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191

장길산 6권 (26)

김식은 아까와는 반대 방향에 마감동을 바라보며 섰다. 그와 엇갈리는 순간에 감동은 돌 아 선채로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내쉬어 북받치려는 긴장과 분노를 흐트러뜨렸다. 옆구리에 베인 상처로하여 몸이 굳어지면 어깨와 팔이 뻣뻣해져서, 상대의 변화무쌍한 칼날을 제 때 받아 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마감동은 시선을 제 발의 서너 발짝 앞에다 떨구고 칼을 늘어뜨린 채 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가운데 김식의 숨소리의 변화와 높낮음이 또렷이 들려왔다. 달이 지면 그는 죽는다. 마감동은 이제 자신이 있었다. 판단으로 싸우는 자는 감각으로 대응하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는 검을 배운 이래로 월정사의 풍열스님으로부터 마음을 비우는 법을 다시 배웠다. 칼은 그의 마음처럼 무심해질 것이다. 어둠이 내리면 김식..

장길산 6권 (25)

"당장에 그것들을 처치해버려야지." "두어라." 김식이 장교에게 눈짓으로 앉으라고 일렀다. 김식의 주위로 장교들이 둘러앉았다. "내가 뭐라더냐. 벌써 오랫동안 놈들이 구월산에 진치고 들어앉아 있었으니 구월산 인근 은 도적들의 판도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송화 무더리라면 구월산 서쪽에서는 가장 오래 된 장터이다. 이 장터 놈들이 모조리 적당이라고 여겨야 한다. 우리는 두령의 모가지만 가져가면 되니까 섣불리 나서지 말아야지. 내일 정오까지 이 주막 안에 꼼짝 말고 엎어져 있어야 한다." 장교 하나가 김식에게 물었다. "부장, 만약에 화적들이 떼지어 여길 습격해 오면 어쩝니까?" "이들은 보통의 도적이 아니다. 스스로 활빈의 무리라고 자처한다. 수렛고개에서 소두령 되는 자의 태도를 보았겠지. 아랫것..

장길산 6권 (24)

"들었는가, 수렛고개의 네 부하들은 모두 죽고 남은 두 사람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우리는 저 둘을 끌고 내려갈 터인데 너는 산채에 가서 네 두령에게 알려라. 내일 정오 무렵까지 송화 무더리 장터에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라고 전하란 말이다. 곁에 누가 있으면 안된다. 그대와 둘이서 오도록... 만약 그가 의기있고 담이 있는 자라면 내가 한 번 겨루어보겠다." 소두령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김식을 노려보며 물었다. "기찰포교들인가?" 김식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너희 두령에게 포한이 있는 사람이 보내서 왔다." "어떤 포한이냐?" 김식의 곁에 있던 장교가 거들었다. "우리도 너희들처럼 먹고사는 사람들인데 구월산이 탐이 나서 그런다. 우리 두령은 너희 들 때문에 해서에서 몸둘 곳이 없어졌..

장길산 6권 (23)

좌수가 통인과 더불어 마룬내를 떠나 들판을 허둥지둥 달려갈 때 어찌나 놀랍고 기가 막혔던지 어서 돌아가 화채그릇에 시원한 꿀물이나 타서 벌컥이며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우선 갈증이 심하여 침이 마르고 목구멍이 뻑뻑한지라 아무데나 들어가서 냉수 한 사발이라도 얻어먹으려 하였다. 가까이 외딴 농가가 있거늘 통인 아이를 시켜 물을 얻어오게 하였다. 통인이 달려가 물그릇을 들고 오는데 물빛이 누르끄름 하였다. 좌수 어른 살펴볼 사이도 없이 대접을 들이켜고는 죽을상이 되어서 뱉어냈다. "에익 퉤퉤, 이 무슨 구린내냐?" 그때에 사립 밖을 내다보던 아낙네가 하도 어이가 없는지 한마디 하였다. "때가 기근이라 물을 급히 찾길래 그래두 사람 사는 인정이라 진간장을 타서 주었더니, 참 별사람 다 보겠네." 좌수가 망신을..

