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R/B> 亂中日記 (譯者解題) -이은상-

카지모도 2021. 1. 1. 05:09
728x90

 

난중일기 역자해제 (亂中日記 譯者解題)

 

-이은상-

 

 

 

세상에 어떤 이가 거룩하냐? 남을 위해 제 생명을 버리는 이요. 세상에 어떤 이가 위대하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공적을 끼치는 이다. 우리 역사상에 가장 거룩한 이, 가장 위대한 이가 누구냐 하고 물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충무공이라고 대답하리라.

그야말로 자기 몸을 희생하여 나라와 겨레를 죽음 속에서 건졌고, 무너지는 역사를 바로 세워 은혜를 천추에 드리운 이가 바로 그 어른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대인격 완성자요, 민족으로서의 대이상 구현자다. 참 인간의 모습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고, 최고도로 발휘된 민족의 이상을 또한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나간 어느 한때의 영웅만이 아니라, 구원한 세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과 더불어 같이 갈 거룩한 존재요, 또 그는 한갓 제사나 받는 우상적 위치에 계심으로써 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 속에 들어와 살아 움직이고 실천되어야 할 지도 정신인 것이며, 또 그는 다만 한국 민족만이 받들어야 할 작은 범위의 국내적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국제적으로 널리 선양되어 모든 인간들의 의범(儀範)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그를 예찬하는 표어를 생각한 나머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이라고 했으며, 또 ‘세세에 번쩍이는 역사의 면류관’이라 했다. 우리 민족에게 광명을 주고 생명의 힘을 준 이이기에 ‘민족의 태양’인 것이며, 또 비록 우리 역사에 어둡고 슬프고 지저분한 부분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존재야말로 승리와 정의로써 번쩍이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의 면류관’이라 한 것이다.

 

그는 조선 인종(仁宗) 원년(1545년) 음력 3월 8일 새벽 1시에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니, 지금의 경기도 풍덕(豊德)이요, 율곡(栗谷)과 같은 종문이었다. 그래서 학자로서의 율곡과 영웅으로서의 충무공을 덕수문중의 쌍벽이라고들 일컫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만 그들 문중의 이야기일 따름이요, 민족 전체의 입장에서 그보다 오히려 세종대왕과 충무공을 비기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의 선조 때는 유학의 가문이었고, 또 정명하고 충직함으로써 가풍의 전통을 삼는 집안이었다. 증조부 거(琚)는 성종 때에 동궁(東宮)의 강관(講官)으로 있었고, 또 사헌부(司憲府)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감찰 기관인 장령(掌令)으로도 있었다. 너무도 탄핵이 엄정했으므로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명까지 들었던 이다. 조부 백록(百祿)이란 이도 중종 때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걸렸던 사람인만큼 강직했던 이요, 다만 그 때문에 아버지 정(貞)은 벼슬을 살지 않아 가난한 집안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님은 초계(草溪) 변씨(卞氏)요, 자(字)는 여해(汝諧)이며, 희신(羲臣), 요신(堯臣)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 등 사형제 중의 셋째였다.

부인은 보성(寶城) 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 따님이었고, 그 몸에서 회(薈), 열( ), 면(葂) 등 세 아들과 한 딸 그리고 소실에서 훈(薰), 신(藎) 등 두 아들과 두 딸, 모두 합하여 5남 3녀의 8남매를 두었다.

 

어려서는 유학을 배웠으나, 자라서는 생각한 바 있어 무예를 닦아 28세에 무과에 오른 뒤로, 혹은 함경도로 나가 여진족의 오랑캐들을 평정하고, 혹은 전라도로 내려가 전라좌수사가 되어 닥쳐올 국난에 대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47세 전후 7년을 통해 오직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오직 정의로써 일생을 살았으며, 전쟁에 나가서는 백전백승, 모략과 중상으로 옥에 갇혀서도 그는 원망보다는 대의에 늠름했다.

 

마지막 선조 31년(1598년) 음력 11월 19일 오전 6시쯤, 최후의 노량 해전(露粱海戰)에서 장렬히 전사하니 향년 53세였다.

