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179

장길산 6권 (14)

몽둥이로 후리니 허리를 얻어맞은 포수가 숨막히는 소리를 내지르며 넘어졌다. 몽둥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는데, 마을 장정들이라야 모두가 춘궁에 푸성귀죽이나 마시고 양지쪽서 해바라기하던 사람들이라, 앞으로 내어보는 작대기며 괭이 쇠스랑에 힘이 들어가 있을 리가 없었다. 선흥이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부딪치자마자 맥없이 퉁겨져 나가거나 자루 중동이가 꺾어져버린다. 맨손이 된 사람들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횃불로 던져두고 멀찍이 달아났다. 선흥이는 얼른 돌아서서 떨어진 화승총을 포개어 들고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였고 그에 용기를 얻은 마을 장정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따라붙었다. 선흥이는 동산을 바라고 한참 뛰다가 일각이라도 벌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숲으로 들어서기 전에 휙 돌아섰다. 역시 저쪽에서도 소리만..

장길산 6권 (13)

임씨는 시동생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작은조카가 들어와 흥복을 빤히 올려다보았고, 그는 아이를 끌어다 무릎에 앉혔다. 아이는 극성스럽게 울더니 흥복이 놓아주자 제 어미에게로 가서 안겼다. "소문을 듣고 아주머니와 조카들을 안돈시키러 찾아왔습니다." 임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늦었습니다." "고생이 많으셨지요?" "벌써 오래된 일이어요. 삼촌이 이렇게 건장하게 살아 계실 줄은 몰랐어요." 흥복은 제 형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주머니가 여기서 편히 계실 줄은 저두 몰랐습니다." 여자는 눈을 치뜨고 흥복을 쏘아보았다. "그러면 절더러 혀를 깨물고 형님을 따라 죽으라는 말씀인가요. 관가에 함께 잡혀가서 형률에 따라 관비로 떨어질 제 나는 죽은 거나 매한가지였어요. 여기..

장길산 6권 (12)

아낙네는 소리를 죽여 울기 시작하였다. 관에서 민변으로 작당한 고장에 대한 보복은 당시에 매우 혹심하였던 것이다. 고장의 등급을 강등시키고 마을을 폐하여버리기도 했고, 아예 양민으로서 살아갈 모든 권리를 방기해버리는 수도 있었다. 춘궁기에 환곡 내주는 일로 말썽이 생겼다 하여 이서배들은 아예 이 마을을 외면하는 모양이었고, 그 보복이 몇 년 계속되는 가운데 느릅나무골은 몰라보도록 황폐하게 변한 것이다. 강선홍이는 장연에서 겪은 일이 있었는지라 그러한 내막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제가 읍내에 다녀오지요. 그리구 흥복이두 데리구 오겠습니다." "그이를 데려오면 안돼요. 누구든지 그이를 보면 발고할 테니까요." "저희 걱정은 마십시오." 읍내 주막에서 흥복이와 선홍이는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느릅나무골로 ..

장길산 6권 (11)

길산은 얼결에 일어섰다. 그러나 기왕에 일어선 김이라 다시 주저앉을 수도 없어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짧은 칼을 뽑았다. 그는 허참, 하면서 멋쩍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일단 판 안에 들어서니 길산의 본색이 원래 광대라 한바탕 놀아보고 싶기도 하였다. 그는 역시 나무 한 그루를 바라고 천천히 걸어갔고, 마치 그것이 놀이마당의 오리목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길산은 가볍게 두 발을 굴러보고 나서 나무 바로 밑에까지 번개 곤두로써 몸을 공중회전하여 다가갔고, 여선참사로 칼을 던졌다가 다른 손으로 바꿔 쥐면서 칼살판을 뛰는데 나무의 전후좌우로 눈보라가 뽀얗게 일어나 그의 몸이 보이질 않았다. 마치 독수리가 나무 주위에서 힘차게 퍼덕이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살판으로 허공에서 떨어져 발이 땅에 닿자..

