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기는 말없이 아랫목의 한편을 비워주고 물러나 앉았다. 산지니는 억기의 풀려진 눈동자와 꺼칠한 안색에서 요즈음의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읽을 수가 있었다. "중길이란 자를 잘 아는가?" 산지니가 물었으나, 억기는 얼빠진 모습으로 미닫이의 격자창살을 물그러미 바라볼 뿐 대답이 없었다. 산지니의 눈꼬리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그는 마당 쪽에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릎을 당기며 억기에게로 다가앉았다. "어디 몸이 불편한 모양이군?" 산지니는 연신 바깥에 주의를 하면서 품속에 손을 넣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때에 억기가 고개를 돌려 산지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생각이 났소. 나는 댁을 잘 압니다. 남별대에서도 만났고, 쌍이문방 바침술집에서두 뵈었습니다." 산지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