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8권 (27)
또한 성심껏 중국을 섬겨서 조빙하는 사신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널 때, 험준한 산에서는
사다리로 오르고 망망한 바다는 배로 건너면서 연락부절하였다. 뿐만 아니라 항상 고관의
자제들을 중국에 보내어, 밤새도록 황제의 대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직무를 다하여 숙위
를 하게 하고, 국학에 들여 보내서 공부하게 했다. 이리하여 성현의 풍도를 이어받고 미
개한 습속을 개혁함으로써 예의를 존중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천자가 거느린 군대의 위력과 위엄에 의거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국토
를 빼앗아 이를 군과 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불법을 깊이 숭상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마을마다 불탑과 절집을
즐비하게 세워, 백성들은 너나없이 중이 되어 버리매, 군대나 농민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라가 날로 쇠퇴해 가니 어찌 국정이 어지러워지지 않을 것이며, 나라가 망
하지 않을 것인가.
이때에 경애왕은 오로지 음란하고 놀기에만 바빠 궁녀들 속에 파묻힌 채, 좌우 근신들
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아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견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오
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나라가 기울어 비록 그것이 부득이한 일이었다 하더라
도 역시 가상한 일이라 하겠다.
만일 그가 힘껏 싸우다 죽기로 작정하고 신라를 지켜서 고려 군사에게 항거 반항했다
한들, 힘은 꺾이고 기운은 다 빠져 반드시 제 가족을 멸망시키고, 무죄한 백성들한테까지
피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경순왕은 우리 태조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국고를 봉한 채로 군과 현
의 호적을 모두 그대로 가지고 고려에 바치고 귀순했으니. 우리 고려 조정에 대해서는 큰
공로가 있고, 신라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매우 덕이 있는 일이라 하겠다.
옛날 오월의 왕 전씨가 송나라 태조에게, 자신이 다스리던 나라 땅 십삼 주를 가져다
바치고 귀순하매 소자담은 그를 가리켜 충신이라 했는데,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
씬 낫다 하겠다.
우리 고려 태조는 비빈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했는데,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
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뒤에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들이니 이것이 어찌 (귀
순한) 경순왕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
이것이 신라의 마지막 모습이다.
심진학 선생은 미간을 무겁게 좁히며 한동안 침묵하였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제군들이여, 나는 이 멸망기를 이렇게 읽는다.
우선 통일신라 마지막 임금인 오십육 대 김부대왕, 즉 경순왕 이전 오십오 대 경애왕에
대한 언급부터 거꾸로 더듬어 찬찬히 읽어 보겠다.
삼국유사에 씌었으되
천성(후당 명종의 연호) 2년 정해 구월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지
금의 영천)에 이르니, 경애왕은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고 하였다. 일찍이 한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아 존망이 위태로울 만큼 급박한 지경에
이르면, 인접 동맹국한테 얼마든지 원병을 청할 수 있는 법인지라, 위의 일은 조금도 괴
이하지 않다.
그러한 경우가 아닐 때에도, 신라는 오직 제 나라 땅덩어리를 넓히기 위한 야망으로 강
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융성하던 백제를 치고 무너뜨린 전력이 있을진대, 하물며 이런
위기에서야.
다급하게 두 손 뻗어 후백제의 견훤을 쳐달라고, 고려를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었으리라.
급보를 받은 태조 왕건은 지체없이 용맹스러운 장수에게 명령하여 날래고 강한 군사
일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신라를 구하라.
하였으나.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견훤은 매서운 날씨 찬 바람 부는 겨울 음력 십일월 동짓
달에, 신라의 서울로 가차없이 밀물처럼 밀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해괴한 일이 그 다음부터 벌어지고 있었으니.
나로서는 도무지 이 이야기 앞뒤를 맞추기가 어려웁다.
이때 경애왕은 왕비와 후궁,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으므
로,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는 것인데.
경애왕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지금 막 일촉즉발로 후백제 군사들이, 그것도 저 용감무
쌍과 지모를 겸비한 왕건조차 휘몰아쳐 곤경에 빠뜨리고 마는 견훤이 몸소 마상 진두를
지휘하며 내달려오는 이 마당에, 남의 나라 고려에는 원병을 화급히 청하여 놓고, 친서
보낸 임금은 한가로이 제 나라 궁궐 담장 안도 아니요, 경주 남산 서쪽 산밑의 포석정 근
교 놀이터까지 이고 지고 나들이 나가서, 궁녀 비빈 종척들과 삼삼오오 둘러앉아, 질탕하
게 노래 부르고 춤추며 음풍 농월 잔치를 하게 생겼는가.
더욱이나 포석정이라면 계곡의 물을 받아들여 이것을 전복 모양 곡수 수구에 흐르게 하
고, 이에 술잔을 띄워, 문무백관의 품계를 좇아 열을 지어 앉아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
며, 흐르는 물에 떠오는 술잔을 차례로 들어 마시면서 흥겨워하는 곳이니. 음력으로 동짓
달이니 양력으로는 십이월인 겨울에는 못 노는 곳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기록은 뒤틀리고 비뚤어지기 시작하였다.
썩어도 준치 라는 말이 우리 속담에 있다.
이것은 그 어떤 무엇이 비록 상하여 썩었다 할지라도, 원래 품격과 기틀을 가지고 있었
던 사물이나 바탕은, 그 본질이 몸 어딘가에 남아서 꼭 제 노릇을 한다는 비유인 것이다.
아무러면 썩어도 신라인데, 우여곡절과 산전수전 다 겪어 천 년 사직을 면면히 이어온,
삼국통일의 찬란한 주역 신라가 아직 왕실이 엄연하고 국호를 그대로 달고 있는 한, 결코
저지를 수 없는 작태를, 이른바 소위
포석정 사건.
에서는 벌이고 있었으니.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설령 삼국유사에 쓰인 대로 경애왕은 음탕하고 놀기 좋아하여 왕으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으매, 적병은 쳐들어오고 원병은 그 뒤를 쫓아오는데도 기어이 한바탕 포석정에서 둥당
거리며 놀고자 한다, 치더라도.
그와 같이 바람 앞에 등잔불처럼 목숨이 펄럭이는 순간, 나라는 제쳐두고 제 발등의 불
을 털어 끄기 바쁜 비빈, 궁녀, 왕족과 신하, 종척들이 그리하여이다.
왕의 뜻을 따랐을 리 천만 없을 것이다.
더욱이나 분명히 기록에는 신라 경애왕은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라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 놓고는 어떻게 왕으로서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도록. 즐겁게 놀 수가 있었으리오.
천하에 무지몽매한 필부조차도 인간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제 앞에 닥치는 위험 때
문에라도 그렇게 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저를 죽이러 살기등등 창칼을 번뜩이며 군사떼가 몰려온다는데.
춘 삼월 만화방창, 봄날의 아지랑이 몽혼마냥 아늘아늘 넋을 홀리는 계절도 아니요, 푸
른 잎새 물든 단풍 정취가 무르익는 여름과 가을도 아닌, 겨울 동지 낙목한천, 을씨년스
럽고도 모가지 움츠러드는 한겨울 엄동 추위에 부르르 어깨 떨면서, 얼어붙은 포석정에
줄줄이 쭈그리고 앉아 얼음 위에 대소신료 비빈 궁녀 술잔을 돌리며, 희희낙락 잔치를 할
수가 있는 것일까. 과연.
우선 난장에 추워서도 못 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