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8권)
혼불 8
15. 세상은 무너져도 좋아라
보다 더 아득한 상고의 내력은 오로지 짐작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남원은 마한. 진
한. 변한이 한강 유역으로부터 남부 일대에 걸쳐 삼한을 이루고 있을 때, 마한의 영역에
속한 부족국가였다.
개국신인 단군 왕검이 천제 환인의 손자요, 환웅의 아들로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
나, 이 상서롭고 아름다운 강토의 북방 아사달에 거룩한 도읍을 정하사, 최초로 단군조선
나라를 세운 이래 이천여 년이 지나니, 고조선은 어느덧 말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한강 아래 남방 일대에는 아직 국가의 형체는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지만 진국
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부족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진국은 강토의 남쪽이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이기 이전의 삼한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던 이 연맹의 부족들이 점점 저의 지리적인 환경에 따라 더욱 결속하고 혹은 멀어
지고 하면서,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이 동아리를 이룬 마한과,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진한, 낙동강 하류 경상남도 서남쪽에 근거를 잡은 변한 등 삼한으로 갈라져 갔다.
이 중에서 가장 넓고 기름진 지역을 그 범위로 삼은 마한은 삼한의 기간이었다. 목지
(혹은 월지)와 백제를 비롯하여 오십오 개 소국들이 서로 연합체를 이룬 마한의 여러 나
라 총 호수는 도합 십만여 호였으며, 이 가운데 큰 나라는 일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호 규모였다.
이에 비해 진한 십이 소국과 변한 십이 소국을 합한 총 호수는 대략 사만 내지 오만이
었다. 그리고 각 국가의 호수는 큰 나라가 사천에서 오천 정도였고, 작은 나라는 육백호,
혹은 칠백 호에 지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이러한 삼한의 칠십구 개 소국들은, 국가라기보다는 각각 자기가 속한 지역에 따라 여
러 부족국가가 모인 연맹체였으니, 이 조그만 부족국가에는 족장이 있어 부족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삼았다. 이 군장의 지휘 통솔 밑에 평지의 사람들은 움집에서 농사짓고 누에
치고 길쌈을 하며, 산간에서는 귀틀집을 짓고 목축을 했다. 그리고 해안에서는 고기를 잡
으면서 부족적 혹은 씨족적인 자치생활을 하였다.
수도를 익산군 왕궁면 일대에 두었던 마한은, 진한인 경상북도와 어깨를 비비는 접
경 지역 남원군 산내면에다 별궁을 지었는데, 그곳이 곧 달궁이라고 노인들은 말했다.
지금은 주춧돌 몇 개만이 여기저기 희미하게 묻히고 누운 흔적과, 묵은 밭뙈기처럼 버
려진 채 그저 평평한 듯한 것이 고작인 모습으로, 무심히 잡초를 다보록 뒤집어쓰고 있는
늦가을 달궁의 별궁터에 서서, 강호는
어여쁜 남원...
이라고 에이게 생각한 일이 있었다.
바람에 쓸리어 흩어지는 검불처럼, 이 자리에 살았던 누군가가 설혹 한때는 눈부시게
불탄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다만 시꺼멓게 가벼이 티끌로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
아니라, 내 선조의 선조와 그 너머 더 먼 선조의 숨결이 스민 자취가 이렇게 지워지지 않
는 터를 잡아 오늘까지도 자국을 역력히 남기고 있다는 것이, 그는 느꺼웠던 것이다.
달궁 옛궁터에서는 이천 년이 넘도록 마한의 온기를 그대로 담은 발소리가 두벅두벅 다
숩게 수런거리며 울려 오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 발소리가 결코 한가로운 것일 수는 없었을 터인데도.
이 달궁의 머리 지리산을 경계로 진한과 서로 국경이 맞물린 곳 정령치, 황령치, 험준
한 봉우리에 마한은 용맹스럽고 지혜로웠던 정장군과 황장군을 파견하여 적국의 침략을
막았다 하는데, 정장군이 주둔하던 곳은 정령치요, 황장군이 지키던 곳은 황령치로서, 아
직까지도 그 이름과 자리가 이토록 뚜렷이 남아 있으니.
깍아지른 험산 준령 첩첩한 지리산의 정령치 꼭대기에서, 강호는 구름의 운해를 허리마
다 머리마다 흰 너울로 감고 까마득히 이랑져 굽이치는 산능선의 검푸른 물마루를 내려다
보며, 저도 모르게 깊이 몸을 떨었다.
바로 그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자리에다 성첩을 쌓고 그 성가퀴 뒤에서 바람 속에
두 눈을 부릅뜨며 외침을 막고자 우뚝 서 있던 정장군의 체온이, 사납고도 그리운 힘으로
순간 그의 온몸에 후욱, 덮씌어 접심이 된 탓이었다.
아마 그 정장군, 황장군을 정령치, 황령치 고갯마루에 파견하면서부터, 마한이 안심이
되야 가지고 별궁을 이 달궁에다가 세우기 시작했을 것이여. 여그가 바로 그 품 아래닝게
로.
누런 앞니마저 다 빠져 버리고 몇 대 안 남은 마을 노인은 그때 일을 마치 눈으로 보기
라도 한 듯이 말했었다.
아무도 데불지 않고 혼자서 그렇게 마한의 옛터를 돌아보던 스무 살의 청년 강호는, 그
걸음으로 내쳐 운봉까지도 가 보았었다. 운봉 또한 진한과의 경계여서 유적이 있다고 들
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운봉에는 놀랍게도 순라로라 부르는 길이 나 있었다. 그것은 운봉면 가산리에서
부터 매요리, 권포리를 거쳐 가장촌 뒤를 돌아서 저 정령치에 이르기까지 상,하 이중으로
확실하게 뚫려 있었는데, 이는 마한이 진한을 방어하기 위해서 일부러 설치한 국경 경비
도로였던 것이다.
국경 경비 도로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눈물 나게 소박한 이 옛길을 따라 마한에서는
수시로 국경을 순시하면서, 진한이 혹시 뜻밖의 순간에 쳐들어올는지도 모르는 사태를 미
리 막았노라 하였다.
그때 깎고 다듬어 뚫은 길이 아직도 이처럼 뚜렷이 남아 있은즉, 이때부터 이미 남원은
남방의 중요한 부족국가로, 마, 진 양국의 경계에서 마한 국방에 요새지를 이룬 것이 분
명하지 않은가.
이 남원이 참으로 묘한 곳이니라.
조부 동계어른 이헌의는 그 무렵에 이제 고보를 졸업하고 청년이 된 강호를 앉혀 놓고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시정의 사람들은 흔히 남원하면 맨 먼저 그냥 춘향이부터 떠올리던 걸요. 또 끝내 춘향
이밖에는 모르고, 학생들조차도.
강호가 이헌의와 마주앉은 그날의 사랑에서 조부에게 웃음 띄운 음성으로 응대하자 이
헌의는 다만
무지해서 그러하다. 모르는 줄도 모르고. 허기는, 모르는 줄을 알면 이미 반절은 아는
것이지. 하더니 이윽고 물었다.
그러면 너는 네 고을 향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냐? 한집안에 살면서 아들을 셋아나
낳도록까지 제 시어미 성씨를 모르는 며느리도 있다더라. 그건 또 양반이고, 어떤 사람
은 돌아기시도록 몰랐다가 위패를 보고서야, 아하, 우리 시어머니가 아무아무 성씨였구
나 하는 사람도 있었더래.
그 말씀 끝에 강호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 그처럼 마한의 옛길을 더듬어 오직
홀로 한 바퀴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마치 입향조께서 낙담하여 맨 처음 이 마을 동구로
들어오시던 길목을 이번에는 후손이 다시 한번 그대로 되짚어 거꾸로 걸어 보듯이.
강호가 더터본 그 늦가을 풀머리 눕는 길들에는 아직도 마한의 바람이 불고, 부족국가
의 눈물겨운 피가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남원을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익명의 세월이 익으면서 부족국가 연맹체들이었던 삼한이 각각 세력을 모아서 진한
은 신라를 세우고, 변한은 가야 제국을 이루었으며, 마한은 백제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섰다.
이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러 문헌에 남원 고장의 이름이 밝혀지기 시작했는데,
최초로 드러난 백제 때의 이곳 지명은 고룡군이었다.
마한을 병합하여 국토를 넓힌 백제는 온조왕 31년에 국내를 크게 남, 북 이 방으로 나
누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이 년 후에 동, 서, 남, 북, 중앙 오 방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각 방에는 달솔이라는 벼슬을 두어 다스리게 하고, 방을 다시 십 군으로 세분하여 군에는
덕솔을 두었다. 그 가운데 특히 큰 대읍에는 담로라 해서 왕자나 왕족을 임명하여 다스리
게 하였는데, 이 남원 옛고장은 남방의 대읍인지라 틀림없이 담로를 임명했을 것이다.
그것은 물경 지금으로부터 천구백여 년 전 일이었으나, 낱말에도 체온이 있는가, 강호
는 이상하게도 달솔, 덕솔, 담로 같은 명칭들이 오늘날의 군수, 도지사보다 더 친근하고
정답게 느끼어져서 속으로 되뇌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후, 백제 오 대 초고왕 31년에는 이 고룡군이란 지명을 바꾸어 대방군이라고 했지.
이때는 어느 때냐, 중국으로 말하자면 후한 마지막 영제때라. 한나라 사백 년 왕업이 영
제에 이르러 극도로 쇠약해지자, 촉한의 유비, 동오의 손권, 위나라 조조가 서로 솥발같
이 대립해서 다투다가, 마침내 위나라가 한, 오를 멸하고 일시 삼국을 통일할 무렵이었
어. 이렇게 중원에 군웅이 할거해서 치열한 싸움을 하는 통에, 요동땅의 공손 강이란 사
람이 고구려로 들어와 가지고 낙랑군 일부를 빼앗아서,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대방군을
세운 일이 있었지. 이 대방군을 세운 것이 초고왕 41년인데, 다음 왕위에 오른 육 대 구
수왕은 우리 고장 이름을 남대방군이라고 고쳤거든. 남녘 남짜를 하나 앞에다 더 붙인 게
지. 원래 이름에다. 아마 공손강이가 세운 대방군과 글자가 똑같애서 구별하려고 그랬을
거야.
강호는 그해 겨울, 아직 전주고보에 다니고 있던 강모와 강태가 종항간에 함께 동절기
방학을 맞아서 매안으로 돌아왔을 때, 모처럼 같이 앉아 무릎을 맞대고 그런 이야기를 들
려 주었다.
삼국유사에는 조위 때에 남대방군을 두었는데 이것이 즉 지금 남원부의 옛 이름이다.
남대방군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나 미치었으니, 이 바다를 가리켜 한해라고 하니라. 고
기록되어 있는바, 한해는 여수 앞바다 남해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남대방
군의 행정관할 구역은 조그마한 읍이나 면 혹은 마을 단위가 아니라, 멀리 순천, 여수
에까지 미쳤다는 말 이 아니겠는가.
국가가 있으면 반드시 국경이 있고 국경에는 늘 병사들이 일으키는 충돌과 분쟁이 그치
지 않는 법이지. 고대 삼국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나 백제와 신라는 마한과 진한
때부터도 그러했지만, 국경을 두고 서로 침범 침입하기를 그치지 않았어. 끊임없이, 크고
작은 것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만치.
이 무렵 백제의 주요 군사기지는 남원에 있었고, 신라의 군사기지는 운봉에 있었다. 두
고장은 바짝 코를 맞대어 숨만 쉬어도 부딪치는 곳이다.
운봉이 그때는 신라 영지가 됐거든. 자고 새면 빼앗고 빼앗기는 접전 전투 끝에 신라땅
이 되었겠지. 그래 신라에서는 백제를 막기 위해 운봉면 가장촌 뒤에 수정산성을 쌓고,
준향리 뒷산에는 준향산성, 장교리 뒤에다는 합민성, 가산리 뒷산에 가산산성, 성리 뒤에
는 성리산성 등등 손으로 다 꼽을 수 없게끔 운봉에다 수많은 성을 쌓고 쌓았지. 이에 대
비해서, 백제는 운봉면 가산으로부터 정령치에 이르기까지 견고 면밀한 답사를 해서 두
겹으로 순라로를 설치하고는 대방군, 그러니까 주로 남원읍에다가 집중적으로 국방시설을
했을 것 아니냐?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러다가 결국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리어 나당 연합군을 조직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린 뒤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통일신라 신문왕 5년에 왕은 이 대방군에다 남원소경을 설치했다. 남원이란 말이 이제
드디어 처음 나온 것이다.
경주를 대경 즉 큰서울이라고 하고, 남쪽에는 남원소경, 서쪽에는 서원소경을 두었어.
작은서울이라는 것이지. 그러한즉 이 남원소경은 전라도 일대를 다스리는 지방 행정의 중
심지가 된 거야. 충청도 일대의 행정 중심지는 서원소경, 청주를 가리키고.
고려 때에는 어찌 되었고?
강태가 공부하는 학동처럼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성격은 남보다 날카로웠지만 또 그만
큼 치밀하여 무엇이든지 알다가 마는 것이 없었다. 명경에 비친 손금처럼 한 손이 한 눈
에 정연하고도 확실하게 들어와야 사물에 대한 직정이 풀리는 사람이 강태였다.
왕건 태조가 즉위한 지 이십삼 년 만이고 후백제를 고려로 통일한 지 오 년 만에 전국
의 행정구획을 재정비했지. 그리고 주, 부, 군, 현의 이름을 일신했는데, 남원소경은 이
때부터 남원부라고 개칭이 됐어.
이 남원부에 속한 다섯 현은 순창현, 임실현, 운봉현, 방수현, 장계현이었다.
그러다가 흥망은 덧없어서 오백 년 고려가 망하고 왕조에 조선이 들어서니, 이때가 태
조 원년 칠월 십칠일.
건국 초기에는 옛제도를 답습하여 그냥 있다가, 태종 13년 시월에 조선 팔도를 새로이
구획지어 정하고 도, 주, 군, 현의 명칭을 고칠때, 전국에 칠십사 개 도호부를 설치하였
는데, 남원부는 이름도 당당한 남원도호부로 승격, 개칭되었다.
전라도에서는 관찰사가 있고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와, 목사가 부임하는 나주말고는 제
일 큰 성읍이 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 때에는 순창현을 비롯한 다섯 개 현만을 관할하던 것이 이제 일 부, 일 군
과 아홉 개 현을 자신의 자락에 다스리게 된 남원도호부.
즉 담양부와 순창군, 그리고 임실현, 무주현, 곡성현, 진안현, 용담현, 옥과현, 운봉
현, 창평현, 장계를 포함한 장수현을 관할하는 남원도호부는 그 규모가 실로 웅장하고,
흥왕한 속에 분주하였으리라.
용성지 기록을 보면, 남원도호부 동,서,남,북 사대문에 수문장이 밤낮으로 지키고 있어
서, 중앙과 각 지방 관원들이 위엄있는 모습을 갖추어, 화려하게 내려오고 올라가는 행차
들 수행과 안내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손님 맞는 공광인 용성관은 공무를 띤 관원들로 날
마다 북적북적 붐비었으며, 이 내객들을 접대하는 데 관수미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 민폐
를 끼치기 쉬운지라, 오직 손님들을 대접하는 소용에만 쓸 비축미를 따로이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하더라.
그뿐이 아니었다.
중앙집권 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조선의 행정이 더욱 견실하게 발전하고 또한 온 나라
가 병자호란을 겪은 뒤라서, 십칠 대 효종 5년에는 전국적으로 군사제도를 쇄신하여 개편
했는데, 이때 우리 남원에는 전라좌영을 두게 됐다.
전라도에는 중, 좌, 우, 전, 후 모두 오 영을 두었으니, 가장 막중한 중영은 전주, 그
리고 좌영은 남원, 우영은 나주, 전영은 순천, 후영은 여산에 있었다.
남원 좌영의 총병력은 마병이 사백삼십육 명, 보병이 사천육백오십칠 명, 장교들에게
직속된 표하병이 이백팔십칠 명, 척후와 정보 정찰을 맡은 당보병이 일백이 명, 수졸 졸
병이 사백구십이 명으로, 총 오천구백칠십사 명의 대군단을 이루어 참으로 그 규모가 어
마어마하였다.
전라좌영이 운봉에도 있잖었어요, 왜?
강태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는 싸움에 관심이 많아, 전에 어려서 무슨 일로 아버지 기
표를 따라 운봉에 갔을 때, 운봉장대 유적이 남은 터를 본 기억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숙종 34년에 전라좌영을 남원에서 운봉현으로 옮겼거든. 왜냐하면 그곳이 경상도와 전
라도를 제압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야.
운봉이 거 중요한 곳이구려.
강태는 눈을 빛냈고, 강모는 나직이 한 마디 하였다.
고을 이름은 아름다운데, 늘 사납게 곤두서서 싸워야 해.
하지만 운봉이나 남원이나 한집안의 마루요, 토방이니까.
남원도호부에 속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영조 때.
이 고장 남원은 뜻하지 아니한 수난을 당하고 말았다.
사실은 내가 이 말이 꼭 하고 싶었다. 이 말을 하려고 그토록 유구하고 융성하고 중요
했던 남원을 꼼꼼히 얘기했는지도 몰라. 그 남원을 알아야만, 이 남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강호는 강모와 강태를 바짝 끌어안는 눈빛으로 두 아우를 얽으며 음성을 조여 줄였다.
영주 16년 경상도 지방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다. 찬구란 사람이 일으킨 것이었지. 찬
규. 그는 비천한 종, 천노, 하예였다.
아니 반란이라면 혁명이었을 텐데 아이들 동네 싸움이 아니고서야 문자도 모르고, 병법
도 모르고, 더구나 학식 덕망도 없을 그런 자가 어떻게 무리를 규합하고, 작전을 세우고,
선봉에 서서 그 무리를 이끌어 싸우게 할 수가 있단 말이요? 의아하여 눈썹을 찡그리며
묻는 강태에게 강호는 대답했다.
고려 때 만적의 난도 있었다.
만적이, 최충헌의 사노?
그래. 찬규도 종이었지. 사노지자. 어느 이름 없는 절에 속한 종의 자식으로 태어난 찬
규는 제 아비처럼 나면서부터 종이었다. 성은 물론 모르고. 그런데 이 찬규는 아주 기골
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더라. 허나 그것만은 아니었으리라.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에 미천한 찬규를 따라 괭이, 삽, 막대기 하나 추켜들고 맨몸뚱이 맨발로 나선다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이니. 그렇게 제 몸 제 목숨 다 던지며 부르짖어 나서게 할
만한, 그 어떤 무섭고 강력한 힘을 그는 반드시 뜨겁게 지니고 있었을 게다.
찬규는 본디 남원의 언저리 조그만 사찰에 매인 사노였으나, 일찍이 그 절에서 도망하
여 자기를 뒤쫓거나 알아보는 이 없을 고장을 찾아 멀리 멀리 산을 넘고 강을 건넜던 것
이다.
그리하여 낯설고 물 설은 고장 영남 지방의 이 골 저 골 골짝진 절을 떠돌아다니면서
승 노릇을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승려가 귀족이었지만, 조선에 들어서서 숭유억불 정책을 행하는 바람에
승려가 그만 팔반사천이 되어 버리잖었어? 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 들이 참 이런 부류에 한데 묶였는데, 찬규는 그나마 또 중의 종이었으니. 나중에야
명색이 승려가 되었다고는 하나, 냉대, 멸시, 짓밟히며 받은 천대가 오죽하였으며,
그것을 말로 다 못하고 흉중에 품은 억울 원통함과,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 소원이
오죽했을까.
천한 노예 찬규는 제 뼈를 지지며 타오르는 먹피 같은 불꽃을 재우지 못한 채, 자기와
함께 울어 울어 그 눈물 모인 파도로 이 잘못된 세상을 여한 없이 뒤집어 버리고서, 대대
로 켜켜이 누르고 조이던 신분의 족쇄를 통쾌하게 풀어 던지며, 부디 이 죄보다 무거운
굴레를 벗고만 싶은 노비, 천민, 상민 들을 은밀히 모으기 시작하였다.
세상을 고치자.
그들은 서로 핏속에다 문신을 새기었다.
그렇다면 그 무너뜨려야 할 파도 위에 뜬 배는 지배계층인 양반, 혹은 기득권을 가진
세력, 또는 그런 것을 만들어 준 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모자랐다. 눈물을 파도를 이루지 못하였다. 파도를 이루지 못한 몇 줌
남루한 눈물이 어찌 저 질긴 닻 깊이 내린 육중한 배를 뒤집을 수 있으랴.
결국 찬규는 변을 일으킨 지 얼마 못되어 관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천 하늘 아래 마른 뱃전 절벽을 향하여 대가리 거꾸로 박으며 부딪쳐 부서지는 물거
품처럼, 찬규는 하찮은 모가지를 칼날 아래 떨구고 죽었다. 참수를 당한 것이다. 선지피
가 시꺼멓게 엉겨 굳은 그의 대가리 머리카락을 거둠거둠 걷어매어 높다란 장대끝에 달아
놓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이 다 그 끔찍한 형상을 보게 한 뒤, 어느 날인가 그것은 없어
졌다. 찬규는 이생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대역무도한 반란 죄인 찬규를 사로잡아 주리를 틀며 조사하는 첫머리에, 그 고을의 원
인 관장은 엄중히 물었다.
네 태생지가 어디냐?
이에 찬규는 대답하였다.
전라도 남원이올시다.
전라도 남원이올시다.
오직 이 한 마디 때문에, 저 아득한 상고로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성벽처럼 굳건하고
위엄있으며, 구슬이나 비단처럼 영롱하고 보배롭게 흥왕하던 남원땅은 하루아침에 죄인의
하급땅으로 강등되어 굴러 떨어지게 되고 말았으니, 그가 태어나 탯줄 끊은 것밖에는 아
무 덕본 것도 인연 지은 것도 없는, 잘나고 차가운 남원에, 떠돌이 종 찬규는 모질게 보
갈이를 한 셈이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한낱 천더기 중의 종이 일으킨 이 반란의 참악한 흉보를 듣고 상과 중
신들이 모두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원은 찬규 같은 흉악무도한 반란자가 난 땅인즉, 오늘로 당장 남원도호부를 폐하고
현으로 강등하라.
고 추상 같은 영을 내리었다.
남원부 온 고을 백성들은 차후로, 이런 패역 죄인의 땅에 함께 난 죄를 부끄럽게 참회하
고 오로지 근신하라. 지명 또한 일후에는 절대로 남원이라 쓰지 말라.
하는 영도 같이 내려서, 남원은 이날로부터 제 고을을 감히 남원이라 부르거나 쓰지 못하
게 되었다.
그리고 천 년 이상이나 변함없는 긍지로 써 오던 지명을 모든 문서에서 깎아 지우고,
대신에 이 고장의 이름을 낯설고 어설픈 일신이라고 고치게 하였다.
말하자면 호남의 웅도로서 위용을 떨치고 자랑하던 남원도호부가 그만 순식간에 일신현
으로 바뀐 셈인데, 전국의 행정 조직인 삼백육십여 주, 부, 군, 현 중에서도 이는 최하
말단 등급의 서열로서, 맨 뒤꽁지에 일컬어지게 된데다가, 반란 죄인이 난 곳인즉, 이 고
을은 등급이 문제가 아닌 천향의 처지로 시궁창에 곤두박히게 된 것이야. 남원이 곧 찬규
가 되어 버린 것이지. 그러니 찬규를 죽었다, 사라졌다, 할 수 있겠어? 마한 이래 이천
년 동안 남방에서 제일 가는 군사의 요충지였고, 정치 행정의 중추였으며, 문인, 달사,
현인, 의열, 충효가 끊임없이 잇달아 나와 문향으로서의 떨기를 천하에 자랑하던 남원,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이 함락될 때에 장렬하게 순절한 접반사 정기원을 비롯한 여덟
충신과 병사들, 그리고 제 고장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서 돌멩이 하나로 마지막까지 왜군
들과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성내의 일만여 명 주민들 시체를 경건하게 묻은 만인
의총이 바로 여기 성스럽고 의롭게 모셔져 있는 남원. 이었지만, 분하고 서러운 사노
찬규의 대가리 하나는 그 모든 역사와 공덕의 무게보다 더 혹독하게 무거웠던가. 저울대
위에 걸린 남원과 찬규의 대가리는 좌청룡, 우백호같이 맞먹지도 못했어. 모가지 떨어진
찬규 대가리가 얹힌 저울판이 아래로 툭 꺼지면서, 남원 놓인 저울판은 공중으로 솟구쳐
치올라 홀깍 뒤집혀 버렸으니. 찬규는 살아서 저를 바꾸 고 싶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죽어서 남원을 바꿔 버린 것이지. 참 엄청난 일이야.
그러나 이 찬규의 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원부 거주자로서 남녀노소 상하귀천 그 누구를 막론하고, 찬규의 이름을 알고 있거
나, 찬규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일이 있는 바, 찬규와 지면이 있는 사람은 가차없
이 모조리 목을 치라. 는 영이 일신현 강등의 파발마를 뒤쫓아 조정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 남원은 단칼에 목을 치는 피비린내와 튀는 피, 단말마의 비명과 지질리는
공포로 살려 달라. 울부짖는 처절함이 너무나도 참혹 낭자하여 온 고을 곡곡이 꼭 아비
지옥, 규환 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물론 이통에 억울하게 희생된 부민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만, 억울하기로 들면 찬규
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게다. 얼마나 처절한 원한이 맺히게 억울했으면 그 죽은 이름이 산
사람 목을 그토록이나 미친 듯이 치게 했으리. 무서운 일이다. 참으로 이런 일은 무서워.
강호는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면서
무서운 일이다.
는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이 불의의 변이 일어난 것은 영조 16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로부터 이백 년의 세월이 흐른 음력 이월 중순이다.
지난날 찬규의 변에 대해서 밤이 늦도록 함께 이야기하던 강모와 강태는 지금 이곳에
없었으나, 강호는 웬일인지 자꾸만 아까부터 그 이야기만은 되풀이 되풀이 생각하고 있었
다. 아니, 그것은 아까부터가 아니었다. 어젯밤 그가 매안에 당도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모처럼 돌아온 고향, 매안의 온 마을에 감도는 살기와 어둡고 음산한 피 냄새, 그리고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머금은 불길함의 검은 어깨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강호는 찬규
의 흐느낌이 귀곡으로 울리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그 울음끝에 걸린 소름이 그의 정수를 송곳같이 꿰뚫었다.
이백 년 전에 이미 죽어 효수당했던 찬규의 목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서 매안에 숨어
울고 있다니.
푸른 힘줄이 돋은 그 울음의 멍든 옹이에 춘복이가 감긴다.
그러더니 찬규와 춘복이는 서로 엉크러들면서 한 몸에 한 얼굴로 겹쳐져 버린다. 그리
고 남원도호부와 매안이 저절로 일목요연하게 비유되며 그들의 반대쪽으로 떠올랐다.
찬규와 남원, 춘복이와 매안, 찬규와 춘복이, 남원과 매안.
그 대비 환영들은 도저히 떼쳐내 버릴 수 없는 주문이나 무슨 예감처럼 강호에게로 파
고들었다.
춘복이 하나 때문에 어쩌면 매안을 송두리째 잃을는지도 모른다. 인근에 떨치던 이 위
세도, 대대로 지켜오던 명예도, 그리고 그런 날은 뜻밖에도 그다지 멀지 않은 장래에 닥
쳐올는지도 모른다.
강호는 아무리 해도 춘복이 얼굴과 형상에 연이어 당골네 백단이, 무부 만동이가 덕석
말이로 너덜너덜해진 몸뚱이에 피칠갑을 한 채 절룩이며 날 저무는 매안에서 쫓겨 나가는
모습과, 그 걸음으로 다시 매안을 향하여 그들이 중음신 그림자들처럼 걸어 들어오는 환
영을 지우기 어려웠다.
(원한같이 무섭고 깊은 것은 없건만, 왜 그 씨앗을 산야에 저토록 많이 뿌려, 두려운
줄 모르고 칡과 등이 자라나게 하는가. 그 원한의 줄기와 뿌리가 서로 뒤얽히어 뻗으면
태산 명산이라도 숨막히어 기가 끊기고, 무쇠 철기와 지붕이라도 그 등걸에 짓눌려 무너
지고 말 터인데, 그래서 다 척지지 말라, 했을 것인데.) 강호는 찬규의 대가리와 춘복이
의 몸뚱이 그리고 백단이와 만동이의 봉두난발이 서로 칡뿌리와 등넝쿨처럼, 피울음으
로 또아리져 켜켜이 엉키는 것을 눈앞에 바로 보는 듯 했다.
그렇게나 장하고 아름다운 남원의 위용과 넓은 품을 두고도, 어느 갈피 한 자락 그늘에
다 그 하찮은 찬규 하나를 품어 주지 못했던 용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토록 단호하게 몽둥이를 내리쳐 그 누구도 넘보거나 접근하지 못하게 서슬을
세우는 매안의 배타는 또.
(이런 세상은 반드시 바뀌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마구에 바뀌고 말 것이다. 그 징
후는 이미 도처에 보이고 있다.)
강호는 잠을 못 이루렀다.
(내가 이 세상을 향하여 세운 이상을 나는 꼭 실현해 내고 싶다. 비천하고 상스러운 하
천의 폭동 보복이 두렵다거나 그 계급에 대한 기득권자의 측은지심 연민 때문이 아니라,
당당한 이상으로서, 인간이 지행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세상을 이 땅에 나는 이룩하고
싶다. 비록 작은 힘이지만, 사람 하나의 진정한 뜻과 올바른 마음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
리라.)
잘못되고 부서진 것들은 복구되어야 한다.
제도와 관습이라는 허울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빼앗아 박살하여
버린 횡포는, 마땅히 역사와 사회로부터 철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와 환경을 모든
인간 앞앞에 각자의 몫으로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것을 받은 자가 제 몫을 어떻게 쓰든지 간에.
남원도 다시 복원이 되었다.
그 참람한 일이 일어난 지 몇 해가 지나고 나서, 홍문관 옥당의 홍익삼이 유서 깊은 남
원부가 강등된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던 중, 저간의 사정을 상세히 조사한 결과 부민들
의 억울한 사연을 알게 되어, 영조 26년에 적극적으로 남원부 호를 되돌려 찾도록 있는
힘을 다했다.
비록 세월은 지났다 하지만, 그의 이름만 들었다 하여도 그 자리에서 참수를 할 만큼
흉악 끔찍한 찬규의 변에 관하여 언급을 하고, 나아가 그 벌을 받고 있는 남원의 이름을
원래대로 복구하자, 운동하는 것은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충정은 참으로 진실하여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는지라, 마침내 이해 사월
초닷새날, 상께서는 친히 중신회를 열고
남원부 복호에 관한 여러 대신들의 뜻은 어떠하오?
하문하시니, 회의에 참석한 좌의정 김약노, 우의정 정익량, 이조판서 김상노, 병조판서
이대보, 형조판서 조재호 등 대소신료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남원부 복호의 타당함을
아뢰었다.
이에 상께서는 곧 홍익삼을 부르시어
남원부 복호를 선포하라.
고 명하였다.
이름이 깎이어 없어지고 고을이 강등된 지 실로 십 년 만의 일이었다.
얼마나 좋았을까.
강호는 문득 그날의 남원부 부민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참말로 쾌활하고 즐거웠으리라.
그러나 홍익삼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그 일이 쉬웠으리야.
강호는 밤바람에 이마를 맡기고 원뜸의 솟을대문 문간에 서서, 메마른 어둠이 숯가루같
이 쌓인 고샅과, 불꺼진 숯막보다 더 괴괴하게 엎드린 매안의 지붕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기채의 사랑에서 나오다가 콩심이 전갈을 받고는 다시 되짚어 들어가 효원을 만나고
나오는 강호는, 집으로 가는 골목을 그냥 지나치면서 두벅두벅 걷는다. 인적이 끊긴 고샅
에 그의 구두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다. 그것은 마을이 숨을 죽이고 있는 탓인
지도 모른다.
중뜸을 지나, 휘엇하게 뻗어오른 적송이 몇 그루 별도 없는 밤하늘의 희뿌연 천공에다
검은 구름덩어리마냥 머리를 두른 모퉁이를 돌아 지나고, 아랫몰 끄트머리에 다다른다.
아이고 서방님, 언제 오셨능기요오?
손에다 당그래를 든 채로 막 제 집에서 나오던 임서방이 깜깜한 중에도 얼른 이쪽을 알
아보고 허리를 굽신한다. 그의 낫낫한 목소리에서는 반가운 기색이 묻어났다. 그는 강호
를 보면 나이는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리지만 이상하게도 흠모의 마음이 저절로 고이는 것
이다. 그것은 반촌에 빌붙어 사는 일개 타성으로서, 상놈이 양반을 우러르는 그런 마음하
고는 다른 것 같았다.
그냥잉, 나맹이로 산전수전 다 저끈 인생이 독자갈 소리 따글따글 냄서 살자먼, 머 그
렇게 인자는 부러울 것도 그리울 것도 애터질 것도 없이 그냐앙저냥 살아지는디. 사리반
서방님을 뵈먼잉, 이런 인생 마음에도 왜 그렁가 머이 화안허니 틔이는 것맹이그덩. 이러
어케 문앞으로 지내가시는 것만 뵈어도 기양 가슴이 박하 먹은 것맹이로 왜 화아허니. 잉?
내 말 알겄어?
한번은 임서방이 어서방한테, 강호의 뒷모습이 저만큼 아랫몰 아래 냇물을 건너가는 것
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 일도 있었다.
모르겄어, 왜.
어서방도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일부러 눙을 쳤었는데, 참 아쉬운 것은 강호
가 매안에 있는 날보다 동경에 있는 날이 더 까맣게 많은 점이었다.
음. 어제
강호가 대답한다.
말씀은 들었그만이라우. 저물으셋등게비네요. 지가 못 뵈인 것이.
그랬네. 집안은 다 무고한가?
즈그 같은 것들이야 머 탈날 거이 있능기요? 목숨이 정승인디요. 살어만 있으먼 되지
요. 객지 타국에서 불철주야 공부허시니라고 외나 서방님이 애쓰겼을 것이네요. 세상도
시끄런디.
고마울 말일세. 아니 그런데 왜 밤중에 당그래는 들고? 아, 예에, 이거요? 저그 저 어
서방이 부엌에 재 긁어 내다가 즈그 당그래 모가지가 매급시 툭 빠져 부렀다고, 어뜨케
조께 잘 박어서 고쳐 써 볼 수 있으끄냐고 아까 갖꼬 왔 길래, 저엉 때요, 밥 먹고 나
서 앉어 갖꼬 또드락또드락 해 봉게로 머 기양 임시벤통을 헐 만허겄어서, 시방 갖다
줄라고 나옹만요.
그래 임서방이 본디 솜씨가 좋지.
에이, 머 솜씨랄 것이 있능교오, 우습지. 근디 서방님은 날 다 저물었는디 어디 가싱가요?
임서방은 강호와 마주서서 이야기 나누는 마음이 좋아서 자꾸만 말을 붙이고 싶어한다.
강호도 그런 임서방을 홀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 가는 길이냐는 말에는 대꾸를 안한
다. 그리고는 대답 대신 걸음 옮길 기색을 보인다. 그러한 몸짓에 눈치 빠른 임서방은 자
기가 주제넘었다는 생각이 드는지 얼른 말꼬리를 접는다.
아직은 야기가 찬디요.
그렇구만.
강호는 발을 뗀다. 그리고 아랫몰을 빠져 나와 소리 없이 냇물을 건넌다. 그는 거멍굴
로 가고 있는 것이다. 깊어진 밤의 어둠은 그를 거멍굴 우묵한 복판으로 수욱 빨아들이더
니 너울로 감추었다.
위험할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었다.
짐승같이 성난 거멍굴의 분원이 뜻밖에 제 발로 나타난 강호한테로 쏟아져, 쇠도리깨
곡괭이를 내리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밤은 깊고 매안은 멀며, 거멍굴 사람들은 한
무리로 여럿이고 강호는 혼자인데, 만일에 순전히 힘만으로 덤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
는 아가리로 그는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공배네를 토방에다 세워 둔 채로 보란 듯이 옹배기에다 미영걸레를 담아 가지고 나왔던
옹구네는, 투닥투닥 방망이질 몇 번을 시늉으로 한 뒤에 다시 춘복이 농막으로 들어간다.
자알 헌다. 오밤중에 방맹이질허고, 귀신 불를 일 있능가? 그네가 하는 일마다 못마땅
한 공배네는 방망이 소리보다 더 크게 혀를 찬다. 그리고는 옹구네 따위야 무어라고 하
든지 말든지 지게문짝을 잡아당겨 덜크덩 열고는 방안으로 들어선다.
그 소리에 놀란 미영씨 기름 등잔의 심지가 펄럭하는데, 춘복이가 얼핏 눈을 뜨는 것처
럼 보였다.
아이고 야가 정신이 드냐 어쩌냐.
공배네는 깜짝하는 반가움에 얼른 춘복이 옆에 바싹 다가앉는다.
춘복아. 야. 눈 떠 바아.
잘못 본 것인가 싶게 여전히 부어터진 눈두덩을 무겁게 닫고 있는 춘복이 눈자위를 뚫
어지게 들여다보며, 공배네는 행여 아차 옹구네한테 춘복이 눈뜬 모습을 빼앗겨서는 안되
는 사람같이 다급하게 말한다.
아이, 나 누군지 알겄냐? 응? 내 소리 딛겨?
공배네는 애가 타 춘복이 귀에 대고 거푸거푸 풀무질을 한다.
저노무 여펜네 들오기 전에 내가 꼭 너한테 헐말이 있단 말이다.
그렁게 내 소리 딕기먼 눈 쫌 떠 바야.
아니 그렁게 니가 머이 모지래서 어쩌다가 저런 홀에미 더런 년 불여시한테 잽헤 갖꼬
옴짝달싹을 못험서, 내가 저년 눈치를 저렇게 보게 맨드냐아, 긍게. 저년 속은 내가 알
수가 없고 저년 재주는 내가 알 수가 없단 말이다. 정신채려라아. 잉. 정신채려어. 여시
한테 홀리먼 우선은 좋겄지만 종당에는 혼 다 뺏기고 간 다 멕히고, 죽능 거이여. 죽어
어. 이놈아. 아이고. 폭폭허고 속상해서 꼭 내가 너보돔 몬야 죽을랑게비다.
맞아터져 아픈 자리 걱정보다 옹구네 때문에 상한 속이 더 분하고 아파서, 공배네는 춘
복이를 붙들고 입속으로만 궁얼궁얼 누르며 한숨 범벅이 된 말을 굴리고 짓이기고 하였다.
저녁은 잡샀소?
어느결에 옹배기를 들고 들어선 옹구네가 언제 내가 퉁명스러웠느냐는 낯빛으로 감치게
묻는다. 공배네는 그 옹배기의 물을 쳐들어 옹구네한테 쫙 찌크러주고 싶은 충동을 참는
다. 공배네로서는 늘 당하는 일이지만, 옹구네의 그 천연스러움을 도대체 이길 수가 없었
다. 그래서 늘 돌아앉아 부글거리었는데. 오늘은 안될 일이었다.
저녁? 자네 참 한가헝갑네에?
목소리에 갈고리가 걸려 있다.
한가나 마나. 나물 먹고 물 마셰도 먹기는 먹어야 살제. 냉수 먹고 이빨을 쑤셰도잉?
내가, 저녁이다아, 허고 먹으먼 그게 저녁잉거이제 머.
입심도 좋아.
우리 어매가 나 뱄을 때 아매 가난해서 밥은 못 먹고 맨 풀칠만 했등게비지. 긍제 내가
뱃속으로서부텀 입에 풀이 올라 갖꼬 그렁가아?
그런 씰닥쟁이 없는 소리는 딛기도 싫고.
그러먼 머언 보드란 소리를 해 디리까요잉? 요렇게 마실이랑 오셨는디. 손님 대접 헐
것도 마땅찮고.
머? 손니임? 손님은 저나 나나 마찬가지제 내가 무신 손님? 인자 이 사람 일어나먼 몰
라도, 그때끄장은 내가 경황이 없잉게로 성님이 이해를 허겨 어. 콩팔칠팔 숭보지 말고.
아니, 이노무 여펜네가 시방 누구를 데꼬 노능 거이여, 머여? 애들 장난도 아니고. 능
구렝이 담 넘어 가디끼 살살 넘 약올려 감서 머얼 어쩌겄다능 거잉고? 잉? 경우지고 아능
것도 많은 자네가 어디 말을 좀 해 바. 머얼 어쩌겄다는 거인지.
옹구네 수작에 드디어 화통이 터진 공배네가 앞뒤 없이 맞대거리고 정면을 치자, 옹구
네는 샐쭉한다.
머얼 어쩌다니요?
아 그렁게 속 시연허게 말을 다 털아 놔 봐. 차라리. 아예. 그러먼 그런 줄이나 알게.
아니, 외나 내가 성님한테 물어야겄네? 머얼 듣고 잡은 거인지? 나는 암만해도 모르겄
잉게.
꼭 내가 내 입으로 말을 해야겄어?
헤기 싫으먼 내비두시요오. 나는 까깝헐 거 하나도 없소. 아쉬운 사램이 시얌 파드라
고., 머.
자네 이러기여?
아 긍게 머얼 이러기냐고요오. 하 참. 나는 모르겄다는디이. 성님 말을. 알어듣게 말을
해 바요오, 긍게.
공배네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린다.
묻는 내가 미친년이지.
그래, 내 더 긴 말은 안 물어 보겄어. 그런디, 내가 꼭 알어얄 일 있어서 왔는디.
알어얄 일 없으먼 머 못 올 디 외겼소? 아까부텀 자꼬.
공배네는 이제 더 물러설 수가 없었다. 머뭇거릴 수도.
자네 집에 오류골댁 작은아씨 뫼세다가 뉩헤 놨든디. 그거 먼 일이여? 항아장시 말로
는, 자기가 비접 뫼시고 가야 허능 거인디 사정이 그렇게 안되야서 만부득이 자네 집에
메칠 기실 거이라고 허등만. 대관절 어뜨케 된 사정잉가? 자네가 직접 둥구나무 밑에서
업고 왔다든디.
사실은 어젯밤 강실이를 본 순간부터 춘복이와 옹구네 사이의 사정보다 더 궁금하고 두
렵고 알 수 없는 일이라. 그에 관해서는 차마 먼저 말을 못 꺼냈던 공배네가 드디어 물었다.
소상히 자알 들었그마는 머이 더 알고 잡소? 성님은 애들맹이로 무신 궁금헌 일이 그렇
게도 많응고? 참 ㅈ소예? 힘이 남능게비네.
이게 그렇게 넘어갈 일이여 시방? 매안에서 알게 되먼 바로 그 당장에 모조리 다 끄집
혀 가서 물고가 날 일이 벌어지고 있는디. 덕석말이 한두 사람 당허고 말 일이 아니겄그
만, 이게 어디 예삿일이라고 그렇게 태평헌 소리를 허고 자빠졌디야? 금방, 당장에, 떼죽
으로 끄집헤 가서 저 송장이 다되야 갖꼬 온 것을 봄서나도.
애민놈 저테 베락맞는단 말도 몰라? 무단히 죄 없이 옆에 섰다가 날베락 뒤집어쓰능
걸. 춘복이 보고도 모르겄어? 왜 투장은 만동이 백단이가 했는디 춘복이는 짹소리도 못허
고 저 지경을 당했간디? 베락이 치먼 손잡은 놈은 다 같이 떼죽음당허는 거이 이치여. 이치.
그럴 일은 없을 거이요.
어찌 그리 장담을 허능고오?
그래 내가 속 시연히 이애기허먼 혼자만 알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비밀을 지키실라요? 그
럴 자신이 있소? 아매 못허실껄?
아니, 옹구네맹이로 입이 싸고 ㅅ이 얕은 야발이도 지키는 비밀을 내가 못 지키게 생겠
어서 다짐을 받능가?
나허고 성님은 또 달체.
다르다니?
그 속은 나중에 알 것이고.
그러먼 나중에 알 건 알토란맹이로 냉게 놓고 시방 알어도 되는 것부텀 얼릉 말을 해 바.
옹구네는 공배네 옆으로 조금 당겨 앉는 시늉을 하며 목소리를 차악 낮추었다. 그러면
서 힐끗 춘복이를 쏘아본다.
작은아씨가 시방 태중이요.
그 말에 너무 놀란 공배네는 옹구네 기색이나 눈구녁 살필 생각은 엄두도 못 낸 채 뭐
라고?
라는 말조차 가슴뼈에 덜컥, 걸려 토해 내지 못하며, 아악, 벌린 입을 못 다문다. 그러
는 공베네 얼굴이 까맣게 질린다.
그렇게만 알고 지시요. 나는 그 속을 소상히 알고 있지만 그 말이야말로 시방 내가 입
밖에 내먼 너 죽고 나 죽고. 그 말 들은 사람도 죽소. 그렁게 더 알라 말고. 필유곡절에
무신 사정이 있능갑다만 짐작허고 계시요잉. 그러고, 작은아씨 기맥힌 사정을 내가 돕고
있단 것만 아시고.
아까 두 아낙이 서로 춘복이 곁에 앉아서 티각태각 말씨름을 시작할 때부터, 어렴풋이
정신이 들어 혼곤한 춘복이의 귀에도, 가물가물 그 말은 들리었다.
그는 부어터져서 철갑같이 잠긴 눈도 떠지지 않고, 매맞은 몸뚱이가 천 근이라, 바윗덩
이를 마주 문 입술도 벌어지지 않았으나, 오직 두 가지 사실만을 뚜렷하게 짚어 낼 수가
있었다.
작은아씨 강실이가 지금 거멍굴의 옹구네 닙에 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네가 지금 아이를 배었다는 것.
아아, 세상은 무너져도 좋았다.
16. 뜻이 가는 길
남원이 찬규로 인해서 일신현이 되었던 게 불명예라면, 그와는 반대인 경우도 전고에
많았다. 한 고을에 죄인이 났을때 고을 전체가 강등되어 버린듯 ,훌륭하고 어진 이가 나
오면 고을이 격상이 돼. 어떤 집안에 문짜 시호가 하나 나면 설령 그가 벽성이었다 할지
라도 그 성씨는 그날로 파벽이 되고, 또 그의 고향고을이 무반향 이었더라도 하루아침에
미천한 처지를 벗어 반향으로 파벽되니. 광채가 찬연하지. 문짜 시호가 그만큼 무섭고 귀
한것이다. 받기 어려운 것이고. 그러한 시호를 나라에서 내릴 만한 인재를 배출할 성씨와
고을에 대한 응분의 대접이 격상일 것이다. 또한 그만하신 인재라면 능히, 그 어떤 거칠
고 궁벽한 성씨나 고을일지라도 자신의 덕망과 학문으로 교화 선도해서 어질고 의롭게 이
끌었을 터이니, 당연한 상 아니겠느냐.
전에 어느 날 조부 이헌의가 들려준 말들이, 어둠속에 거멍굴로 들어선 강호의 귀를 누
른다. 무겁다.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저어 남도 화순에 능주 말이다. 그게 원래는 능성현이었는데 능
주로 승격된 곳이니라. 본디 어떤 고을 이름에 전주, 공주, 이렇게 고을 주짜 들아가는
이름이 붙은곳에는 관찰사가 부임을 허는 법이다. 종이품 감사로 문관직이면서 절도사
직책을 겸한 지방장관이 관찰사라.
관찰사가 집무하는 관청을 감영이라 하였다. 감영은 팔도에 각기 하나씩만 있었는데,
그 감영의 소재지 명칭에 고을 주짜가 들어갔던 것이다. 물론 경상도 안동이나 달성, 혹
은 함경도의 함흥, 영흥, 또 평안도의 평양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그런즉 행정의 역할이나 고을의 규모가 다른 곳과는 비교가 안되리만큼 크고 중요한 곳
이며 유서 또한 깊은 곳이 바로 이 감영 소재지들 이었다. 그래서 이 고을 주짜 주민들은
자긍심이 대단하였다.
허나 나주같이 관찰사 없는 주에는 목사가 수령으로 갔다. 목사는 정삼품 관원인데 각
고을에서는 으뜸 벼슬이지. 전국 팔도에 스무명을 두었느니. 전라도에 목사는 네 명이 있
었다.
그 다음 단계는 부였다.
부에는 부사가 부임을 해서 다스렸는데, 남원같이 대도호부가 있는 곳에는 정삼품관이
왔고 일반 도호부에는 종삼품이 임명됐다. 그래서 남원의 관장을 남원부사 그러지 않느
냐.
끝으로 중앙에서 임명하는 지방장관으로서는 가장 낮은 등급이었던 현감이 부임하여 다
스리던 곳이 현이었다.
이 현에도 두 가지가 있어, 작은 소현에는 종육품 현감을 두었고, 그보다 좀 큰 대현에
는 종오품 현령을 두었니라.
어쨌든 행정단위로 가장 작고 하위 말단이었던 능성 현이 가장 크고 높은 능주로 된
것은 오로지 정암 선생 때문이었다.
고 이헌의는 말했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정암 조광조.
그는 일찍이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주례의 육경을 연구하여 성리학에 통달했
던 문경공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근공정진 성리학 연구에 힘써, 스승의 스승
이었던 정필재 문충공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는데.
왕의 지극한 신임을 받은 그는, 이상적이고 도학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고자 삼십대 신
진사류 소장학자들과 더불어, 종래로부터 내려오던 여러 관습의 악폐와 모순을 주자학에
의거, 과감히 뜯어고치는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진정으로 이 땅에 참된 도를 세워 하,
은, 주 삼 대 와 같은 지치의 왕도정치를 통한 군자의 세상을 이루어 보고자 하였으나.
진작부터 뿌리 깊은 세력을 가지고 있던 보수 훈구파의 음해 적대와 강력한 반발을 사
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특히나 조정 공신의 사분지 삼을 차지하고 있던 훈구 대신들 일
흔여섯 명의 공신호를 조광조 일파가 박탈하자, 이에 놀란 남곤, 심정 같은 훈구 대신들
은 조광조를 모략 중상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더욱이 조광조가 이론에만 치우쳤던 지난날의 과거제도 대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관
리를 뽑고자, 새로이 현량과를 실시하여 관리를 채용한 것에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
과거에 선발된 백이십 명이 거의 모두 조광조 일파의 신진사류였던 탓이다.
그때 시정을 비판하고 모든 관리들을 규찰하여 억울한 것을 바로잡아 주는 감찰 관청
사헌부의 최고 관직으로, 대헌 이라고도 하는 정이품 대사헌에 올랐던 조광조는, 대사헌
이 된 지 불과 이삼 년 안에 벌써 나라의 기풍을 쇄신하여, 벼슬아치들에게서 청탁과 뇌
물을 씻어내고, 백성을 오직 덕으로 다스리자, 선비들은 그를 선생으로 존중하고 백성들
은 다시없는 상전으로 우러러 받들었다.
그러니 자연 따르는 무리가 반상간에 구름을 이루었다.
이러한 명망과 정황을 남곤, 심정이 모를 리가 있으랴.
그들은 딸이 희빈으로 중종을 모시고 있는 홍경주와 함께 왕에게 날이면 날마다 궤계를
부려 참소하였다.
조광조 일당이 간사스러운 속임수로 정치를 어지럽게 하니 처벌하소서. 종묘 사직이 위
태롭습니다.
그들은 또한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등에 업고 괴이하
게 일을 꾸미어 왕에게
조광조가 공신들을 제거하고 임금이 되려 하옵니다.
하는 모함을 하도록 했다. 아비 홍경주의 사주를 받아 일을 감쪽같이 도모한 희빈 홍씨
는, 아무도 모르는 깊은 밤에 경복궁 함원전 뒤뜰 배나무 잎사귀에다 꿀물 섞은 배즙으로
주초위왕.
이라 써 놓았다.
하늘은 무심하여 벌레한테 조광조를 내주고 말았던가.
단맛을 좇는 벌레들은 꿀 묻은 글자 생긴 모양대로 잎사귀를 파먹었다.
희빈 홍씨는 그 잎사귀를 쟁반에 따서 받쳐들고 대전으로 나아가 이것이 바로 조씨가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흉악 불길한 예언이며 참람한 변괴의 징조이올습니다.
하고 짐짓 두려움에 떨며 아뢰었다.
주와 초를 이으면 조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중종은 실로 기이한 현상인지라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조광조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훈구파들의 끈덕진 무고가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는 거의 위협에 가까운 논조로 왕을 몰아세우자, 그간 조광조의 도
학적인 언행에 은근히 지쳐서 염증을 느껴오던 왕이 마침내 그를 투옥하여. 결국 엄청난
기묘사화를 일으키고야 말았으니. 훈구파들의 강경한 주장으로 조광조 일파에게는 모조리
사약을 내리거나 배소에 가시나무고 울타리를 쳐 위리안치를 시키고, 절해고도 외딴섬에
절도부처 귀양을 보내었다.
이때가 중종 14년.
정암은 억울하게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뒤 인종 지나 명종 지나 실로 오십 년 만인 선
조 초에야 드디어 신원이 되어,사훙에나마 영의정에 추증되고는, 기묘명현으로 문묘에 배
향되었는데. 시호는 문정공이시다.
헌데 능주와는 무슨 연관이 있길래요? 그 어른이 귀양을 간 곳이 바로 능성현이었다. 거
기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지. 그처럼 크고 훌륭한 이의 고초와 죽음을 받아 안은 고장이
라, 훗날 정암 선생 신원 후에 고을도 함께 승격이 된 것이다.
아아, 그러합니까. 그때, 사사되실 때, 선생은 몇 살이셨을까요? 서른여덟이었느니라.
강호는 묵묵히 그 나이에서 제 나이를 헤아려 빼 보았다. 아직 스무살 청년이었던 강호한
테도 서른여덟은 너무나 젊고 아깝게 여겨졌던것이다. 비록 필부라 할지라도 죽기에는 이
른 나이 아닌가. 하물며.
(뜻을 가진 사람이 살기에 세상은 알맞지 않은 곳일까. 뜻이 가는 길은 평탄치 못하
다.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 김종직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사사되고, 그의 스승 김종직은 무오사화 때 조의제문으로 부관참시를 당하여 두 번 죽
었다. 그리고 조광조는 기묘사화에 사약을 받았다. 이렇게 사제 삼 대가 모조리 죽어 참
화를 당하고도 그뜻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여,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물론
세월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들의 원통한 죽음은 신원이 되었다. 허나, 명예가 회복되었다
고 해서 그들의 꿈도 회복되었을까. 비록 죽은 이의 이름은 다시 찾았으나, 주인의 몸을
잃은 꿈은, 피 토하고 고꾸라진 그 꿈은, 중음신이 도어 역사의 중천을 떠다니고 있는지
도 모르지. 서른여덟, 조광조. 정말 그때부터는 경륜을 다하여 한번 대장부의 뜻을 포부
대로 펴 볼 만했을 터인데. 때를 얻지 못하고 버리는 목숨의 사무침이여. 뜻의 불우함이
여.)
강호는 흰옷 입은 조광조의 마지막 모습이 사약 사발과 더불어 떠오르는 형영에 이상한
그리움과 흠모로 가슴이 미어졌다.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세상을 바꾸어 이 땅 위에 새롭게 세워 보고자 하는 꿈
을, 그 순간 강호는 그렇게 그리워하며 흠모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형체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은 간절하였다.
(아름다웠으리라.)
구체적으로 누구와 닮았다고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그는, 살빛이 희고 맑았을 조광조의
옥골 선풍 얼굴과 단아 고결한 풍채, 그리고 혁신의 꿈에 펄럭이던 도포와 넉넉한 소맷자
락, 끌어당겨 서책을 읽고 글씨를 썼을 서안이며, 그의 음성까지도, 혼자서 역력히 그리
어 몸으로 느끼며 체감하려 하였다.
(그 아름다운 이가 숨을 거두어 마지막 몸을 의탁한 곳이라면, 마땅히 그 고을은 승격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옳은 일이다.)
불빛이 까우러지는 오두막이 저만큼 보이는 거멍굴 근심바우 밑에서 강호는 문득 발걸
음을 멈추며 골똘히 그 생각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홀로 고개를 깊이 주억였다. 그러더
니 이내 좌우로 젖는다.
(어리석다. 한 나라를 이끌어 올릴 지렛대를 그 하찮은 꿀 몇 점으로 징표 삼아 부러뜨
려 죽이다니. 참으로 군자의 취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간특한 소인배 신하와 후궁들에게 어이없이 휘둘린 그날의 임금을 한탄스럽게 생
각하였다.
임금의 어둠은 온 나라의 운명을 어둡게 하는 법.
주초위왕 글자를 촘촘히 갉아먹어 납작없이 귀신의 희롱을 나타낸 배나무 잎사귀를 뚝
따다가 임금 앞에 들이밀어 보여 주면서
조씨가 장차 왕이 될 것이라 합니다.
했다 한들, 어찌 한 나라의 군주로서 그런 어린애 장난 같은 잔꾀에 넘어가 충격을 받고,
일세에 다시 나기 어려운 학자요, 어진 신하를 의심하여, 결국은 죽이기까지 할 수가 있
단 말인가.
(허나 사람을 얻고 잃는 것도 다 국운이리라.)
한 개인의 운수가 곧 국운으로 이어지는 인물이란, 길흉간에, 저 혼자의 힘만으로 나고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호는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어떤 것이 누구의 집인지 내가 알 수가 있나.)
어둠에 익은 눈으로 거멍굴 오두막들의 곰삭은 버섯 지붕 짚시울을 더듬어 본다. 그러
나 한번도 직접 와 본 일이 없는 천민촌에 발길도 낯선 고샅을 어떻게 디뎌서, 누구에게
로 먼저 가야 할지, 그는 잠시 막막하였다.
정암 조광조는 신분을 탓하지 않고 혜화문 밖 갖바치와 여러 해 동안 상종하며 교분을
나누었는데, 갖바치가 조정의 재상을 찾아갈 수는 꿈에도 없는지라. 늘 조대헌이 밤이면
미복을 하고 갖바치를 찾아가서 오래도록 마주앉아 이야기하다 가곤 하였다 한다. 그 갖
바치가 예사 사람이 아니라 문식이 놀랍고, 언행 거동이 반듯하여 사대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며, 경서와 사서, 제자류, 시문집에 밝고 식견이 높은데다가, 앞날을 예견하는
요량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놀랍게도 그때 당시 이조판서였던 이장곤 또한 그
갖바치를
나의 선생.
이라고 존중하며 미편을 하고 찾아 다녔다지만.
