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지] -2-
-김훈-
최희량(1560--)
수성 사람이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흥양 현감에 제수되었다. 이순신의 막하에서 군수물자 확보에 힘썼다. 나무를 베어서 배를 만들고 망가진 무기를 수리했으며 군량 조달에 힘썼다. 노량, 돌산, 예교, 당포에서 적들을 크게 부수었다. 싸움 때마다 적의 군량을 노획해서 싣고 왔고 적에게 붙잡힌 조선인 포로 7백여 명을 구출했다. 노량 해전의 선봉장으로 나아갔다. 노량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소식을 알고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나주 충일사에 배향되었다.
정사준
경주 사람이다. 젊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형제들과 함께 통곡하며 가산을 정리해 군량미를 확보해서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왔다. 임진년에는 적들의 조총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연구했다. 정사준은 백성들 중에서 솜씨 있는 대장장이들을 뽑아서 적의 조총보다 더욱 우수한 총통을 만들어 생산해냈다.
이순신은 적의 화포의 구조와 성능을 분석해서 그 우수한 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의 조총을 항상 눈앞에 두고 그 노리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적의 조총은 총신이 길고 총구멍이 깊숙하여 탄환이 나가는 힘이 맹렬하고 맞으면 반드시 부서집니다.
또 우리나라 총통의 단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승자나 쌍혈총통은 총신이 짧고 구멍이 깊지 않아서 그 맹렬한 힘이 적의 총통만 같지 못하고, 그 소리도 우렁차지 못합니다.
정사준이 대장장이들을 지휘해서 만든 총통은 이 같은 결점을 모두 보완했다. 이순신은 정사준에게 특별한 상을 내려줄 것을 임금에게 요청했다.
병조참의에 증직되었고 옥계사에 배향되었다.
나대용(1556--)
금성 사람이다. 26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완고하고 강인한 성격이었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늘 주변이 적막했다. 옥포 해전에서 노량 해전에 이르는 모든 해전에 거의 참전했다. 옥포, 사천 해전에서는 유군장을 맡아 전선을 지휘했고 때로는 복병장이 되어서 적의 후미를 기습했다.
그는 전투 지휘에 능했을 뿐 아니라 각종 무기와 병선을 스스로 고안해 내는 일에 뛰어난 창의력을 보였다. 그가 거북선을 만들었다.
임진년에 이순신이 처음으로 적탄에 맞았을 때 나대용도 왼쪽 허벅지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노량 해전에서는 이순신이 적탄을 맞고 숨진 다음에도 끝까지 전투를 지휘해서 싸움을 마무리지었다.
그는 이순신이 가장 아끼던 부하 장수들 중 한 명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경기 수사를 지냈다.
정경달
영광 사람이다. 젊어서 문과에 급제했다. 병조 정랑, 가평 현감, 남원 부사, 청주 목사, 함경도백을 역임했다.
임진년 개전 초기에는 선산 부사로 군량과 군사를 모아 김성일의 부대와 합쳐서 금오산에서 크게 이겼다. 그 후 죽령 아래쪽에 군사를 주둔시키며 죽령을 넘나드는 적을 막았다.
1595년, 이순신은 임금에게 요청하여 정경달을 자신의 종사관으로 맞아들였다. 종사관은 지금의 비서실장 혹은 정보참모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정경달은 이순신의 직접 지시를 받아 행정 업무, 징모 업무, 군수조달 업무, 시찰, 전령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이순신이 투옥되자 정경달은 임금과 조정 요로에 탄원서를 보내 이순신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정경달은 서울로 올라와 임금을 만났다. 그때 정경달은 임금에게 말했다.
-장수가 기회를 엿보고 정세를 살피는 것을 가지고 전투를 기피한다고 하여 죄를 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통제사를 죽이시면 사직을 잃게 될 것입니다.
사후에 예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선무원종훈에 참록되었다.
이억기(1561-1597)
전주 사람이다. 20세에 함경도 경흥 부사로 부임했다. 북쪽 국경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며 무인의 길로 들어섰다. 여진의 적장 율지내, 니응개를 붙잡아 베었다.
순천 부사를 거쳐 임진년 개전 때는 전라 우수사로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왔다.
이순신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을 때 통렬한 울분의 편지를 옥중으로 보내 안부를 묻고, 관계 요로에 진정서를 보냈다.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하자 원균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임진년 개전 초부터 칠천량 해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전투에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당할 때 그는 도피하라는 부하들의 말을 꾸짖어 물리치고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그는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의 넋을 건져서 양주 아차산에 장사지냈다. 병조판서를 증직했다.
