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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7권 (10)

억기는 말없이 아랫목의 한편을 비워주고 물러나 앉았다. 산지니는 억기의 풀려진 눈동자와 꺼칠한 안색에서 요즈음의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읽을 수가 있었다. "중길이란 자를 잘 아는가?" 산지니가 물었으나, 억기는 얼빠진 모습으로 미닫이의 격자창살을 물그러미 바라볼 뿐 대답이 없었다. 산지니의 눈꼬리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그는 마당 쪽에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릎을 당기며 억기에게로 다가앉았다. "어디 몸이 불편한 모양이군?" 산지니는 연신 바깥에 주의를 하면서 품속에 손을 넣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때에 억기가 고개를 돌려 산지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생각이 났소. 나는 댁을 잘 압니다. 남별대에서도 만났고, 쌍이문방 바침술집에서두 뵈었습니다." 산지니는 ..

장길산 7권 (9)

5 중흥동 싸움이 있은 지 달포나 지나서였다. 민심은 찬바람이 불수록 더욱 흉흉해졌고, 경강의 거래도 이제는 거의 끊겨서 성내에서도 굶주리는 집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아직 아사자나 동사자는 나오지 않았으나, 나라에서는 각 활인서에다 기민 구제를 지시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중량포에서 청량고개를 넘어 돌곶이를 건너면 바로 고암 오거리가 나오게 되는데, 이는 양주 포천로와 홍인문으로 들어가는 한양 직로가 나오게 되는데, 이는 양주 포천로와 홍인문으로 들어가는 한양 직로가 만나는 곳이었다. 부근에 동적전과 선농단이 있으니 임금이 친히 밭을 갈아 여섯 가지 곡물을 천신하는 곳이다. 즉 땀흘리고 수고하는 백성들의 삶을 나라님이 몸소 겪어 알게 한다는 곳인데, 바로 이 앞에 제기 고개요, 그 아래로는 왕십리의 드넓은..

장길산 7권 (8)

중길이는 미리 와 있었던 바침술집의 주모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그 여자는 산의 식구들과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 달려왔다. "어머니, 북성의 아우가 와서 저의 형이 목내선에게 죽었다구 했지요?" "그래... 무슨 일이야?" "남부 계원들이 모두 잡혔습니다. 왜 계원들에게 모이지 말라구 알려주지 않았소?" "나는 그저 자네한테 어서 알릴 마음만 앞서서..." 중길이는 주모를 붙잡고 뭐라고 더이상 질책할 수가 없었다. 사실 중길은 주모가 전해준 덕으로 청파에서 포교들의 함정에 빠진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계원 중의 누구인가가 총각에게 물었다. "억기가 그날 초동에서 나갔다던가?" "잘 모르겠습니다." 중길은 알았다는 듯이 주먹을 그러쥐고 손바닥을 쳤다. "그 자식 또 당마을에 나갔구나, 내가 기찰 대상이..

장길산 7권 (7)

"이놈, 죽이기 전에 오늘밤 군호를 말하여라." "예, 저... 전언은 천둥이오." "후언은 무엇이냐?" "땅입니다." 군호는 병조에 입직한 당상관이 친히 써서 봉함하고 매일 신시에 낭관이 받아서 각 군영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산지니가 군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차갑게 내뱉었다. "군기 누설은 사죄에 처한다는 것이 군무의 율령이다." 그는 칼을 들어 다친 군사의 목숨을 끊고는, 여럿이 달려들어 시체의 머리와 다리를 들어 기중 담장이 기다란 집을 택하여 담 너머로 하나씩 넘겨버렸다. 복처를 휩쓴 산지니 일당은 내쳐서 하도감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샛길로 하여 광희문으로 나아갔다. 광희문에는 원래 어영청 수직 구역이라 동소영에서 이십 명의 군사가 나와 지켜야 하는데, 잘 시행되지 않아 호군이랍시고 다섯이 문을 ..

