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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7권 (25)

주모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중길이는 그의 친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살주계의 총대 청파 중길이가 잡히면 한양 성애의 모든 계원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그들은 지난번 큰 일을 해치우고 일단 중흥동 은신처로 몰려갔지만, 중길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서강 식구들과 거래하는 청파 난전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안되겠어. 댁은 새벽에 목멱산을 넘어서 서강으로 나가요. 서강에 가서 모신이네 주막을 찾아가지구. 모두 얘기해줘요. 중길이 만나거든 청파에 가지 말라구." 포교의 눈에 띄었으니 쌍이문방 바침술집은 이제는 빈집이 될 판이었다. 강변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해가 솟은 지 오래였건만, 새벽처럼 느껴졌다. 서강은 흉년을 타서 그런지 예년의 가을보다는 한산하여 배도 몇척 떠 있지 않았고 문을 닫아..

장길산 7권 (24)

"네가 그렇게 해라. 달아나서 너희 언니 동무들께 알려주어라. 끝까지 입을 다물고 죽었다고..." "어머니, 지금 나가겠수." "너는 네 언니가 어디로 나다니는지 잘 아느냐?" "예, 압니다. 쌍이문방의 바침술집에 잘 간다고 합디다." 북성의 아우가 일어나려는 것을 그 어미가 잡아 앉혔다. "오늘은 안된다. 너희 언니는 기왕에 죽을 몸이야. 내일 시신이 나온 뒤에 빠져나가거라. 내가 짐을 다 챙겨놓겠다. 그런데... 너 내가 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겠지." 어미는 작은 아들들의 두 손목을 꼭 움켜쥐었다. "저것을 그냥 두면 밤새도록 갖은 악형을 당할 게다. 사랑채의 담이 아무리 높고 광문이 철옹성같이 단단하여도 저것의 단련받는 소리가, 너무나 똑똑히 들리는구나. 가슴에다 대못을 쾅쾅 박는 듯하여 나는 아무..

장길산 7권 (23)

"기간 평안하였습니까?" 목내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번에 물어왔다. "그래 포청의 종사가 무슨 일로 내 집에 왔는가?" 최형기는 방안의 사람들 모두가 자기를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중의 하나가 말하였다. "자네는 김익훈의 문하에 있던 자가 아닌가?" 최형기는 눈길도 주지 않고 목내선에게 말하였다. "영감께서 아시듯 저는 조정의 형편에는 어두울 뿐만 아니라, 낮고 천한 일개 무장으로서 여러가지 구설은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영감 신변에 위급한 일이 생겼기로 의논드릴까 하여 감히 찾아뵈옵는 것입니다." "위급한 일이라니..." "주위를 물리쳐주십시오." 목내선이 밤문객들에게 눈짓하였다. 그들은 아무 말 못하고 자리를 떴다. 방안에는 이제 목내선과 최형기 두 사람뿐이었다. 최형기가..

장길산 7권 (22)

"작년에는 사흘이 멀다하고 자주 왔으나 금년 들어서는 어쩐지 뜨음하여 한 달이면 고작 한두 번이었습니다." "그래, 근래에는 언제 왔었느냐?" "열흘 전에 왔다가 자고 갔습니다." "무슨 말이 없던가?" "곧 우리를 시골로 데려간다고만 하였지요." "양식이나 돈을 주더냐?" "양식은 꼬박꼬박 보내옵니다." 최형기는 한숨을 쉬고 나서 일어섰다. 그제사 여인이 피투성이의 입언저리를 소매로 씻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나으리... 우리 주인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최형기는 여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부장에게 일렀다. "부장은 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 집에서 며칠 지내야겠다. 놈이 언제 찾아올지두 모르니까, 잘 감시하도록 하여라." "이년은 어찌할까요?" 최형기는 여자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자를 잡을 ..

