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9권 (42)

카지모도 2025. 5. 23. 05:31
728x90

 

옹구네 눈꼬리가 순간 샐쭉해진다.

머? 옹구네? 하이고오, 지랄허네. 이 꼬라지를 허고 자빠져 있어도 저는 양

반이다, 이거지? 오냐, 잘났다. 어따 대고 옹구네여, 옹구네가. 그리여, 옹구

네. 어디 말씀을 해 보시겨. 왜 그러싱고?

대꾸하는 대신에 아니꼬워서 고개만 빼톨침하고 강실이를 바라보는 옹구네

한테 강실이는, 반닫이 속에 놓어 둔 제 보퉁이를 좀 꺼내 달라고 하였다.

"왜라우?"

옹구네가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며 엉겁결에 내뱉는 목소리끝이 뒤집혔다.

"주어 보시오."

비록 그 처지가 불행하고, 위신을 세울 정황이 아니라 할지라도, 역시 타고

난 천품이 있는데다가 몸에 밴 반가의 규수 자태가 있어, 옹구네는 저보다

한참이나 어리고도, 손아귀에 쥐인 새새끼 같은 강실이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앙금앙금 반닫이 쪽으로 앉은걸음을 옮긴다.

마지못해 꽁꽁 묶은 보퉁이를 끌어 내어 강실이한테로 건네주는 옹구네 손

이 아까워서 버르르 떨린다. 여차하면 그것을 다시 채 올 것처럼 그 손은

얼른 거두어지지 않은 채 공중에 떠 있었다.

강실이는 받아든 보퉁이를 무릎앞에 놓고 말했다.

"내가 아무래도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소."

법도대로 한다면 강실이는 의당 옹구네한테 말을 놓아야 옳을 것이나, 상

놈은 나이가 양반이라고, 자기보다 나잇살 한참이나 더 먹은 옹구네이기도

하거니와,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든 자기를 업어다 기거하게 해 주는 사람

인지라, 그네는 옹구네한테 말을 놓지 않았다..

옹구네도 이 당치않은 공대에 빈말일지언정 말씀 낮추시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게 먼 소리래요?"

곧 금방 엉덩방아를 찧을 것처럼 놀란 옹구네가 반몸을 펄쩍 일으키다 만다.

"그 보따리 들고 시방 이 길로 나가신다고라오?"

가만 있어 바. 서두르지 마라. 허둥대지 마. 하이고, 얌전헌 갱아지 부뚜막

에 몬야 올라 앉는다고, 저거이 뒤통수 치네이. 여그서 까딱허먼 도마비얌

꼬랑지 잡응 것맹이로 몸통은 놓치고 꼬랑지 한 토막 끊어내 불고 가는

것, 아무 짝에도 씨잘데기 없이 줏고 말랑가도 모르능게.

옹구네는 낯색을 화안하게 폈다.

"지가 영문을 모르겄그만요잉."

강실이가 자기를 경계해서는 안되는 일이라, 음성도 공손하게 꾸미었다.

"까닭없이 남의 신세를 너무 오래 지고 있는 것이 인사가 아니요."

"어매, 무신 말씀을 그렇게 섭허게 허신당가요? 여가 머 넘으 집인기요?

아 누추헌 거이 참 몸둘 바를 모르게는 생겠지만, 즈그들이야 다 매안이

덕 보고 사는 인생들인디, 머, 먹는 것, 입는 것, 세간살이, 헐거 없이 모

다 다 첨부톰 끝끄장 매안으 것이지라잉."

"말은 고맙소...허지만 이곳이 나 있을 데는 아닌 것 같소."

"아 여그 오실 적으 머 작은아씨가 오시고 자와서 지 발로 걸어오셌능가

요? 참말로 사참헌 일을 당허시잖ㅇ어요오? 해필이먼 긍게 그날 밤중에,

구신이 장난을 했등가아, 앙 그러먼 하늘이나 알제 사람은 모르는 무신 말

못헐 인연을 우리가 서로 지었등가, 어찌 그리 힘아리 없이 걸어오다, 기양

픽 씨러지시능 것을 지가 마침 뵈었으니 망정이지, 앙 그랬드라먼 그 추운

엄동으 질바닥에 얼어서도 일당허고, 무서서도 도채비한테 홀리든지 무신

일 당허실 뻔허겼지요잉. 아이고, 작은아씨, 인장게 말허지만 이년으 등짝

이 똑 칠성판 되는지 알었그만요. 그때. 작은아씨를 업어서 뫼시는디 기양

추욱 늘어지시길래."

