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9권 (9)
아낙이 행여 불경스러운 딸년의 언사가 사천왕의 노여움을 사지나 않을까
겁내는 투로 황급히 무지르며 계집아이 얼굴을 감싼다.
"잡아먹을 것맹이여."
"아 왜 우리 이쁜 언년이를 잡아먹어? 매급시."
그러능 것 아니다잉? 어서 잘못했다고, 다시는 앙 그러겄다고 빌어라. 이러
어케 엄마맹이로 두 손을 싹싹 비빔서 절을 해양 거이여. 얼릉.
아낙은 아이를 치마폭에서 풀어내 놓으며, 천장을 찌르게 우뚝 솟아 한 발
로 무엇인가를 짓밟고 있으면서, 다른 한 발로는 다시 또 무엇인가를 걷어
차려 하는 시늉으로 쳐든 사천왕의 위용 앞에 합장하고 고개를 깊이 조아
린다.
그러나 아이는 어미를 따라 절을 하기는커녕,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마
는 것이, 아마 몹시도 무서운 모양이었다.
"울지마, 울먼 참말로 사천왕님이 잡어 가아."
잡어 간당게. 너 말 안 들으먼 그렁게 큰일나능 거이라고 안 그러디야? 야
가 왜 이런다냐, 시방. 너, 절 안헐래?
어미는 달래면서도 주먹을 쥐어 보이며 위협을 하고, 아이는 그럴수록 더
질린 울음을 찢어 내며 뒷걸음질친다.
그 곁에서 머리가 하얀 노파는 구부러진 등허리를 고꾸라지게 굽히면서 천
왕문 양쪽에 두 위씩 봉안한 사천왕의 앞앞마다 공손히 합장하는데. 일행
인가 싶은 부인은 모래 담은 목기에다 향을 한 줄기 꽂는다. 그리고는 연
기가 오르는 그릇을 오른쪽 맨 앞에 선 사천왕 전에 두손으로 받들어 바친다.
그런가 하면, 겁이 나는지 어떤 사람은 아예 이 천왕문을 통과하지 않고
옆구리로 빗기어 절의 경내로 들어갔다.
"너 꼭 그렇게 말대답 콩콩 헐래?"
이번에는 무슨 말을 했는가. 어미한테 대가리를 쥐어박힌 채 다시 한번 울
음을 터뜨리고 마는 계집아이를 아낙은 번쩍 들어올린다.
"왜 저렇게 구신 나오게 생겼냥게에."
계집아이가 새되게 소리를 지른다.
"너 여그다 집어 넣고 갈란다. 어매 말을 니가 꼭 안들응게로, 천왕님 보고
야 조께 매 때려서 갈쳐 주시라고 그리야겄어. 허지 말라는 말을 자꼬 그
렇게 맻 번씩 허고 또 헝게잉?"
앙 그러께에. 앙 그러께.
계집아이가 두려움에 질려 떨면서 서럽게 어미 목을 찰싹 끌어안는다.
도환은 물끄러미 그 모녀를 바라보다가 말을 잇는다.
"암자 말사에는 천왕문이 없지요. 당연히 사천왕이 서 있을 리도 없고요.
그러니 호성암에서는 사천왕을 못 보셨을 것이고. 큰 절에서는 어떠셨습니
까? 완주 송광사, 승주 송광사, 구례 화엄사, 고창 선운사, 모두 다 우리 전
라도의 절로서 명찰들이기도 하거니와 꽃놀이 구경 삼아서 부녀자들조차
한번씩은 행차를 하는 곳일 터인데, 거기서는 사천왕 보신 기억이 나십니까?"
"이거... 송구스러운데요. 말씀하신 곳 다는 아니지만 몇 군데 사찰은 아닌
게 아니라 구경하러 갔었는데...사천왕들은 으레 절 문간에 그냥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두 눈을 부라린 채 무언가 험상궂고 사나운 몰골로 무기 같
은 걸 움켜쥔 자세...무슨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비, 이런 분위기의 장수
복장을 요란스럽게 울긋불긋 떨쳐입은 문지기...이런 정도로만 생각하고 무
심히 지나쳤습니다."
"문지기라면, 지옥의 문지기라고 생각하셨겠군요?"
"예, 뭐, 꼭 그런 것은."
"아닙니까?"
"허나, 밝고 환한 곳 문지기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무언지 어둡고 음산
해서 어쨌든 기분이 안 좋다,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 그런식이었지요.
실은 구체적으로 이만큼 생각해 본 일도 없는 것 같은데요? 지금은 물어
보시니까."
"마귀, 악마라고는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그렇게까지야."
"불도들 가운데서도, 막연히 이 사천왕상을 사찰 수호의 문지기라고만 아
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면 죄 지은 자를, 절 문간에서 지키고 섰다가 잡
아내어 지옥으로 끌고 가는, 무섭고 난폭한 존재로 여겨서 두려워하거나.
혹은 부처님 졸병이라든지. 이렇게들 짐작대로 생각하니, 사천왕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지금."
"그러니까, 권선징악의 상징...이랄까, 그런 건가요?"
호기심 어린 낯빛으로 강호가 물었다.
이에 도환은 호성암에서 그늘진 바람에 연분홍 물들인 조선 종이를 말리던
도환도, 일본인 죄상 십조목을 분노에 차 읊조리던 도환도 아닌, 학승의 모
습으로 찬찬히 아주 진지하게 대답하였다.
"사천왕은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는 천신이지요. 우리나라 절에서는 보통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출입구 첫 번째 문인 천왕문에 사천왕을 봉안하여
모시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강호가 신중한 낯빛으로 고개를 주억인다.
"다시 보니, 쌍둥이가 아니라, 각 위마다 생김새 복장이 다 다른데요? 들고
있는 것도."
