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10권 (18)
수염 달린 손님 뒤쪽에서 강모가 점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김씨 아낙이
의외라는 듯 큰소리로, 오유끼 듣기 좋게 외친다. 오유끼는 대꾸 대신 아궁이에
부지깽이를 쑤셔 넣어 틱, 틱, 틱, 헤젓거린다. 강모는, 이른 새벽이라 마침 문을
두드려서 사람 깨우기가 민망한 참에 빈지쩍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잘 되어서, 이
리로 들어선 것이다. 김씨 아낙이 뜨거운 국밥을 말아 주어, 강모와 함께 겸상으로
아침을 한 술 잘 얻어먹은 부서방은, 제 식구들을 점방의 도장방에 그대로 놓아
둔 채, 어디 좀 같이 가자는 강모의 뒤를 우춤주춤 따라 나선다.
간밤, 부서방을 잠시 혼자 있으라 하고는, 강태한테 할머니 부음을 전하러
갔다가 권유에 못 이겨, 시칸방 강태의 방에서 마음에도 없는 쪽잠을 잔 강모가,
눈뜨자마자 아침 일찍 부서방을 데리러 온 것이다.
"가서 부서방 이리 오라고 해라. 심진학 선생님 모시고 그 사람이 겪은 이야기
좀 듣게. 밥은 거기서 먹든지, 여기 와 먹든지."
심진학 선생은 만주로 온 조선 이민들의 역사를 낱낱이 조사해서 실록처럼 꼭
써 보고 싶다 했으니, 부서방을 보면 반가워할 것이었다. 더구나 걸어 걸어서 국
경을 넘어온 고향 사람이 아닌가. 부서방은 강태한테도 엎드려 절을 하려 했으
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하대도 하지 않았다. 부서방은 그런 것이 도무
지 어색하고 불공스러운지, 몸둘 바를 몰라 좌불안석 벌겋게 얼굴을 붉히고만
있었다.
"부서방이 우리 할머님 상사 말씀을 전해 주어서, 고맙소."
강태는 먼저 간단히 그 인사를 차렸다.
"아이고, 멋을요... 벨 말씀을 다 허시네요. 지가 마님 지실 적에 받은 은혜를 생
각허먼 참말로 백골이 난망이지요. 지가 살어서 어뜨케 그 일을 잊어부리겄능가
요. 그 일만 생각허먼 눈물이 몬야 쏟아져서요잉. 어저께도 기양 대실서방님을
뵈옹게 어치케나 청암마님 생객이 복받치든지 앞뒤를 못 개리고 울어 부렀그만
요. 똑 마님을 뵌 것맹이드라고요. 손이싱게로. 마님은 참말로 인자허시고, 도량
도 크시고, 이런 넘 백 개를 갖다가 쌓아 놔도 그 어른 발뒤꽁치 때만도 못허지
요. 암먼, 그 은혜를 꼭 갚을라고, 어치케든지 한 번 살어 볼라고 시방 이렇게
온 만주 벌판을 헤매고 댕기는 거이여요. 긍게."
부서방은 어젯밤에는 모든 것이 겨워서 우노라고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던 '그
일'을 행여 다칠세라 정성스럽게, 소상히 이야기했다. 깊은 추모의 심정으로 목
이 메어 더듬더듬, 원뜸의 종가댁에 곡식을 훔치러 갔었던 날과, 청암부인께 들
켜서 죽을 각오를 했던 일, 그리고 마님께서 한량없는 자비심으로 용서해 주시
며, 벌을 주는 대신,
"네가 이것을 지고 갈 수 있겠느냐?"
하고, 곡식 가마를 가리키시던, 그 순간에 대하여, 부서방은 제 생전에 갚을 길
없어 애통하고 서러운 존경과 감동으로 떨면서 말했다.
