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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3권 (8)

황희는 그대로 달려들어가며 방포를 하니 맨 앞에 지켜 서 있던 마름 형제의 맏이가 가슴을 맞고 고꾸라져버렸고, 시동이도 방포를 하여 하나를 거꾸러뜨렸다. 이미 화적이 들었다는 것을 안 유동지네 식구들은 모두들 마루 밑으로 기어들거나 다락에 올라 숨느라고 법석이었고, 하인배들만이 이리저리로 몰리면서 대적하려고 농기구를 찾아 들었다. 황회는 패거리를 이끌고 툭 터져버린 중문을 돌파해서 사랑채로 돌아드는데 유동지는 이미 의관 정제하고 마루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취재로 늙어온 부가옹답게 침착하고 배포있는 태도로 말하였다. "웬 사람들이오?" 황회는 멈칫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먼저 기를 죽여놓아야겠다고 생각되어 화승총을 똑바로 겨누고 말하였다. "보면 몰라? 돈궤를 내놓고, 창고 열쇠도 이리 내놓아." 하는..

장길산 3권 (7)

묘옥은 일어나서 절뚝이며 뛰어 보였다. 그러나 안간힘을 쓰는 양이 역력하여 경순이 반강제로 묘옥을 업고는 솔밭 사이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을 업은 자의 걸음이 어찌 홀가분하게 달려오는 자의 걸음에 비기랴. 그들의 거리는 좁아졌고 드디어 뛰고 있는 두 사람의 자취를 보았는지 뒤따라 붉은고개의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에이... 안되겠군!" 경순은 묘옥을 길섶에 내려놓고 총을 들었다. 그들의 숨소리가 가까위졌다. 경순은 엎드린 채로 고함을 내질렀다. "이놈들 더 올라오면 방포하여 해골을 박살내리라." 그들은 더 올라오지 못하고 주춤 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중의 한 놈이 외치기를, "방포해봤자, 못 맞히면 너는 죽는다." 하고 나서 제 동무를 독려하는데, "이 깜깜한 데서 총을 놓았자 머리카락 ..

장길산 3권 (6)

일렁이며 우왕좌왕하던 횃불들이 다가왔다. 그들이 막 출발을 하려는데, 행렬에 끼였던 달근이와 역삼이가 빠져나오더니 지키던 자의 면상을 질러놓고 양쪽으로 튀었고, 잇달아서 묶이지 않았던 사당들이 흩어졌다. 잠시 멍청했던 그들은 사당이 흩어질 때에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제각기 쫓아가 잡으려고 이리저리로 뛰어갔다. 박거사도 어느틈에 줄을 풀고 바닷가 쪽으로 잽싸게 달아났다. 역삼이는 마침 가까운 곳에 섰던 자의 딴죽에 걸려 나뒹굴고 무지막지하게 얻어맞고는 혼절해 버렸으며, 사당들은 모조리 잡혀서 따귀를 맞거나 머리끄덩이가 당겨져서 산발이 되었다. 그러나 박거사와 고달근이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 줄을 단단히 묶었으며 이번에는 사당들도 한꺼번에 어울려 묶어버렸다. 달근이는 안개 속으로..

장길산 3권 (5)

"왜들 이래, 좁쌀하구 멥쌀하구 섞이면 농사 망치는 줄 몰라. 어서 길이나 가자구." 그들이 우우 일어서는데, 여태껏 아니꼬움을 참아온 동작진 행중의 모가비가 침을 퉤 몰아 뱉으면서 중얼거렸다. "나 참, 광대 소갈머리가 어쩌면 저렇게 빈대 옆구리처럼 좁을꼬..." "뭐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씨불거리는 게야?" 달근이가 험상궂은 얼굴을 돌리며 묻자, 동작진 행중의 모가비는 상대를 않고 자기네 패거리를 돌아보며 이죽거렸다. "못된 일가가 항렬만 높다더니, 제기랄 당진에선 안성 계집만 계집이라든가." "아니 저런 새카만 자식이...언제적 모가비라고 대꾸를 하구 지랄여. 이놈아, 모가비라구 모두 같은 모가빈 줄 아느냐. 내가 바루 안성 달근이여." "그래, 곰보 상판대기를 보구서 별성마마님이 오줌 싸구..