장길산 6권 (22)

"대에 뽑힌 사람들은 강변에 나가 지키다가 세 불리하면 달아나는 척하고 갈대밭에 숨으시오. 그리고는 좌우로 갈라져 포졸들이 들어올길을 터놓으란 말이오. 그러면 저들이 안심하고 언덕 아래까지 쫓아오면 여기서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돌을 던져서 쫓아내고 갈밭에 숨었던 패가 합세하여 협공하십시다. 미곡을 차압당하면 어루리벌의 굶주린 백성들은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요." 이윽고 오십여 명이 먼저 세 곡선이 대어졌던 마룬내 냇가로 나가서 늘어서고 언덕 위에 남은 사람들은 아이들까지도 돌을 그득히 무릎 아래 쌓아두고 기다렸다. 아이들과 젊은 총각들은 꼭 대보름날의 투석놀이나 되는 듯이 희희낙락하며 연습팔매를 한답시고 허공중에 돌을 날려보는 것이었다. 멀리 강변을 따라 뛰어오고 있는 포졸들의 행렬이 보였는데 육모방망이..

장길산 6권 (21)

키 큰 사내가 마당 구석의 헛간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자, 하인들은 그를 따라서 헛간으로 들어 섰다. 쫓기던 자는 우선 돈을 헛간 안쪽에다 던졌고, 앞섰던 자가 그를 지나쳐 안으로 뛰어드는데 뒤이어 다른자가 앞을 다투며 들어선다. 키 큰 사내는 뒤미처 들어오던 자의 배를 무릎으로 올려 찼다. 그가 입을 딱 벌리더니 배를 안고 무릎을 끓었으며, 다시 이번에는 돈꿰미를 주으려고 엎드린 하인의 등판을 발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목에 헉, 걸리는 듯한 숨소리가 들리며 길게 뻗으니, 키 큰 사내는 널브러진 두 하인의 다리를 잡아 헛간 깊숙이 끌어다 두었다. 그는 저고리를 잡아 흔들어 바람을 내면서 유유히 대문으로 가서 빗장을 빼고 한쪽 문을 열더니 고개를 내밀었다 십 여 명의 사내들이 안으로 우르르 밀려들었다. 그들의..

장길산 6권 (20)

동지는 침통한 얼굴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에 완전히 기진맥진해버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마음에 없는 진휼을 베풀었다고는 하나 벌써 태산 같은 선행으로 인근 사방에 알려지고 사또는 감영을 통하여 조정에 장계까지 올렸으니, 이제 와서 도적들의 강압적인 사주를 받았다고 광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어서 일이 조용히 끝나 종손이 무사히 되돌아오기만 바랄 뿐이었다. "어서 보내주시오." 동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인배들이 아무리 세상 도리에 어둡다 할지언정, 굶주리는 자들에게 미곡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대하다 보니 모두들 진휼이 어떠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른바 관상가에서 말하는 길기라는 것은 선행을 한 뒤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안색을 말하는 것이니..

장길산 6권 (19)

사내는 자기를 믿어주는 것만 반가운지 산 위로 올랐다. 김기가 말득이에게 당부를 하였다. "자네는 여기서 형편을 보았다가 관군이 모두 돌아간 뒤에 조동지네 집으로 들어가 식객을 자청하게. 아마 다른 마음은 품지 못할 테니까." "젠장 나는 매일 파장이나 보구 다니라는 게로군." 투덜대는 말득이만 남겨두고 그들은 뒷산을 넘어갔다. 산을 한참이나 올라서 동현령으로 들어가니 깊은 골짜기에 찬바람이 일어나고 물이 마르지 않은 제법 큰 사내가 나왔다. 그 위에 빈터가 있었는데 다 허물어진 집 한 채가 보였다. 앞서 가던 사내가 말하였다. "바로 여기입니다. 극락사라는 절이 있던 곳입니다. 예전에 주지를 역모에 몰아 죽이고 장정들을 동원하여 불을 질러버렸지요. 그 뒤로 워낙 사연이 있는 절터라 아무도 올라오지 않고..

