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9권 (23)
구름이 흐르면 하늘이리라. 삼천 년에 한 번씩 핀다는 천상의 꽃 우담바라,
보배로운 꽃이 만발한 그곳에 비천의 천인들 하염없이 날고, 하이얀 백학
과 금빛 용이 춤을 추는 사천왕 보관의 세계.
그 보관의 가장자리에는 공작새 꼬리 모양을 이루며 사천왕의 눈동자 크기
로 방울방울 새빨간 화염이 타고 있었다.
그것은 사천왕의 화관, 족두리였다.
꽃관을 쓴 사천왕.
"보관은 대개 보살이 쓰시는 것이지요."
도환은 아까 말했었다.
어찌하여 사천왕은 보살의 머리를 하고 있을까.
"무서운 사천왕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장식 같은데요?"
의아한 낯빛으로 묻는 강호의 눈을 도환은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아마 가장 사천왕다우신 장엄구가 이 보관일 것입니다. 한 몸에 두 성품
을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광폭하거나 소심하거나, 오로지 강하거
나, 오로지 부드럽거나, 어느 한 성품만이 두드러져 나타난 자는 대왕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강약, 온난, 대소, 고저의 성품들이 한 몸에 녹아 조
화를 이루어야만 비로소 완전에 이르는데. 보관만이 아니라 저 보관을 묶
은 끈을 좀 보십시오. 저토록 호화롭고 엄숙하며, 기품있고도 아름다운 댕
기를 본 일이 있습니까?"
사천왕의 보관을 머리 뒤쪽에서 묶은 뒤 늘어뜨린 형상의 흰 끈은 날개옷
과도 같이 바람에 나부끼며 그윽하고 신비로운 곡선을 수십 가닥으로 짓고
있었다. 그것은 두광처럼 얼굴 양쪽을 장식해 주었는데 크기가 엄청나 보
관만이나 했다. 그 보관끈은 서리 비단인 양 가벼웠지만, 또 사슴의 뿔이나
늙은 나무 뿌리보다 더 건강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 보관끈이 스치는 사천왕의 귀는 살이 두툼하고 기다랗게 어깨까지 찰랑
찰랑 내려와, 어질고 자애로운 보살의 귀 모습이 완연하였다.
그리고 눈썹 아래 관자놀이에서부터 한 자락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
리면서 빗금으로 귀를 감고 소라처럼 돌아서 다시 귀 뒤로 가닥을 감추어
사라지는 것이, 속눈썹까지 무장해야 하는 싸움터의 용맹한 장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 이 또한 자애롭고 풍요로운 보살의 머리카락이었던 것
이다. 그 머리가닥들은 어깨 위 날개 옷자락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스님, 제가 만일 지금 이 사천왕 존위 앞에 향을 한 줄기 사르어 올리고
싶다면, 경박하고 즉흥적인 감상일까요?"
진지하게 굳어진 얼굴로 강호가 도환에게 묻는다.
"공덕이 되실 것입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천왕문 입구에는 만수향 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 향 한 대를 빌려 불을 붙이고, 손가락으로 누르자 이윽고 향연이 오른
다. 강호는 두 손을 모아 동방지국천왕 앞에 향을 꽂고는 정성스럽게 합장
한다.
아름다운 젊은이로다.
도환은 수그린 강호의 등허리를 말없이 바라본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가 왜구에게 짓밟혀, 그만 전국의 사찰이 모두 타
버렸다고 하지요? 그런데 묘하게도 그 불길이 천왕문만 비껴가서 임진왜란
이전의 사천왕이 보존된 곳이, 제가 다녀 본 곳 중에 딱 두군데가 있었습
니다. 직지사와 보림사였지요. 그리고 우리 범련사입니다."
"온 절이 다 타는데 어떻게 그 천왕문만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일부러 불
을 지른 것일 테니, 모르고 빼놓았을 리도 없는데. 천왕문이 무슨 눈에 안
보이는 조그만 상자 같은 것도 아닌 터에."
"그것이 저도 신기합니다. 다만 추측건대, 용케도 직지사와 보림사, 범련사
를 맡은 자가 사천왕 신앙이 있는 왜병 대장이 아니었을까 싶지요. 불교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사천왕도 함께 갔으니 사천왕 신앙으로 사천왕을 믿는
왜인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자기가 믿는 신장을 자기 손으로 태울 수가 없었단 말씀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또 이것도 그냥 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만, 그 왜장이, 같
은 무사 장수로서 동류의식으로 사천왕을 살려 드린 것 아닐까."
"동류의식으로요?"
"글쎄요. 같은 장수끼리니까."
"재미있습니다."
"결국, 그 원인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지 않은 이 사
천왕만이 어찌 꿈같이 오늘날까지 살아서 임란 전 사천왕을 볼 수 있게 하
고, 나머지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복원한 것입니다."
"벽암대사께서 이 일에 깊이 관여했다고 하셨지요?"
"총기가 좋으십니다."
"벽암대사가 조실스님으로 계셨던 절에는 반드시 사천왕 불사가 크게 있었
고, 사천왕이 봉안된 절은 승병들의 집결소였으며, 또 그곳에는 의병들이
모였다, 고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벽암과 사천왕과 승병과 의병과 벚나무."
"벚나무라고요? 일본 국화, 벚꽃?"
"그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국화를 무엇 때문에 번뇌초 다 깎은 중들의 절
집에다 저토록 백 년생 무성하게 진작부터 심어 오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까닭이 있었습니까? 저도 사실은 고철에 벚나무가 창궐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는데."
"창궐...이라."
도환은 그 말에 실소를 하였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절에다 벚나무를 심은 것은 벽암대사였습니다. 이유는 이 벚나무가 곧고
도 단단해서 유사시에 병장기로 만들어 쓸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왜병이
쳐들어오면 가차없이 저 나무를 베어 깎아서, 구국의 무기로 만들려고."
"그렇습니까?"
강호가 놀란 눈을 더욱 크게 뜨는데, 도환이
"이제 절간의 벚나무 보는 눈이 좀 달라지시겠습니까?"
하며 불이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범련사 입구 일주문 언저리에 용틀임하는 아름드리 벚나무들 잎사귀, 푸르
게 겹겹으로 짙어지는 무리무리가 녹음의 구름머리를 아득히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