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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0권 (2)

카지모도 2025. 6. 8.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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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강태가 회원들이 모이는 지하실로 내려가려고 옆구리에 책꾸러미를

한 보따리 낀 채 막 그 복도 모퉁이를 돌아오다가 강모와 마주선 심진학 선생을

발견하고는 설마 하여 칼끝 같은 눈끝으로 찌를 둣이 쏘아보더니 이윽고 한순간

에 눈동자가 커다랗게 열리면서 입이 함박처럼 벌어져,

"선생님."

벽력같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는 창턱에다 책을 내팽개치다시피 던지며 심진

학한테로 달려들어 두 손을 왈칵, 부둥켜 잡았다. 심진학도 아까 강모를 대할 때

와는 아주 판이하게 그냥 허물없이 고개를 끄떡이며 강태가 잡은 손을 마주 쥐

고 뜨겁게 흔들었다. 그 둘은 거의 부둥켜안았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강태는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그래, 여기서 만나는구만."

은사는 나지막이 삼키듯 말했다. 그 음성에는 그들만의 시간이 매어 있었다. 강

태의 온몸에 혈관이 환히 열리는 듯 미소가 어린다.

"숙소는 어디...신가요?"

"응. 우선 여기 있지."

"아, 그러십니까?"

강태의 얼굴에 안도의 반색이 번진다.

"이따가 와."

선생은 그렇게만 말했다. 그날 형설 학회 모임이 끝난 후 강태와 강모는 따로

남아서 심진학의 거처인 골방으로 찾아갔다.

"살다가 이런 일이 있네 그려."

"불행 중에 저희들 복이지요."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끓는 물을 들어내 찻잔에 따르자 말리화 차향이 김을 따

라 오른다.

"어떻게... 여기 동문사와는 연고가 있으셨던가요?"

서로 익히 속을 알고 있는 사이에서 은근히 나누는 말과 같이 강태의 음성은 진

지하면서도 짐작을 한 가락 깔고 있는 듯했다. 찻잔 테를 손가락으로 쓸면서 묵

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심진학이 고개를 끄떡인다.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이다.

창백한 그의 이마는 푸른빛을 띠고, 움푹 꺼진 양볼은 광대뼈의 그림자가 어둡

다. 내리뜬 눈에 그늘이 깊다.

"재작년 봄, 삼월 초닷새, 아침 여덟 시. 전주 전일 정미소의 노동자 사십여 명이

돌연 스트라익을 일으켰지. 아마 자네들도 알걸? 전주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건이었으니까. 쟁의는 그날 일본인 고용주 무마책으로 얼핏 해결되는 듯

했지만 이튿날 여전히 인부들은 태업을 강행하고 크게 동요했었다네."

이 사태를 보고 받은 전북 경찰부에서는 경악을 하여 정보망을 총동원, 전일 정

미소로 형사를 급파한 뒤, 노동자 동태를 파악 감시하면서 한 사람씩 경찰부로

끌어다가 일일이 취조하고 수사한 결과,

"이 일은 일본에서 잠입한 박모라는 자의 선동이다."

하고 경부 횡천선삼랑이 휘하에 고등계 주임과 형사 다섯 명, 그리고 강력계 사

복 순사를 집중 투여하여 그 '박모'라는 배후 조종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지.

그놈들 악랄한 수사 방법과 탄압이라는 건 이미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지 않

은가.

"그들은 이 일이 반드시 '조선공산당 재건 전북 지방 위원회 사건'과 관계가 있

으리라고 본 거야. 비록 그 사건은 지금부터 십년 전에 종결되었다고 하나, 그것

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마무리일 뿐 잠재 세력이 다시 공장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으로 판단한 것일세."

김창주, 한종식, 김철주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재건 전북 지방 위원회

사건이란 1932년 이월 삼육일, 그 당시 전북 지방에서 활동하던 공산당을 일제

검거한 이래 1934년 구월을 최후로,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서 관계자 삼백여

명을 송국하여 전주 지방법원에서 심리했는데, 그 중 의식이 농후한 마흔두 명

은 그해 십이월 일일, 유죄로 결정되니, 김철주는 징역 오 년, 한종식은 사 년,

기타는 각각 처분을 당한 일을 말한다. 이로써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 그리고

충청남도 및 경기, 육 도에 관계 있는 조선공산당 재건 계획은 무산되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망령이 독아를 숨기고 있다가 이처럼 살아 남아 전일 정

미소 노동자 틈바구니에 끼여들어 공작을 한 것이라고, 횡천선삼랑은 본능적인

심증을 굳혔다. 그리고는 수사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이러한 내사 끝에 그들은

중요한 사실을 포착하였다.