장길산 7권 (21)

산지니는 바로 뒤에 마루를 지나 뒤꼍으로 나가는 쪽문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뛰쳐나가 뒷담을 넘어 청량사쪽의 숲에까지 달아나,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리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산지니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산지니가 마루로 돌아서자마자 단숨에 쫓아들어와 그의 뒤통수나 등짝을 도리깨로 내리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계원이 아니우. 덕구한테 받을 돈이 있어서 들린 게요. 댁네가 계원들인 모양인데 포청에 가서 찌를 테요." 산지니는 짐짓 그들의 주의를 혼란시키느라고 엉뚱한 말을 던져보았다. 앞에 섰던 사내가 자기 동료들을 돌아다보았다. "뭐하는 거냐. 놈은 틀림없는 혈당이다." 삽짝에 섰던 자가 말하니 그는 쇠도리깨를 쳐들며 다가섰다. 산지니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

장길산 7권 (20)

"최형기가 이리로 오구 있소. 이 집이 발고되었지. 검계의 집합처로 알려졌단 말이우." 덕구는 안색이 싹 바뀌며 욕설부터 나왔다. "이런 염병 앓다 배창자가 꿰어질 자식들 같으니라고... 기껏 오갈데 없는 무리를 거두어주었더니 돌아서서 댓진을 먹이는구나. 허, 이거 작두 위에서 춤추게 생겼군." 중길은 혹시나 그가 박쥐 구실을 할까 걱정이 되어 궁지로 사정없이 몰아세웠다. "이미 주인장의 이름이 나았을 게요. 검계의 장물 와주라고 발고가 되었을 게요. 어서 식구들 데리구 솔부리로 떠나시오." 덕구는 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멍하니 섰다가 다시 뭐라고 욕설을 중얼거리며 안채로 들어가 부산을 떨었다. 중길은 다시 안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흥인문에서 포도 군사들이 모이는 것을 보구 달려왔으니 곧 들..

장길산 7권 (19)

중길은 살주계의 계원들을 모아 목내선의 집을 급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친척붙이 가운데 목대감이 가장 아프게 여길 대상을 고르려다가, 직접 목내선을 들이치기로 하였던 것이다. 최형기가 총에 맞아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소문이 배오개나 혜정교 또는 사대문 밖의 저자 난전에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모든 왈짜와 무뢰배들은 한결같이 통쾌하게 여기고 있었으니, 그동안 저들은 최형기의 빈틈없는 기찰에 몰려 옴치고 뛸 수도 없었던 탓이었다. 중길은 이제부터 과감하게 활동하여 좌포청을 들이치고 남부 살주계의 계원들까지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중이었다. 최형기가 없어진 저자는 이제 살주계와 검계의 손바닥 안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동 옹장이네 집에는 중길이를 비롯한 계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

장길산 7권 (18)

산지니는 저녁을 먹고 나서 솔부리 졸개들 중에 연배가 높은 자에게 일렀다. "내가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시동이가 돌아오면 기다리라고 하게나." "어딜 가시게?" "응, 갑갑해서 서강에 다녀올까 하고..." "그럼, 급한 일이 생기면 모서방네 주막으로 사람을 보내지." 산지니는 살변을 일으키고 도망 나온 광주 송파에 가겠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신이네 주막 얘기가 나오자 잠깐 다른 말을 해줄까 생각하던 산지니는 고작해야 하루나 이틀 차이가 될 터이라 굳이 밝혀두지 않더라도 별 문제가 없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내일 이맘때 돌아올 테니 염려 말게." 산지니는 주막 주인 최가를 불렀다. "내가 맡겨둔 포목 잡았다 치고 삼십 냥만 돌리슈." 주막 주인이 돈이 있겠는지 모르겠다며 들어갔다 나..

장길산 7권 (17)

시동이는 총을 자리에다 둘둘 말아 들고는 호동을 향하여 뛰어내려 갔다. 등뒤에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 느티나무 잎새가 어지럽게 흩날려 내려왔다. 그는 어둠속을 내달려 장경교에서 내려오는 길을 돌아 옹장이네 집으로 뛰어들었다. 들어서자마자 긴장이 풀린 시동이는 마루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길이와 주인은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시동이는 헐떡이면서 내뱉었다. "처치했네." "정통으로 맞혔소?" "여기를 단방에..." 시동이가 관자놀이를 검지손가락으로 찔러 보이고 웃었다. "잘했소." "어, 시원하다." 중길이와 주인은 제각기 시동이의 팔과 어깨를 잡고 흔들며 기뻐하였다. 삽짝이 열리며 총각도 뛰어들어왔다. "나는 방포 소리만 들었는데... 어찌되었나요?" "골루 갔다." 시동이는 껄껄 웃고 ..