장길산 6권 (18)

"아서라... 누구든지 거기서 세 걸음만 떼면, 다리몽갱이를 분질러서 머리에 이게 해주지."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멍하니섰는 총각의 작대기를 덥석 잡았다. 상대가 놀라서 지레 겁을 먹으며 작대기도 놓고 물러났고, 선흥이는 그것을 두 손아귀에 쥐어 어깨에다 약간 힘을 주더니 삭정이처럼 부러뜨렸다. 아무리 몽둥이라 하나 굵기로 보아서는 무릎에다 대어도 한참힘을 써야 할 텐데, 그것을 허공에서 잡고 간단히 꺾어버리는데야 누가 보아도 완력이 대단하였다. "좀 비켜요 비켜." 마을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과 선일이와 말득이가 나타났다. "김서방! 저놈 입 좀 닫아놔라." 길산이 빙그레 웃으며 담장 위로 내밀어진 조동지네 하복의 머리를 눈짓하였고, 선일은 땅바닥을 한바퀴 휘둘러보고서는 맞춤한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

장길산 6권 (17)

노파가 가냘프게 중얼거리는데, 바람맞이를 하고 앉으니 한결 나은 모양이었다. 노파의 이마에는 땀이 번져 있고 입술에 백태가 끼어 말라붙었다. 사내가 봇짐을 끌어다가 손을 쑤셔넣더니 쌈지 같은 주머니에서 한약 비슷한것을 한줌 꺼내었다. 그가 아이에게 그릇을 내어주며 부드럽게 일렀다. "가서 물을 떠오너라." 아이는 할머니만을 바라볼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구황하는 황랍환이다. 이걸 잡수시면 곧 나으신다." 그러나 노파는 아이의 손을 꼭잡고 놓지를 않았다. "그만두오. 내가 더 살아서 무얼 하겠소. 저것이 이제 노중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아 죽고 말터이니, 먹을 것이나 있거든 내 보는 앞에서 저애를 먹여주었으면 그게 약이지요." 사내가 말하였다. 그는 노파의 빈 사발을 들고 문루를 나서서 숲을 향..

장길산 6권 (16)

"성님께서 해주신다면야 저두 할말이 없습니다." 마감동이도 새삼 장가드는 얘기가 나오고 보니 어쩐지 심란한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이사나 끝내구 보십시다." 감동이가 말하였다. 그믐께에 가서야 산채가 대강 정돈이 되었고 길산을 비롯한 식구들은 모두 구월산으로 돌아갔다. 오만석은 구월산 산채에 남고자 하였는데 마감동이도 그 생각은 같았다. 김기도 그의 고향이었던 봉산 근처로 식구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꺼려하였으므로 결국 동선령으로 이사갈 가족이 있는 것은 길산과 말득이뿐이었다. 김기는 식구들을 탑고개에 남겨두고 혼자서 동선령으로 가기를 원하였다. 이따금씩 은율로 가서 식구들을 돌아보고는 다시 산채로 오르면 될 것이라 하였다. 오만석이와 마감동이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가리라 다짐하였다. 길산은 산..

장길산 6권 (15)

나리가 손가락질 하기도 전에 하인들은 나중에 집에 가서 치를 곤욕부터 두려워 제가 미리 지나치게 나올밖에. 우선 나간다는 게 욕설이었다. "이런 망할 자식 같으니. 예가 어디라구 초상집 개처럼 얼씬거려." "예가 어디긴 어디야. 구휼청 활인서두 아니구 청보에 싸논 개똥 두엄께지." 선비들이 저런 저런, 하면서 손짓 입맛 다시기 바쁘니 하인은 오랜만에 주인들 앞에서 꿩잡은 매의 행세라 신이 나서 손찌검을 하였다. 볼퉁이를 찰떡 치듯 하는 판인데, 아무리 흥복이가 별다른 재간이 없다고 하나, 한창 시절에 주막거리에서 당초망이란 소리를 듣던 사람이라, 슬쩍 손을 올려 막으면서 손가락을 비틀어 쥐었다. 그리고는 한바퀴 꺾어서 등뒤로 밀어붙였다. "글 한다는 것들이 앉아서 굶주린 양갓집 유부녀나 희롱하고 있으니,..

장길산 6권 (14)

몽둥이로 후리니 허리를 얻어맞은 포수가 숨막히는 소리를 내지르며 넘어졌다. 몽둥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는데, 마을 장정들이라야 모두가 춘궁에 푸성귀죽이나 마시고 양지쪽서 해바라기하던 사람들이라, 앞으로 내어보는 작대기며 괭이 쇠스랑에 힘이 들어가 있을 리가 없었다. 선흥이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부딪치자마자 맥없이 퉁겨져 나가거나 자루 중동이가 꺾어져버린다. 맨손이 된 사람들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횃불로 던져두고 멀찍이 달아났다. 선흥이는 얼른 돌아서서 떨어진 화승총을 포개어 들고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였고 그에 용기를 얻은 마을 장정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따라붙었다. 선흥이는 동산을 바라고 한참 뛰다가 일각이라도 벌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숲으로 들어서기 전에 휙 돌아섰다. 역시 저쪽에서도 소리만..

