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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4권 (17)

카지모도 2022. 12. 26.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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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게 자네 술 먹을 줄 아나? " "사내자식이 술 못 먹을까. " "그럼 한잔 먹으려나? "

"주면 먹지. " 총각은 쇠고삐를 쥐고 걸음을 멈추고 유복이는 술병과 홍합을 손에

들고 내려왔다. 총각이 남은 술을 병으로 들이켜고 홍합 서너 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고

꺼귀꺼귀 먹었다. 유복이는 총각이 무식하게 먹는 것을 서서 보다가 흘저에 오가

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왜 웃소? " "그까지 웃는 곡절은 말할 것

없구 인사나 하세. 나는 박서방이란 사람일세. " "나는 곽도령이란 사람이오. " "

이름은 무엇인가? "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 ”내 이름은 유복일세. " "

내 이름은 오주요. " "고향이 어딘가? " "황해도 강령 이오. " "나두 고향이 강령

일세. " "거짓말 마우. 말이 틀리우. " "나는 유복자루 타향에서 나서 자랐지만

우리 부모는 강령 사람이l야. " 이때 뒤에 오는 장꾼이 보이었다. "내일 점심때

이리 올라나? " "왜? " "한고향 사람이 만나 이야기나 좀 하세그려. " "그럽시다.

" "그럼 내일 점심때 만나세. " 유복이는 총총히 총각과 작별하고 언덕 위로 올

라갔다.

이튿날 유복이가 곽오주를 만나서 같이 먹으려고 탁주 한 병과 마른 어물 몇

쪽을 가지고 탑고개를 나왔다. 이때 해가 한낮이 못 되어서 오주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는데 난데없는 금도군관 하나가 군사 칠팔 명을 거느리고 고갯길에 나

타났다. '어제 양반자가 송도 들거가서 말한 것이구나.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

각 못하고 오주를 이리 만나자고 했으니 지금 어떻게 하면 좋을까. ' 유복이가

생각하는 중에 앞잡이 군사가 벌써 언덕 아래까지 왔다. 일이 다급하여 유복이

가 곧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니 언덕 위를 살펴보던 군사가 이것을 보고 "너

웬놈이냐! 이리 내려오너라. " 하고 호령하였다. 유복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으로 도망하니 그 군사가 "도둑놈 여기 있다! " 하고 외친 뒤에 언덕 위로 올

라와서 유복이의 뒤를 쫓았다. 그 군관이 “너희들은 이리 가서 뒤를 쫓아라. "

"너희들은 저리 가서 앞을 질러라. " 하고 손가락질하며 지휘하여 군사들이 이리

저리 갈리어 뒤쫓고 앞질렀다. 유복이가 뒤에서 나는 아우성에 쫓기어서 뛸 수

있는 대로 뛰는데 술병이 주체궂어서 내버릴까 하는 중에 앞을 지른 군사 하나

가 "이놈아, 어딜 가! " 하고 몽치를 두르며 달려들었다. 유복이는 딱 서서 그 군

사가 대어들기를 기다리다가 그 군사의 면상을 노리고 술병을 내쳤다. 술병이

깨어지며 군사는 탁주를 뒤집어쓰고 뒤로 나가자빠졌다. 유복이가 군사의 나자

빠지는 것을 보고 얼른 주머니에서 댓가지들을 꺼내서 손에 들었다. 이 동안에

뒤에 쫓는 아우성이 차차 가까이 들리는데 유복이는 몇 걸음을 앞으로 나가다가

곧 돌쳐서서 뛰어 온 길을 천천히 도로 걸어왔다. 뒤쫓던 군사들이 이것을 바라

보고 서로 돌아보며 수군거리다가 사오 명 군사 중에 한 군사가 앞으로 나서며

"이놈, 항거할 생각 말구 곱게 줄 받아라! " 하고 소리를 질렀다. 유복이가 잠간

발을 멈추고 "날 잡으려면 너희들 백 명 이백 명이 와두 소용없다. 애초 잡을 생

각 말구 곱게들 가거라. 만일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너희들을 낱낱이 병신 맨

들어 보낼 테다! " 하고 통통이 호령하고 여전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놈, 큰소