장길산 7권 (16)

"일을 시켰으면 그만이지 무슨 죄가 있다구 사람을 가두고 벌주고 한단 말이우. 댁네가 양반이면 얼마나 양반이길래 이러시우?" "아니, 어서 매우 치지 않구 무슨 구경을 하구 섰느냐?" 왈자가 참견을 하자 하인들은 서로 질세라 물푸레나무 작대기를 바람이 일도록 휘둘러쳤다. 개천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지르면서 사이사이로 행역질을 멈추지 않았다. "느이 세도가 얼마나 가나 두구 보자. 아이구... 생사람 잡는구나." 개천이 소리를 지르다가 매를 이기지 못하여 쳐들던 고개를 떨구고 코를 공석에 처박고는 울음을 섞어 하소하였다. "애고, 살려주오." 왈짜가 댓돌 아래서 전선달에게 말하였다. "몸소 추달하실 것 없습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선달은 혀를 차면서 옆으로 돌아앉았고 왈짜가 개천의 머리 위로 걸어가 작대기..

장길산 7권 (15)

"헌데 색시가 절색이라며?" "다시 이를 말인가. 이 댁 안마님을 봤지?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살갗이 검든데..." "이봐, 아니할말로 쇠빛 살을 가진 여자는 득남에 무병장수에 감칠맛이 기가 막히다는 게여." "감칠맛이라니." "쉿... 저 자식은 귓구멍이 벽창호군. 타관서 경치구 코 싸쥐구 돌아갈라구 그래? 감칠맛이라면 알아들어야지." "게구녕인지 도끼 자죽인지두 모르구 오형제만 믿구 사는 애가 무얼 알겠냐? 오늘 자네 후장이라두 빌려주어." 음담이 슬슬 무르익는 양이었다. "망할 녀석, 감칠맛이란 새큰새큰하다가 시원하다가 자지러지다가 삭신에 힘 빠질 제 감질감질 올라오는 맛이여." "거 무슨 소린지 원..." "꼭 말로 듣기는, 막걸리 먹구 한밤에 일어나 마루 끝에서 오줌 내 깔기는 양 같군..

장길산 7권 (14)

개천은 주인을 장바닥에 메다꽂았다. 어이쿠, 소리를 내지르며 자빠진 주인은 안면을 땅 위에 갈아 코가 터져서 주홍빛이 완연하다. 개천은 귀주머니를 빼앗아 들고 다른 주인께 뭇매를 맞기 전에 달아났다. 혜정교서 달아나 갈 데가 있겠느냐, 칠패로 배오개로 어슬렁거리며 돌아 다니는 중에 피곤하고 허기가 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명절 때마다 불려가던 역관네 집에 찾아가서 잘 통하는 하님에게 저녁을 얻어먹고는 다시 성내로 나왔다. 광통교 변이나 종루에 나가면 어디든 색주가나 기생 청루에서 그의 솜씨를 반겨주겠지만, 그는 오직 계사댁의 아씨를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경이 되어 행인의 통행이 뜨막해지자 그는 소공주동으로 향하였다. 개천은 계사 댁의 반화방 담장을 따라서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드디어 뛰어넘을 ..

장길산 7권 (13)

심생은 이 편지를 받고 자기도 모르게 울음과 눈물을 쏟았으나, 이제 비록 슬프게 후회의 울음을 울지라도 무엇하겠는가. 그 뒤에 심생은 붓을 던지고 글공부를 폐하였다. 개천이 그 처녀를 알게 된 것은 심생이 북한산성에 올랐을 적의 일이었다. 개천이 숙수도가에서 손님을 기다리는데, 여인 두 사람이 세기와 숙수를 빌리러 왔다. 하나는 주인마님인 듯하였고, 다른 하나는 살림을 맡아보는 하님인 것 같았다. 도가의 주인이 불러서 나가니 이미 기명을 빌려서 꾸려놓았고, 이제 그것을 지고 갈 숙수와 일꾼 두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갑연이라네, 다녀오게." 주인이 말하였고, 장옷을 쓴 노마님이 물었다. "이틀 품이면 되겠는가?" "예, 하지만 야반에 해야 되는 일이라서 첫날은 두 배를 주셔야 합니다." "밤에 일을 ..

