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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0권 (21)

카지모도 2025. 7. 3.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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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영구농장의 이름은 영흥촌이었는데, 북지사변이 일어나면서 만척에서

급작스럽게 세운 것이기 때문에 농민들의 생활 처지는 말이 아니었다.

"거그는 최근년에 왜놈들이 경상도 일대에서 강제로 이주시킨 사람들이 대부분

살고 있고요, 한 귀영텡이에 전라도 농민들도 밥에 뉘 ㅅ인 것맹이로 있는디, 아

그거이 수악헌 염전지드랑게요. 긍게 과거에 바닷물이 들으왔던 디라, 땅이 짜

서, 매년 농사 지을 때먼 요하 강믈을 끌어다가 논바닥을 ㅁ 번이고 ㅁ 번이고

싯쳐 낸 다음에 벱씨를 뿌리능 거이여요. 참말로 겁나는 일이지라우잉."

양판식은 만척에서 지정해 준 염전지 짜디짠 황무지에다 토막집을 짓고, 바람도

제대로 못 막아 추위에 떨면서, 만척에서 꾸어 주는 썩은 좁쌀에 반찬도 없이

맨소금을 먹으며 살고 있었다. 양판식은 부서방네 일가솔을 입을 딱 벌리고 맞

이했는데, 그 기색은 놀라움과 반가움과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는 정황이 뒤

범벅된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이 엄동설한에 짚불조차 못 때고, 차디찬 마

루 판대기에다 건초 한 닢 깐 것 같은 토막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치케 왔능다아, 어치케 왔어. 이 먼 디끄장. 용케 살어서 왔네잉. 이렇게 추운

디."

양판식은 부서방 두 손을 부여잡았다.

"말도 말어. 만주로 가먼 땅도 널룹고 인심도 좋아서 부지런히 일만 허먼 얼매든

지 잘 살 수 있는디, 왜 이 좁은 조선땅으서 배곯고 사느냐고, 이민으로 개기만

가먼 우리 만척으서 처음부텀 끝까지 다 책임진다고, 아무 걱정 말라고, 군으서,

면으서, 이놈들허고 짜고서는 벨지랄 발광을 다 허고 이민 모집을 하드니만. 와

봉게 이 지경이네. 나 사능 것 좀 보소. 이게 개 돼야지만도 못헌 거이제, 사람

사는 꼴잉가. 이러고 살라먼 저 살든 조선서 말이나 통허고 살제. 헌 삿갓에 헌

잠벵이 바람으로, 제우 썩어빠진 좁쌀이나 기껏해야 곰팽이 난 깡냉이를, 그나마

도 배불리 먹도 못허고, 죽이나 쒀 처먹고 살람서, 누구 존 일을 시키자고, 이

산 설고 물 설은 타국 만리 넘으 땅으로 미쳤다고 와. 긍게 속은 거이제, 깜빡.

빛 좋은 개살구에. 그 뿐인가. 일은 또 얼매나 된디. 아 강물을 끌어딜여 논바닥

을 싯쳐 낸다능 게 어디 말이 쉽지 상상이 되가잉?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매

년 매해 매 번씩이나 말이여. 봇도랑도 파야제, 맨땅에 수전도 풀어야제."

양판식은 음성을 낮추었다.

"여그서 못 견디고 죽은 사람 수태 났네. 병들어 죽고, 매맞아 죽고, 도망가다 잽

혀서 죽고. 죽으먼 그만이여. 구신도 몰라. 또 알어도 그만이여. 누가 누구 편인

디 누구를 위해 줄 꺼이여?"

휘잉, 휘잉, 풍막을 치고 지나가는 대륙의 밤바람이 얼기설기 얽은 지붕을 후리

며 칼날같이 내리꽂히는 집안에, 무릎을 맞댄 양판식과 부서방은, 소름이 두드러

기처럼 돋아 후루룩 어깨를 털었다. 그 총중에도 양판식의 아낙은 애기를 낳아

두어 달 된 것을 끼고, 어린 자식들은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뒤집어쓴 채, 이리저

리 겹치고 접히어 곤한 잠을 자고 있으니, 목숨이란 이렇게도 질기고 신산스러

운 것인가. 그 옆에 꼬부리고 구부린 채 부서방의 아낙과 새끼들이 눈을 붙이고

있었다. 도대체 그 먼 길을 걸어서 이 추위에 여기까지 와서, 그래도 고향사람을

만났다고 마음이 놓여서 저렇게 시름없이 자고 있는 것이다. 안 죽으먼 사는 거

이여.

"가만히 어디 다른 자리를 좀 알어보고 이사를 허지 그리여?"

한참 만에 부서방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살 수 없겄그마는."

양판식이 고개를 저었다.

