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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권 (6)

카지모도 2025. 4. 10.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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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혈이 되도록 흥이 난 사람들의 얼굴은 어느결에 알 수 없는 광기로 달아

올라, 징 치고 꽹과리 치며 열두 발 상모가 짙푸른 허공을 하이얀 곡선으

로 휘어감을 때, 얼쑤, 얼쑤, 농악대를 따라서 어깨춤을 추었다. 놀이만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다시없었다. 처음에는 운동을 하는 사람

과 보는 사람의 구분이 있었으나, 이윽고 어느 틈엔가 이들은 뒤섞이어 주

객이 구분되지 않다가, 드디어는 모두 다 얼리어서 얼싸안고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기마전을 지나 줄다리기를 할 때는 온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도 빠

지지 않고 달려들었다. 염소가 상으로 걸린 씨름판도 재미있었지만 이 줄

다리기에 비하랴. 천하에 잡아당기지 못할 것이 없을 것만 같은 힘이 용솟

음쳐 뻗치니, '역발산기개세'라 하였던 항우장사도 이에서 더 큰 힘을 자랑

할 수는 없으리라. 산을 뽑아 옮길 만한 기세로 천지를 울리는 고함이 사

무친다.

"왜놈들 뿌리를 뽑자."

"뿌리를 뽑아서 내던지자."

어영차, 영차.

얼씨구, 절씨구.

차마 못하는 말을 대신해서 줄을 당기는 손이 부르튼다. 손바닥은 씻기어

쓰라려도 좋았다. 사람들은 줄을 놓지 않는다. 나뒹굴어도 놓지 않는다. 와

아아. 질기게 한 덩어리가 된다.

비명처럼 파고드는 아픔과 미묘한 흥분. 그것은 손아귀에 뿌듯한 동아줄을

타고, 강호의 가슴으로 흘러들어 혈관을 후비며 휘저었다. 어린아해와 머슴

애, 계집애, 그리고 못생긴 아낙이나 거무튀튀한 농군 남정네, 저편쪽 중간

너머 곱상한 부인이며 나이 많은 영감님에 이 빠진 잇몸을 연신 옴질이는

할머니도 줄다리기에는 낄 수가 있어서, 맨 꽁지에서 줄만 잡아도 되거늘,

하물며 피 끓는 젊은이들이랴. 청년들은 앞에서 퉁방울처럼 눈이 튀어나오

리만큼 부릅뜨고 불끈 힘을 썼다. 강호는 그 줄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모

조리 한 몸을 이룬 한 핏줄인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울컥 속에서 치미

는 뜨거운 울음을 삼켰다.

이 사람들 마음도 지금 다들 나 같으리. 꼭, 나 같으리.

강호는 목을 놓아 울고 싶었다.

어쩌다가 제 나라를 잃어버리고, 죄도 없이 제 이름도 잃어버리고, 뼈빠지

게 지은 농사 두엄까지 다 빼앗기고, 청천 하늘 아래 동아줄 하나에 매달

리어 목이 아프게 엉엉, 영차, 영차, 울음같이 창자를 토하며 웃는 백성들.

그것은 고등보통학교 학생들끼리 하는 운동회 줄다리기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그때의 그 꿰뚫리는 듯한, 서러운 감격을 강호는 잊지 못하였다.

거기서는 운동회 마당에 곁들여 농산물 품평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그것은

정말 볼 만했었다. 가마니 짜기와 새끼꼬기, 그리고 바구니 짜기 대회에 저

마다 이고, 메고, 들고 온 짚과 겉대, 칡넝쿨을 펼쳐 놓고는 응원 훈수 요

란한 가운데 솜씨껏 재빠르게 걸어 나간 고공품들. 그것은 때깔이 났다.

어제 보던 물건이 아닌 것만 같은 이 출품작들 가운데, 튼튼하고 잘 생기

고 매끄러워 곱게 윤이 나는 물건에 상을 주었다. 심사를 맡은 훈장 이두

현과 마을 어른들 표정은 자못 진지하고 심각하였다.

들어 보고, 뒤집어 보고, 두들겨 보고, 털어 보고, 고누어 보고.

물건을 만든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심사위원이 걸음을 옮기는 족족 우

우 따라 다니는 사람들 표정에는 긴장감과 흥겨움이 희비로 엉겨, 벌써 자

기들이 먼저 점수를 주는 것이었다.