도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모양과 복장, 지물 뿐만 아니라 동, 남, 서, 북 관장하는 방위에 따라서 임
무도 다르고, 이름도 각각 다르답니다."
수미산 중턱의 동쪽, 황금파에 있는 천궁에 살면서 세계의 동쪽나라를 돌
보고 수호하는 천신의 이름은 '동방지국천왕'이다. 그는 치국안민의 신으로
서 십육 선신 중의 한 분으로 세계의 동방국 백성들이 부처님 법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골고루 보살피며,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고 선
한 자에게는 상을 주어 교화하고, 국토를 굳건히 지키는 천왕이다.
그는 손에 푸른 칼을 쥐고 있었다.
그가 다스리는 동방국이 어떠한 나라인지 보시겠습니까?
그곳은 불경 아함경과 기세경, 그리고 입세아비담론에 상세히 그려져 있습
니다.
"지국천왕의 동방국은 수미산 동쪽의 산 중턱에 있는 아름다운 나라로서
이름을 유건타라 하느니."
이곳은 땅 위에서 물경 사만 이천 유순, 즉 백육십팔만 리나 올라가야 되
는데 여기에 동방천왕이 사는 궁궐이 있도다. 사방이 둘레 육천 유순 즉
이십사만 리에 이르는 이 성곽의 견고한 담장과 난간, 그리고 그물이며 신
비한 나무들은 저마다 각각 일곱 겹씩 둘러쳐져 엄중한데. 궁전은 오로지
빛나는 금, 은, 파리, 칠보와 붉은 구슬로 장식되어 눈부시고, 동, 남, 서,
북 사면에는 높은 망대와 문루가 치솟아 어떠한 외적이라도 물리칠 수 있
으니, 이 아니 안심이랴.
평화로운 정원에 온갖 꽃만발하고 기이한 나무들은 무성하게 우거져서 푸
른 잎 붉은 열매 형언키 어려운 향기를 뿜어내며, 못(연) 위에 그림자 드리
울 때. 갖가지 새들은 호화롭게 지저귀어 노래하는데, 그 소리가 슬프면서
도 아름다워 즐겁기 그지없네.
"하여, 지국천왕의 동방국토를 소상히 적어 놓았지요. 이 아름다운 국토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굳건히 지키는 것이 그의 큰 소임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천왕의 존명과 역할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도환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남방위로 몸을 돌린다.
"수미산의 남쪽에 살면서, 언제나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살피고 남장국을
수호하는 천왕은 '남방증장천왕'입니다. 달리 증광천왕이라고도 하는데요.
더욱 길다, 더욱 넓다는 글자가 나타내는 바 그대로, 중생의 삶에 이로움을
보다 더 많이 가져다 주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물론 부처님의 법을 통해
서 말이지요."
이 천왕이 다스리는 남방의 하늘 또한 동방국과도 같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금, 은, 보패와 칠보로 장식된 궁전에 일곱 겹씩 찬란하게 보석을 겹겹이
두른 난간이며, 금실 은실로 짠 그물이 눈부신데, 늘어선 나무들은 육천 유
순 즉 이십사만리, 끝도 없는 성곽을 이루고. 오색 날개 새떼들이 무지개처
럼 어울려 날며, 슬프고도 아름다이 우는 곳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장엄하면서 화려한 국토를 한치도 손상시키지 않고 올바로 수호하
는 것이 남방천왕의 소임이랍니다."
그는 오른손으로 싯누런 용을 틀어쥐어 꼼짝못하게 하고 있었다.
조화무쌍하다는 황룡조차도 그의 손아귀 안에서는 한낱 지렁이처럼 미약해
보인다. 저 강대한 힘으로 지키는 남방천 국토.
(그 '국토'란 사바세계, 중생들이 살고 있는 곳, 그러나 곧 부처의 땅, 불국
토를 가리키는 말이리라. 그런데 이 세상은 지상에 있지 아니하다. 하지만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한다.)
강호는 단상들을 떠올린다.
낯설지만 친근한 느낌이 드는 사천왕의 세계는 그에게 아주 새로웠던 것이
다. 허나, 실은 사천왕이 우리나라에 널리 봉안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천
삼사백 년 전, 삼국 시대였다고 한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점이?"
"천 년이 넘도록 우리의 삶에 녹아들어 생활 속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문화라고 할까, 혹은 신앙에 대해서, 이토록 무지할 수가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군요. 스스로."
"귀한 놀람이올시다."
도환이 합장한다.
"서방천왕은 어떤 분이십니까?"
"존명은 '서방광목천왕'이고, 수미산 중턱 서쪽에 살면서, 세상의 서쪽 나라
를 지키는 천신이지요. 광목천왕은 이름에 나타난 그대로 넓을 광에 눈 목,
그러니까 넓고도 큰 눈을 가지고 있는지라, 이 세상에 못 보는 것이 없답
니다. 이 천왕은 여러 가지 색의 눈으로, 인간이 행하는 일의 뿌리, 근을
보는 신통력이 있어서, 사바세계의 뭇 중생을 빠짐없이 보살피며 서방의
국토를 지킵니다."
"그분이 수호하는 국토 또한 저 동방이나 남방의 낙원과 같이 장엄하고 아
름답겠지요?"
"물론입니다."
"금, 은, 보패로 장식된 일곱 겹의 성곽, 일곱 겹의 난간, 일곱겹의 그물,
그리고 일곱 겹으로 늘어선 나무들...향기로운 꽃과 오색 날개 찬란한 새떼
들의 노래 소리."
강호가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읊조리자, 도환이 파안대소한다.
서방광목천왕은 오른손으로 꼭대기에 삼지창이 달린 깃대 당을 힘차게 움
켜잡은 채, 왼손에는 오층 보탑을 받쳐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