장길산 3권 (4)

매화타령이 끝나자 묘옥이 앞으로 나와 상사요를 애틋하게 부르는데 듣는 사내들의 애간장이 저절로 녹는 듯하였다. "산천이라 묘한지라 길주 명천 가시다가, 빨래하네 빨래하네 색시둘이 빨래하네. 쉰 냥짜리 거두부채 색시 앞에 던져놓고, 그 부채 주워주면 색시 체면 떨어지나. 도령 집은 어디관대 해 빠진데 길을 가오. 우리 집을 보려거든 한양 땅을 내리달아 정동지네 손자가 내오. 색시 집은 어디관대 해 빠진데 빨래하오. 우리 집을 보려거든 과천 땅에 내리달려 김첨지네 댁이라오. 그로 해서 얻은 병이 무당 들여 굿을 한들 굿발이나 받을쏘냐. 의원 들여 약을 쓴들 약발이나 받을쏘냐. 봉사 들여 독경한들 독경발을 받을쏘냐. 바람 불어 누운 댕기 눈비 와서 일어나리. 임을 봐야 일어나지. 우리 조부 거동 보소 오간청을..

장길산 3권 (3)

그들은 사당골을 나서는데 다른 패거리들은 서로 손짓을 해가면서 지나갔다. 역시 총대는 달근이인지라 각대에 붙은 작은 모가비들은 일일이 찾아와서 그의 지시를 듣고 떠났다. 달근이가 말을 끌고 행렬을 따르려는 이경순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 짐승은 왜 끌구 오시우, 타시게요?" "암 타야지. 묘옥이를 태우든가..." 고달근이 고개를 홰홰 내두르며 혀를 찼다. "물정 모르기로는 꼭 성문 밖에 마실 나온 남산골 샌님일세. 볼기에 살점이 얼마나 붙어 있길래 그러는거요. 그 말에 올라 거드럭거리며 우리 뒤를 쫓다가는 행중 전체가 아예 노중에서 거적 쓰고 물고장을 쓰겠수. 관아에서는 물론이고 어디 쬐끄만 시골 읍내 생원한테만 걸려두 꽁무니에 능장 댈 자리가 없이 터질게유. 말일랑 버리든지... 가만있자 아예 읍내에..

장길산 3권 (2)

박거사는 묘옥이 몸을 내놓겠다는 소리를 함부로 해대니 귀가 번쩍한 모양이었다. 고달근이는 박거사에게 곁눈질을 하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자식아, 공연히 쪽박 깨지 말어. 홍련이는 어쩔 테야. 행중에서 그 따위 의리부동한 짓을 저지를 테면 저승패를 내몰듯이 길가에 내칠테여. 하고 나서 고달근이는 다시 묘옥에게 말하였다. 좋다, 너 손님 받겠다구 했것다. 오늘 이도장에게서 해우채를 받았으니 청을 들어라. 오늘밤에 당장 옷끈을 풀겠느냔 말이야. 묘옥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홍련이는 여지껏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고, 박거사는 제딴에 기둥서방 노릇을 하느라 머리에다 알밤을 먹였다. 갈치가 뛰니까 망둥이두 뛴다고, 이년까지 쫄쫄거리구 지랄이네. 이년아, 네 뒤를 대구 다니노라구 내가 술 한잔 맘놓구 먹은 ..