정운(1543-1592)
하동 사람이다. 26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일관되게 무관의 길을 걸어갔다. 1592년에 녹도 만호로 부임해서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막하로 들어왔다. 개전 초기에 전라도 수군이 작전구역을 넘어서 경상 해안 쪽으로 출정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장수들의 의견이 엇갈려 있을 때, 정운은 구역에 관계없이 나아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첫 해전인 옥포 해전에서 후군을 맡아 큰 공을 세웠고, 그 후 당포, 한산도에서 선봉을 맡았다. 부산포 해전 때 몰운대에서 적탄에 맞아 숨졌다.
이순신은 정운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정운을 위한 장계를 올려서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 줄 것을 임금에게 요청했다.
녹도 이대원의 사당에 배향했다. 그 후 몰운대에 순절비를 세웠고 병조판서를 증직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강직한 성격을 보였다. 움직임은 민첩하고 단정했고 홀어머니를 지극히 모셨다. 그의 행적은 <삼강행실>에 기록되어 있다.
송대립
여산 사람이다. 송대립, 송희립, 송정립 3형제가 참전하여 모두 큰 공을 이루었다.
송대립은 동생 송희립의 권유로 두 형제가 모두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갔다. 송희립은 지도 만호로, 형을 수군에 불러들였다. 이순신이 송대립을 권률 도원수에게 천거하여 창의별장이 되었다.
정유년 3월에 보성 땅 예진으로 출격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돌산도 남쪽 끝에 수군 기지를 설치하고 적선들의 동서 왕래를 차단했다.
정유년 7월에는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수행해서 남해안 여러 마을들을 돌며 수군 재건 사업에 참가했다.
적들이 흥향 제망포에 상륙했을 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다. 적들이 내륙 쪽 산기슭으로 달아나자 육전으로 나아갔다. 추격 도중에 1천에 넘는 적의 복병에게 포위되어 화살이 다할 때까지 싸웠다. 수많은 적들을 죽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싸웠다. 기력이 쇠진하여 옆구리에 적의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죽을 때,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했다. 사후에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송희립
여산 사람이다. 송대립의 동생이다. 임진년 개전 때 지도 만호로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왔다. 옥포 해전 때부터 적극적인 공세의 전략을 주장했다.
당포, 옥포, 한산, 부산 싸움에 참가했다. 7년 전쟁 동안 시종일관 이순신과 함께 참전했다. 이순신이 투옥되자, 정경달 등과 함께 상경해서 대궐 문 밖에서 울부짖었다. 다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따라 싸움의 길로 나섰다.
노량 관음포 해전에서 적들에게 포위된 명나라 수군을 구출하기 위해 적의 후방을 공격하다가 적탄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그는 상처를 붙잡고 일어나 계속 싸웠다.
이순신이 적탄에 맞고 쓰러졌을 때 송희립은 이순신과 같은 배에 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임종을 수습했다. 이순신이 운명하자, 장수의 북채를 넘겨받아 계속 싸움을 몰아갔고, 싸움이 끝난 후 군사들을 수습해서 돌아왔다.
정조 때 충강공사에 배향되고 선무 일등공신에 참록되었다.
류형(1566-1615)
진주 사람이다. 개전 초기에 의병장 김천일이 강화도에 주둔할 때 김천일의 막하로 가세했다.
의주 피난 조정의 선전관으로 이순신 수영에 왕래하면서 이순신과 알게 되었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전한 뒤 남은 군사들을 수습해서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왔다. 순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노량 해전에서는 여섯 군데나 적탄을 맞아가면서 끝까지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 제5대 삼도수군통제사, 함경도 북병사 등 수군과 육군의 총수를 역임했다.
병신년(1596년)에는 해남 현감 자리에 있었다. 이때 '기일을 어긴 죄'로 목포 만호 등과 함께 이순신에게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3월 1일).
'기일을 어긴 죄'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군수물자 조달 시한을 넘겼거나 행정 사항을 지연시킨 죄일 듯하다. 이때 류형은 부임 초기였으므로 이순신은 류형을 벌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죄는 전임자의 근무태만이었던 듯싶다.
어영담
함양 사람이다. 영호남의 여러 물길을 소상히 파악하여,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이순신 함대의 물길을 안내했다. 옥포 전투 때는 광양 현감으로 있으면서 함대의 물길을 안내했다. 군량을 준비하고 곡식의 종자를 보존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싸움 때마다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한때 파직되어 있었는데, 이순신이 그의 인물됨을 알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조방장으로 기용했다. 장계에서 이순신은 말했다.
어영담은 이미 파직되었으나 바닷가에서 자라나 배에 익숙하고 영남과 호남의 물길 사정과 섬들의 형세를 역력하고 상세하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적을 토벌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작년에는 매번 선봉에 서서 싸웠습니다. 내세울 만한 인재입니다. 조선 수군의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큰일을 성취하도록 할까 하여 감히 품의합니다.
어영담은 한산도 수영에서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어영담은 선무훈록에 오르지 못했다.