장길산 7권 (6)

포도부장 최형기는 그로부터 포교들을 데리고 한양의 곳곳을 기찰하여 다니며 범죄인 잡기에만 열중하였고, 세간에서 말하는 대갓집에는 절대로 드나들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실력을 제대로 알고 있는 대관은 드물었고, 오직 이인하만이 그의 기찰하는 비범한 솜씨를 인정하고 있었다. 계해년에 그는 어는 중인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포도 종사관에 올랐다. 그는 아직 자기 나이가 그만한 직함을 가지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몇번이나 사양하였다. 최형기는 한양의 도처에 자기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정탐꾼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대개 잃은 물건이나 도망한 노비를 찾는 청탁이 들어오면 닷새도 걸리지 않아서 틀림없이 찾아냈던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포도 종사관에 부임했을 적에 그는 부장급들을 모두 개편하였으니, 그의 수하에는 되도록 출..

장길산 7권 (5)

세 판 양승으로 결정이 되어 단번에 익훈의 사위가 지게 되니 분하여 또 두자고 재촉이었다. "내가 두 판만 이긴다면 자네의 목을 뎅겅 잘라버릴 것이다." 최형기가 관아 뒤뜰에서 장기판 내려다보며 자란 지가 한두 해가 아니니 수가 달릴 것은 없었다. 최형기가 꾹 참고 말하였다. "서방님, 두 사람이 한번씩 이겼으니 그만둡시다." 그러나 익훈의 사위는 더욱 발끈하여 장기판을 밀어냈다. "안되네. 내 이번에 자네의 잘난 선달 모가지를 자르고야 말겠어." 최형기는 그가 하도 여러번 목을 벤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오냐 네가 나를 상놈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는구나, 망신을 톡톡히 줘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서방님이 만일 진다면 어찌하려고 그러우. 그러면 진 다음에 서방님의 목을 베어도 한하지 마시우." 다시..

장길산 7권 (4)

아래로 내려간 계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순라들이 그쪽으로 몰리는 듯하더니, 그들은 산을 미처 올라오기도 전에 방향을 바꾸어 송림 사이로 사라졌다. 남은 살주계원들과 달근이 산지니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송림을 걸어 쌍이문방으로 내려갔다. 쌍이문방의 은신처는 작은 기와집이었는데 겉으로는 바침술집이었다. 이 집의 주인은 오십여 세쯤 된 여자였는데 예전에 관비였고, 그의 남편은 호조의 관노를 다니다가 상전의 공금횡류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비명에 죽었으며, 그 뒤로 어린 딸과 함께 바침술집을 하면 살아오고 있었다. 면천한 지는 오래지만 지금도 관노비들과는 낯이 익어 조정이나 관아의 소식은 훤히 알고 있었다. 살주계의 총대인 청파 중길이와는 친모자 사이처럼 지내오던 터였다. "어머니 계시우?" 북성이가 밖으로 ..

장길산 7권 (3)

주모의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믄요, 이제 두고 보세요. 시골에 전장이 있는 사람들만 서울 살림을 지탱할 수가 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서도 이게 작년에 담근 술인데 이미 나라에서 금령이 내렸으나 서방님들이 아시듯 새로 담근 술은 아닙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우리도 장사를 걷어치우고 양주나 고양으로 나갈 거예요. 한양은 점점 인심이 흉흉해지고 있거든요." "포도청에는 요즈음 경이 빗발치듯 하여 포도부장들이 모두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는데." "좌대장 이인하의 처가 식구들이 흥인문 밖에서 적도에게 가산을 탈취당하였다는 소문을 알고 있는가?" "지금 이 일로 기찰포교들이 숭신방과 왕십리 일대에 나가 있지만, 워낙에 백성들의 인심이 사납게 들떠 있어서 도무지 발고는커녕 맞아 죽기가 십상이라고 하더..

장길산 7권 (2)

산지니는 장바닥에서 자란 사람이라 흥정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너무 눅게 부르면 의심할 터이고 저희들께는 이틀 품을 셈하여 한 사람에 열 냥씩만 주십시오." 수노가 속으로 중얼중얼 따져보더니 마상의 늙은이는 놓아두고 젊은 주인에게로 뒤처졌다. 그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는 모양이더니 수노가 그를 손짓하여 불렀다. "이리 좀 오우." 젊은 주인은 번듯한 통영갓에 명주 술띠를 매고 갖신을 신고 있어 돈푼이나 있는 집안이 틀림없었다. "마침 문밖에서 곁꾼을 사려던 참인데 잘되었다. 허나 품이 좀 비싼 걸. 우리가 시세는 잘 모르지만 말 한 필에 십 리마다 열두 푼이라면 과하지 않겠느냐." 산지니는 능숙하게 대꾸하는데 곁눈질로 평생을 보낸 사람 같았다. "아이구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횡성까지가 이백오십 리 길인데..