지금 강호가 그 흉내를 내고자 여기 바가지 속 같은 천민촌 거멍굴 어둠 속에 서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누구여?
어둠 저쪽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놀란 듯 경계하는 듯한 음성이 불쑥 튀어나온다.
나이 든 아낙의 목소리다. 강호는 순간 그 기척이 반갑다. 그래서 얼른 그 소리난 쪽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그러나 소리 임자는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쪽이 낯선가 보다.
크흠.
강호가 적의 없는 마른기침을 하며 상대방 마음을 누구리고는 두벅 두벅 몇 발짝을 걷
자, 아낙도 사람 오는 것 안다는 시늉으로 공연히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는가 싶더니 누구
대요?
다시 묻는다. 아낙은 공배네였다. 평소 같으면 조심성 많은 그네가 그럴 리 있었을까
만, 지금은 막 농막에서 옹구네한테 됩대고깔로 호되게 당하고 오는 길이라, 봅시 분이
받쳐 머리 속이 후끈거리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거기다가 천만 뜻밖에도
강실이가 아이를 뱄다.
는 날벼락 같은 말까지 겹쳐서, 난마처럼 뒤얽힌 정신에 얼른 쉽게 강호를 못 알아본 것
이다. 그가 거멍굴 사람이 아닌 것만은 직감으로 알아챘지만, 아직은 엊그제 사건에 놀란
속이 진정되지 않은 끝인지라. 이렇게 밤 깊은 시각에 낯선 사람 비치는 것이 왠지 두려
워, 그네는 지레 오그라진다. 그래서 강호가 코앞에 바싹 다가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
았다. 마치 독사 본 개구리처럼.
아이고, 서방님. 아니, 여그, 어쩐 일이싱기요잉?
드디어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본 공배네는 정말로 놀라서 황망히 두 손을 맞잡으며
굽신 허리를 꺾었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몸둘 바를 몰라하며 떠듬떠듬 겨우 그 말을 한다.
(아니, 참말로 이게 웬일이까잉. 매안이 어디고 거멍굴이 어디라고 사리반서방님이 몸
소 여까지 외겨어 긍게. 필시 무신 곡절이 있을 것인디 그거이 머이까. 만고에 없든 일을
어찌허시꼬. 우리가 매안으로 올라가도 차마 낯 딱 치키들고 마주뵙기 에러와서 고개를
땅에 박어 쉭이고 설설설 기어야는 서방님이, 이 아닌 밤중에 기별도 배행도 아무껏도 없
이, 생전 첨 오는 낯선 질을, 왜 시방 암행어사맹이로 살째기 저러고 오시능 거이냐고오.
긍게로. 일난 동네에.)
얼른 몰라봤더니 아는 얼굴이로구만.
강호가 먼저 운을 떼었다.
예에, 에. 지가 외나 몬야 알어뵈야는디 기양.
맞잡은 두 손을 비비는 공배네는, 묻지 못해 속을 알 수는 없었으나 우선 그가 다른 매
안 사람 아닌 사리반서방님인 것에 그래도 마음이 좀 놓인다. 그라면 결코 모진 일 하러
오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였다.
밤도 짚었는디 어찌... 여그... 외겼능교?
그럴 리가 있으랴는 투로 공배네가 강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도대체
매안의 지체로 양반의 자제가 이 천민들 엎어져 사는 하촌에 발을 디뎌 들어선다는 것부
터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시궁창에 진솔버선 신은 발을 딛지 않
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그리고 도무지 매안의 양반들은 이곳에 직접 올 필요가
없었다. 부르지 않아도 으레 거멍굴 떨거지들은 눈곱 떼면 매안으로 내달아 올라갔고, 아
니어도 부르거나 시킬 일이 있으면 노복이나 머슴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니 장에만 가도 큰일나는 줄 아는 매안의 이씨 그 누구라도 이 거멍굴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은 아직 없었다. 하나도.
(아니다. 있다. 작은아씨. 아, 아, 아이코오, 어쩌꼬잉. 작은아씨가 여그 와 지시지
참,. 쥐도 새도 몰라얀다고 항아장시가 오금박등만 지가 외나 매안으 가서 나발 불었이
까? 작은아씨 여가 지신다고. 그래서 벌쎄 그리고 알려졌능가? 그렇게 참말로 암도 모리
게 사리반서방님이 와서 보시고는 도로 뫼시고 갈라고 혼자 외겼이까아?) 생각이 그에 미
치자, 이 마을에서 무슨 불길한 피투성이가 다시 될 일은 없을 것도 같 아져 안도가 되
었다. 적어도 강실이 일이라면 거멍굴 누구가 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 었다.
혼자서 한 짐작이지만 남도 아닌 족친이 몸소 와서 작은아씨를 모시고 간다면, 무사히
인도하는 셈이 되어 차라리 낫지 싶고, 무엇보다 옹구네 같은 더러운 년 집구석에 금지옥
엽 작은아씨 애기씨가 몸져 누워 계신다는 것이 애초에 말이 안되어. 얼른 빠져 나오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진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듯이 강실이를 옹구네한테서 건져 내야만 하는 사람처
럼 갑자기 조급해진 공배네는 하마터먼
작은아씨 뫼시로 외겼능기요?
툼벙, 말을 떨어뜨리며 아는 척을 할 뻔하였다.
그러나 아차, 남의 눈칫밤으로 한평생 뼈가 굵어 등이 꼬부라지는 공배네가 펀뜻, 정신
을 차리고 꿀꺽, 말을 삼켜 버린다.
(아조 섶을 지고 불러 들라고 환장을 했등갑다, 내가. 어매, 나 조께바아. 이게 그렇게
쉬운 일잉가 어디이. 시방 옹구네 그 여펜네 말 대로라먼 작은아씨는 죽으먼 죽었제 인자
다시 매안으로는 못 가실 몸인디. 들키먼 차라리 맞어 죽고, 여그라도 무사히 숨어 지시
먼 목숨을 부지허실 거이라고 그년이 막 으름장 안 놓등게비? 아까막새. 나한테, 참말로
베락맞은 소리지만 몸 가지싱 거이 사실이라먼 어쨌든 아직은 나서먼 안되시겄잖응가 말
여. 아이고, 내 주댕이. 큰일날 뻔했다. 사참해라.)
공배네는 자기가 부리를 함부로 까불지 않은 것이 어떻게나 다행스러웠던지 후루루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거멍굴에 불이 많구나.
공배네는 쓸어 내리는 가슴 한 쪽이 아슬아슬 위태로워. 섶나무 뭉치가 여기저기 웅크
리고 있는 것만 같은 거멍굴 검은 지붕들을 훑어보며, 불깃이 부디 이제 더는 번지지 않
기를 저도 모르게 빌었다.
(아닝게 아니라 내가 아까는 온 정신이 아니였등게비다. 법도 갖꼬 세상 사는 매안이
가, 내외법도 엄중헌디 아무리 한집안간 이라지만 당혼 처자 작은아씨를 서방님이 오밤중
에 단식으로 와 뫼세갈 리가 있겄능가. 없제. 아조 친남매지간이나 된다먼 혹 또 몰라.
안서방네나 누구 심복을 대동헌 것도 아니고, 그러먼 대관절 여그를 왜 오겼이까잉.) 궁
리에 몰골한 속은 답답했지만, 서방님이 무슨 말씀 하시기 전에 하민으로서 먼저 강 호
한테 자불자불 여쭐수도 없는 처지라. 공배네는 안절부절 못하는데, 강호가 드디어 무
겁게 입을 열었다.
춘복이는 어띠쯤 사는가?
이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어찌 춘복이를 찾으싱기요?
의아한 낯색으로,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올리는 공배네 머리 속에 또 잡으로 왔능게비다.
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스치며 그만 가슴 밑창이 퉁 꺼지는 듯하였다.
공배네는 지금 확실히 얼이 빠져 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좀 가 보려고 그러는데.
앞장서라는 말로 들은 그네는 다리가 후둘후둘 떨린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 아랫것 공배네는 저 가는 걸음 놓는 곳이 밭둑인지 구
덩인지를 모르고 허둥거리는데, 어둠을 밟는 발아래 써그럭써그럭 언 흙이 부스러진다.
만동이 집은 또 어디고?
미리 알아 두려는 것처럼 강호는 길라집이하는 공배네 뒤에 대고 묻는다. 공배네는 손
을 들어 조심스럽게 시꺼먼 동산 기슭을 가리킨다. 외짝 지게문이 불그룸한 불빛을 머금
고 있는 것이, 꼭 눈에 피 벌겋게 돋은 눈구녁을 뜨고 있는 것 같은 집이다.
그 집을 눈여겨 바라본 강호는 백정 택주가 사는 곳도 물었다.
만일에, 그가 이렇게 매안의 그 누구도 모르게 오밤중이 겨운 시각에 거멍굴로 찾아와
서성거리는 것을 어른들이 아신다면
네가 지금 무슨 조정암이 흉내를 내는 것이냐? 이런 당치않은 꼴을 보았나. 백정 택주
가 경사자집에 능통했다는 말 내 일찍이 못 들었는데 글공부허러 갔더냐? 동경 유학으로
는 모자라서? 네가 소위 매안이의 자식으로서 지금 온당한 자리에 서 있느냐? 철딱서니없
는 것. 옛어른 흉내, 아무나 내는 것 아니다.
하며, 크게 진노하여 꾸중하실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또한 다리가 성치 못할 일
이었다. 더욱이나 지금은 때가 때인 만큼 강호가 섣불리 거멍굴 행보를 하는 것이 미묘하
기 짝없는 정황 아닌가.
즈그들 사능 거이 머 집이랄 게 있당가요 어디. 시방 날이 깡깜해서 그렇제 버언헐 때
보먼 한누에 옹게옹게 옴싹 다 들와서, 누구네 집 찾고 불르고 헐 것도 없그만요. 박적
만배끼 안헝게요잉. 동네가. 다 뵈이고 다 보기지라우. 그런디 어두워농게 요렁 것도 질
이라고 요리 조리 더듬더듬 해지시요? 초행잉게. 즈그는 눈깜고도 댕기지만. 어쿠, 조심
허겨요,, 자빠지신디.
동네와 길 남루한 것이 제 탓이나 되는 양 못내 송구스러워하는 공배네 기색에, 강호는
가여운 마음이 들어 문득 습습해진다.
(상놈은 지게가 의관이고, 나이가 양반이라는데.)
지금껏 하던 대로 공배네한테 무심히 말을 놓던 것이 걸리며, 희 머리 뒤숭숭하게 잿빛
으로 섞어 쓴 그네의 나이를 짐작으로 헤아려 본다.
집은 어디요?
예?
느닷없는 존대말에 공배네가 잘못 들었는가 하고 겅겁결에 뒤를 돌아보며 반문한다. 놀
란 그네의 음성끝이 위집힌다.
어디 사시오?
아이고. 서방님. 왜 않든 일을 허싱기요잉?
황감을 지나쳐 당황한 공배네가 못 집을 것 집은 손을 털어내듯 실색을 하는데, 무망간
에 나무라는 어조가 튀어나온다.
(안 먹든 것 먹으면 관격이 나는 거인디, 내가 오늘 먼 일을 당해도 당헐라고 서방님
만났능게비다, 아매. 이게 웬일잉가 모르겄네에.)
공배네는 자꾸 뜻하지 않은 일에 부닥치자 울컥 두려운 마음조차 들었다. 그네는 그 마
음을 감추려고 가슴을 오그린다.
관격은 음식이 급하게 체하여 먹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보며, 급기야는 까무러쳐 정
신을 잃고 마는 위급한 병인데, 꼭 그 관격 걸린 사람처럼 공배네는 말문이 막혀 버린다.
입은 닫은 그네는 도망이라고 하듯이 끈걸음을 놓아 핑 농막으로 달아갔다.
강호는 묵묵히 그 뒤를 따라 걷는다.
육시 처참을 해도 분이 다 안 풀릴 투장을 하고는 덕석말이 체형을 당하여, 그 자리에
서 대가리 빠개져 죽어도 할 수 없고, 안 죽었으면 죽지 않은 것만 천만다행 감지덕지 해
야 하는 극죄인의 집에, 제 발로 먼저 족질이 찾아가고 있는 것을 이기채가 안다면, 그
진노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그것도 예사 사람이 아니라 문중의 어른인 문장 이헌의의 장손 된 자로서 이런 발칙한
놈. 위에서는 어른이 몰매 때려 살이 흩어지고, 아래서는 네놈이 도학자연 그것들한테
낯 내어서 인심 얻을 일 있더냐? 너 이놈, 거기, 그 수악헌 곳에 간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지금 네 문중과 종족을 능멸하기로 작정하였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천인 이 공노할
가문의 일로 어른이 책벌한 년놈을, 네까짓 것이 감히 무얼 알아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
고 쌍지팡이 짚고 나서서 이런 경거망동을 한단 말이냐. 너는 위신도 없고 체면도 없느
냐? 네가 내 한 일을 책망하고, 나한테 정면으로 맞서서, 내 면상을 후려쳐 깎고 밀어
젖히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게. 이런 방자하고 경우 없는 놈.
새파랗게 질리어 숨이 끊어지는 이기채의 밭은 노성이 금방 뇌천에 꽂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어 이헌의의 노엽고 근심시러운 얼굴이 떠오른다.
어두운 밤바람이 그 얼굴들을 씻는다.
춘복이의 농막 토방에 이르러 왠지 차마 얼른 문짝을 못 열고는 잠시 우춤주춤하던 공
배네가, 강호의 눈빛에 밀려 문고리를 잡았다.
나는 여그서 기양 가야능가 어쩌야능가. 무단히 서방님 허부도 안 듣고 따러 들으갔다
가 베락이나 맞으먼 어뜨케 히여?
방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강호를 뒤따르려다 멈칫한 공배네 눈에, 깜짝 놀라 우두두 일
어서는 옹구네가 비친다.
옹구네 손에는 여전히 그 망할 놈의 미영걸레가 들려져 있었다.
순간 공배네 오장이 홱 뒤틀린다.
피 터진 춘복이 낯바닥이고 몸뚱이고 모두 옹구네 차지여서, 미영걸레를 따로 들고 가
지 않는 한, 걸레 천신이 안되어서도 그 애간장 녹는 피 한 방울을 닦아 주지 못한 채,
오만 수모를 다 당해가며 멀거니 구경만 하고 밀려나 앉아 있던 아까 생각이 다시 치받친
것이다. 걸레 대신 치맛자락이라도 부욱 찢어서 여보란 듯이 닦아 주기나 하면 모르겠거
니와, 아니라면 그저 옹구네 하는 양이나 실컷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등신 시늉이 새삼
분통터진 공배네는, 앞뒤 가리는 것을 그만두고 신짝을 툭툭 벗는다.
다 떨어진 미영걸레가 무신 마팬가아? 어따 대고 휘휘 휘둘, 휘둘르기를. 옴짝꼼짝 못
허게 사람 손 딱 뭉꺼 놓고. 빌어먹을 년. 아조 걸레 권세가 대단허등만, 어디 사리반서
방님 앞에서는 어쩌능가 내가 좀 바야겄다. 지께잇 년이 버티고 앉었는 자리에 나라고 왜
못 앉었겄어? 들으가자, 들으가. 오기가 나서도, 궁금해서도, 걱젱이 되야서도 내가 기양
은 못 가제.
옹구네는 들이닥치는 기세인 공배네한테는 아는 척도 안하고 강호를 향해서 창황한 기
색을 감추지 못하며, 명색이 아랫목인 곳을 두 손으로 내드리듯 앉으시라 가리킨다.
서방님이 어쩐 일이싱교?
강호는 아무 말 없이 춘복이 어깨맡에 앉으며 방인을 둘러본다.
네 귀퉁이가 헐어서 모서리조차 없는 바람벽에 묵은 곰팡이가 그림자처럼 번진 방은,
방이라기보다 을씬녀스러운 헛간만 같았다. 하지만 이곳을 하늘 아래 유일한 거처로 삼고
살아온 춘복이가, 찢긴 사지를 참혹하게 부리고 누워 있는 이 방바닥은, 어쩌면 이 세상
에서 가장 확실하게 그의 등을 받쳐 주는 한 평 면적이며 구체일는지도 몰랐다. 그가 등
을 기대고 부빌 수 있는 것이란, 천지에 오직 저 누추한 흙벽 한 점과 부들자리 방바닥
한 닢뿐인데, 어떻게 세상이 따듯하기를 바랄 수 있으랴.
(그는 추울 수밖에 없다. 추우면 얼고 얼면 웅크러든다. 웅크러들면 뭉치고 뭉치면 단
단해진다. 단단해진 것은 무엇도 품지 못한다. 돌덩어리처럼. 품는 대신 돌덩어리는 다른
것에 부딪치면 그것을 깨고 만다. 이 돌덩어리에 부딪쳤을 때 깨지지 않는 것은 이보다
더 단단한 강철이나, 목화솜 무명천같이 푸근하고 부드러운 것일 게다.
허나 만일 강철이라면 이 돌덩어리가 끊임없이 제 몸을 내던져 부딪쳐 울 때, 깨지지는
않을는지 모르나 시끄러워 평화를 잃고, 결국에는 우글쭈글 일그러지고 상처도 입을 것이
다. 물론 돌덩어리도 부서지겠지만. 그런데 만일 목화솜 무명천이라면 이 돌을 품어 병아
리로 깨어나게 할 수는 없을는지 모르나 둘다 상하지 않고 대립도 안할 터인데.) 강호는
오랜 세월 거친 일로 낫에 찍히고 추위에 터지고 칼에 베인 흠집과 공이투성이 인 춘복
이의 손을 가만히 잡는다.
부옇게나마 정신이 들어온 춘복이는 찢어진 눈퉁이가 부어올라, 선지 핏물이 아직도 동
자에 고여 있는 모양인지 눈 속이 무겁고 탑탑하여 좀 껌벅거려 보고라도 싶었지만 마음
대로 안된다.
눈이 떠지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강호를 볼 수가 없었다.
운신을 제대로 못하니 잡힌 손을 마주잡을 수도 ㅃ낼 수도 없다. 독오른 두꺼비 배야지
만큼 시퍼렇게 멍들어 부푼 손을 영문도 모르는 채 잡히고 있는 춘복이는, 이 사람이 누
구일까, 감지해 보려 한다. 아까 방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오자 옹구네가 우두두. 놀라 일
어서면서
서방님이 어쩐 일이싱교?
라고만 했지 무슨 서방님이라고 택호를 안 불렀으니, 눈감은 춘복이로서는 짚일 리가 없
는 것이다.
공배네가 따라 들어온 것은 기척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몹시 어려운 지체가 거동하여
온 것이 분명한지, 옹구네도 공배네도 단 한 마디 입을 안 뗀다. 공배네는 몰라도 옹구네
가 어지간한 경우라면 이렇게까지 숨죽이고 있지는 않을 것인데, 이상하다. 누구일까. 묻
고 싶지만 두 입술이 바위덩어리를 맞물고 있는 것처럼 부풀고 무거워 벌리지 못한다.
사람의 몸뗑이, 이거 참 아무껏도 아니구나. 그께잇 거 몇 대 조께 투드러 맞었다고,
눈 깜작 새 이 지경으로 벵신이 되야 부네, 참. 이러고 있을 때 누가 몽뎅이 하나 들고
들와서 패 쥑이먼 죽제 머 손구락 한나 깐닥도 못허겄다. 모가지를 눌러 쥑여도 당해야지
벨 수 없겄고. 잘구에다 담어서 쩌어그 어따 갖다 내부러도 머 어째 볼 방도가 없겄어.
그는 등골이 써늘해지면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참말로 나는 내 몸뗑이 딱 한나뿐이구나.
하는 것이 절감되었던 것이다.
만일에 눈먼 봉사라도 저를 낳아 준 어매 아배가 옆에 있더든지, 아니면 살갑고 미더운
각시가 있다든지, 혹은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이 있다든지 하면 심정이 이러지는 않았으리라.
살과 피를 같이 나눈 혈육 한 점 없는 인생이, 성씨도 없고, 성씨가 없으니 비렁박적을
차고서라도 고고샅샅 삼천리 끝까지 헤매어 찾아가 볼 만한 일가 친척 단 한 명도 없는
춘복이. 나.
라는 생각이 뼈에 미친다.
그래서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었는데, 그래서 무서운 생각이 지금은 확 끼쳐든 것이
다. 골수가 시리었다.
(그런디... 작은아씨가, 애기를 뱄다. 내 자식을 뱄다... 아아.) 그리고 연유를 아직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작은아씨가 지금 바로 내 가까이. 거멍굴에 와 있다. 옹구네 집
에 와 누워 있다.
춘복이는 가슴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 무엇 한 가지도 차마 믿어지지 않아서 내 발로 걸어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야겠는데, 그리 안되어 그는 숨만 벅차게 몰아 쉰다.
심장이 툭탁툭탁 뒤는 소리가 울리면서, 잡은 손이 푸들푸들 떨리는 것을 보고 강호가
희색으로 묻는다.
정신이 좀 드는가?
하는 순간, 춘복이는 아찔하였다.
(대실서방님이싱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춘복이 귀에는 강호의 그 음성이 꼭 강모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
다. 뛰던 심장이 멎는가 싶었다.
안되야. 절대로 니가 돌아와서는 안되야.
춘복이는 감은 눈을 꺼풀 속에서 부릎뜨며 주먹을 부르쥔다.
이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해. 눈 좀 떠 보아. 억지로라도. 눈뜰 기운만 돌아오면 다른
것도 따라서 회복이 되지. 점차. 눈뜨는 기운이 첫째야. 그러니 몸에 힘을 눈에다 모으고
눈을 떠.
강호는 춘복이 손을 붙들고 지성껏 이야기한다.
(누구시요...?)
아플 때일수록 눈을 뜨고 있어야 해. 눈을 감어 버리면 더 까라지고 기운이 없어서 못
써. 아무것도 안 보이면 회복이 더디어. 눈을 뜨면 내가 무얼 보는 것 아닌가? 해도 보
고, 달도 보고, 별도 보고, 삼라만상, 산천초목, 들짐승, 날짐승 다 보잖는가? 그런데 눈
을 뜨면 그 순간, 내가 무얼 보는 순간, 이번에는 또 그 온갖 것들이 거꾸로 내 눈 속으
로 생생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야. 한세상이. 살어서. 생기운 펄펄 넘치게.
(누구시까아...)
그러니 눈을 떠. 눈을 뜨고, 보아. 눈감고 있으며, 생기운은 못 들어오게 닫어 버리고
아픈 기운만 종횡무진 몸 속에서 치닫게 하는 것이니. 살려거든 꼭 눈을 떠. 알었지?
아이고, 까깝해라. 누구냐고 물어 볼 수가 있어야 누군지를 알제.
강모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나,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매안의 자제들은
이상하게도 언어 음색들이 얼핏얼핏 비슷하여, 이인가 하면 저이인 경우가 더러 가다 있
지만, 그것은 아마 그들과 춘복이가 한자리에서 긴 이야기를 해 본 일 없고, 또한 그 자
제들이 노상에서 객담하고 떠드는 일이 없는 까닭이었을 것이다. 춘복이가 노상 매안에
가서 엎드려 산다 해도 주로 놉일 하는 거친 자리가 대부분인 터라.
하지만 어쨌든 춘복이로서는 매안에서 이렇게 자기를 찾아와 준 것이 너무나 뜻밖이었
다.
처음 방문이 열리며 서방님이 오셨다는 옹구네 말을 들었을 때는, 덜컥, 아직 덜 맞은
매가 남었능게비다, 싶었다.
(아조 쥑여라, 쥑여. 이께잇 거 내가 아까울 거 머 있냐. 여지도 없이 쥑여 부러. 냉게
놓고 찔끔찔끔 소일 삼어 패지 말고.)
아예 자포자기의 양심까지 생겼었다.
그러다가 오기 분통이 받쳤다.
(왜, 사화허로 오셌소? 병 주고 약 주네.)
흥. 누가 사화를 해 주어? 어림없다. 내가 죽기를 한사코 원한갈먼 느그 문중에다 내가
못헐 일도 없는 놈이여. 느그만 덕석 있고, 느그만 몽뎅이 있고, 느그만 패는 놈 있는지
아냐? 느그가 양반 무선지만 알고 상놈 무선지를 모르능게빈디, 내가 상놈 무선 본때를
뵈어 주마. 꾀벗고 달라들어 맞붙기로 허먼, 느그는 잃을 것 많어서 무섭겄지만, 나는 잃
을 것 없어서 무설 것도 없는 놈이여.
눈감고 널부러진 중에도 춘복이는 여차하면 끌어다 댈 강실이를 머리 속에 볼모로 틀어
쥔 채, 자기를 찾아온 사람한테 빈틈을 안 주려고 칼을 세웠다.
그러다가 순간, 강모인가 싶어서 전신의 갈기가 곤두섰다.
그런데 지금은, 이 사람이 누구인가, 그것이 궁금하였다.
내가 별다른 것은 못해 주고, 여기 돈을 약간 놓고 갈 터이니 장독 풀리는 약이나 한
첩 써 보게. 아주 약소하네만, 거저 생긴 돈도 아니고 부모한테 탄 것도 아니야. 내가 낯
선 땅 남의 나라에서 인력거 끌고 빈 병 팔아 고학하며 아깝게 모은 학비야. 내가 왜 이
런 말까지 다 하는고 하니, 우리가 서로 나눠 씀직한 돈이란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래. 그
러니 다른 데 쓰지 말고 꼭 약을 지어 먹어.
강호는 교복 윗저고리 단추를 풀더니 안주머니에서 누런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춘복이
손에다 제 손 대신 그 봉투를 쥐어 준다.
약 짓거든 잘 좀 달여 먹이시오.
강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공배네한테 이른다. 강호로서야 옹구네 내막을 알 리도 없거
니와, 춘복이 걷어 기른 사람이 공배 내외인 것은 매안에서도 다 아는 일인지라 당연히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공배네는 아까부터 목이 메어 울먹이느라고 감사하다는 말씀도 무엇도, 다 명
치에 얹혀서 아무 대꾸도 못하고 말았다.
춘복이 손을 잡고 지성으로 말을 이르는 모습이며, 돈을 꺼내어 쥐어 주던 것, 옹구네
를 젖히고 자기한테 약수발을 명하던 것들이 자꾸만 눈물겨워 공배네는 (아아, 양반은
다르시다.)
느껍게 이 말만을 삼키었다.
강호가 춘복이를 대하고 있는 동안, 그 낯뻔뻔한 옹구네마저 단 한 마디 말은커녕 침조
차 제대로 못 삼키게 오갈이 들어, 구석지 한쪽에 숨죽이고 앉아 있게 하는 그 위엄과 기
품, 그리고 이토록 사람을 눈물나게 하는 온화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이 아
직 젊고 적은데.
공배네는 강호를 배웅하러 나서면서도 그 생각만 하였다.
아까 그렇게나 부글거리던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아 그네는 이대로 어디만큼까지
라도 강호를 따라 가고 자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나이로야 춘복이보다도 아래인데, 이 늙은 사람이 물색 없이, 그 깃에 기대어 의지하고
싶어지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아까 물을 때 봐 두었으니 이 길은 혼자 갈 수 있겠소. 아픈 사람 있는데 들어가
보아.
강호의 말에 공배네가 펀득 정신이 나서 묻는다.
어디 들렀다 가실랑가요?
응.
지가 뫼시고 가지요. 이게 널룹도 안헌 질이 기양 움푹짐푹 해 갖꼬요, 첨 가시는디 무
단히 발이라도 삐시먼 안되야요.
공배네는 그가 지금 만동이와 백단이를 찾아서 당골네 집으로 가려 하는 것을 알고는
눈치 빠르게 앞장을 섰다.
아이고오, 등이라고 있었으먼 참말로 좋았을 것을.
그것을 공배네의 진심이었다.
왜 그런지 마음이 등불을 밝힌 것처럼 화안해지는 것이 좋아서 그네는 웃는다. 그리고
옹구네가 끝내 오갈이 안 풀려 더 길게 따라나올 생각도 못하고 우물우물 물러서던 모습
이 우스워진다.
공배네와 옹구네가 강호를 배웅하고자 나가고 혼자 누운 춘복이는 (사리반서방님이셌
구나.)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이었다.
그리고 처음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기척에서부터 다시 방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떠올렸다.
(인력거를 끌고 빈 병을 팔어서 마련헌 고학 학비...) 제 손을 쥐고 있던 강호의 손 감
촉이 아직 그대로 남은 것 같은 봉투를 가만히 쥐어 본다. 그러나 마음뿐이지 정작 쥐어
지지는 않는다.
아앗따아, 방안에서 향내가 진동을 허네 기양.
덜크덕, 지게문을 열고 들어오는 옹구네가 비아냥인지 진정인지 새된 소리를 냈다.
원, 나 대그빡 털 나고 오늘맹인 날은 첨 보겠네. 하이고 그렁게 시상이 딜러지기는 달
러졌능갑서어. 이게 어디 옛날 같으먼 언감생심 생각이나 헐 수 잇는 일이여? 끄집어가
뚜드러 팬 죄인네 집이까지 와서 돈이랑 따악 놓고 가고. 나 이거 어디 가서 말해도 허능
거잉가 아닝가아.
건성으로 주섬주섬 옹배기와 걸레들을 치우는 척하던 옹구네 손이 춘복이 손에 들린 봉
투를 홱, 나꾸어챈다.
이 돈 내가 갖고 있으께. 내일 날새먼 바로 고리배미 비오리네 가서 광생당 진의원 약
좀 지어 오게. 거그다 부탁허먼 바로 연락이 와야제.
(저런 빌어먹을 노무 예펜네.)
갑자기 손바닥이 허전해진 춘복이가 마음까지 무엇을 빼앗긴 사람처럼 허퉁해져진다.
손가락을 꼼질거려 본다.
그러나 그 역시 마음뿐이다.
자개 오늘 아조 정승판서 부럽잖은 호강했네이? 터억 드러누워서 매안이 서방님 문병
받고 부조 받고. 위문 듣고. 사리반서방님이 인물은 인물이여. 매안이 자제 중에 기중 낫
제머.
그랬다가 샐쭉해진다.
아까 그 앞에서 보란 듯이 가시버시 노릇을 했더라면 좀 나았을 것인데. 그 노릇을 제
대로 해 보였으면 나중에 그처럼 강호가
약 짓거든 잘 좀 달여 먹이시오.
하고 공배네한테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까짓 말에 괘념할 옹구네가 아니었다.
약수발 누가 했능가 사리반서방님이 조사를 나오실 것도 아니고, 내가 또 수발을 넘한
테 맡길 사람도 아니고잉.
춘복이 손에서 걷은 봉투를 제 저고리 앞섶 밑 젖퉁이를 헤치고, 꾀죄죄한 치마말기 사
이에 꽂는데 공배네가 들어왔다.
배웅 잘 해 디맀소?
옹구네가 천연스럽게 묻는다.
잔뜩 마음이 상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양양해져서 들어온 공배네는, 희색이 만면한
옹구네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춘행이 이도령 작별허디끼 오리정끄장 갔다 외겼어? 자네 먼 존 일 있능가?
아 그 잠깐 새 존 일이 있으먼 머이 얼매나 그렇게 존 일이 많겄소? 여그 나랑 내나 같
이 있어 놓고는, 무신 봉창 뚫는 소리를 히여?
근디 왜 그렇게 자네가 짓이 났디야? 시방.
사리반서방님 말씀허싱 거 헛들었그만잉. 아까 안 그러십디여? 눈을 딱 뜨고 삼라만
상 산천초목을 보먼, 우선을 내가 그것을 보는 거이지만, 꺼꿀로, 그것들이 내 눈으로 들
으와서 내 속에 찬다고. 그래서 내 꺼이 된다고. 내가 기양 향내 나는 양반을 그렇게 바
짝 한 방으서 뵈입고 낭게로, 눈이 다 환허고 내 가슴이 화안허게 차서 그렁게비요.
저런 사램이 어뜨케 법사가 못 되얐능가 몰라.
공배네는 더 말을 이어 봐야 득볼 것이 없을 터여서 얼른 춘복이 손바닥에 눈길을 떨어
뜨린다. 봉투를 찾는 것이다. 없다.
돈 어디 갔어?
공배네가 까뀌눈으로 옹구네를 노려본다.
무신 돈?
아까 서방님이 주고 가신 돈 말이여.
그걸 성님이 왜 찾소?
머이라고?
저 사람 약값 부조를 성님이 왜 찾냐고요.
아니 이 예펜네가 참말로.
저 사람 약값잉게 저 사람이 안 챙겠겄소? 넘들이 왜 나서서 눈구녁 삐이래 갖꼬 돈을
찾어? 멋 헐라고.
말 다 했당가 시방?
다 안했지만 더허먼 멋 나오요?
니가 감췄제?
공배네가 얼굴이 빨갛게 부풀며 옹구네 콧배기 밑에다 턱을 들이민다. 옹구네는 손으로
가볍게 그 턱을 밀어 버린다.
어따 대고 너짜 붙여어?
그러먼 내놔.
멀 내놔?
도온.
돈?
돈 말이여. 춘복이 약값. 여그, 여그 뇌였던 봉투 내노라고오.
그걸 왜 나한테서 찾소?
이 방안에 너밖이 없었는디 봉투가 온디간디 없이 없어졌잉게 니 소행 아니겄어? 나밖
이 없다니. 저 사람이 송장이요?
이년아. 저 사람이 시방 사람이냐? 숨만 붙어 있제, 눈구녁도 못 뜨는 반송장 아니냐?
응? 아, 천하에 눈구녁맹이로 뜨기 쉬운 것도 저렇게 못 뜨고 자빠져서 꿍꿍 앓고 있는
춘복이가 무신 돈을 어따가 어뜨게 치워 놨겄냐. 심봉사 등쳐 먹은 년에 뺑덕이네가 있다
드니, 니가 꼭 그짝 났구나잉? 저렇게 되야 부린 사람 약값을 다 훔치다니. 그 손목떼기
가 온전헐 성싶으냐? 잉? 콱 썩어 불제. 그게 어뜬 돈이라고. 누가 주신 어뜬 돈이라고
니 년이.
공배네 숨이 넘어간다.
이보시오 성님. 말 좀 물어 봅시다 예.
아이고오오. 저 능청. 저 구렝이. 천 년 묵은 백여수 뱃속에 구렝이가 열두 마리 들앉
었는 년이 바로 너여. 그래. 물어 바라, 물어 바. 머? 멀 물어 본당 거이여? 어디 까락까
락 물어 바아.
성님이 누구시요?
머?
저 사람한테 누구시냐고.
공배네는 억장이 무너져 터진다.
그것을 어떻게 말하란 말이냐. 말하지 않아도 춘복이가 알고, 내가 알고, 온 거멍굴이
다 알며, 옹구네 역시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저 사람 낳았소? 성님이 성님 배 아퍼서 낳았냐고요.
옹구네 낯빛은 차악 가라앉아 찰진 빛을 띄운다.
반대로 공배네는 울그락불그락 술 너무 갑자기 많이 마신 사람 얼굴에 홍반 돋듯이 얼
룩덜룩해진다. 숨이 깔딱 넘어갈 것만 같다. 좀체 이렇게까지는 흥분하지 않는 공배네인
데, 오늘을 쌓이고 쌓인 것이 한꺼번에 터져 걷잡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저 사람하고 몸 섞어서, 가시버시요
퉤에액. 예라이 더러운 년.
공배네는 정말 끓어 오르는 대로 가래를 공구네 낯바닥에 뱉어 주고 싶은 것을 가까스
로 참는다. 어찌 되었던 춘복이 소행이 있으니 저년이 저렇게 말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침을 뱉는 일만은 춘복이를 생각해서 참아야 했다.
머리 끄뎅이를 쥐어뜯으면 뜯었지.
그러먼 피도 살도 안 섞인 성님이 가찹소오, 살 섞은 내가 가찹소?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은 성님도 아시겄지이. 성님이 하도 못 알어들으싱게 내가 이렇게 세 살 먹은 애들힌테
맹이로 일러디리는 거이여어. 인자부텀은 당최 이런 일 갖꼬 왈가왈부 말으시요. 내 한
번 말했잉게로 잉? 딛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는디 내가 자꼬 같은 말을 허먼, 듣는
성님이 좋겄소오. 허는 내가 재밌겄소? 인자 서로 알 만치 다 알었응게 알은 만큼 대접해
줌서 삽시다.
서방님이 너한테 수발을 시기시디야아, 나한테 시기시디야? 그게 벨거 아닝 것 같어도
분명히 짚어얄 거인디, 어디 말해 봐.
아 누구라고 딱 집어서 말씀 허시든 안했지요.
나를 보고 말씀을 허셌잖이여? 나를 보고.
설령 성님보고 했다 치드라도 약 짓거든 잘 댈에 멕이라고 그랬제. 머 돈 집어드는 것
부텀 약 지어 오능 것끄장 어쩌라고 저쩌라고 일일이 말씀 허싱 것은 아니잖에요? 솔직히.
옹구네가 암팡지게 쏘아붙인다.
아아, 왜 이렇게 그 돈이 아까울까. 틀림없이 저년의 어디에 찡궜을 텅니데. 달려들어
와락 몸을 뒤지면 금방 나올 터인데. 그 속에 얼마가 들어는지, 그 돈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는지, 냄새는 어떠한지, 꺼내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냄새도 맡아 보면
서, 춘복이와 함께 사리반서방님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고, 아주 정성스럽게 첩약을 지어
다가 뭉근한 불 위에 부채질해 가며 탕약을 달여 주고 싶었던, 그 모든 과정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네는 꼭 날강도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네한테서 날강도질해 간 온갖 것을 옹구네는 지금부터 야금야금 즐기기 시작
할 것 아닌가. 차라리 아주 강도라면 털리고 나서 눈 질끈 감고 잊어 버린다지만, 이 강
도는, 내게서 빼앗아 간 것을 제 품에 다 늘어지게 늘어 놓고, 하나하나, 나도 다 보게
즐길 것을 생각하니.
그래서 옹구네 끄뎅이를 와드득 쥐어뜯어 잡아채려 공중으로 치켜들던 두 손을 부르르
떨며
어히그으으.
하더니만 제 허벅지를 움쳐잡고 토악질하려는 사람처럼 허리를 앞으로 고꾸리어 구부린
다. 그리고 이 모든 난장판 속에서도 송장처럼, 부어 터진 채 눈을 감고 있는 춘복이한테
악을 쓴다.
눈 떠어. 눈 좀. 이놈아아.
17. 꽃심을 지닌 땅
(돌이킬 수 없다.)
강모는 오직 그 생각만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몹시 추운 겨울날, 뭉뭉한 황토흙 아랫목 잘 익어서 올라오는 구들냇내 가득히 훈김으
로 들어찬 방안에 앉아 있다가, 벌컥 문 열고 나가면서 준비없이 바깥 바람을 수욱 들이
켤 때. 날카로운 얼음칼 꼬챙이로 폐부를 꿰뚫어 찌르는 것 같던 공기. 그 공기의 비수.
그것은 급습이었다.
그럴 때면 강모는 한동안 더 숨을 들이쉬지 못한 채, 금방 삼킨 비수의 얼음이 저절로
다 녹아 온도 없는 물이 되기까지, 찬 바람에 찔린 가슴을 웅크리곤 하였다.
스르릉 미끄러지다가 덜컹, 서는 기차 칸에 앉은 강모의 심정이 꼭 그 바람칼 느닷없이
삼킨 것처럼 아프고 시리었다. 이것은 뜻밖이었다.
검은 빙괴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던 겨울밤이 새벽빛을 받으면서 한쪽부터 푸릇 퍼릇 얼
음비늘 일으키는 시각.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틈에 섞여 강태와 함께 전주역 구내를 빠져
나갈 때만 해도 강모는, 역사의 천장에 오색으로 단청을 물린 사방연속 꽃무늬를 유정하
게 바라보며, 다시는 못 올 곳을 버리고 떠나가는 남자의 비장함과 연민을 휘감듯이 느꼈
으나, 개찰구에서 문득 뒤돌아본 골기와 문묘 같은 정거장 건물의 검은 지붕과 붉은 두리
기둥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강모는 흉증을 치는 회오리에 우욱, 울음이 치밀었다.
더운 울음이었다.
그런 줄을 몰랐었는데, 전주역은 강모에게 매안의 정거장이나 마찬가지로 근원정서의
출입문, 지울 길 없는 시간의 자자 바늘이 먹점 묻히며 드나든 대문이었던가.
아니면 어머니.
언제 누가 지었는지, 단청 물린 주칠 기둥에 아롱아롱 휘황한 천장무늬가 흡사 어느 궁
궐이나 사찰 같은 느낌을 주는 전주역의 고풍 창연한 역사는 장엄하리만큼 육중한 골기와
지붕 때문에 더더욱 웅장해 보였다.
그래서 어디론가 떠나고 어디선가 돌아오는 보따리와 가방을 이고 지고 든 나그네들의
바람 섞인 경박성을, 지그시 재워 누르는 품성이 전주역 정거장에는 깊이 배어 있었다.
떠나거든 돌아오너라.
골기와 정거장은 그렇게 소리 없이, 개찰구를 빠져 나가는 뭇아들의 뒷등에 묻어, 낮은
소리로 스며들며 말했던 것일까.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발길이 머뭇머뭇 남루하게 고향의 문간에서 주춤거릴 때나, 분망
한 원로에 보란 듯이 일하고 올 때나, 정거장은 이만큼 마중나온 어머니처럼 낡아서 깊은
품을 벌리어
어서 오라.
안으며 맞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전주역이 유독 이처럼 사람을 품어 들이는 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철도와 기차라는 신식 개화물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당연하게 자신의 자
리를 잡은 조선식 건축물, 전주역.
마한에서부터 백제 넘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연한 빛을 자랑해 오던 고래의 고도여서
그러했을까.
어떻게 이곳 사람들은 저 쇳덩어리 시커먼 물체가 들고나는 철로와, 팔도의 모산지배처
럼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고 모여 들어오는 사람들의 이합집산 마당에, 이와 같은 한옥을
천연스럽게 지어 앉힐 수가 있었는지. 정거장은 전주와 시람들과 기차와 하도 알맞게 어
울리어, 강모는 그 광장에 들어설 때마다 서러운 부랑이 위무를 받는, 흡습을 느끼곤 하
였다. 그것은 눅눅한 듯 쓸쓸하고 의연한 의무였다.
강모가 이 전주역 역사를 맨 처음 본 것은 전주고보에 시험을 치르러 가던 해, 겨울끝
이었다.
그때, 싸르락, 낯선 공기가 끼치는 객향의 첫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전주역의 지붕이었
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한쪽에 희끗희끗 잔설이 남아 막 저무는
석양을 비스듬히 받고 있던 기와지붕과, 아, 추녀.
집에서도 얼마든지 보았던 처마와 요마루, 그리고 호성암과 범련사 눈에 익은 단청, 붉
은 칠 훤칠한 두리기둥 들이 그의 뇌리를 두드렸다. 마치 저녁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퉁기
어 딩, 둥, 두둥, 울리는 소리처럼.
그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외지에 나갔었다.
그것도 자신의 관향이며, 이씨 조선 오백 년을 낳은 태조 이성계의 아득한 곳으로부터,
몇 백 년 뒤 후손인 이태조의 사대조인 목조 안사에 다다르기까지, 십팔 대를 두고 면면
히 선조 대대로 부성의 이름난 토호로서 전주 인근을 누르며 살아왔던, 임금의 선영 요람
지로 들어가는 것이어서, 여나믄 살 어린 소년 마음에도 조상의 땅을 찾아가는 감회가 자
못 남달랐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전주는 일찍이 우리 조선의 발상지다, 해서, 예로부터 경향간에 두루 지중히 받드는 곳
이니라.
이기채는 이제 시험을 보기 위해서 전주로 출행하는 열네 살 아들 강모를 큰사랑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러기에 왕조에서는 이 부성을 가리켜 풍패지향이라고 높여서 불렀다.
풍패지향이요?
오냐. 이는 중국의 고사에서 따낸 지칭이지, 내력인즉.
진이 쇄약해지자 남지인 진승과 오광 등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필두로, 중원 천지는
온통 군웅들의 싸움터가 되어 밤낮 없는 말발굽 회오리를 칠 때. 일어나고 스러지는 것이
뜬구름 같은 중에 끝내 남아서 청룡과 황룡으로 쟁패전을 벌이던 두 영웅이 있었으니. 이
둘은 초나라의 항우와 이에 맞서 일어난 일개 필부 유방이었다.
그는 고향땅의 정장이라는 시시한 몸으로 일어나서, 산을 뽑아 내던질 만큼 강성한 항
우와 겨루기를 사 년여. 마침내는 해하에서 항우를 무찌르고, 오강에서 자결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유방은 드디어 천추락 만세향의 기틀을 마련하고, 한나라를 세워 고조가 되엇
다.
이 한고조 유방의 향당, 즉 고향이 바로 풍패였느니라. 그래서 이 고사에 비추어, 한고
조가 태어나 자란데다가 후일에 큰 왕업을 이루어 잘된 땅을, 우리 아조의 성업에다 견주
어 비유한 이름이 곧 풍패지향이다. 알겠느냐?
예.
그러하매 아조에서는 전주를 선영의 선원조발지기로서, 아름다운 옥과도 같은 왕조의
근원이 시작된 곳이라 하여, 이 땅에 웅숭 깊은 경의를 다하였으며, 시방동천 부성을 두
루 성역으로 삼아서 신성하게 가꾸고 애중히 여기었다. 그리고는 한양에 버금가는 고을로
이 고장을 존중하였더니라.
알겠습니다.
거기다가 무엇보다 전주는 우리 성씨의 관향이다.
시조께서 나신 땅이란 말이다.
무릇 별과도 같이 무수히 총총하고, 풀과도 같이 흔하디 흔한 것이 세상의 사람이지마
는, 그 중에서도 어느 성씨를 막론하고 한 성씨의 시조가 되는 이는 그 태어남부터가 남
과는 다르고, 품행, 덕망, 학문이 뛰어나게 거룩하여 하늘도 아신는바, 후인의 추종 숭앙
을 받지 않으시는 이 없도다.
따라서 이만하온 어른이 태어나 자라고 연고 가진 땅이라면, 가히 군자의 지덕을 갖추
지 않았으리오.
이러한즉 그 땅은, 그 성씨의 시조로부터 대대손손 뻗어 나간 후손들의 줄기와 가지와
뿌리가 창성하면 할수록 추앙하여 지명을 일컬을 것이요, 마지막 잎사귀 단 하나 남을 때
까지도 그 종족에게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관향의 관자가 꿸 관인 것은 참으로 의미 심장하다.
무엇에 무엇을, 무엇과 무엇이, 왜, 어떻게 서루 꿰어지겠느냐.
전주에 들어가거든 애비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아라.
일개 성씨의 과냥도 이처럼 지귀하거늘, 한 나라 왕업의 탯자리이랴. 일러 무삼 하겠느
냐.
땅의 덕이 이토록 융융하매, 전주를 본으로 하는 성씨는 매우 많으니. 전주 이씨를 비
롯하여, 백제시대 팔대 성의 하나였던 전주 국씨, 그리고 전주 김씨, 전주 도씨, 문화 유
씨 전주파, 전주 박씨, 전주 애씨, 전주 연씨, 전주 오씨, 전주 운씨, 전주 임씨, 전주
장씨, 완산 전씨, 전주 정씨, 전주 주씨, 완산 최씨, 전주 최씨, 전주 필씨 등등 미처 다
헤아리기 어려웁다.
전주의 옛이름은 완산이었다.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다음, 막 산수유 꽃들이 사운사운 노랗게 잎도 없는 마른 가지에
서 피어날 무렵, 까칠한 중로의 역사선생은, 둥그렇고 두꺼운 안경을 밀어 올리며 조근조
근 찬찬히 이야기하였다.
제군들이 앉아 있는 여기는 백제, 마한의 옛땅이다. 한반도 서남지방에 자리한 전라도
의 행정과 군사 및 교통과 산업,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로서 전주는 그 이름을 떨치고 있
지. 흔히 전주를 천 년 고도라고 한다. 천 년이란 이 고장이 전주라고 불기기 시작한 이
후의 세월을 말하는 것이다.
전주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 16년에 처음으로 비롯되었고, 그 이전에는 완산이라 불렀
었다.
신라 천 년 이전에는 백제 칠백 년이 있었고, 백제 칠백 년 이전에는 마한의 세월이 있
었다. 마한의 이전에도 이 고을에 햇살은 다사로웠으니, 그 세월을 다하면 이천 년이 어
찌 모자라겠는가.
잘 들어 보라.
세상의 삼라만상 모양 가진 것 중에 혹 이름이 있는 것도 있고 이름이 없는 것도 있지
마는, 역할이 분명한 것치고 이름이 없는 것은 없다. 또 그 이름에는 분명한 뜻이 있다.
정명으로, 바로 붙은 이름을 바로 쓸 때 사문을 줄기가 바르게 잡히는 법이다.
전주의 이름을 보자.
이제 제군들이 부조의 함자와 휘자를 똑바로 아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이, 그 음덕을 입
고 살아갈 땅의 이름 또한 잘 알아야만 한다. 땅은 어버이이기 때문이다.
역사선생은 칠판에 백묵으로 강렬하게 전주라고 썼다.
전주는 온전 전과 고을 주로서 온전한 고을이라는 말이요, 완산은 완전할 완에 뫼 산이
니, 산의 고어가 달인 것을 안다면 온 들이라, 완전한 외와 어울려 다함없이 완전한 산과
들, 즉 완전한 누리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전주가 나지막한 산자락에 둘러싸인 원형분지로서, 동남쪽 저만큼 산악지대를 우
뚝우뚝 장수처럼 첩첩이 늘어 세우고, 서북쪽 비옥한 평야지대를 아득히 풀어서 펼쳐 놓
아 비산비야를 적절히 이룬 지형인데다가, 서해 바다 또한 지척인지라, 산과 들과 바다의
산물이 사시사철 풍요롭게 모여들고, 기후조차 온화 따뜻하여, 사람들의 성품은 명랑하
고 낙천적이면서 남방인 특유의 개방적인 호방함을 넉넉하게 가진 바를 기리어, 만물이
은성하며 모든 것을 완비하여 원만하다는 뜻을 글자로 표현한 것이리라.
이 글자 속에는 무궁하면서도 아늑한 이상이 담기어 있다.
전자나 완자나 모두 온전하다는 뜻으로, 온이란, 흠이 없다. 혹은 모든 것, 그리고 갖
추어져 부족함이 없는 상태, 백, 천, 만 숫자를 가리킬 때, 백의 옛말이다.
온 세상, 온갖 것, 온 힘을 다하여, 온통.
백제 사람들은 이 온이란 말을 즐겨 써 온 것 같다. 그 시조인 온조왕의 이름 첫 글자
인 온에도 드러나 있고, 국호 백제의 백도 훈으로 읽는다면 온이다. 이 온 속에는 완전
원만, 광대함을 사모 숭앙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전주 이전에 완산, 완산 이전에는 다른 이름이 없었던가.
찾아보면 마한이 멸망한 뒤에 백제에 병합당하지 않으려고 최후까지 버티던 고을 명칭
가운데 원산과 금현이 있는데, 이 원산이 바로 지금의 전주 일대로서 완산과 같은 이름인
것이다. 우리 글자가 아직 없었던 때라 그 훈만 빌려다가 이두 혹은 한문으로 적은 것이
니,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리라.
또 하나 예를 들면, 부족국가 시대, 마한을 이루었던 오십오 개 소국 중에서 전주 지방
을 중심으로 세운 전라도 지역 나라의 이름은 원지국이었다.
이 원 역시 완상의 완과 소리가 비슷하니 같은 말이다.
이처럼 전주의 옛이름은 온 들을 나타내는 한자말이, 때마다 표기는 바뀌었으되 그 뜻은
변함없이 이어져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유구한 이름이 아니냐.
비록 아직은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동맹 마한이었지만, 일찍이 삼한을 제압하던
나라 마한의 마지막 도읍을 낀 중심지로서, 그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몸소 보았으며, 끝
까지 백제에 항거하여 복종하지 않았으나 결국은 분한 눈물을 삼켰던 땅, 원산, 원지국.
청동기 내지는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은 이 마한 소국 원지국은
토착적인 지배 세력과 지배 기구를 토대로 독립적인 성장을 지속하였으나, 끝내는 백제에
복속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벌어진 생살 아물 듯이 백제의 몸 되었다.
그리고는, 찬연하게 융성했던 백제의 빛나는 고도였음에도, 그 청년 백제가 분하고도
아깝게 죽은 국망의 철천지원, 사무치는 원한으로 하늘을 우러러 울 수조차 없어서, 천추
에 시퍼런 멍 깊이깊이 다시금 엉기어 울형이 된 땅, 완산.
완산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또 한번 몸으로 겪었다.
늙어서 기진맥진 제 한 몸 가누지 못한 채, 기력이 다하여, 온갖 징조를 행패처럼 드러
내며 망한 나라였다면 이러했으랴.
밤 잔 원수 없다고 하는데, 국운이 하늘을 찌르게 융성하던 성세의 백제가 피를 뿜으며
요절한 망국의 설움이 얼마나 절통했으며, 왕손도 아니요, 귀족도 아닌 일개 필부 필부들
의 심장에까지 저미어든 한이 한두 날도 아니고, 일이 년도 아니고, 백 년 넘어, 이백 년
넘어, 백제 멸망 이백사십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아, 귀신도 질릴 만큼 질기게 깊어,
멍든 피, 속으로 울어 울면서 대대손손 흘러내리다가, 신라도 힘 다하여 기우는 말엽, 후
백제란 이름 들고 깃발을 드날리며 입성하는 견훤을 완산의 아들이라고 그토록이나 열광
하여 맞아들였으리오.
신라 진성여왕 3년
천 년 세월 이어 오던 왕조는 쇠잔의 징조가 뚜렷하여 여왕은 구중 궁궐 깊은 곳에 화
려하고 음탕한 잔치를 날마다 극치에 이르도록 벌이며, 오로지 행음을 즐기니, 나라의 기
강은 무너지고 백성의 원성은 실로 높았다.
이에 원종, 애노 등이 상주에서 반란하였다.
그 반란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며 마른 장작을 태우듯이 온 나라 안에 걷잡을 수 없
는 회오리를 일으켰다.
신라는 늙은 것이다.
이 진성여왕 6년에 나이 스물여섯 난 무진 사람, 청년 견훤이 한 뜻을 품고 무리를 이
끌어 서남 주현을 치자, 한 달 만에 그를 따르는 사람은 오천이 넘었다.
날렵하고 강력한 견훤의 군사들은 가는 곳마다 승전하면서, 효공왕 4년에 드디어 전주,
완산주에 이르렀다.
문밖에 나와 길을 메우며 에워싸는 주민들의 환호를 받고, 그는 자기가 인심 얻은 것을
기뻐하며 크게 외쳤다.
백제가 개국한 지 칠백 년이 다 될 무렵 당고종은 신라의 청을 들어서,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십삼만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 김유신은 황산을 거쳐, 당병과 함께
백제를 합공하여 멸망시켰다. 비겁한 일이다. 나는 지금 감히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
라, 오직 백제의 사무친 숙분을 풀려는 것뿐이다.
이 말에 주민들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었다.
백제를 다시 일으키자.
견훤은 먼저 신라를 정벌하여, 지난날 나당 연합군에게 억울하고도 무참하게 짓밟히어, 저 찬란하였던 백제국 칠백 년의 사직을 멸절시키고, 당나라에 의자왕을 노예처럼 넘겨 주어 버린 것에 대한 설욕전을 기어이 베풀어서, 이역 만리 구천의 검푸른 바람 속을 아직도 헤매며 방황하고 있을 왕의 원혼을 달래 드리자 하였다.
그리고 백제 유민들의 가슴에 피못 박힌 통분을 기어이 갚아 주겠다고 맹세하였다.
서른네 살 강용한 견훤은 천성 2년 정해 구월, 곧 경애왕 4년에, 군사를 몰아 질풍같이
신라의 남해안 일대를 휩쓸었다.
삽시간에 상주, 산양을 공략하여 불바다로 태우고, 울산, 영천을 엄습하여 함락시킨
뒤, 그 길로 계림 서곽을 쓸면서 강토가 진동하게 왕도 경주로 휘몰아쳐 들어갔다.
견훤이 무리를 몰고 성난 파도처럼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경애왕은 혼비백산 황
급히 왕건에게 급박한 정세를 알리면서
도와 달라. 하였다.
왕건은 장수 공훤에게 일만 명의 군사를 주어 지원하라.
했으나, 고려의 원군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서라벌은 거대한 산더미와 같이 덮치며 몰
려오는 후백제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말았다.
때마침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비빈 척신들과 함께 농탕하게 흩어진 오색 비단처럼 마시
고 취하며 흥겨운 풍류 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순간 산악이 무너지는 듯한 함성을 지르며, 두 눈을 부릅뜬 후백제 군사들이 도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황홀했던 요지경의 포석정은 삽시간에 피를 뿜는 아수라의 도륙장으로 변하였다. 견훤
군의 창검에 쓰러지는 비명 소리는 서라벌에 가득했다. 왕은 질겁을 하여 왕비와 후궁들
을 거느리고 성남의 이궁으로 도망갔으며, 시종들도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군사들은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능욕하고, 재물과 보화를 약탈하였다.
이때, 견훤은 이궁에 숨어 있던 왕을 찾아내, 그 자리에서 자살케 하고, 왕비를 욕보인
즉, 도성은 순식간에 통곡 소리가 하늘에 진동하는 쑥대밭으로 변했다.
이에 견훤은 왕의 족제인 김부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 분이 곧 서라벌 천 년의 사직을
마지막으로 지키던 오십육 대 경순왕이다.
견훤은, 백제 의자왕과 그 유민들의 설분을 해 준 셈이 되었다.
싸움에 이긴 견훤은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사로잡고, 오만가지 기술을 가진
공인들을 징발하여, 남녀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묶어서 열지어, 많은 보화 보물들을 바리
바리 싣고, 신라 왕도를 떠나 하늘을 찌르는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의 귀로에 올랐다.
때는 음 십일월, 동짓달 한겨울이었다.
견훤군이 대구 동쪽에 이르렀을 때, 뒤늦게 구원차 다다른 고려 태조 왕건의 정예부대
오천과 맞닥뜨려 피를 튀기는 한바탕 격전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경주 함락으로 사기
가 충천한 견훤의 날래고 용맹스러운 부대에 왕건 군사가 대적할 수는 없었다.