장길산 7권 (12)

문 양쪽에 창을 들고 서 있던 군사 두 사람이 마주 뛰어나왔다. 계원은 이제 꼼짝없이 잡히게 되었으나 무악재로 넘어가는 골목으로 휘었다. 곧이어서 광통방으로 나가는 길이 왼쪽에, 오른쪽에는 황화방 나가는 길이 보였으며 곧장 올라가면 소정동이었다. 계원은 광통방으로 나가는 길을 택하였다. 군사들은 흥화문을 멀리 떠나지 못하고 서버렸으나 포교는 아직도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중이었다. 계원은 연신 뒤를 돌아다보며 뛰었다. 이제는 사람이 많은 곳에 섞인다 할지라도 포교의 고함소리를 듣고 그를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행인들에게 곧 잡히게 될 것이다. 계원은 죽을 힘을 다하여 뛰었다. 잡히면 그가 죽는 일은 고사하고 한양성내에서 활동중인 모든 계원이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 그는 끝까지 해보다 안되면 스..

장길산 7권 (11)

중길은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는 혜정교에서 한구역 내려가 북으로 광화문까지 이어 있는 육조 앞길로 올라갔다. 안국방에서 내려온 길과 삼청동서 뻗은 세 갈래 골목과 사직단으로 나가는 길이 복잡하게 얽힌 쑥다리 앞에 와서 중길은 맞춤한 장소를 골라냈다. 벼슬아치들은 물론이요 한양의 일반 상놈들의 내왕이 잦은 곳이었고, 관청에서는 떨어지고 저자에는 가까워 유리한 곳이었다. 중길은 퇴로를 살피려고 쑥다리에서 안국방으로 빠져나가다 철물교로 하여 좌포청이 있는 정선방 파자교를 피하느라고 청계천 쪽으로 올라가 이교를 건너 연화방 호동에 이르는 길을 골라잡았다. 계속하여 관청 부근과 대로를 피한 셈이었다. 중길이 저녁밥을 먹고 나니 혜정교 잡전에서 옹기짐을 지고 돌아온 총각은 계원들이 연락을 받고 돌아갔음을 알렸다. ..

장길산 7권 (10)

억기는 말없이 아랫목의 한편을 비워주고 물러나 앉았다. 산지니는 억기의 풀려진 눈동자와 꺼칠한 안색에서 요즈음의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읽을 수가 있었다. "중길이란 자를 잘 아는가?" 산지니가 물었으나, 억기는 얼빠진 모습으로 미닫이의 격자창살을 물그러미 바라볼 뿐 대답이 없었다. 산지니의 눈꼬리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그는 마당 쪽에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릎을 당기며 억기에게로 다가앉았다. "어디 몸이 불편한 모양이군?" 산지니는 연신 바깥에 주의를 하면서 품속에 손을 넣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때에 억기가 고개를 돌려 산지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생각이 났소. 나는 댁을 잘 압니다. 남별대에서도 만났고, 쌍이문방 바침술집에서두 뵈었습니다." 산지니는 ..

장길산 7권 (9)

5 중흥동 싸움이 있은 지 달포나 지나서였다. 민심은 찬바람이 불수록 더욱 흉흉해졌고, 경강의 거래도 이제는 거의 끊겨서 성내에서도 굶주리는 집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아직 아사자나 동사자는 나오지 않았으나, 나라에서는 각 활인서에다 기민 구제를 지시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중량포에서 청량고개를 넘어 돌곶이를 건너면 바로 고암 오거리가 나오게 되는데, 이는 양주 포천로와 홍인문으로 들어가는 한양 직로가 나오게 되는데, 이는 양주 포천로와 홍인문으로 들어가는 한양 직로가 만나는 곳이었다. 부근에 동적전과 선농단이 있으니 임금이 친히 밭을 갈아 여섯 가지 곡물을 천신하는 곳이다. 즉 땀흘리고 수고하는 백성들의 삶을 나라님이 몸소 겪어 알게 한다는 곳인데, 바로 이 앞에 제기 고개요, 그 아래로는 왕십리의 드넓은..