장길산 7권 (1)

제 1장 황민 경조를 중심으로 하여 이전부터 행정의 그늘 아래서 여기저기 사는 터전 나름으로 패거리를 가져오던 천류와 무뢰지배자들은, 드디어 조정이 혼란해지고 왜국이 재침한다는 소문으로 양반들이 동요하자, 제각기 천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모여들게 되었던 것이다. 검계에서도 한양에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의 모임은 따로이 살략계를 이루었다. 난리 때에 왕궁에 불을 지르고 부잣집을 습격하던 난민들이 실상은 다 이러한 무리들이었으니, 고금에 대처 저자란 모두 이러한 불씨를 안고 있는 셈이었다. 겉으로는 눌려서 눈도 제대로 치뜨지 못하고 대청 아래에서 설설 기며 죽는 시늉을 하고는 있으나, 그들의 가슴속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물려 내려오던 불덩이가 이글이글 타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남의 세상..

장길산 6권 (35, 完)

"광주에서는 정원태가 제일이고, 경강에서는 모신이가 제일이고, 양주에서는 이도장이라는 사람이 제일이고, 교하에서는 홍서방이라데. 헌데 실상은 한양 성내의 벼슬아치와 선비들 몇이 우리하구 연락이 있다던데 우리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네." 산지니는 어쩐지 자기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같이 여겨졌고, 이미 세상의 판국이 이쯤 돌아가고 있다면 자기가 전 판관짜리 하나 죽였단들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부터 일당이 되었더라면 이번 일도 그렇게 서투르게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한밤중이나 되어서 그들은 묘적산의 광활한 계곡에 이르렀다. 퇴계원으로 내려가는 계곡의 개천이 있었으나 가뭄으로 한팔 정도가 될까말까 한 실개천이 되어 있었다. 물이 지나던 곳마다 잡초가 자라나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흔들거..

장길산 6권 (34)

송장치레를 끝마치고 나서 상번수들은 산지니를 허술한 송판으로 만든 관 안에다 뉘었다. 산지니가 덥고 답답하여 머리를 움찔거리며 우물우물 입안엣 소리로 웅얼거렸다. "이 송장 좀 보게. 자칫하면 포졸들이 도깨비 잡으라는 방을 놓겠네. 꼼짝 말라니까." 상번수들은 다시 관 위에다 송판 두 장을 얹고서 귀퉁이에만 못을 쳤다. 그리고는 둘이 어깨에 둘러메고 마당으로 나섰다. 화초방 삼촌이 따라나오며 관 뚜껑을 토닥였다. "잘 가, 이 사람아. 가서 자리잡으면 송파루 기별두 해주어." "허 북망에 가는 놈 보구, 재작년 그러께 뒈어진 둘쨋놈 돌잔치에 술 먹으로 오라는 격이로군." 송낙에 가사 장삼을 입은 까마귀가 앞장을 서면서 농을 쳤다. "배는 준비해두었나?" "수장을 지내는가, 배는 찾아서 뭘 해. 아예 들판..

장길산 6권 (33)

"원서를 내려 하는데 형방의 댁이 어딘가 가르쳐주오." 관노는 아직 졸음이 덜 깼는지 푸석푸석한 눈두덩을 열고 석씨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아직 삼현육각도 없거늘 때 아니게 무슨 원서란 말이우?" "나중에 문책받지 말구 어서 알려주오. 살변이오." 석씨의 살변이란 말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 변이면 길청에 오지 말구 대번에 삼문 앞으로 가서 발고하시우." "사또께 직소할 것이나, 아녀자로서 글을 아지 못하여 개청 전에 형방을 만나 원서를 써서 내려는 거예요." 석씨의 말이 그럴 듯하다 여겼는지 그가 이리저리하며 형방 집을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석씨는 한달음에 내달아 성내에 있는 형방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그는 방금 일어나 마당에서 양치질을 하던 참이었다. 석씨가 하인을 부를 것도 없이 그대로 열..

