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791

혼불 7권 (35)

"하이고오, 오지랖도 넓구라. 삼천 리가 좁겄네. 삼생을 넘나들게. 참내. 나 좀 보시겨. 전생 이생 내생이 머 그렇게 복잡헌 거인지 아능게빈디, 내 눈에 다 뵈이는 거이여, 그게. 왜 그런지 알어? 부모는 내 전생이고 이 몸뗑이는 나 사는 이생이고요잉? 내생은 바로 자식이여. 자식. 그렇게 생각허먼 간단허잖에에? 긍게 그, 좀 낫겄는 내생을 봉출이한테서 보라 그 말이여, 내 말은." 옹구네는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아낙이었다. 눈동자 검은 알맹이가 데구르르 구를 때마다 거기 사물이 부딪쳐, 딱, 수리를 내거나, 가느소롬 눈꼬리 좁히며 깎은 손톱 낚싯바늘을 세우면, 남의 눈에 좀체로 뜨이지 않을 속내 비늘까지도 착, 낚아챌 수 있는 것이 옹구네라고나 할까. 그런 그네의 성정머리를 아는지라 이쪽 사람이..

혼불 7권 (34)

10. 이 피를 갚으리라.  피걸레가 다 되어 널부러진 만동이와 백단이를 질질질 끌어내 솟을 대문 바깥에다 동댕이치고는, 왕소금을 쫙 뿌려 버린 노복들이 어금니 무겁게 돌아서는 이기채의 사랑마당에, 두 사람 끄집힌 핏자국이 대빗자루로 쓸고 간 자국처럼 음산하고 쓸쓸한 기운으로 차갑게 남았다. 흐린 날이 저무는 잿빛 땅거미를 빨아들이는 탓인가, 그 참혹한 자취는 마치 검은 비명의 갈포가 갈갈이 찢긴 흔적인 양 귀살스러운 흑적색을 띠고 있었다. 넋이 나가 우두망찰, 정신이 공중에 뜬 아랫것들이 아직도 질린 낯색을 거두지 못한 채 두 손을 맞잡은 그대로 식은땀을 쥐고만 있는데 "멋들 히여? 후딱후딱 치우제. 수악허그만." 구부정한 안서방이 헛간에서 사납게 닳아진 대빗자루를 찾아들고 나와, 얼른 달려들라는 ..

혼불 7권 (33)

그런데 방에서 나온 것은 여자가 아닌가. "아는 사램일 거이요." "아는 사람? 누구간디?" 공배네는 다소 안심을 한 듯 마당이랄 것도 없는 마당으로 그제서야 들어선다. 그러나 황아장수는, 아까 누구냐고 댓바람에 묻는 소리 들을 때보다 더 화들짝 놀라, 마중이나 하듯이 이만큼 고샅께까지 밀고 나와 공배네 들어서는 걸음을 막는다. "아이고, 나는 또 누구라고?" 가까이 다가온 황아장수 아낙을 알아본 공배네가 팔짱을 꽂아 끼며 이제 아주 마음을 놓은 소리로 말한다. "근디 웬일이여? 여그서 자고 갈라고 들옹 거잉가?" "어차피 어디서 자든 나는 매마찬가징게로. 아는 집이라 기양." "빌어먹을 노무 예펜네." "잉?" "아니 자개말고 옹구네 말이여. 나그네끄장 있는 년이 집 비우고 그 지랄을 허고 헐레벌레..

혼불 7권 (32)

바싹 눈을 구멍에 들이대고 유심히 유심히 방안을 더듬어 보자니까, 어두워서 무엇이 보여야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사람 형상 분명헌 것이 나란히 누워는 있지만, 자세히는 안 보여. 방안에 자던 사람이 무심코 눈을 뜨고 보았더라면 놀라서 소리를 지르드레, 먹장 같은 어둠 속 문짝에서 시어머니 눈알만 번들번들, 용을 쓰고 기어이 이 비밀 실마리를 캐내고 말겠다는 눈빛이니 그랬겄지, 그 눈에 불을 쓰고 살펴보았더니만, 이건 참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네. 이게 웬일이라냐. 며느리는 자기 품에 전실자식을 안고 자고, 제 자식을 내팽개쳐 문간에서 꼬부린 잠을 자고 있지 않는가. 그걸 누가 믿어? "내가 잘못 봤을 테지. 바꿔 봤을 테지." 허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절대로 잘못 본 것이 아니었어. 몇 번이나 고..

혼불 7권 (31)

어느 하루 아무 까닭도 없이 앓기 시작하던 애기엄마가 끝내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구나.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한하리요. "니가 인제 나중에 얼마나 울라고 그렇게 웃냐." 귀신이 시기를 했던 모양이지. 그래서 옛날부텀도 복이 너무 차면 쏟아진다고, 항상 어느 한 구석은 허름한 듯 부족한 듯 모자라게 두어야 한다 했니라. 천석꾼 만석꾼 부잣집에서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대궐마냥 덩실하니 짓는 거야 당연할 일이겠지만, 대문만은 집채 규모에 당치않게 허술하거나 아담 조그맣게 세웠고, 작명을 할 때 또한 사방 팔방이 복으로만 복으로만 숨통이 막힐 만큼 꽉 차게 짓지는 않는단다. 지나치면 터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거든. 그리서 부부 금슬이 유난히 좋아 떨어질 줄을 모르면 예전 어른..