"선비는 한양 가서 과거에 급제하여 베실을 허지만, 농사꾼 알성시는 바로

요 우리 마을 농산물 품평회네이."

누군가 호쾌하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맞았다.

꼼꼼하게 살핀 끝에 우수한 성적으로 뽑혀서 표창을 받은 사람은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고, 상으로는 장정들이 떡두꺼비 손을 모아 가마를 엮어서

두둥실 태워주었다.

기마전 할 때처럼 높이 뜬 농사꾼을 추어올리며 사람들은 환호를 했다. 함

성이 온 운동장을 뒤흔들었다.

이들은 그저 소리가 지르고 싶었다.

도대체 '가마니때기'나 '산내끼', '바구리' 같은 것들도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사랑스럽고 신명나는 일 아닌가.

운동회가 열린 마을은 온통 운곡재를 에워싸고 함성을 지르노라 해저무는

줄을 몰랐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다."

그 사무친 함성은 하늘이 좁았다.

이두현의 아우 두석이 지은 창가를 있는 힘껏 주먹 쥐고 저으며 부르는 합

창에, 땅거미 내리는 운동장은 떠나갈 것 같았다.

 

지리산 정기 받고 자란 남아야

정기도 당당하게 승부 다루세

지을 때는 장엄하기 태산과 같고

움직이면 남산의 맹호로다

만세 만세 서로 부르세

프레이 프레이 우리 선수야

 

운동회가 파하고 사람들이 흩어져 돌아간 다음에도 귀를 울리던 노래의 메

아리는 여전히 운동장에 가득하였다. 그 여운에 몸을 맡긴 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강호 곁에서, 강모도 강태도 묵연히 서 있었다. 그들 또한 알

수 없는 감흥에 젖어들어 심장이 출렁이는 듯했다.

"어디서 오신 뉘 댁 자제들이시오?"

고즈넉해진 운동장 가운데로, 발자국 소리도 못 들었는데 다가선 누군가의

음성이 귓전에 닿았다.

그는 이두현이었다.

어둑어둑한 어스름의 땅거미, 저녁 이내 속에서 보아도 체신과 용모가 반

듯하여 범상치 않은 기혈을 느끼게 하는 그를, 한눈에 알아본 강호가 얼른

예를 갖추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가볍게 목례하며 나붓 허리를 굽히는 강호의 인사

에는 귀태가 배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까지 온 김에 찾아 뵙고 가려고 했습니다."

강호는 먼저 강모를 매안이의 종손이라고 소개한 다음, 강태와 자신을 밝

히었다. 그리고 오늘 운동회에서 받은 감명이 아직도 뜨겁게 혈관을 채우

며 일렁이는 것을 토로하였다.

"귀한 문중에서들 오시었구료. 나는 관향이 재령이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요? 참 반가운 일입니다.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운곡

재로 들어갑시다. 오늘 하루 여기서 허물없이 정담도 나누며 유하고 가셔

도 됩니까?"

온후하면서도 간곡한 그의 언동이 마치 십 년이나 서로 만나기를 원하여

온 듯 진진했다.

처음 만난 사이에도 오랜 지기와도 같은 낯익음이 우러나고, 십 년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마음이 흐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군말이 필요가 없다.

이두현이 먼저 운곡재 사랑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전진계 계원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행사 뒤처리를 하고 있던 아우 두석을 불러, 강호와 강모, 그리

고 강태를 번갈아 인사시켰다.

시절이 뜻 같지 않은 때 남의 집에 불쑥 찾아가, 장정이 세 사람씩이나 예

정에 없이 먹고 자고 머무는 것은 분명 폐가 되는 일이었으나, 헤어지기

차마 아쉬워 서로 소맷자락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박주산채나마 괘념치 마시고, 정으로 한술 뜨시기 바랍니다."

뒷마당 텃밭에서 뽑은 나물 반찬 몇 가지에 소박한 밥상이 들어왔다. 반주

로 곁들인 막걸리를 탑탑하게 따르는 이두현의 얼굴이 등잔 불빛에 환하

여, 흔흔 기꺼움이 넘쳤다.

운동회의 더운 열기가 아직도 여전히 몸을 휩싸고 있는데다가, 뜻밖에 관

옥 같은 청년들을 맞이하여 흉금을 털어놓는 이두현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흥겨움을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