고려군은 풍비박산이 되도록 크게 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고려의 장군 신숭겸과 김락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왕건도 겨우 몸만 건져서 빠져 나와 탈출하였으나, 여기서 받은 타격으로 당분
간 재기의 힘을 얻지 못했었다.
견훤은 여세를 몰아 북으로 진격, 승승장구 무인지경을 치닫듯 천안을 공격하여 빼앗
고, 다음해에는 남방으로 군을 돌려 강주를 점령한 뒤, 또 이듬해에는 의성을 공격하여
이겼다. 그리고는 안동 병산으로 나와, 왕건 태조군과 격렬하게 부딪쳐 싸우다가 물경 팔
천 명의 아까운 군사를 잃었으나, 불굴의 견훤은 그 잔병을 모아 순주성을 습격, 다시 이
겼다.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백성을 사로잡아 전주로 돌아오니, 서러운 세월, 이룰 수 없는
꿈을 잊지 못하던 부성 주민들의 환호성은 하늘을 뒤덮었다.
견훤은 이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끌고 온 백공들을 시켜 전주에 왕업의 터를 닦으려
궁궐을 짓고, 견고한 성첩을 쌓았다.
완산부 도성을 토대로 한 백제 재건의 벅차고도 흥대한 꿈은, 난공불락, 도읍터를 다지
는 함성으로 가슴을 울렸으며, 토성을 곁들이어 쌓는 고덕, 동고, 남고 산성들이 산 몰랭
이에 까마득히 치솟아 오를수록 드높아졌다.
아아, 백제가 다시 일어선다.
그러나 이러한 웅도는, 당대 사십여 년 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하늘이 그의 왕업을 자손 만대에까지 허락하지 않으신 것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백제를
다시 찾아 일으키겠다는 꿈은 어리석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남을 정복하여 무력으로 천
하를 다스리는 패업을 성취하려 나선 왕자로서, 그는 인화 포용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니
면 그는 혹 앞을 내다보는 통찰의 눈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교묘한 역사의 계
략에 빠져 지금까지도 모함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서전에서는 싸울 때마다 파죽지세로 왕건의 군사를 패주시키고 기세가 등등하였으나,
경순왕 8년, 고려 태조가 운주 홍성에 주둔한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선발하여 공격했다
가, 고려 장군 금필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매, 견훤은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금필은 후
백제 군사의 머리 삼천여 개를 버히었다.
웅진 이북의 삼십여 성이 이에 대한 뜬소문만 듣고도 크게 놀라 왕건에게 항복해 버리
니, 견훤의 부하장수들조차 투항하는지라. 전세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역전되어 힘들어
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훤이 결정적으로 몰락한 계기는 집안의 분란이었다.
왕가의 내분.
성품이 용맹할 뿐만 아니라 호탕했던 견훤은 여러 명의 처첩을 거느리어, 배다른 자식
들 십여 명 아들을 두었는데.
이것이 재난의 씨가 되었다.
부왕을 도와 왕업을 일으키던 그의 용감한 아들들 중에 금강을 견훤은 가장 사랑하였
다. 키가 아홉 척이나 되었으며 지모가 놀라운 금강이 만일 장자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인가.
불행히도 그는 넷째였다.
첫째 아들 신검과 둘째 아들 용검, 그리고 셋째 아들 양검을 다 제치고, 넷째 아들 금
강에게 장차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는 견훤의 뜻에 반발한 세 왕자들은, 몹시 불안한 가운
데 질투와 시기로 속을 태웠다.
신라 경순왕 9년 삼월.
이찬 벼슬을 하고 있던 능환이 강주 도독 양검과 무주 도독 용검을 끼고 한 음모를 꾸
미었으니. 큰아들 신검으로 하여 금 침전에 든 부왕 견훤을 붙들어다가 금산불우, 곧 김
제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리게 한 다음, 아우 금강을 베어 죽이고 왕위에 오르라 부추겼
다.
참으로, 왕권이란 무엇이길래 이를 따른 신검은, 스스로 난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고
자기를 대왕이라 칭하며 보좌에 올랐다.
그때 동요 한 수가 항간에 유행되었나니
가련완산아
실부비련주
가엾도다 완산의 아들
아비 잃고 눈물 흘리네
무심한 아이들은 무엇을 미리 알고 그와 같은 노래를 불렀으리.
하늘이 징조를 누설하지 않았고서야.
허망한 일이로다. 일장춘몽이라더니 견훤을 두고 한 말이었던가. 하루 핀 무궁화의 영
화. 남아의 한세상을 걸고 풍운 속에서 전복을 벗을 날 없었으나, 말년에 이르러 털 빠진
사자가 된 채 벼랑에서 굴러 떨어진 견훤.
그는 석 달 동안을 함정에 빠진 늙은 맹수처럼 성난 울음 소리 뒤흔들어 커다랗게 으르
렁거리면서 외떨어진 금산사 절에 갇혀 있다가.
음 유월 폭염에 독한 술을 빚어, 수금된 견훤을 지키고 있던 병졸들 삼십여 명한테 모
두 다 취해 떨어지도록 먹이고는, 막내아들 능예와 딸 쇠복, 그리고 애첩 고비만을 데리
고, 가까스로 유폐지를 빠져 나와 금성(나주)으로 달아났다.
싸움터가 모자라게 평생토록 종횡무진 거침없이 내닫던 천하의 용장 불세출의 무적 영
웅이, 남도 아닌 제 자식을 피하여 적진으로 도망하는, 어이없는 비운이여.
이와 같은 일이 어찌 개인의 운수리오. 차라리 국운이었으리라.
나주에 이른 견훤은 사람을 보내어 태조에게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기뻐하며 장군 유금필과 만세로 하여금 뱃길까지 나아가 정중히
맞아들이게 하였다.
왕건은 견훤이 도착하자 예의로써 후하게 대접하고, 나이가 자기보다 십 년이나 연장이
므로 견훤을 상부라고 문무백관 위에 높여 불렀다. 뿐만 아니라 그를 송악(개경)의 남궁
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면서 극진히 섬기는 한편, 양주 땅을 그의 식읍으로 내려 주고 노
비 사십 구와 말 아홉 필 등을 하사하였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온 하늘을 얻고자, 두 마리 용처럼 서로 천하를 걸고서 일진일퇴 징
패전을 벌이던 방패와 창이, 오늘은 이와 같이 마주 앉은 것이다...
이때 견훤의 사위, 장군 박영규는 그 아내인 공주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대왕이, 지난 사십여 년 간 애써서 이룩했던 공업을 하루아침에 집안사람이 일으킨 화
로 잃어버리고, 실지하여, 고려에 항복하게 되고 말았소. 대저 정절 높은 여인이 두 지아
비를 섬길 수 없고, 충신은 두 임금을 받들 수 없는지라. 만약에 우리가 자기 임금을 버
리고서, 아비를 죽이고자 반역한 아들을 받든다면, 어찌 얼굴을 들어 천하의 의로운 이를
대할 것인가. 그러나 마침,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너그러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인심
을 얻고 있다 하니, 이는 아마도 하늘의 계시인가 하오. 그는 장차 반드시 삼한의 통일주
가 될 것이니, 글을 보내어 우리 임금을 안위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은근한 뜻을 보여서
장래의 복을 꾀하지 않으려오?
그의 아내는 대답하였다.
이에 천복 원년, 곧 고려 태조 19년 이월에 영규는 사람을 고려에 보내어 태조에게 의
사를 전하였다.
만일 왕께서 의로운 깃발을 들어 후백제를 치신다면, 기꺼이 내응하여 왕사를 돕겠나이
다.
태조는 기쁜 빛이 가득하여, 심부름 온 사람한테 선물을 후히 주어 돌려 보내며, 영규
에게 사례하여 말했다.
만일 은혜를 입어 우리가 하나로 합치고, 가는 길에 막힘이 없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뵌
후, 당상에 올라가 부인께 절하고 공을 형으로 섬기며 부인을 누님으로 높이겠습니다. 이
일은 반드시 끝까지 변함없이 지키며, 꼭 헌신적으로 보답할 것을 천지 신명에게 맹세하
겠습니다.
또 그해 유월에 와서, 견훤도 태조 왕건 앞에 진언했다.
오늘날 늙은 이 몸이 전하께 몸을 의탁해 온 까닭은, 전하의 위세에 의지하여 역적 자
식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요.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을 내어, 그 반란을 일으킨 적들을
토멸케 해 주신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왕건은 때가 온 것을 간파하였다.
내가 토멸의 뜻이 없어서가 아니라 때를 기다린 것뿐이오.
드디어, 태조는 먼저 태자 무와 장군 박술희에게 보병과 기병 십만의 대군을 주어 천안
부에 이르게 한 다음, 구월에 삼군을 호령하여 몸소 이끌고 천안까지 나아가, 선발 부대
와 합세해서 질풍같이 진격하여 신검을 치니.
그때 일선 선산에 있던 신검은 왕건의 군세에 그만 놀라 달아나다가, 선산 동쪽 일리천
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필사적인 결전을 벌이었으나. 세궁역진, 기세가 꺾이고 힘이 다하
여 가까스로 머리터럭만 건지어 달아났다.
이때 견훤은 태조와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이 모습을 관병하였다...
황산타령 연산에 이르러 신검이 군사들을 살펴보매, 살아 남아 따라온 자들은 겨우 양
검, 용검 두 아우와 장군 부달, 소달, 그리고 능환 등 불과 사십여 명의 무리들뿐이었다.
마성 땅에까지 죽을 힘을 다하여 기진맥진 도망하던 신검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
무 관료 잔병 사십여 명과 함께 왕건에게 몸을 던져 부복하며, 그만 항복해 버리고 말았
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패자의 내면은 문서로 남지 않는다.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일개 필부로서, 견훤이 왕건과 신검의 싸움을 지켜보던, 환장할
것 같던 지경을 혼자 상상해 보곤 한다. 거의 한평생을 두고 싸워 온 숙명의 적수 왕건에
게 제 발로 기어 들어가 늙은 몸을 의탁하는 비루함과, 그 숙적의 창검을 빌려 제 아들을
죽여야 하는 찢어짐. 그때 이미 견훤의 창자는 터져 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견훤은 그 싸움에서 신검이 왕건을 이겨 주기 바랐을는지도 모른다. 비록 자기
가 아들의 칼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신검이 왕건을 보란 듯이 무찔러 단칼에 버
히고, 자신이 일으켜 세운 후백제 왕업을 자자손손 이어 주기 바랐을는지도 모른다. 엄청
난 이율배반이겠지만, 아마도 그것이 어버이요, 제왕의 마음이 아닐까.
역설과 역사.
못난 놈.
외마디 부르짖음을 토하는 견훤의 터럭은 갈기같이 뻗치어 부르르 떨렸다. 그 처참한
비명이 신검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쥐어뜯으며 터뜨린 것인지 아무도 알 수
가 없으나.
견훤은 황산불사에서 시시각각 신검이 쫓기고 있는 전황을 듣다가, 울분과 번민에 싸여
괴로워하던 끝에 홧병으로 등창이 나서, 며칠 후 파란만장한 풍운의 생애를 마치니, 그날
이 고려 태조 19년 구월 팔일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일찍이 청운의 뜻을 품고 무진주(광주)를 거점으로 일어선 견훤의 후백제는, 삼한 제패
의 꿈을 헛되이 무너뜨린 채, 백제의 이름을 다시 찾아 세운 지 이대 사십오 년으로 물거
품처럼 스러져 버렸다. 거품 같은 웅지.
견훤이 어려서 아직 강보에 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 나가 밭을 가는데, 어머니가 밥을
나르면서 어린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 한다. 호랑이 젖을 먹은
견훤.
반세기의 세월을 두고, 닿는 곳마다 피비린내 진동케 하면서 왕건을 죽을 고비로 몰아
넣고 적병들을 낙엽의 산더미처럼 베어 넘기던 동방의 항우. 후백제 왕, 견훤은 이렇게
지고 말았다.
그가 숨을 거둘 때
하늘이 나를 세상에 보내면서, 어찌하여 왕건이 뒤따르게 하였던고... 한 땅에 두 마리
용은 살 수 없느니라.
길게 탄식하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초한 때 오강에서 자결하던 패왕 항우의 비극적인 죽음을 방불케 하지 않은가.
역사선생은 한숨 지었다.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금산사 절간에 유폐된 상황은, 조선의 태조 이
성계와 그 아들 태종 이방원의 관계와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은가. 태조도 태종을 죽이려
고 했었다. 그러나 왕조가 이어진 조선에서는 그것이 야망과 권력의 속성, 혹은 건국 초
기의 혼란으로 이해되고, 견훤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어서 천하에 다시 없은 패륜으
로 매도되며, 자식한테조차 버림받는 아비, 인격 파탄자, 웃음거리로 전락되었다.
그 누구의 그 어떤 꿈도 그 이름에 비비어 다시 불씨를 일으킬 수 없도록, 능멸당한 임
금. 후백제 왕. 견훤.
그는, 갔다.
왕건은 항복한 무리들을 모두 위로하고, 그들의 처자와 더불어 고려경에 올라와 살라.
고 허락하였다.
다만 신검을 부추겨 모의를 꾸미었던 능환에게 문책하기를 너는 처음 양검, 용검 등
과 함께 감히 역심을 품고 밀모하여, 대왕을 잡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웠으니,
이것이 다 너의 음모다. 남의 신하 된 도리로서 이것이 합당한가. 하니, 능환이 고개를
떨구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능환을 크게 꾸짖고 단칼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 신검에게는
그대가 왕위를 찬탈한 것은 다른 사람의 협박 때문이었지 본심은 아니었으며, 이제 왕
명에 귀의하여 죄를 뉘우치므로, 특별히 죽이지 않고 용서한다.
했다고도 하고, 죽였다고도 한다.
한편, 견훤의 사위 박영규한테는
전왕이 나라를 잃은 후에 그 신하로서, 누구 하나 위로하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경의
내외만이 천리에 멀리 서신을 보내어 성의를 표하고, 겸하여 나에게 미덕을 돌려 보내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하여 벼슬과 후한 상금을 내리었다.
신검의 군대를 격파하고 후백제를 토평한 왕건은 그 길로 후백제의 도성 완산에 들어
가, 토호와 장자들을 찾아가 일일이 살피어 안위를 묻고, 창황망조 놀란 백성들을 어루만
져 진정시키며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라.
이르고 돌아갔다.
이러한 태도는 대단히 어질고 너그러워 보이지만 미화된 부분도 있을 것이고,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지략이었다.
나라를 세웠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였던 고려 초기였으므로, 그 시
대의 사회적 지배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각 지방호족의 존재는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독자적으로 일정한 영토 영역을 지배해 나갔다. 따라서 지방 장
관은 조정에서 파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니 자연 호기로운 지방 호족들의 반란도 잦았다.
당시 형편이 이러했기 때문에 고려 초기 수십 년 동안은 왕실이 호족들과 타협하지 않
으면 안되었다. 말하자면 각 지방에 대한 호족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유력한 호족을 포섭
하여 유대를 강화하면서, 이들을 철저히 감시하거나 상호 견제케 하여,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함으로써 왕실의 안정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태조의 호족정책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것이 혼인정책이었다.
왕건 태조는 호족의 세력이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 왕실의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각 지방 호족의 딸들은 스물아홉 명이나 후비로 맞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부인들한테
서 난 스물다섯 명의 왕자와 아홉명의 왕녀를 다시 호족들과 혼인시키어, 서로간에 이중,
삼중으로 혈연적인 관계를 맺게 했다. 또한 왕녀를 신라 경순왕 즉 김부에게 출가 시킴으
로써, 지방 호족 출신인 고려 왕실이 신분으로나 실력으로나 명실 공히 신라 왕실과 대등
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대외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가히, 누대 송악 일대를 중심으
로 해상 활동을 하면서 호족으로 등장한 가문의 후예답게, 왕건은 지략이 출중했던 것이
다. 그는 신라와 후백제에서 귀순한 왕족, 귀족은 물론이고 지방 호족에 대해서도 융화정
책을 썼다. 이는 태조의 아량이나 덕망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전통적인 지위를 인정함으로
써 민심을 수습하고, 왕조의 권위를 떨치려 하는 데 실리적인 목적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왕건이 신검과 박영규에게 벼슬을 내리고, 항복한 무리들한테 위로 환대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신검의 두 아우 왕자 양검과 용검은 위리안치, 유배를 보냈다가 적소에서 죽이
고 말았다. 그리고 뒤미처 신검을 죽였다는 설도 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또 하나,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일단 백제땅을 손안에 넣은 태조는, 이 전주 완산 지방에 대하여, 한 나라의 어
버이 제왕으로서 자식인 백성들에게 결코 가져서는 안되는 편견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
았던 것이다.
아마 지나간 한평생 몇 십 년 동안, 견훤과 격심한 쟁패전을 벌이면서 호되게 당했던
분이, 끝내 피해망상으로까지 나타났던 모양이다. 그것을 결코 지울 수 없는 지독한 증거
가 있지.
바로 소위 훈요십조다.
이 훈요십조에는, 고려가, 완산부성과 서해영지, 즉 호남지방, 그러니까 백제의 옛땅과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제 유민들에게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곳과 달리 어
떻게 대했었던가가 문서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 내용과 언사가 너무나 편협하고 노
골적이어서 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후예로서 오직 믿고 싶지 않을 뿐이다.
태조가 붕어하기 한 달 전, 그러니까 등극한 지 이십육 년이 되는 사월달. 자리에 누운
왕건은 전날 신검을 함께 쳤던 장군 박술희를 불러, 친히 이 훈요십조를 건네 주었다.
자손들에게 남겨 주는 열 가지, 꼭 지켜야 할 가르침.
즉 태조의 유언이 되는 유훈이었다.
왕의 자손들이라면, 그가 누구인가.
적장자라 할 시에는 왕일 것이요, 왕자들이라면 왕실을 이룰 사람들이니. 이것은 단순
히 민가 여염의 부모가 죽으면서 자식들한테 남기는 형제화목, 근검절약,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국가 백년지대계, 혹은 천년지대계를 내다보고 이끌어 갈, 왕실의 정책 지침으로
내려 주는 선왕의 지엄한 분부인 것이다. 더욱이나 개국시조의 계명이 아닌가.
이는 고려의 태조가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몸소 지은, 고려 왕실의 헌장으로서 후
세의 귀감이 되도록 한 조항들이다. 여기에는 태조 왕건의 신앙과 사상, 그리고 정책과
규범이 단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역사적으로는 대단히 귀중한 문헌이지만, 통탄하여 마지
않을 항목이 바로 훈요십조 제8항이다.
일 점 일 획도 감히 더하거나 뺄 수 없는 고려 태조 왕건의 이 훈요십조 제8항을 그대
로 옮기면 이러하다. 제군들은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잘 들어 보기 바란다.
차현 땅, 즉 공주 차령산맥 이남의 땅 및 공주강(금강) 이남의 산형과 지세를 놓고 볼
때, (금강 유역이 남에서 북으로 역류하여) 풍수학상으로 이것들은 모두 본주를 향해서
배역의 추세를 띠고 있다. 이러한 시방풍상 동, 서, 남, 북, 상, 하, 좌, 우, 하늘과 땅
의 지형 경치 생김새는 곧 그곳 사람들 마음이 반역의 뜻을 품었다는 징조니라.
그럴진대, 이 아랫녘 지방의 무리들인 관사노비 진역잡척, 즉 천한 백성의 후손들이 발
탁되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사돈을 맺어 국정을 잡는 날이 오게 된다
면, 반드시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가) 고려에 병탄당한 원한을 깊이 품고 백
제 유민을 꼬드겨서, 군왕이 출입하는 길을 침범하여 그 어떤 참해를 끼칠는지 감히 아무
도 모를 일이다. 또는 그들이 임금과 재상들에게 아첨하여, 간교한 말솜씨로 이익을 챙기
고 권력을 독차지하면, 정사를 어지럽힐 일들이 생길 것이다.
이들이 만일에 중용되어 농권난정, 제 분수에 맞지 않게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남용
하거나, 정도에서 벗어난 어지러운 정치를 한다면, 반드시 나라에 재변이 닥철 터이니,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이곳 사람들은 결코 등용길을 열어 벼슬자리를 주지 말고, 각별
히 조심하라.
어떠한가.
이를 가히 군왕의 어질고 너그러운 대덕이라 할 말한가? 아니면 용렬하게 편협된 경계
심과 증오의 극치라 하겠는가.
이 글에는 소위 군왕이라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위선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옛글에 일찍이, 군왕은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것을 태산과 같이 무겁게 하라고 하
였다. 왜냐하면 만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임금으로서 생살 여탈권을 쥐고 있는 막중
한 지존이, 아무 생각 없이 잠깐 미소 띄운 것을 보고, 신하들은 저마다 구구히 해석하여
아첨하거나, 뜻밖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그저 뜻 없이 문득 얼굴을 찌푸렸을
뿐인데도 모시는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중신들은 그것으로 저마다 시시비비를 하다가,
급기야는 걷잡을 수 없이 억측이 번져 생각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뜻 없는 표정 하나에도 이처럼 전전긍긍, 일회일비, 우주가 움직일 지경으로 주변이
흔들리는데, 하물며 태조 대왕의 훈요십조 제8항 같은 말씀이랴. 더 일러 무엇 하겠는가.
문서로 박아서 쇠철에다 새긴들 이보다 더 강력하리오. 이것은 그대로, 고려 왕조가 계속
되는 한 철칙으로 뿌리박혀 여조 오백 년씩 요지부동 하였다. 나아가 그것은 민족의 잠재
정서가 되었다.
그러니 죄 없이 호남땅 전라도에 난 백성은, 대대손손 죄가 많아 전라도를 멍에로 지
고, 이 편협한 차별 박대를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받아야만 하였다.
오로지 백제의 옛땅이었던 탓에, 융창했던 백제가 멸망했던 탓에, 그 백제를 못 잊어
백제를 잃고도 몇 백 년씩 백제 사람 마음으로 살았던 탓에, 백제가 피먹지게 그리워서
끝내는 후백제 이름을 걸었던 탓에, 당해야만 하는 보복.
아아, 한 나라가 백성을 얼마나 깊이 사로잡으면, 이와 같은 사모와 사무침을 남길 수
있으리야.
신라가 되고도, 고려가 되고도, 백제는 살아서 백제로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백제 회복 꿈이 되었던, 후백제의 서울 전주, 완산, 신라 경덕왕
때 전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끝끝내 이들의 옛이름 완산을 고집하는 땅.
반만 년 유구한 역사 속에서 단 반 세기, 오십 년이 채 못되는 몇 세월, 한 점 꽃잎처
럼 잠시 떴다가 진 수도였지만, 이같이 서럽고 아름다운 도읍은 고금에 다시 없으리.
그래서 고려 태조 왕건은 이 땅을 증오하였다.
그가 일생에 가장 꺼렸던 곳이 바로 전주, 완산이었다.
이는 완산이 바로 이가 갈리는 후백제의 오아도로서, 견훤의 거점이었고, 지난날 견훤
과 칼끝을 맞대고 싸울 적에, 왕건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많이 남긴 곳이었으며,
언제나 강박관념의 초점으로 불씨를 이글이글 안고 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왕건은 후백제와 서른여섯 해 동안 겨루면서 참담하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었고,
그때마다 아까운 명장들과 수많은 군사를 헤아릴 수 없이 잃었으므로, 후백제인에 대한
공포심과 불신감이 대단했었다.
그러니 도무지 이 고장은 달갑지 않은 곳이었다.
고려 창건 때부터 완산은 요주의, 위험한 곳이라 하여, 조정에서는 차가운 눈을 뜨고
감시의 고삐를 잠시도 늦추지 않았다.
예를 들면, 고려 현종 3년에 거란의 사십만 대군이 침략해 왔을 때, 오죽하면 도성 송
악까지 다 내주고 황급히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공주를 거쳐 전주, 완산부
성 문턱인 삼례역에 보도시 당도하여, 막 부성에다가 왕의 숙소를 차리려고 준비하는데
태조 훈요 제8조를 잊으셨나이까. 완산은 성조역악지라, 태조께서도 악독한 당으로 여
기어 피하신 곳이매 어가 머무심히 당치않은 곳입니다.
하는 박진의 상언을 받아들여, 즉시 하던 일을 중지하고 바로 곧장 장골역으로 행차하였
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비단 현종과 박진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려의 열성조를 통하
여 조정 안 상하간의 통념으로 절어 있었다.
임금과 재상의 행신이 이러할진대, 바람이 불면 나뭇잎 떨어지듯이, 위를 따라 이 생각
은 온 백성들의 생활 속으로 켜켜이 박혀들 수밖에 없었다.
완산부성을 놓고 풍수사와 지상가들이 말하기를, 행주형이라 한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
들과 재물을 한 배 가득 싣고서, 순풍에 돛을 달아 항로에 오른 배를 지그시 잡아매어 둔
형상이란 말이다. 다시 말하여 나무랄 데 없는 지형을 구비한 산수형국이니, 그야말로 백
대천손 길이 길이 만세를 살아가기에 참으로 알맞고 넉넉한 곳이란 얘기지.
이러한 땅에 풍광도 수려하고, 물산도 풍부하며, 교통의 요지로서 사람과 물물의 왕래
가 빈번하고, 군사적으로도 요충이 되는 전주 완산이, 그 어떤 면에서, 행정적으로나 정
치적으로나 조정으로부터 괄시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그런 끔찍한 백안 외면을 당했
던 것이다.
그것은 꽃심을 가진 죄였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가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꿈의 꽃심을 지닌 땅.
그 꿈은 지배자에게, 근이 깊은 목의 가시와도 같아서, 기어이 뽑아 내버리고자 박해,
냉대, 소외의 갖은 방법을 다하게 했다.
이 억울한 땅 전주가 여러 백 년 견디다 못해, 앙금도 씨앗이 되는가, 이제 드디어, 뭉
친 세월의 고갱이가 익어서 왕재를 배태하였으니. 비로소 설분, 해원하였다 할까.
전주는 결국 왕을 낳았다.
왕의 관향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개창하여 새 나라를 세우자, 조정에서는 이 땅 전주를 왕가
의 발상지로 여기어 거룩히 섬기고, 주를 높여 부로 삼았다. 그뿐 아니라 왕가의 자제를
뽑아 전주로 보내서 숙위에 들도록 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예전에 고려 신종 때 전주사록 겸 장서기로 도임했던 이규보는 전주에 대하여 못마땅히
여기고 이렇게 말했다.
전주는 곧 완산이라고 부르는데, 옛 백제국이다. 인물은 번호하고, 가옥들은 즐비하여
고국지풍이 있다. 따라서 백성은 검소하지를 못하고, 모두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니,
그 거동이 가관이다. 그리고 완산이라 이름은, 근교의 작은 산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데 어
찌해서 고을의 이름이 되었는지 이상하다.
그는 고려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의 서거정은 공북루기에서
아조선근본지지(우리 조선의 근본이 되는 땅). 라 전주를 각별히 상서로운 곳으로 높여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아조종풍패지지, 이남국인재지연수야.
라 하여
전주는 이씨 조선의 발상지이며, 호남지방 인재의 못자리라.
고 말했다. 그리고 이후 오백 년간, 전주는 왕조로부터 극진한 공경을 받았다. 왕의 조상
뼈가 묻힌 거룩하고도 신성한 땅이기 때문이었다.
서러운 세월은 이제 다 간 것 같았다.
태조 이성계의 용안을 그리어 모신 영정을 봉안하고, 봄, 가을로 춘추 두 번에 걸쳐,
향사에 따라서 분향 제전을 받들어 오는, 장엄하고도 전아한 경기전과, 전주 이씨 시조
신라사공 이한과 그의 배비인 경주 김씨의 위패를 받들어 모신 터 조경묘를 경기전 북쪽
켠에 세워서, 이 땅이 조선의 연원이라는 것을 확실하고도 상징적으로 밝히었다.
경기전은 태종 10년에 창건하여 그해부터 바로 엄숙한 지고의 제향 범절을 갖추었지만,
조경묘를 창건한 것은 한참 뒤인 영조 4년이었다.
그때 신묘 시월 오일. 선비 이득이를 필두로 칠도 유생들은 하얗게 궐기하여 구름같이
엎드린 채 상소를 올렸다.
고구려나 신라 시대를 살펴보면 나라마다 시조묘가 있어 받들어 모시는 품이 장중한 데
반하여, 우리 조선에서는 나라를 세운 지가 장구한데도 아직까지 묘전의 창건을 보지 못
한 것을 심히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애오라지 크나큰 결전이오매, 우리 조선 연원이
사공공에서 비롯하였음은 사승(역사상의 사실을 기록한 책)에 명명 뚜렷하온바, 상께옵서
는 부디 하루를 더 미루지 말고, 어지신 성대에 묘전을 창건하소서.
이에 조정에서는 선비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묘관을 파견하고 시조 내외 두 분의 위판
(위패)을 모신 다음, 묘호를 조경묘라 하였다.
조선 개국의 왕업을 이룬 후에, 경기전을 창건하여 태조의 초상화를 족자로 모셨고, 조
경묘를 건립한 다음에는 시조의 위판을 모시었으니, 이로써 풍패지향 선원조발지기를 조
화롭게 갖추었다고 보겠으나, 늘 안타깝고 섭섭한 것은 실로 어디에 시조의 묘소가 계신
가 찾지 못하는 점이었다.
이미 너무나 멀어진 세월의 아득한 소실점 너머로 가물가물 스러져 가는 시조의 묘자리
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다만 고증도 들어가며, 바람에 섞인 티끌조차 놓치지 않고 얻은 항간의 풍문이나 전설
야담까지라도 받아 내어 더듬은 자리는, 전주 북쪽 건지산의 둘레 일원동천이었다. 그러
한즉
이곳이 왕가의 발상지로서 조짐이 짙다.
표하고, 수십만 평 도량 일대에 묻힌 민가의 묘지들을 파서 옳기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 일대를 감시 관찰하는 감관 산지기를 두어 일체 잡인이 범접하지 못하게 금역영내로
명하였다.
이곳은 성역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고종 임금 광무 3년, 기해 오월에, 왕은 열성조의 기원이던 시조의 단을 비로
소 뭇고
대한조경단.
이라 친필로 휘호를 하고, 찬문을 올렸다. 이로써 태종과 영조를 거쳐 고종에 이르기까
지, 내내 오백 년 동안, 조선 왕조 왕기의 요람지로서 전주를 웅숭깊게 받들어 왔던 것이
다.
그러나... 오백 년 유장하던 그 나라는, 지금 여지없이 짓밟히어 찢기고, 갈갈이 흩어
진 조선의 강산은 이제 일본의 더러운 발굽에 능욕을 당하고 있다.
전주는 또 다시 나라를 잃어버린 것이다.
무상하다.
일찍이 저 옛날 마한의 한 나라였던 원지국의 도읍 원산이었으며, 후백제의 도읍 완산
이었고, 조선 왕조 임금의 발상지였던 전주. 이 땅은 마한의 맨 마지막 땅, 백제의 맨 마
지막 땅, 그리고 조선의 맨 마지막 땅이 되었다. 멸망. 나는 제군들에게 이 땅의 운명을
통하여 내 조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선생이다.
역사선생은 목이 메어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강모도 목이 메었다.
그때 문득 매안을 떠나 올 때 강모를 앉혀 놓고, 바람 소리가 문풍지를 차갑게 흔드는
밤, 아버지 이기채가 해 주던 말이 떠올랐다.
그저 한낱 가그매(바람새)처럼 허공에 휘이 떠돌며 건성으로 스치면, 제 아무리 귀한
보배 쥐어 주어도, 보고, 듣고, 배우고, 깨달을 것 없으되, 눈여기어 심중을 기울이며,
뜻 깊지 않은 것이 세상에는 없으리라.
천하에 제일 몹쓸 것이 건방진 것이니라.
소인 못난 종자가 제멋에 비틀어져 꼬이고 순탄치 못하면 제 속이 뭉쳐 옹이가 생기지.
옹이는 다른 결보다 딴딴하다. 이 오직 딴딴한 것 하나 믿고 남의 고른 살 파고들며 치고
뻗고, 스스로 제 기운에 충돌을 일으키면. 이 충돌이 뭉쳐서 또 다른 옹이가 생기지. 이
러한 행티 심술을 부려 남을 해치는 버릇은 절대로 군자가 취할 바 아니로다.
모름지기 새로운 고을에 가거든 겸손히 그 땅의 내력을 들을 일이요. 그 고을이 오래고
긴 세월 걸리어 길러낸 자손들의 성품과 문화에 함께 어울려 녹아들도록 하라. 공융해야
한다.
행여라도 너의 옹이와 아집이 그들에 부딪쳐 서로 깨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무익하게
부서지지 말라. 무엇이든 너의 것으로 받아들여 살지워라.
내가 한 집안에서 겉돌면 이웃집 누구와도 사이 좋기 어렵고, 내가 한 고을에서 떠돌면
끝내는 나그네 면하기 어려우리라.
머무는 곳을 소중하게 알아야 한다.
고을이건 사람이건 바로 내가 지금 서 잇는 이 자리. 내가 만난 이 순간의 이 사람이
내 생애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인즉.
그것이 부실한 징검돌이면요?
라고 그때는 묻지 못하였다.
생애라.
왜 옛어른들은 사람이 살아 있는 한평생 동안을 가리켜, 날 생 옆에 물가 애, 끝 애,
벼랑 낭떠러지 애자를 붙였을까.
산다는 것은 그렇게 늘 아슬아슬한 백척간두, 백 자나 되는 장대끝에 까마득히 곤두서
서 위태로이 흔들리며, 자칫 고꾸라져 떨어진 채 물살에 섞쓸려 떠내려가기 쉬운 것이란
말인가.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데 만일 딛어도 흔들리지 않고, 흔들어도 뽑히지 않는 실직한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면 그 징검돌은 그 얼마나 커다란 바탕이 되랴.
그러나 그때 그렇게, 국경을 넘어 중국의 동북 만주로 가려는 기차에 몸을 맡긴 강모
는, 전주역 궁문 같은 골기와 검은 지붕을 바라보며 문득, 물살이 세찬 여울목에서 부석
을 잘못 디디어, 그만 징검돌이 뒤집힌 채, 허공에 뜬 발로 허우적이며 어디론가 둥둥 떠
내려가고 있는 듯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었다.
강태와 함께 가는 봉천도 누루하치 청조의 발상지라고 하였다.
다 같은 사나이로 이 한세상 태어나서 누구는 천추 만대의 위업으로 나라를 세우고, 누
구는 징검돌을 헛디디어 허방다리 제 인생에 곤두박질치고 말아. 붙잡을 길 없는 허공,
빈 손짓도 못해 본다.
아아, 사실은, 손짓마저 싫어.
(이미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다).
그냥 이렇게 떠내려갈 뿐.
가는 데까지.
그러나 기차는 어둠이 무거운 듯, 가려고 미끄러지다가 다시 뒷걸음을 치고, 뒷걸음을
치다가는 앞으로 덜컹, 급정거하면서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기차는 검은 여울 같았다.
나둥그러진 나를 싣고 과연 너는 어디까지 가려는가.
물 위에 뜨는 돌.
뒤집힌 돌.
역사선생은 무심한 땅이 그토록이나 절실한 역사의 생명체로서, 지리적 분류에 의해 흙
덩어리 지명이나 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소 그도 인간처럼 한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비장하게 가르쳐 주었고, 아버지는 왕조와 성씨의 관향에 대하여 그다지도 간곡하게 말씀
하셨지만, 왕업과 성씨의 주춧돌은커녕, 돌멩이 하나 제대로 가슴에 박지 못한 나는, 살
아서 이 위에 무엇을 지으리.
다만, 떠내려, 떠내려갈 뿐.
그 부유와 부랑의 물살에 실려, 만주 봉천, 이제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가 아니라 청나
라 왕조의 발상지, 강모는 삭풍 속에서, 맨 처음 향리를 떠나던 전주로 입성할 때 아버지
가 들려주시던 말씀과, 그 전주를 버리고 떠나 오던 정회를 되돌이키며, 머무는 곳을 소
중하게 알아야 한다.
하였으나, 이 낯설고 먼 세상의 어디에도 도무지 마음을 내릴 수 없는 자신이 춥고 쓸쓸
하여 서성거린다.
그는 전주가 그러웠다.
18. 이름이 바뀌어도
매안의 문중 둥지에서 새새끼 날개 비비듯이 옴막하게 지내던 강모가, 처음으로 도회지
전주에 들어섰을 때, 과연
웅주거읍.
이로구나, 실감이 났지만.
사실은, 기차에서 내려 개찰구로 나오면서 정거장 역사를 본 순간, 규모가 하고 우람하
고 화려하기 궁궐 같아서, 늘 말로만 듣던
(경기전인가?)
하였고, 막상 경기전을 보고는 엉뚱하게
(전주는 후백제 서울이었다더니만, 여기가 궁궐이었나 보다.) 혼자서 짐작하며 공연히
감회롭게 그 곁을 맴돌아 거닐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공연히는 아니었을 것이다.)
강모는 그 어떤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제 핏속을 황사처럼 떠돌며 그렇게 자꾸
만 경기전이나 조경묘.조경단 쪽으로 발길을 이끌어갔던 것은,어쩌면 그가 전주 이씨로서
전주에 본을 가지고 있는 조산왕조 영명하신 한 임금의 대군 낙남파 종갓집 종손이기 때
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와 문득 반추해 본다.
이 집안에 종손으로 태어나 부끄러울 것도 물론 없었으나 그렇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본 일도 없이, 그저 산과 내와 길처럼 당연한 일샹의 풍경이라 여겨졌던 것이 그에게는
곧 종손이라는 이름이었으며, 그이름에 걸맞는 종손 노릇한 것은 지금까지 쥐뿔도 없지마
는, 그의 유전에 끼쳐 내린 피의 인자는, 이 노릇과는 무관하게, 저절로 저 홀로 제 선조
와 제 조상의 숨결 흔적을 그리며, 그 기색의 언저리로 뻗치어 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못났으나, 이 나를 있게 한, 피 한 점, 살 한 점.에 수백 년 수천 년을 거슬러 돌아
가 닿고 싶은 그리움. 설령 그것이 비록 채송화씨 반토막만한 인자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
라도, 기어히 한번 가 닿아 보았으면 싶은 안타까운 절실함.
그런 것들이 전주의 인력이었다.
매안에서 전주는 그다지 먼 곳이 아니었고, 문중 어른들 출입도 잦았던 곳이며, 무엇보
다 매안 이씨들의 관향이어서, 강모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전주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
를 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 유서깊은 옛 도시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뿐만 아니
라 이 유서깊은 옛 도시에 모셔진 시조 할아버지 이한 공과 선조의 유적들에 대하여 강모
는 각별히 여러 번 이기채한테서 듣곤 하였다.
사람이 제 근본을 잃으면 안된다.
아버지 이기채는 말끝에 항상 이러한 다짐을 엄숙하게 두며, 잊어서도 안된다.고 눌러
일렀다.
제 한 몸 제 핏줄에 대해서도 그렇거니와 한 나라의 근본 또한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느니라. 너는 지금 오백 년 아조의 발상지로 공부하러 떠나는 것인즉, 조그만 자취에서
크고 깊은 뜻을 꼭 발견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알겠느냐.
강모는 아직 당도하지도 않은 전주땅이 미리부터 숙세의 연처럼, 어린 그를 감아 들이
는 것을 그때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경기정을 보게 되었다.
경기정에서 몇 걸음만 동쪽으로 가면 오목대가 있었지.
전주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 오목대, 앙징맞고 조그마한 비각 하나 서있는, 언덕같이 나
지막한 동산 기슭, 그러면서도 전주 울안이 한눈에 들어와 안기는 이곳, 햇볕 따스한 양
지밭을 정다웁게 좋아하였다.
고려말, 우왕 6년, 경신 중추 구월 상천에, 자군 이성계가 양광. 전라. 경상 삼도 도순
찰사로서 군사를 이끌고 남정하여, 운봉 황산에서 노략질하며 날뛰던 왜구 아지발도를 무
찌르고, 승전고와 더불어 개경으로 돌아가던 길에. 때마침 전주부성에 당도하여, 이 도도
록한 동산 허리를 지나게 되매. 조상들이 기식하다 떠나간 자취 아직도 역력한 옛 선영의
땅을 밟게 되니, 후손으로서 핏줄이 둘리는 그리움을 어이 가누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 아직도 이 부성에 여전히 눌러 사는 핏줄기 동종 종족들과 어우러져 한바탕
회포 어린 연회를 베푸셨다는 바로 그 자리에, 조선 말엽 고종 임금은 광무 4년, 친필로
태고조황제주필유지.라 새긴 기념 비석과 더불어 단정 아담한 기념 비각을 세웠다.
태조 황제께서 머무셨던 유적지라.
조선의 임금으로서 나라의 문을 닫는 황제가, 그 나라의 문을 열었던 조상의 웅보 머무
신 자리에 한점 필묵을 피처럼 눈물처럼 떨구어 점점 이 새긴 글귀가, 언덕 아래 잠만동
밥 짓는 저녁 연기 쏘이면서, 푸른 비면 자욱토록 이끼로 돋는 오목대, 모여 앉아 졸기
좋게 사방으로 평평한 둔덕이어서 황소의 잔등 같은 이곳에, 사람들은 봄이변 봄대로, 할
미꽃 필 무렵부터 뒷짐지고 느릿느릿 손자 손녀 데불고서 졸러 나오고, 여름이면 여름대
로 서늘한 바람 이마에 받으면서 삼삼오오 나무 그늘 이만큼 저만큼씩 만면홍소 한가로웠
다.
여산 역도랄 일하샤 지바로 도라오실제
열희 마사말 하날히 달애시니
셔ㅂ 사자랄 꺼리샤 바라랄 건너실제
이백 호랄 어느 뉘 청하니
한고조가 여산으로 데리고 가던 부역군들을 잃으시어, 나머지 사람들은 다 집으로 돌
려보내고 돌아오실 때에 함께 따라가고자 지원한 열 사람의 마음을 하늘이 달래시었도
다.
(목조께서) 서울에서 새로 부임해 온 안렴사를 꺼리시어 바다를 건너 덕원으로 옮기실
때에, 이백 호나 되는 세대를 누가 따라오라고 시켰는가(하늘이 시킨 일이로다)
조선의 개국을 송축하고, 건국 대의를 널리 알려서, 왕씨의 나라가 이씨의 나라로 바뀌
는 역성 혁명이 한갓 인간의 욕심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을 합리화하여, 민심을
순하게 이끌어 돌리려 한 장엄 서사시, 용비어천가, 제18장.
이는, 한나라 고조 유방이 일찍이 고을 현관의 명을 받아, 진시황의 장례지인 여산으로
무덤 부역군들을 인솔하여 갈 때, 도중에 사람들이 많이 도망가매 말리지 않고 모두 놓아
주며 가라.
고 했는데, 그 중에서 십여 명이 끝내 함께 남아 따라가기를 청하였으니. 유방이 이로부
터 인심을 모아 훗날 큰일 이룰 기초를 닦았다.
이러한 예처럼, 목조가 아직 나이 스물 안팎으로 전주에서 천호장 토호의 위세를 떨치
며 살고 있을 때, 어쩌다 요괴스러운 풍운에 휘말리어, 관기 하나를 두고 주관이던 산성
별감과 다투다가 사이가 버그러져, 필경에는 주관이 병사들을 풀어 목조를 해치고자 하는
지라, 목조는 목숨이 위태로워 본의 아니게 조상 대대로 뼈를 묻으며 살아온 선영 고향땅
을 등지고, 깊은 밤 어둠을 타서 북방 천리 산 설고 물 설은 강릉도(강원도) 삼척 머나
먼 곳으로 옮아가니, 집안 권속들 말고도 그를 사모하여 따라나선 고을 백성들이 무려 백
칠십여 호나 되었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고향 전주에서 다투던
산성별감이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하매, 이를 꺼리어 다시금 무리들과 함께 바닷길을 좇아
삭방인 함길도 덕우너으로 떠날 적, 이백여 호나 되는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목조를 쫓아
갔다.
고, 용비어천가는 노래하였다.
그 목조가 태어나 자라고 장성하기까지 살던 곳이 바로 오목대 무릎 가까이 맞은편 남
동쪽, 어질고 도도록한 둔덕 마을, 오늘은 교동이라 하는 자만동이었다. 이는 전주로 보
면 동쪽이었다.
사람들은 이 둔덕에서 조선의 임금 이씨가 났다 하여 발리산.
이라고도 불렀는데, 여기 목조의 태생지에다, 고종 황제는 광무 4년에 친필로 목조대왕
구거유지.
라고 쓴 비석과 단아한 비각을 세웠다.
목조대왕께서 사시던 옛 자취가 남아 있는 빈터.
이곳은 이목대였다.
아마 장군 이성계도, 전주부성 다른 곳을 다 놓아 두고, 하필이면 오목대에서 승전을
자축하려 일가 친척 여러 붙이들을 불러 모아 잔치한 것은, 그의 사대조께서 태어나 사시
던 자리가 하도 기꺼운 탓이었으리라.
나의 할아버지, 이 풀을 밟으셨던가.
얼굴도 목소리도 이미 보거나 들을 수 없고, 그가 세상에 났었다는 실감조차 하기 어려
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고조부. 그러나 이보다 더 아득히 짚어 오르고
오른다 해도 이는 분명 나와 한몸이리니. 그 핏줄의 사다리 한 칸인 이성계는 할아버지
숨길이 행여 어디 묻어 있을세라 더듬어 보았을 것이다.
제주의 삼성인 고, 부, 양씨 시조가 솟아난 곳이라 하여, 패인 듯 들어간 움묵움묵한
구멍자리 세 개 흔적은 신비스러운 전설로 실화처럼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래서 경건하
게 보존하고도 있으나, 오백 년 왕조의 비롯인 전주 이씨 시조의 위판이 모셔진 묘소 조
경단은 오히려 아는 이 적고, 더욱이 이목대는 그저 한낱 소풍 노는 언덕배기 동산 정도
로 스치고 마는 것이 오늘의 시류다. 그러나 저 바람에 흩날리는 풀씨 하나도 오목대 이
목대 앞에서만 나고 죽기 수백년 하였다면, 오로지 그가 씨를 이어 살아온 세월만으로도
그 풀씨는 귀물로서 보존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역사이랴.
강모의 전주고보 역사선생은 말했었다.
임금이 나실 땅은 지령이 역시 다른가. 물맛조차 예사롭지가 않아서 녹두묵도 이 오목
대 이목대 아래 자만동의 묵샘골 물로 빚으면, 그 빛깔이 하도 곱게 물들어 차마 먹기 아
까울 만큼 선명한 노랑색으로 맑고 깊어지는데, 어찌 이런 조화가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
었다.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애련하다 할까, 난들 난실 묵채를 썰어서 가지런히 놓고 파,
마늘, 참기름에 고춧가루, 깨소금 갖은 양념 다하여 섞은 간장을 얌전하게 얹거나, 다른
음식 웃저지로 살짝 몇 닢 고명 올릴 때, 자칫 스러질까, 먹기도 전에 바라만 보아도 입
안에서 녹아 버리는 전주교동 녹두묵, 청포.
이는 천하의 진미라 해서 강호에 이미 알려진 바.
음식 사치 유명한 전주부성의 전주 팔미 혹은 전주 십미 맛깔진 음식들 중에서도 뽄이
나게 이름 높은 묵샘골 녹두묵은, 이 동네 샘물이 아니면 도저히 이 빛깔과 찰기와 연함,
맛을 낼 수 없다 하였다.
물이 이처럼 영특하여 이곳 물로 기른 콩나물 역시 사정골 노내기샘 콩나물과 더불어,
부성 인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나라의 미식이란 이름을 얻을 만하였으니.
구성없이 막대기처럼 자라 뻗치지 않고, 잔뿌리 터럭 하나 달지 않으면서, 작달막하고
통통하며 고소한 전주 콩나물.
여기다가 매콤하고 빨갛게 갖은 양념 고춧가루, 간장에 파, 마늘, 참기름을 넣고 무쳐
서 끓이든지, 그냥 소금에다 파만 살짝 송송 썰어 넣어서 말갛게 끓이든지 간에, 한 숟가
락 후루룩, 목을 넘어가면 막혔던 오장이 다 시원하게 풀리며 머리 속이 명쾌해지는 이
콩나물국은, 외지인한테는 별미였지만 전주 사람들에게는 필수 음식이었다. 콩나물은 전
주만의 독특한 바람과 토질 탓으로 자칫 생기기 쉬운 풍토병을 달래어 순화시켜 주는 음
식이기 때문에, 전주 사는 사람들은 이를 상식하였던 것이다.
온 고을의 체질에 끼니마다 스며들어 병을 미리 막아 주고 소리 없이 다스려 주는 인덕
이야말로, 어찌 한낱 물의 작용이며 콩나물의 성분만이겠는가.
이미 왕재를 품음직한 모태 지당으로, 만복이 우러나는 복지 아니고서는 이만한 물과
음식을 낼 수 없으리라.
이런 곳이어서일까.
옛날에 이야기책 그 재미난 춘향전의 완산판 목판본을 찍어내던 자리 또한 곧 여기 아
니면 저기일 것이라고, 나이 자신 노인들은 손가락을 들어, 즐비한 교동 기왓골 지붕 위
를 가리키며 짚어 보곤 하였다.
아 저 망헐 놈의 왜놈들이 기냥 저 좋은 경기전을, 이까짓 게 다 뭐냐고, 이태조 수용
(초상화) 뫼신 전각이나 한 채 허고 그 옆에 재궁이나 조께 게우 냉게 놓고는, 싸가지 없
이 반절 넘게 모도 싹 안 헐어 부렀능가잉. 그러고는 서쪽으로는 터를 뭉개서 즈그 보통
학교 터억 지어 앉히잖었어? 저것. 시방은 또 무신 심상소학굔가 머잉가람서? 썩을 놈들.
오목대를 거쳐서 쉬엄쉬어 소풍 삼아 이목대까지 놀러 나온 노인들은, 굽어보이는 발
아래 경기전 수풀을 아쉬웁게 내려다보면서, 단발령에 머리가 깎여 버린 뒤통수처럼 베어
넘겨진 학교터의 회색 양회 우람한 교사를 두고, 수군수군 한탄하곤 하였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야 감히
지차계하마 잡인모득입.
이라고 두 줄기 선명한 글씨로 화강암에 각인하여
누구든지 이곳에 이르러는 말에서 내려야 하며, 잡인들은 들어갈 수 없다.
고 홍살문 입구, 돌사자 등판에다가 경건 우뚝하게 세워 놓은 하마비 비석의 위용이 삼엄
한 경기전을, 감히 언덕 위에 놀면서 장난같이 내려다볼 수가 있었으랴만, 국망은 무상하
여 촌로 아동들마저도 조선 개국시조의 할아비 탯자리 이목대 옛터에서 잔디풀 뭉그러지
도록 깔고 비비고 뒹굴어 노니나니.
목조 유아시에 동네 아이들과 진법놀이를 유난히 즐기사, 매양 이목대 둘레 남천 냇
가 자만동 언저리, 산 좋고 내 흘러 경치가 빼어난 이 동천에, 한 그루 커다란 둥구나무
를 본부로 끼로 놀았대서, 훗날 사람들이
장군수.
라 이름 붙인 나무, 그 오래고 묵은 둥치만이 몇 백 년 세월에도 죽지 않고 아직 살아,
그을음 같은 가지끝에 여린 잎을 피웠다, 졌다, 숨쉬고 있을 뿐.
조선이 참으로 있었던가.
꿈결을 더듬는 듯하다만.
한 나라가 일어서고 무너지는 것은 늘 톱니를 물고 있어, 고려 말엽, 고려는 기울고 이
성계는 웅비할 때.
오목대 축연에서 바야흐로 흥겨운 승전의 잔치가 무르익을 제, 솟구쳐 터져 오르는 야
망의 회오리를 미처 가누지 못하고 이성계가 기염을 토하자.
같은 자리에 종사관으로 함께 종군하였던 포은 정몽주 공은, 나라를 훔치고자 하는 참
람한 이성계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보다못해 분연히 자리를 차고 일어나, 홀로 구월장천
가을 바람에 갈기 날리며 말을 몰아서, 전주 남천 자만동 목조가 멱감던 냇물을 건너, 동
서학동 좁은목 병풍리를 휘돌며, 드높은 남고상 산성의 낡은 옛 성터에 이르러.
비로소 목을 놓았다.
층운이 감돌다 흩어지는 산 상봉에 우뚝우뚝한 바위 덩어리, 튀어나올 듯 거꾸로 쏟아
질 듯 기괴수장한데. 수십 명 장정이 떼를 지어 걸터앉을 만한 만경대 너럭바위, 절경으로
빼어난 산마루에 서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흐르는 물, 바람 소리까지도 내 인군
그리어 외오는 듯 애절하여. 아득히 저 먼 송도, 북쪽 하늘 우러르며 무릎 꿇어 절을 하
고는, 창자 에이게 통곡을 쏟아 소리 높여 울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긴 호읍 끝에 저미는 절통한 심사를 피로써 먹물 찍어, 남쪽 바위 벼랑 가파
른 석벽에다 한 자 한 자, 새기어 남기니.
쇠하여 스러지는 왕조를 한 조각 단심으로 곧추어 버틸 수만 있다면, 그 한 몸, 천 년
이라도 바람닫이 낭떠러지 깎아질러 울며 울며 서 있었으련만.
만고의 충절로도 움터오는 여린 잎 맹아를 막을 길이 없었던가.
그저 다만 애오라지 규암석 돌벽에다 슬피 남긴 석벽제영 우국시 한 수만이, 조선 왕조
오백 년 다 지나고. 그 나라도 망하여, 같은 시름 끌어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표표하
게 한 점 한 획 지워지지 않는다.
천인강두 석경횡
등림사아 불승정
청산은약 부여국
황업빈분 백제성
구월고풍 수객자
백년호기 오서생
천애일몰 부운합
교수무유 망옥경
천 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홀로이 다다르니 가슴 메는 근심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누른 잎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구월의 소슬바람 나그네 시름 짙고
백년 기상 호탕함을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지고 뜬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
하염없이 고개 들어 송도만 바라본다
이 우국시를 지은 지 십이 년 만에 고려가 망하는 국난을 당하여, 끝끝내 일편단심 충절
을 지키던 포은 공은 이성계 일파의 일격에 개성 선죽교 다리 위에서 피를 뿌리며 순하였다.
그때 흘린 핏자국이 세월과 빗물로 쓸어도 쓸어도 지워지지 않고 오늘까지 선연히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고려의 마지막이었다.
기묘한 우연이라 할 것인가, 역사의 필연이라 할 것인가.
이성계가 성씨를 바꾼 개국의 포부를 공고히 다진 곳은 오목대, 자신의 조상이 태어나
신 태실이었다.
그리고 포은이 선 만경대 남고산성 자리는, 멸망한 후백제의 왕 견훤이 천하 강산을 얻
고자 철옹성을 굳게 쌓으며 왕건에게 대적하던 견훤산성이었다.
만년을 가라 하면 길다 했으랴.
그보다 더 창창히 우거져 뻗어 나가고 싶었을 후백제.
분하고 억울하다. 때를 얻지 못한 천고의 영웅이, 좀처럼 세상에 나기 어려운 불세출
호걸로서, 웅대한 한 나라를 꿈꾸었으나, 정사에도 제대로 남지 못하고 한낱 역사 속의
야담이나 설화 전설처럼 떠도는 견훤. 조롱당하며 몰매 맞는 역사의 미아. 일어서다 부러
진 왕국의 꿈이 나는 오늘도 아깝고 서럽다.
전주고보 역사선생은 목울대에 걸린 비분을 삭이지 못하며 말했었다.
그런데도 고려의 아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의 후백제, 견훤편에 태조 왕건의 편지를 빌
어 이와 같이 적었다.
(견훤은) 털끝 같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버리고 임금(경애
왕)을 목 베어 죽이며, 궁궐을 불사르고, 재상과 대신을 몰살했다. 또한 백성들을 상하
없이 도륙하였으며 임금의 후궁들이면 붙잡아 능욕하고, 보물이면 빼앗아 바리바리 싣고
갔다. 원흉으로 친다면 걸, 주보다도 지나치고, 잔인한 것으로 친다면 흉악한 짐승보다
더 심할 것이다.
이 글은 포석정 사건을 두고 쓴 것이다.
오욕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마디 변명할 기회도 가지지 못한 견훤.
그때 학교에 갓 입학한 까까머리 학생들은, 영문을 다 알 수 없는 숙연함에 휩쓸리어
선생과 함께 잠겨들면서 침묵하였다.
그 견훤왕 당년에 후백제 왕의 터, 도읍을 견고하게 다지고, 백세, 저 만세 후 자손 대
대로 백제같이 강성하며 융흥한 나라 이어지이다. 도읍지 완산에 성첩을 쌓을 때.
완산 동편 기린봉 ㅈ은 어머니 가슴 같은 봉우리 바로 옆에, 규암 돌이 뾰죽뾰죽 창끝
인가 칼끝인가, 첩첩바위 겹겹으로 온 산을 뒤덮어서 하늘이 준 천연요새를 이른 중바우
산, 흑운모 검은 갈색 번뜩이는 편안들이 천 장 만 장 방패처럼 날카로이 둘러선, 이 승
암산에다, 견훤은 동고진을 두고 동고산성을 쌓았다.
기린봉에 달 뜨는 밤이 오면, 동고산성 굽이치는 성벽들은 달빛에 푸른 몸 드러내며,
산꼭대기 휘감아 넘실대는 성곽들의 강물을 아득히 이루었다. 여기서 기린봉 능성을 가파
르게 타고 내린 산성은 다시 동정리 인후동 동쪽을 엮어서 휘엇하니 반달을 그리며 진안
가는 길목 서낭당이를 감싸고 돌아, 그 안에 물결치는 산과 내 보듬어서 뺑 돈다. 그리고
는 견훤의 왕궁터였다는 물왕멀 동네에 잠시 머물어 한숨 돌리다가, 이제 남고산 남고진
에 길고 긴 용의 꼬리를 힘껏 쳐올리니, 이것이 남고산성이었다.
역사 속에 단 사십 년 살고 갈 한세상의 후백제로서, 그 도읍지 서울인 전주 완산을 이
토록 반월성으로 드높이 단단하게 쌓은 성축은, 여덟 자 높이에 길이 물경 팔천구백삼십
척이나 되었다.
이것을 성세의 백제 왕국, 부여의 반월성 일만 삼천여섯 척에 비긴다면 다소 모자라지
만, 병산성과 청산성에 견준다면 예닐곱 배나 되는 길이요, 웅주 공산성에 댄다면 거의
두 배에 이르는즉.