장길산 6권 (13)

임씨는 시동생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작은조카가 들어와 흥복을 빤히 올려다보았고, 그는 아이를 끌어다 무릎에 앉혔다. 아이는 극성스럽게 울더니 흥복이 놓아주자 제 어미에게로 가서 안겼다. "소문을 듣고 아주머니와 조카들을 안돈시키러 찾아왔습니다." 임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늦었습니다." "고생이 많으셨지요?" "벌써 오래된 일이어요. 삼촌이 이렇게 건장하게 살아 계실 줄은 몰랐어요." 흥복은 제 형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주머니가 여기서 편히 계실 줄은 저두 몰랐습니다." 여자는 눈을 치뜨고 흥복을 쏘아보았다. "그러면 절더러 혀를 깨물고 형님을 따라 죽으라는 말씀인가요. 관가에 함께 잡혀가서 형률에 따라 관비로 떨어질 제 나는 죽은 거나 매한가지였어요. 여기..

장길산 6권 (12)

아낙네는 소리를 죽여 울기 시작하였다. 관에서 민변으로 작당한 고장에 대한 보복은 당시에 매우 혹심하였던 것이다. 고장의 등급을 강등시키고 마을을 폐하여버리기도 했고, 아예 양민으로서 살아갈 모든 권리를 방기해버리는 수도 있었다. 춘궁기에 환곡 내주는 일로 말썽이 생겼다 하여 이서배들은 아예 이 마을을 외면하는 모양이었고, 그 보복이 몇 년 계속되는 가운데 느릅나무골은 몰라보도록 황폐하게 변한 것이다. 강선홍이는 장연에서 겪은 일이 있었는지라 그러한 내막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제가 읍내에 다녀오지요. 그리구 흥복이두 데리구 오겠습니다." "그이를 데려오면 안돼요. 누구든지 그이를 보면 발고할 테니까요." "저희 걱정은 마십시오." 읍내 주막에서 흥복이와 선홍이는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느릅나무골로 ..

장길산 6권 (11)

길산은 얼결에 일어섰다. 그러나 기왕에 일어선 김이라 다시 주저앉을 수도 없어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짧은 칼을 뽑았다. 그는 허참, 하면서 멋쩍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일단 판 안에 들어서니 길산의 본색이 원래 광대라 한바탕 놀아보고 싶기도 하였다. 그는 역시 나무 한 그루를 바라고 천천히 걸어갔고, 마치 그것이 놀이마당의 오리목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길산은 가볍게 두 발을 굴러보고 나서 나무 바로 밑에까지 번개 곤두로써 몸을 공중회전하여 다가갔고, 여선참사로 칼을 던졌다가 다른 손으로 바꿔 쥐면서 칼살판을 뛰는데 나무의 전후좌우로 눈보라가 뽀얗게 일어나 그의 몸이 보이질 않았다. 마치 독수리가 나무 주위에서 힘차게 퍼덕이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살판으로 허공에서 떨어져 발이 땅에 닿자..

장길산 6권 (10)

정면에는 감동이가 있었고 보다 아래편에는 선홍이가 있었는데, 감동이는 환도를 쥐고 오르다가 그를 바라고 달려오는 멧돼지를 보자 주춤하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달아날까 옆으로 샐까를 눈가늠해보다가 너무 눚은 걸 알았다. 짐승이 감동이의 사추리를 받아넘기려고 달려들적에 감동이는 옆으로 피하면서 환도를 내리그었다. 짐승이 울부짓으면서 감동이의 허벅지께를 들이받고 빠져나갔고, 이어서 선홍이가 한손에 엄파를 치켜들고 섰다가 부상당한 멧돼지와 맞섰다. 둔중한 어갯죽지에 칼을 맞아서 짐승도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상처는 치명적이긴커녕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멧돼지는 흉포해져서 선홍이를 허공으로 날려 보내려는 기세로 달려들었다. 선홍이가 뚝심이 없었으면 그대로 짐승의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슴에 받고 뒤로 나가떨어졌겠지만, ..