장길산 3권 (1)

장길산 3권 제1장 대소두령 1 안성은 삼남의 육로가 합치는 지점에 있는 대도회요, 위로 수원, 과천에 닿고, 아래로는 천안, 청주에 통하며 서쪽으로는 해로가 뚫렸는데 아산 앞바다를 거쳐서 물길이 진위, 양성 평택, 안성에 닿으니 사통팔달이다. 동으로는 남한강의 지류가 광주를 지나 여주를 거쳐 충주, 청풍, 단양에까지 닿으니 실로 삼남과 경기의 장꾼들이라면 안성을 제 집 드나들 듯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안성의 동촌은 연일 각처에서 모여든 장사치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데, 한양의 거간꾼들도 들끓었다. 청룡사가 있는 사당골에는 사당패 삼 대가 모여 있어는데 그 수가 근 오십 명에 이르고 있었다. 원래가 화주 출신의 모가비 고달근이는 사실상 그들의 총대나 마찬가지였고, 이제 청룡사의 새 동종을 마련한다고 ..

장길산 2권 (40, 完)

정학은 벌써 도포와 초립을 벗어 던지고 저고리까지 벗어 던졌다.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우람하여 웬만한 사내라면 그 떡벌어진 어깨에 벌써 겁을 집어먹을 만하였다. 길산은 초립과 도포만을 벗고서 두 손에 침을 뱉어 두어 번 비벼보고 나서 빈터 가운데로 나가서 섰다. 정학이 어깨를 구부리고 어슬렁대며 걸어나왔다. "아까는 우리가 서로 상소리를 주고받았으나, 정식으로 이름이나 나누구 겨뤄봅시다." 정학이 의외로 예의 바르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길산이도 빙긋 웃으면서, "그럽시다. 나는 문화 사람 장길산이라 허우." "나는 고성 수자리골 산는 정학이오. 헌데 뭘루 할까. 서로 떼밀기 하려오, 아니면 씨름으루, 아니면 그냥 치고 박겠수?" "그 세 가지를 차례루 다 해보지." 정학은 길산의 대답을 듣자 어이없다..

장길산 2권 (39)

길산이 돌여울을 건너 숲 사잇길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내닫고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슬그머니 숲으로 해서 그들의 근처로 다가갔다. 길 옆의 제법 너른 공터에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수건들을 질끈 동이고 무기를 가진 자들은 역시 새벽에 길산에게 된 경을 치렀던 그 멸악산 패거리들이었다. 남의 일에 끼여들 형편은 아닌고로 곧 피하여 길을 가야 겠으나, 아까 그들이 말하던 천하장사의 일이 궁금하였기 때문에 길산은 두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봇짐을 내려놓고 까치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다. 우람하게 떡벌어지고 눈이 부리부리한 장한이 맨손으로 서 있었고, 그의 등뒤에는 가냘픈선비 하나가 찰싹 붙어 있었다. 패거리 중에 둘은 이미 넙치가 되었는지 쓰러져 있었고 남은 셋은 악착스럽게 싸고 도는 중이었다..

장길산 2권 (38)

말득이가 봉노도 좋다고 하여 숙박비와 세마비를 미리 치르고 봉노에 들었다. 넓은 방안이 쩔쩔 끓고 있는데, 벽에 기름 등잔 하나가 까무룩히 졸고 있고 안에는 장사치인 듯한 사내들 댓 명이 이리저리 흩어져서 잠들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저고리를 벗어 웃통이 벌겋게 드러나 있었다. 안내하는 사노에게 길산이 물었다. "이봐, 다른 봉놋방은 없나?" "예, 바로 옆방에 아낙네들만 자는 방이 있습니다. 대부인과 애기씨는 그리로 모시지요." 그제서야 길산과 말득이는 안심을 하고서 방으로 들어섰다. 그저 잠깐 피로를 풀고 갈 작정이니 편안한 금침을 찾는 것은 아니로되, 따뜻한 구들을 지고 등판이라도 녹이려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다섯중에 셋은 아랫목 쪽에다 다리를 두고 누웠으며 둘은 그들과 엇갈려서 횡으로 누웠으니..