장길산 6권 (10)

정면에는 감동이가 있었고 보다 아래편에는 선홍이가 있었는데, 감동이는 환도를 쥐고 오르다가 그를 바라고 달려오는 멧돼지를 보자 주춤하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달아날까 옆으로 샐까를 눈가늠해보다가 너무 눚은 걸 알았다. 짐승이 감동이의 사추리를 받아넘기려고 달려들적에 감동이는 옆으로 피하면서 환도를 내리그었다. 짐승이 울부짓으면서 감동이의 허벅지께를 들이받고 빠져나갔고, 이어서 선홍이가 한손에 엄파를 치켜들고 섰다가 부상당한 멧돼지와 맞섰다. 둔중한 어갯죽지에 칼을 맞아서 짐승도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상처는 치명적이긴커녕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멧돼지는 흉포해져서 선홍이를 허공으로 날려 보내려는 기세로 달려들었다. 선홍이가 뚝심이 없었으면 그대로 짐승의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슴에 받고 뒤로 나가떨어졌겠지만, ..

장길산 6권 (9)

"전번에 오백 냥과 곡산에서 만둥에게서 빼앗았던 은이 대략 칠백여 냥 되는 듯합니다. 미곡이 삼십 석, 포목이 이십 동쯤 됩니다." "허허, 꽤 많이 모아두었구나. 그만하면 우리보다두 부자네. 재물은 모두 자네가 가지려는 것은 아니겠지." "원 천만에요. 그런 생각을 하다니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비축해두고 있습지요. 대개는 여기 식구 중에 여염에 남아 있는 가족을 도우려는 자들이 있어 이만 재물도 얼마 안 가서 식량과 고른 분배로 다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몇 차례나 분배를 하였는가?" "예, 두어 차례 하였습니다. 대개는 섣달 그믐께에 모두 모여서 의논을 정하지요." "그렇게 하였다면 한 사람에 백여 냥의 차례는 돌아갔겠지?" "아마 이십여 냥씩 돌아갔을 겁니다. 포목으로 받은 자나 미..

장길산 6권 (8)

흥복은 비틀거리며 고개를 넘어 거북이골로 내려가보았지만 역시 먼저 떠났던 을량의 일행도 보이질 않았다. 그는 눈 위를 여기저기 살피다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어 있는 부담을 발견하고는 눈속에서 돌멩이를 뽑아내어 뚜껑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판자가 뻐개지고 틈이 벌어지자 그는 부리나케 손을 집어넣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움켜쥐었다. 그는 손에 쥔 것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는 맥없이 던져버리고 말았다. 다른 부담을 부숴서 다시 한번 살피니 마찬가지였다. "그랬구나..." 부담마다 가득 들어있는 것은 은이 아니라 자갈돌이었다. 그들은 자갈을 짊어지고 허겁지겁 달아나느라고 괜한 전력을 모두 소모해버렸던 것이었다. 흥복은 드디어 자기가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누구일까, 관군인가, 관군이라면 그를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

장길산 6권 (7)

그자가 병장기 세워두고 내려오는 기색을 보자 말득이는 얼른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문을 빠끔히 열어두고 기다렸다. 그자가 마루에 와서 머뭇거리는지, "이 사람 어디 갔나..." 어쩌구 하며 올라서는 기척이 들렸고, 말득이는 크, 하는 소리를 냈다. "거 술 한번 독하다." 다급해진 파수꾼이 방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는데 말득이는 지체없이 그의 멱살을 잡아끌면서 단번에 정수리를 돌멩이로 내리쳤다. "요게 바로 벽력주라구, 풍도 염라국 야차들이 즐겨마시는 술이니라." 그는 넙죽하니 뻗어버린 자의 발목을 잡아 질질 끌어다 구석에 눕혀두고, 밖으로 다시 나왔다. 말득이는 그제서야 허리에 한 손을 찔러넣고 산채 어귀로 슬슬 내려갔다. 양편 바위에 섰던 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어디 가려고 그러나." ..

장길산 6권 (6)

"나도 오죽하면 어릴 적의 동무를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러 다닐 것이오. 내가 보아허니 산에서 썩기는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오. 내가 지난 사흘 밤을 이리저리 수심 걱정으로 세우며 보내던 중에 내게도 좋고 당신께도 좋은 일 한 가지를 생각해냈소그려." 최흥복이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김기는 말하였다. "만약에 이 돈이 네 배가 되어서 돌아온다면 어떻겠소?" 최흥복은 한바탕 웃었다. "그러면 배로 불려서 돌려드리지요. 천 냥을 드리겠습니다." "농이 아니요. 대금을 벌 방도가 있소. 다만 내가 꺼리는 것은 이것이 국법을 어기게 되고 화적과 공모하는 일이라서 그러오. 허나 박복한 놈에게는 계란에도 뼈가 있다고, 도무지 이 돈 내놓고는 돌아가지 못할 형편이 되었구료. 내 평생 처음으로 뒷길로 지나갈까 생..

