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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8권 (44)

카지모도 2025. 3. 16.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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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택호는 향촌 사회의 신분 증명서 도장이었다.

앙혼을 즐거워하고 낙혼을 꺼리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그토록 확연히 드러나는 택

호를 꿈에라도 거짓으로 차용해 볼까 하는 경우 없지 않겠지만, 그것만은 부모를 바꾸

는 것과 같아서 안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택호를 언감생심 민서 상민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당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

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 제 이름 그대로 꾀벗은 채 스거나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

면 그 아이의 이름을 앞에 붙여 옹구네라든가 아니면 꽃니어미. 곤지아비라고 부르고,

손자가 있을 때는 서운이 할미라 불렀다.

혹 자식도 없이 신분은 미천하고 성씨 또한 없을 때는 아무리 늙어도 그냥 제 남정

의 날이름에다 네짜 하나 붙여서 불렀다.

그런데 지금 고리배미 아낙들이 그것을 마다하고 생으로 작명을 하여 소위 어거지 택

호를 쓰기 시작하였다니, 이런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작태가 어찌 매안의 부인들

에게 괴이히 비치지 않겠는가.

이게 그냥 넘어가질 일인지 나는 모르겄네.

홈실댁이 의심쩍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사랑에서는 아시는가?

동계댁이 율촌댁한테 묻는다.

율촌댁은 대답 대신 무거운 눈길을 사랑채 쪽으로 돌린다. 그 눈길은 햇살이 기우는

장지문에 걸려 더 넘어가지 못한다.

이기채는 아까부터 골똘히 어떤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아직 살구만한 소년이었을 때. 그러니까 고리배미 장업이가 턱없는 정자관을

뒤집어쓴 죄로 붙잡혀와 매맞던 무렵엔가 들은 이야기였다.

어찌 그 이야기가 이렇게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어느 갈피에 남아 있다가, 오늘 문

득 새삼스럽게 떠오른 것인지. 그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되렌님, 지가 재미난 옛날이얘기 한 자리 해 디리끼요? 안서방은 사랑채 누루마에 앉

아 있던 이기채한테 그렇게 말했다.

때는 겨울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혹은 봄이었는지.

다만 해질녘이어서 노적봉으로 기웃하니 넘어가는 해가 길고 붉은 너울마냥 석양을

드리워, 안서방 얼굴이 물든 것처럼 보이던 것이 떠올랐다. 얼굴만이 아니라 무명저

고리와 바지 올올에도 낙조의 붉은 먼지가 스며드는 것만 같이 보였었는데, 안서방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어린 눈에 저녁 햇볕 을 물고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기억이, 희미하나마 절실하게, 배어나듯 떠오른다.

그 햇볕에 주름이 진다. 이기채는 가슴을 조인다. 아프다. 그래. 안서방도 그때는 젊

었지. 그와 함께 나눈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까지는 이렇게 실감하지 못햇었는데.

반상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승의 한 고비 해 저무는 어느 날 석양에 누마루 난간을 짚

은 그는 붉은 햇볕 머금은 몸으로 웃고, 나는 그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

것이, 왜 몇 십 년 지난 이 훗날, 비로소 살아나며 가슴이 저리는 것일까.

이 얘기는 뛰얘기?

이기채가 말을 미리 짚자.

뛰얘기는 이 얘기.

하며 안서방이 이기채를 불끈 들어 등에 업더니, 토방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고는 다

시 누마루에 내려 놓았다.

꼬숩지요?

응.

한양 보겼어요?

아니.

그러먼 한 번 더 태워 디리끼요?

그러더니 그는 이기채를 휘익 들어올려 제 어깨 위에 얹으며 무동을 태워 주었다. 십

여 세라고는 하지만 체수가 본디 작고 실하지 못했던 이기채였고, 충직하면서도 힘

이 좋은 안서방은 이기채라면 갓난아이 때부터 어르고 널아 준 하인이라, 나이는 좀

먹었지만 무동 태우는 것쯤은 가벼운 일이었다.

한양 뵈여요?

아니.

안서방은 꼰지발을 디뎠다.

뵈여요?

아니.

이래도요?

짚신 발가락 끝으로 곤두서며 토방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겅중겅중 오고가는 안서방의

어깨 위에서 바라본 한양은 서산 노적봉이었다. 노적봉에 걸려 이제 막 떨어지려는 저

녁해였다. 그리고 그 해가 물들이 는 매안의 붉은 하늘과, 해를 등진 하늘이 붉어서 더

욱 시꺼멓게 미리 질려 벌써 어둠을 들이삼키던 노적 봉 가슴팍이었다.

그토록 선연하게 타오르며 온 매안을 적시던 석양의 붉은 빛과 어둡고 검은 노적봉의

대비.

옛날에 옛날에요, 어뜬 나무꾼이 하나 있었등게빈디요.

말수 적은 안서방이 그날따라 재미나게 들려 준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묘한 것이었다.

가난허디 가난헌 이 나무군이 나무를 허로 인자 지게를 지고 산으로 들으갔대요. 젊

은 총객잉가 장개 간 장정잉가는 모르겄당만요. 그 소리는 없잉게로. 하이간에 지게

뿔다구에 다가 도시락을 짬매서 걸어 놓 고 땀이 나게 얼매나아 얼매나 정신없이 낭구

를 허다 봉게 로 배가 고푸드래요. 점심 때가 된거이지요.

아앗따아, 다 먹고 살자고 허는 짓인디 조 께 쉬여 감서 밥이나 먹고 해야겄다, 허고는

인자 도시락을 풀었네요. 깡보리밥이지만 그게 어뜨케나 달고 맛나게 뵈이능가 기양

목젖이 떨어질라고 그러는디, 아, 한 숟구락 막 뜰라는 판에, 멋 헐라고, 지 앞에 풀

섶을 봤등게비여요.

어매, 너 누구냐?

나무꾼이 저도 모르게 그만 한 소리를 했답니다.

거그 시퍼렇게 크댄헌 깨구락지 한 마리가 턱을 딱 괴고는 요러어케 나무꾼을 체다보

고 있었등 거이여 요. 똑 사람 보디끼. 떼룩떼룩헌 눈구녁이 툭 튀어나와 갖꼬는 마치

꼭 무신 생각 있는 사람 낯바닥맹이 로 간절허게.

나 깨구락지다.

아, 이런. 이런 변이 있능기요? 그거이 말을 허드란 말이여.

머?

잘못 들었능가 싶어서 이 나무꾼이 다시 한번 그것한테 말을 시켜 봤대요. 아무러먼

세상에 깨구락지가 말을 허겄능기요잉?

너 밥 좀 먹을래?

장난 삼아 밥 한 숟구락을 푹 퍼 갖꼬 그놈한테 어쩌능가 볼라고 주는 시늉을 했당

만요. 머 설마 허니 깨구락지가 사람 말 알어듣고, 밥을 받어 먹겄능가. 나 대그빡에

털 나고 그런 소리 못 들어 봤다 험서.

나 밥 좀 먹을래.

이? 이런 수가 있당가요, 긍게.

허, 내 참. 기가 맥헤서. 야가 참말로 내 말에 대답을 헝거이냐아, 어디 메아리가

돌아온 거이냐. 싶드 랑만요. 그래서 아조 이번에는 그것 주뎅이에다 밥을 바짝 딜이밀

었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