장길산 2권 (37)

"나는 사립문 밖에서 살필 테니... 네가 먼저 들어가보아라." 서녀는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어머니... 주무셔요?"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서녀는 내키지 않았으나 주춤거리며 마루에 올라서서 더듬더듬 미닫이를 잡고 열었다. 문을 여는 참인데, 안에서 우악스런 손이 불쑥 나오더니 서녀를 안으로 잡아끌었다. 그녀는 안으로 고꾸라져 들어가면서 소리르 지르기도 전에 홑이불 자락에 씌워졌다. 뭔가 묵직하게 누르면서 굵은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찍짹 소리를 냈다간 멱통을 도려낼 테다."밖에서 동정을 살피던 오공랑은 안이 다시 쥐죽은 듯해지자 뭔가 심상치 않은 기미를 알아처렸다. 그는 삽짝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뒤꼍으로 해서 싸리 담장을 헤치고 기어들었다. 집 뒤를 돌아서 건넌방 툇마루 ..

장길산 2권 (36)

"아... 여환이 암자르 폐하고 떠난 것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는 얼마 전에 암자를 그대루 버린 채 맨몸으로 어디론가 떠나버렸습니다. 소문에는 그를 따르는 여자가 있었다고도 합디다." "음, 곧 해주를 떠나겠다더니... 벌써 가버렸군. 한번 마나볼 작정이었는데 그냥 떠나야겠군요. 묘향산의 도안스님이 제 생부 보라는 분의 행적을 알 거라구 하셨던가요?" "예, 그럴 겁니다. 향산 도안선사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찾아뵙게 될 것입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혹시 내달쯤에 도안선사께서 들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여쭈어볼까요?" "저는 금강산 장안사의 일여라는 승려를 통하면 연락이 될 듯합니다. 혹시 소식이 닿으면 말이나 전해줍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길산은 망해사를 내려왔다...

장길산 2권 (35)

길산은 스스로 긴 한숨을 토해내며 일어나 앉았다. 그는 윗목에 차려진 술상을 끌어당겼다. 봉순이는 눈에 물기가 가득한 채 입술을 꼭 다물어서 흐느낌을 삼켰다. "어려서부터 이 댁의 신딸로 점지받아, 저를 낳아주신 부모의 얼굴도 모릅니다. 제가 듣기에 서방님께서도 저와 같은 신세라는 것을 까막내 성님에게서 들었지요. 저는 서방님을 친오빠보다도 더욱 가깝게 생각하며 자라났어요. 공연히 이렇게 눈물이 나네요. 서방님과 제가 부부가 된 것이 이렇듯 서러운 일인 줄은 저두 몰랐습니다." 길산이도 술을 넘기는데 명치끝이 타는 듯하였다. 대저 부부의 인연이란 하늘의 월하노인이 적승을 맺어서 이루어진다지만, 광대인 자신과 무당인 봉순이의 두 사람이 세상에서 버려진 살덩이로 자라나, 똑같은 운명을 겪으면서 이제는 봉순이..

장길산 2권 (34)

길산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정한 때문에 집을 나가려는 것은 아니올시다. 우리네 같은 천한 백성들에게 좋은 짓을 할 사람이 되겠다고, 옥에 갇혀서도 참형을 당하는 일을 스스로 탄하였습니다." "천한 백성? 네 중생이 무엇인지를 안느냐?" 길산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간신히 말하였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합니다. 그러나 저나, 제 아비나 제 어미 같은 모든 사람들 아닙니까?" "전에도 말했듯이 중생은 곧 불신이다. 네가 스스로 가장 아껴하듯 중생은 곧 네 자신이니라. 정토가 어느 하늘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온 세상이 밝아지는 때에 이르러 마침내 현세는 극락이 되는 것이다." "그때에 오는 부처가 미륵님입니까?" "그렇다. 미륵은 제 혼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보살들의 실..