장길산 6권 (5)

"좌우지간 내가 저자로 다시 나가야만 환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찌할 터인가?" "그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황주에 거래하는 자가 여럿이니 달포만 기다리면 될 터이다. 그동안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사백냥이라면 너무나 싸군. 생각해보아라. 선화당에 종놈을 재우고 먹인다면 꿈이나 꿀 일이겠는가?" 흥복이와 둘러섰던 그 식구들이 소리를 내어 요란하게 웃었다. 김기가 말하였다. "달포까지 기다릴 건 없다. 감영에서 온 비장이 어음을 주며 말하기를, 급하면 동선관에서도 환전할 수 있다 하였으니, 나는 여기에 남고 우리 아이를 보내어 즉시 가지고 올라오도록 함이 어떻겠는가?" "음, 하루라도 여기서 빨리 나가구 싶겠지. 좋다, 만약에 돈이 올라오지 않으면 너는 죽는 몸이다. 오늘은 기왕 늦었으니 명일 날..

장길산 6권 (4)

"틀림없이 내막을 소상히 꿰는 자가 미리 계획하였군." 김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졸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급히 의원을 데려다 보이니, 원행하다가는 목숨을 잃는다기에 주막에 그대로 눌러앉아 며칠을 묵으며 차도가 있기를 기다렸습니다만... 제 소견으로는 가는벌에서 우리를 노리던 자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은을 싣구 온다는 걸 그때에 알았을 테니까요." "세평이라면 바로 지척에 자비령 맥이 있지 않은가." 김기가 말하였고, 천동이가 덧붙였다. "글세 따져보나마나 최가네 일당이 분명하다니까요. 수년 전에 문가가 몰락한 뒤에 춘천놈 최가가 자비령의 산주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놈들은 도모할 노릇이 도적질밖에 없으니 그런 곳으로만 꾀가 돌아가겠지요. 우리 처지가 이러니 관가에 발고할 수도 없고..

장길산 6권 (3)

과연 그제서야 문점손의 전령은 쾌히 응락하였다. 흥복의 생각으로는 아직 자비령의 세력 판도를 모르고 있었으며, 우리 지금 형세가 불리한데 환난을 불러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위세를 부리려고 열 오에 오십여 명의 도당을 자랑하지만 그것은 과장일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에 여기서 기반이 튼튼하고 수가 여럿인 점만은 분명한 듯하니 자기네가 불리할 것은 틀림없었다. 최흥복은 식구들과 더불어 잠시 의논하였다. 세 불리할 제 져주고 나중에 실해진 연후에 도모하는 것이 병법의 순서라 하여 의논이 정해졌고, 흥복과 문점손의 전령은 함께 여계산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여계산은 자비령 연봉의 허리나 마찬가지라서 예전에는 산성이 있던 곳이었다. 흥복은 여계산 산채로 올라가 문점손에게로 안내되었다. 문점손이는 작은 키에..

장길산 6권 (2)

새벽까지 멀찍이 지켜 섰던 사람들은 동이 훤하게 터오자, 시장기에 피로에 무엇보다도 싱겁고 또한 후환이 두려워져 누가 제 얼굴이라도 알아볼까 하여, 소피 보는 척 빠지고, 부르러 가는 듯 새고, 첩 들어온 뒤 뒤주 밑창 드러나듯 휑뎅그레 줄어들고 말았다. 드디어 관졸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몰라도 느릅나무골 사람들은 기왕에 화냥년 소리 듣기는 마찬가지라서, 저지른 짓이 있고 보니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들은 작대기를 버리지 않고 대룡산으로 밀려 올라갔고 관군들은 사방의 활로를 끊고 그들과 대치하였다. 반나절쯤이나 족히 되었을까, 그들의 가족들이 마을에서 하나둘씩 끌려나와 자식이나 형제나 지아비를 부르면서 애소하니 더는 견디지 ..

