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9권 (7)
"지금은 사람이 필요한 때요. 무어니 무어니 해도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강모보다는 꼭 열 살 위요, 강태보다는 여덟 살, 강호보다는 일곱 살 연장
인 두산 이두현은 강호 형제들을 대하여 말을 놓지 않았다.
존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두석도 마찬가지였다.
임자생이라 강호와는 다섯 살 차이밖에 안되어
"객지 벗은 십 년을 맞먹는다."
는 말도 있거니와 의기 상통하여 서로 편히 응대할 법하지만, 허리를 반듯
이 펴고 상머리에 마주앉은 두석은 쾌활하면서도 깍듯하였다.
형 이두현보다 키가 좀더 크고 체격이 다부진데다가 아주 활달해 보이는
두석은 명랑한 성품 같았다.
일찍이 대대로 한문학에 밝은 유교학자의 집안 둘째아들로 태어난, 어려서
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아홉 살 때 이미 고을 선비들 회강에 참석해서 소
학의 독강력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이 암울한 시대, 운봉소학교에 입학한
후 새로운 학문과 한국사를 배우며, 크게 깨친바 있어 형 두현을 전심전력
으로 돕고 있는 두석.
그는 축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 사람이 공차기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저 가파른 산 비야데기(비탈)를,
뜻 맞는 사람들하고 손수 깎어서, 날마다 삼태기로 흙을 퍼 나르며 땅을
골라 가지고, 운동장을 두 개나 만들었지 뭡니까."
이두현이 미소를 지었다.
"몸 없는 이상은 허약하기 때문에."
활기 찬 목소리로 두석이 덧붙였다.
과연 열여덟 열아홉의 시절에 능히 왜경 두세 명을 한 손에 때려눕혀 대적
할 만한 용기와 씩씩함이 전신에 팽팽한 청년이었다.
그는 거침새가 없었다.
강화와는 나이 차이 별로 많이 나지 않는 두석이었지만, 초면인데도 스스
럼이 없고, 마치 장형이나 선생처럼 사람을 이끄는 힘이 그에게서 우러나
는 것에 강호는 놀랐다.
그 힘은 그저 단지 젊은 약관의 청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가
진 자의 깊은 뱃속 신념에서 넘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멋진 창가도 몸소 지으셨다니, 다재다능이 부럽습니다."
강호는 아까 들은 응원가의 일절을 다시 되짚어 읊조리었다.
프레이, 프레이, 우리 선수야,.
"다재다능이야말로 무서운 생의 함정이지요. 이것저것 착수를 해보면 조금
씩 되거든요? 그 재미에 빠지다간 자칫 호사가가 되고 말 공산이 큽니다.
정진을 못하고.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누구나 다 각자 제 할 수 잇
는 일의 선수가 되어야 할겁니다. 농사면 농사, 살림이면 살림, 그리고 민
족운동, 혹은 독립운동, 같은 것 말이지요. 또 교육을 맡은 경우도 마찬가
지예요. 나라의 번영에 앞장서는 일꾼들은 모두 이 불우한 시대의 선수들
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 선수가 되어야겠습니다."
자못 수긍이 간다는 말투로 강태도 한 마디 거들었다.
"혁명에도 선수가 있습니까?"
강태는 어쩌면 그렇게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묘한 일이지요. 선수들이란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다하여 제 존재
의 영역을 보다 넓고 높게 개척하는 사람들일텐데, 그 재능을 부여 받은
부분에 가장 극심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단 말입니다. 꽃이 그 아름다
움 때문에 꺾이기 쉬운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축구 선수는 다리
뼈 성할 날이 없고, 공을 너무 세게 맞아서 금이 가거나, 삐거나 하니까요,
달리기 잘하는 사람은 무릎 성할 날이 없지요. 넘어지는 것이 곧 달리기
선수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선수가 될 수 없
습니다. 위험한 일이지요.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선수는 훌륭한
것 아닐까요?"
두석의 단호한 음성에 쇳소리가 심지처럼 박혀 있었다.
그는 이미 그때, 자신의 생에 피할 길 없이 들이닥칠 엄청난 상처를 감지
하고 있었던 것일까.
"선수는 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몸을 바치는 존재지만, 그 꿈을 이
루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의 잠재욕구를 대신 짊어지고 싸우는, 이중적인
존재입니다."
산간의 밤은 깊어 호젓해지는데, 두석은 결연히 말했다.
"저는 운곡재 전진계가 이 처참하고 불행한 시대를 어둠 속에서 기꺼이 건
져낼 선수들의 진정한 운동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호는 진심으로 빌었다.
"그런데 정말 좋은 선수는 소질을 타고나야 해요. 우리 모두가 다 싸울 수
는 없으니까. 싸움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 나서야 합니다."
그날,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짧은 하룻밤 상면 끝에 그들은 헤어져 버리고
말았으나, 헌걸스러운 체격에 기백도 당당하던 두석의 인상은 강호에게 아
주 강렬한 것이어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이 운곡재를 해체하라고 왜경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종용을 한답니다.
아주 이제 내놓고 목을 조이면서 강권 발동을 하는 모양이에요. 형산 선생
은 요시찰 인물이 되고."
도환이 이번에 이두현의 십조목을 전하려고 운곡재로 찾아갔을 때도 일본
도 찬 순사가 먼저 와 버티고 있더라고, 모골이 송연하던 것을 이야기했다.
"동냥 다니는 중노릇을 천연스럽게 해서 수색은 면했습니다만."
걸승이 먼 길 걷고 허기진 속에 밥 한술 얻어먹는 시늉을 하는 동안, 다행
히도 순사가 일어섰다는 것이다.
"이두석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시찰하러 그 순사는 이틀 걸러 한 번씩 오더니, 이제는 매일매일 빠뜨리지
않고 느닷없이 아무때나 머리를 내민다고 했다.
지난 삼월, 일본 고베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돌아온 이두석은, 형제우애가
유난히 깊고 도타웠으며, 처음부터 형 두현과 뜻을 같이하여 운곡재 수양
전진계를 조직하고, 낮에는 쑬모없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확대하
였으며, 비탈을 깎아 운동장을 만들어서 마을 청년들의 신체와 정신을 호
기롭게 단련시켰다.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났던 그는 북바치
는 울분과 넘치는 애국심을 창가로 지어 틈나는 대로 야학당에서 가르쳤
다. 그래서 밤이면 밤마다 호롱을 밝힌 운곡재 학사는 그 우렁찬 노래 소
리에 우렁우렁 흔들렸다.
그것이 곧 일본 경찰의 눈에 핏발이 돋게 했다.
거기다가 결정적으로, 이두석은 야학당에 걸어 놓고 참배하라고 배부된 일
본 천황의 사진과 일장기를 학생들과 함께 한 줌의 재로 태워없애 버렸던
것이다.
그것들은 밤하늘의 불티가 되어 먼지처럼 흩어져 날아갔다.
"참, 보통 사람 담력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도환은 고개를 들어 봄 하늘을 우러르고, 강호는 고개를 숙이어 제 발등을
내려다본다.
몇 년 전의 그날, 그들이 단 한 번 만났을 때, 이두석은 이런 날이 오리라
는 것을 미리 예견하고, 선수의 상처에 대해서 그처럼 말했던 것일까. 그리
고, 싸움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 나서야 한다고도.
강모는 그 강철 같던 두석의 눈빛이 가슴에 꽂혀, 깊이 에이는 듯하다. 쓰
라리다.
두 눈에다 쌍심지를 돋우고 있던 왜경이 이 일을 놓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