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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7권 (2)

산지니는 장바닥에서 자란 사람이라 흥정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너무 눅게 부르면 의심할 터이고 저희들께는 이틀 품을 셈하여 한 사람에 열 냥씩만 주십시오." 수노가 속으로 중얼중얼 따져보더니 마상의 늙은이는 놓아두고 젊은 주인에게로 뒤처졌다. 그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는 모양이더니 수노가 그를 손짓하여 불렀다. "이리 좀 오우." 젊은 주인은 번듯한 통영갓에 명주 술띠를 매고 갖신을 신고 있어 돈푼이나 있는 집안이 틀림없었다. "마침 문밖에서 곁꾼을 사려던 참인데 잘되었다. 허나 품이 좀 비싼 걸. 우리가 시세는 잘 모르지만 말 한 필에 십 리마다 열두 푼이라면 과하지 않겠느냐." 산지니는 능숙하게 대꾸하는데 곁눈질로 평생을 보낸 사람 같았다. "아이구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횡성까지가 이백오십 리 길인데..

장길산 7권 (1)

제 1장 황민 경조를 중심으로 하여 이전부터 행정의 그늘 아래서 여기저기 사는 터전 나름으로 패거리를 가져오던 천류와 무뢰지배자들은, 드디어 조정이 혼란해지고 왜국이 재침한다는 소문으로 양반들이 동요하자, 제각기 천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모여들게 되었던 것이다. 검계에서도 한양에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의 모임은 따로이 살략계를 이루었다. 난리 때에 왕궁에 불을 지르고 부잣집을 습격하던 난민들이 실상은 다 이러한 무리들이었으니, 고금에 대처 저자란 모두 이러한 불씨를 안고 있는 셈이었다. 겉으로는 눌려서 눈도 제대로 치뜨지 못하고 대청 아래에서 설설 기며 죽는 시늉을 하고는 있으나, 그들의 가슴속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물려 내려오던 불덩이가 이글이글 타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남의 세상..

장길산 6권 (35, 完)

"광주에서는 정원태가 제일이고, 경강에서는 모신이가 제일이고, 양주에서는 이도장이라는 사람이 제일이고, 교하에서는 홍서방이라데. 헌데 실상은 한양 성내의 벼슬아치와 선비들 몇이 우리하구 연락이 있다던데 우리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네." 산지니는 어쩐지 자기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같이 여겨졌고, 이미 세상의 판국이 이쯤 돌아가고 있다면 자기가 전 판관짜리 하나 죽였단들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부터 일당이 되었더라면 이번 일도 그렇게 서투르게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한밤중이나 되어서 그들은 묘적산의 광활한 계곡에 이르렀다. 퇴계원으로 내려가는 계곡의 개천이 있었으나 가뭄으로 한팔 정도가 될까말까 한 실개천이 되어 있었다. 물이 지나던 곳마다 잡초가 자라나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흔들거..

장길산 6권 (34)

송장치레를 끝마치고 나서 상번수들은 산지니를 허술한 송판으로 만든 관 안에다 뉘었다. 산지니가 덥고 답답하여 머리를 움찔거리며 우물우물 입안엣 소리로 웅얼거렸다. "이 송장 좀 보게. 자칫하면 포졸들이 도깨비 잡으라는 방을 놓겠네. 꼼짝 말라니까." 상번수들은 다시 관 위에다 송판 두 장을 얹고서 귀퉁이에만 못을 쳤다. 그리고는 둘이 어깨에 둘러메고 마당으로 나섰다. 화초방 삼촌이 따라나오며 관 뚜껑을 토닥였다. "잘 가, 이 사람아. 가서 자리잡으면 송파루 기별두 해주어." "허 북망에 가는 놈 보구, 재작년 그러께 뒈어진 둘쨋놈 돌잔치에 술 먹으로 오라는 격이로군." 송낙에 가사 장삼을 입은 까마귀가 앞장을 서면서 농을 쳤다. "배는 준비해두었나?" "수장을 지내는가, 배는 찾아서 뭘 해. 아예 들판..