장길산 6권 (1)

장길산 6 권 제3부 잠행(상) 제1장 황민 1 곡산 수안 방면에서 뻗어 내려오는 큰 산령이 서흥 봉산을 지나서 황주 극성진에 이르러 끝나는데 서흥 쪽의 북방로는 절령을 지나고 봉산 방면의 길은 동선령으로 향하여 있었다. 원래가 절령의 통로를 국도로 썼으나 너무 험준하고 여름 장마철과 겨울의 강설기가 되면 행로에 매우 곤란하여 결국은 동선령으로 옮겨 절령역은 봉산의 검수역말과 합치게 되니 자연히 절령길이 두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절령은 봉우리가 높고 험하며 골짜기가 깊어서 병마가 접근하기 어려운 요새지였으니 그야말로 일부당관 만부막적의 고장이었다. 이곳이 자비령으로 불려지게 된 것은 절령 북쪽에 나한당으로도 일컫는 자비사라는 절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원행하는 사람들이 자비사에 들러 행로의 무사함..

장길산 5권 (35,完)

"내 돌아왔네 돌아를 왔네. 못 올 길을 내 어이 왔나 이별에 두 자를 깨치러 왔구나. 우리 인생 죽어지면 만수 장림에 운무로구나, 만첩청산 썩 들어가니 잔디 잎으로 이마를 삼고 두견 접동으로 벗을 삼고석침 베고 누웠으니 송풍은 거문고요 두견성은 노래로구나. 살은 썩어 물이 되고 뼈는 썩어 황토가 되고 삼혼칠백이 흩어질 제 어느 동무가 불쌍타 할까 생각하면 맘성이 좋질 않아 못 살리로구나. 휑뎅그레 빈방안에 홀로 앉았으니 임이 오며 누웠으니 잠이 올까. 수다하니 몽불성이라 잠을 이뤄야 꿈을 꾸고 꿈을 꾸어야 임 만나보지. 임 사는 곳과 나 사는 곳은 남북간 수십 리에 멀지 않건만 어이 그다지 못 본단 말가 춘수는 만사택하니 물이 많아서 못 오는가. 하운이 다기봉하니 봉이 높아 못 온단 말가. 봉이 ..

장길산 5권 (34)

"요즈음 청국 가는 사행선이 결딴났다고 황당선 기찰에 해서 수역이시끄럽다더군. 혹시 우두령 짓이 아닌가 몰라." "남이 말하는데 흥을 잡치면 어떡허우. 전선을 때려잡구 사행선 한척을 고스란히 먹었지요." "소문에는 청인들이라든데. " "그게 다 둔갑술이오." 길산이 귀가 트이는지 재빨리 물었다. "그 집에 화포가 있어?" "화포가 두 대에 화승총이 열 자루쯤 된다네." 길산은 다가앉았다. "화포야 필요없겠지만, 우리두 화승총을 구할 수 없을까?" "몇 자루나 쓰려고?" "우선 다섯 자루쯤... 많아도 좋고." "그래, 나하구 형제처럼 지내는 이가 있으니 곧 사람을 보내도록 허지." 우대용은 이경순을 생각하였고, 길산은 매우 기뻐하였다. "우선 다섯이지만, 더 부탁할 수 있겠지. 비용은 얼마나 들까?..

장길산 5권 (33)

길산이 다시 말하였다. "이번에 성님과 내가 대강 짧은 일정으로 돌아보았는데, 무엇보다도백성들의 제일 가까운 적들을 하나씩 처단해나갈 일이 급하다. 곡괭이와 호미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우리가 미리 경고하고 기간을 두고 본연후에 가차없이 징치한다. 그래서 다른 토호나 관리들에게도 두려움을 주어야지. 대개 반수가 당하고 나면 나머지는 죽어 있는 거나 진배없을 게다." 선흥이가 거칠게 말을 꺼내었다. "먼저 장연을 들이치도록 해주오. 첫봉이의 원수를 갚아야지." 김기가 만류하고 나섰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거병하였다간 낭패를 보구 마네. 우리가 일을거듭해가노라면 틀림없이 알려지게 될 것이고, 알려진 연후에는 감영이 문제가 아니라 조정에서 들고일어나 우리를 토벌하려 하겠지. 우선 민심을 얻는 쪽으로 신중하게 ..

