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연보] -2-
-김훈-
<난중일기>는 임진년 7월분이 누락되어 있다. 한산도 싸움의 전말은 임진년 7월 16일자 장계에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함대의 작전은 수색섬멸에서 유인섬멸로 바뀌었다.
한산도 대첩은 두 개의 국면을 갖는다. 견내량 싸움과 안골포 싸움이다. 견내량은 거제도 북쪽 하청면 앞바다이다. 안골포는 지금의 진해시 안골동이다.
적의 함대는 견내량과 안골포에 숨어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의 적 앞으로 소수의 전선을 보내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부수었다.
안골포의 적들은 내항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는 종렬진으로 내항을 깊이 찔러 들어갔다. 여러 번의 파상 공격 끝에 안골포의 적들을 모두 부수었다.
견내량에서 적선 47척이 격침되었고 10여 척이 나포되었다. 안골포에서는 적선 42척을 격침시켰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은 수세와 공세, 유인과 섬멸, 도주와 역공, 포위와 역포위에서 신속한 전환의 위력을 떨쳤다. 이 ‘전환’이야말로 한산대첩의 비밀이었다.
적의 주력을 넓은 바다 쪽으로 유인하며 도주하던 이순신의 함대는 돌연 적 앞에서 방향을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치며 적을 포위해서 섬멸했다. 강도 높은 군사 훈련과 지휘관의 대담성만이 작전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
견내량에서, 적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였다. 와키자카는 김해로 달아났다. 와키자카 휘하의 장수들은 대부분 견내량에서 전사했다. 와키자카의 가신 마나베가 패잔병 4백을 이끌고 한산도로 들어갔다. 마나베는 한산도에서 할복 자살했다. 이순신 부대는 한산도로 들어간 적의 잔당들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적들은 모두 굶어 죽은 것으로 보인다. 한산도에는 식량이 없었고 적들은 배가 없었으므로 바다로 탈출할 수 없었다.
한산대첩은 남해안의 두 물목에서 벌어졌던 국지전이었으나, 그 전과는 전쟁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놓았다.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상실했다. 바다를 통한 보급이 끊겼고 퇴로가 막혔다.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시킴으로써 조선은 전라, 충청, 황해를 지켜냈다. 반격의 교두보가 확보되었고, 서해를 통한 지휘 계통이 회복되었다.
임진년 7월에 고시니 유키나가는 평양을 점령하고 눌어붙어 있었다. 임금은 의주에 있었다. 고니시가 의주의 조선 임금에게 편지를 보냈다. 류성용의 <징비록>이 이 편지를 전한다.
일본 수군 10만이 또 서해를 건너오고 있소이다. 알 수 없구나! 대왕의 수레는 이제 또 어디를 가려는가.
이순신은 한산도 싸움의 여러 모습들을 다음과 같이 장계에 적어 보고했다(임진년 7월 15일의 장계).
안골포의 백성들은 산속에 깊이 숨어 있었습니다. 적의 배를 모조리 깨뜨리면, 적들은 숨어 있는 조선 백성들을 도륙할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물러나와 밤을 새웠습니다.
적들의 시체를 12곳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적의 피가 포구에 가득 찼습니다. 얼마를 죽였는지 헤아리지 못합니다.
견내량은 물길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이 싸우기 곤란합니다. 적은 또 형세가 급해지면 기슭을 따라 육지로 올라갈 것입니다. 그래서 한산도 쪽의 넓은 바다로 유인해서 모조리 잡아버리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7월 13일, 싸움을 마친 이순신 함대는 여수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7박 8일의 전투였다. 이 싸움의 공로로 이순신은 정헌대부로 승품되었다.
정헌대부를 내리는 교서에서 임금은 말했다.
바람 불고 서리 찬 국경으로 임금의 수레는 떠돌고, 갑옷 번쩍이고 말발굽 소리 요란한 옛 도성의 선왕의 무덤은 천리나 떨어졌으니, 돌아가려는 한 가닥 생각이 마치 물이 동으로 흐르듯하던 차에, 이제 적의 형세가 기울어지니 하늘이 노여움을 푸는 줄을 알겠도다.
아아, 백 리를 가는 자는 구십 리로 반을 삼는 법이니 그대는 끝까지 힘쓰라.
8월 1일, 판옥전선 74척, 협선 92척을 좌수영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8월 24일 발진, 남해도 관음포에서 1박,
8월 25일 사량도에서 원균과 합류, 당포에서 1박,
8월 26일 물결 사나워 포구에서 대기,
8월 27일 응천에 도착, 경상 해안 쪽 적에 대한 정보 수집,
9월 1일 새벽에 몰운대 도착, 부산 동래 해역을 수색, 부산포에 정박중인 적선 5백여 척을 발견, 장사진으로 돌격해 들어가 전투, 6차례 전투로 적선 150여 척 격침.