장길산 6권 (9)

"전번에 오백 냥과 곡산에서 만둥에게서 빼앗았던 은이 대략 칠백여 냥 되는 듯합니다. 미곡이 삼십 석, 포목이 이십 동쯤 됩니다." "허허, 꽤 많이 모아두었구나. 그만하면 우리보다두 부자네. 재물은 모두 자네가 가지려는 것은 아니겠지." "원 천만에요. 그런 생각을 하다니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비축해두고 있습지요. 대개는 여기 식구 중에 여염에 남아 있는 가족을 도우려는 자들이 있어 이만 재물도 얼마 안 가서 식량과 고른 분배로 다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몇 차례나 분배를 하였는가?" "예, 두어 차례 하였습니다. 대개는 섣달 그믐께에 모두 모여서 의논을 정하지요." "그렇게 하였다면 한 사람에 백여 냥의 차례는 돌아갔겠지?" "아마 이십여 냥씩 돌아갔을 겁니다. 포목으로 받은 자나 미..

장길산 6권 (8)

흥복은 비틀거리며 고개를 넘어 거북이골로 내려가보았지만 역시 먼저 떠났던 을량의 일행도 보이질 않았다. 그는 눈 위를 여기저기 살피다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어 있는 부담을 발견하고는 눈속에서 돌멩이를 뽑아내어 뚜껑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판자가 뻐개지고 틈이 벌어지자 그는 부리나케 손을 집어넣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움켜쥐었다. 그는 손에 쥔 것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는 맥없이 던져버리고 말았다. 다른 부담을 부숴서 다시 한번 살피니 마찬가지였다. "그랬구나..." 부담마다 가득 들어있는 것은 은이 아니라 자갈돌이었다. 그들은 자갈을 짊어지고 허겁지겁 달아나느라고 괜한 전력을 모두 소모해버렸던 것이었다. 흥복은 드디어 자기가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누구일까, 관군인가, 관군이라면 그를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

장길산 6권 (7)

그자가 병장기 세워두고 내려오는 기색을 보자 말득이는 얼른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문을 빠끔히 열어두고 기다렸다. 그자가 마루에 와서 머뭇거리는지, "이 사람 어디 갔나..." 어쩌구 하며 올라서는 기척이 들렸고, 말득이는 크, 하는 소리를 냈다. "거 술 한번 독하다." 다급해진 파수꾼이 방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는데 말득이는 지체없이 그의 멱살을 잡아끌면서 단번에 정수리를 돌멩이로 내리쳤다. "요게 바로 벽력주라구, 풍도 염라국 야차들이 즐겨마시는 술이니라." 그는 넙죽하니 뻗어버린 자의 발목을 잡아 질질 끌어다 구석에 눕혀두고, 밖으로 다시 나왔다. 말득이는 그제서야 허리에 한 손을 찔러넣고 산채 어귀로 슬슬 내려갔다. 양편 바위에 섰던 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어디 가려고 그러나." ..

장길산 6권 (6)

"나도 오죽하면 어릴 적의 동무를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러 다닐 것이오. 내가 보아허니 산에서 썩기는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오. 내가 지난 사흘 밤을 이리저리 수심 걱정으로 세우며 보내던 중에 내게도 좋고 당신께도 좋은 일 한 가지를 생각해냈소그려." 최흥복이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김기는 말하였다. "만약에 이 돈이 네 배가 되어서 돌아온다면 어떻겠소?" 최흥복은 한바탕 웃었다. "그러면 배로 불려서 돌려드리지요. 천 냥을 드리겠습니다." "농이 아니요. 대금을 벌 방도가 있소. 다만 내가 꺼리는 것은 이것이 국법을 어기게 되고 화적과 공모하는 일이라서 그러오. 허나 박복한 놈에게는 계란에도 뼈가 있다고, 도무지 이 돈 내놓고는 돌아가지 못할 형편이 되었구료. 내 평생 처음으로 뒷길로 지나갈까 생..

장길산 6권 (5)

"좌우지간 내가 저자로 다시 나가야만 환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찌할 터인가?" "그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황주에 거래하는 자가 여럿이니 달포만 기다리면 될 터이다. 그동안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사백냥이라면 너무나 싸군. 생각해보아라. 선화당에 종놈을 재우고 먹인다면 꿈이나 꿀 일이겠는가?" 흥복이와 둘러섰던 그 식구들이 소리를 내어 요란하게 웃었다. 김기가 말하였다. "달포까지 기다릴 건 없다. 감영에서 온 비장이 어음을 주며 말하기를, 급하면 동선관에서도 환전할 수 있다 하였으니, 나는 여기에 남고 우리 아이를 보내어 즉시 가지고 올라오도록 함이 어떻겠는가?" "음, 하루라도 여기서 빨리 나가구 싶겠지. 좋다, 만약에 돈이 올라오지 않으면 너는 죽는 몸이다. 오늘은 기왕 늦었으니 명일 날..