혼불 7권 (30)

9. 암눈비앗  일월성신 천지신명이시여. 이런 세상이 있으리이까. 귀신은 밝으시어 모르는 일 없다 하옵더이다. 내 어찌 살리이까. 내 이제 어찌 살아야 하오리아까.  세상에 나서 집 바깥이라고는 동네 새암터에도 나가 본 일 없으리만큼, 살구나무 토담 안에 숨은 듯 있는 듯 감추어져, 아침 이내 아지랑이 아옥하게 어리는 숨결로 자라온 작은아씨, 지나가는 눈빛조차 함부로 쏘이지 않은 부들의 속털같이 여리고 가벼웁고 흰 몸 애기씨, 가장 멀리 간 나들이라면 오로지 대문 밖 한울타리나 다름 없었던 큰집이 다였던 강실이는, 지금 비 먹은 구름이 달빛을 무겁게 삼킨 음 이월 밤의 명치끝이 결리어 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 가슴뼈 아래 한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곳 명치. 명문이라고도 하고 심와라고도 하는 이 급소..

혼불 7권 (29)

만동이 백단이는 죽은 사람 멩당 쓰니라고 애썼지만, 나는 산 사람 멩당을 시방 썼제. 좌춘복이 우강실이로 내가 청룡 백호를 삼고, 인자 두고 봐라, 우리 집 안방 아랫목이 연화도수 멩당자리 꽃 벌디끼 벌어지게 허고 말 거잉게. 내 손아구 양손에다 동아줄 칭칭 매서. 내 허란 대로 느그는 살 수밖이 없도록이 맨들고 말랑게. 그럴라고 내가, 지 발로 걸어나가는 시앗을 꽃가매 태우디끼 등짝에 다 뫼셔서 업어온 거이여. 시앗? 그렇제. 시앗이제. 니가 내 서방인디, 저년은 시앗이제 그럼. 비록 느그가 찬물 갖춰 육리 올리고 귀영머리 마주 푼대도 순서는 순서여. 나는 절대로 내 밥 안 뺏길 텡게. 춘복이 너, 열 지집 거나리는 것은 내가 너를 호걸로 쳐서 바 준다고 해도, 내 밥그릇에 밥 덜어낼 생각은 꿈에도 허..

혼불 7권 (28)

이고 졌던 짐을 내려 멜빵을 풀어 놓은 황아장수는 때묻은 버선짝을 뽑아 벗으며, 이제는 별 도리 없이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 할 사람이라, 비스듬히 바람벽에 등을 기댄다. "사람도 그러까?" 강실이를 눕히던 옹구네가 혼자말처럼 물었다. "사람?" "긍게 사램이, 바가지만 헝 거이여어 못헝 거이여?" "자다가 봉창을 뚫네. 아 왜 사람을 느닷없이 바가지다가 댄당가?" "사람은 아매 그만 못헐 거이요. 더 헌 사람도 있을랑가는 모리겄지만. 못헌 사램이 더 많제." "뚱딴지맹이로... " "비탈진 까끄막에 독밭을 매도 한 해 두 해 일 년 이 년 세월이 가먼, 티 고르고 까시 고르고 정이 드는 거인디, 사람은, 어저께끄장 너냐 나냐, 어저께가 머이여 한숨 전에 아까막새끄장 세상에 다시없이 이뻐라고, 보듬고..

혼불 7권 (27)

8. 납치  못마땅하게 세운 무릎에 두 팔을 거칠게 감아 깍지를 낀 채 삐딱하니 틀고 앉은 옹구네가, 깎은눈으로 춘복이를 꼬아본다. 바지직, 바지직, 무명씨 기름 등잔불에 까물어지는 얼룩이 피멍인지 그림자인지 시꺼멓게 뭉쳐서, 온 낯바닥이 맞어 죽은 귀신 모양으로 터지고 헝클어진 춘복이는 짐승 앓는 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는데, 옹구네는 농막으로 내달려올 때의 기세와는 달리, 지게 문짝 문간 윗목에 오똑하니 앉아, 그러는 양을 바라볼 뿐이다. 마음이 있어도 손을 쓸 수가 없는 탓이었다. 에라이, 더러운 년의 팔짜야. 아무도 안 보는 속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옹구네는 지난번에 강실이 업어오던 생각을 한다. 참내, 내가 아무리이 아무리 근본 없는 불상년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껍데기만 둘러썼제 어디 사램이..

혼불 7권 (26)

"이 몰골을 봇시오. 금지옥엽 귀허디 귀하게 외씨 보손에 볼받어 신고, 방안으서만 앉은 걸음 선 걸음 놓던 발로 단 십리, 단 오리 길을 걸을 수가 있으며, 성헌 몸도 아닌디 병든 몸으로 이리 비척 저리 비척 어느 하가에 목적헌 디를 당도헐 수가 있겄능교? 거그다가 시방 경색이 되야 부렀는디. 사방이 맥헤 갖꼬숨통조차 안 열링만, 어서 어디로든 들으가 바늘로 좀 손구락 발구락 같은 디를 따야 안허겄소?" 황아장수는 그만 제 숨통까지 막힐 지경이어서, 숫제 그냥 다시 원뜸 종가댁으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게 당황하였다.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비단도 지고 다니지만, 온갖 잡살뱅이 자질구레한 물건을 등에다 지고 다니면서 등뼈가 굳은 아낙의 산전수전 눈치로, 이번 일이 도무지 예삿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