장길산 2권 (33)

옥여가 한마디하자 갑송이는 제 손으로 술을 콸콸 따르어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말했다. "까짓... 말을 안 들으면 잡아다가 아내를 삼으면 되지, 뭘 꺼릴게 있수?" "저런, 성미하구는 내 원..." 그때 임가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멀리 간 백련이를 불렀다. "백련아, 이리오너라." 삽짝 밖으로 나갔던 백련이가 핼끔 돌아보더니 곧 되돌아왔다. "왜 그래요?" "우리가 네게 청이 한가지 있다. 도화가 네 말을 잘 듣지 않느냐?" "예, 성님 아우 하며 지내온 지가 여러 해 되었어요." 임가는 갑송이를 보고 나서 계속하였다. "여기 계신 이두령과 도화를 성례시킬까 하여 네게 청하는 것이다. 도화에게 한번 권하여보아라. 이번 일이 성사가 된다면 아마 구월산 산채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게다." "보통 졸장부나 향리..

장길산 2권 (32)

길산이 제 일을 가지고 콩팥 하는 것을 한참이나 듣고만 있다가 말하였다. "혼인이란 별게 아니라, 다정한 사람들 앞에 팔자를 맺게 되었음을 알라고 사주를 얽는 일인데, 시방 산에는 제 뜻맞는 동무들이 대강 다 모여 있습니다. 이런 기회에 치르는 것이 제게나 동무들에게나 복이 되겠지요. 앞으루 사흘 안에 혼사를 치르도록 해주십시오." 무당이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냐. 사흘 말미에 어찌 혼인 준비를 하겠느냐." 그러나 장충은 별로 반대할 의사가 아니 모양이었다. "허긴 그렇다. 먼 타관에서 데려오는 색시두 아니구, 한집안에서 자라난 사이니까. 격식 차릴 것두 없이 작수성례를 지내면 어떠하냐. 더구나 네 의향이 동무들이 모인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다하니, 마음에 작정이 된 이상..

장길산 2권 (31)

"과연 듣던 대로 학선이란 놈의 재주가 놀랍군." "감영을 속인 재주이니, 그 정도라면 한양에 데려다 놓아도 무슨 짓이든 해낼 만합디다." "헌데, 언제 길을 떠나시려오?" "예, 새설을 쇠고 나서 곧 나갈까 합니다." "어떻겠소. 일 년에 한번씩 설은 우리 집에 와서 지냅시다." "글쎄요, 몇 년을 떠돌게 될지 기약할 수는 없으나 약속은 지키지요." "정말 입산하시겠소?" "예, 사람 공부를 하고 싶소." 이튿날 갑송이와 길산은 아침 일찍 된목이골을 나서서, 탑고개로 내려갔다. 그들이 집에 이르니, 마당에 나와 섰던 갖바치 박서방이 길산을 발견하고서 안에다 소리쳤다. "길산이가 옵니다. 길산이가..." 하고는 박서방이 삽짝 밖으로 뛰어나왔고 장충과 그 처와 누이가 한꺼번에 마당으로 몰려나오는데 부엌에 ..

장길산 2권 (30)

사령들이 방망이를 휘저으며 달려들었으나, 방망이가 모두 좌우로 비켜나는 길산의 어깨 사이로 흘러내리고, 대신에 앞과 옆으로 내지른 정권에 명치와 인중 급소를 맞아 실신해 흩어졌다. 대용은 곧장 앞으로 달려드는 자를 슬쩍 비켜나며 그 궁둥이를 호되게 걷어차서 뒷전에 고꾸라지게 하였다. 다시 두 무리가 합세해서 달아나는 자들을 쫓았다. 그들은 멀찍이 뛰어서 간격을 넓혀놓은 뒤에 헐떡이면서 잠깐 쉬었다. 길산이 이마의 땀을 소매로 씻으면서 말하였다. "어휴 더워! 고향에 온 액땜을 단단히 하는군." 우대용이는 코를 헹 풀었다. "그러게 내 뭐랬소. 한번 버린 것은 계집이든 집이든 다시 찾는 게 아니여." 길산은 밑에서 아우성치는 사령들을 내려다보았다. "자, 빨리 산을 탑시다." 그들은 등성이로 뛰어올랐다. ..