장길산 7권 (8)

중길이는 미리 와 있었던 바침술집의 주모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그 여자는 산의 식구들과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 달려왔다. "어머니, 북성의 아우가 와서 저의 형이 목내선에게 죽었다구 했지요?" "그래... 무슨 일이야?" "남부 계원들이 모두 잡혔습니다. 왜 계원들에게 모이지 말라구 알려주지 않았소?" "나는 그저 자네한테 어서 알릴 마음만 앞서서..." 중길이는 주모를 붙잡고 뭐라고 더이상 질책할 수가 없었다. 사실 중길은 주모가 전해준 덕으로 청파에서 포교들의 함정에 빠진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계원 중의 누구인가가 총각에게 물었다. "억기가 그날 초동에서 나갔다던가?" "잘 모르겠습니다." 중길은 알았다는 듯이 주먹을 그러쥐고 손바닥을 쳤다. "그 자식 또 당마을에 나갔구나, 내가 기찰 대상이..

장길산 7권 (7)

"이놈, 죽이기 전에 오늘밤 군호를 말하여라." "예, 저... 전언은 천둥이오." "후언은 무엇이냐?" "땅입니다." 군호는 병조에 입직한 당상관이 친히 써서 봉함하고 매일 신시에 낭관이 받아서 각 군영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산지니가 군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차갑게 내뱉었다. "군기 누설은 사죄에 처한다는 것이 군무의 율령이다." 그는 칼을 들어 다친 군사의 목숨을 끊고는, 여럿이 달려들어 시체의 머리와 다리를 들어 기중 담장이 기다란 집을 택하여 담 너머로 하나씩 넘겨버렸다. 복처를 휩쓴 산지니 일당은 내쳐서 하도감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샛길로 하여 광희문으로 나아갔다. 광희문에는 원래 어영청 수직 구역이라 동소영에서 이십 명의 군사가 나와 지켜야 하는데, 잘 시행되지 않아 호군이랍시고 다섯이 문을 ..

장길산 7권 (6)

포도부장 최형기는 그로부터 포교들을 데리고 한양의 곳곳을 기찰하여 다니며 범죄인 잡기에만 열중하였고, 세간에서 말하는 대갓집에는 절대로 드나들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실력을 제대로 알고 있는 대관은 드물었고, 오직 이인하만이 그의 기찰하는 비범한 솜씨를 인정하고 있었다. 계해년에 그는 어는 중인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포도 종사관에 올랐다. 그는 아직 자기 나이가 그만한 직함을 가지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몇번이나 사양하였다. 최형기는 한양의 도처에 자기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정탐꾼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대개 잃은 물건이나 도망한 노비를 찾는 청탁이 들어오면 닷새도 걸리지 않아서 틀림없이 찾아냈던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포도 종사관에 부임했을 적에 그는 부장급들을 모두 개편하였으니, 그의 수하에는 되도록 출..

장길산 7권 (5)

세 판 양승으로 결정이 되어 단번에 익훈의 사위가 지게 되니 분하여 또 두자고 재촉이었다. "내가 두 판만 이긴다면 자네의 목을 뎅겅 잘라버릴 것이다." 최형기가 관아 뒤뜰에서 장기판 내려다보며 자란 지가 한두 해가 아니니 수가 달릴 것은 없었다. 최형기가 꾹 참고 말하였다. "서방님, 두 사람이 한번씩 이겼으니 그만둡시다." 그러나 익훈의 사위는 더욱 발끈하여 장기판을 밀어냈다. "안되네. 내 이번에 자네의 잘난 선달 모가지를 자르고야 말겠어." 최형기는 그가 하도 여러번 목을 벤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오냐 네가 나를 상놈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는구나, 망신을 톡톡히 줘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서방님이 만일 진다면 어찌하려고 그러우. 그러면 진 다음에 서방님의 목을 베어도 한하지 마시우." 다시..