장길산 6권 (4)

"틀림없이 내막을 소상히 꿰는 자가 미리 계획하였군." 김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졸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급히 의원을 데려다 보이니, 원행하다가는 목숨을 잃는다기에 주막에 그대로 눌러앉아 며칠을 묵으며 차도가 있기를 기다렸습니다만... 제 소견으로는 가는벌에서 우리를 노리던 자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은을 싣구 온다는 걸 그때에 알았을 테니까요." "세평이라면 바로 지척에 자비령 맥이 있지 않은가." 김기가 말하였고, 천동이가 덧붙였다. "글세 따져보나마나 최가네 일당이 분명하다니까요. 수년 전에 문가가 몰락한 뒤에 춘천놈 최가가 자비령의 산주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놈들은 도모할 노릇이 도적질밖에 없으니 그런 곳으로만 꾀가 돌아가겠지요. 우리 처지가 이러니 관가에 발고할 수도 없고..

장길산 6권 (3)

과연 그제서야 문점손의 전령은 쾌히 응락하였다. 흥복의 생각으로는 아직 자비령의 세력 판도를 모르고 있었으며, 우리 지금 형세가 불리한데 환난을 불러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위세를 부리려고 열 오에 오십여 명의 도당을 자랑하지만 그것은 과장일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에 여기서 기반이 튼튼하고 수가 여럿인 점만은 분명한 듯하니 자기네가 불리할 것은 틀림없었다. 최흥복은 식구들과 더불어 잠시 의논하였다. 세 불리할 제 져주고 나중에 실해진 연후에 도모하는 것이 병법의 순서라 하여 의논이 정해졌고, 흥복과 문점손의 전령은 함께 여계산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여계산은 자비령 연봉의 허리나 마찬가지라서 예전에는 산성이 있던 곳이었다. 흥복은 여계산 산채로 올라가 문점손에게로 안내되었다. 문점손이는 작은 키에..

장길산 6권 (2)

새벽까지 멀찍이 지켜 섰던 사람들은 동이 훤하게 터오자, 시장기에 피로에 무엇보다도 싱겁고 또한 후환이 두려워져 누가 제 얼굴이라도 알아볼까 하여, 소피 보는 척 빠지고, 부르러 가는 듯 새고, 첩 들어온 뒤 뒤주 밑창 드러나듯 휑뎅그레 줄어들고 말았다. 드디어 관졸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몰라도 느릅나무골 사람들은 기왕에 화냥년 소리 듣기는 마찬가지라서, 저지른 짓이 있고 보니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들은 작대기를 버리지 않고 대룡산으로 밀려 올라갔고 관군들은 사방의 활로를 끊고 그들과 대치하였다. 반나절쯤이나 족히 되었을까, 그들의 가족들이 마을에서 하나둘씩 끌려나와 자식이나 형제나 지아비를 부르면서 애소하니 더는 견디지 ..

장길산 6권 (1)

장길산 6 권 제3부 잠행(상) 제1장 황민 1 곡산 수안 방면에서 뻗어 내려오는 큰 산령이 서흥 봉산을 지나서 황주 극성진에 이르러 끝나는데 서흥 쪽의 북방로는 절령을 지나고 봉산 방면의 길은 동선령으로 향하여 있었다. 원래가 절령의 통로를 국도로 썼으나 너무 험준하고 여름 장마철과 겨울의 강설기가 되면 행로에 매우 곤란하여 결국은 동선령으로 옮겨 절령역은 봉산의 검수역말과 합치게 되니 자연히 절령길이 두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절령은 봉우리가 높고 험하며 골짜기가 깊어서 병마가 접근하기 어려운 요새지였으니 그야말로 일부당관 만부막적의 고장이었다. 이곳이 자비령으로 불려지게 된 것은 절령 북쪽에 나한당으로도 일컫는 자비사라는 절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원행하는 사람들이 자비사에 들러 행로의 무사함..

