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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0권 (3)

카지모도 2025. 6. 9.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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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내용을 만들고, 내용이 이름을 만든다.

"선생을 아저씨라 부르고 꽃을 돌이라 한다면, 어떻게 바른 관계가 성립되며 바

른 본성을 파악하겠는가. 예를 들자면 말일세. 이름이 잘못 붙는 데서 모든 혼란

은 시작되는 것이야. 바로 지금 우리 나라가 겪고 있는 이 엄청난 시련과 억울

한 고통도, 우리가 우리의 아름을 지키지 못한 죄이며, 우리가 우리의 바른 이름

'대한제국'을 빼앗긴 벌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또한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를 우

리의 바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억지로 '너희도 일본'이라고 우기며 식민지를

삼아서 멋대로 도륙하니 어떻게 두 나라 사이에 바른 관계가 정립될 수 있으랴.

필연적으로 그릇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지. 그것은 단순히 옳지 못하다는 평가

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시대와 두 민족 구성원 개개인의 존재에 대한 치

명적인 비극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나는 이 독서회를 통하여 비록 작은 힘이

나마 단단히 뭉치고 싶었네."

제 이름 바로 붙이고, 제 이름 바로 부르자.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올바른 이

름을 찾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바른 모습, 본디의 원형, 제 정신을 기필코 찾자

는 뜻에서 모임의 명칭을 '정명회'라고 한 것이었어. 나는 그 때, 불행히도, 겉으

로는 역사 선생이었지만 일본 역사를 국사라 하여 가르치는 식민지의 지식인,

가슴 아픈 선생이었어. 그 거짓된 내용. 1910년 팔월 이십 이일, 경술국치, 한일

합병이라는 역사의 거짓이 시작된 그날로부터, 1919년 삼월 일일, 거국적인 기미

독립 만세 운동이 벌어지던 날까지 거의 십 년 간, 나라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

자들조차도 스스로 놀랐을 만큼, 잔인하고 가혹한 탄압과 동화정책에 만신창이

가 되고 말았으니. 암흑의 세월이었다.

"일제는 허울좋은 내선 융화, 내선 일체를 내세우면서 소위 황국신민화를 부르짖

어, 우리 한반도를 자기네 일본 영토로 귀속시키고자 획책할 뿐 아니라, 근본적

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해서 민족적 열등의식을 조장하고, 우리의

민족 의식을 마비 해체시켜 결국은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적인데, 이때 한민족의 일본화라는 것이 우리 조선 민족을 일본

의 하층민으로 흡수한다는 것이었어. 경제적인 수탈을 위한 일차 생산자, 노예,

도구로써."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으로 되고 말았는가. 탄식하고 자성하는 것은 차치하고

라도 이들의 식민지 침략 정책은 전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 수가 없도록 비

인도적이고 야비하고 무자비한 것인데. 대표적인 행태로, 철두철미 간악 잔인무

도한 헌병 경찰제를 도입하지 않았는가. 일본 제국주의에 반항하는 사소한 언행

에서도부터 우국지사와 민족지도자들을 가차없이 체포, 감금, 고문하고 죽이는

짓을 마치 파리 한 마리 잡는 것과 같이 하니, 강산이 피로 물들고, 허공에 원혼

의 절규가 먹구름처럼 뒤엉키어 꽉 쩔어 있지만. 누구도 아직까지 그 핏물을 씻

어 내지 못하고 먹구름을 걷어 내지 못했네. 대저 한 민족이 나라를 잃는다 함

이 그와 같은 것이므로, 아직 합병되기 전, 국운이 쇠미해지는 것을 내 몸으로

막고 내 나라를 지키고자 전국 각지에서 목숨을 건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그 중

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일본에 대항하던 호남 지방의 의병을 진압하고자, 한일

합병 직전인 1909년 구월부터 약 이 개월간 일본은 보병 이 개 연대 및 현지 헌

병 경찰력과 해군 수뢰정까지 동원하여 전남북 일원에 걸쳐 '남한 대토벌'을 자

행하지 않았나. 그것은 의병 소탕 섬멸 작전의 전초였지. 이 방법은 그 뒤로 경

상도와 황해도의 의병 진압에서도 그대로 실시되었어.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함

께 악명 높은 헌병 사령관은 치안의 최고 책임자로서 헌병과 경찰의 조직을 한

손에 지휘하며 통치하였다. 그러니까 일제의 탄압 기구를 살펴보면 1913년에는

경무총장 겸 헌병대 사령관과 전국 십삼 도의 경무부장, 헌병대장 아래 물경 이

백칠십육 개의 경찰서와 헌병분대가 있었고 또 그 아래 백십사 개의 경찰, 헌병

파출소와 천사백십 개의 경찰, 헌병 주재소가 거미줄처럼 배치되어 조선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자네, 일본 헌병 경찰의 임무가 몇 가지나 될 것 같은가?"