장길산 6권 (33)

"원서를 내려 하는데 형방의 댁이 어딘가 가르쳐주오." 관노는 아직 졸음이 덜 깼는지 푸석푸석한 눈두덩을 열고 석씨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아직 삼현육각도 없거늘 때 아니게 무슨 원서란 말이우?" "나중에 문책받지 말구 어서 알려주오. 살변이오." 석씨의 살변이란 말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 변이면 길청에 오지 말구 대번에 삼문 앞으로 가서 발고하시우." "사또께 직소할 것이나, 아녀자로서 글을 아지 못하여 개청 전에 형방을 만나 원서를 써서 내려는 거예요." 석씨의 말이 그럴 듯하다 여겼는지 그가 이리저리하며 형방 집을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석씨는 한달음에 내달아 성내에 있는 형방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그는 방금 일어나 마당에서 양치질을 하던 참이었다. 석씨가 하인을 부를 것도 없이 그대로 열..

장길산 6권 (32)

하나는 늙은이 것이라 치고서 건넌방에는 모두 넷이 있는 듯하였다. 기운 쓰며 달려들 놈이라고는 판관의 큰아들 녀석밖에 없을 것이며, 그 또한 아랫것들 앞에서나 호통칠 뿐 그리 버틸 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갓 쓰고 도포 걸친 녀석치고 팔씨름이나마 제대로 용쓰는 놈을 보지 못했던 산지니였다. 그는 마루 위로 가벼이 올라서서 미닫이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두 사내는 이미 술이 과하였는지 하나는 아예 목침 베고 드러누었으며 다른 하나는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술상을 마주하고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판관의 아들과 그 친척 젊은이는 아직 상머리에 붙어 있기는 하였으되 눈시울이 게슴츠레하였다. 저것들을 모두 한 낫으로 찍어버릴까... 산지는 혼자서 생각해보다가 다시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

장길산 6권 (31)

산지니가 돌아서서 노파의 주름살투성이인 목을 잡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모든 집착을 놓아버렸는지라 그저 고개 숙여 땅만 내려다보며 걸어갈 뿐이었다. 반골 유모네 집에서 석씨는 애를 태우고 있었다. 산지니가 노파를 따라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자기의 속마음을 어떻게 전해주어야 할까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문 밖에는 두꺼비 같은 하인놈이 버티고 앉아 있었고, 아들은 산지니가 혹시 행패를 부릴까 하여 몽촌 본가로 하인배를 대여섯 사람 불러오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초조하였는지 연방 마루 위를 서성대고 있는 눈치였다. 판관 늙은이는 오전 내내 보채다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석씨는 무엇보다도 산지니가 섣불리 성깔을 내어 이 집 마당에서 몰매를 맞든가 장살을 당하든가 하는 일이 걱정이었..

장길산 6권 (30)

"지체와 체모가 있으신 터에 이러시면 안됩니다. 일에는 법도와 순서가 있으니 남들 하는 대로 지키십시오." 판관은 그 목소리에 또한 마음이 뛰었던 모양이다. "그게 옳은 말이다. 참으로 현숙한 사람이로구나." 하면서도 손목을 놓지 못하는데, 아들이 보다 못하여 겨드랑이를 끼어 일으켰다. "아버님, 그 말씀이 옳다면서 왜 이러십니까. 어서 건너가십시다." "얘, 홀아비 홀어미끼리 새삼스레 무슨 전안지례란 말이냐, 그냥 작수성례로 해야겠다." 아들이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하였다. "예, 그리해얍지요." 아들과 유모는 마주 웃고 있는데 고개를 숙인 석씨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신분이 중인이라하여 별것도 아닌 지방 세력자에게 당하는 수모가 뻐저리게 서글펐던 까닭이었다. "지금 널다리로 가셔서 아이들과 산지..

장길산 6권 (29)

젖어미는 받은 돈이 있어 귀찮은 내색은 하지 못하였다. "그거야 여부가 있겠수. 한 달 아니라 일 년이라두 모셔야지. 도련님은 집에 돌아가실 게유?" "될 수 있으면 여기서 함께 모시구 지내야지요. 급한 볼일이 있으면 집에두 다녀오구요." 밖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오고 삽짝이 열리는지 놋쇠 방울 소리가 딸그랑거렸다. "에그머니, 오는 모양이구려." 사내들 둘이 어깨에다 허연 홑청에 싸감은 사람의 형체를 떠메고 들어섰고 뒤이어 나머지 사내들이 따라 들어왔다. "별일 없었는가?" 하인이 큰아들에게 말하였다. "예, 벼락같이 해치웠습죠. 동네 것들이 쫓아 나올려구 해서 불을 질렀다구 엄포를 놓았더니 제 집 걱정에 나서는 놈 하나 없습디다." "잘했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미닫이가 벌컥 열리며 판관이 고개를 ..