두 나라 역사의 길고 짧음과, 문화 깊고 낮음을 생각한다면, 그 규모 방대함이 어떠하
였으며, 견훤의 야심은 또 얼마나 만만하였던가, 그리고 하늘의 가슴을 때리는 백제 유민
들 사무침은 어느만 하였던가, 알 수 있겠건만.
결과적으로 후백제는 졌다, 진 것은 열패다, 졌으면 없어져도 좋은 것이다, 라고 이건
고려는 못난 후백제는 문질러 버렸다. 날파리 하루살이나 개미 한 마리처럼. 그리고 후백
제를 역사 속에 야유거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제군이여, 과연 그러한가. 조선은
망했고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유린하며 짓밟아 국호마저 빼앗았다. 지금 이순간만 본
다면, 조선은 지고 일본은 이겼다. 그러니 조선은 못났고 열악하며 깡그리 없어져도 좋은
나라인가? 빗자루로 쓸어 버리듯, 이 한 나라를 역사 속에서 슬어내 버려도 좋은가 말이
다. 또 일본이 어찌 되었든 이 나라를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으니, 일본은 강하고 아름답
고 옳은가? 만일에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라진 백제와 후백제에 대해서도
반드시 마음을 조아리고 엄숙하게 그 진정을 다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역사선생의 이름은 심진학이었다.
나루의 학, 참 절묘하지.
라고, 첫 시간에 자신의 이름을 툭, 툭, 툭, 백묵으로 칠판에다 써 주고는 혼자말처럼 탄
식인 양 내뱉던 선생의 음성과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나는, 시간과 역사의 나루 위를 날아다니는 한 마리 학이다.
역사선생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지었다.
그것이 어디 비단 나만에 그치는 일이겠는가. 시간의 아들인 우리 모두의 운명이리라.
그리고 그는 유리창 바깥에 누런 아지랑이가 부옇게 드리워진 사월의 낮은 봄 하늘을
내다보았다.
저것은 황사다. 저 황사는 중국의 대륙 북부나 몽고 만주 황토가, 봄이면 이만 때쯤,
바람을 타고 온 하늘에 가득 끼여 노란 모래 흙먼지로, 여기 우리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
까지 누렇게 밀려오는 것이다. 겨우내 얼어붙어 잠자던 바람이 흙을 깨워 데불고 날면 이
토록 수만 리를 머다 않고 뒤덮으며 흔드는 것이다. 저것을 그저 봄바람 한때라고 생각해
버리면 일과성으로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이 먼지 하나가 중국의 몽고 만주 어느 산맥과
들판에서 홀연 바람에 말려 떠오른 끝에,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대동강 건너, 한강을 건
너고 금강을 건너서, 이역 만리 타국땅 조선의 산천 초목을 온몸으로 쓸면서, 지금 이 남
방의 전라도 하늘을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몸소 느끼어
보라. 아마 이 바람과 먼지가 무심히 스치면서 내 몸에 끼치는 감촉이 완연 다를 것이다.
국경을 넘어온 바람.
제 나라 땅을 떠나 남의 나라 땅으로 날아가는 흙.
유리.
나는 왜 그런지 봄이 와서 목련꽃 피고 황사 아득히 흩날리는 사월이 되면, 회색으로
내려앉은 하늘의 먼 자락에 누런 먼지바람 회오리치며 몰려오는 이 풍경이 사무쳐 피고
설레곤 한다.
내 아직 가 본 일도 없는, 이야기 속의 중국과 몽고 만주가 육화 체감되어, 내 살에 실
제로 파고드는 전율을 소스라치게 느끼는 것이다. 그때 나를 떨게 하는 것은 연결감이다.
내가 바둑알처럼 따그락, 따그락, 따로 떨어져 뒹굴면서, 흑이냐 백이냐로 명확하게 갈라
져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경계를 넘나들며 섞이는 황홀
감을 나는 맛보는 것이다.
내가 비록 이곳에 있지만 분명 저곳과 이어져 있구나 하는 실감.
보이지 않는 진맥의 실낱이 떨리면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그 존재의 밀의를 어떻게 설명
할 수가 있을까.
역사에 대한 인식도 나는 마찬가지라고 본다.
내 시간 위를 흘러 지나가는 저 봄날의 흙먼지 한 무리처럼, 역사라는 것을 한낱 하잘
것없는 잡담으로 치거나 번거로운 바람, 혹은 털어내 청소해 버릴 흔적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나와 무관하여, 이미 죽어 버린 자들의 잠꼬대 같은 기록에 불과한 것이 되겠지만.
티끌같이 작은 일도 내가 온몸을 열어 놓고, 오관을 다하여, 마음으로, 느낌으로 받아
들인다면, 역사는 바로 그 순간에 나와 한 몸을 이루어 체화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나로부터 엮어 보는 역사.
역사의 현장을 교과서에서 찾지 말라.
바로 나 자신에게서 역사를 찾으라.
내가 없는 역사를 무엇에 쓸 것이냐.
까마득한 고조선의 단군 할아버지로부터 몇 천 년을 편년체로 지루하게 엮어 내려오는
역사는, 나한테까지 당도하기도 전에 기진맥진 지치고, 외우기 너무 멀어 오다가 길을 잃
어버린다.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누구인가.
정말 궁금하여 아버지, 아버지가 살던 땅,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살던 시대, 증조부,
고조부, 선세 옷깃을 찾아 오르고 오르면서 드디어 단군 할아버지에 도달하는 길은 절실
하고도 구체적이다.
내가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 동화같이 소박한 의문을 가진 까닭에, 자라서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제군들도 일찍이 낙화암과 삼천 궁녀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백제 후
인 아니라도 삼천리 강토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지.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성품이 음탕하여, 궁녀는 삼천이나 거느리고 주지육림에
서 호화 방탕 헤어나지 못한 채, 정사를 돌보지 않아 국정이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임금을
떠났다, 고 하며, 나당 연합군에게 결국 백제가 망하게 되자 이 삼천 궁녀는 스스로 낙화
암 절벽에 몸을 날려 백마강 푸른 물로 떨어져 죽었다, 는 이야기 말이다.
나는 처음 그 이야기를 사랑방 어른들한테서 듣고, 놀랐다.
궁녀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삼천 명이나 되는
여인들이 한자리에서 모조리 죽어, 꽃 같은 목숨을 가차없이 깊은 물 속에 떨어뜨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는 말에 놀랐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장의 목을 껴안고 진주 남강 푸른 물에 몸을 던진 논개부인, 단 한 여
인의 죽음도 청사에 길이 남는데, 삼천 명이라니.
달아나다 붙잡혀서 참수 능욕을 당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 못하는 짐승 벌레들도 살
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본능이거늘, 영리하고 꾀 많은 사람이 삼천 명씩이나 한꺼번에 그
처럼 스스로 제 목숨을 초개같이 내버릴 수 있는 나라. 백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승의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에 인산인해를 이루어도, 정승이 죽으면 지나가던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것이 통상 권력의 속성이 아닌가. 그런데 이미 망
해 버린 나라의 일개 궁녀들이, 삼천 명 모조리, 제 임금을 기리어 목메이게 부르며 물에
빠져 죽을 만큼 사모할 만한 왕이라면, 의자왕은 결코 소문난 것처럼 패덕하지 않았을 것
만 같았다.
궁녀들 또한 의혈 남아나 조국을 위해 비밀 결사를 한 조직원들도 아니면서, 황음한 임
금 곁에서 사치와 음욕과 분냄새, 비단옷 허영에 길들여진 노리개라면 도저히 그러할 수
없는 절개 지조로서 결연히 투강하여 백제와 임금과 자신을 끝내 지켰으니. 이는 의인들
중의 의인이 아니겠는가.
논개만 못할 것이 무엇이랴.
궁녀가 이러할 때, 백성들은 어떠했을까.
나는 문득 생각하였다.
만일에 내가 망하여 죽게 된다면, 나 따라 죽을 사람, 셋 나오기도 어러울 것이라고.
셋이라니 당치않다. 아마 단 한 사람도 어려울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다지도 뜨거운 심장을 망하는 조국에 내던져 바치는 의인들을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궁녀들만도 삼천 명씩이나 가진 나라는, 망해도 좋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몹시 억울한 비밀을 품고 무너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는 들었다.
그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의자왕은 어떤 왕이었으며, 백제는 과연 어떠한 나라였을까.
나는 그렇게 묻기 시작하였다.
만일 내가 경주나 개성이나 한양의 소년이었다면,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도 달랐을
것이고, 내가 역사에 던진 최초의 질문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라도 소년이었
다. 그리고 백제의 소년이었다.
그때 사랑의 노인 한 분이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쟁쟁히 울린다.
하이고오, 아깝제잉. 아깝고말고. 아 그 삼천 궁녀는 긍게 백제 망헐 때 낙화암에서 떨
어져 죽고 만 거이 아니라, 시방 천삼백 년도 더 지낸 지금 오늘끄장도 풍덩풍덩 물에 빠
지고 있지, 암먼. 아직도 죽고 있어. 아매 앞으로도 영원히 안 끄치고 그렇게 죽을껄.
원혼인디 머.
물론 궁녀의 숫자가 꼭 이천구백아흔아홉 명 다음의 삼천 명이 아니라도 나는 좋았다.
수학적 숫자는 상징 앞에서 무의미하다.
다만, 나는 이 순박한 상징을 통하여,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 앞에 서게 된 것이다.
후에 보니 이 부분이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편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백제고기운
부여성북각유대암
하림강수상전운
의자왕여제후궁지기미면
상위왈영자진불사어타인수
상솔지차투강이사
고속운타사암
사내리언지와야단궁인지타사
의자왕졸어당당사유명문
백제고기는 이렇게 말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말에
의자왕이 여러 궁녀들과 함께,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자살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는 말자.
하면서, 서로 이끌고 여기로 와,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타사암, 곧 떨어져 죽은 바위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속설이니.
다만 궁녀들만이 여기서 떨어져 죽었을 뿐, 의자왕은 죽지 않았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에 뚜럿하게 씌어져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소정방은 항복한 백제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
및 대신 장사 여든여덟 사람과 백성 일만 이천팔백일곱 사람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고
되어 있다.
소정방은 이 포로가 된 왕의 일행들을 끌고 간 당나라 임금에게 보이니, 임금은 이들을
책망만 하고 용서해 주었다... 한다.
용서라니, 도대체 무엇을.
심진학 선생은 고개를 쓸쓸히 떨구었다.
왕병사, 의자왕이 그곳에서 병으로 죽으니 당나라 임금은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이라는
벼슬을 증직하고, 그의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명
하여 손호와 진숙보의 무덤 옆에 장사 지내게 하고, 모두 비석을 세워 주었다 한다. 손호
는 제군들도 잘 아는 삼국지연의 가운데 위, 족, 오 삼국 중 오나라의 끝 임금이다. 그러
니까 손권의 손자지. 참 기묘한 일 아닌가. 물론 역사적인 배경과 상황은 서로 완연히 다
르지만 중국의 삼국 위, 촉, 오와 한반도의 삼국 백제, 고구려, 신라 각축이 두 나라 역
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구도인데, 오나라의 마지막 임금과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 죽어서
나란히 묻힌 자리. 그 무덤 위로 부는 바람, 지금도 그곳에 가면 천삼백 년 세월에도 삭
지 않은 비분에 눈물 머금은 의자왕의 비석은, 축축히 젖은 채 하냥 서 있을까. 남의 나
라 낯선 바람 굴욕의 무덤 속에 홀로 갇혀서, 세월은 무상하니 지금쯤은 그래도 썩었을
까... 한이 많은 사람 시신은 죽어도 썩지 않는다는데, 여전히 푸른 몸 누이신 채 눈뜨고
있을까. 가 보고 싶다. 흑룡강성 발해 옛터 경박호 어디쯤에 그 무덤은 있다고 하더라만.
일찍이 삼국유사에도 하였으되
이때 백제 마지막 왕 의자는 곧 무왕의 맏아들이다. 왕자는 영웅스럽고, 용맹하고, 담
력이 있었다.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동
증자라 칭송했다.
고 씌어져 있다.
제군들은 받아 적으라. 백제는 졌으므로 기록이 없다. 단지 백제를 친 승자의 칼끝에
묻은 핏방울 몇 점을 우리는 왜곡되게 얻을 수밖에.
나의 백묵은 지우면 그뿐이지만, 제군들의 가슴에 남은 잉크 한 줄은, 문신처럼 지워지
지 않을 것이다.
시백제말의자
내호왕지원자
웅맹유담기
사친이효
우우형제
시호해동증자
백제말 의자왕은
호왕의 원자로서
용맹스럽고 큰 담력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는 우애하여
해동의 증자라고 널리 일컬어졌다.
성현 공자의 으뜸가는 제자 증자에 비유될 만큼 효성이 지극하고, 덕망과 인품이 훌륭
하여 해동의 증자라고 일컬어지던 의자왕이, 왜 아무 까닭도 없이 왕위에 오르자 주색에
빠져서,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웠다.로 변하였는지 그 어디에도 적힌 바 없다.
백제 삼십일 대 마지막 왕, 의자. 재위는 641년부터 660년까지, 만 이십 년간이었으나,
그 기간은 왕의 생몰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백제 건국 온조 이래 육백칠십판 년 만에,
죽지 않은 그의 이름을 부수며 나라는 멸몰하였다.
탐요주색 정황국위.
라는 상투적이고도 간단한 두 마디로 못박아 버린 것이, 칠백 년 장구한 세월 동안 눈부
시게 융창하던 나라의 마지막, 멸국의 이유였다.
그러나 해동증자 의장왕은 등극하여, 왕 2년에 신라 서쪽 사십여 성을 단숨에 쳐서 함
락시킨 뒤 대야성, 즉 합천을 공략, 질풍처럼 낙동강변까지 진출하였다. 어느 하가에 주
색을 탐하였을 것인가. 촌각을 다투며 나라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는데.
이것이 의자왕 즉위 일년 만의 일이다.
주지육림에 빠진 왕이 휘청거려서 어찌 머나먼 낙동강까지 한손에 장악할 수가 있을 것
이냐. 낙동강이 어디라고. 신라의 수도 코밑이 아닌가.
백제는 성세였다.
이 바람에 압독, 즉 경산 땅까지 밀려나 후퇴하게 된 신라는 그 열세를 돌이키기 위하
여 안으로 김유신 등 옛 가야 세력과 단합하면서, 밖으로는 중원에 새로 일어난 통일 세
력 당 고종을 선동해서,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고 백제 협공을 노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온갖 징조를 시시콜콜하게 들어, 백제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열변을 토한다. 징조는 증거가 없다. 그러나 기록이 남아 있다.
현경(당 임금의 연호) 4년 기미년(659)
백제 오회사에 크고 붉은 말 한마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 안팎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이월에는 여우떼가 의자왕의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 흰 여우 한 마리는 좌평(백제
의 벼슬 이름)의 책상 위에 오똑하니 올라앉았다.
사월에는 태자궁 안에서 암탉과 작은 참새가 흘레를 붙었으며.
오월에는 사비수 언덕 위에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어 있었는데, 길이가 서 발이나 되었
으며, 이것을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구월에는 대궐 안에 있는 회나무가 마치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에서 슬피 울었다.
다음 해 현경 5년, 경신년(660) 봄.
일월에는 서울 안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으며, 서해변에 작은 고기가 나와서 죽은 것을
백성들이 다 먹어 내지 못하였고.
사월에는 청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다닥다닥 붙어 모였다.
서울 저잣거리 사람들이 가닭없이 놀라 달아나는 것이 마치 누가 잡으로 오는 것 같았
다. 이래서 놀라 자빠져 죽은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그 수효를 모
를 만큼 많았다.
유월에는 왕흥사의 중들이 보매,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문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 같았
다.
또 마치 들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 언덕에 와 대궐을 바라보고 짖더니만
이윽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성안에 있는 뭇개들이 길가에 모여들어, 더러는
짖기도 하고 더러는 울기도 하다가 얼마 후에야 흩어졌다.
또 귀신 하나가 궁중으로 들어오더니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
한다.
하다가 이내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히 여기어 사람을 시켜서 땅을 파 보게 한즉, 석 자 깊이에 거북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네.
이 끌뜻을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은
둥근 달이라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차면 기우는 것입니다. 새 달은 차지 않은 것이
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왕은 노해서 무당을 죽여 버렸다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이 말했다.
둥근 달은 융성한 것이옵고, 초승달은 미약한 것이오니, 생각건데 우리나라는 점점 성
하고, 신라는 점점 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태종(무열왕)은 백제에 이상한 변고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현경 5년, 경신년(660)에 김
인문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서 군사를 청했다.
어이가 없다. 남의 나라 서울의 해괴한 징조에 대하여 이대도록 모르는 것 없이 상세하
게 갖가지로 조사하고 기록한 책에, 어찌, 막상 국망의 원인이 된 의자왕 임금의 잘못된
행적과 실정, 다스림에 대해서는 단 두 마디로 잘라서 탐요주색, 정황국위.
라 할 뿐인가. 제왕의 실체는 없고, 징조의 그림자만 어둠 속에 몽유하는데, 불길한 소문
의 검은 연기를 자욱히 역사 속에 퍼뜨리고.
백제원월륜 신라여신월.
과 같은 비유를 내세우면서, 정대한 힘과 당당한 전략으로서가 아니라, 백제에 변고가
많다.
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로 군사를 보내 원병을 청하다니.
그렇게 확실히 망할 징조가 장장 이 년에 걸쳐, 다달이, 민심이 흉흉해지도록 나타났다
면, 기우는 나라의 썩은 밑둥을 치는데 무엇 때문에 수륙 만리 당나라로 사람을 보내어
비루하게 허리를 구부리며 대군을 요청하는가.
당에서는 무려 십삼만이나 되는 대군을 보내왔다.
삼국유사에도 가로되
왕(태종 무열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힘을 다해서 삼한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고 했다.
하, 신비스로운 꾀라.
사나이 대장부, 일세를 풍미하러 세상에 났으면 머리빡이 쪼개지는 한이 있어도 나의
기개, 나의 용맹, 나의 지덕, 나의 열정으로 공명정대한 싸움을 한판 벌이는 것이 옳지,
그래 기껏 꾀를 쓴단 말이냐.
그런데도 승자의 기록이니 꾀 앞에 신비스러운을 붙여 준다.
그 신모로 무슨 짓인들 못하였으리.
특히 김유신은 모사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문을 내는 데 명수였다. 그것도 온
나라 안에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지.
그렇게 백제는 망했다.
흔히 우리는 백제가 당시 신라 김유신의 오만 대군과 소정방의 십삼만 대군의 일격에
멸망해 버린 것으로 알기 쉽지만, 그렇지 않았다.
단칼에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의자왕 29년 칠월, 서기 660년에 원통하게도 백제는 왕도를 함락당하고 말았으나, 지방
에 있던 세력들은 여전히 건재하였으므로, 왕의 종제인 귀실 복신이 승 도침과 함께 이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맞아들이고, 풍장왕으로 옹립하였
다. 그때 풍왕은 처자, 숙부와 함께 일본이 보내는 선박 백칠십 척에 군사 오천을 거느리
고 돌아왔다.
백제 유민들은 지금의 전락북도 부안 변산 주류성에 웅거를 두고 나당군에게 저항하며,
국망 후에도 만 삼 년간이나 줄기차게 조국 부흥 투쟁을 벌이었으니, 이는 우리 한반도
역사상 가장 장기적이고 강력한 부흥 항전이었다. 주류성 위치에 대해서는 한산이라는 이
견도 있으나, 내가 면밀히 조사 답사해 본 결과는 부안 변산이 맞았다.
신라가 고려에게, 고려가 조선에게 망하였을 때 이와 같은 항전이 조직적으로 지속되었
다는 말을 나는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아름다운 신라가 올바른 당나라의 힘을 빌리어, 썩어 문드러진 백제를 무너뜨리고 삼국
통일을 해 준 것이라면, 도탄에 빠져 있던 백제 백성들은 이제야말로 살 길을 얻었다고
기뻐 환호성을 질러야 옳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유민들은, 무엇 때문에 마지막까지 다시 한번 백제를 일으켜 보려고, 그처럼
죽을 힘을 다하여, 사 년 간이나 처절한 싸움을 벌이었을까.
사비성이 함락당하자 달솔 흑치상지는 풍왕을 옹립하고, 부장 십여 명과 함께 임존성
(예산 대흥)을 거점으로 삼아, 불과 십일 만에 삼만의 병력을 규합했다. 그리고는 소장방
이 보낸 당군을 격퇴하면서 파죽지세로 잃어버린 백제의 이백여 성을 되찾았다.
백제 부흥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통곡 같은 함성이 산야를 쓸었다.
이들은 다시 사비성으로 쳐들어 갔는데, 사비성 남쪽의 이십여 성이 한꺼번에 복신에게
호응했다.
이들의 뜨거운 기세는 금방이라도 백제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실현을
눈앞에 둔 것은, 당군 유인원이 진을 치고 있는 사비성을 단숨에 그물같이 포위한 순간이
었다.
고립 상태에 빠진 당군의 진영은 위태로웠다.
이에 당황한 신라는 당나라 군사 없이 단독으로 출병하여 주류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나라에 있는 힘을 모두 쓸어다 바친 이 진공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백제를 멸국시킨 승자 신라의 정예 군사가 괴멸된 백제의 잔병들에게 여지없이 무너져 패
퇴하였다.
이 사비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
하였으며, 당나라에서도 백제 부흥군 토벌을 목적으로 왕문도를 파견했다. 일대 난리가
난 것이다.
이러할진대, 나라의 임금 계시고, 군율 지엄한 때의 백제는 얼마나 굳세고, 찬란하고
강하였을 것이냐.
눈부시었으리라.
이 주류성 공략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출전하여 병사들의 사기
를 북돋우고 신라를 승리로 이끈, 명장 대당장군 품일이 몸소 작전을 진두 지휘했으니,
그 절실 심긱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품일 장군은 화랑 관창의 아버지다.
주류성의 다른 이름은 두량이성이며, 중국사서에는 주류, 일본서기에는 주유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때의 치열한 정황이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그 지명은 시대를 격절하여 알아듣기 어려우나, 그래서 오히려 우리를 그 시대의 복판
으로 이끌어 들이는 사실감이 있으니, 꼼꼼히 짚어가며 읽어 보도록 하자. 제군이여, 이
것이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다.
태종 8년 춘 이월에, 백제 잔병이 사비성으로 쳐들어오매, 왕은 품일을 대당장군에, 문
충을 상주장군에, 의복을 하주장군에, 의광을 낭당장군에 각각 임명하여, 군병을 이끌고
출동케 하였다.
삼월 오일, 중로에 이르러서 품일은 휘하 군사를 나누어, 먼저 두량이성 남쪽으로 나아
가 싸우기에 마땅한 영지를 물색하게 하였다.
백제군이 신라군의 대오가 미처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내려다보고 이를 급습하니 신라
군은 놀라서 물러나고 말았다. 십이일에 신라 대군이 고사비성(전북 고부) 외에 내둔하
여, 삼십육 일 동안 두량이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월 십구일에 철수하여 본
국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가다가 빈골양(전북 정읍 태인)에 이르러 백제군 기습을 만나
싸웠으나, 패하여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신라군의 사상자는 많지 않았지만, 무기와 수레들을 적잖게 빼앗기고 말았
다. 상주장군과 낭당장군은 각산에서 백제군을 만나게 되자 공격하여 둔보로 쳐들어가 이
천여 명을 베었다.
한편 무열왕은 두량이성 진공이 실패로 돌아가 모두 후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
라,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구원케 하였다.
허나, 구원군이 가시혜진(경남 고령 영현)에 이르렀을 때, 이미 신라의 후퇴군들을 가
소천(경남 거창 북방)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중도에서 그만 돌아오고 말았다.
여기서 죽지장군은, 신라 화랑 득오곡이 그를 흠모하여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로 유명
한 바로 그이다.
이처럼 신라가 자랑하는 용장 맹장들이 모두 총력 출병한 두량이성 진공작전이 실패한
가닭을 구당서에서는
군량이 떨어져 물러났다.
고 했다. 그 또한 승자의 기록이며, 나당 연합군으로서 군사력이 모자랐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가 삼사월로 춘궁기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후퇴할 때 이곳저곳
에서 백제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것을 보아도, 너무 깊숙이 대군을 투입시켜 무모한 작
전을 감행하려 했던 것이 패인이었을 것이다.
때가 때이니만큼 보릿고개에 신라군의 군량이 모자랐다면, 성안의 백제군들도 굶으면서
싸웠으리라.
거기다가 백제 부흥군의 본영 주류성의 지세는 험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대하여는 일본서기 천지기에 자세히 나왔으니.
곧 천지천왕 원년 십이월에, 백제 풍장왕과 일본 군장 등은 주류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
로 이동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의논하매.
이 주류성은 산은 높고 험준하며, 토지는 암석으로 뒤덮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
다. 이곳은 논밭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바위 자갈 땅이어서, 싸움터는 될망정 농경지는
될 수 없다. 따라서 싸움이 길어져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 군민은 모두 굶어 죽고 말
것이다. 그런즉 피성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피성은 전라북도 김제였다.
피성은 서북에 강을 두르고 동남에는 제방이 있으며, 기름진 논이 풍요로워 농사 수확
은 삼한의 으뜸이요, 의량의 근원이 확실한 천하의 본고장이라. 비록 땅은 낮다 해도 옮
기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들이 분분하게 오고 갈 때.
일본 군장 박시전래진이 홀로 나서서
피성은 적이 있는 곳에서 불과 하룻밤 거리도 못되는 가까운 곳이다. 만약 적이 쳐들어
오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굶어서 죽기도 전에
망한다면 끝장이 아니랴. 지금 적이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하는 것은, 오직 이 주류성이
산은 준고하고 골짜기는 험악하여, 방어에 쉬우며 적이 공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만
약에 이 험한 곳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옮겨 앉는다면 어찌 나라를 끄떡없이 지탱할 수
있겠는가.
하고 불가론을 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부안현을 보면
변산은 백여 리에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중첩고대하며 암곡 심수하다.
고 되어 있다. 이런 척박 궁벽한 터에서 배가 꼬부라지는 허기와 싸우며, 잃어버린 백제
를 기어이 다시 찾아보고자 맨손으로 헐벗은 채 승자인 신라군과 싸웠던, 망국의 백성들,
가여운 투쟁.
하지만 백제는 신라를 물리쳤다.
태종 무열왕은 이 국력을 기울인 작전이 엄청난 실패로 돌아가 버린 것에 커다란 충격
을 입은 탓인지, 이해 유월, 죽었다.
왕위를 이어받은 왕자 법민 문무왕은 혼자 힘으로 백제 부흥군을 당해 낼 수 없는지라,
또 다시 당군을 끌어들여 재차 나당연합군을 결성하고, 주류성 총공 작전을 치밀하게 세
웠다.
즉 백제 유민 잔여 세력 소탕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저 장렬한 최후의 주류성 백강 결전에 이르매.
일본에서도 백제와 동맹을 맺어 천여 척의 배와 군사를 보냈다.
드디어 팔월 하순, 동양의 네 나라, 신라와 당나라가 합세한 나당 연합군과 백제 일본
이 힘을 합친 제일 동맹군이 주류성 어귀인 백강구에서 바다와 육지 양면으로, 유례 없는
국제전을 벌이며 뒤엉키어 처참하게 부서지도록 대결 접전하였으나.
결국 일본의 선단이 사백여 척이나 무너지자, 아아, 대세는 기울었다.
생각해 보라. 망한 나라의 무엇을 보고 일본은 백제와 동맹을 맺어 그처럼 많은 배와
군사를 보냈겠는가. 멸망해 버린 뒤에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대외적으로 강력한 신뢰를
얻을 만큼 백제는 힘있는 나라였다.
그때의 일이 당서에는
백강구에서 위선을 만나 죽기를 작정하고 싸운 끝에 모두 이기고, 배 사백여 척을 불태
우니, 불꽃 연기는 하늘을 찌르고, 바닷물은 붉게 물들었다.
고 적혀 있다. 피눈물 떨어지는 기록 아니냐.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강력한 흥복운동을 일으켰던 백제의 마지막 의병은 크
게 패하였다...
물경 사 년여에 걸친 백제 재흥의 줄기찬 꿈은 이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 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이 663년, 구월 칠일이었다.
주류성도 무너졌으니,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도다. 백제의 이름도 오늘로써 다하였구
나. 어찌 다시 고향땅을 밟으리오. 다만 궁례성에 나아가서, 일본 군장들과 만나 다시 일
어날 기회를 서로 의논함이 좋겠다.
가슴치며 탄식한 부흥군 지도자들은 이 거국지심을 침복기성에 머물고 있는 처자들에게
알리게 하고, 열사흗날 궁례성에 당도, 스무나흗날에 일본선사가 도착하자, 다음 날 일본
을 향하여 다시는 돌아올 길 없는 망명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한 나라의 마지막 중추들이 옴시레기 옮겨간 것이다.
그 마지막 가는 길에 그분들이 처자를 두고 갔는지 데리고 갔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나라를 떠나는 마음을 알리게 했다, 는 것까지뿐이다. 헌데...
백제의 이름도 오늘로써 다하였다고 그날은 뼈가 녹게 울었으나, 백제의 이름은 오늘까
지 살아서, 이 이름 없는 나를 여전히 백제의 아들로 기르고 있다.
그들은 갔지만, 갈 수 없는 유민들은 남아서 나를 낳았다.
그리고 백제 부흥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안타깝게 죽은 복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금도 부여 은산에서는 은산 별신제를 지내고 있다.
서럽고 원통한 백제를 달래고 있다.
백제는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비록 나당 연합군에 패하여 넘어졌으나, 그 찬란한 문화는 일본으로
건너간 망명인들에 의해서 일본에 꽃피었고, 또한 그 피는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중요한
맥락을 이루고 있느니.
백제는 죽어도 죽지 않았다.
제 밥그릇에 밥 한 주걱 더 얹는 것이 급해서 밥상을 통째로 내주고만 통일. 그것이 소
위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것 아닐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들의 문자
마따나 통일을 했다. 그러나 애당초 당나라 대군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힘에
겨워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인 원산만, 대동강구 이북은 포기하고 말았으니, 우리의 민족
사상 천추 만대의 한이 아닐 수 없다. 그 통일을 한 뒤로부터 우리 민족은 저 중국의 대
륙을 깊숙이 누비던 웅혼함을 잃고, 한반도에 국한된 소국으로 전락되어, 천삼백여 년이
나 대국의 세력 앞에 무릎을 조아리며 사대주의로 연명해 온, 비운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
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당나라를 이 땅에 끌어들인 책임을, 이제 와 물어도 아무 소용없
지마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힘이 모자라면 그만두고, 힘없으면 제 힘을 스스로 길러야
지, 국토를 지키고 넓히는데 정당한 힘이 아닌 남의 나라 힘을 편법으로 빌리어 등에 업
고, 한 푼 어치 눈앞의 이익이나 좀 남기고 만, 역사 속의 처남 매부. 그러나 이긴 자는
끝없이 미화될 뿐이다.
삼국유사에는 이 나라의 운명에 대한, 매우 슬픈 상징 하나가 남아 있으니. 신라가 나
당 연합군이 되어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신라의 화랑 장춘랑과 파랑이
진중에서 죽었다 한다.
그 뒤 다시 백제를 칠 때, 그들은 태종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신 등이 옛날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이제 백골이 되어서도 나라를 완전히 지키려
고 종군하여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위엄에 눌려서, 남의 뒤
로만 쫓겨 다니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우리에게 조금만 군사를 주십시요.
대왕은 꿈에서 홀연 깨어나 몹시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급히 두 혼령을 위하여 하룻동
안 모산에서 불경을 외고, 또 한산주에 장의사라는 절을 세워, 그들의 명복을 빌게 했다
하는 것이다.
장의사는 지금 서울 창의문 밖 신영동에 그 옛터가 남아 있다. 죽은 군사의 귀신도 쾌
활하지 못하여, 대국의 대군 위엄에 짓눌린 채 남의 뒤로만 쫓겨 다니고 있다는... 식은
땀 나는 하소가 그날 태종의 꿈결에만 들리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우리가 살
고 있는 이 시대의 한복판에까지 울리고 있지 않으냐. 그 원혼의 한숨이 차갑게 끼쳐 나
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 한숨을 맨 처음 이 땅에 부른 자 누구인가.
이제 훗날 제군들이 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 보면, 나의 말이 실감나리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만주 벌판에, 여기서도 저기서도 우리나라 초가지붕 앞냇물 뒷동산에 안
기어서 달큰한 흙냄새 맡으며, 외갓집 큰집 안마당같이 낯익은 토질에다 고추, 참깨, 해
바라기, 오이, 가지 기르는 풍경을 실제로 보면, 여기는 확실히 우리 땅이었다.
는 것을 뼈가 저리게 절감할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고 저도 모르게 토로하고 말 것이다.
공기의 켜 속에 스민 우리 조상의 고함 소리와, 흙 속에 스민 우리 선조 땀내음이 상기
도 살아서, 살냄새처럼 체온으로 끼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무심히 당연한 듯 써 온 삼국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허구요,
어불성설이요, 지배자의 논리, 횡포였다.
그러나 신라는 남고, 고구려와 백제는 사라졌다.
제군들이여. 나는 여전에 홀로, 해가 지는 부안의 변산 바닷가 주류성에 다녀왔다.
백제의 해풍에 삭은 주류성 흔적, 마지막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지 다 굶어서 비참하게
죽었다 하는 성벽 아래, 무너진 돌무더기, 눈물이 굳은 것처럼 이리저리 발길에 채이는
그곳에 갔던 것이다. 그 돌무더기 틈바구니, 바스라지고 있는 돌의 어금니에는 아직도 백
제의 시간이 고여 있었다. 함성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석양이 스며들고 있는 돌멩이 하나를 뒤집어 보다가 울었다.
아직도 습습하게 이뿌리처럼, 햇빛 없는 돌밑에 박혀 있는 백제의 온도. 그 축축한 흙
내는 백제의 숨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저 끝없는 파도 소리.
풍화.
나는 거기서, 그 중 백제같이 생긴 돌덩이 두 개를 주워, 내 시린 가슴에 품고 돌아왔
다.
아직 감히 나는 그 돌에 단 한 자 내 마음도 쓰지 못했다. 이제 훗날 제군들 중에 누구
인가 시인이 되어, 나의 이 빈 돌에 한 점 글귀를 인각하여 새겨 주기를 바란다. 나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서러워 서러워 지우지 못하는 백제의 꿈이, 이백 년이 넘
도록 헤매어 떠돌다가 또 다시 꺾인 곳,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 완산 남고산성, 견훤 왕
이 쌓으신 산성의 성긴 돌벽 모퉁이에, 나는, 나머지 한 개를 놓아 드렸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 서러운 도읍지의 산성에 서서 후백제 도읍을 쓰러뜨린 왕건의 고려 충신 포은 선생
이, 이제 어쩔 수 없이 쓰러지려 하는 조국의 석양에, 가슴 찍어 도려내는 비절 참절로
피 토하며 아프게 우셨나니. 역사도 윤회를 하는 것인가.
업장이 있다.
그러나, 조선은 백제인지도 몰라. 백제를 무너뜨린 나당 연합군의 신라를 고려는 흡수
해서 무너뜨렸고, 조선은 또 그 고려를 무너뜨렸으니, 백제를 못 잊어 세운 나라 후백제
의 도읍지 전주에서, 백제 사람, 백제의 자손, 이성계는 몸을 일으켜 신라의 핏줄이 섞인
고려를 치고 조선을 세웠다. 그러니까 결국 조선은 백제가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몰라.
이성계가 백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만일, 땅의 혈통으로만 본다면 아닌게 아니라, 그는 분명 백제의 자식이다. 견
훤의 아들이다. 무너진 왕도에서 몇 백 년 뒤, 다시 왕이 났으니.
심진학 선생은, 남고산성 만경대 앞 절벽에 새겨진 포은의 우국시를, 알아 두라며 한
자 한 자 칠판에 적어 주었다.
과연 나라는 무엇인가.
국파산하재라.
나라는 부서져도 산과 물은 예대로 여전하다. 하지만, 나라의 이름이 바귀어도 백성을
다시 그 나라 운명으로 태어나 목숨을 엮는다.
포은을 베어 고려를 넘어뜨린 이성계도 조선도, 명성왕후 민비를 버힌 채 나라의 문을
피울음으로 닫았다. 그리고 고려의 충신들이 그러했듯이 조선을 따라 목숨을 던진 이가
하나둘 아니었다.
마음속에 끝없이 백제를 그리워하면서, 후백제를 앙원하고, 후백제 섬멸한 고려의 마지
막 충신을 애끊게 기리면서, 그 고려를 뒤집고 일어난 조선의 백성으로 당연하게 살아온
사람들. 백성. 그 가련하고 당당한 뿌리. 그 커다란 어리석음. 그리고 순명함.
돌이킬 수 있다면 좋을 것인가.
놓쳐 버린 기회나 역사의 순간들을.
만일이란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훗날의 뒤척임일 뿐이지만, 그래도 만약 만
일이 허용된다면, 어디까지 세상은 바뀌었을까.
만일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후백제가 그렇게 망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서글픈 열변에 스스로 겨워 목이 잠기던 심진학 선생의 음성이 바로 귀곁에 들리
는 듯한데, 강모는 홀로 무겁게 고개를 젓는다.
그는 문득 자신의 만일을 돌아본다.
만에 하나. 그때 그러지만 않았으면 좋았을 것들이, 나의 이 짧은 생애, 그러나 기나
긴 멍에, 어느 목을 조이고 있는지, 그는 더듬더듬 짚어 본다.
(그때 그러지만 않았으면).
모든 것은 지금과 달라졌을까.
과연.
그 한순간을 끝끝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나는 점에 불과한 시간의 티끌을 순간
으로 흘려 버리거나, 지워 버리거나, 없애 버리지 못하고, 이처럼 전 생애를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 채, 낯선 땅, 낯선 시간, 머나 먼 곳으로 떠밀리어 흘러온 것일까.
19. 저항과 투항
삼국유사 김부대왕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태조(왕건)의 손자 경종 주는 정승공(경순왕)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이가
헌승왕후이다. 이로 인하여 경순왕을, 태자보다 위에 가는 정승공에 봉해서 아버지와 맞
잡이라는 뜻의 상부로 삼았다. 그리고 그가 태평흥국(송나라 태종의 연호) 3년 무인(978
년)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상부로 책봉하는 글에 이르기를
(경순왕은) 비록 자신이 (신라의) 임금으로서는 무능했지마는 (고려의) 신하로서는 도리
를 다하였다. 명령하노니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팔천호 김부는, 대
대로 계림 땅에 자리를 잡아, 벼슬은 왕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 그 영특한 기상은 높이
뛰어났으며 문장과 학식은 땅을 진동시킬 만하였다. 그의 부는 춘추를 거듭하여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귀는 능히 모토(봉토)였으며, 육도삼략은 가슴속 깊이 들어 있는데다, 전략이
탁월하고 군기가 철저하였다.
우리 태조는 처음에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를 닦으실 때, 일찍이 (신라의) 오랜
전통과 풍도를 알아서 진즉 그대(경순왕)를 사위로 삼아 주었으니, 안으로 그대의 큰 충
절에 보답하였다.
이제 집안이나 나라가 통일을 이루게 되고, 임금과 신하가 완전히 삼한으로 합쳤으니,
그대의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며, 그대의 올바른 도덕과 규범은 빛나고 높은지라.
그대에게 상부도성령의 호를 더해 주고 추충 신의 숭덕수절 공신의 호를 주니, 훈봉은
전과 같고, 식읍은 이전 것과 합하여 일만 호로 한다.
그리고 명하였다.
추충 신의 숭덕 수절 공신 상부도성령 상주국 낙랑군 왕 식읍 일만호 김부에게 고하노
니, 위와 같은 칙명을 받들고, 부신(신표)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할지어다.
이어 사론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나왔고, 김씨는 하늘로부터 왕금 궤 속에 들어서 내
려왔다고 하거나, 혹은 황금으로 돈 수레를 타고 왔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황당하여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이렇게 전해 내려와 사실처럼 되었다.
이제 다만 신라의 건국을 살펴보면, 윗자리에 있는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했
고, 남을 위해서는 너그러웠다. 또 관제의 설정은 간략히 했고, 그 일을 실행하는 것은
간편하게 했다.
또한 성심껏 중국을 섬겨서 조빙하는 사신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널 때, 험준한 산에서는
사다리로 오르고 망망한 바다는 배로 건너면서 연락부절하였다. 뿐만 아니라 항상 고관의
자제들을 중국에 보내어, 밤새도록 황제의 대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직무를 다하여 숙위
를 하게 하고, 국학에 들여 보내서 공부하게 했다. 이리하여 성현의 풍도를 이어받고 미
개한 습속을 개혁함으로써 예의를 존중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천자가 거느린 군대의 위력과 위엄에 의거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국토
를 빼앗아 이를 군과 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불법을 깊이 숭상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마을마다 불탑과 절집을
즐비하게 세워, 백성들은 너나없이 중이 되어 버리매, 군대나 농민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라가 날로 쇠퇴해 가니 어찌 국정이 어지러워지지 않을 것이며, 나라가 망
하지 않을 것인가.
이때에 경애왕은 오로지 음란하고 놀기에만 바빠 궁녀들 속에 파묻힌 채, 좌우 근신들
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아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견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오
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나라가 기울어 비록 그것이 부득이한 일이었다 하더라
도 역시 가상한 일이라 하겠다.
만일 그가 힘껏 싸우다 죽기로 작정하고 신라를 지켜서 고려 군사에게 항거 반항했다
한들, 힘은 꺾이고 기운은 다 빠져 반드시 제 가족을 멸망시키고, 무죄한 백성들한테까지
피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경순왕은 우리 태조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국고를 봉한 채로 군과 현
의 호적을 모두 그대로 가지고 고려에 바치고 귀순했으니. 우리 고려 조정에 대해서는 큰
공로가 있고, 신라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매우 덕이 있는 일이라 하겠다.
옛날 오월의 왕 전씨가 송나라 태조에게, 자신이 다스리던 나라 땅 십삼 주를 가져다
바치고 귀순하매 소자담은 그를 가리켜 충신이라 했는데,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
씬 낫다 하겠다.
우리 고려 태조는 비빈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했는데,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
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뒤에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들이니 이것이 어찌 (귀
순한) 경순왕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
이것이 신라의 마지막 모습이다.
심진학 선생은 미간을 무겁게 좁히며 한동안 침묵하였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제군들이여, 나는 이 멸망기를 이렇게 읽는다.
우선 통일신라 마지막 임금인 오십육 대 김부대왕, 즉 경순왕 이전 오십오 대 경애왕에
대한 언급부터 거꾸로 더듬어 찬찬히 읽어 보겠다.
삼국유사에 씌었으되
천성(후당 명종의 연호) 2년 정해 구월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지
금의 영천)에 이르니, 경애왕은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고 하였다. 일찍이 한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아 존망이 위태로울 만큼 급박한 지경에
이르면, 인접 동맹국한테 얼마든지 원병을 청할 수 있는 법인지라, 위의 일은 조금도 괴
이하지 않다.
그러한 경우가 아닐 때에도, 신라는 오직 제 나라 땅덩어리를 넓히기 위한 야망으로 강
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융성하던 백제를 치고 무너뜨린 전력이 있을진대, 하물며 이런
위기에서야.
다급하게 두 손 뻗어 후백제의 견훤을 쳐달라고, 고려를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었으리라.
급보를 받은 태조 왕건은 지체없이 용맹스러운 장수에게 명령하여 날래고 강한 군사
일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신라를 구하라.
하였으나.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견훤은 매서운 날씨 찬 바람 부는 겨울 음력 십일월 동짓
달에, 신라의 서울로 가차없이 밀물처럼 밀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해괴한 일이 그 다음부터 벌어지고 있었으니.
나로서는 도무지 이 이야기 앞뒤를 맞추기가 어려웁다.
이때 경애왕은 왕비와 후궁,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으므
로,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는 것인데.
경애왕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지금 막 일촉즉발로 후백제 군사들이, 그것도 저 용감무
쌍과 지모를 겸비한 왕건조차 휘몰아쳐 곤경에 빠뜨리고 마는 견훤이 몸소 마상 진두를
지휘하며 내달려오는 이 마당에, 남의 나라 고려에는 원병을 화급히 청하여 놓고, 친서
보낸 임금은 한가로이 제 나라 궁궐 담장 안도 아니요, 경주 남산 서쪽 산밑의 포석정 근
교 놀이터까지 이고 지고 나들이 나가서, 궁녀 비빈 종척들과 삼삼오오 둘러앉아, 질탕하
게 노래 부르고 춤추며 음풍 농월 잔치를 하게 생겼는가.
더욱이나 포석정이라면 계곡의 물을 받아들여 이것을 전복 모양 곡수 수구에 흐르게 하
고, 이에 술잔을 띄워, 문무백관의 품계를 좇아 열을 지어 앉아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
며, 흐르는 물에 떠오는 술잔을 차례로 들어 마시면서 흥겨워하는 곳이니. 음력으로 동짓
달이니 양력으로는 십이월인 겨울에는 못 노는 곳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기록은 뒤틀리고 비뚤어지기 시작하였다.
썩어도 준치 라는 말이 우리 속담에 있다.
이것은 그 어떤 무엇이 비록 상하여 썩었다 할지라도, 원래 품격과 기틀을 가지고 있었
던 사물이나 바탕은, 그 본질이 몸 어딘가에 남아서 꼭 제 노릇을 한다는 비유인 것이다.
아무러면 썩어도 신라인데, 우여곡절과 산전수전 다 겪어 천 년 사직을 면면히 이어온,
삼국통일의 찬란한 주역 신라가 아직 왕실이 엄연하고 국호를 그대로 달고 있는 한, 결코
저지를 수 없는 작태를, 이른바 소위
포석정 사건.
에서는 벌이고 있었으니.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설령 삼국유사에 쓰인 대로 경애왕은 음탕하고 놀기 좋아하여 왕으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으매, 적병은 쳐들어오고 원병은 그 뒤를 쫓아오는데도 기어이 한바탕 포석정에서 둥당
거리며 놀고자 한다, 치더라도.
그와 같이 바람 앞에 등잔불처럼 목숨이 펄럭이는 순간, 나라는 제쳐두고 제 발등의 불
을 털어 끄기 바쁜 비빈, 궁녀, 왕족과 신하, 종척들이 그리하여이다.
왕의 뜻을 따랐을 리 천만 없을 것이다.
더욱이나 분명히 기록에는 신라 경애왕은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라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 놓고는 어떻게 왕으로서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도록. 즐겁게 놀 수가 있었으리오.
천하에 무지몽매한 필부조차도 인간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제 앞에 닥치는 위험 때
문에라도 그렇게 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저를 죽이러 살기등등 창칼을 번뜩이며 군사떼가 몰려온다는데.
춘 삼월 만화방창, 봄날의 아지랑이 몽혼마냥 아늘아늘 넋을 홀리는 계절도 아니요, 푸
른 잎새 물든 단풍 정취가 무르익는 여름과 가을도 아닌, 겨울 동지 낙목한천, 을씨년스
럽고도 모가지 움츠러드는 한겨울 엄동 추위에 부르르 어깨 떨면서, 얼어붙은 포석정에
줄줄이 쭈그리고 앉아 얼음 위에 대소신료 비빈 궁녀 술잔을 돌리며, 희희낙락 잔치를 할
수가 있는 것일까. 과연.
우선 난장에 추워서도 못 놀 일이었다.
저 하찮은 개미떼나 쥐떼들도 저한테 닥치는 위험은 미리 알아차리고, 행렬을 지어 죽
음의 그림자 덮이는 사지로부터 빠져 나가는 것이 본능이거늘, 항차 사람이 그만 못하랴.
그것도 나라를 다스리고 경영하는 일이 천질인 왕과 왕족과 문무 대신들이 말이다.
눈물로 간곡히 충간하는 단 한 사람 충신도 없이, 의심해 보는 사람 하나도 없이, 경애
왕의 포석정은 신라의 정사에서 벗어나 기우뚱 기우뚱 가련한 역사의 우화 속으로 침몰해
들어갔던 것이다.
이 또한 승자의 칼끝에 인각, 왜곡된 패자의 일그러진 그림이리라.
고려는 이기고 신라는 졌다.
헌데, 신라는 귀순하였고 후백제는 저항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에 남은 신라와 후백제의 모습은 아주 확연히 다르다.
수그리어 안겨들며 제 나라를 살점 하나 발르지 않고 송두리째 바친 신라에게 베푼 관
용과 미화, 그 은혜의 붓털 터럭끝 한 날도 후백제한테는 스친 일 없었다. 오히려 치명적
으로 질타 왜곡하였다.
보겠는가, 제군들이여.
다시 아까의, 적병들이 오는 것도 알지 못했다는 구절로 돌아가자.
굳이 우격다짐으로 둘러 씌워서, 이 날 포석정에 난개난발 흐드러지는 잔치가 벌어진
것이 사실이라 하자.
남의 나라인 고려가 소중한 정병 병사의 목숨과 국력을 아끼지 않고 구원병을 일만 명
이나 급파하여 죽으라.
보낼 적에.
막상 위난을 당하여 국경이 허물어지고, 백성들이 적병의 말발굽에 짓밟히어 눈알이 빠
지며 창자가 흩어지는 신라 당사자는, 원군 일만 명보다 적은 군사로서 싸울 리가 있겠느
냐.
풀 베는 초동까지도 징발하여 싸움터로 몰아넣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전황을 알리는 파발은 지축을 뒤흔들고 난리 겪는 비명 소리 하늘에 사
무치며, 신라 천 년을 지켜온 봉화 불은 밤낮을 모르게 검은 연기 붉은 화염 피워 올리고
태웠을 터인데.
후백제 군사가 겨우 한두 명 간자처럼 잠입하여 아무도 모르게 도성으로 접근해 온 것
이 아니라면, 도성의 사대문이 어찌 그리 허술하여, 왕이 놀고 있는 포석정 깊숙이 그 많
은 병사 치닫도록 아무도 막지 않고, 싸우지도 않고, 난입하게 내버려 두었겠는가.
더욱이나 지난 구월부터 견훤은 근암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며, 고울부를 습격하여 빼
앗고, 시림을 무찌르고 신라 왕도로 돌입했음에야.
오늘날에도 전라도의 전주에서 경상도의 경주로 가는 길은 산 넘고 물 건너 멀고, 높
고, 험난하다.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 완산에서부터 신라 서울 서라벌까지의 거리가 지붕 하나 뛰어넘
는 지척이 아닐진대, 그 멀고 먼 도정을 흙먼지 일으키며 함성 지르며 쳐들어오는 적병의
기척을, 그토록 신라 전역이 쥐죽은 듯 모르고 있다가, 느닷없이 포석정 임금 앞에 창검
을 번쩍이며 들이대게 놓아 두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
못난 나라의 어리석은 임금한테도 언제나 만고 충절 충신은 꼭 있게 마련인데, 이 국가
존망이 턱끝에 달린 위경에, 제 한 목숨 내던지어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병사와 백성 또
한 그 어찌 없을소냐.
목이 떨어져 뒹굴어도 제가 맡은 사명을 다하여 싸웠을 것이다.
하물며 신라가 아니냐.
천하에 자랑하는 화랑의 용맹과 기상으로 무예를 길러 삼국을 통일 한 뒤 이백오십 년
이 넘도록 번영해 온 나라가 진정 분명하다면, 견훤의 군사들이 그처럼 구중궁궐 열두 대
문 도성 안 첩첩심중 복판에까지 쳐들어가 칼을 박아도 적병이요.
알리는 놈 하나 없이 날 살려라 다 도망갔을 리 있겠는가.
너무나도 강용한 군사여서 견훤의 후백제 군사를 이겨내지 못한 채, 갈대풀 쓰러지듯
신라의 군사들이 모조리 죽어 넘어져 버린 탓이라고, 만 보를 양보하여 남산 아래 포석정
놀이 상황을 꿰어 맞추어 본대도 최소한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는 것만큼은 병법을 들먹일 것조차도 없이 아예 말이 안된다.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신라와 후백제 군사들이 모두 한결같이 벙어리이거나, 경애왕을 비롯한 궁녀, 비빈, 종
척들이 전부 귀머거리 청맹과니가 아닌 바에야.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아마 이 부분을 강조하여 쓰려고 포석정 이야기를 끌어낸 것이 틀림없는 사태가
곧 이어 벌어지게 되니.
연회를 베풀고 놀던 왕과 왕비는 뜻밖에 군사가 닥치매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혼비백산 기겁하여 술잔을 대던지고 뒷대궐로 들어가고, 왕족과 공경대부와 귀족, 부인들
은 천지사방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
드리어 벌벌 기며 견훤에게 노비가 되기를 애원했다 했는데.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에 재물을 마구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했다고 한다.
여기서 약탈이라는 언사가 옳게 쓰이었는가.
나라와 나라가 서로 영토를 빼앗고자 부딪쳐 깨지면서, 적국의 궁성에까지 진입하여 이
르렀을 때, 한 나라를 통째로 치고 빼앗으려는 마당에 만일 창고를 부수고 재물을 취하였
다면, 이는 마땅히 약탈이 아니라 상대국에 대한 전리품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국은 져 버린 후백제였으므로, 난폭하게 비하해서 견훤을 일국의 왕
이 아니라 도적으로 취급한 이 약탈 정도의 기록은, 그 다음 일에 비기면 또 아무것도 아
니다. 행하는 것은 간편하게 했다.
왕궁을 점령한 견훤은 좌우에 부하를 시켜 왕을 수색하여 찾게 하니, 왕은 왕비와 후궁
들과 함께 뒷대궐에 숨어 있었다.
이를 뭇군사들의 무리 앞으로 개 끌 듯이 잡아다가 꿇어 앉혀 놓고 리로 오르고 망망한
왕은 그 자리에서 억지로 자결해 죽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고 부하들을 놓아 제 맘대로 왕의 빈첩들을 모두 욕보이게 했다.
고 씌어 있다. 그리고 신라의 이 어리석은 포석정 잔치와 짐승처럼 야비한 견훤의 만행은
극명하게 맞물리어 화석이 된 채, 고려 이후 조선을 지나 오늘에 이르도록 널리 정설처럼
굳어서 이어져 내려온다.
이는 오직 고려의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김부대왕 경순왕편에 활자로 찍히어 넘은 탓
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후백제, 견훤 편에는 사론을 빌어서 견훤을 궁예와 더불어 뭇도적 중
의 한 사람일 뿐이다. 라고 했으며 견훤은 신라의 임금과 신하 죽이기를 짐슴처럼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도 다시없는 죄악의 원흉이다.
궁예, 견훤 같은 악인 따위야 어떻게 우리 태조를 상대로 맞겨룰 수 있겠는가? 라고 적
었다.
그리고 왕건도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대는 털끝 같은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 버리고, 임금
을 죽이고 대궐을 불태우며, 대신들을 몰살하고, 백성들을 모조리 도륙했소. 또 궁녀들을
잡아 수레에 글어가고 보물을 빼앗아서 바리바리 짐 꾸러미로 실었으니, 그 흉악함은 걸,
주보다 더하고, 잔인한 것으로 보면 짐승과 올빼미보다 더하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제왕으로서 견훤이 갖추어야 할 인품과 자질과 덕망에, 두고두고 치명적인 먹칠을 한
이 장면이 나는 결코 믿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포석정에서 적병이 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먹고 마시고 춤추며 놀았다는 것 자
체가 어불성설이었지만, 지금 막 궁성을 점령했다고는 하나, 각축을 벌이는 고려의 원병
이 일만 명씩이나 발뒤꿈치를 물어 뜯게 바짝 몰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기록대로라면, 경
순왕이 자결하여 죽은 시신의 원한 맺힌 선혈이 시뻘겋게 낭자한 자리에 왕비를 쓰러뜨려
능욕할 겨를이 어디 있었겠으며, 부하들을 풀어서 왕의 빈첩들을 모두 욕보일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아직은 여기가 피비린내 진동하는 아비규환 난장판 적국의 궁성일진대, 등뒤에 칼날이
꽂힐까 봐서도 못할 일이다.
그런즉 이는 견훤이 얼마나 야비하고 난폭하며 무지막지한 승냥이 개 짐승과 같은 인물
이었던가를 여실히 강조하여, 역사 속에 꼼짝못하게 못박아 놓고자 했는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감히 단언하노니, 이 포석정 가설 무대는 극적인 허구다.
거기에 등장하는 배우들 역할은 승자의 각본대로 교묘하게 짜 맞춘 활자가 되는 것뿐이다.
그 활자들은 방탕하고 무력한 경애왕을 포석정에 앉힌 뒤, 포악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견훤으로 하여금 그를 찢어 도륙하게 만들어 놓고, 드디어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또 벌어진다.
견훤은 경애왕의 족제인 부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으니, 김부대왕은 견훤이 세웠다.
이 장면을 나에게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해 달라.
나라를 세워 천하를 얻고자 하는 야심으로 후백제 깃발을 드높이 치켜들고 그 융창했
던 백제를 다시 일으키자.
열광하는 백제 유민 전주 완산 백성들의 이백사십 년 피못 박힌 원한과 통분을 반드시
갚아 주겠노라, 백제를 다시 찾겠노라, 신라를 쳐들어 간 견훤이, 인정 사정 없이 궁궐을
유린하며 재물을 약탈하고, 경애왕을 명령 한 마디로 자살시키고, 왕비를 능욕하고, 그리
고 무엇이 무서워서, 무엇을 위하여, 그 자신이 신라의 왕이 되지 않고 경애왕의 먼 친
척 아우뻘 되는 족제 김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을까.
나는 이런 일이 동서고금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견훤이 남의 왕국 왕통을 잡아 주려고 양위를 시키고자 그 먼 길에 그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간 것이라면 모르되, 신라를 쳐 정벌하러 간 후백제의 임금이, 이미 정통의 신라
임금을 제 손으로 죽이다시피 죽게 하고는, 무슨 자비로 그와 같은 엉뚱한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이 기록을 따른다면 견훤은 금수와 같이 저급 치졸하고 무자비 잔혹한 일개 도적에 불
과한데, 어찌하여, 부하 군졸 다 보는 앞에서 제 용맹을 뽐내기 위하여라도 경애왕의 목
을 보란 듯이 제 손으로 치지 않고, 자결케 하였을까. 억지로. 어쩌면 그것은 차마 견훤
이 목을 쳤다고 까지는 지어내기 어려웠던 붓터럭의 망설임이었는지도 모르지.