옹구네는 제 공치사를 범벅하여 상대방 마음이 놓이라고, 짐짓 옛이야기

하듯이 범상하게 그날 밤 일을 말했다.

"내, 잊지 않으리다."

"하이고매, 마땅헌 일을 헝 거인디요 머. 아 급헌 짐에 기양 이년으 집으로

뫼시고는 왔지만, 금지옥엽 귀허신 작은아씨가, 누우실래야 발을 뻗고 누우

실 수가 있능가아, 잡수실래야 건건이 하나 맛 같잖어 잡수실 수가 있능가

아, 쌀이 있능가, 콩이 있는가, 참, 깻묵 찧어 죽 낄에 디릴랑게 목이 메이

등만요. 그나마 통 잡숫도 못허고 아예 밥상은 죄면을 해 부리싱게, 손구락

을 짤러서 단지를 해 갖꼬 생피를 쪼께디려 보까아 싶은 맴이 다 들등마요."

천연하게 음성을 차악 낮추어, 조목조목 진심어린 심정을 이야기하는 옹구

네 얼굴이 피마자 기름 등잔불에 주홍물이 든다.

옹구네는 강실이가 아예 밥상 근처에도 앉지 않으려는 속을

"입덧."

이라고 지레 짚었다.

음식이라고는 도무지 입에 대지 않은 채, 보릿고개 춘궁의 소나무 껍질 벗

겨 넣고 끓인 죽 한 그릇마저 제대로 한번 목에 넘기지 못하면서, 그야말

로 빈 속에 노랑물 쓴물 고이는 것을 구역으로 되삼키며 하루하루 넘기는

강실이 형상을 보고

"아앗따매, 소쩍새 났네이. 양반의 댁 작은아씨 애기씨 귀허신 몸이라 유난

을 떵가. 입덧도 참말로 징허게 요란허네이. 저러다가 안 죽어? 여보쇼, 애

기씨. 먹어야 살제, 안 먹고 사는 장사 봤소예?"

하며,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 혼자말을 한 일도 있었다.

하기는 옆에서 볼 때, 정말로 염려가 안되는 바는 아니었다.

매급시 사람 업어다 놓고 송장 치능 것 아니여? 만에 하나 일이 그렇게 되

야서 자가 죽어 부리기라도 허는 날이먼, 그날이 바로 나 죽는 초상날이제.

곡절이야 어떠하든, 겉으로 드러난 바, 옹구네가 양반의 댁 귀문의 따님을

훔쳐내 잡아다가 죽인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원 옹구 섰을 때, 뱃속에 걸구 하나 들었는지 알었네. 먹어도 먹어도

걸신이 들려서 허천이 나등만. 나중에는 기양 고샅으 독을 줏어 생케도 소

화가 되겄든디. 저 지랄을 허고 안 처먹으먼 죽지, 살겄어? 홀몸도 아님서.

원, 아직은 내색을 헐 수도 없고, 딱 쥐 잡디끼 다그쳐서 주뎅이 벌리고 퍼

멕ㅇ으먼 씨연허겄는디, 그러도 못허고. 나도 이아까운 죽 안 줄어서 좋기

는 허다만. 뒷일도 있응게 막보기로는 못허능것 아니냐. 머 지가 이뻐서 그

러능 것이 아니란 말이여.

옹구네가 귀떨어진 개다리 소반에 하늘이 비치는 말강죽을 받쳐들고, 강실

이 턱밑으로 뽀짝 다가앉아 몇 숟가락 시늉으로 권해보다, 끝내 고개를 외

로 젓는 강실이한테 팽돌아지면,

"아 누구는 애기 안 나 간디이? 나도 다 해 본 일이여어. 머. 넘 않는 베

실이나 허능 것맹이로 벨시럽게 유세허지 마시오."

종주먹을 들이대 을러메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곤 하였다.

"개가 새끼 낳능 거이나, 사램이 새끼 낳능 거이나 다 똑같은 거이고, 양반

이 애기 낳능 거이나 쌍놈이 애기 낳능 거이나 따 똑같은 거잉게로. 벨것

아니여. 새끼 날 때 보먼 다 짐생이제. 암컷이먼 다 허는 일."