김덕령(1567-1596)
광주 사람이다. 의기와 용맹으로 일세를 뒤흔든 영웅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담양에서 의병 5천으로 일어섰다. 남원에 이르러 적을 크게 무찔렀고 다시 영남으로 진출했다. 김덕령의 싸움은 영남의 여러 고을을 적으로부터 막아냈다. 1594년에는 이순신과 함께 수륙합동작전을 전개했다. 이 작전은 적이 유인에 걸려들지 않아서 별 전과는 없었다.
1596년에 이몽학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이미 반군이 해산했기 때문에 회군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연루되어 김덕령은 역적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고문 끝에 옥사했다. 김덕령의 죽음은 조선 군대 전체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후에 신원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대인
순천 사람이다. 집안이 가난해서 중이 되었다가 다시 하산해서 무과에 급제했다. 여수 좌수영 밑 마을에서 살았다. 이순신의 하인들이 민간 마을로 들어와 백성의 개를 잡아먹자 김대인은 이들을 붙잡아 죽도록 매질을 했다. 이순신이 대노하여 김대인을 붙잡아와서 문초했다. 그때 김대인은 말했다.
-종들을 풀어서 민간에 폐단을 일으키는 것도 옳지 않거늘 이제 또 무죄한 사람을 죽이신다면 무엇으로 군대를 호령하시렵니까-
이순신이 김대인을 크게 기특히 여겨 막하에 거두었다. 김대인은 그 후 한산 싸움, 광양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성격이 불같아 어떠한 고관이라도 정의에 거슬리면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적이 많았다. 남의 모략을 받고 금부에 갇혀 울분 끝에 죽었다.
권률(1537-1599)
안동 사람이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사, 의주 목사를 역임했다. 전쟁 때는 전라도 광주에서 의병 1천으로 일어섰다. 수원에서 이겼고 행주산성에서 크게 이겼다. 행주에서는 2천 8백여 명의 군사로 적 3만을 맞아 싸웠다. 적들은 거의 다 죽었다. 정유재란 무렵에 도원수가 되어 전쟁 전체를 총괄 지휘했다.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요격 명령을 이순신에게 전했고, 이것이 이순신을 죽음의 곤경으로 몰고 간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권률은 뛰어난 지휘관이었으나 이순신과의 관계는 험악했다. 이순신이 지휘 계통의 명령에 거역한다는 장계를 올려서 이순신이 구속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권률은 또 김덕령을 체포해서 조정으로 압송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류성용(1542-1607)
본관은 풍산이다. 전쟁 기간 중 영의정, 도체찰사의 신분으로 전쟁과 정무를 두루 살폈다. 이순신을 추천해서 전라 좌수사가 되게 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순신과 친분이 있어서 이순신의 인물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 투옥되었을 때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난처하고 미묘해서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못했다. 이순신과 늘 편지를 주고받아 수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류성용은 명나라 군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조선의 힘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방책을 수립하기에 애썼다.
저서로는 <문집>과 <징비록>이 전한다. 시호는 문충이다.
박몽세
전라 좌수영 아랫마을에 살던 수졸이며 돌 쪼는 석수였다. 민간에 행패를 부리고 백성의 개를 잡아먹었다. 이순신한테 들켜서 곤장을 맞았다.
강막지
강막지는 수영에서 일하던 종으로 소금을 구워서 수군에 바치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슬픔이 복받쳐서 울고 싶을 때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막지의 집으로 가서 울었다.
태구련
대장장이로 솜씨가 뛰어났다. 환도를 만들어서 이순신에게 기증했다. 지금 아산 현충사에 보관된 이순신의 칼은 태구련의 작품이다.
김개, 금이, 금수, 경, 애수, 한경, 해돌
이들은 모두 이순신의 아산 집에 딸린 종들이다. 이순신의 수영을 심부름으로 오가며 집안 소식을 전했다.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에게 하루 쉬어 갈 거처를 마련해 주기도 했고, 이순신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했다.
해
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종이거나 계급이 낮은 수졸이었던 모양이다. 이순신은 달빛이 아름답고 심사가 울적할 때 해를 불러서 피리를 불게 했다. 해는 이순신 옆에서 피리를 불어주었다.
부안 사람, 최귀지, 여진
이순신의 여자들이다.
부안 사람은 이순신의 첩이다. 고향이 부안일 뿐, 그 외에는 알 수 없다.
최귀지는 광주 목사 최철견의 서출인 딸이다.
여진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순신에게 와서 자고 갔다.
<난중일기>는 이 여인들이 와서 자고 간 일까지 기록해 놓았다.
이면(1577-1597)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순신이 남해안 수영에 근무할 때 고향인 아산에서 어머니와 조카들을 뒷바라지하고 있던 중, 정유재란 때 마을로 쳐들어온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스물한 살에 죽었고 장가들지 않아 후손이 없다. 아산 현충사 경내에 산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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