장길산 2권 (29)

우대용이와 길산은 영문을 몰라서 서로 마주 바라보았다. "당신의 아낙이 날 찾아왔던 것 같소." 길산이 놀라서 물었다. "내 아내라니오?" "장뭣이라는 살인 도적이 참형되었다던 날 밤이었서. 남장을 한 여인네가 내 우거루 찾아왔었지요. 주인의 넋을 위무하겠답디다." "묘옥이..." 길산의 눈에 물기가 가득하게 괴었다. 여환이도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묘옥이 찾아왔던 날 밤의 일을 얘기하였다. 둘이서 말바위에 올라 갔던 일, 그 여자가 뛰어내리려는 것을 만류하던 일, 이제는 아무 곳에도 붙일 데가 없다며 한탄하던 일들을 자세히 말하는데, 길산은 두 빰 위로 굵은 눈물방울을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참, 묘한 인연두 다 있지." 여환이 염주를 헤아리면서 탄식하였다. "어디루... 간다고는 말 없습디까?" "..

장길산 2권 (28)

학선이가 재빨리 말에 올라 달아나는 군졸의 뒤를 쫓아갔다. 군졸은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 뛰는데 워낙 눈길이 미끄러워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 뛰고 또 엎어지니, 얼마 못 가서 학선이가 탄 말이 바로 등뒤에까지 다가들었다. 학선이가 환도를 쳐들었다가 군졸의 어깨에서 아래로 죽 그어내렸다. 핏방울이 튀어오르면서 군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학선이는 말을 몰아 지나 되돌아 달려오면서, 이번에는 군졸의 배를 바라고 힘껏 찌르니 칼을 배에 박은 채로 쓰러지고 만다. 대번에 흘러나오기 시작한 피가 눈을 붉게 적시면서 번져갔다. 학선이는 말에서 내려 잠깐 동안 시체를 내려다보더니 가래침을 돋구어 뱉었다. 그가 칼을 뽑아내어 눈에다 비스듬히 박았다가 몇번 씻어낸 후 발끝으로 눈덩이를 죽 떨어내고는 칼집에..

장길산 2권 (27)

"송도 체장이로군! 그러면 그렇지." "저 나장이 우리에게 이것을 알리려는 연유는, 혹시 국문할 때에 우리가 일을 그르칠까 염려해서요. 잘 생각해서 해냅시다." 길산이 말하였고, 우대용이도 잠들 생각을 잊고 벽에 기대어 앉아 못내 감탄하는 것이었다. "대근이 성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구 있었지만, 참으로 처하의 대장부로군!" "자 일찍 자둡시다. 내일은 먼길을 걷게 될 것 같소." 그들은 짚더미에 몸을 파묻고서도 못내 잠이 오질 않았다. 길산은 아버지와 갑송이의 얼굴을 떠올렸고, 애인촌의 낮은 돌담이며 광대산 솔숲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리고는 탐스럽게 피어난 박꽃 같은 묘옥의 희고 둥근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와 벗은가슴이며 젖무덤 사이의 연비 자국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장길산 2권 (26)

학선이의 어명이란 말이 떨어지자 도사는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압송장의 내용에 본즉 이미 장계를 통하여 신원이 알려졌다는데 어떤 자들 말씀이오?" "그자들은 형조에서도 파악한 바와 같이 지금 감영 옥에 갇힌 우대용이라는 자와 임춘삼이라는 자요." "예, 저두 대략 보아 알고 있습니다." "서울에 압송하여 판의금과 각부 판사 지사 대감들을 모시압고 추국을 열라는 지엄한 붑부를 받잡고 왔소이다." "지금 형옥이 일어나고 있소이까?" "그렇소, 하루가 급합니다. 내일 사또께 현신하여 말씀드리고 곧 압송 거행할 테니 동행을 바라오." 길산이 독칸에 갇히고 나서야 곳에 갇혔던 자가 자기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송도 박대근이가 우선 길산의 목숨을 살려놓기 위해서, 옥사장에 돈을 쓰고 대시수로 바꾸..