 

순국 후 6년 만에 정부의 논공행상에 의하여 1등 공신으로 책정되었고, 45년 뒤 인조(仁祖) 21년(1643년)에 ‘충무(忠武)’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그 이후 수백 년을 통하여 공의 유적지와 전승지 바다에 사당과 비석을 세워 공을 기념하고 경모해 왔다. 특히 공의 옛집이 있었던 아산(牙山) 현충사(顯忠祠)는 이제 성역(聖域)을 다시 꾸며, 민족정신의 도장이 된 것이다.

 

충무공은 단순한 무장만이 아니었다. 정치가요 외교가요 도덕가요 과학자요 그 위에 시문(詩文)과 서도(書道)에까지 능한 문학가였다. 그러므로 그가 쓴 시와 문장과 전쟁 보고서로 위에 바쳤던 장계(狀啓)와, 각처에 보낸 서간 등 어느 것 한 가지도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중 가장 귀중한 것은 임진란 7년 동안 전쟁 중에서 그날그날 적어 나갔던 일기이다.

공의 순국 2백 년이 지나, 정조(正祖) 때에 이르러 비로소 내각에 명령하여, 공의 시문과 저작들을 중심으로 공에 대한 행적과 역대 제왕 및 명현들의 공을 숭상 예찬한 시문과 비명을 집대성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요, 그 속에 한 부분으로 채록되어 있는 것이 《난중일기(亂中日記)》이다.

 

동서고금에 문인, 무사들이 써 놓은 일기가 허다하지만, 충무공의 《난중일기》야말로 가장 귀중한 문헌이 아닐 수 없다.

첫째는 수량으로 7년 동안의 일기인 것이다. 혹 본시부터 쓰지 않은 날도 있고, 또 초고를 잃어버리기도 했건만 그래도 지금 우리에게 남아 끼쳐진 것이 1천 6백 4일 동안의 일기인 것이다.

둘째는 생사를 걸고 싸우던 전쟁 중의 집필이다.

셋째는 그 내용이 공의 엄격하고 지성 어린 진중 생활과 국정에 대한 솔직한 감회의 기록이요, 전쟁 중의 비망록과 군사에 대한 비밀한 계책 등을 기록한 것이요, 가족, 친지, 부하, 장졸, 내외 요인들의 내왕에 대한 기사요, 부하들에 대한 상벌의 기록이요, 정치 군사에 관한 서신 교환 등 광범위한 기록들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전체 사(史)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가장 정확하고 필요한 사료가 되는 것이다.

넷째는 그 문장이 범상한 문인으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간결하고도 진실한 것이어서, 피눈물 밴 충과 효와 신과 의의 곡진한 기사들은 감격 없이 읽을 수 없는 인간 충무공의 고백인 것이다.

다섯째는 그 글씨가 또한 어떠한 전문적인 서가일지라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그야말로 명필, 신필에 속하는 글씨인 만큼 국보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공이 가는 곳에는 승리가 있었고, 정의가 있었고, 안전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민중이 있었다. 거기에 따라 그 일기 속에는 민중의 눈물과 아우성과 호흡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무공은 우리 민족의 구원한 이상이요 의거요 노선인 동시에, 공의 《난중일기》는 민족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만한 귀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충무공의 유물, 유적이 조금도 상함 없이 길이 보존되어 오는 중에, 이 《난중일기》는 가장 귀중한 것으로 보배로이 전해 온 것이다.

공의 친필 초고는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왔었는데, 모두 7책 2백 5장이요, 그 밖에 장계, 등본, 별책 끝에 최후 10일 동안의 일기 1장이 붙어 있음을 본다.