이 싸움에서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했다. 정운은 이순신이 가장 아끼던 장수들 중의 하나였다.
이순신은 정운에 관해 별도의 장계를 올려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임진년 9월 11일의 장계).
정운은 몸을 가벼이 여겨 죽음을 잊고 먼저 적의 소굴에 돌격하여 하루 종일 힘써 싸웠습니다. 그날 돛을 올릴 때 정운은 적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기상이 아주 없어져서 뒷세상에 알려지지 못하면 절통한 일입니다.
정운의 사당은 녹도에 있다. 이대원과 함께 모셨다. <쌍충사>라고 한다.
이때 부산에 진을 친 적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임진년 9월 17일의 장계).
……부산성 내의 관사는 모두 철거하고 흙을 쌓아서 집을 만들어 소굴을 이룬 것이 1백 호에 달했습니다. 성 밖의 동남쪽 산기슭에서 적의 소굴이 3백여 개가 있었습니다. 그중 큰 집은 축대를 쌓고 회를 발라서 마치 절과 같았습니다. 적들의 소행을 생각할 때 통분한 마음 가눌 수 없습니다…….
임진년은 저물었다.
<계사년(1593년), 공의 나이 마흔아홉>
7월 14일, 한산도로 수영을 옮겼다(이보다 며칠 전에 권률은 행주산성에서 크게 이겼다. 행주대첩의 소식은 7월 13일 이순신 수영에 전해졌다). 수영을 옮기던 날 몸이 많이 아팠다. 수영은 한산도 두을포에 자리잡았다. 두을포는 지금의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이다. 섬의 서쪽 해안, 오목한 포구이다. 포구 앞에 대혈도, 소혈도 두 섬이 있어 배를 감추기 좋고 파도를 막아주어서 내항은 늘 고요하다. 물밑 경사가 완만해서 배들이 들고나기가 힘들지 않다.
1593년 8월 10일에 올린 장계에서 이순신은 적의 동태와 아군의 실정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적들 중 3분의 1은 조선 백성들이 섞여서 일하고 있습니다. 적들은 부산에서 웅천에 이르는 백여 리에 서로 마주 보며 성채를 쌓고 성채를 엮어서 벌이나 개미처럼 진 치고 있으니 참으로 통분합니다…… 적들의 동정을 보면, 거기서 겨울을 날 듯하니 더욱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수군은 바람이 높지 않은 8월, 9월 이전이라야 배를 부려 적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인데, 이제 날마다 바람이 높아지고 파도가 산같이 일어나면 배를 부리기 어려울 것이니 참으로 답답하고 민망하옵니다.
한산 수영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참혹한 식량난을 겪는다. 백성들은 흩어져서 군사를 모을 수가 없고, 징집한 군사들도 먹이기가 어려웠다. 명나라 군대는 싸우지 않고 행패만 부렸다. 참혹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같은 날 보낸 장계에서 이순신은 이렇게 말했다.
수군이 먼 해상에 진을 친 지도 벌써 5개월이 되었습니다. 병졸들의 마음이 풀어지고 날랜 기운도 꺾였습니다. 전염병이 크게 번져 진중의 군졸들이 태반이나 감염되었습니다.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군량이 모자라서, 굶고 또 굶고 있습니다. 병이 들면 이기지 못하고 반드시 죽습니다. 군사의 수효는 날로 줄어드는데, 다시 보충할 길도 없습니다.
신이 거느린 수군은 원래 6천 2백 명입니다. 그 중 금년 이월부터 지금까지 병들어 죽은 자가 6백 명입니다. 겨우 남아 있는 군졸들도 먹는 것이 조석으로 불과 두세 홉에 불과합니다. 배고프고 고달픔이 극도에 달해, 노를 젓고 활 당기기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순천, 낙안, 보성, 흥양 고을의 군량 680석을 지난 6월에 이어 모두 실어다가 먹었습니다.
전라도가 비록 보존되었다고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 후 물력은 이미 고갈되었습니다. 또 명나라 군대를 접대하느라고 이미 말라빠져 버렸습니다. 요즘 명나라 군대가 남하해서 마을을 드나들며 재물을 빼앗고 들판의 곡식을 빼앗아 명군이 지나가는 고을마다 마을은 남아나지 못합니다. 무지한 백성들은 우르르 무너져서 달아나버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굶주리고 병든 군졸들을 데리고, 적을 공격하기에는 백 가지로 생각해도 계책이 전혀 없으니, 통분하고 또 통분합니다.
수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것은 이순신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편안히 기다리다가 피로한 적을 맞는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산도는 적 수군의 서진을 막는 요충지이다.