장길산 7권 (4)

아래로 내려간 계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순라들이 그쪽으로 몰리는 듯하더니, 그들은 산을 미처 올라오기도 전에 방향을 바꾸어 송림 사이로 사라졌다. 남은 살주계원들과 달근이 산지니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송림을 걸어 쌍이문방으로 내려갔다. 쌍이문방의 은신처는 작은 기와집이었는데 겉으로는 바침술집이었다. 이 집의 주인은 오십여 세쯤 된 여자였는데 예전에 관비였고, 그의 남편은 호조의 관노를 다니다가 상전의 공금횡류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비명에 죽었으며, 그 뒤로 어린 딸과 함께 바침술집을 하면 살아오고 있었다. 면천한 지는 오래지만 지금도 관노비들과는 낯이 익어 조정이나 관아의 소식은 훤히 알고 있었다. 살주계의 총대인 청파 중길이와는 친모자 사이처럼 지내오던 터였다. "어머니 계시우?" 북성이가 밖으로 ..

장길산 7권 (3)

주모의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믄요, 이제 두고 보세요. 시골에 전장이 있는 사람들만 서울 살림을 지탱할 수가 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서도 이게 작년에 담근 술인데 이미 나라에서 금령이 내렸으나 서방님들이 아시듯 새로 담근 술은 아닙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우리도 장사를 걷어치우고 양주나 고양으로 나갈 거예요. 한양은 점점 인심이 흉흉해지고 있거든요." "포도청에는 요즈음 경이 빗발치듯 하여 포도부장들이 모두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는데." "좌대장 이인하의 처가 식구들이 흥인문 밖에서 적도에게 가산을 탈취당하였다는 소문을 알고 있는가?" "지금 이 일로 기찰포교들이 숭신방과 왕십리 일대에 나가 있지만, 워낙에 백성들의 인심이 사납게 들떠 있어서 도무지 발고는커녕 맞아 죽기가 십상이라고 하더..

장길산 7권 (2)

산지니는 장바닥에서 자란 사람이라 흥정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너무 눅게 부르면 의심할 터이고 저희들께는 이틀 품을 셈하여 한 사람에 열 냥씩만 주십시오." 수노가 속으로 중얼중얼 따져보더니 마상의 늙은이는 놓아두고 젊은 주인에게로 뒤처졌다. 그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는 모양이더니 수노가 그를 손짓하여 불렀다. "이리 좀 오우." 젊은 주인은 번듯한 통영갓에 명주 술띠를 매고 갖신을 신고 있어 돈푼이나 있는 집안이 틀림없었다. "마침 문밖에서 곁꾼을 사려던 참인데 잘되었다. 허나 품이 좀 비싼 걸. 우리가 시세는 잘 모르지만 말 한 필에 십 리마다 열두 푼이라면 과하지 않겠느냐." 산지니는 능숙하게 대꾸하는데 곁눈질로 평생을 보낸 사람 같았다. "아이구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횡성까지가 이백오십 리 길인데..

장길산 7권 (1)

제 1장 황민 경조를 중심으로 하여 이전부터 행정의 그늘 아래서 여기저기 사는 터전 나름으로 패거리를 가져오던 천류와 무뢰지배자들은, 드디어 조정이 혼란해지고 왜국이 재침한다는 소문으로 양반들이 동요하자, 제각기 천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모여들게 되었던 것이다. 검계에서도 한양에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의 모임은 따로이 살략계를 이루었다. 난리 때에 왕궁에 불을 지르고 부잣집을 습격하던 난민들이 실상은 다 이러한 무리들이었으니, 고금에 대처 저자란 모두 이러한 불씨를 안고 있는 셈이었다. 겉으로는 눌려서 눈도 제대로 치뜨지 못하고 대청 아래에서 설설 기며 죽는 시늉을 하고는 있으나, 그들의 가슴속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물려 내려오던 불덩이가 이글이글 타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남의 세상..

장길산 6권 (35, 完)

"광주에서는 정원태가 제일이고, 경강에서는 모신이가 제일이고, 양주에서는 이도장이라는 사람이 제일이고, 교하에서는 홍서방이라데. 헌데 실상은 한양 성내의 벼슬아치와 선비들 몇이 우리하구 연락이 있다던데 우리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네." 산지니는 어쩐지 자기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같이 여겨졌고, 이미 세상의 판국이 이쯤 돌아가고 있다면 자기가 전 판관짜리 하나 죽였단들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부터 일당이 되었더라면 이번 일도 그렇게 서투르게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한밤중이나 되어서 그들은 묘적산의 광활한 계곡에 이르렀다. 퇴계원으로 내려가는 계곡의 개천이 있었으나 가뭄으로 한팔 정도가 될까말까 한 실개천이 되어 있었다. 물이 지나던 곳마다 잡초가 자라나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흔들거..