 

본시 충무공 자신은 이 일기에 아무런 이름을 붙이지 않았는데, 뒷날 정조 때에 《이충무공전서》〔이하, 《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란 이름을 붙여, 《전서》 권5로부터 권8에 걸쳐서 그것을 수록한 뒤로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공의 친필 초고와 《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그것과를 서로 비교해 보면, 거기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전서》의 편찬자가 공의 친필 초고를 가져다가 정자로 베껴 판각에 올릴 적에 주관적 의견으로 말하면 무책임하다고도 말할 수 있거니와, 남의 글을 함부로 생략해 버린 때문에 생긴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 대신 《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난중일기》에는 실려 있는데, 정작 공의 친필 초고는 언제 잃어버렸는지 없어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는 《전서》에 채록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예를 들면,

① 임진년(1592년) 정월 초하루부터 4월 22일까지의 부분

② 을미년(1595년) 1년 동안의 부분

③ 무술년(1598년) 10월 8일부터 12일까지의 부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무공의 일기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의 친필 초고를 표준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불행히도 초고를 잃어버리고 《전서》에만 수록되어 있는 부분은 역시 그것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다.

우선 여기서는 공의 친필 초고의 책 수와 장 수와 크기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위에 보인 바와 같이 제5책과 제6책은 두 책이 다 같이 정유년의 일기이므로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는 중복되어 있음을 본다. 거기에 대해서, 본시 충무공 자신이 왜 그렇게 다시 쓰게 되었는지 모르나, 제5책에 간지(干支)가 잘못 적혀 있는 것과, 또 내용에 있어서도 제6책의 것이 비교적 좀 더 많이 적혀 있는 것 등으로 보면, 아마 공이 간지 틀린 것을 바로잡는 김에 기억을 더듬어 가며 새로 한 번 더 적어 본 것인 듯하다.

 

대강 위에서 충무공의 초고본 《난중일기》에 대하여 약간의 해설을 가했거니와, 과연 공의 일기 그 자체는 어떤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나라와 정의를 위한 공의 태도가 솔직히 나타나 있음을 본다.

 

수군들이 본영 앞바다에 모두 모였다. 이날은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으며 남풍만 몹시 불었다. 진해루(鎭海樓)에 앉아서 방답 첨사, 흥양 원, 녹도 만호등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모두 분격하며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것이 과연 의사(義士)들이라 할 만하다. (임진년 5월 1일)

 

이것이 임진란을 만나 전라도 바다로부터 경상도로 출전하게 되던 첫 무렵의 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은 그의 일기를 통하여 나라에 해로운 일을 하는 이에 대해서는 그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그릇됨을 무자비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암행어사가 각 고을 수령들의 악행을 덮어 주고 칭양하여 장계하였다.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랏일이 이러하고야 평정될 리가 만무하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수군 일족에 대충 징발하는 일과 장정 넷 중에 둘은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심히 그르다고 말했으니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함을 생각지 않고 다만 눈앞을 꾸며 갈 것만 노력하고 남쪽 지방의 종작없는 소리만 믿으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목(岳穆)에 대한 진회(秦檜)와 다를 것이 없다. 나라를 위하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갑오년 2월 16일)

 

그래서 공은 자나 깨나 나라를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불 밝히고 혼자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국사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밤 10시께 흥양이 내가 혼자 앉아 있는 줄을 알고 들어와 자정까지 얘기하다가 헤어졌다. (갑오년 9월 4일)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병드신 팔십 노친을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을미년 1월 1일)

 

혼자 다락에 의지했다. 나라 정세가 아침 이슬같이 위태로운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음을 생각해 보니 사직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몰라 마음이 산란했다. 종일토록 누웠다 앉았다 했다. (을미년 7월 1일)

 

둘째는 군대의 총지휘자로서, 규율이 엄격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중위장(中衞將)을 불러 내일 새벽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썼다. 이날 여도(呂島) 수군 황옥천(黃玉千)이 집으로 도망간 것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에 높이 매어 달았다. (임진년 5월 3일)

 

이것은 임진란 처음에 공이 경상도 바다를 향해 떠나면서, 맨 처음 군율을 세웠던 첫 기록이었거니와, 그로부터 공의 일기를 통하여 조금이라도 나라와 민족을 해롭게 하거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자에게는 추호의 용서가 없었던 것이 얼마나 많이 적혀 있는지 모른다.