아무렇든, 그렇게 경애왕을 죽게까지 하고, 신라의 백성도 아닌 후백제 왕으로서, 견훤
이 무엇 때문에 피비린내 휘몰며 군사를 이끌고 신라땅 서라벌 궁성까지 쳐들어갔길래,
손아귀에 움켜쥔 신라를 기껏 김부한테 주어서 왕으로 앉히고 돌아온단 말이냐.
견훤은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듯이, 신라에다 자기 말 잘 듣는 꼭두각시 허수아
비를 만들어 놓은 것일까?
지나가던 황소가 웃을 일이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경애왕의 시신을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고 함께 통곡하였다.
그렇다면 견훤은 이때 어디에 있었을까.
시신을 안치하고 통곡을 했다면 날짜로 보아 금명간인데.
남의 나라 왕궁을 도륙해 버린 견훤은 증발하고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서 정중히 조상했다고 하니 견훤은 무단히 서라벌까지 미쳤다고 피 흘리며 군사 몰고 쫓아가 신라의 임금만 바꿔주고 돌아왔다는 말일까.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을. 아무 이득도 없이.
그 뒤로 신라가 후백제에 복속하여 주종 관계로서 조공을 바치다든가 군신의 예를 갖추
었다는 말, 한 마디도 없는 것으로 보아 더욱더, 견훤이 김부대왕 세운 일은 해괴하기만 하다.
이듬해 무자년 춘 삼월에 태조가 오십여 기병을 거느리고 순행을 하면서 신라 서울에
이를 때까지, 후백제의 견훤이 경순왕에게 어찌 했다든가, 경순왕이 견훤에게 어찌했다는
말은 눈 씻고 보아도 비치지 않는다.
이것이 명색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보다도 경순왕은 문무 백관과 함께 왕건을 교외에서 영접하여 대궐로 모시고 들어갔다.
그런 다음 정리와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술이 얼근해지자 경순왕은 정곡을 털어 말했다.
내가 운을 못 타고나서 환란을 불러일으켰고, 견훤은 불의한 짓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
나라를 망쳐 놓았으니, 이 얼마나 쓰라린 일입니까.
경순왕이 체읍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좌우 사람들도 흐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
다,고 자못 비장하게 흐르던 문장은 드디어 태조의 위용이 자애롭고 너그러우며, 그의 부
하 군사들이 엄숙하여 조금도 침범하지 않는 것에, 신라의 서울 선비 귀족들과 부인들이
서로 놀라 경탄하며 흠모하는 광경을 적는다.
그리고 말한다.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성난 늑대와 호랑이라도 만난 것 같더니, 오늘 왕공이 이
르니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물론 천하의 인심이 왕건에게로 기울어 모이는 것을 밝히고자 한 말이겠지만, 소위일국의 선비와 귀족과 부녀자들이 지아비를 두고도 새남자를 보듯,
왕건의 세력이 강성하여 자기 나라가 위협을 당하고 있는 판국에, 왕건과 그 군사를
흠모할 수가 있었을까.
백제가 멸망하게 되었을 때 의자왕을 따라 삼천 궁녀가 낙화암 푸른 물에 떨어져 한 점
꽃잎들처럼 죽어간 정경과는 참 사뭇 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더니 끝내는, 경순왕이 이 나라 사방의 땅이 모두 남의 손으로 들어가, 국력은 약화되고 형세가 고립되어 제대로 부지할 수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전국토를 바치고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자고 의논하는데 여러 신하들의 가부 의견이 분분하여 끝날 줄을 몰랐다.
이에 왕태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은 필유천명이라 반드시 하늘의 마련이 있을 터이매, 응당 충신과 의사들이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해 보는 데까지 해 보다가 안되면 할 수 없지만, 어째서 천 년 역
사를 가진 나라를 선뜻 남에게 내준단 말입니까?
그러나 끝내 왕은 시랑 김봉휴를 시켜서 국서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 귀순하여 항복하기를 청했다. 태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삼베옷을 입고
나물을 뜯어 먹어 가면서 세상을 마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마의태자라고 부른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그 뒤로 죽을 때까지 털끝 하나 상처 입지 않은 채,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와 다시 혼인하고 왕건의 늙은 사위가 되어, 비단옷에 맛있는 음식
을 먹으며 화려하게 번쩍이는 수레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는 죽어서 귀신은 경순왕신이
되었다.
그는 나라를 지키는 대신 불쌍한 백성들을 보호했다고 해서 민간에 널리 받들어진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경상북도 경주와 포항, 영풍, 월성 등지를 비롯
해 강원도 원주, 충청북도의 제천이며 청풍, 북상해서는 서울 시흥동 군자봉 꼭대기 서낭
당에까지, 무당들이 섬기는 신령으로 추앙된다는 것이다.
그가 왕신이 된 이유인즉, 그는 비록 신라를 고려에게 넘겨 준 비운의 왕이었지만, 시
운이 다한 나라를 붙들고 있다가 온 강토를 피투성이 전쟁의 참화에 빠뜨리는 대신에, 가
련한 백성들 목숨을 보호하여 안심하고 살게 해 주었으므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은 덕이
라 한다.
그리하여 그가 죽은 뒤에는, 경순왕 살아 생전의 유적지에 곳곳마다 다투어 사당을 세
웠고, 영험의 전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상도 경주에서 포항에 이르는 지역의 주민들은 인근의 형산 옥련사에 경순
왕을 모셔 놓고 기원을 드린다. 그 까닭은 원래 이 형산과 강 건너 제산이 한 덩어리로
붙어서 이어져 있어, 비만 오면 물이 안강벌까지 잠기어 빠지지 않는지라 여기 사는 사람
들은 수해를 몹시 크게 입었는데, 하루는 용으로 변한 경순왕신이 그 꼬리로 산을 후려치
자 중간이 끊어져 두 산은 서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자연히 넘치는 물은 그 끊긴 자리 골
짜기로 모여 흘러서 바다로 빠지매, 사람들은 마음 놓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애오라지 백성을 보호하려는 경순왕의 눈물겨운 자애가 현신한 이야
기 한 토막이라고 하겠는가.
경상북도 영풍군 영주면 영주리에는 목조 기와로 지은 집 자인당이 있어, 경순왕 영정
을 봉안하고 있고, 충청북도 청풍의 덕주사 뒤편에는 김부대왕사 사당이 있다고 전해진다만.
제군들 생각은 어떠한가.
백제를 잃은 유민들이 부안 변산 주류성에서 만 사 년씩 돌멩이를 부둥켜안고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항거하며 백제 부흥운동을 피가 나게 벌이었던 참경과, 신라를 고려에
넘겨 준 제 나라 임금을 고마워하며 사당까지 지어 바쳐 왕신으로 받드는 신라의 유민들
정경을, 무슨 말로 비유하여 그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조선의 선조 임금이 칠 년 동안이나 강토를 쑥밭으로 만들며 임진왜란
을 겪도록 하였으니, 이순신 장군까지 싸잡어 온 백성이 타도해야 할 것이다. 누가 나라
를 지키라 하였느냐고, 왜국에 우리를 고스란히 넘겨 주어 나라의 이름은 개가 물어가
도 좋으니,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보존하고, 자식을 낳으며, 옷에 밥에 먹고 입으면 그만
일 뿐이라고, 부르짖으면서.
그 대신에 말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임금 고종 황제는 이제 앞으로, 어쩌면 이 순간부터라도 고종황제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국권과 우리나라 이름은 일본에 넘겨 주었으되 혹독한 전쟁을 치르지
않도록 백성을 보호했으니, 그가 한 일이 신라 경순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심진학 선생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마, 이 경순왕신에 대한 추앙과 전설도 어쩌며, 고려에서 의도적으로 도모하
여 사당을 짓고 퍼뜨린 관제 신화였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또한 망한 나라의 왕이기 때문이다.
경순왕신을 섬기어 받드는 신라 유민들의 정서와 행태가, 만일 고려의 개국통치 차원에
서 어거지로 만들어 꾸민 회유 정책의 일환이 아니라, 백성들 각자 심중에서 우러나온 진
심이었다면, 제군들이여, 대저 백성이란 무엇이며, 그 백성이 동아리를 이룬 나라란 무엇
일 것이냐.
제 한 몸 일신의 부귀와 영화나 편안을 도모하고자 시정의 장돌뱅이들처럼 장날 잠시
모였다가, 이윽고 보다 강력한 조직이나 점령자가 나타났을 때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그
쪽으로 투신하는 것이 정당하고도 아름다운 일이라면, 우리는 지금 조선이 망하여 일본에
게 나라를 빼앗겼다고 가슴 짓이기어 슬퍼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피 한 점 흘리지 않고 육신을 보전하여 새 시대의 강대국인 일본의 자랑
스러운 국민으로 편입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며, 시운이 다한 나라를 끝끝내 붙들고 늘어
져 죄 없는 백성만 가엾게 희생시키지 않은 고종 황제, 조선의 마지막 임금께 흠앙의 사
당을 지어 올려야 할 것이다.
그뿐인가.
어전 회의를 주도했던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을 칭송 숭덕하고, 잃어버린 조국을 다시
찾고자 독립운동에 몸 바치는 열사와 의사들은, 거꾸로, 백성들의 평화로운 삶을 찢어발
겨 엎으려는 흉노와 도적처럼 소탕해 버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만일 옳지 않다면, 경순왕의 처사도 결코 옳을 수 없으리라.
죽은 뒤에 경순왕신이 된 것은 왕의 뜻이 아니었는지 모르나, 살아서 그가 자기 손으로
천 년 사직 나라를 들어 송두리째 왕건한테 바친 것은 사실이었으며, 결국 그 자신을 다
시금 새 왕조의 가족으로 어엿이 입적하여 왕건의 사위요, 신하로서 아무런 굴욕도 느끼
지 않고 부귀와 영화를 한껏 누리며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족하였다.
이러한 그가 정말 백성을 위해서 자기 한 몸 내던져 구국의 결단을 한 것일까? 그리고
백성들은 정말 경순왕의 처사를 그처럼이나 신봉하며 따랐었을까?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혈육인 태자는 왜 부왕의 위대한 뜻을 감복 이해하여 기꺼이 따르
지 못하고, 홀로 피눈물을 뿌리며 금강산 깊은 골 바위 벼랑 틈바구 니로 숨어 버렸을까.
그리고 왜 막내아들 범공 왕자는 그처럼 거룩하온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좇지 않고, 서
리 푸른 칼날로 인연을 베어 검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 말았을까.
신라 유민 만백성이 훗날에 여기저기 정성껏 사당을 지어 경순왕을 수호신으로 모실 만
큼, 그것이 어질고 훌륭한 결단이었다면.
허나, 한편 경순왕의 이 처신은 털끝만치도 이상할 것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울 것도 없다.
놀랍게도 그것은 통일신라가 시작될 때와 너무나도 판박이처럼 똑같은 양태였으므로,
차라리 통일신라 개국 정신을 오롯이 이어받아 끝까지 지켜 내려오다가, 처음 모양 그대
로 수미상응, 마감했다 보아야 옳겠다.
힘없어 낡은 제 것을 버리고 저보다 강성한 것에 귀순하거나 혹은 그 힘을 빌려 새로운
세력을 얻는 처세.
그래서 신라는 당나라를 등에 업고 나당 연합군을 결성, 백제를 쳐서 멸절시켰다. 그리
하여 백제 땅을 겨우 얻었지만 저 드넓은 중국의 대륙 호탕한 우리 강토 고구려를 잃어버
렸다.
그렇게 소위 통일을 한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신라를 모두 고려에 내주고 자신
은 경주 땅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 한 뙈기 주민 일만여 호 전후를 가지고, 녹봉 일천 석을 받으면서, 정승 벼슬에 시
종과 관원, 장수를 채용하여 쓰노라면, 경순왕 평생에 그다지 옹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목숨을 보전하였으므로.
이 기록의 끝머리를 장식한 언급은 충격적이다.
우리 고려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뒤에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
두 그의 자손이었다. 이것이 어찌 그 음덕이 아니겠는가.
이는 신라 통일을 꿈꾸던 김유신과 김춘추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 가운데 태종 춘추공
편에 거짓말처럼 똑같이 씌어 있기 때문이다.
왕(김춘추)은 묘호를 태종이라고 했다. 태자 법민과 각간 인문, 각간 문왕, 각간 노저,
각간 지경, 각간 개원 등은 모두 김유신의 누이 문희가 낳은 아들이다.
이 여러 아들 가운데 태자 법민은 태종 무열왕의 대를 이어 즉위, 문무왕이 되었다. 문
무왕은 백제 유민이 부안 변산 주류성에 웅거를 두고 맹렬히 신라에 항거하는지라. 혼자
서는 이겨낼 힘이 없어 재차 당나라와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결국 평정한 인물이다.
그는 즉위 오 년 을축 팔월 경자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고도 웅진성에 가서, 가
왕이라 불리던 부여융을 만나 단을 만들고, 흰 말을 잡아 맹약을 하는데 천신과 산신의
영에 제사를 지낸 뒤, 말의 피를 입에 바르는 절차를 치르고 글을 지어 맹세하였다.
당나라에서는 포로로 잡혀갔던 백제 옛왕의 태자인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고국에
돌아가서, 남은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했으므로 임시의 왕이란 명칭을 썼던 것이다.
승자인 문무왕이 망해 버린 백제의 마지막 왕자, 웅진 도독 융을 제물처럼 세워두고 천
지신명을 향하여 읽은 맹세의 글월은 신라별기에 기록되어 있다.
지난날에 백제의 선왕이 역리와 순리를 분간 못하고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낼 줄도 모르
고, 인친(신라 소조왕 15년에 신라와 백제가 서로 혼인했던 사실을 말함)과 화목하지 않
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내통해서, 그들과 함께 잔폭한 짓을 일삼아 신라를 침략
하여 성읍을 파괴하고 백성을 짓밟아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중국의 천자는 물건 하나
라도 제가 살 곳을 잃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죄 없는 백성들이 해독을 입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일렀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가 험하고 먼
것을 믿고 하늘의 법칙을 업신여기니, 황제는 크게 노하여 엄숙히 백성들을 위로하고 삼
가 정벌을 행한즉, 군사의 깃발이 향하는 곳은 한 칼에 씻은 듯이 평정되었다. 응당 궁실
과 집터를 무너뜨려 못으로 만들어서, 오는 세대를 경계하고, 그 폐단의 뿌리를 아주 뽑
아 없애어 뒷세상에 교훈을 보이려 한다. 귀순해 오는 자는 회유하고, 반역하는 자를 정
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다.
맹세가 끝나자 문무왕은 폐백을 단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은 신라의 대묘에 간직해 두
었다.
그는 여기서 망한 것을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지난날 성인들의 공통돈 규범이었다.
일이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사책에도 전해오는 것이기 대문에, 전 백
제왕 부여융을 세워 웅진 도독으로 삼아 자기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여 상자를 보전케
하는 것이다. 라고도 했다.
상자란 뽕나무와 노나무(가래나무)를 말하는데, 옛날에 무릇 어버이 된 이는 담 밑에
이 두 가지 나무를 심어서 자손에게 물려주어 생계의 자료로 쓰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손이 이것을 보면 부모를 생각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다. 나중에는 이것이
변하여 조상 대대의 고향을 이르는 말이 되었으니, 향리라는 뜻으로 쓰였다.
문무왕은 이어 백제가 신라에 의지해서 길이 우방으로 될 것이요, 제가끔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호를 맺으면서 화친하게 지낼 것이다.
신라는 중국의 소명을 삼가 받들어 영원히 그 변방국 번국이 될 것이다. 서로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를 소중히 여기는 표시로 희생 짐승을 잡아 피를 머금었으니, 언제나 함께 친목할 것이다.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서로 구제하여 형제나 다름없이 사랑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삼가 받들어 함부로 실수를 하지 말며, 이미 맹세한 뒤에는 함께 변하지
말도록 힘쓸 것이다. 하는 여러 맹세들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하고자 한 말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만일 백제가 어기고 배반하여 이 맹세의 덕을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서 우리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는 때에는, 신라를 지키는 신명이 굽어 살피시어, 백 가지 재앙을 내리고,
자손들도 키우지 못한 채, 사직도 물론 지키지 못하여 제사는 끊어질 터이며, 남는 씨가
없게 될 것이다. 이 저주를 통하여 그는 백제 유민을 경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때문에 여기에 금 글자와 쇠 문서를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 두는 것이니, 자손은
만대가 되도록 감히 어기지 말라. 신은 이를 듣고 부디 흠향하시어 복을 베풀어 주옵소
서.
지금 이렇게 승자의 서슬이 시퍼렇게 날 서, 부여융의 덜미를 고누고 있는 문무왕 법
민, 그는 김춘추의 아들이요, 김유신의 생질로서, 그의 외고조부 역시 부여융처럼 망한
나라 가야의 왕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것이 있다면, 부여융은 언제라도 유민들이 치열한 항쟁을 일으킬 수
있는 백제의 위험한 가왕이요, 법민의 외고조부,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는 정벌당하여
무너지는 나라를 버리고 법흥왕 19년, 신라에 스스로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라는 점
이다.
저항과 투항. 저항한 것들의 운명과 투항한 것들의 영화.
투항한 구해왕은 신라의 귀족인 진골 계급으로 편입되었다. 꼭 경순왕이 고려에 그러했듯이.
구해왕의 아들, 김유신의 조부는 이름이 무력이었으며, 구해왕의 손자, 김유신의 아버
지는 서현이었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만명부인으로 신라 갈문왕 입종의 손녀이다. 서현을 흠모한 만명은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둘이서 야합하였는데, 만명의 아버지 숙홀종은 만명을 광에 가
두어 쇠통을 채우고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당시 아무리 금관가야의 김씨들이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 계급이 되었다고는 하지
만, 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혼인하여 아들 김유신을 낳앗으니, 금관가야의 왕족에서 신라의 왕족으
로 발을 벋어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피를 섞어라. 씨를 섞어라.
만명이 서현과 다시 만나 파격적으로 어려운 혼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하늘이
도우사 벼락이 쳐서 갇혀 있던 광 문이 쪼개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만명은 탈출했던 것이다.
김유신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김유신은 신분을 뛰어넘어 상승시키는 그 일을 신통한 꾀로서 능히 이루었으니.
누이동생을 교모히 김춘추에게 권하여 혼인 전에 드나들며 사통하도록 한 다음, 임신한
누이를 태워 죽이겠다고 분노하여 발을 구르며, 온 나라 안에 이 소문을 퍼뜨린 뒤, 어느 날,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둥하는 것을 미리 알아두었다가, 이 틈을 타서, 마당 가운데 장작더미를 높이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검은 구름처럼 매운 연기가 일어나서 멀리 여왕이 있는 곳까지 진동하여 번지매, 여왕
이 놀라서 바라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어인 까닭이냐.
그 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누구의 소행이냐?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옆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하였다.
그것은 네가 한 짓 같으니 빨리 가서 구하라.
왕의 명령을 받고 춘추공은 망설일 것도 없이 황급히 말을 달려 유신에게로 가 죽이지
말라.
왕명을 전하고는, 버젓이 혼례를 치르었다 한다.
그리고 결국은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군신들이 서로 추대하여 진골로서는 최초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매, 누이동생은 지존인 왕의 아내 왕비가 되었으며, 자신은 머지 않
은 훗날 드디어 임금의 외숙이 되었으니, 그는 김수로왕의 십이대손이면서 가야국을 멸망
시킨 신라의 왕족으로 편입하여 이제는 드디어 신라의 등뼈를 이루었다.
할 발씩 한 발씩 용의주도 치밀하게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하여 거대하고 강한 것 속
으로 변신하여 들어가서 끝내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 그의 지모는, 말 그대로 신비스
럽다 할까, 야비하다 할까, 아니면 너무나도 필사적이라 할까.
그는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를 도와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았는데, 신라보다 강
성한 백제를 치기 위하여, 더욱 강성한 당나라와 손을 잡고 나당 연합군을 결성했다. 결
정적일 때, 자기보다 강한 것의 힘을 빌려 꿈을 이루는 사나이.
김유신의 누이 문희가 낳은 아들이 태자 법민으로 문무왕인즉, 금관 가야의 외손이 신
라의 왕통을 이어 갔다 안할 수 없으니, 그 피를 받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질녀
를 왕건에게 시집보내 우리 고려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뒤에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다. 기록을 남겼으니. 통일신라의 개국과 쇠망이
머리와 꼬리를 물어 수미가 절묘하게 상응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역사일까, 업보일까, 운명일까.
무섭다.
20. 그리운 옛 강토
중일간도협약전문
1. 중.일 두 나라 정부는 두만강을 중, 조 두 나라 국경으로 하고, 강원천 근방은 경
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를 경계로 한다.
2. 중국 정부는 본 조약에 조인한 후 아래의 몇 개 곳을 개방하여, 외국인들이 거주
하고 무역하게 하며, 일본 정부는 이런 곳에 영사관이나 영사분관을 설치한다. 개방시
간은 참작하여 정한다.
용정촌, 국자가, 투도구, 백초구.
3. 중국 정부는 조선민이 두만강 북켠에서 계속 개간하고 거주하도록 허가한다. 그 지
역 경계선은 지도로 따로 표시한다.
4. 두만강 개간지에 거주하는 조선민은 중국의 법권에 복종해야 하며, 중국 지방 관리
의 관할과 재판을 받아야 한다.
중국 관리들은 이런 조선민에 대하여 중국 공민과 동일한 대우를 하며 모든 납세 및 기
타 모든 행정처분도 중국 공민과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 조선민과 관계 되는 모든
소송 사건은 중국 관리로부터 중국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해야 한다.
일본 영사거나 위임받고 파견된 인원은 마음대로 재판소에 들어가 들을 수 있으며,
인명에 관계되는 중대한 안건은 반드시 사전에 일본 영사에게 각서를 띄워 재판소에
오게 한다.
만약 영사가, 법률에 맞지 않는 판단을 내렸다고 지적한다면, 중국측에서는 인원을 따
로 파견하여 재심사한다.
5. 두만강 북쪽 잡거 구역 내의 조선민이 소유한 토지, 가옥 등을 중국 정부에서는 중
국인의 산업과 동일시하고 일률로 절실히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강기슭 적당한 곳에 나룻배를 두어 인민들이 서로간에 마음대로 나들게
하되, 증명서가 없이는 무기를 가지고 국경을 넘지 못한다.
잡거 구역 내에서 생산한 알곡을 조선민들이 판매 운수할 수 있다. 만일 흉년이 들
면 국경을 넘기지 못한다.
6. 중국 정부는 앞으로 길장(연길과 장춘) 철도를 연길 남쪽까지 연장하고 다시 조
선 회령 철도와 연결시킨다. 그 모든 방법은 길장 철도와 같이 취급한다. 시공 기간
은 중국 정부에서 정황을 참작하여, 일본 정부와 다시 상의한다.
7. 본 협약은 체결한 후 즉시 실시하며, 일본 통감부에서 파견한 문무 인원들은 두
달 이내로 전부 철퇴하며, 일본은 제2조목에서 개방하기로 한 상업지에다 두달 안으로
영사관을 세워야 한다.
명치 42년 9월 8일
선통 원년 7월 20일
대일본전권공사
이집원어길 인
대청국영명외무부상서회판대신
양돈언 인
중국과 일본이 체결한 이 협약에 의해서, 같은 해인 1909년 십일월 이일, 용정촌에 간
도 총사령관이 섰고, 국자가 분관이 그 이튿날인 십일월 삼일에 섰으며, 투도구 분관
은 십일월 구일에, 백초구 분관은 또 이듬해 삼월 일일에 서서 사무를 보기 시작했는
데.
간도, 간도, 대관절 그 간도라는게 무얼 두고, 어디를 보고 말허는 것인고? 이기채
는 기표에게 무심히 지나는 말처럼 물었다.
흔히 연변 일대를 그렇게들 부르지요.
연변이라...
왜 그 두만강 너머 길림성 동남부, 연길, 훈춘, 왕청, 화룡, 네개 현을 통칭 그리 말
허지 않습니까.
거기라면 내륙인데 그 복판에 무슨 섬이 있어서 간도란 말인가. 그게 사이 간, 섬
도, 그렇지 아마? 그 명칭에 어떤 연유 래원이 있을 것 아니라고? 그 말을 할 때 이기
채의 낯빛은, 극추 생마포 거친 삼베로 얽은 상복보다 더 누르고 썽클하였다. 초췌한
얼굴에 깊이 패인 수심은, 강모의 안부를 드러내어 염려하고 묻는 대신 만주 근교 무
엇에 대해서라도 좀 듣고 싶은 기색을 띠고 있었다.
논조가 다단해서 무어 어느 것이 옳다고 딱이 꼬집어 단언하기는 어려운가 봅니다만.
지리적으로 볼 때, 연변 일대는 남쪽에 두만강이 있고, 북쪽에는 목단강, 수분하가 있
으며, 동쪽에 홍기하가 있어, 이 강물들이 네개 현 주위를 에워싸 흐르는지라, 이 지
역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뜬 섬 같다는데서 그렇게 부른다는 설도 있고,. 역사적으로
는 중국과 조선의 경계에 물려 자리한 이 간도가, 근교의 봉금 시대에 중립 지대로서
어느 한 나라에 속하지 않았는지라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였으며.
또 한편에서는, 본디 이곳의 땅이 비옥하고 토질이 농업 개간에 알맞은 곳인지라 따
비질할 간자가 들어가는 간도인데, 조선에서는 음이 같은 사이 간으로 잘못 알고 있다
는 말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간도는 간동의 틀린 음이라는 일설도 있는데, 이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가 경원군 용당으로부터 간동으로 이사를 했던 일에 비추어, 간동을 두만강
동쪽 일대라고 해석하고는, 조선음에서 강과 간이 서로 비슷하므로, 간동을 간도라 부
른다는 것이었다.
뿐 아니라, 화룡현의 광제욕과 그 맞은편 언덕 너머 종성 사이에 작은 섬이 하나 있
는데, 귀속이 분명하지 않아 의견이 서로 엇갈리어 간도라고 해 오다가, 이 작은 섬 이
름이 연변 일대로 확대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이도 저도 확실한 것은 아니며 떠도는 추측일 따름인데 내가 단언하고 싶은 것
은, 간도라는 두 글자가 한꺼번에 생긴 것이 아니라, 같은 음을 가진 간도와 간도가
서로 뒤섞이어 쓰이다가, 경계에 대한 교섭이 있은 뒤에, 연변이 중국 영토임을 승인
하고 싶지 않은 조선인들의 심리가 이 땅 이름을 간도라 하고, 이곳이 그 어느 나라
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인 것을 표시하였다.
고, 망국 조선의 아들로서 연변에 오랫동안 살면서 그곳의 산천 모습과 정치 외교 연혁에
대하여 아주 숙달하였던, 여추 심용해 같은 사람은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그 연변 일대라는 것이 말갈들 사는 데 아닙니까.
기표는 눈을 가느스름 뜨고, 국경의 변방 너머 아득한 상고를 더듬는 어조로 말했다.
말갈.
얼굴의 광대뼈가 높이 솟아 튀어나오고, 머리칼은 검으며, 피부는 황색인 인종으로
통고사족(퉁구스족) 의 일족인 말갈은.
저 멀고 추운 시베리아로부터 만주와 조선 함경도에 걸쳐 널리 살면서, 생업으로 짐
승을 쫓아 수렵을 하며, 혹 강이나 바닷가에 살게 되면 어업에 종사하는 족속. 이
말갈의 무인들은 돌화살과 독화살을 썼다.
거칠게 들판을 내달리며 미개 야만으로 살던 말갈족 중에 더러는 농경을 익히어 정착
하기도 했지만, 대 부분은 막사 하나 짊어지고 떠돌며 무리지어 다니는 이동생활을 하
였다.
역사 속에서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였다.
주나라 때는 숙신, 한나라 때는 읍루, 그리고 위대에는 물길, 수. 당 이후에는 말갈이
라고.
그리고 조선에서는 야인이라고 불렀다.
고구려가 건국한 뒤,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말갈은, 신라 통일 이후, 멸망한 고구려
의 유장 대조영이 고구려 부활을 꿈꾸며 창건한 나라 발해에 예속되었는데, 이때 일
부는 신라로 귀순하였다.
당서에 해동의 성국이라고 기록될 만큼 국력이 번창하고 문화가 융성하였던 발해가,
건국한지 이백이십칠 년 만에 유목민 거란에게 망하자, 말갈족 중에서도 가장 중심
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던 흑수말갈은, 거란에 복속하여 그 이름을 여진이라 하였다.
생여진, 숙여진으로 나뉜 여진에서, 훗날 고려 중기 예종 10년 을미에 금나라를 세
운 것은, 생여진의 아골타였다.
금나라를 건설한 여진은 고려를 압박하는 동시에 송나라를 정복하여 거의 백육십여 년
간 중국의 북부를 통치하였으나, 문화랄 것을 지니지 못하여 바탕이 조악한지라, 제 나
라가 망한 이후에는 만주와 고려 북방에서 아무런 통일도 없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흩어져 살았다.
그러면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조공하는 동시에, 이익이 없으면 국경을 짓밟
아 침입하여 사람과 재물을 약탈해 갔다.
몽고에게 금이 멸망한 것은 고려 고종 21년 갑오년(1234)이었는데, 나라도 군왕도 없는
잔여한 여진족들이 연변을 점한 것은 고려 원종 8년 정묘년(1267)이었으니, 삼십여 년
떠돌던 이들은 연변 일대에 기둥을 박고는, 걸핏하면 동북 변경을 침노하여 소란하게
하였다.
백 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이에 고려 말엽, 장군 이성계가 솔병하여 평정을 시켰다.
그러나 고려의 이성계 장군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새로 열어 왕위에 오르자, 변방이 비
어 있는 틈을 타 여진족이 또 다시 몇 차례씩이나 침입하여 변경을 시끄럽게 하고 소란
을 일으키는지라. 태조는 함경도 공주 지방에 경원부를 설치하여 이들을 다스리었다.
공주는 경원의 옛이름으로 오랫동안 여진족이 살아온 곳이었다.
경원이라면 태조에게 아주 각별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함경북도 가장 북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의 육
진 가운데 하나인 이 곳은 조선 왕조의 발상지요, 부조로부터 왕업의 기초를 닦은 조기
지지인 동북면이기 때문이었다.
조선 태조는 그 고조 때부터 이 동북면 여진땅에 거주하였다.
본디 전주 사람이었던 이안사가 바로 후일에 목조로 추존된 이성계의 고조부인데, 그는
전주 지방 장관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군민 수백 호를 거느리고 고향인 전주를 떠나
강원도 삼척을 거쳐서, 두만강 하류인 공주로 이주했으니, 이 공주가 곧 경원인데, 이
는 경흥 남쪽의 옛읍이었다.
이안사는 이곳으로 이주하여 원으로부터 남경 오천호소 다루하치라는 지방관리 벼슬
을 받아, 뛰어난 경륜으로 이 간도 지방의 여진족을 잘 다스리었으므로, 명망을 얻
어 증손 자춘까지 몽고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런즉 목조 안사의 아들이요,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는 이름이 행리인데, 쌍성등처
고려군민 다루하치에 임명되어, 그 직을 대대로 세습하면서 영흥. 함흥 지방에서 세력
을 펴고 있었다.
그런던 중 공민왕 5년 오월에 동북명 병마사인 유인우가 쌍성 등지를 수복할 때, 태
조는 스물두 살 청년으로서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에 귀순하여, 남정 북벌에 많
은 공을 세우고 마침내는 조선 왕조를 개창하였던 것이다.
그런 만큼 태조가 이 지방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나 그 조상의 영역(산소)이 모두 이 지방에 모셔져 있지 않은가. 하여, 그곳
은 이미 국경의 변방이 아니라 왕업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조선을 개국하자 태조는 맨 먼저 사대를 추존하여 묘호와 능호를 정하고, 아
들인 정안군 방원을 보내어 법도대로 닦아서 다스리게 했던 것이다.
공주에 있는 목조의 덕릉과 목조비의 안릉, 그리고 안변. 함흥 등지에 있는 익조.
도조. 환조의 능이, 임금된 이의 조상들로서 삭풍 속에 멀리 잠들고 있으니 꿈에라도
소홀히 하지 못할 곳이 경원이었다.
그런데 연변의 여진족들은 이 땅을 물어뜯어 찢으며 괴롭히나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동북은 중국이요, 남동은 경흥, 서쪽은 종성인 이 간도에 태조는 부를 설치하여 다
스렸던 것이다.
그러나 태종 10년에, 너무나도 극성한 여진 야인들의 침입 때문에 견디지 못하는 이
곳 백성들을 경성으로 모두 이주시킨 뒤, 경원부를 경성부에 합병해 버리고 이 고장
은 비워 두었다.
경성이라면?
함경북도 귀때기 근처 중동부지요. 왜 그 주을 온천도 있고 한. 고구려 망하고는 발해
에 소속됐다가 여진 땅이 된 곳인데, 극지라. 고려 예종 임금 2년에 명신 윤관이 말입
니다. 파평 윤씨, 문숙공, 동궁시강에 한림학사였던 윤관이 추밀원사로 동북면 행영병
마도통사가 돼서 십칠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 정벌에 나서지 않았습니까? 그때 윤관
이 이 경성 땅에 진을 친 여진들을 다 내쫓고, 아홉 지구에 구성을 쌓았지요.
하지만 사나운 여진족들은 여전히 머리 갈기를 날리며 침범해 들어오곤 하였다. 그러
다가 결국은,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왕성하게 떨쳐 일어나며 흥기하자 역부족으로 이
아홉 성을 더 지키지 못한 채 뒤로 밀리어 반환하였으니. 침범하고 물리치고. 점령당
하고 수복하고, 강토의 최변 북방은 늘 말발굽의 황토 먼지와, 죽고 죽이는 피비린
내가 바람을 뒤흔들어 벌겋게 자욱하였으며, 추수하던 백성과 모이 쪼던 가축을 노략
하여, 말과 소를 끌어가는 짐승의 울음 소리, 사로잡혀 울부짖는 아녀자와 남정네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이 끊일 날 없었다.
금이 멸망한 후에 이곳은 원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 원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공민왕은, 민족의 일대염원인 고구려 옛땅
을 회복하고자 요동팔참을 점령하고는 저 만주 벌판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었다.
이때 공민왕은 경성 땅을 다시 원으로부터 빼앗아 찾았는데.
조선 건국 태조 7년에는 여기에 만호진을 두고 이름을 경성이라 하였다.
이 경성으로 경원부를 옮긴 것이다.
이토록, 떼치지도 못하고 정벌도 못하면서 시달리던 중에, 훗날 세종때, 육진을 개척
할 즈음, 임금은 병조에 교지를 내려 말씀하시되.
우리나라 북계에 있는 두만강은, 하늘이 만들고 땅이 베푼 험고한 땅이다.
태조께서 비로소 경원부를 공주에 설치했던 것을, 태종께서 소다로(경원에 속한 지역
이름)에 옳겨 부치(부를 둔 장소)를 두시었으니, 이는 모두 처음으로 왕업을 일으킨 땅
을 중히 여긴 때문이었는데, 이를 지키는 신하가 좀도적의 방어에 실패하고 부거참
에 잠시 머물렀더니, 그냥 그대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옛 성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 일찍이 명령하시기를
만약 오랑캐들이 이곳에 와서 살고 있으면 곧 쫓아버려, 절대로 도적의 소굴이 되게
하지 말라고 엄중 간곡히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이제 저 소다로와 공주가 거친 풀밭이 되었으며, 오랑캐의 기마가 제멋대로
밟고 사냥하는 마당이 되었으니, 내가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도다.
또 아무하(함북 회령의 옛지명)는 두만강 남쪽 우리 경내에 있다. 토지가 비옥하여 농
사와 목축의 장소로 알맞고, 바로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니, 거진(정삼품 절제사와 종삼
품 첨절제사가 있는 진영)을 설치하여 북문을 웅장하게 하기에 합당하다.
태조 때에 남만주 지방에 살던 여진 부족이었던 건주여진의 두목 동맹가첩목아가 순
종하여 와서 우리나라의 번리(울타리)가 되기를 청하매, 태조께서 사방의 오랑캐를 지
켜 준다는 생각으로 잠시 허락하였던 것인데, 이제 그들이 스스로 멸망하여 번리가 텅
비게 되었으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릴 수가 없다.
내가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다시 경원부를 경성에서 소다로에 되돌려 옮기고, 영북진
을 아무하에 옮긴 뒤에, 백성을 모아서 충실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리하여 삼가 조종으
로 부터 물려받은 천험의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며, 변방 백성들이 번갈아 수자리 사는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할 뿐이니, 과대함을 좋아하고 공을 즐겨 국경을 개척
하는 따위에 비할 일이 아니라.
이러한즉 너희 병조는 마땅히 이 뜻을 본받아 반드시 행하여야 할 조건을 계속 의존
하여 계문(임금에게 말씀을 아룀)하라.
이때 번리가 텅 비었다고 한 것은, 아직 조선의 동북면 영토 확장이 활발하지 못했
던 육진 개척 이전의 세종 15년, 이 지역 야인들 사이에 별안간 내란이 일어나, 여진
족 중 올적합이라는 부족의 추장 양목답올이, 아무하의 오도리 부족을 공격하여 건주
여진 좌위 도독이었던 맹가첩목아를 살해한 커다란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건주좌위
여진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거의 궤멸 상태에 빠진 상황을 두고 한 말이었다.
양목답올이 본래 요동땅 개양에 살던 여진족 추장 아닙니까. 헌데 그 지방 관헌이
가하는 학해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거든요. 그래 가지고 개양에서, 명군에 편입
된 여진의 군인 수백명과 중국인 남녀들을 포로로 잡아끌고 아무하 쪽으로 이동했는
데, 명나라에서는 이 사람들을 쇄환하려고 자주 조선 조정으로 사신을 보냈지요. 그
런데 그 맹가첩목아는 같은 여진인이지만 동생 범찰이하고 함께 제 부족을 이끌고
조선에 귀순을 해서, 번병(왕실을 수호하는 변방 지대의 감영이나 병영, 또는 제후의
나라, 앞가리개)으로 자처하며 노릇을 잘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더욱이나 그는 명으로부터도 '건주좌우도독`이라든가 '도지휘`등의 직함을 받고 있었
던 터이므로, 항상 명사와 협력하여 지냈는데, 그들은 어서 빨리 양목답올을 잡아
쇄환시키라 종용 재촉하니, 맹가첩목아는 양목답올을 쫓고, 양목답올은 맹가첩목아를
증오하며 어금니를 푸르게 물어 원한을 깊이 갈았다.
그러던 중, 세종 15년. 시월 열아흐렛날 밤.
마침 명나라 관리 배준이 왔을때, 양목답올이 각처 야인 팔백여 명을 이끌고 들이닥
쳐 맹가첩목아 집을 습격했습니다그려. 엄청난 일이지요. 그 사나운 여진 야인들이
팔백명이나 한꺼번에 집 하나를 덮치다니... 맹가첩목아도 결코 녹녹지 않아서 그
만한 규모로 살았겠지만, 다른 여진 야인들도 맹가첩목아에 대한 앙심이 그만큼 있었
던 것 아니겠습니까.
왜놈한테 빌붙어서 왜놈이 주는 작호 받고, 왜놈 앞잡이 노릇하는 조선놈 보는 조선
사람들 심정 같은 것이겄지.
이기채의 말에 기표는 묵묵히 목을 곧추세운 채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굳이 그것
이 자신에게 들으라 한 말은 아니었으나, 웬일인지 자조와 책망이 섞인 이기채의 어
투에 서먹해진 탓이었다.
그러나 기표는 그런 심정에 소득없이 잠겨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금방 음성을 추스려, 하다 만 이야기를 이으며 마치 자신이 그 일의 현장에 있었던
것 처럼 조목조목 갈피를 헤집어 나갔다.
양목답올이 맹가첩목아의 집을 치고, 맹가첩목아와 그 아들 아고를 한 박에 죽이고는,
작은아들이며 부녀자들을 포로로 줄줄이 묶어 끄집고 달아나 버렸는데, 마침 맹가첩목
아의 애비 다른 동생 범찰이는 천행으로 화를 면했지만 졸지에 당한 정경이 하도 참
혹해서 겁이 나, 이 아무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 다른 데로 멀리 이주를 해 버리려고
하니 이 땅에 주인이 없는 고로, 상께서 번리가 텅 비었다 하신 것이지요.
야인들 사이에 자중지란 일어나는 일이야말로 조선 조성에서는 바라던 바요, 이는 하
늘이 주신 기회이므로 세종은 두만강 유역의 조종의 땅을 반드시 되찾기로 결심하고,
밤낮으로 골몰하여 중신들과 숙의하였다.
그리고는 황희. 맹사성. 권진. 하경복. 심도원 등을 불러 말씀하셨다.
지금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모두 죽으매, 범찰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우리 경내에 와서
살고자 하나, 여러 대신들이 말하기를, 경솔하게 허락할 수 없다고 하니, 그 의논이 지
당하오. 그러나 이를 생각할 때마다 이러한 궁리를 할 수도 있소. 아무하는 본래 우
리나라 경내인데 혹 범찰 등이 딴 곳으로 옮겨 가고 난 뒤, 또 다른 강적이 있어서
아무하로 들어와 살게 되면 우리는 나라의 변방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또 하나의 강
적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닌고, 그러므로 내가 저 허술한 기회를 타서 영북진을 아
무하에 옮기고, 경원부를 소다로에 옮겨서, 옛 강토를 회복하여 조종의 뜻을 잇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그리고는 북방 변경에 서슬을 세우면서 경원과 영북진에 견고한 벽성을 쌓고, 토관
을 설치하였다. 토관의 직책은 평안도. 함경도의 부. 목. 도호부에 따로 둔 벼슬로서
오직 그 도 사람만 시켰던 향직이었다.
그런 다음, 본도민을 추쇄하여 일천일백 호는 영북진으로, 일천일백 호는 경원부로
이주시켜 수자리를 살게 하였으니, 백성 쪽에서 본다면 강제 이주라고도 할 것이다.
그로부터 육 년이 지난 세종 21년 팔월 세종은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명하였다.
나라의 동북경은 공험진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말이 전하여 온지 오래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 땅에서 상고하여 보면 이 진은
장백산 북쪽 기슭에 있다고 하나, 또한 그 허실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
관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나라의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석이 있다 하니 본진(공험진)이 선춘점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리고
비문은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 상태인가. 만일 길이
험하고 거칠어 사람을 시키기가 쉽지 않다면, 폐단 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숙고하
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 밖에 오래된 성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에 어찌 연유있는 비갈이 없겠
는가.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서 등서할 수 있을는지 여부를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을 쫓고 구성을 설치했다는데. 그 성이 지금의 어느 성이고, 공험진의 어느 쪽에 있으며, 그 상거는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얼마나 되는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상세히 아뢰라.
이처럼 온 심력을 다 기울여 여진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의 동북면 두만강변에
육진을 개척한 세종은, 서북 방면에서 침략해 오는 여진족을 막기 위해서 또한 압록
강 상류에 자성. 무청. 우예의 사군을 설치하였으니 이로써 끊임없이 변방을 소란
하게 하며, 먹을 양식과 뿌릴 씨앗. 소금. 장을 얻으려고 우리나라 연안 각지에 침입
하여 사람과 말과 소와 가축, 재물을 닥치는대로 약탈해 가면서, 아들은 아비를 잃고
아내는 남편을 잃게 하던 여진족을 제압 정토했던 것이다.
야인 사백여 기가 갑자기 여인 경내에 침입하여 생업하던 인물을 마구 잡아가므로,
강계 절제사 박초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붙들려 갔던 사람 스물여섯
명과 말 서른 필, 소 쉰 마리를 도로 빼앗아 왔으나, 우리나라 사람으로 전사한 사람
이 열세 명, 적의 화살에 맞아 부상한 사람이 스물다섯 명 이었는데, 마침 해가 저물어
끝까지 쫓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라는, 세종 14년 십이월 구일도 평안도 감사 박규로부터 올라온 급보며, 여연. 강계
지방에서 붙들려 간 사람이 일흔다섯 명, 싸우다 죽은 사람이 마흔여덟명 입니다.
홀라온야인이 백오십여 인마를 거느리고 와서 난독지방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리고 지
나갔다 하기에, 우리 편에서도 인마 삼백여 명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그들을
쫓아가서 남녀노소 예순네 명을 모두 빼앗았습니다는 보고들이 쉬지 않고 날아들던
세월이 토벌되었던 것이다.
그후, 숙종 시기에는 새로 무산부를 세우고 무장부대를 주둔시켜 국경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숙종 38년 임진년(1712), 대청 강희 51년에, 조선의 이의복.조대상과, 청나라
목극등이, 음 오월 십오 일, 백두산에 올라 회담하고 두 나라의 변계를 확정한 후, 이 사정
에 비석을 세우니, 이것이 백두산 정계비였다.
정계비는 압록.토문 두 강의 분수령인 산정, 백두산 천지 동남방으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푸른 빛 도는 청석으로 쪼아 세웠는데 (서위압록동위토문고어분수령상륵석위기)
라 새기었다. 산 위에는 샘물 두 줄기가 있었다.
그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었다.
이 어간에 있는 다른 샘물 한 줄기는 삼사십 보 가량 흐르다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 원천과 합치고, 한 갈래는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 원천
과 합치었다. 그 흐르는 모양새가 사람 인자와 같은 두 물줄기 가운데, 호랑이 형국의
작은 바위가 하나 어찌 보면 뛰는 거북처럼도 보이게 엎디어 있었다. 비석은 이곳에
세웠다.
경계가 확정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두만강 봉금령을 내리고, 사사로이 강을 건너는 자
에 대해서는 사형을 내리겠다 하였다.
청나라에서도 신주 밖을 국경 바깥으로 취급하고 사람 살 곳이 못된다하여 황폐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하여 연변 일대는 날짐승과 길짐승이 하늘을 메우고 땅을 채우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다만 사냥꾼이나 약을 캐는 사람들, 혹은 탐관오리 학정을 못이겨 달아난 망명자들
만 이 봉금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사로이 드나들면서, 심산 유곡이나 황야에서 짐
승들과 함께 먹으며 살아갔다.
그러던 고종 6년 기사년(1869), 청나라 목종 동치 8년에, 함경북도 육진에 전례 없
는 대기근이 들어, 풀뿌리도 캐먹을 수 없게 된 백성들이 국가 봉금령을 불고하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강북으로 넘어가니, 이것이 바로 최근 근세 조선인들이 연
변으로 이주한 역사의 첫 장이었다.
그러면서 십여 년이 지난 고종 9년 임오년(1882), 청나라 덕종 광서 58년에, 길림 장
군 명안이 두만강 동북지대를 개간하기 위하여, 영을 받고 변경을 순시하다가 조선인
의 이주 정황과 형상을 보고는 크게 놀라 조선 조정에 글을 보내어 두만강 이서와 이
북을 차지한 조선 빈민들을 몽땅 돌려가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 계미년 사월, 돈화현
에서는 종성. 회령 두 개 읍에 포고를 보내어 삼엄하게 항의하였다.
월경한 조선 개척민들을 몽땅 돌려가라.
이리하여 두 나라의 경계 교섭은 다시 또 시작되었다.
1885년부터 1888년에 걸쳐 세 차례나 변계 검증 회의를 가졌으나 결국은 효과를 보
지 못하고, 중국 정부에서는 무력을 행사하려고 간도 중심에 연길청을 새로 세운 뒤
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조선 개간민에게서 조세를 받아들였다.
조선 개간민들은 조선 조정에 여러 차례 공소하여 자신들의 처지를 보살펴 달라고 하소
연하였다.
조선에서는 두만강 유역에 변계 경찰서를 설치함과 더불어 간도 사찰사를 두어 조선 개
간민들의 이익을 보호해 주었는데, 당시 중국 국적에 입적한 조선민이 이만 칠천사백
여 호에 남녀 숫자가 십여만이나 되었다.
그러나 몇 년 안돼서 노일전쟁이 시작되고 조선은 나라 안팎의 재난이 한창 자심해
진 까닭으로 간도 문제를 돌볼 사이가 없었다.
그 말갈. 여진. 야인의 땅으로, 부랑의 땅 간도로, 이 애들이 왜 갔단 말인가,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엇을 하러.
이 애들이 간도로 갔는지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모르지요.
이기채는 무겁게 눈을 감았다.
부모로서 제 자식이 어디로 갔는지 왜 갔는지 알 수가 없으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 볼 수 있으리야.
이기채의 회한에 저린 심서를 기표는 이미 건너짚어 보았는지라, 되도록 자상하게 아
는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밤 늦도록까지 들려 주었다. 집에도 내려가지 않은 채 사
랑에서.
닿을 수 없는 곳에 바람처럼 흩어져 버린 자식의 소식을 간접으로나마 어루만져 보고
싶은 어버이 가여운 심회를 기표가 모를리 있겠는가. 그 지역의 지명만 말해도 가슴
의 밑뿌리가 어금니 저리듯 저르르 울리곤 하는 것은 기표도 마찬가지였다. 강모가
있는 곳에는 강태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 기표는 만주와 연변 일대에 대하
여 남모르게 많은 소식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널리 벼릿줄을 풀어 귀의
망을 펼쳐 놓으면, 어느 날인가 자식들의 소식이 그 저인망에 걸릴 것을 기표는 믿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기표는 국경 너머 만주땅 그 어느 곳이라도 조선 사
람 사는 곳이라면, 날카롭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한 톨이라도 정보를 얻어냈다.
기표가 그러할 때 이기채인들 다를리 있으리.
아무리 대추씨처럼 단단하고 놋재떨이 같이 강단있다 하지만, 그는 태산 같던 어머
니를 여의고 시린 무릎 여윈 뼈에 살 부빌 단 하나 자식놈 또한 종적없이 도둑맞은,
허전한 아비에 불과하였으니, 형제 서로 마주앉아, 속마음을 구겨서 접어 두고, 그저
다만 간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우회하여 심중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
이야기 곁에 자식들 살 닿고 숨 어린 바람이 묻어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제 강호가 돌아와 만주 봉천 서탑거리에서 만난 강모와 강태의 소식을 풀어 놓
고 갔으니.
선조의 그리운 옛 강토에, 그리운 자식들이 몸담고 머물러 있는 것이, 불쌍한 아비
의 가슴을 쳐, 이기 채는 깊은 밤 아무도 모르게 홀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었다.
그러나 그곳이, 전주 이씨 선조의 아득한 숨결이 일구어 낸 땅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도 안심이 되기는 되어, 강모가 그 품에 든 것은 차라리 다행이라, 싶기도 하였다.
21. 내비두어
온갖 짐생을 다 키워도 머리 꺼먼 짐생은 키우능 거 아니란 말, 내가 그전보톰 딛기
는 들었지만 왜 그렁가를 몰랐드니, 인자 봉게 옛말 그른디 한나도 없습디다. 무단헌
소리가 왜 나왔을 거이요잉? 다 그럴만 헝게로 그랬을 티지.
분이 안 풀리는 공배네가 바짝 마른 두 무릎을 깍지 끼워 옴킨 채로 부르르 어깨를
떤다. 이미 가짓빛 이 되어 버린 입술을 물어뜯어 짓씹는 그네의 낯색은 살기마저 느껴
지는 회청이었다. 그 잿빛 띠운 푸른색에 놀란 사람은 공배였다.
허, 이거 일나겄네.
어이 참, 철들자 망령난다고들 허등만 임자는 망령나기 전에 철이 몬야 들어서 갠찮
그만, 시방이라도 그 기맥힌 것을 알었잉게 잘 되얐어. 머. 참 큰 것 깨쳤네어이.
골골이 주름 패인 이마빡과 볼따구니 눈자위를 구기면서, 웃음엣소리 비슷하게 눙치
려드는 공배의 대꾸를 비웃적대는 것으로 맞받은 공배네가, 벌통 엎은 것처럼 부아
를 터뜨리며, 마치 그가 옹구네이기나 한 듯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그 빌어처먹을 녀르 여펜네가 나를 보고, 이보시오 성님, 말 좀 물어 봅시다 예, 허드
니마는 어이구.
여우 꼬랑지를 감는 시늉으로 옹구네 음색을 본떠 흉내내던 공배네는 그만 화증이 북받
쳐 거친 숨을 토 하고 만다. 춘복이 농막에서 바로 아까 옹구네한테 당한 일이, 명치에
뼉다구 거꾸로 꽂힌 것같이 걸려 숨통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숨쉬여 감서 히여. 넘 이얘기 허다가 내 초상 치겄네.
공배는 곰방대에 담배를 일부러 천천히 잰다. 아낙의 모습이 전에 없이 격한 것이어
서, 잔뜩 허한 사람이 저러다 기색할까 겁이 난 탓이었다. 어떻게든 저 심정에 물꼬
를 터주어야 탈이 안 붙을텐데. 싶어서 그는 맹문이마냥 공배네는 우묵히 바라만 본다.
무어 한 마디 되물을 필요도 없는 것은, 일의 경위나 속내를 이미 다 짚고 있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그는 대꾸 대신 탁, 타닥, 부싯돌을 친다. 부딪치는 불빛이 날카롭다.
오소리 잡을라요? 사람 복장 처지는디 불끄장 때니라고.
공배네가 눈을 꼬아 뜬다.
사램이 늙어 감서 겁이 없어.
그 소리도 못허고 살어? 내가 먼 죄 졌간디? 등신맹이로 암 말도 안허고 있는디끼
없는디끼 상게로 아조 농판인지 아능게비여.
누가, 내가?
봉사도 날짜 가는 속은 알드라고, 나도 지년 짚이는 거 있잉게, 지년도 나 짚이는 거
있겄지맹.
눈먼 큰애기 시라구 다듬능가. 건둥건둥 외딱 배딱 왔다갔다 허지말고 찬찬히 이얘기
히여. 밤은 징게로. 어채피 잠도 안온디.
잠? 참말로 태평헌 소리네. 이 판에 잼이 다 머이여. 그년이 아조, 나보고 그럽디다.
성님이 누구시요? 내가 하도 기가 맥헤서, 머? 그렁게로 요년이 눈꾸녁 차악 내리뜨고
목청 깔어서 허는 말이, 저 사람한테 누구시냐고오, 그렁만. 자빠져 누워 있는 춘복
이란 놈을 손꾸락으로 갈침서. 누구디 다. 내가 춘복이한테 누군디. 내가 누구요,
가한테. 어 디 이녁이 한번 이얘기 해 봇시요. 나 그것 좀 알 어야겄잉게.
공배네가 공배한테로 제 앙가슴을 내밀며 탕탕, 친다.
공배는 대답 대신 푸우우, 부옇게 연기를 뱉어 낸다.
몰르요? 그렇게 몰릉게 당허제. 그년이 머라고 그런지 아요? 성님이 배 아퍼서 저 사람
났냥만? 났니야.
아이고오. 천하 망해 때가리 부칠 년.
내 아들이다.
어쩔래?
라고 당당하게 외장치며 오금박지 못한 분통이 원통해서 공배네는 으드드득, 이를 갈
았다. 이빨이 부싯돌 치는 소리를 낸다.
문서 약조가 무슨 소용있을까 싶게 분명한 부모 자식 정리를, 그 오랜 세월 동안 의심
없이 품어 안고 나누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저 사람허고 몸 섞어서, 가시버시요.
뻔뻔스러운 낯바닥을 반짝 치켜들고 혹자 박힌 주둥이 야불야불 지껄일 때, 내 어찌
그 년의 주둥팽이를 번개같이 후려쳐 납작하게 못 만들었을까. 다시는 입 뻥긋도 할 수
없게 짝짝 찢어서 뭉개 놓았대도 시원치 않을 것을. 엉겁결에 다그치는 대로 밀려
당하고 만 제 꼴이 생각사록 분통 터져 공배네는 아까부터 공배한테 원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지 속으로 난 자식도 품안으 자식이라고들 않등가아? 하물며 덜썩 큰 넘으 자식,
저 혼자 큰지 알고 지 멋대로 지집 붙응걸 인자 와서 어쩌자능 거이여어, 내비두어야
제.
그 속도 온전할 리는 없겠지만 공배는 맞장구치다가 불 일어날 것이 눈에 보여 짐짓 혼
연한 척한다.
아니, 가가 왜 넘의 자식이여? 내가 가를 어뜨케 키웠다고.
공배네가 검붉게 충혈된 눈을 까뀌같이 치뜬다.
흘러간 공은 돌아보들 말어. 배추 벌거지가 배추 속잎 다 뜯어먹고 크지만, 지 날개
돋으먼 두 번도 더 안 망설이고 후루루 날러가 불잖이여? 나비 되야 가부리능 걸
배추가 어쩌겄능가. 손이 있으니 붙잡을 수가 있어어, 발이 있으니 쫓아갈 수가 있
어? 헐 수 없제. 그저 구녁 숭숭 뚫린 잎사구나 너실거림서 시름을 달래고. 원망을 말
어야여.
마음이 스리고 중치가 상하는 것을 겨우 누그리며 아낙을 달래고는, 누구에게랄 것 없
이 공배는 에에잇. 하더니 땟국 절은 나무재떨이에 곰방대를 두드린다.
머? 피도 살도 안 섞인 성님이 가찹소오, 살 섞은 내가 가찹소? 하이고, 야 야. 던지
럽고 추접시러서 나같은 사람은 차마 그 말 입에 담도 못허겄다. 어쩌다 걸려도 똑
그렇게 걸렸능고. 부모 복 없는 놈이 지집 복도 지지리도 없어 갖꼬오. 그년이 나보
고 안 그러요?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 성님도 아시겄지이? 내비두랑게 그러네이.
그년이 눈꾸녁 값 허니라고 인자 춘복이 꼭 잡어먹고 말거이여. 그게 비얌눈 아니
요? 거그다가 막 울고 난 것맹이로 물끼가 번들번들. 춘복이란 놈은 황소 두께비 상호
라 그년 앞에서는 옴짝도 달싹도 못허고 오금 붙어, 날 잡어 잡수우.
허, 거 참. 그렇게 되라고 비능가? 말이 씨 된당만 기양.
씨 안되먼? 일은 이미 글렀소. 그노무 씨가시(씨앗)는 싹이 터서 노오랗게 꼬실라지
는 판이라고요. 시방.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춘복이를 양자로 들인다는 문서라도 한 장 만들어 둘 것을.
정이면 되었지 상놈의 처지에 읽지도 못한 문서는 받아다 무엇에 쓰랴. 물려줄 성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노비 전답 재산이 있는 것도 안닌 바에. 그저 서로 오며가며 한평
생 오순도순 밥 먹었냐 잘 잤느냐 따숩게 또닥이면, 부모 없고 자식 없는 설움 덜고
의지하며 그에서 더 바랄 나위가 없겠길래. 문서같이 겁나고 거창한 것은 아예 꾸밀
생각조차 못했었다. 또한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어느 하루 혼자 남아 천
애고아 되어 버린 춘복이를 거두면서, 어매. 아배로 부르라 시키지도 않았다.