장길산 6권 (32)

하나는 늙은이 것이라 치고서 건넌방에는 모두 넷이 있는 듯하였다. 기운 쓰며 달려들 놈이라고는 판관의 큰아들 녀석밖에 없을 것이며, 그 또한 아랫것들 앞에서나 호통칠 뿐 그리 버틸 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갓 쓰고 도포 걸친 녀석치고 팔씨름이나마 제대로 용쓰는 놈을 보지 못했던 산지니였다. 그는 마루 위로 가벼이 올라서서 미닫이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두 사내는 이미 술이 과하였는지 하나는 아예 목침 베고 드러누었으며 다른 하나는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술상을 마주하고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판관의 아들과 그 친척 젊은이는 아직 상머리에 붙어 있기는 하였으되 눈시울이 게슴츠레하였다. 저것들을 모두 한 낫으로 찍어버릴까... 산지는 혼자서 생각해보다가 다시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

장길산 6권 (31)

산지니가 돌아서서 노파의 주름살투성이인 목을 잡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모든 집착을 놓아버렸는지라 그저 고개 숙여 땅만 내려다보며 걸어갈 뿐이었다. 반골 유모네 집에서 석씨는 애를 태우고 있었다. 산지니가 노파를 따라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자기의 속마음을 어떻게 전해주어야 할까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문 밖에는 두꺼비 같은 하인놈이 버티고 앉아 있었고, 아들은 산지니가 혹시 행패를 부릴까 하여 몽촌 본가로 하인배를 대여섯 사람 불러오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초조하였는지 연방 마루 위를 서성대고 있는 눈치였다. 판관 늙은이는 오전 내내 보채다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석씨는 무엇보다도 산지니가 섣불리 성깔을 내어 이 집 마당에서 몰매를 맞든가 장살을 당하든가 하는 일이 걱정이었..

장길산 6권 (30)

"지체와 체모가 있으신 터에 이러시면 안됩니다. 일에는 법도와 순서가 있으니 남들 하는 대로 지키십시오." 판관은 그 목소리에 또한 마음이 뛰었던 모양이다. "그게 옳은 말이다. 참으로 현숙한 사람이로구나." 하면서도 손목을 놓지 못하는데, 아들이 보다 못하여 겨드랑이를 끼어 일으켰다. "아버님, 그 말씀이 옳다면서 왜 이러십니까. 어서 건너가십시다." "얘, 홀아비 홀어미끼리 새삼스레 무슨 전안지례란 말이냐, 그냥 작수성례로 해야겠다." 아들이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하였다. "예, 그리해얍지요." 아들과 유모는 마주 웃고 있는데 고개를 숙인 석씨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신분이 중인이라하여 별것도 아닌 지방 세력자에게 당하는 수모가 뻐저리게 서글펐던 까닭이었다. "지금 널다리로 가셔서 아이들과 산지..

장길산 6권 (29)

젖어미는 받은 돈이 있어 귀찮은 내색은 하지 못하였다. "그거야 여부가 있겠수. 한 달 아니라 일 년이라두 모셔야지. 도련님은 집에 돌아가실 게유?" "될 수 있으면 여기서 함께 모시구 지내야지요. 급한 볼일이 있으면 집에두 다녀오구요." 밖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오고 삽짝이 열리는지 놋쇠 방울 소리가 딸그랑거렸다. "에그머니, 오는 모양이구려." 사내들 둘이 어깨에다 허연 홑청에 싸감은 사람의 형체를 떠메고 들어섰고 뒤이어 나머지 사내들이 따라 들어왔다. "별일 없었는가?" 하인이 큰아들에게 말하였다. "예, 벼락같이 해치웠습죠. 동네 것들이 쫓아 나올려구 해서 불을 질렀다구 엄포를 놓았더니 제 집 걱정에 나서는 놈 하나 없습디다." "잘했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미닫이가 벌컥 열리며 판관이 고개를 ..