장길산 6권 (28)

"그래 알았네, 잘해내면 제 사람에게 백미 한 섬씩 주겠네." "어이구 참말 충신 효자의 집안이십니다. 어느 말씀이라구 잘해내지 않겠습니까." 장남이 자리를 뜬 뒤에 겸인이 말하였다. "널다리서 우리 집 아이가 돌 텐데, 그애가 길안내를 설 걸세. 이런 일이 자주 생기면 자네들은 대번에 형편이 피겠구먼." 서강 장사치가 말하였다. "내가 그전에 서소문 밖으루 보쌈품을 팔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는 지겟작대기, 낫, 몽둥이를 들구 들어갔지. 허허 막상 뛰어들어가니까 고것이 샐쭉 웃더니 자루에다 머리를 들이미는게 아닌가, 그저 돈만 안 받았다면 침을 발라보구 싶더구먼." "에이 그 부정탈 소릴랑 말게. 다시 이르는 말이지만 여자 몸에는 손가락 자국 한군데 나서두 안되네. 그저 등잔을 들구 오듯이 하란 말..

장길산 6권 (27)

오만석은 더 이상 우기지 못하고서 일당들을 휘동하여 사근다리를 건넜다. 마감동은 큰돌이가 끌고 온 말에 가까스로 올라타면서 사경을 모면한 장교들에게 다시 물었다. "김식에게 가족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장교 하나가 대답하였다. "한양에 아우가 있다고 들었으나, 아직 처자식은 없는 줄로 아오." "다행이로군." 마감동은 부하들의 뒤를 따라서 사근다리를 건넜다. 이로써 감영에서 나왔던 여섯 명의 자객 가운데 두 사람만이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 두 사람이 구월 산 일당들에게는 가장 큰 후환거리로 남게 되었다. 뒷날 포도 종사관 최형기는 이들을 앞장세워 토포군의 길잡이로 삼았던 것이다. 사실 수회천의 결은 구월산 토벌의 초전이었던 셈 이었으니, 숙종 십년 갑자 유월의 ..

장길산 6권 (26)

김식은 아까와는 반대 방향에 마감동을 바라보며 섰다. 그와 엇갈리는 순간에 감동은 돌 아 선채로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내쉬어 북받치려는 긴장과 분노를 흐트러뜨렸다. 옆구리에 베인 상처로하여 몸이 굳어지면 어깨와 팔이 뻣뻣해져서, 상대의 변화무쌍한 칼날을 제 때 받아 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마감동은 시선을 제 발의 서너 발짝 앞에다 떨구고 칼을 늘어뜨린 채 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가운데 김식의 숨소리의 변화와 높낮음이 또렷이 들려왔다. 달이 지면 그는 죽는다. 마감동은 이제 자신이 있었다. 판단으로 싸우는 자는 감각으로 대응하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는 검을 배운 이래로 월정사의 풍열스님으로부터 마음을 비우는 법을 다시 배웠다. 칼은 그의 마음처럼 무심해질 것이다. 어둠이 내리면 김식..

장길산 6권 (25)

"당장에 그것들을 처치해버려야지." "두어라." 김식이 장교에게 눈짓으로 앉으라고 일렀다. 김식의 주위로 장교들이 둘러앉았다. "내가 뭐라더냐. 벌써 오랫동안 놈들이 구월산에 진치고 들어앉아 있었으니 구월산 인근 은 도적들의 판도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송화 무더리라면 구월산 서쪽에서는 가장 오래 된 장터이다. 이 장터 놈들이 모조리 적당이라고 여겨야 한다. 우리는 두령의 모가지만 가져가면 되니까 섣불리 나서지 말아야지. 내일 정오까지 이 주막 안에 꼼짝 말고 엎어져 있어야 한다." 장교 하나가 김식에게 물었다. "부장, 만약에 화적들이 떼지어 여길 습격해 오면 어쩝니까?" "이들은 보통의 도적이 아니다. 스스로 활빈의 무리라고 자처한다. 수렛고개에서 소두령 되는 자의 태도를 보았겠지. 아랫것..