장길산 2권 (25)

"인젠 이 갑갑한 털벙거지와 더그레를 벗어두 되겠습니까?" "안된다. 완전히 익힐 때까지 좀더 연습을 해둬야겠다. 사릉장 다루는 것두 그렇고... 어이 나장, 자네는 나졸들이 죄인을 꿇린 다음에 무엇을 하라고 그랬었지?" "죄목을 외치라 하였던가요?" "예끼 이놈, 내가 위에서 하는 말을 받아 복창 거행하라구 그랬잖느냐." "성님, 저희들두 이젠 지쳤습니다. 좀 쉬어가며 합시다." "그래, 행수 성님께서 오셔서 점심을 들려던 참이다." 춘래와 계집종이 겸상과 원반을 차례로 들고 들어왔다. 학선이와 대근은 상을 마주하고 반주로 몇잔 걸치는데, 학선이가 한양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였다. 학선이 한양에 이르러 먼저 한 일은 판의금 댁을 알아내는 일이었고, 알아내자마자 사직골의 대감 댁 앞에다 사관을 정하였다. ..

장길산 2권 (24)

"싫으면 관두라지. 길구 짜른 건 대봐야 안다구 힘겨루기에 씨름말구 뭐가 있어?" "진 놈이 그래두 성님 소리 하긴 싫어서... 좋다 하자꾸나?" 마감동이와 졸개들은 비록 갑송이가 천하장사라는 말은 들었으되 여태껏 직접 본 적은 없었더니, 총각과 기운겨룸 하는 양을 보고는 완전히 안심을 하게 되었다. 갑송이가 졸개들에게 명하여 눈을 치우고 판을 정리하라 일렀다. 판 수습이 된 연후에 두 사람이 마주섰다. "샅바가 없으니 통씨름으루 하자." 총각이 말했다. 씨름은 왼씨름, 오른씨름이 있는데 이는 서로 고개를 엇돌리는 방향을 이름이요, 샅바 없이 바지허리를 잡고 할 적에는 통씨름이라 하는 것이다. 총각이 갑송이의 허리를 한 손에 잡고 다른 손은 허벅지에 얹었고 갑송이도 그와 같이 하였다. "그래 안쪽으루 걸..

장길산 2권 (23)

"좋소이다. 이제 나으리의 마음을 알았으니 더이상 권하지는 않겠고, 녹림패의 의리를 고집하여 칼을 뽑지두 않겠소이다. 그러나 다만 가족들의 정상이 딱하니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에 이사를 하여 안돈시켜드리리다." "이두령의 은혜를 두 번이나 입었으니 어찌 다 갚겠소." "자, 이 밤을 타구 어서 가십시다." 세 사람은 언덕을 내려갔다. 김기의 노모가 놀랄까 하여 갑송이는 멀찍이서 걸었고 김기가 노모를 업었다. 김기의 처는 누더기와 사금파리만 남은 세간이 버려지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갑송이가 인도하는 마을에는 집도 있고 땅도 있다 하여 아이들만 들쳐업고 뒤를 따랐다. 갑송이는 만동이네 집에 들러 일꾼을 내어 들 것을 만들어 김기 노모를 편히 모신 뒤에 구월산으로 오르지 않고 산아래를 돌아 수렛고개의 토막으로..