그 임무라는 것이 권한을 포함하고 있지만. 심진학은 혼잣말처럼 물었다. 강태는

대답 대신 선생을 주시하고 강모는 말리화차 한 모금을 마신다. 이미 써늘하게

식은 차 맛이 혀끝에 얹힌다. 그 쓸쓸한 온도에는 창문을 치고 스며드는 북국의

바람이 섞여 있다. 천리 타국 만리 타향에서 고향의 정 깊은 사제가 서로 뜻밖

에 만나 반가움에 뒤엉키며 뜨거운 회포를 풀기에는 너무나도 처절한 현실이,

그들을 상처 입은 반벙어리처럼 더듬게 한다.

"일본 헌병 경찰은 말이야, 첩보를 수집하고 의병을 토벌하며 검사 사무 대리와

범죄의 즉결을 비롯한 민사소송 조정, 그리고 집달리 업무 및 학교와 서당 시찰,

또 산림 감시, 뿐만 아니라 어업의 단속이며 정세 조사 등, 우리 민족의 온갖 생

활 구석구석에 빈틈없이 파고들어 이를 간섭하고 통제하고 지배하지. 조선 민족

은 이 손아귀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도록 찰거머리 진두찰이처럼 붙어서 마

지막까지 물고 뜯고 늘어지며 조선의 피를 빠는 족속들. 끔찍하다. 일본인 언론

인 중야정강이 쓴 책 '내가 본 만선'에 보면 조선의 헌병이라는 것은 행정, 사법

양부에 걸쳐 그 권력을 가질 뿐 아니라 학자의 영역에 속해야 할 언론의 지도,

교육가의 영역에 속해야 할 사회풍속의 개선, 흥신소의 영역에 속해야 할 신용

조사, 실업가의 영역에 속해야 할 경제계의 연구 등 모든 권한을 가졌다고 했으

니, 더 말해 무엇 하나."

더욱이 일제는 1910년 합병 직후 '범죄즉결례'를 제정하여 경찰서장과 헌병분대

장에게, 언제라도 그들의 판단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조선 민족을 구금, 태형, 벌

금형에 처할 수 있는 즉결 심판권을 주었다. 그러니까 일본 경찰 헌병은 그들

마음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조선 사람을 잡아가고, 가두고, 때리고, 고문하고, 엄

청난 벌금을 물려 돈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 경찰 헌병이 조선인들한테는 그야말로 꿈속에 그림자만 비쳐도 간이

오그라붙는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지."

실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경찰 헌병 만능의 무단통치를 하고 우리를 개

나 소, 말, 돼지와 같은 짐승처럼 저 구렁텅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고 말았네.

어디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찾아볼 길이 없는 이 세월이 과연 작금 몇 년인

가.

"이 속에서 나는 비겁하게도 역사선생이면서 내 나라 학생들에게 내 나라 역사

를 가르치지 못했어."

일제는 1911년 팔월, 조선인 교육방침을 규정하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천

왕에게 충성하는 일본 신민을 양성하고 일본인다운 품성을 함양하며 국어(일본

어)를 널리 보급하는 것, 그리고 조선인의 민도에 알맞는 보통교육, 즉 정치의식

이 발달할 소지가 있는 고등교육과 인문교육의 기회를 박탈하고, 오직 구체적인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는 것 등이 중요한 목표였다.

"그래, 보통학교에서는 아예 조선의 역사와 지리는 가르치지 못하게 과목 자체를

없애 버렸고, 고등보통학교에서도 일본사와 일본 지리는 가르쳤지만, 조선의 역

사와 지리는 아예 가르칠 수 없도록 교과 과정을 편성했잖아?"

그뿐 아니라 보통학교 수신 교과서에는,

"금상천황폐하께서 내지의 인민도, 조선, 대만의 인민도 모두 친자식같이 여기시

고 똑같이 사랑해 주시는 것 참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써서, 일본 천황과 일장기에 대하여 감사하고 복종하게 했다. 특히 이들은

대한제국 교과서 종류로서 민족정신에 자극을 준다고 하여 '초등본 국역사지지'

와 '중등본 국역사지지', '대한역사' 등을 비롯하여, 일반 교양도서인 '유년필독'

'국민수지', 또한 신채호의 '을지문덕전' '이순신전'에 '면암집'이나 번역서인 '월남

망국사' '파란망국사' '미국 독립사' '애급 건국사' '의태리 삼걸전' '화성돈전(워싱

톤전)' 등, 한 날의 독립과 건국의 역사나 이를 위해 활동한 위인들의 전기를 담

은 책 삼십여 종, 수십만 권을, 서울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책방과 개인 집안

까지 모조리 뒤져 샅샅이 압수하고 불태웠으며, 이러한 책은 읽지도 간직하지도

못하게 판매금지 조치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