장길산 6권 (24)

"들었는가, 수렛고개의 네 부하들은 모두 죽고 남은 두 사람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우리는 저 둘을 끌고 내려갈 터인데 너는 산채에 가서 네 두령에게 알려라. 내일 정오 무렵까지 송화 무더리 장터에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라고 전하란 말이다. 곁에 누가 있으면 안된다. 그대와 둘이서 오도록... 만약 그가 의기있고 담이 있는 자라면 내가 한 번 겨루어보겠다." 소두령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김식을 노려보며 물었다. "기찰포교들인가?" 김식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너희 두령에게 포한이 있는 사람이 보내서 왔다." "어떤 포한이냐?" 김식의 곁에 있던 장교가 거들었다. "우리도 너희들처럼 먹고사는 사람들인데 구월산이 탐이 나서 그런다. 우리 두령은 너희 들 때문에 해서에서 몸둘 곳이 없어졌..

장길산 6권 (23)

좌수가 통인과 더불어 마룬내를 떠나 들판을 허둥지둥 달려갈 때 어찌나 놀랍고 기가 막혔던지 어서 돌아가 화채그릇에 시원한 꿀물이나 타서 벌컥이며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우선 갈증이 심하여 침이 마르고 목구멍이 뻑뻑한지라 아무데나 들어가서 냉수 한 사발이라도 얻어먹으려 하였다. 가까이 외딴 농가가 있거늘 통인 아이를 시켜 물을 얻어오게 하였다. 통인이 달려가 물그릇을 들고 오는데 물빛이 누르끄름 하였다. 좌수 어른 살펴볼 사이도 없이 대접을 들이켜고는 죽을상이 되어서 뱉어냈다. "에익 퉤퉤, 이 무슨 구린내냐?" 그때에 사립 밖을 내다보던 아낙네가 하도 어이가 없는지 한마디 하였다. "때가 기근이라 물을 급히 찾길래 그래두 사람 사는 인정이라 진간장을 타서 주었더니, 참 별사람 다 보겠네." 좌수가 망신을..

장길산 6권 (22)

"대에 뽑힌 사람들은 강변에 나가 지키다가 세 불리하면 달아나는 척하고 갈대밭에 숨으시오. 그리고는 좌우로 갈라져 포졸들이 들어올길을 터놓으란 말이오. 그러면 저들이 안심하고 언덕 아래까지 쫓아오면 여기서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돌을 던져서 쫓아내고 갈밭에 숨었던 패가 합세하여 협공하십시다. 미곡을 차압당하면 어루리벌의 굶주린 백성들은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요." 이윽고 오십여 명이 먼저 세 곡선이 대어졌던 마룬내 냇가로 나가서 늘어서고 언덕 위에 남은 사람들은 아이들까지도 돌을 그득히 무릎 아래 쌓아두고 기다렸다. 아이들과 젊은 총각들은 꼭 대보름날의 투석놀이나 되는 듯이 희희낙락하며 연습팔매를 한답시고 허공중에 돌을 날려보는 것이었다. 멀리 강변을 따라 뛰어오고 있는 포졸들의 행렬이 보였는데 육모방망이..

장길산 6권 (21)

키 큰 사내가 마당 구석의 헛간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자, 하인들은 그를 따라서 헛간으로 들어 섰다. 쫓기던 자는 우선 돈을 헛간 안쪽에다 던졌고, 앞섰던 자가 그를 지나쳐 안으로 뛰어드는데 뒤이어 다른자가 앞을 다투며 들어선다. 키 큰 사내는 뒤미처 들어오던 자의 배를 무릎으로 올려 찼다. 그가 입을 딱 벌리더니 배를 안고 무릎을 끓었으며, 다시 이번에는 돈꿰미를 주으려고 엎드린 하인의 등판을 발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목에 헉, 걸리는 듯한 숨소리가 들리며 길게 뻗으니, 키 큰 사내는 널브러진 두 하인의 다리를 잡아 헛간 깊숙이 끌어다 두었다. 그는 저고리를 잡아 흔들어 바람을 내면서 유유히 대문으로 가서 빗장을 빼고 한쪽 문을 열더니 고개를 내밀었다 십 여 명의 사내들이 안으로 우르르 밀려들었다. 그들의..