장길산 6권 (34)

송장치레를 끝마치고 나서 상번수들은 산지니를 허술한 송판으로 만든 관 안에다 뉘었다. 산지니가 덥고 답답하여 머리를 움찔거리며 우물우물 입안엣 소리로 웅얼거렸다. "이 송장 좀 보게. 자칫하면 포졸들이 도깨비 잡으라는 방을 놓겠네. 꼼짝 말라니까." 상번수들은 다시 관 위에다 송판 두 장을 얹고서 귀퉁이에만 못을 쳤다. 그리고는 둘이 어깨에 둘러메고 마당으로 나섰다. 화초방 삼촌이 따라나오며 관 뚜껑을 토닥였다. "잘 가, 이 사람아. 가서 자리잡으면 송파루 기별두 해주어." "허 북망에 가는 놈 보구, 재작년 그러께 뒈어진 둘쨋놈 돌잔치에 술 먹으로 오라는 격이로군." 송낙에 가사 장삼을 입은 까마귀가 앞장을 서면서 농을 쳤다. "배는 준비해두었나?" "수장을 지내는가, 배는 찾아서 뭘 해. 아예 들판..

장길산 6권 (33)

"원서를 내려 하는데 형방의 댁이 어딘가 가르쳐주오." 관노는 아직 졸음이 덜 깼는지 푸석푸석한 눈두덩을 열고 석씨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아직 삼현육각도 없거늘 때 아니게 무슨 원서란 말이우?" "나중에 문책받지 말구 어서 알려주오. 살변이오." 석씨의 살변이란 말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 변이면 길청에 오지 말구 대번에 삼문 앞으로 가서 발고하시우." "사또께 직소할 것이나, 아녀자로서 글을 아지 못하여 개청 전에 형방을 만나 원서를 써서 내려는 거예요." 석씨의 말이 그럴 듯하다 여겼는지 그가 이리저리하며 형방 집을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석씨는 한달음에 내달아 성내에 있는 형방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그는 방금 일어나 마당에서 양치질을 하던 참이었다. 석씨가 하인을 부를 것도 없이 그대로 열..

장길산 6권 (32)

하나는 늙은이 것이라 치고서 건넌방에는 모두 넷이 있는 듯하였다. 기운 쓰며 달려들 놈이라고는 판관의 큰아들 녀석밖에 없을 것이며, 그 또한 아랫것들 앞에서나 호통칠 뿐 그리 버틸 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갓 쓰고 도포 걸친 녀석치고 팔씨름이나마 제대로 용쓰는 놈을 보지 못했던 산지니였다. 그는 마루 위로 가벼이 올라서서 미닫이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두 사내는 이미 술이 과하였는지 하나는 아예 목침 베고 드러누었으며 다른 하나는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술상을 마주하고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판관의 아들과 그 친척 젊은이는 아직 상머리에 붙어 있기는 하였으되 눈시울이 게슴츠레하였다. 저것들을 모두 한 낫으로 찍어버릴까... 산지는 혼자서 생각해보다가 다시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

장길산 6권 (31)

산지니가 돌아서서 노파의 주름살투성이인 목을 잡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모든 집착을 놓아버렸는지라 그저 고개 숙여 땅만 내려다보며 걸어갈 뿐이었다. 반골 유모네 집에서 석씨는 애를 태우고 있었다. 산지니가 노파를 따라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자기의 속마음을 어떻게 전해주어야 할까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문 밖에는 두꺼비 같은 하인놈이 버티고 앉아 있었고, 아들은 산지니가 혹시 행패를 부릴까 하여 몽촌 본가로 하인배를 대여섯 사람 불러오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초조하였는지 연방 마루 위를 서성대고 있는 눈치였다. 판관 늙은이는 오전 내내 보채다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석씨는 무엇보다도 산지니가 섣불리 성깔을 내어 이 집 마당에서 몰매를 맞든가 장살을 당하든가 하는 일이 걱정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