장길산 5권 (32)

대근이 운을 떼는데 밖에서 궁금하여 엿듣고 섰던 총각의 모친이 문을 벌컥 열며 말하였다. "우리 윤덕이 장가를 보낸다구요?" "뵙겠습니다. 저는 송도 사대전 좌장으로 있는 박아무올시다." 그러나 노파는 사대전이 무엇인지, 좌장이 어느만큼의 직함인지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양 되묻는 것이었다. "그래, 손님네 여식이 있으시우?" 윤덕이는 대근이 장가 이야기를 거냈을 때 할말을 잃고 두리번거리다가 노모가 다시 쫓아들어와 새겨 물으니 몹시 쑥스럽고 부끄럽던지토방 위에 갈아놓은 거적대기를 자꾸만 뜯어냈다. "얘야, 그만 뜯어라. 짚 날린다." "장가는 무얼... 어디 색시가 있담." 최총각은 벌써부터 볼이 벌개져서 고개를 숙이는데 색시 소리를 하는 꼴이 딴에는 몹시 땡기는 눈치였다. "제 친척 중에..

장길산 5권 (31)

대근은 어쩐지 귀가 솔깃하여 그 최윤덕이라는 총각놈의 거동이나살피려고 나무장을 비집고 돌아다니다가 다른 자들과 뚝 떨어져 앉아서 곰방대에 담배를 태우고 앉은 총각을 찾게 되었다. 대근은 천변에멀찍이 떨어져 쭈그리고 앉아서 장작과 숯이 팔려나가는 모양을 보고있는데 다른 사람의 장작은 차츰 팔려나가고 석양 무렵이 되도록 총각의 장작은 값을 묻는 사람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나뭇짐이 무지막지하게 큰지라 값이 비싸겠거니 여기는 모양들이었다. 대근이 바라보노라니 털벙거지에 검정 더그레 입은 관노놈이 탁주잔깨나 좋이 들이켰는지 볼따구니가 불콰하여 건들거리며 총각 앞에 머물렀다. "그 장작짐이 과연 송악산만하구나, 얼마를 내랴?" 총각은 일어서지도 않고서 곰방대만 빨아대면서 대답하는 것이었다. "꼭 일..

장길산 5권 (30)

부인은 얘기하면서 숨이 차는지 몇번이나 말을 끊고는 하였다. "비록 아이의 말을 듣고 인자하신 분이라 여겨 찾아가 발설은 했습니다만, 어쩐지 세상살이가 허무하여 이렇게 심란하게 앉았던 참이지요." 박대근은 이런 경우에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이 가족에 대한 진정을 표하는 것이 되리라 여겼다. "저는 어쨌든 장사아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문이 되는 일이라면염라대왕의 수염이라도 베어야겠지요. 허나 저는 이날까지 이문도 중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이 가장 귀한 것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이문이 쌓여서 재물이 되는데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위하여 쓰여져야 하리라고 믿지요. 우리 송상은 비록 사대부의 반열에도 들지 못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귀한 지체도 누리지 못하지만 모두들 도주공 범여 같은 경륜을..

장길산 5권 (29)

귀례는 남편의 말에 곧 순종하였다. 그녀는 대근의 사람됨을 알뿐더러 어려서부터 배대인의 규훈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터였다. 재물에도 의가 있으니 바른 덕을 갖춘 재물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이요, 비록 만금이 쌓이더라도 천민을 저버리고 모은 것은 강도의 장물과도 같아서 곧 잃거나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법이라는 것이었다. 송상의 일상사는 제아무리 부상대고라 할지언정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이어야 하였고 만약에 가무와 고기 굽는 냄새가 담장 밖을 넘어가면 손가락질을 받았다. 박대근이 일부러 임방에 나가지 않고 하인을 기다리는데 그가 헐레벌떡 뛰어와 아뢰는 것이었다. "뒤를 밟아 따라가보니 서문 밖인데 집이랄 것두 없습니다. 낮은 움막을 파고 세 모녀가 사는 모양이지요. 그 아이의 언니는 이미 과년하여 나다..

장길산 5권 (28)

5 송도 사대전에서도 가장 연로하고 임방회의에서는 좌장으로 존경받는 배대인은 이제는 모든 일을 박대근에게 맡기고 있었다. 배대인이 대근을 그의 가장 귀애하는 막내딸의 사위로 삼고 아예 가업까지 맡기게 된 것은 단순히 딸에 대한 애정 때문만도 아니었다. 비록막내딸이 배냇병신인 외아들이나 두 딸에 비하여 영리하고 이재에 밝다고는 하나 무턱대고 한 사위를 정하여 가업 경영을 물려줄 배대인이아니었다. 그는 본래부터 송도의 상권을 휘두르는 거부는 아니었고, 오히려 지방에 나가 있던 송방 차인의 아들이었다. 그의 먼 친척뻘에 목화장사로 돈 좀 모은 이가 있었는데, 본이 같은 경주 배씨일 뿐이지 전혀 남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수성가를 하여 하인 십여명을 거느리고 있는 처지인데 늙마에 고기 반찬이나 먹게 되니 ..