장길산 2권 (22)

"나물을 뜯으려도 기운이 있어야지요. 안방에서 마루를 건너오는데도 한식경이 걸린 듯하오. 뭘 잡수셔야 글두 읽으실 테니 읍내 가서 장이라두 보아오시구려." 하며 그의 처가 보를 던지는데 펴보니 한 묶음의 머리타래였다. 얹은 가체를 즐길 대가의 아낙이 탐내어 사들일 만한 탐스러운 머리카락이었다. 김기는 별반 감동도 없이 수건을 쓴 아내의 머리를 힐끗 올려다 보고 나서 그것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도림골서 읍내까지 시오 리 길을 걸어가는데 흉년의 붉은 해가 중천에 솟아 땅을 뜨겁게 태우고 있었다. 햇빛만이 붉은 게 아니라 말라서 먼지가 풀썩이는 황톳길은 더욱 붉었다. 그는 간장에 물을 타서 몇모금 들이켜고 나온지라 몸이 허하여 땀은 비 오듯 하였다. 읍내 장거리에 도달했는데 저자는 한산했고 물물교환이 간혹 있..

장길산 2권 (21)

술을 따르던 만동이가 잔이 넘치도록 주전자를 기울인 채로 딱하다는 듯이 입맛을 연신 다셨다. "길산이 성님은 아마 제 심정을 아셨을 겁니다. 성님은 다 좋은데 그놈의 의심하는 버릇은 아직두 못 버리셨구려." "의심이 아니야. 풀떼기 먹던 자가 이밥 먹으면 우선 뒷간 다니기가 수월하여지고, 뒷간 다니기가 편해지면 세상살이두 편해지구, 그러면은 관아에 발길이 닿는 법이다. 네 이 고을 아전붙이들 하구두 오락가락 하렷다." 만동이는 역시 입맛을 한참이나 다시더니, "성님 제게두 꾀가 있구, 세상 사는 이치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성님을 길가에서 만나 반가워한 것은 물론 옛 의리도 의리려니와 제게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소이다. 제 말씀을 듣고 나서두 의심이 가신다면 당장에 제 집에서 나가셔두 붙들지 않겠..

장길산 2권 (20)

그 애처로운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옥여는 여러번 한숨을 내쉬었고, 감동이는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졌으며 무뚝뚝한 갑송이도 연신 헛기침을 했었다. 갑송이는 타관에서 노숙하던 밤의 쓸쓸함을 잘 알고 있던 광대였으므로, 더욱 도화와 버들쇠의 얘기가 가련하게 들렸던 것이었다. 옥여스님이 입을 떼었다. "그래 그 도화라는 아이가 지금도 여기 있다는 말인가?" 모가비 임가는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러하옵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도화는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버렸지요. 저러다가는 아예 밥사당이 되어벌릴 모양입니다." "짝을 맞춰주지 그러나?" "마음이 잡히지 않았습죠. 이 겨울이 지나 다시 출행하게 되면 좀 달라지겠지요." 마감동이가 불쑥 물었다. "도화가 그런 마음씨라면 얼굴은 제법 절색이오?" 임가가 빙그레 웃..

장길산 2권 (19)

"저두 그런 것 좀 가르쳐주시우." "먼저 사람을 활인 해내는 법을 알면 사람의 사법두 알게 되는 것인데, 너는 아직 활인할 생각이 없는 놈이니 사람 목숨의 중함을 먼저 깨우쳐야겠다." 곁에서 묵상을 하듯 꼿꼿이 앉아서 듣고만 있던 옥녀가 풍열스님을 향하여 물었다. "스님, 아까 이 사람과 소승이 대련을 할 적에 어찌하여 제가 졌다구 말씀하셨습니까?" "음, 너는 삼 년 동안이나 여기서 무예를 익혔다. 내가 보았을 적에 갑송이는 병장기 한번 잡아보지 않은 천래의 역사일 뿐이었다. 허나 그 무예의 자질에 있어서 옥여는 갑송이를 당할 수 없더구나. 갑송이는 막는 것과 찌르는 것 모든 동작이 몸에 붙어 있어서 마치 손가락이 가까이 가면 저절로 감겨지는 눈꺼풀과 같고 물 것이 깨물면 날아가 때리는 손바닥과 같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