어거지로 묶어 매어 무릎 아래 잡아 두지도 않았다.
울안에 핀 풀꽃이 이름 없다고 남의 꽃이랴. 순리따라 자연이 된 관계는, 설명하지
않아도 어느덧 세상이 다 아는 풍경으로 어우러 졌는데.
그렁 거이 그게 잘못이였등게비여. 사람들 맴이 어디 모도 내 맘 같어야제? 내가 그
놈 멕이고 입히고 코 떼어 줄 때는, 뒷공 바래는 맘 눈꼽재기만치도 없었지만, 정 하
나 묻어 두고 그렇게나 좋등마는.
묻는다고 다 낭구 나능 거이 아닝게비지 머.
내가 무신 천도복송이 열리기를 빌었소?
개살구사 달리든 뿌랭이가 썩든, 탓을 허지 말어. 팔짜 소관잉게.
궁글어 온 독이 백힌 독 뽑아 낸다드니 똑 그 짝 났그만. 아조, 죽쒀서 개 준 꼴이
되야 부렀어. 아이고, 그만도 못허제이. 개는 원 나중에 복날 잡아먹기라도 허고, 심
심풀이 푸접으로 데꼬나 놀제. 개만도 못헌 년.
공배네는 어떻게 짓씹어도 씹히지 않는 옹구네 소행머리와 말뽄새 때문에 열이 받쳐 벌
컥벌컥 자리끼를 들이켠다. 이빨 빠진 사기 대접을 밀어 놓는 그네의 속이 이번에 후들
후들 한속 든 것처럼 떨린다.
지년이 무신 염치로 나한테, 니 배 아퍼서 저 사람 났느냐고 물어? 묻기를. 나는 아
들 낳아 봤다아, 그 겅가? 오살할 년. 그말 헐 직에 아조 배야지를 따악 내밀고는 배장
군 시늉을 험서, 유세허는 꼬라지라니. 참, 볼 것을 보제 못 보겄등만.
그것이 공배네는 서러웠다.
어쩌다가 금쪽 같은 내 자식을 어려서 죽이고는, 눈먼 딸년 하나도 더 못 낳아 본 갈
치 배 납작한 평생이 안그래도 골수에 사무치는데, 속지르기로 작정하고 내리꽂아
쏘아댄 것이 분명한 옹구네 말에 밑창부터 뒤집혀 버렸던 것이다. 마치, 커다란 항아
리에 흙탕물을 담아 두면 찌꺼기가 아래로 가라앉아 윗물이 우선 말갛게 보이나, 지
푸라기 한낱만 슬쩍 집어넣어 콕콕 쑤셔도 그만 순식간에 다시금 모조리 흙탕물이
되고 마는 것처럼, 공배네는 자식 잃은 아낙의 설움이 늘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다가,
별것 아닌 덧거리 말에도 남모르게 속이 뒤집히곤 하였는데, 무던한 성품에 좀체 내
색을 안하니 곁엣 사람은 얼핏 눈치를 채지 못하고 넘어가기 쉬웠던 것뿐이다.
그래도 나한테는 우리 춘복이가 있잉게. 머 꼭 지 뱃속으로 나야만 자식이간디? 외
나 부모 자식 정리는 낳은 정보돔 키운 정이 더 크다고 않등게비. 옛날보톰도.
공배네는 나이 들어 구부정한 무릎이 텅 빈 공배를 보기가 몹시 민망하고 면구스러
울 때도, 혼자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곤 하였다.
그랬던 것을, 옹구네는 정통으로 도끼날 내리쳐, 여지 사정도 없이 공배네 가슴을 장작
패듯 빡 쪼개서 흙탕물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항아리 바닥까지 박살을 내버린 셈이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깨지고, 쏟아지고, 허사가 되면서 그 그릇 깨진 조각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단도같이 세운다. 공배네는 제 가슴 깨진 조각날에 살이 베이어 아픔을 못 견디고
깍지 낀 팔을 부둥켜 안는다.
그런 아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배는 얼른 말머리를 돌린다.
근디 거, 오루꿀댁 작은아씨가 몸 가지셌다능거이 대관절 무신 소리여? 나 암만 생각해
도 이게.
옹구네가 춘복이를 독차지하고 주무르는 것이며, 사리반서방님이 주신 돈, 약값을 가로
챘다든가 하는 것 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엄청난 사건이라, 공배는 오히려 지금 공배네가
분을 못이겨 길길이 뛰는 것보다 더 큰 걱정이 되는 일이었다.
참말이까, 그게?
공배 말에 공배네가 딴 정신이 든 사람처럼 얼른 대꾸한다.
아 그렇대요, 긍게. 그년이 그러대.
먼 그런 일이 있이까잉.
긍게 내가 자다가도 인나 앉겄다고 안 그럽디여? 천지가 개빅을 헐일이제 이런 사람
궁리로 어디 짚어 져?
아이고오. 무서라.
공배의 얼굴에 두려움이 낀다.
근디 누구 애기란 거이여?
그 말은 안 허대애.
그리여잉.
공배가 고개를 주억인다.
항아장시가 언지 온댔다고?
말로는, 늘 오는 때 가늠해서 뫼시러 오마고 허등마는.
하루 이틀 개법게 댕게오실 행장이 아니드람서? 보따리도 묵직허고.
보따리도?
아, 안 그랬어? 작은아씨 짐이 예사시럽지가 않더라고. 항아장시 둥덩산 봇짐보돔
더 크먼 컸제 작든 않겄드람서 왜. 암만 비접을 가신다고는 허드라도 쉽게 못 오실랑
가, 보 따리가 벨라 크고 무거 뵈드라더니. 그 보따리 봉게로 옹구네란 년 말이 맞기는
맞등갑드람서어? 그리여. 맞어. 그랬었다.
그 쪽제비 같은 년이 여시맹이로 그걸 알어보고는 날강도짓을 또 헝거로이구나. 내 고
에! 이게 다 이년 이 뀌미고 지어낸 일이그만.
공배네는 정신이 펀뜻 들었다.
틀림없이 옹구네가 그 짐보따리를 가로채려고 그렇게 있는 말 없는 말 지어 내어 못들을
소리 엮어대며, 저희 집에다 강실이를 잡아 가둔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네는
벌떡 일어선다.
어디 가?
내가 그 생각을 못했어.
어디 가냥게, 또?
공배는 아낙이 다시 옹구네한테 따지러 농막으로 쫓아 올라가려는 줄 알고 반무릎을
세워 주저앉힐 태세를 하며 채묻는다.
작은아씨를 이리 뫼시고 올라고.
머이여?
생각해 봇시요. 괭이한테 생선을 맡긴 꼴이제, 거가 어디라고 작은아씨가 지신단 말
이 요? 잠시 잠깐이라도. 어림없제, 나중에 내가 삼수갑산을 갈망정 이대로는 안되겄
소. 얼릉 서둘러야제. 아이고.
아니, 왜 이리여? 정신채려. 무조건 앞뒤 없이 저질르고 보자능 거이며, 머여? 시방.
어디로 뫼시고 와? 뫼시고 오기를. 일의 사단도 모름서. 마른 하늘에 날베락 맞일라고.
잉? 앉어 바, 어서. 그러고. 내 말좀 들어 부아아. 급헐수록이 돌아가라고 안히여? 그년
이 도독년이랑게. 아까도 기양 사리반서방님이 그으 살갑게 주고 가신 돈을, 눈 깜작새
잡어채 갖꼬는 어따가 슁킷능가 날 름 줏어채케 불고, 어디 주댕이 씻은 자리도 없
드랑게요. 미꼼허니.
도적년이고 도첵이고 간에 넘의 일이여. 넘의 일.
아 왜 넘의 일이여어? 시방 작은아씨 짐보따리도 그년이 요절을 낼 판인디. 얼릉 안
가 보면. 시얌가에 깟난애기 빠질라고 허능 걸 보고만 있으란 말이요? 이러고 있을 때
가 아니제.
공배네는 미영치마 앞자락을 잘못 밟아 우두두둑 말기 터지는 소리가 나게 헛디뎌 서두
르며 방문고리를 잡는다. 시각이 급했던 것이다.
이 단칸방에 뫼시고 와서 어쩔 작정이냥게에?
단 메칠 간인디 어디 가서 꼬부리고 자먼 잘디 없을랍디여? 자개가 금생이네 가든
지 택주네고 가든지.
휘잉 달아나는 발걸음 소리에 어이가 없어진 공배는 앞일을 가늠해 보느라고 골 패인
이마를 깊이 찡 기는데, 공배네는 옹구네 방문짝을 사정없이 열어제친다. 마음이 급한
탓이었다. 옹구네가 아직 농막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얼른 일을 도모해야 탈이 안 붙
을 터이니.
옹구야.
부르고 들어갈 겨를도 없었다.
옹구는 새비처럼 꼬불친 채 방 귀퉁이 한쪽에 잠들어 있었다.
천만다행히도 옹구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다고 누가 열녀 정문을 세워 줄 거이냐. 쎄 빠지게 수발 듬서 맻날 메칠 눌러
붙어, 지 말마따나 지 배 아퍼 난 자식새끼 팽개치고 농막에만 맴돌때는, 다 그만헌
잇속이 있잉게 그러능 것을. 한 가지 일을 보면 백 가지 일을 알 수가 있제. 훤허다.
훤해.
그네는 성큼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재빨리 강실이 머리맡에 놓인 보퉁이를 쏘아보
았다. 아직 그 보따리를 풀어 본 흔적은 없는 것 같았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옥색 물들인 보자기가 이불보만이나 한데, 들고 난 자국 하나 나
지 않게 편편한 모양새로 채곡채곡 쟁여 싼 물건들은, 피륙과 보패 의복들이 분명해 보
였다.
니가 감히 이것들을 독차지헐라고 모사를 뀌미다니. 하늘이 무심치 않으시먼 니 손모
가지가 썩고도 남을 거이다. 매안으서라고, 알먼 가만히 지시겄냐? 대관절 그년은
전생에 멀 허다 왔이꼬? 나허고는 또 무신 웬수 척을 졌었간디 이렇게 일마동 꾀이고
얽혀서.
아이고, 작은아씨. 눈 뜨겼네요?
찬 기운이 끼쳤는지 아니면 아까 문짝 벌컥 당기는 소리에 놀랐는지, 강실이가 홀연
눈을 뜨고 공배네 를 바라보자, 그네는 반색을 한다.
얼매나 놀래겼능기요?
언감생심 강실이가 손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보듬을 것 같은
기색으로 공배네는 강실이 얼굴을 들여다본다.
까우룩한 등잔불 탓도 있겠지만, 이토록 가까이에서 작은아씨 얼굴을 본 일이 없었
던 공배네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미 그 옛날 아리잠직 어여쁘신 모습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숨이 붙어 산 사람이
랄까, 도무지 살아 있다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검누렇고 푸른 빛 도는 낯색에 사색이
짙은 때문이었다.
즈그 집으로 가십시다. 어서 일어나계요. 지가 업고 가지요.
불문곡절하고 이불을 걷어차며 강실이를 일으켜 앉힌 공배네는 순간 보따리에 눈이 가,
공배와 함께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도저히 한 몸에 업고 이고 할 수가 없는 탓이었다.
저 짐 보따리를 몬야 갖다 놓고 와서, 작은아씨를 업고 가까? 앙 그러먼 작은아씨를
몬야 업어다 놓고 와서 짐 보따리를 갖고 가까.
그러나 둘다 마뜩찮은 방법이었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옹구네가 들이닥치면 이도 저
도 다 틀려 버리지 않겠는가.
저한테 지대고 조께 걸어 볼 수 있으시겄능교?
일으켜 세운 강실이 어깻죽지에 제 팔을 집어넣으며 공배네가 묻는다. 강실이는 희미
하게 고개를 끄덕 인다.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왜 나가야 하는지 영문을 묻지도 않는
강실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저것도 챙게 가시야지요잉?
묵근한 보퉁이를 냉큼 머리에 올려 인 공배네가, 벽에 기대어 세워 두었던 강실이를 부
축하며, 막 한 걸 음을 때려고 할 때.
아니, 이게 누구여어?
누가 바깥에서 돌쩌귀 떨어져 나가게 지게문짝을 잡아당기는가 싶더니, 옹구네가 기
겁을 하며 대꼬챙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벼락같이 달려들어 공배네 머리에 인 보
퉁이를 홱 나꾸어챘다. 제 무게를 못이긴 보퉁이가 방바닥으로 퉁 떨어져 나뒹굴
자, 꼬부리고 자던 옹구가 놀라 눈을 휘둥그래 뜨며 일어났 다. 겁이 난 옹구는 비죽비
죽 입귀를 비틀며 울려는 시늉을 한다.
옹구네 눈에는 그런 것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
머? 나한테 아까 약값 훔쳤다고 애민 소리 팡팡 험서 삿대질허드니, 성님 시방 멋
허요? 쥔도 없는 넘의 집이 들으와서 남 다 자는 오밤중에 시방 멀 훔쳐가시요? 말
조심히여. 말이먼 다 말인 중 아능게빈 디, 찢어진 입이라고 나발나발 아무케나 줏어
셍기네? 나는 시방 작은아씨를 뫼시고 가능 거이여. 보먼 몰라? 공배네는 뫼시고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상하게 그네는 옹구네와 말가릴 일이 생기면 우선 속이 떨 리고 식은
땀이 나서 차분히 따져나갈 수가 없었단. 그래서 이전에는 될 수 있으면 옹구네와 맞
붙지 않으려고 미리 눙치거나, 아예 가시 바르듯이 살을 빼고 알맹이 만 툭, 던져 한
마디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워낙 독이 올라 있어 보통때의 그네 같지가 않은 것이다.
뫼시고? 어디로?
이것이 옹구네였다. 한판 요란하게 벌어질 것이 분명한데도 그네는 마치 허리춤 추
키고, 소매 걷고, 행전 매는 사람처럼 차분히 말 고삐를 잡는 것이다. 고개를 배또롬
히 틀면서.
우리 집이로 가제 어디로 가아?
내 요년을 오늘 저녁에 반 쥑여 놔야제. 지렝이도 밟으먼 꿈틀헌다는디. 니가 나
를 멀로 보고 요렇 게 마구 밟어? 내가 아무리 농판 버꾸라고, 니가 이렇게끄장 막 대
헐 수 있능 거이여? 어디, 니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맞붙어 해 보자.
공배네 음성 끝이 갈갈이 갈라진다.
왜 그 집이로 간다요?
그러먼 왜 느그 집이가 지시야냐?
말을 허먼 들은 사람끄장 다 죽는 일이라고 안 그랬소? 내가.
부앙 떨지 말어, 누가 그 속 모를 지 아냐? 중이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정신
을 판다드니, 니가 작은아씨 씨러지계서 머 어쩠다고 헛소리 허지만, 속셈은 이 보따리
에 있능거 아니여어? 말이사 바로 말이지만 그 잘난 쌧바닥으로 항아장시끄장 꾀여서
띠여 불고.
오오, 그거이 성님 ㅅ이요? 어찌 그리 잘 앙고?
저리 치나. 걸려어. 갈랑게.
공배네는 긴 말 해 보아야 아무 득볼 것이 없어서 한 손으로 옹구네를 밀치며, 부축
하고 있던 강실이 를 더욱 바짝 조인다.
어디로 누구를 데꼬 간다고 이리여?
옹구네가 엉겁결에 주춤 밀리더니 반사적으로 퉁겨오면서, 매가 병아리 채듯이 강실이
팔을 모질게 잡아챈다. 공배네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강실이 몸통을 두 팔로 감아 안
고, 옹구네는 닭다리 찢듯이 강실이 팔을 잡아당기며 악을 쓰니, 옹구는 그예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 더러운 목숨.
강실이는 두 아낙이 제 몸뚱이 하나를 찢어 가지려고 악다구니 쓰는 와중에, 검불같
이 흩어져 버리지 도, 의연하게 나무라며 위의를 갖추지도 못하는 자신을, 차라리 이
들이 찢어 버렸으면 싶었다.
무릇 여인이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어진 모습에, 첫째는 보행이 단정하여 흔들리지 않
는 것이요, 둘째는 얼굴이 모난 데 없이 둥글고 몸 또한 두터워야 하며, 셋째는 귀.
눈 코.입. 눈썹의 오관이 모두 반듯하게 바르고, 넷째는 이마와 코와 턱, 삼재가 균등
한 것, 그리고 다섯째는 그 언어가 단정하면서도 차지 아니하고 허풍이 없는 것이다.
여섯째 용모는 엄숙하면서도 인정이 넘치며, 일곱째는 눈동자의 검은 모공이 크고 눈
은 항시 바르게 정시하는 것을 이른바 칠현이라고 하느니라. 이렇게 일곱 가지 덕을 두
루 갖춘 상호를 가진 여인의 심상에는 선덕과 현숙함이 가득하여, 부명자수로, 남편
의 운을 일으키어 앞 날을 밝게 하고 자식을 빼어나게 길러서 가문의 명성을 드높인다
고 유장상법에 일렀느니라. 한 집안이 크게 융성하거나 무참히 쇠락하는 것이 여인 하
나 들고 나는 것에 달린 경우가 허다하니, 부디 명심하여라.
아직도 귀에 쟁쟁한 청암부인의 목소리가 이 곡경의 누옥에 울리는 순간, 강실이는
저도 모르게 주루 륵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할머니, 할머니.
사람의 얼굴 형상에 따라 성격이 나타나고, 그 성격은 종신토록 운명에 영향을 끼치
나니. 나는 극부의 상이라. 여인으로서 다스운 세상을 못 살아 보았다만, 예전의 어
른이 말씀하시기를, 사덕이라 일컫는 네 가지 덕성을 꼭 갖춘 여인은, 심성이 바른
까닭에, 비록 어느 부위가 흉한 상을 띠고 있다 할지라도, 모 든 재앙을 물리치고
도리어 복록을 받아 가문을 일으키며 남편 운을 훌륭하게 북돋아서 커다란 행복을 누
리게 된다고 했다.
그 사덕을 짚어 보면, 첫째, 평소에 남과 다투지 아니하고, 둘째, 고난 중에도 상대
를 원망하지 않으며, 셋째, 쌀 한 톨이나 음식 찌꺼기 한 옹큼이라도 결코 버리지 않
고, 넷째, 급한 일을 당해도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는 것.
이라고 조목조목 일러 주시던 청암부인의 모습이, 이와 같은 순간에 떠오르는 것이 강
실이는 너무나도 송구스러워, 차라리 덕석말이 몰래를 맞다가 절명을 하는 한이 있을
지라도 매안에서 당하는 것이 떳떳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매안이 구슬 같은 자손으로 나서 어쩌다 이처럼 치욕적인 정황에 이르고 말았던가.
찢어라, 나를 찢어 갈갈이 흩어라. 내 이 자리에서 더 살고 싶은 마음 실오라기만큼
도 없으니, 더 못 당할 수모도 또한 없으리라.
몸을 내맡긴 강실이를 붙들어 잡은 두 아낙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거품을 물다가, 누
가 먼저라 할 것 도 없이 강실이를 동댕이치고, 저희끼리 맞붙어 머리끄덩이를 쥐어
틀었다.
그 서슬에 강실이는 비틀 저만큼 떠밀려나 벽모서리 귀퉁이에 쿵, 구겨 박질러졌다.
강실이는 바람벽에 등을 기댄 채, 써늘하게 끼쳐드는 냉기 때문만은 아닌 소름에 소
스라친다. 등골을 훑어 내리는 손바닥의 불길한 차가움.
와드득, 저고리 옷고름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털은 산발이 되어 미친 것처럼 흩어진
옹구네가 공배네를 메다붙이며 내뱉는다.
아무리 미워도 춘복이와 내쳐 살 양이면 공배네한테 아주 끝까지 막보기로 덤벼들어
서는 안된다는 것 쯤을 모를 옹구네가 아니었다.
다그치기는 하되 여지는 남겨 두어야 했다.
그래서 힘으로 하려 들면야 다 늙어 쉬어빠진 공배네 정도를 못 이길리 없었지만 적당
히 몇차례 쥐어 뜯겨 주고, 그 대신 이쪽에서도 야물게 긁어 할퀸 다음, 더 넘보지 못
하도록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다.
두 아낙이 야차들 같이 뒤엉키어 붙어서 쥐어 뜯는 것을 보는 강실이는 머리 속이 백지
처럼 얇아지면서 핑그르르 돈다.
청암부인의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이 노여운 질책으로 덮쳐오고, 그 옆에 어머니 오류
골 댁의 가엾게 질린 낯빛, 위의가 후중하면서도 기상이 있는 효원과, 입이 단정하고
작은 율촌댁의 모습들이 겹겹으로 강실이를 둘러선다. 깐깐하고 메마른 듯한 수천댁도
보인다.
이마가 넓고 인중이 곧은 저 부인은 누구일까. 희고 맑은 귓바퀴에 귓밥이 도톰한 부인의
모습도 얼핏 비친다. 반달처럼 아름다운 눈썹에 머리털빛도 윤택한 부인이 엄숙한 눈초
리로 강실이를 직시한다.
조상들이신가 보다.
어느 댁 따님으로 고이고이 자라시다 어느덧 연기되어 매안의 문중으로 시집오신 후,
사덕 칠현을 두 루 갖춘 부상 귀상을 조금치도 흠 내지 않을 생을 정숙하게 사시었던 부
인들.
처음에는 한두 얼굴 그린 듯이 드러나더니, 그 옆에 하나 서고, 그 뒤에 하나 서고,
또 저 뒤쪽에 나타 나고, 이만큼에서 솟아나고, 다시 보면 새로 비치는 얼굴들이 강실
이를 둥그렇게 에워싸면서 점점 좁혀 들 어오는 기척이, 소리 없어 무섭고 차가웠다.
그 눈매들은 한결같이 강실이를 뚫어지게 정시하고 있었다.
덕석에 말리는 것보다 더 숨막히게 조여오는 그 부인들의 무리가 일제히 손가락을 들
어 올린다. 그리고 는 칼끝같이 꼿꼿이 날을 세워 강실이 배를 가리킨다.
손가락들은 표창이었다.
손가락들이 날아온다. 비 쏟아지는 것 같다.
표창들은 속수무책 강실이의 온몸을 난자하며 박혀들었다.
22. 조짐
인월댁은 완자문 살창에 빗드는 햇살을 말 없이 바라만 볼 뿐이고, 수천댁은 도무지 가
당찮다는 듯이 허이구 하더니 그만 실소를 해 버린다.
은비녀 지른 낭자머리가 마치 은사를 곱게 섞어 빗은 것 같은 홈실댁은, 옥색물빛 연
푸른 저고리 소매 끝에 풀먹인 백지로 끝동을 덧대었다. 겨울옷은 쉽게 빨 수 없어 여
러 번 입다 보면 아무리 조심해도 위 젓잖게 때가 오르기 십상이라 그렇게 동정처럼 소
매끝을 한 번 싸 주는 것이다.
바느질 솜씨 좋고 성품이 꼿꼿하면서도 덕기가 있어 마음 쓰는 가닥이 어질고 두터운
그네를 보고 덕유신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음 속에 덕을 쌓으면 저절로 겉모습(몸)도 윤택해진다는 것이다.
기생 늙은 것 못 본다고 않던가? 덕 없는 미색은 덧없는 것이라. 호시절 잠깐 한때
반짝은 하겠지만 나이 먹고 세월 가면 그 텅빈 얼굴에 자글자글 쑤세미같이 들끓는
주름을 다 어쩔꼬? 추접스럽지. 그게 무어 늙어서 주름진 것을 나무라는 말인가, 어
디? 미인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더라고. 천하에 어떤 경국지색도 덕성 기품을
당하 지는 못해.
하지만 그런 덕고망중이 쉽답니까.
선천적으로 자질을 타고나기도 해야 하고, 자라면서 보고 들은 문견도 있어야 하고,
결국은 제 스스로 부지런히 갈고 닦기도 해야 하고. 부인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였다.
그게 참 묘하지요. 정거장에 서서 무심히 오가는 사람들을 볼작시면 이마에다 써 붙인
것 아닌데도 매안에서 나온 사람 다르고 타촌에서 나온 사람이 다르다네요. 유표하게.
머리 빗은 것 하나, 치맛자락 여민 것 하나가 어딘지 모르게 위엄 있고 결이 달라,
매안이는 미영옷에 나무 비녀를 찔러도 반태가 자르르 범접키 어려운데, 타촌의 사람
은 비단 명주로 칭칭 휘감았대도 왠지 격이 없어 천상이라나? 무심한 옷자락 주름에도
품이 서리는 모양이지? 주인 따라.
그런 말 듣기 무색하지 않게 홈실댁은 범절이 반듯하고 규제가 있었다. 그네는 사부
가의 부녀자로서 매사에 본이 되도록 자신을 세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남들에게도 또한
지켜야 할 규범을 들어 올바르게 타 이르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엊그제 뜻밖에도
우스운 말을 듣게 되어 지금 율촌댁 큰방에 앉아 그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오늘은 보름이라 청암부인의 삭망이어서 사리반댁과 동계댁도 조손간에 같이 오
고, 인월댁도 올라와 있었다. 오류골댁은 효원의 건넌방에 잠시 들르겠다고 건너갔다.
느그들만 택호 있냐, 우리도 갖다 붙이면 택호다. 그런 심산으로 허는 짓들이겄지.
홈실댁은 아무래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약방에서는 쥐똥을 서분이라고 점잖을 빼서 칭한다더니만, 이제부터는 쥐나 개나 택호
달고 쥐똥댁 서분댁 허겄그만요잉.
세상에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어서 이런 괴이쩍고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
하며 수천댁은 한 마디 꽂았다.
쥐똥도 약에 쓰는가?
엉뚱한 말이라는 표정으로 율촌댁이 묻는다.
약은 무슨 약. 약방에는 왜 오만가지 약재를 늘 널어 놓잖에요? 펼쳐서. 마르라고.
바람도 쐬일 겸. 그걸 어두워진대서 걷었다 쌌다 하는 게 아니고 보니, 밤이면 쥐들이
그냥 내 세상이야 밟고 돌아다니며 똥을.
저런.
손님한테 약을 지어 줄라고 그 쥐똥 섞인 약재를 터억 끄집어 댕길 때, 손님들은 시
컴시컴헌 건재더미 암만 봐도 그게 그거겄지만 의원 눈에는 뜨일 것 아니라고요? 쥐똥이,
그렇다고 손님 보는 데서 그걸 집어낼 수도 없고. 쥐똥 치워라 헐 수도 없고, 그러면
아랫놈한테 점잖게 이른대요. 야, 거 서분 좀 저리 한쪽으로 내놔라. 그럼 손님은 그게 머
못 들어 본 약재 이름인 줄 알지 쥐똥인 줄 알 것인가요.
쥐똥은 서분이 아니라 서시라고 안해?
홈실댁이 고개를 갸윳하며 웃어 버린다. 그리고 덧붙인다.
산수유도 서시라고 허지만.
쥐는 이래저래 대접을 많이 받네그려. 군자 소리까지도 듣잖어? 양상군자.
동계댁이 말을 거들었다. 그네는 좌중에서도 가장 연장일 뿐 아니라 항렬로도 제일
높아 아랫목에 모셨는데, 손부 사리반댁은 웃목 장지문간에 앉았다. 누가 시키지 않
아도 저 알아서 앉을 자리를 알맞게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쥐가 그게 단순히 쥐 그러지만 얼마나 종류가 많다고요.
사리반댁이 시조모한테 웃는 빛을 띄우며 말했다. 택호 이야기 때문에 무거워진 방안을
조금 가볍게 해 보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쥐라면 한문으로 쥐 서짜 하난 줄만 알았더니 쉬흔 개도 넘드만요. 문.미.방.병.분.원.
침.폐.경.구.령.발.이.학.년.정.준.촉.추.격.돌.애.익.혜.리.작.종.번.복.당.박.오.양.정.로.
네가 재롱떠는구나.
방안에 낮은 웃음 소리가 번졌다.
칠언절구 오언율시 외우듯이 글자 수에 음률을 곁들이어 읊조리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아닌게 아니 라 쥐의 이름이 그렇게 많다는 것에 놀라기도 해서였다.
이보다 더 있는데요, 그 많은 글자가 모두 다 모양 성질이 다른 쥐를 가리키는 말이래요.
나는 네가 쥐 박사인 줄은 몰랐구나. 너 무엇에 쓰려고 쥐를 그리 깊이 공부했던고? 제
가 쥐띠라서, 쥐가 대관절 어떤 것인지 궁금한 마음에.
강희자전을 다 외웠나 보구나?
은백색 머릿결을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빗은 동계댁은 손부 사리반댁을 귀여워한다.
평소에는 그저 집 안팎 살림에 묵묵히 충실한 듯하지만, 사리반댁 속에는 남다르게
귀꿈스러운 면이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로 재치로 빛나 사람 맛을 색다르게 하면서,
서당도령 소리를 들을만큼 항상 책을 끼고 노는 것을 예쁘게 여기는 것이다.
그네의 궁체 글씨 고운 것도 기특하다 하였다.
얼룩쥐, 새앙쥐, 시궁쥐, 집쥐, 들쥐, 들쥐, 뒤쥐, 물쥐, 흙쥐, 흰쥐, 검은쥐, 박쥐,
족제비, 종류도 가지가 지고 행태도 가지가지라 신기해요.
이 중에 작견이란 쥐는 능히 범도 잡아먹는다는데, 자그마치 키가 석 자나 되게 큰데다
날개가 돋쳐 있답니다. 무섭지요.
또 자란 쥐는 몸통이 닭같이 생겼으면서 쥐 꼬리를 가진 형상으로, 큰 가뭄이 들 때
면 어김없이 나타 난다네요. 예언처럼. 불길.
오서란 놈은 날다람쥐라고 해야 할까. 다람쥐 비슷하게 생긴 것이 양다리 사이에 피
막이 있어 나뭇가지 사이를 휙휙 날아다니고요.
애리는 묘하게도 서로서로 앞엣놈의 꼬리를 물고 졸졸졸 나란히 한 줄로 다니는 습성을
가진 작은 쥐랍니다.
그뿐 아니예요. 이런 놈도 있어요. 뒤쥐인 방이나 두더지 겸은 제 옆구리에 악취선이
있어서 어찌나 독한 냄새를 풍기는지 고양이마저 질겁을 하고 싫어해서 안 잡는답니다.
그런데 참 특별한 쥐는 혼서라고, 다람쥔데요, 사람을 만나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뒷
발로 반듯하게 서서 두 앞발을 마주 올려 아주 공손히 읍하는 자세를 갖춘다지 않아요?
그래 예절을 안다 해서 예서라고도 하는데, 그렇게 예절이 바른 쥐라 과연 역시
사후가 달라요. 비록 호랑이는 아니지만 이것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데요, 그 쥐 가죽
으로 갖옷을 짓는다는구만요. 오서오능이란 말도 있는 마당에.
오서오능?
수천댁이 묻는다.
사리반댁은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방바닥에 한문자를 써 보인다.
날다람쥐 다섯 가지 재주라, 그런 말이지요. 오만가지 재주와 기능은 많아도, 그 중
에 쓸모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단 뜻이겠지요.
모여 앉아 있던 부인들은 아까 하던 택호 이야기를 잠시 잊고, 사리반댁이 오근조근
들려주는 쥐타령 에 놀라 입을 못 다물었다. 그네가 그처럼 아는 것 많은데도 놀랐지
만, 그 하찮고 혐기스러운 미물 쥐의 생태가 단순히 쥐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
라, 어찌 꼭 사람 사는 모양이나 성품 혹은 무리의 짓에 비유되는 것만 같아서 더욱
놀라웠던 것이다.
원, 나는 그 동안 쥐 그러면 아까운 곡식이나 축내고, 기둥을 쓸고, 기껏 시궁으로
돌아다녀 성가시고 몹쓸 것으로만 알았더니, 그 쥐의 세상도 참 무궁하고 오묘한 것이
로구만.
웃지는 않았지만 율촌댁도 말 참례를 하였다.
지극히 미천해서 취할 바 못되는 사람이나 변변치 않은 것, 혹은 탐욕스러운 소인
배, 못난 자, 간신들 을 일컬을 때 쥐 소리 꼭 들어가고, 신의 없이 약아빠진 기회주의
자 가리 킬 때 쥐새끼 같다 하지만, 이런 쥐의 수염을 뽑아 가지고는 서수필 쥐수염붓을
만들잖는가요? 고결한 선비의 문방사우에 진기한 품목으로 어엿이 끼는 것이 또 쥐수염
이라. 우습 달까, 절묘하달까. 세상의 이치가 하도 공교로이 맞물려, 높고 낮은 경계를
말하기 어려우니. 혼자서 이런저런 상상해 보며 웃지요. 아무리 미천하고 하잘것없는
흉물한테도 고귀하게 쓰이는 부분은 있는가.
그 말을 홈실댁이 되받았다.
그래도, 서구불출상아랬네. 쥐의 입에서 상아는 안난다는 게야. 쥐 엄니가 거 좀 사
나운가? 제 아무리 단단한 것도 돌덩이 쇳덩이 아닌 바에야 그 엄니에 걸리면 사정없
지. 그렇게 강해서 좋으냐 하면 아니야.
그 이빨이 암만 자라나도 나무나 갉아대고 바람벽에 구 멍이나 뚫어놓지 쥐 이빨 길어서
상아 되겠는가.
오히려 쥐는 이빨이 자라면 제 턱을 뚫고 나와 죽고 말어. 상아는커녕. 그러니 저 타
고 난 분수 본색을 제대로 잘 아는 것이 곧 제가 사는 길이야. 상아가 좋아 보인다고
남 따라 당찮은 일 흉내냈다가는 제 이빨에 제 턱 뚫리네. 그런즉 차라리 쥐는 쥐답
게 상아를 꿈꾸지 말고, 부러워도 말고, 길어 나는 이빨을 부지런히 갈고 갈아서 어떻
게든 못자라게 해야 돼. 목숨 걸고. 밤잠도 자지 말고. 잠들면 그 틈새 이빨이 길
어 나거든. 방심하고 꿈꾸는 사이에 날카로운 이빨은 독이 올라, 칼끝같이 턱을 뚫어
버린단 말이야. 그러니 꿈을 갈어 칼날을 만드는 게 아니라, 꿈을 갈어 가루를 만들어
야 살아 남어요. 쥐는.
그것이 바로 쥐의 숙명이라.
미천한 자의 꿈은 자신을 죽이나니.
상아를 꿈꾸는 쥐의 이빨.
고리배미 사람들이 택호를 붙이자고 나서는 것도 그러한 이빨 중의 하나일는지 모른다.
거멍굴 만동이와 백단이의 투장도 또한.
벌써 그게 한 삼사십 년 되었지 아마? 고리배미 엄병곤이가 아직 여나믄 살 조막만
헐 때 이야기니까.
병곤이 애비 장업이가 그 애비 엄구용이 덕분으로 재산깨나 물려받었다고 안해? 병곤이
할애비 엄구용이가 딴에는 수완도 좋고 위세도 부리고 했는가 보던데, 그 물림으로
장업이도 뭐 저희 중로들 중에서는 한 소리 허고 지내다가, 그걸로는 모자랐던가 벼
슬 욕심이 나서 공명첩을 사가지고 의관 하나 얻어 했잖어? 그런다고 양반이 되는
가. 헌데도 하루아침에 겁도 없이 정자관을 따악 쓰고는 마당으로 동네로 잔뜩 배 내
밀고 어흠 저흠 왔다갔다 허다가, 거 죽을 곡경을 치르잖었다고? 매안으로 끄집혀 와서,
참 아니할 말로 개 패듯이 뚜드러 패, 덕석말이를 호되게 당했었지. 나 시집와서 한
십년 가차이 됐을 때 일이그 만, 그게.
그 일이 바로 어제런 듯 생생하게 말하던 홈실댁은 동계댁을 바라본다.
형님도 생각나시지요잉?
서망벽이라는데.
쥐는 제가 갉은 벽을 잊어도, 벽은 그 상처가 남아 있어 길이 쥐를 잊지 못한다지 않
는가. 그래서 벽불 망서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번에는 매안이 쥐가 되고 고리배미는 벽이 되는가.
그렇게 경우 없는 짓 하다가 난장을 맞은 것이 한두 번 아니었지만, 대개는 남정네들
이 그랬지 아녀자가 설치고 나댄 적은 거의 없었는데. 참말로 이제는 세상 다 끝나가는가.
중로의 아낙들도 택호 달자고 이빨을 갈아 붙이니.
홈실댁은 탄식한다.
말하자만 작명을 하나씩 했구만?
동계댁이 홈실댁한테 아까 그렇게 말했었다.
엄가들이 그랬단 말을 듣고는, 나무장사 부칠이, 나무깨 깎는 모갑이, 방물장수 서운
이 네 할것 없이 모두 무당한테로 우루루 쫓아가서 줄나란히로 늘어앉아 택호를 지어
달랬다고 안해요? 솔밭 삼거리 주막에 비오리도 비월댁이랍니다.
비월댁?
고것은 또 제가 스스로 지었답니다. 누구한테 부탁헐것 없이 제 이름이 비월이라면
서 거기다가 댁짜 붙였다는구만요.
모르면 무슨 짓을 못해...?
동낭치는 박아지댁을 허게 생겼지요, 그러니까.
거 참.
이게 무슨 조짐인고.
방안의 부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괘씸하고 우스운 일이었으나, 그것보다 더 자욱하게
밀려드는 세태의 몰풍과 분진이 심정을 메우며 탁하게 가라앉는 탓이었다.
택호가 무엇이관대 감히 저희 민서 상것들조차 하나씩 주머니차듯 옆구리에 꿰어차고,
이 방자한 광대 짓을 한단 말인가. 나라고 못할것 무에 있느냐며, 가당치않은 정자
관을 머리에 둘러쓴 채 거드름을 부리던 장업이와 다른 바 조금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 장업이는 동저고리 바람에 대님조차 매지 못한 차림으로 혼비백산 끄집혀 와 무
참한 덕석말이를 당하였다.
엊그저께 만동이와 백단이, 춘복이가 사지 다 터지게 석덕말이 몰매를 맞았는데, 택호
사단으로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동엄 중의 한 집에서 통 크게도 택호를 율촌이라 했다는 말이 설마 사실은 아니겠지.
창씨개명을 해서 조선 천지 성명 삼자가 너나없이 새로 생긴 터수에, 이름 하나 다시
짓는 셈치고 택호 들을 지었다는데, 택호. 언제부터 이것이 쓰이기 시작했는지 그
연원을 확실히는 알 수 없으되, 성명 대신에 처가 태어나고 자란 출신지명이나, 벼슬의
명칭, 또는 호를 붙여 부르는 이름이 택호였다.
전통적인 반가의 성원들은 반듯한 성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상에 서로 통용할 때
성명 대신 택호를 즐겨 쓰고 불렀다. 이는 남자에 대한 성명 호칭을 삼가고 피하려는
데 우선 까닭이 있겠지만, 그보다도 남귀여가로, 남자가 장가가서 오랫동안 처가살이를
하던 혼인 풍속에 더 깊은 연유가 있지 않을까. 여자가 시집 가서 시집에 사는 것을
여귀남가라 하니, 남자나 여자나 그 몸을 가지고 가서 담고 있는 곳에 자신은 귀속된
다는 것을 귀자로 밝힌 것이 다. 그래서 여가 속한 남자는 당연히 귀속 호칭으로 여자의
마을 이름을 썼으리라.
그리하여 이제는 그 풍속이 사라진 오늘날에까지도, 습관은 연면히 내려와 체화되었을
것인데 대개 택호로는, 그 집 주부가 혼인하기 전에 살던 친정 동네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것 도 무슨 도나 군 같은 큰 행정단위보다 훨씬 구거인 자연촌락 이름 그대로.
말하자면 율촌댁의 경우, 율촌에서 시집을 왔으므로 그 말을 이름을 붙여 그네는 율
촌댁이 되었으며, 촌수 따라 율촌 형님 율촌 동서 율촌 질부 율촌 아짐 등으로 불리었다.
부리는 아랫사람들은 율촌새아씨라 하였다. 자연히 이기채 역시 그날부터 율촌댁과 더불
어 율촌 형님 율촌 동생 율촌 조카 율촌 아재가 되었고, 노복들은 율촌샌님, 율촌서방
님이라 칭하였다. 또 바깥에서는 율촌어른, 율촌양반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벼슬을 한 경우, 그 관직명이 택호로 사용되었으니,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였
다면 진사댁, 생원이었으면 생원댁, 혹은 판관댁, 감찰댁, 부사댁, 교리댁, 정승댁이
라고 통칭했다.
아니면 어질고 덕망이 높으며 학식이 풍부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현조 달서로 널
리 세상에 이름이 난 조상의 시호를 택호로 불러 문정공댁, 충양공댁이라 하였다.
시호나 관직명의 택호는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지체를 높여 주는 호칭인지라 천
하에 알려, 그 당대뿐 아니라 자손들이 대대로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택호는 성명 대신 평생토록 썼으며, 부부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 칭
호 이기도 하여 그 집의 이름 가명이 되었다. 즉 동녘골댁 큰아들. 수천댁 손자. 너부
실댁 작은며느리처럼,
그런데 그 집안의 둘째아들 이하는 혼인하여 분가하면 바로 자신의 택호를 가명으
로 할 수 있으나, 장자와 장손은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아서 동거하고 있는 한, 따
로 자신의 택호는 있으되 그저 단지 성명 대신 부르는 호칭에 그칠 뿐, 가명으로 쓸
수는 없었다.
부조 생전에는 호주의 택호가 그 집안을 대표하는 가명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택호가 혼인에 통혼의 격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이른
바 한 지방의 유명 사족인 망족으로서, 군과 도의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 범위에까지
넘나드는 양반의 혼인에, 가격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택호였다.
동네 이름이 그대로 박힌 이 택호만 들으면, 처의 성씨와 가문은 물론이고, 그 마을
에 최초로 입거한 조상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닥가닥 갈피갈피 내려온 문중
의 내력이며 품격과 사회적인 지위나 위치가 소상히 밝혀지기 때문이다.
세거 가문으로서 대대로 이름있는 명문들과 이중 삼중 혼인관계를 맺어 과갈(오이
와 칡)로 얽히고 또 얽힌 양반들은, 택호 하나로 모든 것을 손금 보듯 짐작할 수 있
었던 것이다.
단순한 지명으로 마을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무 마을 아무 골에 사는 누구
시라면, 양반인지, 상민인지, 혹은 양반이라도 조상이 빛나서 인근에 울리는 명성이
있는지, 아니면 근본이 분명치 않은 경우 양반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어서, 택
호는 성씨의 관향과 마찬가지로 신분을 드러내는 손금 같은 것이었다.
이에 나무랄 데 없이 내로라 하는 집안과 혼인하여 그 택호를 사용하는 것은, 안으로나
밖으로나 우리는 이만한 지체의 집안과 혼인할 만한 동제간으로서, 기꺼이 서로 자식
을 바꾸어 통혼하는 가문이다 하는 것을 다지고 시위하여 떨치려는 속뜻도 있었다.
그러니, 택호는 향촌 사회의 신분 증명서 도장이었다.
앙혼을 즐거워하고 낙혼을 꺼리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그토록 확연히 드러나는 택
호를 꿈에라도 거짓으로 차용해 볼까 하는 경우 없지 않겠지만, 그것만은 부모를 바꾸
는 것과 같아서 안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택호를 언감생심 민서 상민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당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
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 제 이름 그대로 꾀벗은 채 스거나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
면 그 아이의 이름을 앞에 붙여 옹구네라든가 아니면 꽃니어미. 곤지아비라고 부르고,
손자가 있을 때는 서운이 할미라 불렀다.
혹 자식도 없이 신분은 미천하고 성씨 또한 없을 때는 아무리 늙어도 그냥 제 남정
의 날이름에다 네짜 하나 붙여서 불렀다.
그런데 지금 고리배미 아낙들이 그것을 마다하고 생으로 작명을 하여 소위 어거지 택
호를 쓰기 시작하였다니, 이런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작태가 어찌 매안의 부인들
에게 괴이히 비치지 않겠는가.
이게 그냥 넘어가질 일인지 나는 모르겄네.
홈실댁이 의심쩍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사랑에서는 아시는가?
동계댁이 율촌댁한테 묻는다.
율촌댁은 대답 대신 무거운 눈길을 사랑채 쪽으로 돌린다. 그 눈길은 햇살이 기우는
장지문에 걸려 더 넘어가지 못한다.
이기채는 아까부터 골똘히 어떤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아직 살구만한 소년이었을 때. 그러니까 고리배미 장업이가 턱없는 정자관을
뒤집어쓴 죄로 붙잡혀와 매맞던 무렵엔가 들은 이야기였다.
어찌 그 이야기가 이렇게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어느 갈피에 남아 있다가, 오늘 문
득 새삼스럽게 떠오른 것인지. 그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되렌님, 지가 재미난 옛날이얘기 한 자리 해 디리끼요? 안서방은 사랑채 누루마에 앉
아 있던 이기채한테 그렇게 말했다.
때는 겨울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혹은 봄이었는지.
다만 해질녘이어서 노적봉으로 기웃하니 넘어가는 해가 길고 붉은 너울마냥 석양을
드리워, 안서방 얼굴이 물든 것처럼 보이던 것이 떠올랐다. 얼굴만이 아니라 무명저
고리와 바지 올올에도 낙조의 붉은 먼지가 스며드는 것만 같이 보였었는데, 안서방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어린 눈에 저녁 햇볕 을 물고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기억이, 희미하나마 절실하게, 배어나듯 떠오른다.
그 햇볕에 주름이 진다. 이기채는 가슴을 조인다. 아프다. 그래. 안서방도 그때는 젊
었지. 그와 함께 나눈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까지는 이렇게 실감하지 못햇었는데.
반상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승의 한 고비 해 저무는 어느 날 석양에 누마루 난간을 짚
은 그는 붉은 햇볕 머금은 몸으로 웃고, 나는 그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
것이, 왜 몇 십 년 지난 이 훗날, 비로소 살아나며 가슴이 저리는 것일까.
이 얘기는 뛰얘기?
이기채가 말을 미리 짚자.
뛰얘기는 이 얘기.
하며 안서방이 이기채를 불끈 들어 등에 업더니, 토방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고는 다
시 누마루에 내려 놓았다.
꼬숩지요?
응.
한양 보겼어요?
아니.
그러먼 한 번 더 태워 디리끼요?
그러더니 그는 이기채를 휘익 들어올려 제 어깨 위에 얹으며 무동을 태워 주었다. 십
여 세라고는 하지만 체수가 본디 작고 실하지 못했던 이기채였고, 충직하면서도 힘
이 좋은 안서방은 이기채라면 갓난아이 때부터 어르고 널아 준 하인이라, 나이는 좀
먹었지만 무동 태우는 것쯤은 가벼운 일이었다.
한양 뵈여요?
아니.
안서방은 꼰지발을 디뎠다.
뵈여요?
아니.
이래도요?
짚신 발가락 끝으로 곤두서며 토방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겅중겅중 오고가는 안서방의
어깨 위에서 바라본 한양은 서산 노적봉이었다. 노적봉에 걸려 이제 막 떨어지려는 저
녁해였다. 그리고 그 해가 물들이 는 매안의 붉은 하늘과, 해를 등진 하늘이 붉어서 더
욱 시꺼멓게 미리 질려 벌써 어둠을 들이삼키던 노적 봉 가슴팍이었다.
그토록 선연하게 타오르며 온 매안을 적시던 석양의 붉은 빛과 어둡고 검은 노적봉의
대비.
옛날에 옛날에요, 어뜬 나무꾼이 하나 있었등게빈디요.
말수 적은 안서방이 그날따라 재미나게 들려 준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묘한 것이었다.
가난허디 가난헌 이 나무군이 나무를 허로 인자 지게를 지고 산으로 들으갔대요. 젊
은 총객잉가 장개 간 장정잉가는 모르겄당만요. 그 소리는 없잉게로. 하이간에 지게
뿔다구에 다가 도시락을 짬매서 걸어 놓 고 땀이 나게 얼매나아 얼매나 정신없이 낭구
를 허다 봉게 로 배가 고푸드래요. 점심 때가 된거이지요.
아앗따아, 다 먹고 살자고 허는 짓인디 조 께 쉬여 감서 밥이나 먹고 해야겄다, 허고는
인자 도시락을 풀었네요. 깡보리밥이지만 그게 어뜨케나 달고 맛나게 뵈이능가 기양
목젖이 떨어질라고 그러는디, 아, 한 숟구락 막 뜰라는 판에, 멋 헐라고, 지 앞에 풀
섶을 봤등게비여요.
어매, 너 누구냐?
나무꾼이 저도 모르게 그만 한 소리를 했답니다.
거그 시퍼렇게 크댄헌 깨구락지 한 마리가 턱을 딱 괴고는 요러어케 나무꾼을 체다보
고 있었등 거이여 요. 똑 사람 보디끼. 떼룩떼룩헌 눈구녁이 툭 튀어나와 갖꼬는 마치
꼭 무신 생각 있는 사람 낯바닥맹이 로 간절허게.
나 깨구락지다.
아, 이런. 이런 변이 있능기요? 그거이 말을 허드란 말이여.
머?
잘못 들었능가 싶어서 이 나무꾼이 다시 한번 그것한테 말을 시켜 봤대요. 아무러먼
세상에 깨구락지가 말을 허겄능기요잉?
너 밥 좀 먹을래?
장난 삼아 밥 한 숟구락을 푹 퍼 갖꼬 그놈한테 어쩌능가 볼라고 주는 시늉을 했당
만요. 머 설마 허니 깨구락지가 사람 말 알어듣고, 밥을 받어 먹겄능가. 나 대그빡에
털 나고 그런 소리 못 들어 봤다 험서.
나 밥 좀 먹을래.
이? 이런 수가 있당가요, 긍게.
허, 내 참. 기가 맥헤서. 야가 참말로 내 말에 대답을 헝거이냐아, 어디 메아리가
돌아온 거이냐. 싶드 랑만요. 그래서 아조 이번에는 그것 주뎅이에다 밥을 바짝 딜이밀
었겄지요.
아, 그랬더니 기양 낼름 받어 먹네요. 아가리 짝 벌리고.
힉. 너무나 놀라서 공중에 숟구락을 든채로 깨구락지를 노려봤그만요. 그렁게로요
잉, 이놈이 오물오물 그걸 깨물어 먹어요, 밥을. 짭짭 소리끄장 내감서. 눈구녁을
디룩대룩 험서나요. 괴악 괴악, 고럴 때는 또 깨구락지 소리로 트림도 허고.
야 좀 바.
맛 있냐?
맛 있다.
그래서 또 한 숟구락을 줬어요.
그놈은 낼름 받어 먹었지요.
싱겁냐?
싱겁다.
오오, 밥만 주고 반찬을 안 줬잉게 싱겁겄지. 아나, 건건이.
짜냐?
짜다.
건건이 먹었잉게로 자, 또 밥 한 숟구락 먹어야지? 아나, 밥.
싱겁냐?
싱겁다.
하, 거 참. 암만 생각해도 모르겄네. 이게 무신 조화속이라냐.
나무꾼은 밥 한술 떠 주고 반찬 한 번 집어 주고, 반찬 한 번 집어 주고 밥 한 술 떠
주고, 험서나 깨구락지허고 마주앉어, 싱겁냐, 싱겁다, 짜냐, 짜다,를 끝도 없이 했드
랍니다. 그랬더니만 어느새 도시락이 바닥이 나부렀네요잉. 어매애. 어느새 꼴딱 해가
넘어 갈라고 허고요.
인자 없다.
도시락 밑구녁을 숟구락으로 딱 딱 뚜디려 뵈이는 순간, 나무꾼은 왈칵 무선 생객이
들었어요. 소름이 기양 쫙 끼치게요.
아니 내가 시방 멋 허고 앉어서 무신 짓을 허고 있었다냐? 이게 어찌 예삿일이여? 내
가 구신한테 홀렸이까?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되야 부렀제? 세상에는 없는 일로 듣도
보도 못 헌 짓을 내가 허고 있었이니.
아이코. 안되겄다. 얼릉 달아나야제. 저거이 시방 머인지를 알고, 내가 시방 나무도 안
허고, 밥도 못 먹고, 이러고 있다냐아.
그런디, 겁이 나서 빈 도시락을 허겁지겁 다시 짬매는 나무꾼을 이 깨구락지는 빠안
히 뚫어져라 체다 보고 있는 거이여요.
눈구녁 깜박도 안허고.
걸음아, 날 살려라. 귀 떨어지먼 내일 모레 와 줏어 가지.
허고는 혼비백산 머리터럭이 불불불 날어가게, 지게작대기끄장 다 내분 채로 도망을
갔드래요. 이 나무꾼이. 그런디 아 요런 요망헌 일이 있능가. 그 노무 깨구락지가 나
무꾼 발뒤꽁치를 물어뜯을라고 뎀베듬 서 쫓아오능거 아닝기요, 긍게.
싱겁냐?
싱겁다.
짜냐?
짜다.
저 혼자 그렇게 공기 받디끼 방정맞게 아까 헌 말을 숭내냄서나요.
아이코오, 무서라. 내가 오늘 죽을랑게비다.
진땀이 나게 달아나지만 깨구락지를 못 이겨서, 막 그 뒤꽁치를 콱 물릴라고 허는 찰
나, 하 이게 웬일이냐, 천우신조로 하늘이 도와서 저만침 웬 삼거리 동네 지와 상가집
에 초상난 거이 뵈이드래요. 막 채 일을 쳐놓고 사람들이 벅적벅적 들락날락, 한쪽에서
는 통곡을 허고요잉.
앗따, 되얐다.
나무꾼은 번개맹이로 꾀를 한나 냈지요. 그래 뛰어감서 뒤돌아보고 깨구락지한테 말을
걸었당만요.
배 고프냐?
배 고프다.
괴기 먹을래?
괴기 먹을래.
나 따러와라.
너 따러간다.
그러고는 이 나무꾼은 그 초상집으로 쑥 들어가 부렀대요.
먹을 것 많고 복잡헌 집이라 깨구락지가 그만 이것저것 줏어 먹던 총중에 나무꾼을
놓쳐 부렀그만이요. 나무꾼은 그 틈에 삼십육계 줄행랑, 지게고 머이고 짚신짝이고 다
법서 내불고는, 아이고오. 어머이이, 나죽소오, 달아났드래요.
그래서 살었어?
살었지요.
다 했어?
아니요.
그러면 어떻게 됐는데? 잘 먹고 잘 살앗대?
그래 갖꼬요잉, 한 십 년이나아 세월이 흘러갔드랑만요.
어뜨케나 그때 놀랬는지, 다시는 그 짝으로 나무 허로 갈 생각은 안하고 염도 안 먹
었 는디, 하루 지나 이틀 지나 사흘이 지내고, 또 일 년 가 이 년 삼 년이 지내고 봉게
로 슬 뭇이 궁금헌 생객이 들드래요. 그래도 놀랜 가심이 안직은 진정이 안되야서 가 보
든 안했는디, 딱 십 년이나 지내고 봉게로 엥간히 안심이 되드래요.
십 년이먼 강산도 변헌다는디, 그때 그 산속은 어뜨케 변했으며, 그때 그 깨구락지
띠여 불고 온 초상집은 어뜨케 되얐으며, 그 깨구락지는 또 어뜨케 되얐는지, 후일담
이라도 한번 듣고 보고 자와서 지게를 메고 인자 그 경풍을 했던 산 쪽으로 길을 잡었
드래요. 호기심도 있었겄지요.
초상집 쥔을 만나 이얘기나 조께 들어 볼라고 옛날 기억을 더듬어서 그 삼거리 초상
집 언저리에 머뭇머뭇, 암만 해도 여그가 거근디이 왜 아무 집도 안 뵈이까아, 그때
는 깨나 번다헌 동네가 여그 있고 그 초상집은 그 중에서도 썩 갠찮게 사능 것맹이로
뵈이든디. 내가 잘못 왕능가?
그럴 리가 없을거인디 요상허네. 똑 여그 요만큼이 맞는디.
나무군이 지게를 내려서 받쳐 놓고 요리조리 휘둘러 봄서 고개를 찌웃 짜웃 옛날 일
을 더듬어 보는디, 저만치 질가에 웬 오두막 하나가 팍삭 다 씨그러지게 낡어 갖꼬
는, 가까스로 지탱을 허고 있능 거이 눈에 띄어요.
았따, 되얐다. 저 집이 가서 한번 물어 보자.
싶어서 이 나무꾼이 살망살망 다가가 봉게로 몬지가 케케이 찐 오두막 툇마루에 하얀
할마이가 하나 꼬 부라지게 납짝 앉어 갖꼬는 머리는 싸악 싹 빗고 있드래요. 이 사램
이 그 할마이를 보고는 어찌나 반가운지 얼릉 절을 몬야 했당만요. 요렇게나 나이
자신 할마잉게 옛날 일도 잘 알겄지. 제우 십 년 이짝 저 작 일을 모를라디야.
할마이, 할마이
누구여?
지내가는 나무꾼인디요, 여그서 사신지 오래되얐능교?
오래되얐지.
한 십 년도 더 넘으겼능교?
한 십 년 더 넘었지.
그러먼 여그 삼거리 동네가 맞지라우? 전에 한번 와 봤는디 그때는 집들도 많고 시끌
벅적허등만, 내가 잘못 찾어왔능가 허고요.
삼거리 동네 맞어.
그렇지요? 내가 맞게 왔구나. 그런디요. 여그 한 십 년 전에 초상난 집이 있었는디,
지와집에 식솔도 벌 쭉하고 살 만치 사능 것맹이든디. 그 집이 어뜨케 되얐는지 혹시 몰
르싱가요?
망했어.
망해요? 왜요?
하얀 할마이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안허고 머리만 싸악 싹 빗고 있었대요. 말을 않
고 입을 그렇게 깍 다물어 부링게 머쓱해진 나무꾼이 무류히 있다가, 또 물었지요.
사실은 젤로 궁금헝 거이 그 깨구락지 이얘깅게요.
혹시 저, 그 초상집이 초상 났을 때, 무신, 멀허는 깨구락지 한 마리 들으왓었단 말
들은 일 없으싱기요?
들은 일 있지.
본 일도 있고요.
본 일도 있지.
예에? 하이고오, 그러겨요오? 어뜨케 들으겼능가요? 나무꾼이 반색을 험서 할마이한테
딱 달라붙어서 물었겄지요.
