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10권 (17)
강모는 강태가 청암부인을 가리켜 서슴없이 '죽은' 할머니라고 하는 데 놀라, 가
슴이 벌렁벌렁 뛰는 바람에 끝말을 삼키고 말았다. 자기 종조모, 할머니한테는
부음을 듣고도 저토록 매정하면서, 무슨 온정이 넘쳐 부서방은 저리 꼼꼼히 챙
기는고? 형의 말마따나 할머니는 착취반동 계급이고, 부서방은 노동자, 농민, 무
산자여서 그런가? 저렇게 인정 사정이 없고 피눈물이 없어야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단 말이냐 뭐냐. 강태가 명색이 청암부인의 종손자로서 이런 일을 당하여
최소한도의 슬픔만이라도 인정스럽게 표시했으면 강모 마음이 좀 달래어졌을는
지.
"아버지 혼자서 영연을 지키고 계실 것도 걱정이 되는데... 이런 불효 중첩을 어
찌해야 할까. 잠시라도 다녀옵시다."
강태가 단호하니, 강모도 반작용으로 강경하게 말했다.
"죽은 자의 일은 죽은 사람에게 맡기고, 산 자의 일들은 산 사람이 해야 하지 않
겠냐? 산 사람은 살아갈 궁리가 나는 더 급하다."
단칼로 내리치는 이 말에 억장이 막혀 강모는, 강태의 새파랗게 날선 눈을 피해
버린다. 마주보기에 섬뜩하면서도, 이상하게 부신 광채가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
는 그 눈빛은, 부딪칠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까닭이다.
"갈 테면 혼자 가거라."
"그만두시오."
강모도 잘라 말했다.
"어디서 잘 테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집으로 가면 부서방이랑 네가 한 구들에서 나란히 자야 할 것인데, 너 같은
명주 도련님이 가시 돋친 상놈하고 자다가 긁히면 어쩔래? 전고에 없던 일로 양
반 상놈이 한자리에서 너 잘 수 있겠냐?"
"지금 나를 조롱하는 거요?"
"조롱이 아니라 실제가 그렇지."
"내가 알아서 할 일이요."
"그러지 말고 여기서 자고 가거라."
"싫소."
"허긴 이렇게 남루하고 좁아서 둘이 끼어 자기도 어려울 게다."
"누가 그래서 싫답니까?"
"너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겠지."
"우리 나이가 뭐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공연히 고집 부리지 마라. 그럼 너 혼자서 조선여관이나 협화여관에서 떨름하니
잘 것이냐? 오늘 같은 날... 그래. 우리 둘이 같이 자면서, 할머니 얘기나 하자.
핫따, 그 양반, 참말로 음성 한 번 우렁우렁 하셨지. 나, 여자로 난 분이 그렇게
굵은 목소리 내시는 분, 뵌 일이 없었다. 그 국량으로 가문을 위해서만 살다 가
신 것이 아깝지. 보다 큰 세상을 위해 뜻을 세우고 사셨더라면 여한이 없었을
것을."
"보다 큰 세상이라니?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세상 말이요?"
"세상은 말이다, 항상 거꾸로 볼 줄을 알아야 한다. 그곳에 새 길이 있거든. 새
길이 아니면 새 세상으로 갈 수가 없어."
"어이그흐 추워라. 하늘다리나 쌍굴 밑에 밤새 얼어죽은 사람 또 수태 났겠구만.
우리 집에 온 저 사람들, 어저께 저낙에 바깥에 있었으무 영락없이 죽을 뻔했지.
그래두 저승사자가 비껴 가느라구 저 식구가 다 우리 집엘 들어왔지. 새댁은 잘
잤수?"
주인집 김씨 아낙이 검푸른 새벽을 걷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에 수건을 쓰
고, 부엌으로 나가며 오유끼에게 묻는다. 오유끼도 부시시 윗몸을 일으키고는 배
시시 웃는다. 오유끼는 어젯밤 안채의 김씨 아낙 구들에서 잤던 것이다. 말로는
부서방네 식구들을 도장방에서 자라고 했지만, 식구는 예닐곱이나 되는데 방이
라고 코딱지만한데다가 점방 물건들 쟁여 놓은 상자며 자루가 쌓여 있어 장정
같으면 궁둥이 붙일 틈도 없을 지경이어서, 강모가 부서방은 자기네 구들에서
자라고 일렀었다. 식구들이 포개 자도 강모를 만나서 여한이 없는 부서방이, 극
구 사양을 했지만 강모는 간곡히 청하였다. 강모는 부서방이라도 붙들고 자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잠은 자지 않아도 좋았다. 부둥켜안고라도 있고 싶었다. 부
서방은 곧 매안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였다. 그저 자기가 보았던 매안의 노덕봉과
벼슬봉과 청호의 푸른 물결을 그도 보았고, 자기가 마신 매안의 언덕 바람을 그
도 마셨으며, 그 모든 풍경을 할머니도 보셨다는 것... 그리고, 할머니와 자기와
그가 모두 함께 그 동네의 테 안에서 숨쉬고, 밥먹고, 일어나고 잠든 시간이 있
었다는 것을 강모는 흠향하듯이 눈곱만큼이라도 누리고 싶었다. 이 황막한 만주
천지에 지금 강모의 심금을 같이 비비며 나눌 사람은 오직 단 하나, 부서방뿐이
었던 것이다. 여기 무슨 반상이 있으며 허물이 있으랴. 지금 이 순간 그는 세상
에 하나뿐인 생명체로서, 강모의 가장 큰 슬픔을 가지고 온 사람, 그리고 같이
겪어 줄 사람이었다. 그는 부서방을 붙들고, 오유끼를 내보냈다.