장길산 6권 (20)

동지는 침통한 얼굴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에 완전히 기진맥진해버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마음에 없는 진휼을 베풀었다고는 하나 벌써 태산 같은 선행으로 인근 사방에 알려지고 사또는 감영을 통하여 조정에 장계까지 올렸으니, 이제 와서 도적들의 강압적인 사주를 받았다고 광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어서 일이 조용히 끝나 종손이 무사히 되돌아오기만 바랄 뿐이었다. "어서 보내주시오." 동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인배들이 아무리 세상 도리에 어둡다 할지언정, 굶주리는 자들에게 미곡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대하다 보니 모두들 진휼이 어떠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른바 관상가에서 말하는 길기라는 것은 선행을 한 뒤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안색을 말하는 것이니..

장길산 6권 (19)

사내는 자기를 믿어주는 것만 반가운지 산 위로 올랐다. 김기가 말득이에게 당부를 하였다. "자네는 여기서 형편을 보았다가 관군이 모두 돌아간 뒤에 조동지네 집으로 들어가 식객을 자청하게. 아마 다른 마음은 품지 못할 테니까." "젠장 나는 매일 파장이나 보구 다니라는 게로군." 투덜대는 말득이만 남겨두고 그들은 뒷산을 넘어갔다. 산을 한참이나 올라서 동현령으로 들어가니 깊은 골짜기에 찬바람이 일어나고 물이 마르지 않은 제법 큰 사내가 나왔다. 그 위에 빈터가 있었는데 다 허물어진 집 한 채가 보였다. 앞서 가던 사내가 말하였다. "바로 여기입니다. 극락사라는 절이 있던 곳입니다. 예전에 주지를 역모에 몰아 죽이고 장정들을 동원하여 불을 질러버렸지요. 그 뒤로 워낙 사연이 있는 절터라 아무도 올라오지 않고..

장길산 6권 (18)

"아서라... 누구든지 거기서 세 걸음만 떼면, 다리몽갱이를 분질러서 머리에 이게 해주지."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멍하니섰는 총각의 작대기를 덥석 잡았다. 상대가 놀라서 지레 겁을 먹으며 작대기도 놓고 물러났고, 선흥이는 그것을 두 손아귀에 쥐어 어깨에다 약간 힘을 주더니 삭정이처럼 부러뜨렸다. 아무리 몽둥이라 하나 굵기로 보아서는 무릎에다 대어도 한참힘을 써야 할 텐데, 그것을 허공에서 잡고 간단히 꺾어버리는데야 누가 보아도 완력이 대단하였다. "좀 비켜요 비켜." 마을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과 선일이와 말득이가 나타났다. "김서방! 저놈 입 좀 닫아놔라." 길산이 빙그레 웃으며 담장 위로 내밀어진 조동지네 하복의 머리를 눈짓하였고, 선일은 땅바닥을 한바퀴 휘둘러보고서는 맞춤한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

장길산 6권 (17)

노파가 가냘프게 중얼거리는데, 바람맞이를 하고 앉으니 한결 나은 모양이었다. 노파의 이마에는 땀이 번져 있고 입술에 백태가 끼어 말라붙었다. 사내가 봇짐을 끌어다가 손을 쑤셔넣더니 쌈지 같은 주머니에서 한약 비슷한것을 한줌 꺼내었다. 그가 아이에게 그릇을 내어주며 부드럽게 일렀다. "가서 물을 떠오너라." 아이는 할머니만을 바라볼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구황하는 황랍환이다. 이걸 잡수시면 곧 나으신다." 그러나 노파는 아이의 손을 꼭잡고 놓지를 않았다. "그만두오. 내가 더 살아서 무얼 하겠소. 저것이 이제 노중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아 죽고 말터이니, 먹을 것이나 있거든 내 보는 앞에서 저애를 먹여주었으면 그게 약이지요." 사내가 말하였다. 그는 노파의 빈 사발을 들고 문루를 나서서 숲을 향..