 

순천의 거북선 격군인 경상도 사람의 종 태수(太壽)가 도망가다가 잡혀 왔기로 처형했다. 계사년 7월 13일)

 

이같이 전쟁을 기피하고 도망가는 자들에게는 서릿발 같았다. 직접 자기 부하로도 인민에게 조그마한 폐해를 끼치는 자가 있어도 공은 용서하지 않았다.

더구나 공이 감옥에서 나와 외로운 그림자를 이끌고 초라한 백의종군으로 경상도 초계(草溪)에 있는 권율(權慄) 도원수의 막하에 들어가던 그 무렵의 일이다.

 

비, 비. 아침에 떠나려다가 비가 오기 때문에 그대로 묵었다. 종들이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고 하기에 종을 매 때리고, 밥쌀을 도로 갚아 주었다. (정유년 6월 3일)

 

그러나 공은 결코 엄격하고 무섭기만 한, 그런 일면만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부하를 사랑하고 또 그들을 즐겁게 하는 데도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그대로 들어가 앉아 위로하는 술잔을 네 순배 돌렸다. 몇 순배 돌아간 뒤 경상 수사가 씨름을 붙인 결과 낙안(樂安) 임계형(林季亨)이 일등이었다.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했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겁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주자는 생각에서였다. (병신년 5월 5일)

 

셋째는 언제나 농민을 위해 걱정하고 또 가정적으로는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부인을 생각하던 이였음을 알 수가 있다.

 

늦게 큰비가 쏟아지더니 그대로 종일 그치지 않아 개천에 물이 넘쳐 농민들을 만족하게 하니 다행, 또 다행이다. (계사년 5월 6일)

 

바람은 크게 부나, 비는 오지 아니했다. 가뭄이 심해서 농사가 염려스러웠다. (갑오년 6월 12일)

 

이날 밤 소나기가 흡족히 내렸으니 어찌 하늘이 백성을 살리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갑오년 6월 15일)

 

그리고 공이 어머님께 효도한 것이 참으로 눈물겨운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 (계사년 5월 4일)

 

종일 노를 빨리 저어 밤 10시쯤에 어머님 앞에 이르렀다. 백발이 부수수한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져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이 새도록 위로하여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병신년 윤8월 12일)

 

그와 부인에 대한 기사도 여러 가지가 있는 중에 한두 가지를 살펴보면,

 

이날 아침 탐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아주 위중하다는 것이었으니 벌써 생사 간 결말이 났을지도 모른다.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 있으랴마는 세 아들,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꼬. 아프고 괴롭구나. (갑오년 8월 30일)

 

저녁때 탐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덜해지기는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 하니 걱정스러웠다. (갑오년 9월 2일)

 

넷째는 단순한 무장만이 아니라 정한이 깊은, 눈물 있는 정서의 소유자였음을 알수 있다.

 

이날 밤, 달은 낮 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아 회포가 견디기 어려웠다. (계사년 8월 17일)

청 수사가 와서 활을 쏘고, 그대로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달 아래 함께 이야기할 때 옥저 소리가 처량했다. 오래도록 앉았다가 헤어졌다. (갑오년 6월 11일)

 

이날 밤, 바람은 몹시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이 낮과 같아 잠을 들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밀었다. (을미년 10월 20일)

 

이날 저녁 달빛은 대낮 같고 바람조차 없는데 홀로 앉았으니 심회가 산란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신홍수(申弘壽)를 불러 퉁소를 듣다가 밤 10시쯤에 잠들었다. (병신년 1월 13일)

 

다섯째는 정신이 맑고 또 지성스런 이였기 때문에 꿈을 꾸면 그 꿈이 심상치 않아 반드시 사실과 결부되는 징조였던 것을 볼 수 있거니와, 그러한 꿈 기사가 많은 가운데 특히 그의 마지막 아드님 면이 전사했을 때의 꿈 기사는 읽는 이로 하여금 뜨거운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한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헛디디어 내〔川〕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끝에 아들 면(葂)이 엎드려 나를 안는 것 같은 형상을 보고 깼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중략-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天安)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 )〔둘째아들〕의 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 두 자가 씌어 있어 면(葂)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밤 9시께 비가 내렸다. (정유년 10월 14일)

 

여섯째는 이 일기를 통하여 공의 인간됨을 알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무기를 만든 사실이나 전쟁에 대한 기록 등 가장 신빙성 있는 문헌적 자료가 되는 그것이다.