장길산 6권 (28)

"그래 알았네, 잘해내면 제 사람에게 백미 한 섬씩 주겠네." "어이구 참말 충신 효자의 집안이십니다. 어느 말씀이라구 잘해내지 않겠습니까." 장남이 자리를 뜬 뒤에 겸인이 말하였다. "널다리서 우리 집 아이가 돌 텐데, 그애가 길안내를 설 걸세. 이런 일이 자주 생기면 자네들은 대번에 형편이 피겠구먼." 서강 장사치가 말하였다. "내가 그전에 서소문 밖으루 보쌈품을 팔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는 지겟작대기, 낫, 몽둥이를 들구 들어갔지. 허허 막상 뛰어들어가니까 고것이 샐쭉 웃더니 자루에다 머리를 들이미는게 아닌가, 그저 돈만 안 받았다면 침을 발라보구 싶더구먼." "에이 그 부정탈 소릴랑 말게. 다시 이르는 말이지만 여자 몸에는 손가락 자국 한군데 나서두 안되네. 그저 등잔을 들구 오듯이 하란 말..

장길산 6권 (27)

오만석은 더 이상 우기지 못하고서 일당들을 휘동하여 사근다리를 건넜다. 마감동은 큰돌이가 끌고 온 말에 가까스로 올라타면서 사경을 모면한 장교들에게 다시 물었다. "김식에게 가족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장교 하나가 대답하였다. "한양에 아우가 있다고 들었으나, 아직 처자식은 없는 줄로 아오." "다행이로군." 마감동은 부하들의 뒤를 따라서 사근다리를 건넜다. 이로써 감영에서 나왔던 여섯 명의 자객 가운데 두 사람만이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 두 사람이 구월 산 일당들에게는 가장 큰 후환거리로 남게 되었다. 뒷날 포도 종사관 최형기는 이들을 앞장세워 토포군의 길잡이로 삼았던 것이다. 사실 수회천의 결은 구월산 토벌의 초전이었던 셈 이었으니, 숙종 십년 갑자 유월의 ..

장길산 6권 (26)

김식은 아까와는 반대 방향에 마감동을 바라보며 섰다. 그와 엇갈리는 순간에 감동은 돌 아 선채로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내쉬어 북받치려는 긴장과 분노를 흐트러뜨렸다. 옆구리에 베인 상처로하여 몸이 굳어지면 어깨와 팔이 뻣뻣해져서, 상대의 변화무쌍한 칼날을 제 때 받아 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마감동은 시선을 제 발의 서너 발짝 앞에다 떨구고 칼을 늘어뜨린 채 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가운데 김식의 숨소리의 변화와 높낮음이 또렷이 들려왔다. 달이 지면 그는 죽는다. 마감동은 이제 자신이 있었다. 판단으로 싸우는 자는 감각으로 대응하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는 검을 배운 이래로 월정사의 풍열스님으로부터 마음을 비우는 법을 다시 배웠다. 칼은 그의 마음처럼 무심해질 것이다. 어둠이 내리면 김식..

장길산 6권 (25)

"당장에 그것들을 처치해버려야지." "두어라." 김식이 장교에게 눈짓으로 앉으라고 일렀다. 김식의 주위로 장교들이 둘러앉았다. "내가 뭐라더냐. 벌써 오랫동안 놈들이 구월산에 진치고 들어앉아 있었으니 구월산 인근 은 도적들의 판도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송화 무더리라면 구월산 서쪽에서는 가장 오래 된 장터이다. 이 장터 놈들이 모조리 적당이라고 여겨야 한다. 우리는 두령의 모가지만 가져가면 되니까 섣불리 나서지 말아야지. 내일 정오까지 이 주막 안에 꼼짝 말고 엎어져 있어야 한다." 장교 하나가 김식에게 물었다. "부장, 만약에 화적들이 떼지어 여길 습격해 오면 어쩝니까?" "이들은 보통의 도적이 아니다. 스스로 활빈의 무리라고 자처한다. 수렛고개에서 소두령 되는 자의 태도를 보았겠지. 아랫것..

장길산 6권 (24)

"들었는가, 수렛고개의 네 부하들은 모두 죽고 남은 두 사람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우리는 저 둘을 끌고 내려갈 터인데 너는 산채에 가서 네 두령에게 알려라. 내일 정오 무렵까지 송화 무더리 장터에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라고 전하란 말이다. 곁에 누가 있으면 안된다. 그대와 둘이서 오도록... 만약 그가 의기있고 담이 있는 자라면 내가 한 번 겨루어보겠다." 소두령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김식을 노려보며 물었다. "기찰포교들인가?" 김식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너희 두령에게 포한이 있는 사람이 보내서 왔다." "어떤 포한이냐?" 김식의 곁에 있던 장교가 거들었다. "우리도 너희들처럼 먹고사는 사람들인데 구월산이 탐이 나서 그런다. 우리 두령은 너희 들 때문에 해서에서 몸둘 곳이 없어졌..