"너는 안채에 가서 말허고 자라."
너무나도 처연하고 단호하게 말해서, 오유끼는 강모한테 더 무어라고 묻지도 못
한 채 주섬주섬 옷자락을 걷어쥐며 일어섰다. 고향 사람을 이 머나먼 타국땅에
서 만났으니 우선 뭐니뭐니해도 반가울 것이고, 할 이야기도 많을 것이고, 할머
니 돌아가신 소식에 놀란 사람이라 두말도 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인 김씨는
아낙과 함께 안채 방의 구들 아래칸에 있다가, 오유끼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건
넌방으로 갔다.
"왜 쫓겨났수?"
김씨 아낙이 손님 와서 짐작간다는 얼굴로 눙기듯 묻는다.
"할머니 상을 당했대요."
오유끼가 고개를 꼬며 심드렁하니 대꾸한다.
"응?"
"벌써 작년 동짓달 이야기라는데요."
김씨 아낙이 놀린다.
"친손잔데?"
"예."
"아니, 친손자가 할머니 돌아가신 니얘길, 해 넘어서 남한테 듣는단 말이야? 것
도 우연히 만난 사람들한테?"
김씨 아낙 눈빛이 수상쩍은 물건 보듯 휘둥그래진다. 순간, 아차, 싶은 오유끼가
입을 다문다. 안 그래도 쫓겨난 것만 같은 심정이 들어 추레에게, 비록 농조로
던진 것이지만 김씨 아낙 말에 정곡을 찔린 것 같은 무안함을 감추려고, 오유끼
는 기껏 둘러댄다는 핑계가 '거상'이었다. 그래서 상중이라 여자와 한자리에 자
지 않는다는 식으로 면피를 하려던 것이, 오히려 무엇인가 덜미를 잡힌 꼴이 되
어 버려, 오유끼는 속이 상했다.
"머, 다 사정이 있갔지."
약점을 하나 건진 김씨 아낙은 까닭 모를 비소를 실쭉 씰그리더니, 무엇인가 궁
리를 아주 많이 한 사람 같은 표정으로 짐짓,
"손주며느리가 상복을 입어야 할텐데, 베 가져온 것 있수?"
하면서 힐끗 오유끼 안색을 살핀다. 오유끼는 뒷목이 뜨뜻해져 발갛게 물이 든
다.
"돈주면 신시장에 없는 물건이 없어."
귀때기 떨어지겠다고, 이불을 끌어다 귀마개처럼 가리고는 코와 입까지 파묻고
뚱그런 눈구녁만 굴리던 김씨 아낙은, 무슨 궁리가 났는지 혼자서 고개를 끄덕
끄덕한다.
"나한테도 베가 있긴 한데."
그리고는 곧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오유끼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모욕감
에 시달리며 강모에게인지 김씨 아낙에게인지 아니면 난데없이 들이닥친 부서방
한테인지 모를 역증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었다.
"춥지 않았어요?"
인사로 묻는 김씨 아낙 말에 대답 대신 오유끼는 잠 못 잔 내색은 하지 않고,
머리맡에 놓여 있던 물대접을 들어 보인다. 흰 사기 사발 위로 둥그러니 불룩하
게 솟아오른 얼음이 하얗다.
"자리끼 물이 얼어서 두 사발이 됐어요."
"건 예사지 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김씨 아낙은 가마솥 꼭지를 쥐고 몇 번 힘을 주더니, 나
뭇가지를 툭툭 분지르며 아궁이에 집어넣는다. 간밤 추위에 솥뚜껑이 딱 얼어붙
어서 요지부동 꼼짝도 하지 않는지라, 솥단지를 녹이려는 것이다. 뒤따라 쫓아나
온 오유끼가 아낙 곁에 쪼그리고 앉는다. 쏘시개에 불이 붙으면서 기세 좋게 불
땀이 일어, 술술 아궁이 안으로 들어가는가 싶은데 무릎이 따끈따끈해지게 불길
이 세지면서, 후욱 후욱 불너울이 일자, 그만 별안간 솥뚜껑이 '땅'하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유끼는 깜짝 놀라서 입을 아 벌리고,
김씨 아낙은 웃음을 터뜨린다.
"야아, 이런 날은 우아래 눈썹이 딱딱 달라붙구, 한데서 오줌 누면 줄기가 그대로
나오며 얼어놔 고드름이 되지머."
그러는데 누가 점방문을 탕탕, 두드리며 국수 한 사발만 달라고 소리했다. 김씨
아낙이 아궁이 불을 오유끼한테 잠시 맡기고 잰걸음을 놓아 빈지짝 쪽문을 열
자, 쌩 하고 바람이 먼저 달겨들었다.
"후아아."
덧저고리 앞섶을 부둥켜 여미는 그네의 손 등에 오돌오돌 갈퀴소름이 쫙 돋는
다. 바람은 간밤에 내린 눈발을 쓸어 점방 안에다 후린다.
"여기."
허리를 구부려 바깥에다 국수다발을 내주며 힐끗 보니, 푸릿하게 트이는 새벽
눈 쌓인밖에 선 사람은 노인인데, 누리끼리 바랜 수염에 고드름이 조롱조롱
달려 있었다. 수염 가닥마다 입김이 서려 내린 탓이었다.
"아니, 서방님은 마누라만 쫓아내구 빈 방에 손님 혼자 재운 모양인데? 어젯밤에
딴 데서 잤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