장길산 5권 (27)

"청룡포 방포." 선수에서 호포를 장치하고 겨누고 있던 포수 두 사람에게 우대용이외치자마자 큰 독을 박살내는 듯한 메마르고 깡깡한 포성이 터졌다. 이어서 호포의 연환은 사행선의 고리를 박살내었으며 배가 기우뚱하며요동을 텄다. 이제부터 서서히 침수가 될 듯하였다. 전선은 이제 한바퀴 돌아서 용선의 좌편 선미로 방향을 잡는 중이었다. 사행선의 선미를 두들겨 부수어 움직이지 못하게는 하였으나, 이제뒤편에서는 전선이 다가들고 있었고 앞으로 나아가면 비록 자은 화포이지만 한대씩 장치하고 있는 사행 선에서 가만 둘 리가 없었다. 전선에서도 그것을 알고 뱃머리를 돌려 총통의 사선에다 용선을 잡아넣으려는중이었다. 우대용이 외쳤다. "모두들 방갑 뒤에 엎드린 채 노를 저어라. 사행선의 우현으로 피한다." 그들은 용선을..

장길산 5권 (26)

그들은 습격의 계획을 빈틈없이 마무리지었다. 동녘이 부옇게 밝을 즈음하여 허사포에서는 사행선이 닻을 올리고있었다. 풍천부사와 해주도사가 부두에 배웅 나왔고 악공들은 타루악을 연주하였으며 기생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배따라기를 불렀다. 금년 신수 불행하여 망한 배는 망했거니와 봉죽 받은 배 떠들어오네봉죽을 받았단다 오만칠천 냥 여덟 곱절 받았다누나 지화자 좋다 어그야 더그야 지화자 좋다 돈 얼마나 실었음나 돈 얼마나 실었음나 오만칠천 냥 여덟 곱절 받았다누나 월명 사창 달 밝은 밤에 안팎 인물이 처절철 넘누나 뱃주인네 아주머니 인심이 좋아서 금가락지 팔아서 술 받아 오누나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만경창파에 배 띄워라 어그야너야 아하 어그야너야 아하 어그야너여 어허어허 어허어허야 간간 간다 아하 배 떠나간다 ..

장길산 5권 (25)

"사처가 어디에 있는가?" "운유방의 차가 객주입니다." "내일 그리로 찾아가겠다."일단 첫번째 타협은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석범철이가 정말로인삼 백 근을 무역해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사행 날짜와물품의 내역이며 사행 인원과 수행원의 승선 배치 등을 자세히 알아내려는 꾀였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물품이 실하고 정사와 부사가 타지 않은 실속 있는 무역선 한 척만을 습격하려는 것이었다. 이튿날 석범철이는 물치를 허사포로 보내어 정박한 배를 탐지케 하는 한편 백 근의 인삼을 준비하기에 고심하였다. 우선 돛점으로 사공을 보내어 인삼 열 근을 급히 내오도록 하고, 나머지 구십 근의 인삼은 굵기와 모양이 그럴 듯한 도라지로 채우도록 하였다. 열 근의 인삼을 포장하지 않고 채롱에 보기 ..

장길산 5권 (24)

"사행이 당관 객사에 당도하였습니다. 글피 아침에 허사포를 떠날 예정이랍니다." 우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였다. 헌데 어찌 날짜가 늦춰졌다더냐?" "감영에서 은의 차용이 늦어진데다 해주 부상 신복동의 차인들이 역관들의 종인으로 가담하여 인가를 받는 데 시일이 걸렸답니다." 우대용과 송도 곁군 좌장과 박성대는 서로 마주보며 빙긋이 웃었다. "역시... 대근이 성님의 제보가 틀림없었군. 글피라면 배를 정비하고 총포를 단속하며 아이들이 쉴 여유는 충분하다. 너는 지금 곧 돌아가라. 석서방도 함께 가도록 하게. 상부사와 서장관과 역상들은 따로 배를 탈 터이니 어떤 모양의 배가준비되어 있는가를 탐지하고, 물화의 내역은 어떠하며 수비하는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를 자세히 살폈다가 출범하기 전 미명에 돌아..