장길산 6권 (23)

좌수가 통인과 더불어 마룬내를 떠나 들판을 허둥지둥 달려갈 때 어찌나 놀랍고 기가 막혔던지 어서 돌아가 화채그릇에 시원한 꿀물이나 타서 벌컥이며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우선 갈증이 심하여 침이 마르고 목구멍이 뻑뻑한지라 아무데나 들어가서 냉수 한 사발이라도 얻어먹으려 하였다. 가까이 외딴 농가가 있거늘 통인 아이를 시켜 물을 얻어오게 하였다. 통인이 달려가 물그릇을 들고 오는데 물빛이 누르끄름 하였다. 좌수 어른 살펴볼 사이도 없이 대접을 들이켜고는 죽을상이 되어서 뱉어냈다. "에익 퉤퉤, 이 무슨 구린내냐?" 그때에 사립 밖을 내다보던 아낙네가 하도 어이가 없는지 한마디 하였다. "때가 기근이라 물을 급히 찾길래 그래두 사람 사는 인정이라 진간장을 타서 주었더니, 참 별사람 다 보겠네." 좌수가 망신을..

장길산 6권 (22)

"대에 뽑힌 사람들은 강변에 나가 지키다가 세 불리하면 달아나는 척하고 갈대밭에 숨으시오. 그리고는 좌우로 갈라져 포졸들이 들어올길을 터놓으란 말이오. 그러면 저들이 안심하고 언덕 아래까지 쫓아오면 여기서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돌을 던져서 쫓아내고 갈밭에 숨었던 패가 합세하여 협공하십시다. 미곡을 차압당하면 어루리벌의 굶주린 백성들은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요." 이윽고 오십여 명이 먼저 세 곡선이 대어졌던 마룬내 냇가로 나가서 늘어서고 언덕 위에 남은 사람들은 아이들까지도 돌을 그득히 무릎 아래 쌓아두고 기다렸다. 아이들과 젊은 총각들은 꼭 대보름날의 투석놀이나 되는 듯이 희희낙락하며 연습팔매를 한답시고 허공중에 돌을 날려보는 것이었다. 멀리 강변을 따라 뛰어오고 있는 포졸들의 행렬이 보였는데 육모방망이..

장길산 6권 (21)

키 큰 사내가 마당 구석의 헛간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자, 하인들은 그를 따라서 헛간으로 들어 섰다. 쫓기던 자는 우선 돈을 헛간 안쪽에다 던졌고, 앞섰던 자가 그를 지나쳐 안으로 뛰어드는데 뒤이어 다른자가 앞을 다투며 들어선다. 키 큰 사내는 뒤미처 들어오던 자의 배를 무릎으로 올려 찼다. 그가 입을 딱 벌리더니 배를 안고 무릎을 끓었으며, 다시 이번에는 돈꿰미를 주으려고 엎드린 하인의 등판을 발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목에 헉, 걸리는 듯한 숨소리가 들리며 길게 뻗으니, 키 큰 사내는 널브러진 두 하인의 다리를 잡아 헛간 깊숙이 끌어다 두었다. 그는 저고리를 잡아 흔들어 바람을 내면서 유유히 대문으로 가서 빗장을 빼고 한쪽 문을 열더니 고개를 내밀었다 십 여 명의 사내들이 안으로 우르르 밀려들었다. 그들의..

장길산 6권 (20)

동지는 침통한 얼굴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에 완전히 기진맥진해버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마음에 없는 진휼을 베풀었다고는 하나 벌써 태산 같은 선행으로 인근 사방에 알려지고 사또는 감영을 통하여 조정에 장계까지 올렸으니, 이제 와서 도적들의 강압적인 사주를 받았다고 광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어서 일이 조용히 끝나 종손이 무사히 되돌아오기만 바랄 뿐이었다. "어서 보내주시오." 동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인배들이 아무리 세상 도리에 어둡다 할지언정, 굶주리는 자들에게 미곡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대하다 보니 모두들 진휼이 어떠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른바 관상가에서 말하는 길기라는 것은 선행을 한 뒤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안색을 말하는 것이니..