장길산 6권 (16)

"성님께서 해주신다면야 저두 할말이 없습니다." 마감동이도 새삼 장가드는 얘기가 나오고 보니 어쩐지 심란한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이사나 끝내구 보십시다." 감동이가 말하였다. 그믐께에 가서야 산채가 대강 정돈이 되었고 길산을 비롯한 식구들은 모두 구월산으로 돌아갔다. 오만석은 구월산 산채에 남고자 하였는데 마감동이도 그 생각은 같았다. 김기도 그의 고향이었던 봉산 근처로 식구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꺼려하였으므로 결국 동선령으로 이사갈 가족이 있는 것은 길산과 말득이뿐이었다. 김기는 식구들을 탑고개에 남겨두고 혼자서 동선령으로 가기를 원하였다. 이따금씩 은율로 가서 식구들을 돌아보고는 다시 산채로 오르면 될 것이라 하였다. 오만석이와 마감동이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가리라 다짐하였다. 길산은 산..

장길산 6권 (15)

나리가 손가락질 하기도 전에 하인들은 나중에 집에 가서 치를 곤욕부터 두려워 제가 미리 지나치게 나올밖에. 우선 나간다는 게 욕설이었다. "이런 망할 자식 같으니. 예가 어디라구 초상집 개처럼 얼씬거려." "예가 어디긴 어디야. 구휼청 활인서두 아니구 청보에 싸논 개똥 두엄께지." 선비들이 저런 저런, 하면서 손짓 입맛 다시기 바쁘니 하인은 오랜만에 주인들 앞에서 꿩잡은 매의 행세라 신이 나서 손찌검을 하였다. 볼퉁이를 찰떡 치듯 하는 판인데, 아무리 흥복이가 별다른 재간이 없다고 하나, 한창 시절에 주막거리에서 당초망이란 소리를 듣던 사람이라, 슬쩍 손을 올려 막으면서 손가락을 비틀어 쥐었다. 그리고는 한바퀴 꺾어서 등뒤로 밀어붙였다. "글 한다는 것들이 앉아서 굶주린 양갓집 유부녀나 희롱하고 있으니,..

장길산 6권 (14)

몽둥이로 후리니 허리를 얻어맞은 포수가 숨막히는 소리를 내지르며 넘어졌다. 몽둥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는데, 마을 장정들이라야 모두가 춘궁에 푸성귀죽이나 마시고 양지쪽서 해바라기하던 사람들이라, 앞으로 내어보는 작대기며 괭이 쇠스랑에 힘이 들어가 있을 리가 없었다. 선흥이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부딪치자마자 맥없이 퉁겨져 나가거나 자루 중동이가 꺾어져버린다. 맨손이 된 사람들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횃불로 던져두고 멀찍이 달아났다. 선흥이는 얼른 돌아서서 떨어진 화승총을 포개어 들고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였고 그에 용기를 얻은 마을 장정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따라붙었다. 선흥이는 동산을 바라고 한참 뛰다가 일각이라도 벌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숲으로 들어서기 전에 휙 돌아섰다. 역시 저쪽에서도 소리만..

장길산 6권 (13)

임씨는 시동생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작은조카가 들어와 흥복을 빤히 올려다보았고, 그는 아이를 끌어다 무릎에 앉혔다. 아이는 극성스럽게 울더니 흥복이 놓아주자 제 어미에게로 가서 안겼다. "소문을 듣고 아주머니와 조카들을 안돈시키러 찾아왔습니다." 임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늦었습니다." "고생이 많으셨지요?" "벌써 오래된 일이어요. 삼촌이 이렇게 건장하게 살아 계실 줄은 몰랐어요." 흥복은 제 형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주머니가 여기서 편히 계실 줄은 저두 몰랐습니다." 여자는 눈을 치뜨고 흥복을 쏘아보았다. "그러면 절더러 혀를 깨물고 형님을 따라 죽으라는 말씀인가요. 관가에 함께 잡혀가서 형률에 따라 관비로 떨어질 제 나는 죽은 거나 매한가지였어요. 여기..

장길산 6권 (12)

아낙네는 소리를 죽여 울기 시작하였다. 관에서 민변으로 작당한 고장에 대한 보복은 당시에 매우 혹심하였던 것이다. 고장의 등급을 강등시키고 마을을 폐하여버리기도 했고, 아예 양민으로서 살아갈 모든 권리를 방기해버리는 수도 있었다. 춘궁기에 환곡 내주는 일로 말썽이 생겼다 하여 이서배들은 아예 이 마을을 외면하는 모양이었고, 그 보복이 몇 년 계속되는 가운데 느릅나무골은 몰라보도록 황폐하게 변한 것이다. 강선홍이는 장연에서 겪은 일이 있었는지라 그러한 내막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제가 읍내에 다녀오지요. 그리구 흥복이두 데리구 오겠습니다." "그이를 데려오면 안돼요. 누구든지 그이를 보면 발고할 테니까요." "저희 걱정은 마십시오." 읍내 주막에서 흥복이와 선홍이는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느릅나무골로 ..