8월 1일,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전라, 경상, 충청의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수군의 최고 사령관이다. 이 임명은 그해 10월 9일 이순신에게 전달되었다. 69일이 걸렸다. 전시에 최고 지휘관에 대한 인사발령이 이처럼 늦게 전달되는 배경은 난해하다. 아마도 조정 내부의 당쟁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분명한 것은 조정의 현실 인식과 현실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계사년(1593년)에서 갑오년(1594)에 이르는 2년 동안 전쟁은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2년 동안 흉년이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이 무렵의 <난중일기>와 장계는 참혹하다.
경상우도의 여러 고을은 군량이 이미 바닥났습니다. 군사를 모집해 온들 무엇으로 먹이겠습니까. 답답하고 또 답답합니다(1593년 11월 17일의 장계).
영남의 여러 배에서 격군과 사부들이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 참혹하여 들을 수가 없다(<난중일기>, 1594년 1월 19일자).
살을 에이듯이 추운 날이다. 옷 없는 병졸들이 움츠리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다. 군량은 바닥났다. 군량은 오지 않았다(<난중일기>, 1594년 1월 20일자).
그 무렵 조선 백성들의 참상은 땅위의 지옥을 이루었다.
부자가 서로 잡아먹고 부부가 서로 잡아먹었다. 뼈다귀를 길에 내버렸다(<징비록>).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널렸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먹었다. 뜯어먹은 자들도 머지 않아 죽었다(<난중잡록>).
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박고 빨아먹었다. 힘이 없는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뒷전에서 울었다(<난중잡록>).
<정유년(1597년), 공의 나이 쉰셋>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원균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을 체포하기 직전, 조정에서 벌어진 어전 회의에서 임금(선조)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어찌 이순신이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며 기슭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나라는 이제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허위 보고를 하니, 이제 가토의 대가리를 들고와도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이순신이 글자는 아는가-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해군의 선봉을 갈아야겠다.
이순신을 털끝만치도 용서해 줄 수 없다.
(이상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순신을 압송하는 함거는 2월 26일 한산도를 떠나 3월 4일 서울에 도착했다.
3월 13일, 선조는 승정원에 비망기를 내렸다. 비망기에서 임금이 이르기를,
이순신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좋은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
임금은 이순신을 죽이기로 작정을 하고, 대신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앞서, 사헌부는 이순신 처리 문제에 대해 임금에게 의견을 올렸다.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청컨대 잡아와 국문하여 죄상을 밝히시옵소서(<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조정은 이순신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한 차례 고문을 받고 4월 1일 출옥해서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이순신에게 가해진 고문의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이순신은 출옥 후, 부축하는 사람없이 걷거나 말을 타고 남해안까지 내려왔다. 출옥 후 술도 조금 마셨다. 이순신에 대한 고문이 몸을 아주 망가뜨린 것은 아니었다.
4월 13일, 백의종군의 남행길에 모친상을 당했다. 이 무렵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나는 기진맥진했다. 남쪽 길이 바쁘니, 다만 부르짖으며 울었다. 어서 죽기를 바랐다(1597년 4월 16일자).
7월 16일, 원균의 함대는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했다. 조선 전함 3백 척 이상이 깨어졌고 삼도 수군은 전멸되었다. 경상 해안 일대가 다시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원균, 이억기, 최호가 전사했다. 배설은 전함 10척을 수습해서 진도로 물러섰다. 한산 통제영은 궤멸되었다.
칠천량 해전은 바다에서는 원균이 지휘했지만, 작전을 기획하고 강행한 사람은 도원수 권률이었다. 이 참패의 전술적 책임은 원균에게 있고 전략적 책임은 권률에게 있고 정치적 책임은 병조판서와 임금에게 있을 것이다.
7월 23일, 조정은 상중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임명교서는 8월 3일 남해안을 정찰중인 이순신에게 전달되었다.
9월 16일, 이순신은 명량에서 크게 이겼다. 전선 12척으로 우수영에서 발진했다. 적은 330척의 함대로 명량 수로로 들어왔다. 적은 명량 수로를 지나서 서해안으로 진공하는 수륙합동군이었다. 이 싸움에서 적선 33척이 깨어졌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 싸움은 정유재란의 국면 전체를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적은 서해를 우회할 수 없게 되었다.
10월 14일, 아들 이면이 충남 아산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10월 29일, 목포 앞 고하도로 수군 진영을 옮겼다. 고하도에서 조선 수군은 매우 안정된 상태에서 겨울을 넘겼다. 총통을 새로 만들고 배를 만들어 조선 수군 무력을 재건했다.
<무술년(1598년), 공의 나이 쉰셋>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2월 17일, 고금도로 수군 진영을 옮겼다. 철수하는 적의 주력 쪽으로 바싹 다가가려는 이동이었다.
7월 16일, 진린이 지휘하는 명 수군 5백여 척이 고금도로 들어와 이순신 함대와 합류했다.
11월 19일,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 이날 전쟁은 끝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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