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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0권 (5)

카지모도 2025. 6. 12.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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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필사본 동국사략을 다른 학생들한테도 빌려주어 읽게 하자."

회원들간에 뜨거운 공론이 일었다. 그 때 지용훈이 비장한 제안을 했다.

"이렇게 한 자 한 자 베껴 쓰다가는 우리 스스로 읽을 책 한 권도 끝내기 어렵

습니다. 헌데 언제 전체 사권을 다 쓰겠습니까. 지금처럼 일일이 수공으로 작업

하면, 그 치열한 정성은 하늘이 알겠지만 한 번의 수고에 오직 단 한 권의 책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니, 널리 읽히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보급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루 한시가 급하지 않은가.

"맞는 말씀이요."

"그렇다면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밤은 깊어 사방이 교교한데, 심진학의 집 사랑에 둘러앉은 정명회 회원들은 일

어설 줄을 몰랐다. 전주 교동, 오목대 아래, 경찰서 맞은편 골목 안 깊숙이 전주

천변 쪽으로 들어앉아, 흐르는 물소리가 귀에 가까운 심진학의 고옥에 초여름

등꽃이 소리 죽여 피어나고, 지용훈 목소리는 더욱 낮게 내려갔다.

"등사를 하는 겁니다."

지용훈을 주시하던 눈빛들이 번쩍 치켜올려진다. 순간 침묵이 팽창한다. 모시같

은 모세 그물망이 그어진 철판에 얇은 기름종이 등사원지를 덮고, 뾰족한 철필

로 글씨를 긁어 쓴 다음 그 원지를 가져다가 네모난 등사판의 뚜껑인 망판에 붙

이고는 위에서 잉크 묻은 롤러를 밀어 굴려서 밑에 놓인 종이를 한 장씩 찍히도

록 박아내는 수제 인쇄.

"물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야 더 바랄 나위가 없는 일인데..."

등사 기구를 구하기 어려웠다. 또 만일에 기구 일습을 준비했다 할지라도 심진

학 선생이나 혹은 다른 학생의 집에 그런 시설을 갖추어 놓는다는 것은 아주 위

험한 일이었다. 누가 보아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감쪽같이

감추어 놓기도 쉽지 않았다. 검은 기름 잉크 냄새가 진동을 해서, 다락에 두어도

온 집안에 석유내가 나기 마련이었다. 더욱이나 심진학의 집은 경기전 앞 경찰

서에서 멀지 않아, 결코 안심할 만한 곳이 못되었다. 좌중에 이런 설왕설래가 한

참 진지하게 깊어질 때 지용훈이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런 염려스러운 점들을 미리 감안해서, 우리 학교 소사 쌍현이

를 일찍부터 포섭해 놨어요."

아아 절묘하다. 사람들 낯빛에 경탄이 어렸다. 지용훈은 용모가 단정하고 얼굴이

맑은데다 몸이 날렵하였으며, 이야기 솜씨가 뛰어나 어디 가든지 항상 좌중을

사로잡았다. 심지어는 누가 무료히 앉아 있다가도, 저쪽에 슬쩍 지용훈이 비치면

저도 모르게 생기가 돌 정도였다. 쌍현이는 나이 열 다섯 이쪽 저쪽이라 하나

생김새만으로 보아서는 열 두엇 되었다 하기도 미심쩍으리만큼, 배리배리 가녀

린 소년이었다. 눈도 코도 입도 그저 자그만 자그마하고 목소리도 덜 익어, 언뜻

일시키기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들게 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학교 숙직실

한쪽 골방에서 기거하는 탓인지, 이른 새벽 꼭두부터 기다란 대빗자루를 들고

운동장을 쓸거나 수돗간 청소를 하곤 했다. 그리고 겨울에는 전교생이 먹을 물

을 끓이느라 목욕탕 같은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해가 저물면 쌍현이는 우두커니 운동장 나무 아래 앉아 한참 동안 고개

를 들어 먼곳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는 부모가 없는 소년이었다. 일찍이 쌍둥

이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그의 어머니마저 산후 조리가 잘못되어 이레 안에 죽

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두 형제는 젖동냥으로 배곯으며 자라나 이제 쌍둥이

하나는 남의 집 새끼머슴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는 소사가 되었다. 쌍현이는 시

험 때면, 산더미 같은 백로지를 등사실에 쌓아 놓고 하루 온종일, 밤늦게까지도

등사판 앞에 앉아 성냥개비처럼 마른 팔을 쉭쉭, 놀리며 시험지를 찍었다. 등사

실은 학생들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쌍현이가 그 일을 해 주겠다 하던가?"

학생들보다 심진학이 먼저 물었다.

"예 기꺼이."

"거 장한 일이로구먼."

"시험지 밀면서 밤늦은 시각에 아무도 눈치 못 채게 할 수 있답니다."

좌중은 벅찬 감격을 누르기 어려워 옆에 사람 손을 와락, 붙들며 흔들기도 하고,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 윗몸을 지용훈 쪽으로 쑥 내민 사람도 있었다.

방안은 완연 활기에 넘쳤다.

"틈만 나면 쌍현이 옆을 맴돌았지요. 가련한 아이라 정에 약한 점도 있어 제가

형같이 대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 애 힘에는 겨워 보여서 백로지를 쌀가마니

처럼 몇 씩 둘러메고 등사실로 갈 때면 얼른 제가 대신 날라주기도 하고, 장작

짐도 곁에서 들어주고, 점심시간이면 각 반에서 뜨거운 물 받아 가려고 급수실

로 주전자 하나씩 들고 오잖아요? 그 때 물 퍼 주는 것도 쌍현이 혼자 하기는

팔 아프지요. 그저 농담해 가면서 제가 대신 물국자 들고 재미나게 시중들었더

니 그냥 멀리서 제 모습이 슬쩍 지나만 가도 쪼르르 뛰어와 씩 웃곤 했습니다.

그 애가 작년 봄에 왔으니, 한 일 년 서로 낯익고 정들어 이제는 무르익을 만한

때가 됐지요."

과연. 지용훈은 다르다. 갑자기 들인 공이 아니었어. 방안이 술렁이었다. 이상하

게 압도되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쌍현이가 한 몫 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심진학은 고개를 깊이 주억이었다. 지용훈의 말에 대한 긍정과, 지용훈의 그릇을

알아본 감명이었다. 그 밤은 비밀스러운 결속과 흥분 때문에 좀체로 부풀어오르

는 열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그 때 지용훈이 유명한 말을 했지."

심진학은 식은 말리화차 한 모금을 마신다.

"무엇이었습니까?"

비감한 표정으로 강태가 물었다. 바람 부는 만주 벌판 봉천의 밤, 이국의 꽃차

향기는 실내의 낮은 온도에 물방울처럼 맺히며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