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리딩북 5

혼불 (6권)

혼불 6권   13. 지정무문  혼인하면 반드시 따르는 것이 사돈서였다. 이는 일생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녀자로소 각기 그여아와 남아를 성혼시키고 난 후에, 서로 얼굴도 모르지만 시 세상에서 제일 가갑고도 어려운 사이가 된 안사돈끼리, 극진한 예절을 갖추어 정회를 담은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양가의 정의를 더욱 두텁게 하고, 자식들의 근황이며 집 안팎 대소사를 마치 같이 겪어 나가는 것처럼 이야기로 나누는, 정성과 격식이 남다른 편지였다. 허물없는 친구에게 흉금을 털어놓는 사신이 아니면서도 자식을 서로 바꾼 모친의 곡진한 심정이 어려 있고, 그런 중에도 이쪽의 문벌과 위신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 푹격을 지녀야 하는 사돈서는, 조심스러우나 다감하였다. 궁체 달필로 문장을 다하여 구구절절 써내려..

혼불 (5권)

혼불 5권 지은이:최명희 출판사:한길사   1. 자시의 하늘  자시가 기운다. 바람끝이 삭도같은 섣달의 에이는 어둠이, 잿빛으로 내려앉는 겨울 저녁의 잔광을 베어 내며, 메마른 산과 산 능선 아래 움츠린 골짜기로 후벼둘고 헐벗은 살이 버슬버슬 얼어 터지는 등성이와 소스라쳐 검은 뼈대를 드러낸 바위 벼랑 허리를 예리한 날로 후려쳐 날카롭게 가를 때, 비명도 없이 저무는 노적봉은 먹줄로 금이 간 몸 덩어리를 오직 묵묵히 반공에 내맡기고 있었다, 어둠의 피는 검은가. 휘이잉. 칼날의 서슬이 회색으로 질린 허공에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노적봉 가슴패기에 거꾸로 꽂히자, 그 칼 꽂힌 자리에서는 먹주머니 터진 듯 시커먼 어둠이 토혈처럼 번져 났다. 바람이 어둠이고, 어둠이 난도였다. 어지러이 칼 맞은 자리마다 언 ..

혼불(3권)

혼불 3권 1암운 십일월은 중동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 치며 눈 오고 얼음 언다 가을에 거둔 곡식 언마나(얼마나) 하였던고 몇 섬은 환자하고 몇 섬은 왕세하고 언마는 제반미요 언마는 씨앗이며 도조도 되어 내고 품값도 갚으리라 시계 돈 장리 벼를 낱낱이 수쇄하니 엄부렁하던 것이 남저지 바이 없다 그러한들 어찌할꼬 놀양이나 여투리라 콩기름 우거지로 조반석죽 다행하다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 쑬 일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 두소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시식으로 팥죽 쑤어 인리와 줄기리라 새 책력 반포하니 내년 절후 어떠한고 해 짤라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리하다 공채 사채 요당하니 관리 면임 아니온다 시비를 닫았으니 초옥이 한가하다 단구에 조석하니 자연히 틈 없나니 등..

혼불(2권)

혼불 2권 9 베틀가 인월댁은 드디어 북을 놓는다. 그리고 허리를 편다. 두두둑, 허리에서 잔뼈 부 서지는 소리가 나며 갑자기 전신에 힘이 빠진다. 그네는, 오른손 주먹으로 왼쪽 어깨를 힘없이 몇 번 두드려 보다가 허리를 받치고 있는 부테의 끈을 말코에서 벗긴다. 뒷목도 뻣뻣하고 다리도 나무토막처럼 굳어져서 이미 감각이 없는데, 마 치 그네가 베틀에서 내려앉기를 재촉이라도 하려는 듯 닭이 홰를 친다. 벌써 세 홰째 우는 소리가 새벽을 흔든다. 용두머리 위에 놓인 바늘귀만한 등잔불이 닭 이 홰치는 소리에 놀라 까무러치더니, 이윽고 다시 빛을 찾는다. 방바닥으로 내려 앉은 인월댁은 그제서야 허릿골이 빠지는 것처럼 저려와 그대로 무너지듯이 드 러누워 버렸다. 불기 없는 바닥이라 등이 서늘하다. 비록 여름이지만..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신수정(문학 평론가) 일상을 견디는 방법, 삶의 미학화 '삶에 대한 여유'와 '소년다운 장난기'가 묻어나는 하루키식 인생미학이 작품은 '작가 하루키' 이전의 '인간 하루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매력적인 에세이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삶의 미학'을 발견, 새로운 형태의 '행복'을 창조할 줄 아는 하루키만의 고유한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작가' 이전의 '인간' 하루키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 이미 이 고유명사는 한 사람의 일본 작가를 가리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하나의 보통명사로 굳어 버린 감이 없지 않다. [상실의 시대]를 비롯,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태엽 감는 새]에 이르기까지 하루키가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