한번은 춘복이한테, 강실이 수발하기가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지 원정을

하면서, 되알지게 내뱉은 일이 있었다.

"흥. 참말로 열녀 정문은 어디 가서 썩고 있능고. 이런 연도 있는디 그렁

것도 모르고. 내가 그년 뱃속에 든 것이 자개 씨가 아니라먼, 미쳤다고, 오

뉴월 염천에 엠병을 앓고 말제 이런 속 빠진 것을 허겄능가. 시앗 본 것만

도 분통이 터져 딱 죽겄는디, 아조 양반이라고 손구락 깟닥도 안허니, 상전

이 따로 없고 종노릇이 따로 없어. 몸썰난다, 몸썰나아. 이러고 살먼 머 존

세상이 오기는 온당가아? 엉? 알기는 알어 줄거이여? 상년은 창시도 없간

디? 참새는 작어도 오장이 다 있디야. 나도 비록 족보 없는 민촌으 상년이

지만 양반 가진 오장육부 구곡간장 창시는 다 있어. 다 있다고오. 그

창시가 푹푹 다 썩어서 문드러질 지경이 되야 부렀어, 내가. 내 속을 알기

는 알어? 아냐고오."

그때 춘복이는 고개를 떨구고

"왜 몰라. 나도 알제."

하였다.

"하이간에 나한티 잘히여. 씨 받을라먼."

옹구네는 새초롬한 낯빛으로 춘복이한테 으름짱을 놓으며 눈을 흘겼다.

"어뜨케 잘허까잉."

우직한 어깨를 모으며 수그리는 춘복이의 궁리 어린 말에, 옹구네는 무당

개구리처럼 폴짝 뛰듯이 그 품으로 옴삭 들어가 무릎 안에 안기며

"요렇게 잘 해 주먼 되제에."

목을 감고 배시시 웃었다.

춘복이가, 뜻밖에 투장의 일에 말려 매안으로 잡혀 가서 죽을 만큼 뚜드려

맞고 돌아온 이래, 지성으로 보살피는 옹구네를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게 든데다가, 강실이를 옹구네 오두막에 데려다 놓은 것을 알

고는, 확실히 눈에 뜨이게 옹구네한테 눅어지고 있는데.

느닷없이 강실이는, 보퉁이를 내놓으라 하더니

"내가 아무래도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소."

라고 하는 것이다.

천금 같은 볼모를 자칫하면 아차 놓치게 생긴 옹구네가, 숨을 깊이 들이쉬

며 머리 속을 차갑게 가다듬는다.

절대로 안되야. 그럴 수는 없제.

"그렁게로, 작은아씨가 어디를 어뜨케 가실라고요?"

옹구네는 차분히 물었다.

"내가 본의 아니게 몸이 부실해서 도중에 지체가 되었으나, 목적한 곳이

있으니 이제 내가 혼자서라도 가 볼까 싶은 것이요."

"아니, 그 가실라는 디가 어디간디요?"

그 말에 강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아장시 없이도 갈 수가 있으시단 말잉교?"

"...가면 가지 못 갈 것 있겠소?"

"아이고오, 물정 모르는 소리는 허들 말으시여잉. 길라잽이가 있어도 시방

시절이 흉흉해서, 길거리에 끄리끄리헌 총각에 남정네들도 불문곡직 왜놈

헌벵이 막 끄집어 간다는디, 젊으나 젊은 처자가 보따리 하나 따악 끼고

뚜리뚜리 어설프게 나서고 보먼, 눈 깜작 새 어느 구신한테 어뜨케 잽헤갈

지 알 수가 없을 거이네요."

"그래도..."

"아, 매안이 어뜬 딘가요. 작은아씨 세상에 나서 대관절 사립문 배깥에 나

가 본 디 있으먼 말씀해 보시기요. 기껏해야 중뜸도 아니고 원뜸에 큰댁으

로 몇 발짝 띠여 논 것말고는, 단 한 간디도 가 보들 못허신 애기씨가, 어

쩔 작정을 허고 질바닥으로 나서겄다는 말씀이까요. 아니 헐 말로 몸 팔으

실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