"박모는 가명일 뿐, 실제는 소화 4년(1929) 오월 전주고보 오학년 재학 중에 동

교생들을 선동시켜 스트라익을 일으킨 관계로 퇴학 처분을 당하고, 그 때 함께

퇴학 처분 당한 분자들, 김춘배, 임병주, 최재선, 정해철 등 삼십칠 인을 규합하

여 학교를 습격했으며 폭행까지 가한 뒤 검거를 피하여 도주한 특요(특별 요시

찰) 지용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네."

"그들 일파는 폭력 행위로써 모두 처벌을 당하였는데 유독 수모자인 지는 교묘

하게 도망하여 기소 중지중인지라 경찰부를 비롯하여 각 서에서는 이 자를 잡으

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지의 잠행술은 신출귀몰, 전주 부근에 있으면서

노동자를 리드하고 스트라익의 재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재며 회

행하는 곳들은 전혀 알 수 없다. 전주 경찰서에서는 최선을 다하여 조사할 뿐

아니라, 간첩 삼 인까지 투입하여 수사하고 있다."

고 횡천선삼랑은 체포 일지에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일부에서는 지용훈이 모 도지사의 주선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전한다."

고 별표와 함께 주석을 붙여 놓기도 했다.

"지용훈...이라면?"

강태가 알 만한 이름이라는 듯 미간을 좁히며 심진학을 바라본다.

"자네 짐작대로야. 그 사람 맞아. 전에도 더러 내가 얘기했었지 왜. 지군이 스트

라익을 주모하던 전주보고 오학년 때라는 것이 바로 내가 그 학교에 부임하던

해였구만. 그 때 나는 막 서른이었네. 스무 살 안팎이었던 지군과 나는 첫눈에

서로 사제간이라든가 나이 차이 같은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동지애를 느끼며,

금방 의기가 통했어. 거기에는 매혹이 있었네."

부모, 형제, 동기간에 부부의 인연이며 친구, 연인이 다 각별한 연대가 있는 것

이지만, 천하 영재의 교육지 삼락야가 아니더라도 가르치는 사람은 영특한

제자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큰 기쁨이며, 뜻을 같이 나눌 만한 동지를 얻는 것

은 난세에 가장 큰 힘 아닌가. 더욱이 조선 사람이라면 무조건 두 명만 있어도

수상하게 생각해서 일경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밀고하면 상금으로 한

돈 반을 준대서 '돈반짜리'라고 하는 밀대들이 앞집이고 옆집이고 길거리에고 쫙

깔려, 더럽고 비루한 개같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터에, 뜻이 맞는다고 투

합을 하기에는 모든 것이 뜻 같지 않았네. 이러한 상황과 사태 아래서 자연스럽

게 집단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직은 공장 노동자, 혹은 부두 노동자였지. 그리고

젊은 지식인들이 매일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집단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학교였어. 학교는 무엇보다 신지식이 가장 활발하게 교류되는 곳 아닌가.

"이 신진 청년들이야말로 혈기와 지성을 행동하는 용기로 응집시키는 힘이 있었

고 나라의 앞날을 암흑에서 건져낼 빛을 품고 있었지.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기

에는 너무나 불우한 현실의 벽이 철옹성보다 높고도 견고했어. 우리는 우선 이

벽, 식민지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지. 독서회를 만든 것이

야. 정명회, 학년을 가리지 않고 전교생 누구나 뜻이 있으면 참여하도록 했는데

서로 함께 토론할 만한 지기들로 각기 추천을 하고 추천을 들은 회원들이 찬반

가부 의견도 내놓아 어느 결에 만장일치 형식을 갖추게 되었지. 그 과정은 이

모임의 성격상 필요한거야. 서로 깊은 속을 알자니까 아무래도 겪어 본 사람이

나아서, 여러 해 학교 생활을 같이 한 삼사학년 이상이 많았지. 열일곱 명, 딱

알맞은 수였어. 참 좋았네... 여기서 지용훈군이 수장 역할을 했지. 헌데 이 독서

회 명칭을 바른 이름회, 정명회라고 지었는가. 무릇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사

물과 삼라만상에는 이름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데.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것이나 차마 이름짓지 못한 것도 있지만, 기왕에 '이름'이라는 것이 붙여질

바에는 반드시 그 사물과 삼라만상의 본질에 부합하도록 바르고 온당해야 한다

고 나는 믿네. 그것은 어떤 직책이나 사람끼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지. 그 모

든 것들에 올바르고 똑바로 이름을 붙여야 그 이름 붙은 것의 내용과 본질이 바

로 서는 것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