"이사를 헐라먼 몬야 만척회사에서 내준 물건값에 그 동안 진 빚을 몽땅 다 갚

어야네. 저 빚문서 안 뵈이능가? 저것. 저승사자맹이로 문간에 처억 버티고 붙어

있는 것 말이여. 저것 저그다 안 붙여 노먼 생난리 나네잉. 들으감서 나감서 신

주 단지 뫼시디끼 한 번씩 보래."

양판식은 그 알량한 토막집 바람벽에 붙여 놓은 빚 명세서를 가리켰다. 그리고

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그 영구농장 사람들은 집집마동 다 꼭 저렇게 해 놔야 여."

"농사가 안돼야서 끄니 챙게 밥먹기조차 힘든 판에 저런 걸 어뜨케 갚는단 말인

가."

"누가 아니리야? 허나, 저걸 안 갚고 도망치다 붙잽히먼 피가 튀게 죽도록 뚜드

러 맞는디? 실제로 그렇게 맞어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여."

양판식은 부수수 여물같이 흩어진 머리카락에 열 손가락을 박고 긁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아무 말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틀 후,

"부서방을 믿고 내가 도망을 가 볼란디, 우리 힘 좀 합쳐도 되까?"

하고 나직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헌 일은, 우리 집에 마침 깟난애기가 있어 놔서, 설마 니가 이 엄동에 에린

것 데불고 산모 끌고 어디로 갈 꺼이냐 싶어서, 저놈들 감시가 좀 헐망헝게. 요

때 차라리 자네 손도 좀 빌리고 해서 떠나 볼라고. 내가 맘을 한 번 먹어 봤네."

양판식의 말을 들은 부서방은 기꺼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그들은 목숨이

달린 일이라 이웃집조차도 이사하려는 낌새를 눈치채이지 않고 있다가, 하룻날

밤에 가만히 영흥촌 영구농장을 떠났던 것이다. 양쪽집 식구를 합하면 거의 열

대여섯 되는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농장에서 빠져 나오자니, 간이 새까맣

게 탔다.

"용케도 벗어났구만."

강모는 부서방의 식은 찻잔에 차를 더 따라 주었다.

"어디가요. 일은 그 담이 더 컸지라우. 날씨는 땅땅 얼어 엄동인디, 옷이라고 다

떨어진 홑것배끼는 없고, 가진 돈도 한 푼 없고, 먹을 것마저 좁쌀 한 줌 제대로

없어 농게로... 산후 조리할라 안 좋았던 양판식이 집이 그만 덜컥 길바닥으서

벵이 나 부렀네요. 그러고는 미처 손써 볼 틈도 없이 기양 죽어 붕만이요. 태여

난 지 두어 달배끼 안되는 핏뎅이 깟난쟁이를 놔두고."

하도 기가 맥힝게 눈물도 안 나와요. 그래도 헐 수가 없지라우. 묻어야지 어쩌겄

능기요. 울어도 쇠용도 없고, 어따 대고 원정을 해 볼 수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요. 어찌어찌 삽을 하나 빌려 갖꼬 두 남정이, 얼음 백힌 만주땅 이름도 알

수 없는 눈구뎅이다 아낙을 묻어 두고 돌아서는디. 엎친 데 덮친다고, 어미 잃은

갓난아이가 아비의 등판에서 구토 설사를 무섭게 해대더니만, 힘없이 그냥 축

늘어져 죽고 말았다.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등만요. 양판식이는 실성을 해서 눈깔이 삐렇고, 아그들

은 겁이 나 부들부들 떨기만 허는디, 그래도 지가 멩색이 나이 먹었다고 양판식

이 달래고, 아그들 붙들고 험서 길을 갔지요. 니 식구 내 식구 한 무데기를 몰

고, 어디로 가능가도 몰라요. 정처도 없고, 정신도 없고."

허나 아이를 묻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아무리 조그만 주검이지만 길에다 버리고

갈 수도 없고, 맨땅을 맨손으로 파헤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디서든지 삽을 좀

빌려 보려고, 마침 발에 닿은 낯선 마을로 들어섰으나,

"진 송장을 어디로 들여와? 감히, 그건 제 고장에 가지고 가서 묻어야지. 동티가

나면 어쩔려구? 누구 망허게 헐 일 있느냐?"

한족 지주가 길길이 뛰며 마을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죽은 아이를 업고 할 수 없이 십 리를 내쳐 걸어 왔지라우. 양판식이 업었다가,

지가 업었다가, 죽은 지 자식을 업고 어디 묻을 디가 없어서 피눈물을 토험서

푹 꺾고 꼬꾸라져 우는 것을 어뜨케보고만 있겄능교. 기양 지가 뺏어서 보듬고

오다가, 양판식이 뺏어가먼 뺏겠다가... 아 그런디, 한 십 리나 옹게로 무신 장거

리가 나와요. 그러고 마침 그날이 장날이네요."

장바닥에 모인 사람들이 오며 가며, 남자가 아이를 업고 있으니, 재미로 놀리면서,

"애기 한 번 보자."

고 했다. 아낙 하나는 아이 이마에 손까지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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