너는 어뜨케 들었간디?
하얀 할마이가 되물었어요.
나무꾼은 그만 자기랑 같은 경험을 가진 할마이 만난 거이 하도 신기허고 반가워서,
그 옛날 십 년 전 산속에서 깨구락지 만난 이얘기부텀 싱겁냐 싱겁다 허던 것, 그러
고 왈칵 무서운 생객이 들어서, 다리야 날 살려라, 도망치던 것, 그러고 끝내 꾀를 내
서 이 깨구락지를 그 초상집에다 띠여 불고 달아난 이얘기 들을, 어저게 바로 지은 것
맹이로 소상히 조랑조랑 했그만요.
나, 그, 암만 생각해도 고거이 무신 요물이지 싶등만. 할마이는 그것 만나서 어쩠소잉?
허는디.
휙.
할마이가 몸을 일으킴서 팔짝 뛰더니
요렇게 잡아먹었다.
허드니만 나무꾼 목덜미를 기양 여지없이 칵, 물어뜯어 부렀대요.
꽈악.
여기서 안서방은 두 팔을 활짝 벌려 이기채를 덮을 듯이 치켜들었다.
요놈. 내가 바로 그 요물이다. 내가 바로 그 깨구락지여. 내가 그날 너를 놓치고는
어뜨케나 분허든지 그 초상집 식구들을 다 잡어먹고, 온 동네 사람 다 잡아먹고, 이
날 이때 끄장 여그 앉어서 너 오기만 지달 렀다. 요놈. 너 잘 왔다. 내가 너 잡아먹기 전
에는 절대로 안 죽을라고 이빨을 갈었는디 인자 내가 소원이 이뤄졌다.
아 기양 순식간에 이 나무꾼 모가지에서 피가 콸콸콸 쏟아징마요잉. 이런 청천에 날베
락이 어디 또 있겄어요?
나무꾼은 인자 깔딱깔딱 숨이 다 넘어가 부렀지요.
아니, 할마이. 기왕에 죽능거 알고 죽읍시다. 내가 할마이한테 무신 요렇게 죽을
죄를 졌소? 나는 그때 할마이한테 머 못헐 짓 헝것도 없고, 했다먼 밥 주고 반찬
준 죄, 싱거웅가 짱가 말 물어 보고 말시킨 죄베끼는 없는디요.
그거이 죄다, 이놈아.
그렁게로 그 나무군은 그것 첨 만난 그 옛날로부텀, 십 년이나 도망 댕기다가 결국
지 발로 다시 찾어 와 죽은 거이지요.
쫓아가서 베락을 맞은 거이여요.
한 번 물어 보고 말 것을 왜 물어 봤냐. 한 번 주고 말 밥을 왜 떠 주었냐. 한 번 놀고
도망갈 껄 왜 동무해 주었냐아.
할마이는 나무꾼을 물어뜯고 물어뜯음서 그렇게 소리 소리쳐 울었더래요. 그 울음 소
리가 시방도 딛긴 당만요. 거그 가먼.
꽤악, 꽤애악, 꽤악.
안서방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날 저녁 이기채가 어머니 청암부인에게 그 이야기를 다시 들려 드렸을 때, 부인은 아
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더니
그래서 인간이 어리석다는 것이다.
라고 무겁게 말했다.
사물은 제 각각 제 모습이 있고, 할 일이 있고, 제 몫이 있는 것이다. 사람 아닌 것
하고 사람 말을 해 보려 한 것이 첫째 어리석고, 이 나무꾼이 저 살아갈 궁리요, 방편
인 제 나무조차 안하면서 개고리 동무를 해 준 것이 둘째 어리석고, 저 먹으란 제 밥
을 저는 하나도 안 먹고 개고리한테 바닥까지 다 낸 준 것이 셋째 어리석다. 그것이
산에 가서 드리는 고수레라 해도 지나치고 가여운 미물에 대한 동정심이라 해도 그
렇게까지 하는 것은 과한 것이니라. 내 것이 실한 연후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밥을 주었으면 그냥 주 었지, 싱겁냐, 짜냐, 일일이 간 맞추고 비위 맞추어 물어 보
고, 그 미물의 뜻을 들어주고, 한 것이 넷째 어리석음이다. 다만 헤아릴 뿐 묻지는
말아야 한다. 베풀고 냉정해야 사람들은 어려워해. 평생토록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섣부르게 베푸는 시늉하는 것은 오히려 무서운 원심의 근원이 되기 쉬운 즉,
이런 어리석음은 결코 저질러서는 안된 다. 다섯째 어리석음은 제 잘못으로 인하여 남
의 집을 망치고, 남을 죽이고, 남의 온 동 네까지 쑥밭으로 망친 일이다. 헌데, 이 나
무꾼의 제일 큰 어리석음은 무엇인 줄 아느냐? 한 번 벗어난 아가리에서 끝내 벗어나
지 못하고, 그 끈에 매달려 다시금 그 처음 아가리로 대 가리를 밀고 들어간 일이니라.
너는 이제 훗날 자라서 이 가문의 맨 윗사람이 될 터이니, 늘 자신을 남과 다르게 생
각하고, 작은 일에 서 큰 것을 배우도록 하여라.
청암부인의 음성이 귀에 쟁쟁히 들린다. 오늘 이런 옛날이야기가 이토록 선명하게 다시
들리는 것은 어 쩌면 아까 강호가 올라와서 한 말에 받은 충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호는 말했었다.
속량을 하십시요. 집안 노복 종들을 모두 면천을 시켜 주세요. 더 늦기 전에 지금 풀
어 주시지요. 세상은 이미 옛날의 세상이 아닙니다.
23. 시궁이 비취로
서방님.
주춤거리면서도 항급히 부르는 사내의 갈라진 목소리가 등뒤에 들려 강호는 걸음을 늦
추었다.
(누군가?)
거멍굴 근심바우 우묵한 가슴패기가 어둠 속에서 더욱 깊은 근심을 쓸어안으며 시꺼멓
게 뭉개지는 어귀로, 투박한 발자국이 다가왔다.
지놈인디요.
쑥덤불 흐트러진 다발머리가 우부륙히 솟아오른 그는 택주였다.
오오, 어찌?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겅중하게 검은 그의 어깨와 체수로 택주를 알아본
강호가 돌아서며 물었다.
아까 춘복이의 농막에서 나오는 길로 만동이와 백단이네 당골집에 들렀던 강호는, 사람
의 형상이라고 하기 어려운 가시버시 두 삭신을 귀신들처럼 지키고 앉아서 돌보던 택주와
금생이를 만났었는데.
어미 아비 발치에 꼬부리고 접힌 채 잠이 든 귀남이를 한쪽으로 밀어 눕히며 황급히 일
어선 백정 택주와 대장장이 금생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도 못 다물어 어서 오시라.
는 말은 물론이요. 앉으시라는 말조차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강호가 춘복이한테 그리했듯이, 품안에 넣어 가지고 간 돈을 꺼내어 만동이의
뭉크러진 손아귀에 쥐어 주고 나올 때까지, 그들은 단 한 마디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거멍굴 어귀를 막 벗어나려는 강호의 등뒤에서, 택주가 놓치면 안될 사
람 부르는 소리로 따라온 것이다.
참말로 에러운 걸음을 허겼는디요, 암껏도 디릴 거이 없어서 기양 입맛도 못 다시고 가
싱게로.
택주는 걱실걱실한 체구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내가 무엇 먹으러 갔는가.
강호의 음성은 낮고도 온량하였다.
어느 댁으 어느 서방님이시라고, 즈그 같은 것들이 언감생심 뫼세 볼 수가 있었으까요
마는, 지경이 시방 이 난리라, 어따 무슨 절차를 챙게 볼 수가 없어서.
걱정 말소.
아이고, 서방님, 말소라니요.
택주는 두 손으로 부둥켜 안고 있던 것을 더욱 오그려 안으며, 당치 않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알었으니 들어가.
아니요, 그게 아니고라요잉. 이것 조께.
웃으며 돌아서려는 강호에게 택주는 급한 몸짓으로 불쑥, 품고 있던 뭉치를 내밀었다.
벨것은 아니지만... 즈그들이 머 가진 거이 있어야지요, 암만 뒤져 봐도 기껏 소 잡는
도치나 뼉다구 발르는 칼이나 잽히제, 서방님 디릴만헝 거이 없어 놔서.. 기양 가시게 허
능 것도 인사가 아니고요... 만동이 보로 오싱 거이 곧 즈그 보로 오싱 거인디..., 서방
님, 지가 텍이 덜덜덜 떨려서 무신 말씸이 잘 안 나오네요... 지 속은요, 기양 딴거이 아
니고, 시방, 지가 갖꼬 있능 것 중에, 기중 지일 낫은 거, 요거 하나 있길래 들고 나왔그
만요. 우습지마는.
이런 사람이 소는 어떻게 잡았을까.
강호는 물끄러미, 더듬거리는 택주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본성인 인, 의, 예, 지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를 두고, 측은지심은 인지단이요,
수오지심은 의지단이며, 사양지심은 예지단이고, 시비지심은 지지단이라 하였는데.
강호는 택주에서 측은지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데?
엉겁결에 받아 안은 뭉치를 들고 강호가 물엇다.
나무로 깎은 벵인디요잉.
병?
예. 저어그 고리배미 나무깨 깎는 모갭이가요, 아조 귀헌 거이라고 험서나, 지가 몇
년씩 공딜여서 맨든 거이라고 저번에 갖꼬 왔었그만요. 달리 그러잖에, 모갭이가 저한테
제사 멩질날 당해서는 괴기를 조께 갖다 쓰고는, 빚이라고 차일피일 갚들 못헝게로 미안
헌 마음이 들었등가, 빚 대신 요 병으로 준 거이지요.
헌데, 왜 나를 주는가?
고매허신 양반으 서방님이, 없는 것 없이 다 갖추고 사실 거인디, 백정것 살림살이에
참말로 오늘 같은 날 디릴 것 없는 것도 서러와서, 요런 거이라먼 귀물이 좀 될랑가도 싶
고요잉. 빈 손으로 가시게 헐 수가 있었야지요. 여기까지 외겼는디.
위문이 폐문이 되겠네그려.
원, 벨 말씀을 다 허싱마요.
그러더니 택주는 나직이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덧붙였다.
요것도 사실은, 디릴 만헝 거인지 어쩡 거인지 모르겄그만요.
사실은 이거이 시궁창 속으서 석 삼 년을 썩고 썩은 나무로 깎은 거이라고 허든디. 술
병을 헐 거잉가, 꽃병을 헐 거잉가아, 잘 몰라서 기양 시렁 욱에다 얹어 놓고 체다만 봤
당게요. 안 쓰고. 그런디 아조 귀허기는 귀헌 거이랑만요.
당골네가 보고는, 아이고, 굿허는디 꽃병 허먼 참 좋겄네에, 허든디. 헤기는. 그래도
어따 쓸 거인지 모르겄등만요. 실지가 즈그들이사 머 꽃벵이 있으먼 멋 허고 술벵이 있으
먼 멋 헐 거잉교오. 선지 묻은 쇠가죽으로 덕지덕지 도배를 허는디, 꽃가지 꽂아 놓고 매
화타령을 허겄능기요, 두루미 술벵에 권주가 맞추겄능기요.
꼭 어디다 써야만 허는가? 좋은 것이면 그저 두고 보기만 해도 좋지. 두고 보는 것도
잘 쓰는 것이야.
그러먼 참말로 좋겄는디요. 서방님이 저트다 두고 보시먼.
하여, 가지고 온 나무 화병을 앞에 놓고 강호는 아까부터 내내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나무라 하던가?
그건 저도 모르겄는디요.
이름없는 나무로 깎은 이 화병은 강호의 마음에 조용히 놓인다.
모양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그 무슨 무지개 고운 칠 알록달록 입히지도 않아, 제
몸의 나무색과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 이 화병은, 조선 백자 목이 긴 술병을 닮았다.
넉넉하게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둥두렷 동그람한 몸통은, 다시 보면 마치 풍요롭고도 수
줍은 여인의 치마폭인 양 봉긋이 부풀어, 탐스러운 꽃송이 저절로 벙글려 하는 모습 같은데.
이 충만을 못 이긴 은밀함이 저토록 맑은 대로 솟구친 것인가.
화병의 모가지는 가늘고 길어서 간절해 보인다.
이 목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어깨로 흘러내리는 저 곡선의 고적하면서도 가득 차서 그윽
한 맵시라니.
아무리 보아도 이 화병은 여인이다.
그 둥글고 어진 몸에는, 속 깊은 곳으로부터 은은히 배어나 비치는 온갖 무늬가 탈속의
동양화마냥 어리어 있다.
그 무늬는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한 폭의 몽유도원도라고나 할까.
이승의 산수 어디에도 저런 풍경은 없을 것만 같다.
속된 세상 잡다하고 더러운 뒤얽힘이나 티끌이라고는 단 한 점도 섞이지 않은 듯한 초
연이, 구름과 안개, 아스라한 천인단애, 기암괴석을 에워 감으며 이루는 무늬는,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다.
나무의 살 속 갈피마다 머금고 있던 나뭇결이 화병 깎이는 대로 드러나 저절로 아롱진
그림인 것이다.
저것은 곧 아랫단 웅숭 깊은 지하로부터 결결이 층을 이룬 채운인가, 휘황하게 타오르
는 불꽃 무리 소용돌이 한바탕 윤무인가, 아니면 참다 못한 파도와회오리가 물마루 꼭
대기 아찔히도 솟구치다 모란꽃 너훌너훌 꽃으로 화했는가, 숭어리 심지 박힌 옆구리에는
그 모든 바람을 감싸 재운 물결이 잔잔하다.
그뿐인가.
누군가는 바위를 운근이라 일컬어 구름의 뿌리라 하였지만, 그것이 참인 줄을 이제서야
알겠으니. 저 땅 밑에 스치듯 뿌리 둔 바위의 거대한 기둥 솟구침이 절묘 아득하게 일으
킨 몸은, 아득히 욕계 삼천 다 넘어간 도솔천의 구름 너머에 머리를 두르고 있지 않은가.
구름이 몸을 이루면 바위가 되고, 바위가 몸을 풀면 구름이 된다.
일월중 드높아 까마득한 신비를 홀로 나투고 있는 화병의 모가지는, 이미 아무도 범접
할 수 없도록 경건하고 오묘하였다.
그러나, 놀라워라.
이처럼 유현 황홀하고도 매혹적인 몸매와, 마음을 사로잡는 무늬는, 천만 뜻밖에도 시
궁창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 하지 않는가.
청천 하늘 아래 햇빛 먹고 비 마시며 순결하게 자라던 생나무 둥치 아름드리가,어느 하
루, 나무 깎는 장인의 도끼날에 그만 토막토막 잘리어서 흩어지며 시궁창에 처박힐 때.
누구라서 그 나무라면 참혹다 아니하랴.
한 해도 아니고, 두 해도 아니고, 석삼년 캄캄한 세월 동안을, 나무 토막들은 부글부글
괴어 끓는 도랑창 더러운 복판에서, 남모르게 홀로 삭고 썩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윽고 날이 차서 건져내면, 열에 아홉은 형체마저 찾지 못하게 참말로 썩어
버리지만, 그 중에 천행으로 겨우 한 개 건져낸 토막은, 다행히도 살아 있어 소중하게 보
듬아 올린다.
이제 이 나무는 종이같이 가벼우며, 돌보다 단단하고, 불속에 구원 낸 것처럼 변함없는
성질로, 천 년이 가도 만 년이 가도, 다시는 썩지 않을 몸을 이루어낸 것이다.
새로운 재질로 태어난 것이다.
썩어서 썩지 않는 그대.
죄도 없는 몸뚱이를 시궁창에 잠그고 썩으며, 삭으며, 부스러지고, 갈라지면서, 또 아
물며, 무섭게 뒤틀리다 몸 속에 품고 있던 응어린 진액을 마지막까지 다 토하고 토해 내
면서, 기왕의 존재를 버리고 새로이 태어난, 가벼운 생명.
그것이 곧 화병에 어리는 저 무늬요, 나무의 지문이며, 한세상을 다 썩도록 견디어 이
겨낸 자의 아름답고 찬연한 낙관이 되었으니.
이제 이 화병은 서럽니 않으리라.
하찮은 나무토막 하나가 빚어 내는 세상이 이러할진대, 우주의 대지라 하는 여성, 만자
손의 어머니인 모성을 한 몸에 지닌, 여인의 근원적인 힘이야 일러 무엇 하리오.
결코 순탄치 않은 시대와 역사, 진부한 인습, 억울한 관념의 편벽이 그대들을 상하게
할지라도, 오히려 저마다 제 몸으로 깎은 화병 하나, 삶의 중심에서 빚어 낸다면, 그 몸
에 어리는 무늬들은 이 세상에 새로운 풍경을 이루어 드리울 것이니.
이제 사리반댁을 두고 다시 홀연 떠나가야 할 자신이 돌아보아져, 강호는 온기 도는 화
병을 어루만지며 묵묵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더러운 시궁창 한복판에서 괴어 끓고 울부짖는 거멍굴 하천들을, 이 화
병 속에서 그는 보고 있었다.
그도 다만 삼라만상 뭇생명 가운데 죄 없는 한 몫으로 태어났으나, 그 무슨 양반, 상놈
제도의 도끼날에 토막토막 날토막 쳐지면서, 실지렁이 뭉쳐 있고 온갖 하수 잡동사니 똥
오줌 내버리는 시궁창, 고이고 고이건만 나갈 곳은 어디에도 바이 없는 곳, 썩어서 푸르
딩딩 질척질척한 도랑물에 던져진 채, 한평생 썩어가다 대를 물리는 사람들, 천예.
그 중에 대부분은 그대로 썩어서 없어져 버린다.
하지만 이 나무 화병을 깎아 내는 나무토막처럼, 요행히도 열에 하나는 이렇게 제 살
다 떨어져 나가게 썩으면서도 골격이 남아, 화병이나 그릇으로 다시 깎이어 쓰이는 것이
다.
살아나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 남은 이 나무토막의 세상도 세상일 것이냐.
시궁창에서 견디는 그 세월 동안, 제 가슴이 썩어서 저절로 쪼개지며 벌어지는 아픔을
못 견디다가 스스로 지치게 겨워 저 혼자 아물리고, 제 몸의 진액을 악쓰듯이 아악, 아
악, 다 토해 내어 꺼멓게 얼룩진 눈물 자국 피 맺힌 먹줄같이 남기며, 그래도 파고든 시
궁물 시퍼런 그림자 얼룩 문신을 지우지 못해, 명암이 심절해지나니.
썩고 삭아 문드러진 상흔투성이 나무토막을 시궁에서 건져 올린 장인은, 이제 이를 흐
르는 냇물에다 몇몇 날, 몇몇 달, 몇몇 세월을 잊어 버리도록 담그어, 말갛게 헹구는 것
이다.
이 진저리나게 더러운 나무토막의 모세혈관 끄트머리 속속들이 들이박힌 시궁물 시궁내
가 다 씻겨 내리도록.
그렇게 씻어서 투명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야.
하지만 씻어도 씻기지 않은 시궁물 멍든 빛은, 아련히 그윽한 비취빛으로 남는다.
헹구어 낸 나무토막 고갱이는 이제 그늘에서 말린다.
서러운 세월을 갚아 주듯 땡볕에 바짝 말리는 것 아니라, 아직도 남은 세월 있는 것처
럼, 조금 더 슬프라고 매달아 둔 처마밑 그늘, 응달에서 달래며, 말리는 나무토막. 고갱이.
나무는 바람이 된다.
그런 다음 장인은 칼을 들어 깎는다.
그래서 이 모든 것 품어 안아 드러내며 새로이 이루는 이러한 화병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멍굴의 춘복이나 만동이 백단이는, 끝끝내 썩지 않고 버티어 살아 남을 나
무토막들일까. 양반 선산에 투장을 하여 조상의 뼈를 몰래 옮기고, 반골의 뼈를 꼿꼿이
곧추세워 몸뚱이 맞는 저들이, 결국은 이 역사 앞에 온몸 드러내 저마다의 무늬로 새 경
치를 아로새길 것인가.)
그 어떤 경치를.
듣기 싫다.
이기채는 강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잘라 버린다.
속량이라니 너 일본 가서 신학문 했다고 신구식 따져가며 표 내는 것이냐? 돼먹지 못하
게. 앉아 천리 서서 만리, 나도 세상 볼 줄은 안다. 여기 이 구석지에만 엎드려 있어도.
그것이 아닙니다.
강오는 이기채의 벽력 같은 언사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화안을 짓는다. 중참이 좀 지나
종가댁으로 올라온 그는 이기채 앞에 그 나무화병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말머리를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마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온 사람처럼 속량을 하십시요. 여쭈었다.
없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 전대에는 물론 대가를 받고서야 노비를 풀어 주어 양인
이 되게 하였지만요. 경국대전에는 노비라도 공을 세우면 양인이 되는 규정이 실려 잇고,
실제로도 모반 사건에 공을 세워 면천된 사례나, 열녀 효녀로서 면천된 사례도 있지 않습
니까? 군공으로 노비가 양인이 된 일 또한 있고요.
그래, 이 매안이 문중에 남노여비 중에서 누구 특별히 공을 세운 일 있거나, 열녀 효녀
정문 받은 일 있느냐? 아니면 국치에 순국해서 충신 충복이 났느냐? 무슨 공이 있어서 노
비 속량을 해? 너는 배운 것 많으니 이야기를 해 봐라.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달라진 세상을 어제 오늘 겪은 것이 아니다.
내일은 더욱 달라질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옛법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하기는 많이 달라졌지. 요
새 종이 그게 어디 종이냐? 종이 상전 노릇 한다. 너는 나가 있어 모르지. 상투 깎아 단
발하듯, 예법을 싹 깎아 버려도 되는 줄 알지만, 그 어떤 법이 남아 내려올 때는 다 까닭
이 있는 것이다.
필요하면 새법을 만들기도 하지요.
너는 일찍이 개명해서 바다 건너 동경까지 유학을 갔지마는, 나는 이곳에 남아 옛모양
을 지키고 있다. 자고 이래로, 궁성이 있는 곳은 임금이 계시니 가장 옛법이 성할 것 같
지만, 사실은 그 어느곳보다 제일 먼저 외국의 문물과 새로운 법식을 받아들이는 곳이 곧
왕실이다. 늘 외국으로 드나드는 대신들이 있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사신들이 있는 까닭
이지. 안경이니, 자명종이니, 전깃불이니, 모두 궁전으로 먼저 들어가고, 그 연후에 궁궐
가까이 인접한 동네로 그것이 퍼진다. 그곳은 권문 세도가의 집들이 있는 곳인 탓이다ㅏ.
이 나라에서 단발을 제일 먼저 한 분이 누구이며 그곳은 어디이냐.
물론 이것은 불행하고 서러운 일이다마는 경위야 어찌 되었든 결과로는 그러한 외래를
피할 수 없는 곳이 곧 궁성이요, 왕실이요, 권문 세도가이며, 서울이니라. 그래 서울은,
나라 안에서 가장 변화가 빠른 곳이다. 전통을 지키기 어려운 곳이지.
허지만 향리는 다르니.
서울과 멀리 떨어진 곳 궁벽진 비산비야, 진부하고 고루하고 낡아빠진 유습이나 지키면
서, 시대에도 뒤떨어져, 아무 쓸모 없는 구법에 얽매인 듯 보이는 이 향리의 선비나 아낙
네들한테, 진실로 변치않는 이 나라의 전통은 남아 있는 것이야.
그래서 낙후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네가 서울도 아닌 동경까지 가서 새법 많이 공부하였겠으나, 내가 여기서 지키고 있는
것들이 모두 하찮은 것은 아니다.
앙반과 천첩 사이의 소생도 일정한 수속을 거쳐야만 양인이 되었고, 노비가 속량이 되
는 경우 또한 공노비는 대구하여 제 나이와 비슷한데다가 질병이 없는 자를 대신 박아 넣
고 풀려났으며, 사노비는 납전 속량으로 노주한테 속량가 백 냥은 내야 풀려났으니. 당시
뱍냥이라면 면포가 오십 필에 쌀이 열석 섬, 적지않은 비용인데 지금이라고 그 절차 거치
지 않고 속량이 될 수 있겠느냐?
만일에 이들이 달아난다면 어찌하시렵니까? 지금은 장례원도 없고 노부 추쇄도감도 없
습니다. 또 옛날처럼 속량문기를 작성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옛날에야 속량하는 데 필요한 절차로 문서를 써야 했지요.
첫째로 속가를 지불하는 사람과 이 속가를 받고 속량을 시켜 주는 사람 간에 서로, 속
량할 노비는 누구이며 속량 가격은 얼마로 한다는 계약 속량문기를 쓰고.
둘째로 속량을 받은 사람, 그러니까 노비랄 수 있는 납속인이나 혹은 돈을 받은 사람인
노주 즉 수속인이 장례원에 올리는 입안 신청 소지의 작성이 있으며.
셋째로 수속인 또는 납속인, 증인, 필집에 대한 초사(진술서)를 써야 했고.
넷째로 위에 열거한 문기와 초사를 바탕으로 장례원에서 이 사실에 대하여 입안한 문서
를 발급해야 했습니다.
이런 문서들은 모두 장례원에서 관장하여 풀로 붙인 다음 관인을 곳곳에다 찍은 후에,
신청한 사람한테다 주었지요. 그 서류를 받은 순간부터 노주, 노비는 서로 떨어져 고리에
서 풀리는 것이 옛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 절차가 늘 같은 것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하물며 이제는 노비를 다스리는 장례원뿐만 아니라 나라 자체마저도 망하여, 모든 것이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종중이 있고, 이 마을 저 마을이 모두 그
대로 있으며, 자식들과 손자들이 자라고 있는데 왜 나라가 망했단 말이냐, 망했다 망했다
하지 말아라. 다만 잠시 나라의 이름이 덮여 있을 뿐인즉.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조와 더불어 모든 것은 그대로이다.
이기채는 단호히 말하였다.
24. 매 안 놓치려고 꿩 잡아다 바치고는
요런 빌어먹을 년. 날 풀렸으면 기어 나와 요강이라도 비우든지, 걸레라도 후닥닥 빨
어다가 방구석이라도 조께 싹싹 딱든지.
옹구네는 일부러 들으란 듯 탕, 대야에다 빨래 방망이를 두드려 담으며, 방안 쪽에 대
고 구시렁거린다.
강실이한테 하는 소리다.
아이고, 즈그 집구석에서나 상전이제 머, 여그끄자아 와서도 무신 낯짝들고, 나 상전이
요오, 헐렁가? 지 밑구녁 내가 다 아는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지랄허고 자빠졌등게
비. 눈꼴이 시여서 참말로.
아직은 손끝이 찬 도랑물에 춘복이 옷가지를 첨범 담가 휘휘 흔들던 옹구네가, 깜짝이
나 놀란 시늉하면서 저만치 질러가는 평순네를 부른다.
어디 강가잉?
평순네는 힐끗 빨랫거리부터 훔쳐보더니 비웃적댄다.
열녀 났네, 또 빨래여?
아 어디 성헌 사람 입성맹인가, 원? 빨고 나서 돌아스먼 또 빨어야고오, 입히고 나서
돌아스먼 또 새로 입히야고오잉. 진물으 어뜨케나 줄줄줄줄, 피고름 엥긴 거 참 에지간히
빨어 냈네, 내가. 누웠는 사람도 못헐 짓이고, 수발허는 사람도 못헐 일이고오.
굿을 허네.
깃대가 없어서 어쩌끄나고는 안히여?
아조 늘었어이? 인자 내놓고.
슁킬 거 머 있당가? 자랑을 못해서 웬수제.
아 시끄러. 무단히 바뿐 질 가는 사람 불러 세워 놓고는 무신 노무홰냥 자랑이여? 시
방. 헐 일이 없이. 더러 죽겄네.
팔짜 바꾸자고 안헌디야. 나도.
춘복이 얼룩진 저고리 한판 보여 주려고 불렀던 것이니만큼, 이제는 평순네가 무슨 말
을 하든, 어디로 가든, 알 바 아닌 옹구네는 배시시 웃기까지 한다.
미친 놈 삼베 속곳을 빠능가아, 처웃기는.
느닷없이 웃는 것에 놀란 평순네가 팽하니 돌아선다.
그러나 옹구네는 지금, 조금도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멋 모르고 강실이를 멍사 없이 업어다 놓기는 놓았지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고쳐 먹
어도 도무지 기분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고, 속 터져어. 속 터져. 내 속이여어. 담배씨로 꽁꽁 찧어를 보끄나아, 솜방맹이
로 쾅쾅 뚜드려를 보끄나아, 기가 맥헤 말이 안 나오네. 아니, 매칼없이 기양 무신 사단
만 났대도 내가 눈구녁 튀어나올 판인디, 머이 어쩌고 어쩌? 애기를 배야? 삼시랑도 무심
하시지.
왜 나한테는 일점 혈육 점지를 안허시고, 맻 년이나 숨쥑임서 숨어 산 나한테는 죄면
(외면)을 허시고, 저런 웬수뎅이, 지내가는 꽹이질에는 씨를 뿌레 주시능고.
옹구네는 앞뒤 가릴 것도 없이 제 처지가 서럽고 원망스럽기만 하여, 쉬쉬하던 시절에
조차 아이 하나 낳지 못한 것이 원통해지는 것이다.
자식이야 애비 없는 상놈으로 옹구 하나면 거기서 더 바랄 것이 없었지만, 이제는 처지
가 달라져 강실이는 춘복이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자기 또한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워서 이미 거멍굴에 다 내놓고 밝힌바, 춘복이의 아낙 노릇 하는 것이 점점 당연해지는
마당이라, 무엇이 두려워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인가.
그렇지만 이상한 일은, 어찌 되었든 바위에서 굴러도 열 번은 구르게 아이가 생겼음직
도 하건만, 아직까지 한번도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지금까지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기는커녕 하늘이 도우시능게비다.
하며 은근히 쾌재를 부르던 일이 아니었던가.
안되겄어. 그동안 내가 너무나 무심했등갑다. 강실이란년이 바로 저렇게 한 번에 애기
스는 것 봉게로 저 사람은 양기 뻗쳐 모지랠 거이 없고, 저년은 젊어서 흠이 없능게빈디,
나만 늙었던 말잉가? 잉? 머이 어쩌고 어쩌? 이거이 무신 소리여? 옹구네는 순간 머리꼭
지가 뒤집히어 아찔하였다. 그러면서 딛고 섰던 땅바닥이 홀깍 따 라 뒤집히니. 캄캄하고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것만 같은 아뜩함에 머리를 털었다.
나는 어찌 살어?
매 안 놓치려고 꿩 잡아다 바치고는, 이만큼에서 비실비실 눈치 보는 자신의 모양새가
눈에 선하여, 그네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몇 날 며칠 머리를 쮜어뜯고 우두었다.
그러다가 번개같이 떠오른 생각이 바로 보약이었다.
비오리네 가서 광생당 진의원한테 부탁해 달래 갖꼬, 나 보약 한 제 먹어야겄다. 애기
스는 약 지어 도라먼 숭이사 조께 보겄지만, 넘의 말은 사흘을 못 가고, 또 기왕지사 나
도 인자 내놓고 삼서나 큰마느래 노릇 헐라먼 떠억허니 아들도 한나 낳야지. 앙 그리여?
저년이 가이내나 탁 나불먼 갠찮지마는, 머이매나 낳아 봐라. 오매, 나는 미친다. 찢어
쥑이도 못허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제, 내가.
옹구네는 그 밤으로 내달아 고리배미 비오리네로 갔다. 그러고는 속 아는 자리라 내가
일부로 왔잉게로, 누구 약이냐고는 묻지 말고, 애기 못난 사램이 먹는 요런 약 조께 지
어 주소잉? 진의원님은 척 들으먼 아실 거이네. 요새 여그 댕기시제 잉? 아들 낳얀다고
꼭이.
라고만 빌고 빌어서 약을 지어 왔던 것이다.
약값은 여그 있잉게잉.
옹구네는 저고리 앞섶을 들추고 치마 말기에 찔러 꽂은 지전을 꺼냈다. 그것은 사리반
서방님 강호가 춘복이 약이나 지어 주라면서, 인력거 끌고 고학하여 번 돈이라고, 깨끗한
돈이라고 춘복이한테 쥐어 주고 갔던, 그 돈이었다.
부부는 일심동쳉게, 자개가 먹으나 내가 먹으나 안 같겄다고? 이거 머 나만 좋자고 허
는 일잉가 어디? 가와가 만사성이라야. 내 몸이 편해야 우리 셋, 우리 집안 다 현히여어.
옹구끄장 넷, 알겄능가? 애기 나먼 다섯, 애기 하나 새로 스먼 여섯. 내 몸 잘못되야 바,
국물도 없을 거잉게.
이렇게 지어 온 약이 지금 옹구네 정짓간 시렁 위에 올려져 있었으니.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앙심도 솟구쳤지만, 왜 그런지 자꾸만 자신이 처량해져서 그네
는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나 늙었이까?
늙기는 머이 늙어?
얼마나 내가 기운이 좋다고.
하는 심정으로 옹구네는 탕, 탕, 방망이질을 한다. 옷 귀퉁이를 잘못 두드려 터져 나가는
것도 모르고, 제 가슴팍에 방망이질을 하듯이. 마구 친다.
그날 밤, 이슥한 어둠이 깊을 때, 옹구네는 찌그러진 풍로에 약단지를 얹어 놓고 부채
질을 팔락팔락 하면서, 숯불 빛을 받아 빨개진 낯바닥이 홍시감만큼이나 익어지도록, 불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밤중에 번지는 탕약 냄새에 거멍굴 사람들은, 웬일인가 의아하여 코를 벌름거리며 일
어나 앉는다.
이거이 무신 냄새여?
공배네도 부시시 자리를 걷었다..
25. 윷점
이런 것도 아조 헛것은 아닌가아.
오류골댁은 고개를 깊이 수그리고 앉은 채, 방바닥에 던진 윷가락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개. 도. 걸.
아까는 모. 개. 모였다.
내가 무어 당골넨가. 허튼 짓으로 재미 삼아 해 보는 일이지. 나한테 웬 신이 실렸을
리도 없고... 저까짓 나뭇개비가 뭘 알어. 무단히 저런 것에다 마음을 비빔서 이런 말 저
런 말 붙이고 매달리는 게 우습지.
하면서도 그네는 붙박인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금방 던진 윷괘만 뚫어지게 보고 있다.
손가락마디 하나보다 조금 더 길까 말까 한 윷짝들은, 등허리 거멓게 엎어지고 뱃바닥 허
옇게 뒤집으며 길흉을 방바닥에 그리고 있었다. 걸. 개. 도. 걸이라니.
그것은 윷을 세 번 던져서 각기 나온 상태를 합하여 얻은 괘로 점을 치는, 윷점 육십사
괘 중에 궁실우전이라는 점사였던 것이다.
활이 화실을 잃는다. 윷가락은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 번에 나왔던 괘는 모. 개. 모였으니 각궁무현인즉 활에 활줄이 없다는 뜻 아니었
던가. 그때 이미 손끝에 힘이 빠지면서 식은땀이 돋아 더 해 볼 염이 나지 않았으나,
점괘 속은 또 모르는 것이어서 다시 윷을 흔들었는데, 떨어진 것이 개였다.
(개?)
두 짝은 엎어지고 두 짝은 뒤집어지는 모양에 까닭 없이 흠칫한 오류골댁의 뇌리를 훑
으며, 괘 머리에 개가 오는 경우의 여러 점풀이들이 차갑게 지나갔다.
(거기 무슨 좋은 말 없었던고...)
그네는 무당한테 공수 받는 사람처럼 윷가락 앞으로 무릎을 당겨앉으며, 절박하게 점사
를 더듬었다.
그러나 어이없이도 떠오른 구절들은 차무양륜(차에 두 바퀴가 없음).
아니면 하어실수(물고기가 물을 잃는다) 같은 것이어서, 오류골댁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심벽이 내려앉고 말았었다.
개 들어가는 괘사 열여섯 가지 중에 나비가 꽃을 얻는다(호접득화)는 말인들 어찌 없으며
학이 하늘에 오른다(학계우천)하는 말 또한 어찌 없으리오마는, 그네의 마음이 이미
깃대일 곳 없는지라, 하필이면 그런 말만 줄줄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두번째로 윷을 던져 얻은 것이 도였으니 개. 도 다음에 이제 무엇이 올까.
윷(수)과 모는 같은 값으로 쳐주므로 도. 개. 걸. 모 넷 중에 하나가 되겠지만, 하늘이
도우사 천행으로 개나 나오면 혹 모를까, 도. 걸. 모 가운데 어떤 것이 떨어지더라도 점
사는 절망이었다.
만일에 정말 개. 도. 개가 되어 준다면 임천견일로 무겁게 젖은 마음이 일시에 걷히어
기나긴 장마에 드디어 해를 본다는 낭보를 얻는즉, 이에서 더 큰 기쁨이 없겠으나, 혹
개. 도. 도일 경우에는 일입운중이매, 어찌할까 답답워라.
밝은 해가 어두운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요, 개. 도. 모는 조무우한으로 낙심천만
새의 날개가 없다는 뜻이니. 어디에다 터럭조차 부벼 볼 곳 없는 운수 아니랴.
그런데 결국 이렇게 개. 도. 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활에 활줄이 없다.
활이 화살을 잃는다.
지금 강실이의 처지가 이에서 더 나을 리 꿈에도 없지만, 막상 윷가락을 던지는 대로
이러한 괘가 나오자 오류골댁은 아연 막막해져서, 혹 내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것 아
닌가, 되짚어 본다.
가슴이 서늘하다.
아니, 정월도 다 지나갔는데 꽃 피는 춘삼월에 혼자 앉어서 무슨 윷놀인고? 방문 밖에
인기척이 난 것도 모르고 있던 오류골댁은, 안으로 들어서는 수천댁 소리를 듣고서야,
낯붉히어 감출 일 들킨 사람처럼 얼른 윷짝을 걷으며 엉거주춤 한쪽 무릎을 세 운다.
나, 오다가 흰 나비를 봤네이.
아무래도 그 징조가 불길하여 근심스럽다는 듯, 수천댁은 저어한 마음 끼인 음성으로
낮게 말했다. 겨울 가고 날 풀리어 봄이 오면, 그해 들어 맨 처음 보는 나비에 따라, 노
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였고, 흰나비를 보면 불행하게도 부모
복을 입는다하여 몹시 언짢게 여기었던 것이다.
아 그것이 방정맞게 눈앞으로 팔랑 떠오르더니, 나푸울 나풀, 어디로 가도 안허고 똑
내 옆에서 맴을 도네 그냥.
수천댁은 그 나비를 멀리 쫓아 버리고자 손사래 시늉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혼자
서 고개를 자웃자웃 하였다. 그네는 수천의 친정에 연로하신 부모가 아직 구존해 계신 터
라, 우선 그 모습이 먼저 걸리었을지도 모르나, 그 말은 꺼내지 않고 시어머니 이율댁 근
력을 염려하였다.
어머님이 이번에 큰어머님 상 당하시고는 부쩍 쇠진허셔 갖고 노인은 봄에 병환이 많이 나시던데 걱정이네요.
시절도 이렇고, 집안도 뒤숭숭허고, 어디 마음붙일 곳이 있어야 낙을 삼지, 원. 젊은 사람
기력에도 못 당허게 자고 새면 놀랠 일만 터지는데, 무엇으로 보원을 해 드리여? 노인냥반을.
어른 모시는 데는 음식 보약 못잖허게 수바라지 잘 해야지만, 그저 어른들 뜻 받고 마
음 편허게 해 드리는 게 첫짼데요잉.
마음이 편해야 몸도 편허지. 편치 않은 데서 무슨 기력이 나온다던가. 요새 같으면. 손
자 손녀들 줄줄이 타관 객지로 종적도 없이 야반에 나가고.
수천댁이 은근히 이율댁 심기를 빌려, 지난번에 강실이 일로 놀란 이쪽 사정 속내를 물
어 보려는 것 아닌가 싶어, 오류골댁은 지레 둘러댈 말부터 떠올린다.
강실이는 좀 어쩐다고 해? 그 동안 인편이나 있었는가.
아닌게 아니라 짐작대로 수천댁한테서 그 말이 나온다.
그만허다네요.
어류골댁은 짐짓 침착한 척 대꾸하며, 앓는 자식 비접 보낸 부모다운 무거움을 지어 보
인다. 그리고는 윷짝을 모두어 사기종지에 담는다.
때 아닌 춘삼월에 귀 빠진 윷놀이는?하던 수천댁이 그제서야 짐작이 간다는 듯 오,
윷점 쳤는가 보구나 하면서 웃었다.
어디, 이리 좀 주어 봐. 나도 한번 해 보게.
넘어진 김에 쉬어 가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도 있다더라만, 나도 윷 본 김에
점이나 쳐 보자. 아까 흰 나비를 보았더니 영 마음이 안 좋네. 아이고오, 이놈의 세상.
원래 윷점 칠라면 복숭아나무 가지로 만든 윷 가지고 해야는 것 아니라고? 수천댁이 손
바닥에 엎은 종지를 짜락짜락 흔들며 말했다.
머, 재미로 허는 것인데요, 무슨 나무 윷이면 어떻답니까.
그래도 귀신은 복숭아나무를 좋아헌다대.
싫어헌다등만. 아닝가? 에이, 그런 무서운 말씀 말고, 어서 던져 보서요. 맞는가 좀 보
게요.
수천댁은 종지에 담긴 윷을 손바닥에 엎어서 살짝 쥐고 흔들었다.
짜그르락, 짜그르락, 윷들이 종지를 치는 소리가 투명하고 곱다.
이것은 사랑에서 어른들이 자리를 펴놓고 놀 때 쓰는 밤나무 윷이 아니고 오린 소년들
이 만들어 노는 싸리나무 윷도 아니었다. 박달나무를 아주 작고 예쁘게 다듬어서 만든 것
이다. 이 박달나무 윷은 손안에 잡히는 맛이 차고 매끄러운데다가 앙징맞고, 윷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맑아서, 부녀자들이 내방 전용으로 아끼며 즐기는 윷이었다.
음력 정월 한 달 내내 남녀 노소 반상의 구별 없이 사람들은 윷놀이를 하였는데, 남자
들은 주로 마당에다 멍석을 펴놓고 놀았으며, 여자들은 안방에서 방석 위에 윷가락을 던졌다.
윷도 여러 가지여서 길이가 다 달랐으나, 장작개비같이 커다락 장작윷이나 팔뚝만한 것
들보다는 모두들 밤윷을 가지고 놀았다. 밤윷은 조그만 밤톨 크기로 자른 나무토막 네 조
각을 공기나 종지에 담아서 손바닥에 엎어 가지고 짤짤 흔들어 젓다가, 종지와 손바닥 틈
새를 살짝 띄워서 바닥에 뿌리듯 쫘악 던지는 것이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윷가락이 엎어지고 뒤집어질 때, 와아악, 지르는 비명과 함께 하늘
을 찌르는 함성이 터지며 온 동네를 흥겹게 만드는 윷놀이.
이처럼 친근한 놀이는 참 다시없을 것이다.
윷놀이는 말 이름도 재미있다.
도는 도야지, 개는 개, 걸은 노새, 윷은 소, 그리고 모는 말에서 따다가 붙였으니, 이
것들은 모두 집안에서 기르는 가축들 아닌가.
거기다가 말이 앞으로 나아가는 순서를 또 이 동물들 몸집 크기와 달리는 속도로 정하
여 웃음이 나오게 한다.
돼지는 뚱뚱하고 게을러서 한 걸음에 한 밭만 가고, 개는 돼지보다 몸은 작지만 날쌔고
빠르므로 두 밭을 가고, 노새는 개보다 체구도 크고 잘 달리는 고로 세 밭을 간다. 또한
소는 비록 걸음은 느리지만 덩치가 클 뿐 아니라 일도 잘하여 네 밭을 한 번에 갈 수 있
다. 그리고 말은 일 잘하고 기운 차고 적토마 천리마로 비호 비룡 견주오니 한꺼번에 다
섯 밭을 신나게 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윷을 던질 때는 모 나오라고 모야아 소리를 지
르잖느냐? 윷 나오고 모 나오면, 어렵고 좋은 것을 얻었대서 한 번 더 놀 수 있는 게야.
할머니가 손자한테 일러주며 마주앉아 정답게 노는가 하면, 일가 친척 남녀가 한자리에
허물없이 놀 수도 있고, 양반도 놀고 상민도 놀아, 정초에는 어디를 가나 마당에서, 사랑
에서, 안방에서 윷놀이로 웃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이는 어제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라.
전에 어른들이 하시던 말을 되새겨 보면 나무 조각 다섯 개를 가지고 놀던 중국의
저포 놀이가 고래에 우리나라로 들오와서 민간에 토착된 것이 윷놀이 아니냐고도 하였고
저포네 격양이네 하는 중국 놀이들이 다 윷놀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몽고
쪽이 오랜 습속으로 살한이란 놀이가 있으니. 이것이 꼭 윷놀이와 흡사하니라는 말씀도
들은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윷놀이판에 쓰이는 도.개.걸.윷.모 같은 말 이름은, 옛날
옛적 몇 천 년 전, 부여 나라 사가의 관직명인 저가(산돼지), 구가(개), 우가(윷), 마가(모)와
귀족이었던 대사에서 본 떠 지었다 하더라. 그러니 우리 윷놀이 기원도 아득해서, 연원
을 굳이 찾을작시면 저 먼 상고에 고구려나 부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게다 라고도
했다. 하잘것없는 나뭇가지 몇 토막 가지고 노는 놀이 하나가, 어쩌면 그토록 장구한
세월을 두고 면면히 흘러내려 집집마다 속속들이 파고들어서, 이 나라 백성의 일상에
저마다 따뜻하고 친밀하게 체화될 수 있었을까.
오류골댁은 수천댁이 흔드는 윷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짜그르락, 짜그르락.
모야아.
네 마리가 모조리 까맣게 엎어진 윷 등을 보고 수천댁은 손뼉을 친다. 모도 모나름이어
서 이 다음에 올 괘가 무엇이냐에 따라 점사는 각양각색 여러 말로 풀리겠지만, 우선 모
가 나오니 윷놀이 하던 습관이 있어 그런 것이다.
옛날에 양생이 만복사 법당에서 부처님하고 내기를 해 이긴 덕으로 아리따운 아가씨와
가연을 맺었다 하드구만, 오늘 나는 누구랑 내기를 해 무엇을 얻어낼꼬? 수천댁이 손바닥
에 엎은 윷종지를 산통처럼 흔든다.
시방 형님 운수하고 허시잖에요?
그건 그렇지.
만복사 부처님이야 자비로우시니 가련한 양생에게 일부러 져 주신 것이겠지만, 사람의
운수는 앙칼지고 가차없어 당해 내기 어려웁다고 한 마디 하며, 수천댁은 윷을 뿌린다.
만복사가 지금도 그대로 있는가?
안 가 봐서 모르지요. 예전에는 아조 웅장허게 크고 화려했다등만. 그 유명헌 생육신
매월당께서 만복사 이야기를 명문장으로 지으신 걸 봐도.
만복사는 남원부 서쪽 기린봉 아래 있던 대찰이었다.
고려 문종 임금 때 세웠다고도 하고, 신라말에 도선 스님이 창건했다고도 하는 이 큰
절은, 정유재란에 왜병의 방화로 무참히 불타지만 않았더라면 여전히 그 웅자를 떨치어
자랑할 것이언만, 지금은 전소되어 옛 모습을 찾을 길 없고, 오로지 오층탑과 당간지주가
세월의 풍화 속에 그 옛날의 흔적으로 서 있을 뿐인데.
오래도록 남원 사람들은 만복사를 사랑하여 남월 팔경 빼어난 여덟 경치를 일컬을 때,
비안정 앞 요천 강변 널따란 모래사장에 기러기떼 그림같이 앉았다 떴다 하는 풍경 비정
낙안 대신, 만복귀승을 넣기도 하였다.
수백 명 승려들이 바랑을 둘러메고 이른 아침 떼지어 탁발하러 나갔다가, 날이 저물면
바랑들을 가득 가득히 채우고 무거운 듯, 물드는 석양을 등에 진 채 만복사 쪽으로 고개
를 두르며 돌아오는 풍경이 장관이라 그렇게 말한다고도 하지만.
승려의 무리 구름같이 흩어지고 모이는 것도 참 볼 만한 것이겠으나, 어찌 그것이 수백
명 승려들의 나가고 들어오는 숫자만을 일컬어 팔경중에 넣었으랴.
잘새도 날아드는 고찰의 황혼에 모종은 사바를 쓰다듬어 은은히 울리는데, 고단한 듯
쓸쓸한 듯 서두르는 듯 바랑을 추스리며 귀소하는 귀승들의 모습이 멀리서 보기에는 사뭇
정취가 있었으리라.
일찍이 신동이라 이름이 난 매월당 김시습이 세 살 때 이미 시에 능했고 다섯 살에 벌
써 대학과 중용에 정통하였으나, 스물한 살에 이르러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
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등극하였다 소식을 듣고는, 통분하여 울면서 보던 책
을 태워 버리고 중이 되었는데.
신품의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던 그가 한문 소설 다섯 편을 지어 한 권에다 묶었으니,
이것이 금오신화였다.
이 금오신화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만복사저포기가 바로 이 남원의 만복사를 배경
삼은 것이어서, 이 고장 사람들은 부처님과 저포놀이 내기하여 이긴 양생이 제 소원을 푼
이야기를 많이들 알고 있었다.
저포란 게 윷 저 윷 포 그러니, 윷놀이를 한문자로 쓰자만 그리 말하는 것이다 하는 이도
있고 저포는 옛날에 호인들이 점칠 때 쓴 것으로, 우리 윷과 비슷하다 하는 이도 있어,
양생이 부처님 앞에서 단 둘이 마주앉아 윷놀이를 하였는지 저포 점을 쳤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수천댁이 던진 윷은 모.도.개로 떨어졌다.
이게 무슨 소린가? 이렇게 나오면 뭐라고 읽어? 이 괘를.
그네가 얼른 짚이지 않는 얼굴로 오류골댁을 바라본다.
모.도.개...그게 아마 무공무상 아니던가요?
무공무상이라니?
공이 없어 상이 없다, 그런 말인데요잉.
오류골댁이 조금 민망하다는 듯 말끝을 흐린다. 아짜 자기 앞으로 떨어진 괘에 비기면
이나마 호사였지만, 그대로 남의 점이라 더 좋은 말 나온 것만은 못했던 것이다. 공연히
자기 탓이나 된 것도 같아서
뭐, 무해무득, 그런 소리나 같지요 머.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지 꽁지에 더 말을 덧붙이는 오류골댁한테, 수천댁은 고개를 무
겁게 저어 보인다.
다르지, 그건.
저는 아까 더한 말로 나오등만요.
괘 틀린 것 없지 멀. 내가 무슨 공이 있어야 상이 있지.
저런 게 맞던가요. 어디?
다른 건 몰라도 이 괘는 맞네. 똑 내 처지 그대로 아닌가.
제가 혹 잘못 말씀 드렸는지도 모르지요.
흰 나비를 본데다가 점사가 이러해서 더욱 울적한 낯빛인가,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가,
수천댁 기색은 도무지 밝지 못하다.
저도 그걸 다 외우기는 어려워서 적어 놓은 게 있거든요. 한뻔 꺼내보께요.
오류골댁은 반닫이를 열고 궤 속에 두루마리로 넣어 두었던 윷점 점사 풀이 기록을 찾
았다. 궁체로 촘촘히 적힌 글씨들은 저마다 길흉을 머금고 까맣게 번들거린다. 그네는 그
것을 시집올 때 가지고 왔었다.
그냥 글씨 연습 삼아서 베꼈던 것이에요.
도.도.도 아유자모(아이가 어머니를 만남)
도.도.개 서입창중(쥐가 창고에 들어감)
도.도.걸 혼야득촉(밤에 불을 얻음)
도.도.모 창승봉춘(파리가 봄을 만남)
도.개.도 대수역류(큰물이 거슬러 흐름)
도.개.개 죄중입공(죄인의 몸으로 공을 세움)
도.개.걸 비아박등(나는 개미가 등불에 부딪힘)
도.개.모 금철우화(금이나 쇠가 불을 만남)
도.걸.도 학실우편(학이 날개를 잃음)
도.걸.개 기자득식(굶주린 자가 밥을 얻음)
도.걸.걸 용입대해(용이 큰 바다로 들어감)
도.걸.모 구입광중(거북이 죽순 속으로 들어감)
도.모.도 수목무근(나무의 ㅃ부리가 없음)
도.모.개 사생복생(죽은 이가 다시 살아남)
도.모.걸 한자득의(추운 자가 옷을 얻음)
도.모.모 빈인득보(가난한 사람이 보물을 얻음)
개.도.도 일입운중(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감)
개.도.개 임천견일(장마에 해를 봄)
개.도.걸 궁실우전(활이 화살을 잃음)
개.도.모 조무우한(새의 날개가 없음)
개.개.도 약마타중(약한 말의 짐이 무거움)
개.개.개 학계우천(학이 하늘에 오름)
개.개.걸 기응득육(굶주린 매가 고기를 얻음)
개.개.모 차무양륜(차에 두 바퀴가 없음)
개.걸.도 영아득유(어린애가 젖을 얻음)
개.걸.개 중병득약(중병에 약을 얻음)
개.걸.걸 호접득화(나비가 꽃을 얻음)
개.걸.모 궁득우전(활이 화살을 얻음)
개.모.도 배견소빈(서먹서먹한 손님을 절하여 뵘)
개.모.개 하어실수(물고기가 물을 잃음)
개.모.걸 수상생문(물에 무늬가 생김)
개.모.모 용득여의(용이 뜻대로 얻음)
걸.도.도 대어입수(큰 고기가 물에 들어감)
걸.도.개 염천증선(무더위에 부채를 줌)
걸.도.걸 경응무조(놀란 매가 발톱이 없음)
걸.도.모 척주강중(구슬을 강 속에 던짐)
걸.개.도 용두생각(용의 뿔이 생김)
걸.개.개 빈이차천(가난하고 또 천함)
걸.개.걸 빈사득록(가난한 선비가 녹을 얻음)
걸.개.모 묘아득서(고양이가 쥐를 만남)
걸.걸.도 어변성룡(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됨)
걸.걸.개 우득추두(소가 콩을 얻음)
걸.걸.걸 수화성실(꽃나무에 열매가 달림)
걸.걸.모 사문환속(중이 속세로 돌아옴)
걸.모.도 행인사가(나그네가 집을 생각함)
걸.모.개 마무편책(말에 안장과 채찍이 없음)
걸.모.걸 행인득로(행인이 길을 얻음)
걸.모.모 일조초로(해가 풀의 이슬에 비침)
모.도.도 부모득자(부모가 아들을 얻음)
모.도.개 무공무상(공이 없어 상이 없음)
모.도.걸 용입심연(용이 깊은 연못 속에 들어감)
모.도.모 맹인직문(장님이 문에 다다름)
모.개.도 암중견화(어둠 속에서 불을 봄)
모.개.개 인무수비(사람에 손과 팔이 없음)
모.개.걸 이견대인(이로움이 대인을 만남)
모.개.모 각궁무현(각궁에 활줄이 없음)
모.걸.도 이변생풍(귓가에 바람이 일어남)
모.걸.개 치아득보(어린애가 보배를 얻음)
모.걸.걸 득인환실(사람을 얻었다가 도로 잃음)
모.걸.모 난이불길(어지럽고 불길함)
모.모.도 생사망연(살 길이 아득함)
모.모.개 어탄조구(고기가 낚시를 삼킴)
모.모.걸 비조우인(나는 새가 사람을 만남)
모.모.모 가가득제(형이 동생을 만남)
인생사 구구절절이 일도 많지. 말도 많고 아니, 이것 좀 봐, 이변생풍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고? 참말로.
두루마리를 읽어가던 수천댁은 그 구절에 눈이 멎어 뇌어 본다.
귓가에 바람이 일어난다... 그러면 대관절, 급헌 소식을 들을 것인가아, 못 들을 말 듣
노라고 귓전이 시끄러울 것인가, 소리 소문에 시달릴 것인가.
아이고, 형님도 허구 많은 말 중에 왜 하필 그런 말을 골라서 외우신가요? 오류골댁이
가볍게 나무란다.
그제서야 수천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공이 없으니 상도 없다든데, 무슨 성과가 있을라는지. 이번에 사리반 조카 만주 갔다
온 이야기를 수천양반이 자세히 듣고, 아마 직접 강태를 만나러 가실 작정인가 보네.
예?
그 동안은 몰라서 못 갔지, 못 갈 것도 없는 곳 아닌가.
언제요?
금명간.
그러시고만요잉.
내가 꼭 따라갔으면 좋겠는데. 부자간에 성품이 다 격해서, 막상 서로 부닥친다 해도
걱정이고 만에 하나 못 만난다 해도 큰일이네.
배행도 없이 혼자 그 먼 데를 어떻게 가실까요? 기차는 있다고 하지만, 여간 흉하고 험
한 곳이 아니라던데. 마적떼 들끓고. 날씨도 영 춥고요.
날이사 이제는 봄 다되얐지.
허기는 거기도 사람 사는 데니, 만날 수만 있다면야 하루라도 빨리 가서 상봉을 해야
지, 잠시 잠깐이라도 늦출 일은 아니지요.
이역 만리 타국 땅 만주 벌판에 무슨 정이 있다고 그러고들 엎데어 할머니가 돌아가셔
도 안 온단 말인가? 늙은 부모 살쩍머리가 허옇게 세어 가지고, 물도 설고 말도 선 오랑
캐 땅으로 자신 찾어 나서는 걸음이 온전허겄어? 시방.
한번 나간 길, 핑계가 없어 무렴해서 못 오고 있었을 것이네요. 정녕. 그런데 데리러
가신다니, 잘허시는 일이지요.
이변생풍이 왜 자꼬 밟혀.
수천댁은 두루마리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고, 오류골댁은 가슴이 미어져 더는 아무 말
도 안한다.
내 새끼.
우리 새끼 강실이.