장길산 6권 (11)

길산은 얼결에 일어섰다. 그러나 기왕에 일어선 김이라 다시 주저앉을 수도 없어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짧은 칼을 뽑았다. 그는 허참, 하면서 멋쩍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일단 판 안에 들어서니 길산의 본색이 원래 광대라 한바탕 놀아보고 싶기도 하였다. 그는 역시 나무 한 그루를 바라고 천천히 걸어갔고, 마치 그것이 놀이마당의 오리목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길산은 가볍게 두 발을 굴러보고 나서 나무 바로 밑에까지 번개 곤두로써 몸을 공중회전하여 다가갔고, 여선참사로 칼을 던졌다가 다른 손으로 바꿔 쥐면서 칼살판을 뛰는데 나무의 전후좌우로 눈보라가 뽀얗게 일어나 그의 몸이 보이질 않았다. 마치 독수리가 나무 주위에서 힘차게 퍼덕이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살판으로 허공에서 떨어져 발이 땅에 닿자..

장길산 6권 (10)

정면에는 감동이가 있었고 보다 아래편에는 선홍이가 있었는데, 감동이는 환도를 쥐고 오르다가 그를 바라고 달려오는 멧돼지를 보자 주춤하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달아날까 옆으로 샐까를 눈가늠해보다가 너무 눚은 걸 알았다. 짐승이 감동이의 사추리를 받아넘기려고 달려들적에 감동이는 옆으로 피하면서 환도를 내리그었다. 짐승이 울부짓으면서 감동이의 허벅지께를 들이받고 빠져나갔고, 이어서 선홍이가 한손에 엄파를 치켜들고 섰다가 부상당한 멧돼지와 맞섰다. 둔중한 어갯죽지에 칼을 맞아서 짐승도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상처는 치명적이긴커녕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멧돼지는 흉포해져서 선홍이를 허공으로 날려 보내려는 기세로 달려들었다. 선홍이가 뚝심이 없었으면 그대로 짐승의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슴에 받고 뒤로 나가떨어졌겠지만, ..

장길산 6권 (9)

"전번에 오백 냥과 곡산에서 만둥에게서 빼앗았던 은이 대략 칠백여 냥 되는 듯합니다. 미곡이 삼십 석, 포목이 이십 동쯤 됩니다." "허허, 꽤 많이 모아두었구나. 그만하면 우리보다두 부자네. 재물은 모두 자네가 가지려는 것은 아니겠지." "원 천만에요. 그런 생각을 하다니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비축해두고 있습지요. 대개는 여기 식구 중에 여염에 남아 있는 가족을 도우려는 자들이 있어 이만 재물도 얼마 안 가서 식량과 고른 분배로 다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몇 차례나 분배를 하였는가?" "예, 두어 차례 하였습니다. 대개는 섣달 그믐께에 모두 모여서 의논을 정하지요." "그렇게 하였다면 한 사람에 백여 냥의 차례는 돌아갔겠지?" "아마 이십여 냥씩 돌아갔을 겁니다. 포목으로 받은 자나 미..

장길산 6권 (8)

흥복은 비틀거리며 고개를 넘어 거북이골로 내려가보았지만 역시 먼저 떠났던 을량의 일행도 보이질 않았다. 그는 눈 위를 여기저기 살피다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어 있는 부담을 발견하고는 눈속에서 돌멩이를 뽑아내어 뚜껑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판자가 뻐개지고 틈이 벌어지자 그는 부리나케 손을 집어넣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움켜쥐었다. 그는 손에 쥔 것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는 맥없이 던져버리고 말았다. 다른 부담을 부숴서 다시 한번 살피니 마찬가지였다. "그랬구나..." 부담마다 가득 들어있는 것은 은이 아니라 자갈돌이었다. 그들은 자갈을 짊어지고 허겁지겁 달아나느라고 괜한 전력을 모두 소모해버렸던 것이었다. 흥복은 드디어 자기가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누구일까, 관군인가, 관군이라면 그를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