"그러고, 네 일생 동안 아무한테도 오늘 일은 말허지 말어라아, 허겼지요. 마님도
말씀 안허시겄다고요. 그런디, 마님이 그만 돌아가세 부렀어요. 저는요. 마님 영
위 앞에 엎데서 속맘을 다 말씀 디ㄹ지라우. 마당에 지시던 분들도 다 들으ㄱ어
요. 지가 도독놈이라고... 저는 마님께서 아조 혼백끄장 떠나시기 전에 속 시연허
게 그 맺힌 이 얘기를 고해 올리고 싶었습니다. 두 분 서방님한테도. 자손들이싱
게. 그만허신 어른의 자손들이싱게요."
그랬었구나. 그런 속내가 있어, 할머니의 손자인 나를 대하고 그리 울었구나. 할
머니는 나한테 당신의 몸을 덜어 명주 수건에 담아 놓고 가신 것처럼, 저 부서
방의 한 생에다가 당신의 몸을 덜어 흰 쌀 한 가마로 남기고 가셨다. 한 사람의
일생에 맞먹을 당신의 일부. 내 춥고 외로운 생애의 습한 구덩이를 덮어 주실
명주 수건 한 조각과, 저 불쌍한 상놈의 평생을 먹이고 먹이실 곡식 한 가마. 아
아, 우리는 할머니의 몸을 나누어 가졌다. 강모는 부서방이 더욱더 애틋하여, 알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말없이 부서방의 이야기를 듣고 있
던 강태는 엉뚱하게 음성을 세워 물었다.
"그 광속에 곡식 가마가 많습디까?"
"암먼이요. 그득그득 했지라우."
"곡식만 있었소?"
"어디가요. 어두워서 잘은 보들 못했는디요잉, 빨강꼬추도 있고, 죄기도 있고, 괴
기 말린 포도 있고, 마늘도 있고 고구마, 머 다 어뜨케 욍기겄능교. 몰라서도 못
욍기제."
"그런데 부서방은 집에 가면 무엇이 있었소? 걸쳐 입을 의복이건 먹을 식량이건
반찬이건 불 땔 나무건 간에."
"앙끗도 없지요 머. 이런 놈이 머시 있겄능기요. 아 그러고 허다못해 지푸라기
한 끄터리라도 있으먼, 인두껍을 쓰고서 다른 디도 아니고 원에 도독질을 허로
가겄능기요잉?"
"그럼, 왜 원의 광에는 그렇게 많은 곡식과 일용 생활품들이 쓰고 넘칠 만치 가
득 차 있고, 부서방의 집에는 보리쌀 한 톨이 없습니까?"
"아이고, 그거야 어따 대고 비교를 허끼요오? 하늘과 땅인디. 언감생심 생각도
해 본 일이 없그만요. 낭구 꼭대기에 가서 생선을 구허제. 저는 쌍놈이요, 가진
것도 없고 조상도 없는디, 원의 마님은 신분이 다르시고, 시상이 다르시지라우잉."
"부서방이 못나서 그렇다는 말이요?"
"암먼이요오. 암먼이고말고요. 비교를 헐 디다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못난 생각입니다."
"예?"
"세상이 정직하지 못하고 공평치 못해서 그런 차등이 생긴 것이지. 부서방이 못
나서 그런 게 아니란 말이지요. 원의 마님과 부서방이 왜 서로 똑같이 갖지 못
하고, 마님은 많이 가졌는데 부서방은 하나도 못가진 것일까. 똑같이 가질 수는
없을까. 그것을 생각해 보시오. 곰곰."
부서방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강태의 말에 의아한 낯빛을 짓고, 강모는 불쾌
한 기색이 역력한 눈살을 찌푸린다.
"혹시 부서방이 가져야 할 곡식을 우리 할머니, 원의 마님께서 빼앗아 간 것은
아닌가, 부서방은 자기 몫을 자기도 모르게 빼앗긴 것은 아니었던가, 생각해 보
라는 것이에요. 당신이 못 사는 것이, 꼭 당신 탓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