장길산 6권 (19)

사내는 자기를 믿어주는 것만 반가운지 산 위로 올랐다. 김기가 말득이에게 당부를 하였다. "자네는 여기서 형편을 보았다가 관군이 모두 돌아간 뒤에 조동지네 집으로 들어가 식객을 자청하게. 아마 다른 마음은 품지 못할 테니까." "젠장 나는 매일 파장이나 보구 다니라는 게로군." 투덜대는 말득이만 남겨두고 그들은 뒷산을 넘어갔다. 산을 한참이나 올라서 동현령으로 들어가니 깊은 골짜기에 찬바람이 일어나고 물이 마르지 않은 제법 큰 사내가 나왔다. 그 위에 빈터가 있었는데 다 허물어진 집 한 채가 보였다. 앞서 가던 사내가 말하였다. "바로 여기입니다. 극락사라는 절이 있던 곳입니다. 예전에 주지를 역모에 몰아 죽이고 장정들을 동원하여 불을 질러버렸지요. 그 뒤로 워낙 사연이 있는 절터라 아무도 올라오지 않고..

장길산 6권 (18)

"아서라... 누구든지 거기서 세 걸음만 떼면, 다리몽갱이를 분질러서 머리에 이게 해주지."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멍하니섰는 총각의 작대기를 덥석 잡았다. 상대가 놀라서 지레 겁을 먹으며 작대기도 놓고 물러났고, 선흥이는 그것을 두 손아귀에 쥐어 어깨에다 약간 힘을 주더니 삭정이처럼 부러뜨렸다. 아무리 몽둥이라 하나 굵기로 보아서는 무릎에다 대어도 한참힘을 써야 할 텐데, 그것을 허공에서 잡고 간단히 꺾어버리는데야 누가 보아도 완력이 대단하였다. "좀 비켜요 비켜." 마을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과 선일이와 말득이가 나타났다. "김서방! 저놈 입 좀 닫아놔라." 길산이 빙그레 웃으며 담장 위로 내밀어진 조동지네 하복의 머리를 눈짓하였고, 선일은 땅바닥을 한바퀴 휘둘러보고서는 맞춤한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

장길산 6권 (17)

노파가 가냘프게 중얼거리는데, 바람맞이를 하고 앉으니 한결 나은 모양이었다. 노파의 이마에는 땀이 번져 있고 입술에 백태가 끼어 말라붙었다. 사내가 봇짐을 끌어다가 손을 쑤셔넣더니 쌈지 같은 주머니에서 한약 비슷한것을 한줌 꺼내었다. 그가 아이에게 그릇을 내어주며 부드럽게 일렀다. "가서 물을 떠오너라." 아이는 할머니만을 바라볼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구황하는 황랍환이다. 이걸 잡수시면 곧 나으신다." 그러나 노파는 아이의 손을 꼭잡고 놓지를 않았다. "그만두오. 내가 더 살아서 무얼 하겠소. 저것이 이제 노중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아 죽고 말터이니, 먹을 것이나 있거든 내 보는 앞에서 저애를 먹여주었으면 그게 약이지요." 사내가 말하였다. 그는 노파의 빈 사발을 들고 문루를 나서서 숲을 향..

장길산 6권 (16)

"성님께서 해주신다면야 저두 할말이 없습니다." 마감동이도 새삼 장가드는 얘기가 나오고 보니 어쩐지 심란한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이사나 끝내구 보십시다." 감동이가 말하였다. 그믐께에 가서야 산채가 대강 정돈이 되었고 길산을 비롯한 식구들은 모두 구월산으로 돌아갔다. 오만석은 구월산 산채에 남고자 하였는데 마감동이도 그 생각은 같았다. 김기도 그의 고향이었던 봉산 근처로 식구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꺼려하였으므로 결국 동선령으로 이사갈 가족이 있는 것은 길산과 말득이뿐이었다. 김기는 식구들을 탑고개에 남겨두고 혼자서 동선령으로 가기를 원하였다. 이따금씩 은율로 가서 식구들을 돌아보고는 다시 산채로 오르면 될 것이라 하였다. 오만석이와 마감동이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가리라 다짐하였다. 길산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