어디 가서 무얼 먹고 무얼 입고 무엇을 하며, 어쩌고 있는고. 살어는 있는지, 끔찍헌
일 저지르지는 않었는지. 길이라도 가찹다면 골백번이나 갔다 왔다 댕기겄그마는. 오류골
양반 모르게 가 볼 수도 없고. 이놈의 황아장수는 한번 그리 가 버린 뒤로 소식을 돈절허
니, 애간장이 끊어져도 물을 곳이 없네. 늘 다니던 사람이 왜 이렇게 뚝 발걸음 끊고 나
타나들 안헐까. 천리라도 좋고 만리라도 좋으니, 나도 우리 강실이 찾어서 나설 수만 있
다면 좋겄다. 말 한 마디 못해도 좋으니, 그냥 먼 발치에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왔으면
좋겄다. 내 새끼, 우리 강실이, 그림자라도 한번 보고 왔으면 원이 없겄다.
오류골댁은 덧문을 터엉 열어제친다.
꽃이 터진 살구나무가 사립문간에 연분홍 그림자를 적막하게 드리우고 있다.
옹구네 토방에도 봄 햇살에 겨운 살구꽃잎 몇 낱이 떨어져 있다. 지게문이 닫혀 있는
것으로 보아 집안에 아무도 없는가 싶은데, 바깥으로 닫은 방 문고리에 놋숟가락 닳아진
달챙이가 거꾸로 꽂혀 있어 이상해 보인다.
내가 그년.
이라고 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삼키며 옹구네는 낯꽃을 환하게 밝히여, 춘복이한테 슬쩍
이 다가앉으면서 말한다.
내가 작은아씨를 방에다 혼자 두고 나올 적에는 얼매나 조심을 헌다고오. 행이라도 어
린 쇠견에 목을 맬까 겁이 나고, 나 없을 때 우루루 어디로 나가 불먼 어쩌까아 싶고오.
그래서 시방도 문 딱 배깥으서 장구고는 숟구락 꽉 찔러 놓고 왔제. 어찌여? 내가 열녀
아닝가?
도무지 사람의 형상이라고는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겨우 일어나 앉을 수 있
고, 어정어정 몇 발자국 걸어 볼 수도 있게 된 춘복이가 생각보돔 많이 맞어 부렀능가.
골벵이 들었능게비여. 앉은뱅이 되까 싶우드니마는 그건 아닝 것맹이고. 이게 통 쉽게
낫든 안헝마잉.
하면서 옹구네 수발을 아직까지 받고 있었는데, 옹구네는 살갑기 짝이 없게 부닌다.
춘복이도 그런 옹구네한테 예전처럼 퉁명스럽게 대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우둑박구라고
하지만, 지금 일의 경위가 옹구네한테 함부로 할수 없게 된 정황을 모를 리 없고, 또 그
동안 밤낮으로 지성껏 자기를 돌보아 준 정성이 그렇게 밉지만은 않은 탓이었다.
거기다가 무엇보다 옹구네는 강실이를 업어 오지 않았는가.
아이, 내 생각에는잉, 인자 자개가 조께 돌아댕길만 허그던 우리 집이다가 방 한 칸 딜
였으먼쓰겄는디. 어쩡고?
방을 멋 헐라고?
아이고오, 머리보톰 깎어야겠네에. 아조 지대앤허니 질어 갖꼰느 도사맹이로. 우서 죽
겄네에. 떠꺼머리 총각맹이로 땋고 댕게도 허겄그만? 낯색도 영 수척허고잉. 내가 냇갈으
가서 깨구락지 ㅁ 마리 잡어다 고아 주께. 뽀오여니 국물 나먼 얼매나 꼬수와? 보 되제.
진짜로.
방 딜인담서 딴 말은.
기운 나야 방도 딜이제. 허새비가 심쓰겄어? 아 시방 금지옥엽 천상 선녀 식구가 한나
늘었잉게 방도 늘어나야제. 앙 그리여? 인자 얼매만 있으먼 또 한 식구 더 늘어나고. 응
애애앵.
옹구네는 갓난애 울음 소리를 흉내낸다.
춘복이는 낯을 붉히고, 옹구네는 그런 춘복이의 낯바닥을 쫙 할퀴어 뜯어 놓고 싶다.
그렇지만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제 곧 숨도 못 귀게 조일 것이니 지금을 그때를 위
해서 낙낙하게 풀어 두는 것이 좋은 때문이다.
니가 우직헌 줄 내가 안다. 잔꾀 없는 천성이라 은혜를 입고는 배반 못헐 위인인 줄도
내가 알제. 내가 나중에 걷어 먹을라고 요렇게 속 씨리는 씨 뿌리능 거이제, 내가 무신
보살 났다고 느그들한테 오장 찢어 창시끄장 시주허는 중 아냐? 어림없다 어림없어.
옹구네는 배암같이 서리 튼 속마음을 꼬깃꼬깃 똬리로 쟁여 넣으며, 긴 혓바닥 날름이
어 휘감듯이 춘복이한테 차악 감겨든다.
내가 시방 보약 댈에 먹은 기운이 날랑가, 안 날랑가아.
깨구락지 통통허니 요새 참 좋을 때여잉?
26. 졸곡
어머니를 여읜, 슬픈 아들 고애자 이기채는 이마를 조아리어 절하고 통곡으로 아뢰나이다.
이 몸은 죄역이 태산같이 깊고 무거워 스스로 죽음으로써 멸하지 못하옵고, 오히려 그
화가 돌아가신 어머니께 미치었으니, 가슴을 두드려 울부짖고 머리를 부딪쳐 몸부림하며
오장이 무너지고 흩어져 가누지 못하도록, 땅을 치며 하늘에 외쳐도 이 울음이 닿을 곳
없습니다.
해와 달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지라 무정한 세월은 빨라서 어느덧 어머니 가신 지 석
달이 지났는데, 이 불효 자식은 혹독한 벌로 죄를 받아 차마 살아 남기를 바랄 수 없사오
나, 이토록 서러운 궤연을 받든 채 구차히 살아 있으니.
존자께서 위문하여 주시는데도 애감 극통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고 호소할
수도 없어, 오직 까무러칠 지경이옵나이다.
보내주신 위소를 소중하게 받았으나, 황미하여 순서도 없이 삼가 소장을 올립니다.
참으로 원통하여 창자를 찢으며 울어도 시원치 않을 일이 벌어진 끝에, 오늘 새벽은
졸곡이어서 제사를 올리는 날이었다.
울음을 마치다니.
이기채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상례 절차의 이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 기가 막혔다.
졸곡이라 무시애곡을 마친다는 뜻이었지만, 그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며칠 전에 당한
일이 그만큼 억색을 할 것이어서 정말이지 목을 놓아 울기라도 했으면 그나마 좀 흉중이
풀릴까 싶은 판에, 밤새 짓이긴 쓴울음이 칡즙같이 목에 찬 새벽.
하필이면 그는 졸곡을 당한 것이다.
졸곡은 삼우를 지낸 후 반드시 삼 개월이 지나고 나서 거행하는 것이 예인데, 날짜의
천간에 갑.병.무.경.임이 들어 있어 양의 날인 이 강일을 택해서 행하였다.
오늘은 계미년 병진삭 삼월 초엿새 무술일이었으니. 어머니 청암부인의 삼우제를 지낸 지
꼭 백 일이 되는 날이었다.
어린아이 세상에 갓 나온 맨 처음에는 그저 다만 핏덩이라, 아직 사람이라고는 하기는
어렵지만, 어느덧 석 달이 지나 백 일이 되면 이제 비로소 사람으로서의 형상을 갖추어
이목구비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하는 짓도 눈에 띄게 달라져 재롱이 는다.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날을 축하해서 잔치를 한다.
백은 이 세상의 수 가운데 가장 큰 수이며, 많은 수, 완전수로서, 모든 것을 이루어 스
스로 가득 찬 수다.
그래서, 소원을 이루고자 드리는 기도와 치성을 백 일 동안 올리는 것이다.
이제부터 백 년을 살 인생에 백일기도를 마친 날이 바로 백일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백 날이 이처럼 의미 깊듯이, 사람이 죽어서도 백 일이 되면 졸곡
을 한다.
유혼은 이미 무덤 속, 우주 자연의 태 안으로 돌아가서, 저 세상에 다시 났을 것이니.
그 혼백도 이제 백일이 되면 안혼정백, 혼돈과 슬픔과 낯설음을 가라앉혀 다스리고 이제
는 올바른 신명으로서 자신의 모양을 갖추게 되리라.
그러니 이제는 울음을 거두고, 신명이 편안히 자리잡고 안신하시도록, 졸곡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기채는 이제부터 울 일이 북바쳐 창자가 미어진다.
그래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조석 상식을 올리고 그 궤연 앞에서 울 수 있을때, 그 눈물
을 타고 어머니와 아들은 교혼할 수 있엇는데, 한 몸으로 흐를 수 있었는데. 자신의 뺨을
적시는 눈물이 유체의 체온 같아서, 자신을 쓰다듬어 주시는 어머니의 손길을 감득할 수
있었는데. 그리는 마음의 골을 타고 내 속으로 스며드신 어머니가 눈물로 현신하여 하염
없는 슬픔을 이루어 주셨는데 이제는 울지도 말라 한다.
어머니는 자식의 몸에서 눈물을 거두어, 이제는 당신의 질서 속으로 홀연히 가신다 한다.
허전하고 차가운 뺨.
눈물은 얼마나 따뜻한 것이었던가.
이기채는 목메인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멀리 가지 마소서. 제 안에서 머무소서.
비록 이제 울음을 끊는다 하나, 내 어찌 울음을 끊을 수 있으리.
어머니 돌아가신 지 백 일이 다 못되어, 유택을 더럽고 소란하게 뒤집은 죄, 내 뼈를
빻아 가루가 된다 해도 씻을 수 없는데 혼백인들 어찌 안정하실 수 있으며, 잠시나마
더 머물고 싶은 정이 나리오.
내 너를 낳지 않아 이대도록 홀대하느냐.
어머니는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양자 온 아들이라, 저와 같이 제 어머니 산소를 허술히 지킨다. 피는 어쩔 수 없다고,
사람들이 냉소하여 손가락질하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다.
아니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기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속으로 부르짖는다.
하지만 자신의 양자 온 아들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각성되며 골수에 사무쳐, 처신에
구설이 있으리라는 것도 아지 못하는 것 아니었지만, 그보다도 피 한 점 살 한 점 이승에
남기지 못하고 가신 어머니, 유혼의 흉중이 어떠하실까.
짐작만 해도 이기채는 창자를 찧고 싶었다.
꿈에라도 어머니를 생모. 양모, 자각하여 생각해 본 일 없었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
고 보니, 허물은 드러나고 정은 감추어져, 오로지 죄지은 자식으로서 자격지심이 뼈에 미
치고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러웠다.
또한 그냥 제 어미의 산소를 훼손당한 것만 해도 수치요 치용인데, 홀로이 한세상 추상
같이 공규로 지나오신 어머니의 사후에 깨끗하신 그 뼈 하나 온전히 보존해 드리지 못하
고, 무당아비 뼈다귀가 침노해 들어가 개개게 하니 그 봉욕을 어찌하시리. 아, 무엇으로 어떻게 갚아 드리리.
이제는 틀렸다. 어머니의 한세상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고 말았다.
살아서 지키신 어머니의 뼈를, 죽어서 자식은 지키지 못하고. 한낱 지 웬수엣 놈의 천
골들 작란에 말려들어, 풍비박산, 흩어지게 만들고 말았으니. 하늘 아래 이와 같은 죄인
이 또 어디 있으리오.
울지 말아라. 울지도 말아라. 무슨 낯을 들고 슬프다, 서럽다, 운단 말이냐.
다 이런 일 경계하노라고 여묘 시묘하는 것을.
상제가 부모의 거상 중에 무덤을 돌보지 않고, 몸 편히 집안에서 자고 눕고 한 죄를 하
늘이 아시는 것이지. 징벌하신 것이지.
나는 어머니를 도둑맞고 말았다.
이기채는 이 능멸을 견딜 수 없어 그만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다.
원통해서...어머니.
대성통곡을 하고 만다.
아아, 이런 말을 참람해서 용서도 받을 수 없지만, 그렇지만... 기왕에 어쩔수 없이
투장을 당했다 하더라도, 통혼하는 동제간, 양반의 댁 부인이 산소의 옆구리를 들치고 들어
온 것이라면, 그랬더라면 분노는 하늘을 찌르지만 이토록 처참하게 모욕스럽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세상의 사람들도, 명당도둑 일화로서 전고에도 있었고 지금도 남모르게 일어나
는 사건의 사단으로 수군거리다 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생전에도 남녀가 유별
한데 죽었다고 이치가 바뀌랴, 개결하신 부인의 시신이 아직 땅의 생기운도 삭이지 못했
을 시간에, 신체 형영이 역력한 몸을 범하여 성가시에 달라붙는, 무당아비 홀아비 늙은
뼈 홍술이가 어찌 말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킥킥
깨물어 터지는 웃음 소리가 이기채의 폐를 찌른다.
이기채는 기침을 토한다. 토혈을 하는 것 같다. 얼굴이 거멓게 졸아들며 입술이 멍든 보랏
빛으로 질린다.
옆에 있던 기표가, 가슴을 쥐어잡는 이기채의 손을 얼른 따라 잡으며, 괴로움을 진정시킨다.
이기채는 괜찮다고, 기표의 손을 밀어낸다.
이제 그만 지곡허세요.
너무 과히 우시면 몸이 못 견디십니다.
아아. 어머니의 몸을 훼손해 드리고. 이 몸 견디어서 무엇 할 것이냐. 이이고오, 아이고오오.
이기채의 낯빛이 폐색이 된다.
어머니. ...어머니이. 부정탄 그 자라, 꿈에라도 더 거기에 모시고 싶은 마음 티끌만치
도 없사오나... 아직은 마른몸 되지 못하시어... 진몬 가지고는 면례를 못하시니 어찌하
오리이까... 육탈을 다 하시도록은... 구멍 뚫린 옆구리, 온전한 구천을 이루지 못하시
고, 오욕... 오욕의 혼음을 견디어야만 한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세월이 가기만을, 육탈하시기만을, 살아서 깨끗이 가지신 몸 죽어서 더럽힌 살을, 다
썩히어 말강물로 바꿀 때까지, 썩어서 말강물 되신 그 물로 백골의 흰 뼈를 개완허게 씻
으실 때까지, 어머니, 이 못난 자식을 원망허시고... 용서하지 마시고, 다만 어디로도 가
지 마시고... 부디 제 안에 머무소서. 어머니.
이기채는 졸곡에 맞추어 편지로 조상을 해 온 위문의 글들을 채곡채곡 포개 놓고, 그에
게 답례로 써 둔 답장을 한 장식 챙겨 봉투에 넣고는 피봉에 답소상모성모관좌전 이라,
각 성씨를 따라 쓰면서 시름없는 눈물을 떨구었다.
이제 상제는 요질에 끼워 늘어진 베조각을 거두어 묶고, 무시로 애곡하던 것을 폐지하
여, 아침과 저녁에 비록 슬픈 마음이 일어나도 곡을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잠자리도 바뀌어 지금까지 침고 침괴로 거칠고 험한 짚자리에 흙덩이 베개를 베고
자던 것을 거두어, 침석 침목하기 시작하니, 목침을 베고 자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음식만큼은 여전히 죽미음에다 소금과 장을 찍어 먹는 정도에 그치며, 나물이나
과일은 먹지 않는다.
이른 새벽 미명에 푸른 비늘이 일어나는 찬물로 목욕을 한 이기채는, 집사자가 영좌 앞
에 제사 때 수저를 담은 놋그릇 시접이며 잔반, 그리고 소.과.포.혜를 숨죽이고 진설하는
곁에 파리하게 서 있었다.
졸곡 제를 올리려는 것이다.
상장조차 짚지 않은 그는 자칫 잘못하면 비척 스러질 것만 같이 보였다.
그 옆에서 축을 맡은 기표가 신주의 겉집 독개를 조심스럽게 여는 순간, 이기채는 희고
소슬한 분면의 신주를 향하여 고꾸라질 듯 곡을 터트렸다.
이제는 울지도 못한다. 이제부터는 울면 안되는 것이다. 오늘로 곡을 그쳐야만 한다.
그것이 더욱 서러워 그는 청암부인의 말없는 영연을 우러르며 입곡하였다.
강신과 진찬이며 초헌.아헌.종헌을 올리는 것, 그리고 집사자가 술잔에 첨주하면 희게
봉우리 솟은 메에 공손히 숟가락을 꽂아 삽시하고, 시접에 젖가락을 나란히 맞추어 놓는
소리 토독톡, 두어 번 들리게 하는 유식. 그리고 신명이 제수를 흠향하시는 동안 상주를
비롯하여 상복 입은 유복자들은 제상 앞에서 물러나와 문을 닫고 한식경이나 밖에서
읍하여 기다리는 합문, 또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계문들은 우제 때와 꼭 같은 절차였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절차가 같다고 제의도 같으랴.
이기채는 북받치는 설움에 허리를 꺾고 울면서도 한편으로는 반넋이 상한 사람처럼 뜬
정신으로 헛손을 들어, 삽시했던 숟가락을 뽑으면서 흰 밥티 몇 알을 숙수 숭늉 대접에
담그었다. 삼초반 그는 세번을 그렇게 했다. 마른밥에 목이 메이실 것이니 숭늉을 잡수
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씹지 않고 흠향만 하는 신명이라 하신들 투장의 능욕, 그 절통한 지경을
당하고서야 이 제찬이 어찌 목에 넘어갈 것이며, 물 몇 모금 마신다고 얹힌 밥이 내려갈
것이냐. 한갓 시늉이고 우롱일 뿐.
너는 이제 그만 운다고 절하느냐. 나는... 이제부터 울리로다.
이기채의 가슴팍 명치에 어머니의 울음이 얹힌다.
27. 어느 봄날의 꽃놀이, 화전가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 내 말쌈 들어 보소.
부유 같은 천지간에 초로 같은 인생이라.
세상사를 생각하니 우습고도 고이하다.
저 건너 저 산 우에 높고 잦은 저 무덤은 천고영웅 몇몇이며 절대 가인 그 누군고. 우
리들도 죽어지면 저러이 될 인생인데.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십일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울어라.
일장춘몽 우리 인생 아니 놀고 무엇 하리.
놀음 중에 좋은 것은 화전밖에 또 있는가.
어화 우리 벗님네야, 화전놀이 가자스라.
단오 명절 좋다 해도 꽃이 없어 아니 좋고, 추석 명절 좋다 해도 단풍 들어 낙엽 지니
마음 슬허 아니 좋고, 설 명절이 좋다 하나 낙목한천 잔설 빛이 스산엄동 역력하니.
꽃도 피고 새도 울어 양춘가절 화개춘 삼월이라 삼짇날에, 강남 갔던 제비들이 꽃 따라
서 돌아온가, 제비 날개 훈풍 따라 작년 진 꽃 돌아온가, 천지상봉 새 기운이 만화방창
흐드러진 산천초목 금수강산, 비단 같은 골짜기에 우리들도 꽃이 되어 별유천지 하루놀
음, 화전말고 무엇 있소. 화전놀이 하러 가세.
좌중에 삼사인이 그 말 좋다 반겨 듣고 문장 지어 날짜 잡자, 회물(여럿이 차례로 돌려
보도록 쓴 글)을 적으렬 제, 눈부시게 흰 백지를 은장도 드는 칼로 선듯선듯 버혀 내어,
섬섬옥수 두 손길로 서리서리 펼친 뒤에, 당황모 무심필을 소동파 벼루에다 풍덩실 담그
어서, 왕희지 필법으로 조맹부체를 받아 궁체 글씨 일필휘지 나는 듯이 써서 내니. 여중
군자 여중선비 먹빛에서 꽃이 피네, 제비 소리 들려 오네.
봉한 편지 걷어 들고 여종 불러 분부하되, 이 회문을 가져다가 상하촌 각 댁 전에 차례
로 보낸 후의, 이 날로 노자, 하고 속속히 전하여라.
어와 우리 벗님네들, 화전놀음 하여 보세.
우리 비록 여자라도 일시 놀음 없을손가. 옛사람 뽄을 받아 상춘심사 건절하다. 정읍
태인 불우헌님 상춘곡이 유명하나, 도화 행화 아울러 핀 우리 고장 운치로도 화전가를 짓
고 남아 붓끝 벌써 설레인다.
백년 금고 시집살이 빠져 나기 어렵기로, 꽃은 피어 화산이요, 잎은 피어 청산인데 무
르녹은 봄 날씨에 하루 소풍 못할소냐.
가자스라 가자스라 화전놀이 가자스라.
사시가절 언제던고 삼월 하기 제일이며, 인생 행락 어느 때냐 이팔 청춘 으뜸인데. 소
문 없이 오는 백발 귀밑머리 재촉한다. 서러워라 흰 터럭이 이리 올 줄 내 몰랐네. 무정
세월 원망하며 돌아앉아 울지 말고, 옥수 홍안 고울 적에 꽃놀이를 가고지고.
상하촌 동류들과 각 촌에 있는 벗님, 한 분도 빠짐없이 앞앞으로 청첩하니, 화전 날짜
언제던가 삼월이라 이십육일.
앞집에 새터댁아 뒷집에 동녘골댁, 화전날이 급했도다 하던 일을 속히 해라, 화전놀이
준비하세. 춘삼월 호시절이 아까워서 어이하리. 우리 문중 따님들과 시집오신 며느리들,
연중 일차 어우려져 진단래는 만발한데 춘색 유산 즐겨 보세.
이렇듯이 약속하니 차약중에 하였으되, 오날날 이 놀음에 식물(음식)인들 없을손가. 식
물 배치 어이할꼬 채색 갖춰 하자스라. 너도나도 추렴내어 백미 한 되 돈 한 돈씩, 쌀 모
아 가루 짓고 돈 모아 그릇 살제, 나가셨던(시집 간) 애기씨나 들어오신 새악씨(며느리)
나 너나없이 동참동행 만고 성히 하여 보세.
우리 동류 거동 보소, 이 말 듣고 좋아라고 시부전에 돈을 타고 시모전에 쌀을 타서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각각으로 흥겨워라.
어화 어화 벗님네야, 화전가를 불러 보자, 아니 놀고 무엇 하리.
남녀야 다를망정 놀음조차 다를소냐.
태고천지 오늘까지 여자 노릇 통분한다. 하루 삼시 정지 구녁 주야장천 쌈이라,
세시 풍장 좋다 하나 남자 좋지 여자 좋나. 도처마다 장구 바둑, 봉작마다 연회로다. 자
고천지 성현 문장 그 모두가 남자이며, 우리들은 다 모르나 시대마다 놀음일레. 고금 이
래 사책에도 여자 놀음 바이 없어.
오호와 동류들아 여자 발명 하여 보세.
지체야 다를망정 풍류조차 다를소냐.
만고정절 춘향이도 문장 태백 높아 있고, 사임당에 허난설헌, 열 남자가 부럽잖다. 송
도 삼절 황진이는 무슨 노래 남겼나뇨.
우리가 남자라면 이팔청춘 공부하여 입신양명 이루고서 가문창달 하려니와, 용문에 득
지하고 사군보국 갈력하여, 문호광채 비무할 걸.
시운이 불리하고 가운이 불행하여 우리 무리 여자 되어 타문에 입승하니. 덕문화벌 좋
은 가문 준수가랑 골라 뽑아 백년고락 작배할 제, 구고(시부모님) 은혜 무한자별 낭군님
은 군자시라, 굽이굽이 서려 있는 여신 포한 풀리련가.
개명시대 밝은 세상 여자들도 뜻을 키워 단발맹장 기탄없네, 수륙 만리 넘나들며 재주
대로 노는구나.
그렇지만 우리들은 구가정에 태어난 탓, 규중심처 오륜행실 부모님의 엄한 교훈 대문
밖을 몰라보고, 요조숙녀 단정함과 침선 방적 삼종지도 낱낱으로 배워 익혀, 청춘의 곱던
낭자 부모 슬하 떠날 적에, 봉제사며 접빈객을 소홀히 하지 말라, 당부 말쌈 눈물겹다.
남의 집 흥망성쇠 부녀 얻기 달렸니라. 친정 부모 무슨 죄로 딸 보내고 욕 먹으랴, 여공
만이 부덕이라 학문 아니 가르치니.
가나다라 기역니은 소학 겨우 떼었으나, 동경제대 백일 유학 몽상으로 그려보네. 구라
파 신진여성 참정운동 맹렬한데, 새 소식엔 귀를 막고 귀머거리 삼 년에다 버버리 삼 년
이요, 장님소경 삼 년 세월 가도가도 끝이 없네.
자녀 교육 부모시나 반가 법도 어이하리. 생각사록 여자 된 일 원통코도 분하도다. 오
라버니 남자라고 경성 동경 보내 주고, 나는 어이 여자인가 남의 집에 보내 주니. 원망할
곳 그지없어 국어 산술 한문자를 밤이면은 잠을 줄여 여가 보아 자습할 때, 재주야 모자
랄까 일취월장 하였다네.
서방님이 부쳐 주신 신학문책 강의록도 변한 세상 문견이나 개명에는 큰 몫이라. 졸업
장은 없다마는 부러울 것 전혀 없다.
우리 비록 여자이나 전정이 만리 같고 소임 복록 무량하다. 주부 없는 가정 없고 어미
없는 자식 없네. 수신제가 가화만사 무궁무궁 우리 손에, 충효동량 자녀양육 무진무진 우
리 손에.
어와아 벗님들아, 이런 탄식 다 버리고 좋은 말쌈 빼어 하세.
시유모춘 청명가절, 기다리던 오늘 오니 침선 방적 밀쳐 두고 오색단장 차려 보자. 남
자 놀음 열 가지에 여자 놀음 없다 하나, 널뛰기에 그네뛰기 다리밟기 있거니와, 화장하
는 즐거움은 남모르는 기쁨이라.
짙도 옅도 안하면서 은은 향기 풍겨나는 얼굴이며 몸 매무새 아리잠직 꾸밀 적에. 월태
화용 고운 얼굴 분세수로 정히 하고, 아미를 정돈할 제 반달 같이 뽑아 내어, 선제(조선
물건)로 덧분에다 약간 발라 보기 좋게. 얌전할사 두 눈썹은 세붓으로 그렸는가, 양 볼에
는 연지 분홍 살구꽃이 피어나 듯. 감태(김) 같은 검은 머리 애밀동박 기름으로 달빛같이
발라서나, 반달모양 월소 빗에 흑단물결 빗어 낸 뒤, 은봉채 금봉채, 국화잠 매화잠을 느
직하게 질렀으니. 월궁항아 예 비친다, 왕소군의 맵시로다. 처녀도 곱다마는 이 모습에
견주리요.
어느 댁은 이렇다고 이죽비죽 하는 말이, 우리 액씨(애기씨) 거동보소. 나도 남의 딸이
건만 시누 놀음 너무 한다. 그리 못난 지 얼굴에 분 바른들 인물날가 백종이칠 한 것 같
다. 단장하고 남은 분은 내 단장을 할까 봐서 야속하게 감추더라, 치장해도 설움이라.
아이 아이 그뿐인가,내 설움 좀 들어 보제.
시어머님 섬길 적에 친정 부모 윗머리로 순응복종 공손하나 그 공덕은 어디 가고, 포폄
편애 목메이는 시어머님 거동 볼래.
명(미영:목화)을 따서 탐진 송이 딸자식만 주는구나. 서리 맞은 뿔덕명(색깔이나 질이
나쁜 목화 송이)은 내 천신이 될 수밖에. 여름 삼을 볼작시면 살진 삼은 골라내어 우리
액씨 먼저 주고, 벌레 먹은 모기다리(잘못 자란 삼) 하릴없는 내 차질세.
알강달강 길쌈할 제 우리 액씨 방적 보소, 그 좋은 삼 차지하고 베 솜씨가 워낙 있어
얼금벌금 석새 길쌈, 누가 알까 겁이 난다. 며느리는 어떠한가, 뿔덕명과 모기다리 고생
고생 골라내어 적은 새는 열두새요. 많은 새는 보름새니. 톡톡하고 말끔하게 춘추의복 장
만하여 의걸이장 비좁더라.
화전날을 당하여서 액씨 시누 거동 보소, 면상 검은 그 얼굴에 의복 치장 하려 하니 석
새밖에 더 있는가. 심술나서 부은 딸이 안쓰러워 못 견딘 듯, 시어머님 참견하여 꼬챙이
로 하는 말쌈, 네 형한테 얻어 입고 화전놀이 갔다 온나.
며느리고 오동 장농 양문짝을 열어 놓고 의복들을 뒤적이며 이것 저것 대어 볼 때, 적
삼 들고 하는 말이 이것도 모기다리, 보름새 치마 들고 이것도 뿔덕명. 색색깔로 물들인
놈 마전하여 흰 빛인 놈, 이 옷 저 옷 만질 적에 옷구경도 찬란하고 바느질도 놀랍도다.
새형 새형 옷 하나 주소. 우리 액씨 달려들어, 내 입으려 해 둔 것만 여우같이 추려가
네, 바로 바로 저 옷이네. 노랑 저구리 가지색 치마 언듯번듯 숨었다가 나타났다, 사람
속에 뛰어나는 저 빛깔이 보이는가.
애돌와서 발꽁치 찧었다는 며느리댁, 금년에는 그 액씨의 애기씨 시누 놀음 거구로 듣
자오니 코웃음이 절로 나서, 여소 여소 애기씨요, 그 설움 속 내가 아니 나랑같이 손을
잡고 화전놀이 가쟀다나.
출가하니 알겠던가, 이 내 사정 알겠던가, 사친지회 그리운 정 근친 와서 풀고 가소.
화전놀이 가거들랑 화전가를 지어 불러, 시집살이 고달픔과 남정네들 방약무인 허심탄회
그려 보고, 딸네들은 새색들을 아낌없이 놀려 주며 새댁들은 딸네들을 아낌없이 놀려 주
어, 풍자마당 웃음 소리 흥에 겨워 못 이기게 한 바탕 봄꽃놀이 화전하러 가쟀다나.
네 한 일이 장하구나 도량 있고 너그럽다, 어서 가자 화전 가자.
하루 해가 짧아시니 날 기다릴 광음 아니다.
깊이깊이 접어 넣은 농옷 찾아 털어 입고, 저 동창을 열치어서 좌우 동산 살펴보니, 건
듯 부는 봄바람에 춘삼월 화풀 소식. 앞냇가 범나비는 꽃을 찾아 춤을 추고 황금새야 꾀
고리는 세우간에 오락가락. 어젯날에 불던 삭풍 오늘날에 훈풍 되니, 앞뒷산에 푸른 초목
가지 가지 봄빛인저.
가세 가세 화전 가세, 동구 밖에 모이시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사진을 이루면서 이 댁 저 댁 액씨 따님 우리 문중 며느님들, 근
친 오신 부인이며 동류 벗님 모여든다. 누구누구 모였던고, 두루두루 친면이라. 십오십육
처녀들과 이십삼십 새댁들이 노댁 또한 모시고서, 무지개 구름인가 아릿다운 자태 자랑
은근하고 화려하네, 선녀라서 따라오랴.
생초 상의 매만져서 기름같이 곱게곱게, 양태무늬 수갑사에 금사로 수를 놓아 수복다남
박아달고, 다 각지 종대로 오색치장 하였구나.
백능 비단 겹저구리 자주 비단 깃을 달고 남색 비단 끝동에다 반호장을 물렸으며, 홍능
치마 길게 말아 백능으로 말기 달고, 삼승 버선 겹버선을 마치맞게 기워 신어, 앙징할사
어여쁘다 배꽃 같은 두 발길을, 푸른 비단 운혜 당혜 검은 공단 속을 받쳐 담숙담숙 신었
으니, 그 아니 고우리요, 이 댁이 누구신가.
또 한 댁네 치장 보소. 시절 알고 때 맞추어 초록으로 물들여서 푸새다듬 맞게 하야 제
색 고름 늘이우고, 한산세저 가는 모시 진솔 내어 꾸밀 적에 주름은 좁게 잡고 말기는 넓
게 달아, 오만 누비 잔줄 바지 발등 우에 남상남상, 삼승 버선 외씨발에 아조 담쏙 신었
으며.
어떤 댁네 차림이냐, 송화색의 겹저구리 흑자주색 깃을 기워 흰빛으로 동정 달고, 홍갑
사 속치마에 청갑사 겉치마를 몸 맵시 가득 내어 보기 좋게 덮어 입고, 알송달송 꽃당혜
는 운무간에 노니는 듯.
이 모습을 어떠하오, 아른아른 유문갑사 순색으로 깃을 달아 바람 받아 나부끼는 제 색
으로 고름 매며, 월광단 다홍치마 아홉폭 말아 입고 얼쑹덜쑹 호랑당혜 두 발길에 넌즛
신네.
그 남은 온갖 치장 다 각각 기록 못해, 물색도 찬란하다. 대강 짐작 하오소셔.
녹두 비단 겹저구리 밀화 단초 달았으며, 물명주 속옷에다 시금치색 진녹치마, 산호 진
주 좋은 구슬 옥패 경경 앞에 차고, 은장도 빛난 칼을 치마끈에 나붓 차니. 인물도 좋을
시고 장하고도 어엿브다.
오색창연 만색당혜 신체 따라 격에 맞춰 떨쳐입고 나설 적에, 난잡하게 안하고도 상품
의복 가려 내어 옥양목 차렵버선 달갈같이 굴려 짓고, 백설 백운 흰 신에다 일신을 고이
담아, 갑사 치마 녹의 홍상 첫걸음에 썩 나서니 꽃도 같고 달도 같네, 우리 모두 놀아 보
세, 어화 둥둥 놀아 보세.
이 말 저 말 다 버리고 화전 감독 누가 하리.
우리 문중 종갓댁에 새손부 대실댁께 이 좌중을 이끌어갈 화전 감독 맡겨 보세. 신구식
이 훌륭하고 어백사가 능통하여 못할 일이 없으리라.
때는 바로 상춘이요, 놀기 좋은 화신인데, 시호시호 부재래라 아니 놀고 무엇 하리.
일기도 명랑하고 풍광은 더욱 맑아, 흉금이 쾌락하고 가슴이 도도하다. 어젯밤에 부던
바람 도리춘광 걷어 가면 봄빛이 더 없는 줄 낸들 어찌 알았으리. 양류간 천만사로 가는
춘풍 잡아매랴, 편편각화 꽃잎 모아 봄 못 가게 성을 쌓랴. 도화 유수 흘러가니 물 우에
도 봄이 간다.
그 일일랑 한탄 말고 시비 불러 길 잡어라, 어디로 가잔 말가. 여러 동류 뒤를 따라 손
님 끌고 옷깃 부여 정다웁게 올라가세, 새 닢 나고 새 꽃 피는 모든 초야 다시 보세.
앞산으로 올라갈까 뒷산으로 올라갈까, 화전 장소 정할 적에 공론들이 분분하다.
이름나고 경치 좋은 명승 고적 찾자 하면 소상팔경 어떠하리. 중국이라 호남성에 동정
호 남쪽 부근, 소상야우, 동정추월, 원포귀범, 평사낙안, 황릉애원, 어촌낙조, 강천모설,
산시청람, 여덟 곳의 절경들을 두루두루 둘러봄이 이 봄날에 마땅한가.
중원도 좋지마는 우리나라 더욱 좋지. 강원도 금강산 동해안의 관동팔경, 평생에 원하
요되 단 한 번만 보았으면, 총석정, 삼일포, 청간정, 낙산사,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에
월송정.
그 소망도 옳지마는 우리 고을 남원에도 팔경 어찌 없으리오. 교룡낙조, 축천모설, 금
암어화, 비정낙안, 선원모종, 광한추월, 원천폭포, 순강귀범, 여기에다 또 하나는 만복귀
승 있다더라.
마오 마오 그리 마오. 팔경 산수 좋다 해도 우리 놀음 부당하고, 도리원이 좋다 해도
우리 놀음 부당한데. 노적봉 호성암도 여기서 머잖허고, 벼슬봉 꽃골짜기 지척이면 흐드
러져, 재공 뒷골 절경에는 작년 삼월 작별한 꽃 금년 삼월 기다리오.
가세 가세 그리고 가세. 이곳 저곳 다 버리고, 생장지 매안방의 명승지를 찾아가세. 소
백산맥 곧은 줄기 한 가닥을 받아 안아 동으로는 계룡산, 서쪽에는 노적봉, 남면에는 밤
재 율치 어깨 겯고 우뚝하며, 물빛 맑은 매안천과 서도천 율쳔 내가 서류하다 합수하는
삼계석문 빼어남이 그 어디만 못 하리오.
유서 깊은 노유재 아름드리 노거수는 천삼백 년 은행나무, 경건하게 찾아야지 놀면서는
불경하고, 남원 읍내 광한루나 관촌마을 사선대는 오늘 갔다 오늘 오는 하루 길로 모자라
니, 산도 좋고 물도 좋은 삼계석문 찾아가자 우리 고장 자랑일레.
어질고도 맑은 물결 양양하온 비단 계류, 바위 안고 모래 적셔 천하 절경 예 있도다.
우리 선조 대대손손 문인지사 배양할 제 충신.열사.효지.효부 끊임없이 이어나고, 명현
달사 이름 높아 나라고을 일컬으는, 우리 동네 독서 소리 오늘 하루 쉬는구나. 저 물소리
은은한 게 글 소리와 흡사하다.
넓은 반석 꽃그늘에 마치맞게 숨어 있고, 푸른 물빛 맑은 모래 도화 떠서 흐르도다. 좌
우경개 둘어보니 꽃밭 조선 예 아닌가.
하루 전에 모은 떡쌀 새벽부터 찧어지고, 번철 위에 바를 기름 두루미로 이고 오는 여
종 불러 분부하되, 너희들은 먼저 가서 솥을 걸고 불붙여라. 길라잡이 하려무나.
이 마을 젊은 도령 공부하는 월록서당 오늘 종일 하루 빌려, 넓은 대청 앞뒷문을 활짝
열고 달아매니, 문전옥토 싱그럽고 굽이치는 물결 이랑, 산간벽촌 앞 뒷간에 두견화가 불
이 난 듯.
고직이는 쫓아나와 황송해서 조아리며 땔나무도 갖다 주고 솥뚜껑도 걸어 줄 제, 시비
는 꽃을 따고 노파는 불 넣는다.
옛글에도 일렀으니 무산 놀음 하는데도 음식 없이 어이하리. 악약루도 식후 구경, 풍류
남자 모인 자리 주륙진찬 제격이요, 유한정정 여자 놀음 꽃떡이라 제격이지.
매안 이씨 출가 따님 오랜만에 친정 와서, 삼삼오오 작반하야 모여드니 한 방이요, 악
수상봉 즐긴 후에 쌓인 회포 털어놓고, 어린 딸 네 산에 보내 두견화를 꺾게 하니, 아롱
명주 겹저구리 자주 고름 팔랑팔랑. 잇시물감 다홍 치마 꽃과 섞어 바꿔 볼 듯. 온 봉우
리 진달래꽃 어린 품에 다 안겼다. 아이마다 한 아름씩 꺾어 온 꽃 진단래야, 화심을랑
고이 두고 화판만을 곱게 따소. 차노치떡 구울 적에 보기 좋게 얹어 붙여, 난들난들 익거
드면 맛이 있게 노나 먹세.
이만한 좌석에 잔치를 하자 할 때 무엇이 부족한고. 한량이 없지마는 비상시국 이 시기
에 벌리기가 당치 않아, 소 한 마리 돈 두 마리 거멍굴에 분부하고, 건청어에 대북어며
메추리도 장만하여 술안주로 챙겼으니. 소주 닷 말 약주 닷 말 이것이야 안할손가.
어와 우리 벗님들아, 우리 비록 여자라도 성상의 은덕으로 덕문중에 생겨나서, 아름답
게 노닐면서 꽃가지를 꺾어 드니. 꽃 속에 잠든 나비 분날개를 놀라 펴네. 솥다리 높이
걸고 흰 가루 맑은 기름 두견에 졸던 나비 춘몽을 다 깨치네. 잠깨 나비 꿈을 꾸듯 두 날
개를 몽유하며 푸른 연기 피해 가네.
장자의 호접몽이 남의 얘기 아니로다.
저 나비가 나로더냐, 내 이 몸이 나빌러냐. 나비는 꿈을 꾸어 사리반댁 되어 있고, 사
리반댁 꿈을 꾸어 저 나비가 되었는가.
따라가자 따라가자, 나비 따라 날아가자, 전에 한번 본 듯하면 전생 일이 분명탄데, 저
나비는 누구이며 이 꽃들은 누구인가.
꽃을 꺾어 손에 들고 꽃노래를 지어 볼까.
하늘에는 하늘지기 강가에는 수련화, 길가에는 노변화요, 내 마음엔 심화꽃. 이 등에도
꽃천지요, 저 등에도 꽃천지라. 예쁜 입에 꽃을 물고 꽃노래가 절로 난다.
만첩 산중 두견화는 이 산 저 산 님 부르고, 이 골 저 골 도화꽃은 도원결의 재촉하네.
서러울사 할미꽃은 미리 피어 잦아지고, 소복단장 찔레꽃은 누구 몽상 입었는지. 명사십
리 해당화야 붉은 빛이 애절하다.
대실댁아 새터댁아 너의 꽃은 무엇인가.
연분홍빛 살구꽃은 강실액씨 꽃이고요, 달고 연한 참배 열릴 청초여염 이화꽃은 그 누
구의 꽃이런가. 서리 시린 오상고절 홀로 피는 국화꽃은 절개 있다 대실댁 우리 종부 꽃
이로다. 자운영은 지고 없네, 새터댁은 부용꽃.
꼿꼿하다 개화꽃은 열녀과부 꽃인데요, 알긋발긋 모과꽃은 샌둥액씨 꽃이고요, 포리족
족 가지꽃은 새암 많은 애기씨꽃, 쪼박쪼박 싸리꽃은 심술액씨 꽃이네요. 풍신스런 패랭
이꽃 울기 잘한 애기씨꽃, 달랑거린 배추꽃은 촐랑액씨 꽃이래요.
꽃을 보고 사람 보면 어찌 그리 닮았는지. 조화옹이 신기하다.
너도 나도 한 마디씩 꽃 보면서 흉도 보고.
귀품 있고 너그러워 휘황하온 목련꽃은 뉘 꽃이라 하려는가, 종부댁의 꽃이로다. 크고
넓은 천지화는 대장부의 꽃일러라. 비단 같은 난초꽃은 살림 잘 산 동서꽃, 빛깔 좋은 진
달래는 아이 동서 꽃이지야. 남원읍의 옥중화는 성춘향의 꽃 아닌가. 이몽룡의 장원 급제
꿈에 그린 어사화라.
이 꽃 저 꽃 화답하여 태평화가 내 꽃이네.
우리 여러 동류들아, 태평으로 화전하세.
화전놀이 하려거든 꽃을 많이 따서 오소.
분홍치마 벌려 들고 꽃을 따는 저 선녀야, 이 산에도 꽃을 따고 저 산에도 꽃을 따니,
꽃놀이도 좋건마는 꽃 따기가 아깝도다.
우리 액씨 거동 보소, 꽃 따다가 정신 잃고 낭군 생각 하느라고 산천만을 바라보네. 서
울 가신 그 님일랑 명년 삼월 오실란가.
다른 시누 거동 보소, 꽃은 따지 아니하고 한자리에 모여 앉아 황서방님 낭군 자랑 하
느라고, 우리 가도 모르고서 희희낙락 만면홍소.
얽은 액씨 거동 보소, 꽃 따면서 하는 말이 나도 어서 성인하야 낭군님이 생기시라. 꽃
잡은 손 모으더니 합장 기도 시늉한다.
며느님네 들어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제.
낭군 자랑 너무 마오, 우리들도 낭군 있소.
얼금숨숨 김서방댁, 자랑할 일 또 하나 있소.
우리 낭군 한량 낭군, 활을 잘 쏴 한량인가 돈을 잘 써 한량인가, 놀음 그리 잘하야서
서로 불러 한량인가. 어떤 양반 볼작시면 글공부를 많이 하고 좋은 말에 안장하여 과거
보러 가건마는, 운수가 비색하여 과거를 못 본다고(나라가 망했다고) 자기조차 따라 망해
기생첩에 한량일세.
어떤 양반 팔짜 좋아 남이 못한 급제하고, 금관조복 좋은 옷에 옥관자와 금관자를 망건
편자 달아 쓰고, 나주 갈까 경주 갈까 암행어사 출도할까. 이런 세상 살았으면 죽어서도
여한 없지.
다른 액씨 한탄한다.
우리 낭군 가난하야 괭이 들고 땅을 파며 무명옷을 지어 입고 짚신을랑 신었지만, 유식
개명 많이 했고 글로 보면 대학이요, 일을 하니 농부로다, 돈 없으니 허사로다. 성씨 가
문 있다마는 그 누구나 알아주리.
저 시누님 고개 들어 절레절레 흔들고는, 세상이 수선스러 망둥이가 날뛴단다. 어떤 남
자 볼작시면 속 개명은 아니하고 겉 개명만 들었더래.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지 양복 쪽
빼입고, 소가죽 구두에다 금시계줄 늘이고서 밝은 눈에 안경 쓰고 저 잘난 체하건마는,
일자무식 저 양반아, 놀랍고도 괴상하나, 알고 보면 욕이로다.
아소 아소 우리 동류, 십 리 평야 앞에 놓고 녹죽장송 그늘 속에 경치도 좋거니와 흥취
도 만장한데, 남의 말은 그만두고 꽃들이나 따러 가세, 화전꽃을 따러 가세.
화전놀이 꽃싸움에 누가 지나 내기 하세. 이기며는 떡 한 도래 지고 나면 절 하기라.
동부 서부 두 패 모음 웃음 속에 내기로다. 꽃 속 싸움 놀음터에 호기 있게 다가앉아, 화
심 뽑아 고이 걸어 묘리 잇게 당겨 보세.
이기는 쪽 춤을 추고 지는 쪽이 노래하며, 산간벽촌 꽃마을의 앞뒷산도 기뻐하고, 벼슬
봉 및 송림 사이 두루미도 춤을 추리.
어화 춘풍 좋을씨고, 오늘 우리 화전이라.
동부편에 수월 숙주 다섯 명을 이겼도다. 박수 갈채 환호 속에 둔덕 형주 맞붙더니, 에
헤 좋다 장쾌로다 서부 쪽의 서광이요. 사람마다 지고 이겨 승패 가름 어려웨라. 어느 편
이 개선할지 누가 미리 짐작할꼬.
한참 동안 백병전에 동부편의 승리로다. 박장대소 승전곡에 앞뒷골이 진동할세, 어화
우리 좋을씨고 이긴 편이 춤을 덩실.
패한 편은 앉은 채로 목을 뽑아 노래하네. 풍정 있는 지당댁은 새댁 중에 호걸이요. 율
잘하는 원촌 부녀 노봉딸네 대표로다.
어화 춘풍 좋을씨고, 오늘 우리 화전이라.
밤낮으로 짜던 베틀 오늘이라 나랑 쉬고, 달밤에도 돌던 물레 오늘 낮에 잠을 자네. 쇠
털같이 많은 날에 한가한 날 없었으니. 오늘 하루 잠시 쉰들 나무랄 이 그 누구랴.
백설 같은 분가루를 말말이 내어 놓고, 조청 같은 참기름을 병병이 부어 내어, 전후 산
의 두견화를 아름마다 따 담아서, 시비 시켜 굽는구나. 노치 꽃떡 부치누나.
우리네 배운 솜씨, 꽃 따서 적은 구워 손수 한번 놀아 보세. 멥쌀 한 섬 찹쌀 한 섬 순
식간에 안칠 적에, 팥소 넣고 대추실백 꽃술 박아 꽃잎 얹고 모양 낸 후 열두 아궁 솥을
걸고 기름 닷 되 꿀 닷 되에 지글벅적 구워 내니, 향내도 나려니와 풍미가 절가하다.
이러한 좋은 음식 나만 어미 억을 건가. 상춘가절 당하여서 사향지회 간절하다. 나의
고향 사리반땅 저 하늘 아래건만, 눈에 익은 풍광 둔 채 꼬불꼬불 가마 타고 저 산길을
넘어왔네. 흐르는 물 거슬러서 다시 가지 못하듯이, 한번 온 길 되짚어서 옛날로는 못가
리라. 부모님도 내 맘 같아 사리반의 우리 부모 어린 아해 데리고서 오죽이나 심심할까.
꿈인들 오죽하며 심정인들 온전하리. 가여운 여자 인생 고향 산천 뒤로 하고, 험한 객지
먼먼 곳에 무엇 하러 여기 와서 층층시하 독수공방 외로이 사려는고.
아서라, 여자 행실 이것이 분명하다. 누구를 탓하리요.
어화지야 반갑고야, 화전 목판 들어오네.
노골노골 차노치떡 살짝 익은 꽃냄새라. 노릿노릿 익은 화전 골라 내어 따로 담아, 장
유유서 잊지 말고 고루고루 노나 주소. 실컷 먹고 남은 떡은 이긴 편에 상을 주게, 소두
뱅이(솥뚜껑) 맡은 사람 너무 세도 하지 마소.
어화 춘풍 좋은 씨고, 오늘 우리 화전이라.
시집갔다 근친 온 딸 허기병을 고쳐가고, 시집살이 하는 새댁 껄덕껄덕 체할세라. 중늙
은이 부녀들은 상기 아니 못 먹었네.
삼계석문 냇물 앞에 일자로 늘어앉아 종일토록 구운 떡을 두루두루 노눌 적에, 산채를
곁들이어 술안주가 나오누나, 꽃 꺾어 산 놓고 우리 한 잔 먹세그려.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홍조는 면면하고 취정이 도도하여, 봄빛이 물든 골을 좌우로 둘러 보니 처처이 기봉이
요, 앉고 선 것 기암바위, 춘색도 좋을씨고 심회를 둘 데 없다. 날리는 꽃 분분설인데 가
지 우에 우는 새야 이내 심사 모르리라. 꽃잎 진 가슴 자리, 눈 내린 듯 썬득코야.
만리 청천 백운간에 두리둥실 두 발 떠서, 우화 신선 되엇는가 꽃구름을 타고 놀며, 견
우직녀 은하수냐, 굽어보는 저 냇물에 은빛비늘 고기 뛰네.
가소롭다 가소롭다 남자 놀음 가소롭다. 호연지기 나만 하랴. 신을 벗어 뒤에 차고 버
선 벗어 앞에 차고, 다리 추고 물에 서서 이 돌 저 돌 둘씨면서, 고기 하나 잡아 들고 이
것 보라 으쓱이네.
청류변에 시냇물가 나무 주워 불 해 놓고, 탁주 수 배 받은 후에 너도 나도 잡은 고기,
하나 둘씩 구워 내어 소금 없이 안주하고, 잘 놀았다, 말을 하며 담뱃대 길게 물고 뒷짐
지고 뒤로 걸어, 남자 노릇 흉내내니 혼자 보기 아깝도다. 만장 폭소 웃음 소리 천만 시
름 씻어간다. 남자 놀음 좋다 하나 여자 놀음 따를손가.
여러 시누 여러 액씨, 우리 놀음 구경하소.
시집살이 매서워라, 춤 한번도 못 추었지.
우리 춤을 볼작시면 서리 내린 가을날에 홀로 피는 국화주며, 오월단오 앵두주며, 꽃노
래 화전주며, 이것 저것 가지각색 취하도록 먹어 놓고, 안주까지 볼작시면 매화도화 열매
따서 매실 복송 담가 들고 참배 생강 익힌 술은 향기 좋고 이름 높은 이강주 그 아닌가.
앵화행화 열매 따서 앵도 살구 그 아닌가, 꽃열매 꽃안주를 먹고 나니 꽃마음 만발하여
춤을 춰도 꽃춤이요, 노래해도 꽃노래라. 온 마음이 꽃과 같소. 내가 그만 꽃이 됐소.
명년 삼월 오거들랑 우리 놀음 뽄을 보소.
어화 세상 벗님들아, 지화자 좋을씨고.
산유화를 노래하자 유산가를 노래하자.
글 잘 짓는 사람한테 어사화를 꽂아 주고, 장원 급제 환호하며 박수갈채 찬사로다.
노소동락 오늘 하루 시집살이 잊은 하루, 내기 붙여 이긴 떡을 머리 위에 고이 얹고,
못다 먹은 화전떡은 긴 수건에 꼭꼭 싸고, 둥실둥실 엉덩춤에 사람마다 요절이요. 하루
종일 먹고 놀고 일어서며 하는 말이, 삼 년 묵은 현기증이 화전으로 골을 막고, 시집살이
썩은 속이 오늘이라 거풍했네.
어화 춘풍 좋을씨고, 오늘 우리 화전이라.
별유천지 비인간이 이외에도 또 있는가.
이번 구경 다 못하여 서산에는 해가 진다.
애달프다 광음이여, 대하 장강 흐르는 물 어느 누가 막아 내며, 서산에 지는 해를 어느
벗님 붙들손가. 일락서산 해가 지고 동녘에는 달 뜨는 것, 일월의 순리로다.
화전놀이 아깝구나, 저 해가 기울도록 등산임수 하여 보자.
백사청송 저문 날에 도량폭포 구경하고, 석경을 밟으오며 학정봉 올라서니, 원근에 푸
른 산이 병풍같이 둘렀는데, 이곳이 우리 고장, 죽어서도 묻힐 곳에, 오호라 우리 문호
사백 년을 울렸구나. 명철하신 조상 넋을 길이 기려 흠모하리.
앞으로 오천만 년 새 세상이 될 것이니, 출가하신 우리 액씨 남자들이 되었으면 신학문
에 힘을 써서, 육대주에 팔을 둘러 당할 사람 없을 것을, 여자 몸이 되었으니 문호에 쓸
곳 있나. 다음날에 번영함이 새댁네에 있사오니 자녀 훈육 잘하여서 가르침에 힘을 쓰소.
부조 내력 있사오니 외가 낫다 못쓸손가. 부디부디 조심하고 전심전력 기울이소.
여보소, 동류들아. 한양 동경 어디메뇨.
동서로 바라보니 운연이 아득하다. 학창의 우리 군자 평안히 계시던가. 오작교 구름에
도 석양이 비쳤구나.
앞뒤 서서 하산하며, 어서 가자 날 저문다. 산수를 이별하네.
못다 놀고 가는 심사 그 어이타 채워 보리.
돌바우야 잘 있거라, 앞냇물도 잘 있거라. 우리 간다 설워 말고 부디 평안 잘 있거라.
명년 삼월 꽃 피거든 우리 모두 다시 오마.
종일토록 놀았건만 꽃들과 작별할 때 섭섭하기 그지없네.
기화요초 풀잎들은 이별하기 서런 듯이 남실남실 흔드는 양, 사람 같아 유정하다. 내
마음을 두고 간다.
정회는 미진한데 그 어디로 가잔 말고.
가세 가세 어서 가세, 화전떡을 이고 가세. 부모님이 맛보시고 어린 자식 반겨할 떡,
화전 놀음 무늬 놓아 꽃 핀 떡을 드려 보세.
오늘 여기 헤어지면 어느 때나 만날손가. 환갑잔치 만날손가 혼인잔치 만날손가. 명년
삼월 오거들랑 화전 갈 때 만날손가. 오월 단오 추천시에 그네 뛰며 만나 보세. 팔월이라
추석날에 달구경도 하러 가세. 춘초는 연년록이요, 왕손은 귀불귀나, 얽은 액씨 시집갈
때 부디 부디 놀러 오소.
낙조 한 점 넘어갈 때 벗님들도 작별하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손 흔들며 돌아볼 때, 아연하기 할말 없고 서운하기 미어진다.
돌아오며 생각하니 꿈꾸다가 깬 것 같고 호접몽의 청산나비 간 곳 몰라 애석해라. 사람
마을 돌아오니 모색은 적적한데, 아랫몰에 두 줄 버들 저녁 연기이었구나. 멱멱하는 기적
소리 적막을 돋우나니.
정거장 앞 돌아설 때 의외로 족친어른 누구 마중 오셨던가, 우리 무리 행장 보고, 이제
오냐, 웃으신다.
이제 가네, 나는 가네, 시댁으로 가는 액씨, 하직코자 옷 차린다.
배웅하는 늙은이들 마당으로 내려서니, 동네 새댁 할 수 없이 무름 쓰고 나서는데, 자
주 무름 귀귀마다 진주 옥판 달랑달랑. 분홍 당혜 옥색 당혜 뾰죽뾰죽 뵐 듯 말 듯. 하루
쉬고 다시 틀에 굴레 쓰고 가는 기상, 우리들도 당해야 할 피치 못할 운명이며, 양춘가절
낙화유수 우리 딸네 정경이라.
헛브도다 초로인생, 나비 날개 팔랑하는 그 한순간 꿈이러니.
어느 때나 또 모일꼬. 만단정회 어이하랴. 기약 못할 모듬이라 눈물 모아 먹을 갈고,
펼쳐 놓은 긴 수건에 적어 보니 화전가라.
한양성 남 천리 밖에 우리 이씨 은거함을 세상이야 알든 말든, 능문능필 아니라도 매안
이의 며느리 사리반은 붓을 들어 이 몇 자를 지었으니, 부디 돌려 읽으시고, 이날 소회
웃으소서.
사리반댁은 만지장서 두루마리에 적은 이 화전가를 방안 가득 펼쳐 놓은 채, 한동안 그
대로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삼계석문으로 매안 이씨 며느리와 혼인하지 않은 따님들인 부녀자들과, 출가하여 타문
으로 시집간 애기씨들이 이날만은 친정으로 와서 모두 한데 모이어 꽃 핀 골로 놀러 갔을
때, 백일장을 하여 장원으로 뽑힌 사리반댁은 어사화처럼 접시꽃 대신 진달래꽃 머리에
다 상으로 받아 꽂았었다.
그 흥을 못 이기어, 밤이면 한 소절씩 파적삼아 빈 방에서 조금조금 적어 본 것이 바로
이 가사였다.
시절은 흉악해도, 그럴수록 하루 놀이를 누구한테인가 앗기지 않으려고, 예 하던 풍습
대로 화전을 하러 갔던 그날이 눈에 삼삼하다.
일본 경찰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선 사람들이 떼로 모이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
지만, 매안의 화전놀이만큼은 어쩌지 못하였다.
마을의 오랜 전통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 화전놀이가 끊긴 것이다. 집집마다 공출로 싸래기 한 톨 남
아 나기 어려운 탓이었고, 시절은 하루가 다르게 참혹해져, 꽃 피고 새운다고 돌아볼 겨
를이 없어진 탓이었다.
사리반댁은 아직도 먹빛이 임리한 가사 두루마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먹빛은 조금
도 변함없는데, 화전놀이 갔었던 기억은 어찌 이리 까마득한 옛일처럼 여겨지는 것일까.
마치 다시 못 올 시간의 그림자인양 봄꽃들은 창 밖에 저토록 피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