장길산 5권 (35,完)

"내 돌아왔네 돌아를 왔네. 못 올 길을 내 어이 왔나 이별에 두 자를 깨치러 왔구나. 우리 인생 죽어지면 만수 장림에 운무로구나, 만첩청산 썩 들어가니 잔디 잎으로 이마를 삼고 두견 접동으로 벗을 삼고석침 베고 누웠으니 송풍은 거문고요 두견성은 노래로구나. 살은 썩어 물이 되고 뼈는 썩어 황토가 되고 삼혼칠백이 흩어질 제 어느 동무가 불쌍타 할까 생각하면 맘성이 좋질 않아 못 살리로구나. 휑뎅그레 빈방안에 홀로 앉았으니 임이 오며 누웠으니 잠이 올까. 수다하니 몽불성이라 잠을 이뤄야 꿈을 꾸고 꿈을 꾸어야 임 만나보지. 임 사는 곳과 나 사는 곳은 남북간 수십 리에 멀지 않건만 어이 그다지 못 본단 말가 춘수는 만사택하니 물이 많아서 못 오는가. 하운이 다기봉하니 봉이 높아 못 온단 말가. 봉이 ..

장길산 5권 (34)

"요즈음 청국 가는 사행선이 결딴났다고 황당선 기찰에 해서 수역이시끄럽다더군. 혹시 우두령 짓이 아닌가 몰라." "남이 말하는데 흥을 잡치면 어떡허우. 전선을 때려잡구 사행선 한척을 고스란히 먹었지요." "소문에는 청인들이라든데. " "그게 다 둔갑술이오." 길산이 귀가 트이는지 재빨리 물었다. "그 집에 화포가 있어?" "화포가 두 대에 화승총이 열 자루쯤 된다네." 길산은 다가앉았다. "화포야 필요없겠지만, 우리두 화승총을 구할 수 없을까?" "몇 자루나 쓰려고?" "우선 다섯 자루쯤... 많아도 좋고." "그래, 나하구 형제처럼 지내는 이가 있으니 곧 사람을 보내도록 허지." 우대용은 이경순을 생각하였고, 길산은 매우 기뻐하였다. "우선 다섯이지만, 더 부탁할 수 있겠지. 비용은 얼마나 들까?..

장길산 5권 (33)

길산이 다시 말하였다. "이번에 성님과 내가 대강 짧은 일정으로 돌아보았는데, 무엇보다도백성들의 제일 가까운 적들을 하나씩 처단해나갈 일이 급하다. 곡괭이와 호미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우리가 미리 경고하고 기간을 두고 본연후에 가차없이 징치한다. 그래서 다른 토호나 관리들에게도 두려움을 주어야지. 대개 반수가 당하고 나면 나머지는 죽어 있는 거나 진배없을 게다." 선흥이가 거칠게 말을 꺼내었다. "먼저 장연을 들이치도록 해주오. 첫봉이의 원수를 갚아야지." 김기가 만류하고 나섰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거병하였다간 낭패를 보구 마네. 우리가 일을거듭해가노라면 틀림없이 알려지게 될 것이고, 알려진 연후에는 감영이 문제가 아니라 조정에서 들고일어나 우리를 토벌하려 하겠지. 우선 민심을 얻는 쪽으로 신중하게 ..

장길산 5권 (32)

대근이 운을 떼는데 밖에서 궁금하여 엿듣고 섰던 총각의 모친이 문을 벌컥 열며 말하였다. "우리 윤덕이 장가를 보낸다구요?" "뵙겠습니다. 저는 송도 사대전 좌장으로 있는 박아무올시다." 그러나 노파는 사대전이 무엇인지, 좌장이 어느만큼의 직함인지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양 되묻는 것이었다. "그래, 손님네 여식이 있으시우?" 윤덕이는 대근이 장가 이야기를 거냈을 때 할말을 잃고 두리번거리다가 노모가 다시 쫓아들어와 새겨 물으니 몹시 쑥스럽고 부끄럽던지토방 위에 갈아놓은 거적대기를 자꾸만 뜯어냈다. "얘야, 그만 뜯어라. 짚 날린다." "장가는 무얼... 어디 색시가 있담." 최총각은 벌써부터 볼이 벌개져서 고개를 숙이는데 색시 소리를 하는 꼴이 딴에는 몹시 땡기는 눈치였다. "제 친척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