 

쇠로 만든 총통은 전쟁에 가장 긴요한 것이건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하더니 이제 온갖 연구를 거듭하여 조총(鳥銃)을 만들어 내었는데, 왜총보다 더 잘되어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으로 쏘아 보고서는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미 그 묘법을 알았으니 도내(道內)에 같은 모양으로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좋겠기로 순찰사,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또 공문을 돌리도록 했다. (계사년 9월 14일)

 

전쟁에 대한 기록으로는 임진란 7년 동안 수백 차의 접전 중에서도 가장 신기하고 경이적인 전쟁은 1597년 정유년 9월 16일의 명량 해전(鳴梁海戰)인데, 그날의 일기는 그야말로 소설 이상의 진진한 흥미 있는 기사임을 본다.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 부대가 보고하기를, “적선이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이 명량(鳴梁)으로 해서 곧장 우리가 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들어온다”고 하였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백 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는 것이라 스스로 낙심하고 모두 회피할 꾀만 내는데,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地字), 현자(玄字)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은 폭풍우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질렸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하고 여러 장수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 해도 적들이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中軍)에게 군령을 세우는 기(旗)를 세우라 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더니, 중군장(中軍將)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김응함(金應諴)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中軍)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령하여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 하여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또 혹은 수마석(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치고 막다가 배 위의 사람이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자빠졌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淙)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鷹斗)의 배가 뒤쫓아 와서 합력해 쏘아 죽여, 적은 한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투항한 왜인 준사(俊沙)는 안골(安骨)에 있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포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無上)〔물 긷는 군사〕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갈고리로 낚아 올린즉 준사(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그래, 마다시다” 하고 말하므로 곧 명령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였다.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가 지자(地字), 현자(玄字)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싸움하던 바다에서 그대로 정박하고 싶었으나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이라 형세 또한 위태롭고 외로워 당사도(唐笥島)〔전남 신안군 암태면(岩泰面)〕로 옮겨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참으로 천행이었다.

 

위에서 대강 《난중일기》의 내용을 인용 검토해 보았거니와 이 저작은 충무공 순국후 2백 년이 지나 정조 19년(1795년) 9월 14일에 인쇄 반포된 《이충무공전서》 속에 수록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1백 70여 년 동안 충무공을 숭배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독물이 되어 온 것이다.

 

그러는 한편, 특히 그것의 친필 초고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이 방면의 절대한 보물이라 얼마나 유쾌한 일인지 모른다.

고전이란 어느 민족에게서든지 그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양식이 되는 것이거니와, 특히 이 《난중일기》나 《이충무공전서》 같은 것은 오늘의 우리 민족 사회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그 어떤 고전보다도 가장 긴요한 서적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이 저작은 어느 특수한 학자나 연구가나 또 어느 일부층 사회에서만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 누구나가 읽어서 좋고, 꼭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국민 독본으로서의 성격을 띤 점에서 다른 고전들과는 달리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저술이다.

 

현재 충남 아산 백암리(白岩里)에 현충사가 있고, 그 현충사를 성역으로 지정하여 민족의 정신적 도장으로서의 대규모 중건을 계획, 이제 그 사업의 완성을 보게 됨과 아울러 ‘유물·유적 전시관’을 설치하고, 그 속에 충무공에게 관계된 여러 가지 유물과 함께 이 《난중일기》 초고도 보관되어 있다.

 

그 유물로서의 초고본에 대해서는 국보적 가치를 띤 것이라, 그 물건에 대한 평가를 겸한 것이거니와, 우리가 여기서 논하는 것은 그것의 내용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또는 정신적 가치를 뜻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난중일기》는 어디까지나 널리 읽혀져야 할 글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문으로 씌어 있는 그 고전을 우리 국어로 번역 주석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