날 제군들 중에 누구

인가 시인이 되어, 나의 이 빈 돌에 한 점 글귀를 인각하여 새겨 주기를 바란다. 나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서러워 서러워 지우지 못하는 백제의 꿈이, 이백 년이 넘

도록 헤매어 떠돌다가 또 다시 꺾인 곳,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 완산 남고산성, 견훤 왕

이 쌓으신 산성의 성긴 돌벽 모퉁이에, 나는, 나머지 한 개를 놓아 드렸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 서러운 도읍지의 산성에 서서 후백제 도읍을 쓰러뜨린 왕건의 고려 충신 포은 선생

이, 이제 어쩔 수 없이 쓰러지려 하는 조국의 석양에, 가슴 찍어 도려내는 비절 참절로

피 토하며 아프게 우셨나니. 역사도 윤회를 하는 것인가.

업장이 있다.

그러나, 조선은 백제인지도 몰라. 백제를 무너뜨린 나당 연합군의 신라를 고려는 흡수

해서 무너뜨렸고, 조선은 또 그 고려를 무너뜨렸으니, 백제를 못 잊어 세운 나라 후백제

의 도읍지 전주에서, 백제 사람, 백제의 자손, 이성계는 몸을 일으켜 신라의 핏줄이 섞인

고려를 치고 조선을 세웠다. 그러니까 결국 조선은 백제가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몰라.

이성계가 백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만일, 땅의 혈통으로만 본다면 아닌게 아니라, 그는 분명 백제의 자식이다. 견

훤의 아들이다. 무너진 왕도에서 몇 백 년 뒤, 다시 왕이 났으니.

심진학 선생은, 남고산성 만경대 앞 절벽에 새겨진 포은의 우국시를, 알아 두라며 한

자 한 자 칠판에 적어 주었다.

과연 나라는 무엇인가.

국파산하재라.

나라는 부서져도 산과 물은 예대로 여전하다. 하지만, 나라의 이름이 바귀어도 백성을

다시 그 나라 운명으로 태어나 목숨을 엮는다.

포은을 베어 고려를 넘어뜨린 이성계도 조선도, 명성왕후 민비를 버힌 채 나라의 문을

피울음으로 닫았다. 그리고 고려의 충신들이 그러했듯이 조선을 따라 목숨을 던진 이가

하나둘 아니었다.

마음속에 끝없이 백제를 그리워하면서, 후백제를 앙원하고, 후백제 섬멸한 고려의 마지

막 충신을 애끊게 기리면서, 그 고려를 뒤집고 일어난 조선의 백성으로 당연하게 살아온

사람들. 백성. 그 가련하고 당당한 뿌리. 그 커다란 어리석음. 그리고 순명함.

돌이킬 수 있다면 좋을 것인가.

놓쳐 버린 기회나 역사의 순간들을.

만일이란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훗날의 뒤척임일 뿐이지만, 그래도 만약 만

일이 허용된다면, 어디까지 세상은 바뀌었을까.

만일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후백제가 그렇게 망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서글픈 열변에 스스로 겨워 목이 잠기던 심진학 선생의 음성이 바로 귀곁에 들리

는 듯한데, 강모는 홀로 무겁게 고개를 젓는다.

그는 문득 자신의 만일을 돌아본다.

만에 하나. 그때 그러지만 않았으면 좋았을 것들이, 나의 이 짧은 생애, 그러나 기나

긴 멍에, 어느 목을 조이고 있는지, 그는 더듬더듬 짚어 본다.

(그때 그러지만 않았으면).

모든 것은 지금과 달라졌을까.

과연.

그 한순간을 끝끝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나는 점에 불과한 시간의 티끌을 순간

으로 흘려 버리거나, 지워 버리거나, 없애 버리지 못하고, 이처럼 전 생애를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 채, 낯선 땅, 낯선 시간, 머나 먼 곳으로 떠밀리어 흘러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