장길산 5권 (23)

한참이나 어수선하게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부상한 자들만 추려서 압송해 가는 모양인데, 별장은 곧이어 산채를 들이치자고 큰소리를쳤고, 수하 장교들은 감영의 거병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의논들을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공격의 세를 늦추어서는 안된다며 별장은 내일 날이 밝자마자 진의 군사를 더 내어서 산채를 들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일단 학령 부근에서 숙영을 할 모양이었다. 관군들이 호림을 빠져나갔을 때 숲속은 이미 캄캄하고 풀벌레들만이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그들은 바위 틈으로부터 기어나왔는데, 선흥이는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을 정도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우선 상의를 찢어서 묶도록 하고 오만석이도 부러뜨린 채 박아두었던 화살을 제 손으로 뽑았다. "산채로 가야지..." 선흥이가 땀..

장길산 5권 (22)

"우리두 곁에서 형편을 두고 보다가 아우님을 돕겠네." 그들은 산채의 바깥쪽으로 둘러싼 두어 길쯤의 돌담을 지났는데 짚더미들이 한 줄로 주욱 늘어놓여져 있었다. 아마도 바같 토벽이 점령되면 안에서 화공으로 시간을 끌며 탈출하려는 계획인 듯하였다. "제놈들이 짓쳐오면 얼마나 오겠나. 우리도 돕겠네. 정 버티기 힘들면 까짓 우리 산채루 이사오게." 오만석이가 말하였고, 곁에 앉아 의형제끼리의 얘기에 끼여들지 않고 있던 변가가 말하였다. "아니올시다. 겨울이면 몰라두 지금 같은 녹음지절에 달마산을 토벌하진 못하지요. 온 산골짜기와 등성이와 바위가 모두 우리들 은신처요, 우리는 숨어서 저쪽의 일동 일정을 한눈에 바라보며, 저쪽에서는어림짐작으로 산채를 안다 할지라도 우리를 볼 수가 없으니 벌써 싸우나마나 합지..

장길산 5권 (21)

비좁은 주막 안에 사람은 가득 찼으니 어디서 합을 겨루랴. 그러나환도 가진 사내가 뒷전에다 나직하게 말하였다. "만석이, 아랫것들을 맡아라." 입구에 섰던 키 큰 사내는 오만석이었고 칼 가진 자는 마감동이었다. 그들은 달마산의 강선흥을 만나기 위하여 해지점 주막에 들렀던것이다. 곁군 차림의 사내는 길안내로 나선 강말득이었으니 제아무리포도 군사들이라 하나 그들이 수걱수걱 포승을 받을 리가 없었다. 마감동은 칼을 정면에 세워 들고 포교를 노려보았고 포교는 쇠도리깨를쥐고 연신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다른 사람들이 상한다. 밖으로 나가서 결딴을 내자..." 감동이가 말하였다. 평복의 포졸들은 칼 가진 자와 육모방망이를 가진 자들로 왼쪽 방에 서 있었다. 때마침 뒤곁에서 중노미를 잡아끌고나오던 포졸들이 그..

장길산 5권 (20)

이튿날 그들은 남의 눈에 띌까 하여 우선 은밀히 읍내로 나가 별장이며 하리들과 모의하여 손발을 맞춰놓은 다음에 고만이는 황급히 창암골의 불타산 천년암으로 돌아갔다. 첫봉이는 며칠이 지나서야 천년암 산채로 돌아왔다. 거병하기로 모의된 날 별장은 군졸 이십여 인에 변복을 시켜서 곁에는 주지가 붙여준 길 안내인을 이끌고서 사슴 사냥이라도 나가는 행색으로 불타산에 들어섰다. 그들은 실지로 사슴 사냥을 하면서 불타산의 동편으로 접근해 올라갔다. 마침 산봉우리 하나만 넘으면 불타산성의 옛터였으니 거기서 날이 어둡기만을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우선 군졸 하나가 등성이에 올라 정탐하고 돌아와 붉은 치맛자락이천년암 곁의 나뭇가지에 걸려서 펄럭이더란 얘기를 했다. 그것은 즉아무 때나 밀고 들어와도 된다는 군호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