리 마라! " "본보기를 내야 너희들이 내 말을 믿을 게다. 너희들 다 보아라. 지금

소리지르는 놈 바른편 눈을 멀려 줄 테다. " 유복이의 손에서 댓가지 하나가 날

아나가더니 그 댓가지가 위로 올라가지도 않고 아래로 처지지도 않고 꼭 소리지

르던 군사의 바른편 눈에 들어가 박히었다. "아이구! " 그 군사가 눈을 부등켜

쥐려다가 댓가지가 손에 가로 거치니 입을 악물고 댓가지를 뽑아버렸자. 다른

군사들이 이것을 보고는 당황한 기색으로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놈들, 모주

리 병신이 되구야 갈 테냐! " 유복이 호령 한마디에 모두 돌아서 뛰어가는데 애

꾸 된 군사는 아픈 눈을 손으로 누르며 여러 군사 뒤에 뛰어갔다. 유복이가 앞

으로 걸어오는 중에 뒤에서 발짝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얼른 돌쳐섰다. 군사

이삼 명이 살금살금 뒤를 밟아오다가 유복이가 돌아서는 것을 보고 일시에 악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어 왔다. 유복이가 앞서 들어오는 군사 하나를 발길로 차

서 자빠뜨리고 그 몽치를 빼앗아 들고 이놈 치고 저놈 치고 하였다. 이통에 유

복이도 머리를 몽치에 맞아서 머리가 터지고 허리를 발길에 차여서 허리가 아팠

다. 유복이가 머리를 만지고 허리를 주무르고 주머니 속에서 쇠끝 두어 개 꺼내

서 댓가지들과 함께 손에 쥔 뒤 어제 은신하였던 자리에 와서 아래를 내려다보

니 길 중간에 군관이 서 있고 그 앞에 군사들이 늘어서서 무엇들을 한참 지껄이

는 중이었다. "이놈들, 그저 안 갔구나. 이 산 위에 쓰러진 놈들이 있으니 너희들

이 가서 끌구 가거라. " 군관이 군사를 헤치고 앞으로 나서서 칼을 빼어들고 언

덕 위로 올라오려고 하니 "네놈은 칼을 믿구 올라오느냐? 칼을 쓰지 못할 테니

자 보아라! ” 유복이가 쇠표창 한 개로 군관의 칼 든 손을 맞히어서 군관은 손

에서 칼을 떨어뜨리고 발을 멈추었다. "너희들 인제는 내 재주를 알았겠지. 쇠끝

한 개루 목숨 하나를 끊을 수 있다. 너희들을 구태어 죽이기까지 할 것이 없기

데 지금 내 재주만 보인 것이니 이 담에 너희가 혹시 날 만나드라두 아예 덤빌

생각 마라. 그러면 나두 너희를 건드리지 않을 테다. " 유복이는 재주를 자랑하

고 "큰소리하는 네 아가리를 찢어놓을 날이 있을 테니 두구 봐라. " 군관은 이를

갈았다. 그 군관이 쫓겨내려온 군사들을 세워놓고 도적놈 하나에게 여럿이 쫓겨

왔다고 개 꾸짖듯 하던 끝이라 도적을 눈앞에 보면서 잡지 못하고 가기는 우선

군사들 보기에도 꼴이 사납고, 도적이 재주를 가져서 섣불리 잡으려다가는 도적

의 말과 같이 목숨까지도 위태할 모양이라 잡으러 올라가지는 못하고 면무료하

느라고 손등에서 뽑은 쇠끝을 들고 군사를 돌아보며 "별놈의 재

주가 다 많다. " 하고 쇠끝 박히었던 손을 폈나 쥐었다 하였다. 영리한 군사 하

나가 군관 가까이 와서 "칼 쓰시기가 거북하시겠습니다. " 나직이 말하고 나서

동무 군사들을 돌아보며 "저 도둑놈을 잡자면 좋은 수가 있겠네. 우리가 부중에

들어가서 갑옷 입구 투구 쓰구 나오면 염려 없지 않겠나. " 하고 말하였다. 군관

이 "미친 놈 미친 소리 말구 저 칼이나 이리 집어 다우. " 하고 말하여 군사

가 언덕 위를 치어다보며 앞으로 나와서 땅에 떨어진 칼을 군관에게 집어다 바

치면서 넌지시 "삼십육계를 생각해 봅시오. " 하고 달아나자고까지 말하는덴 군

관은 검다 쓰단 말이 없었다. 이 때 술병 맞고 자빠졌던 군사와 몽치 맞고 쓰러

졌던 군사들이 서로 붙들고 산에서 고개 밑으로 내려왔다. 군사 하나가 이것을

바라보고 "저것들 저기 내려오네. " 하고 말하니 “저런 병신의 자식들. 그 자식

들의 꼬락서니가 어떤가 우리 가서 보자. " 하고 고개 밑을 향하고 서다가 다시

몸을 돌이켜서 언덕 위에 섰는 유복이를 치어다보며 "네놈의 목숨이 얼마나 오

래 가나 어디 두고 보자. " 악증풀이하듯 말하고 곧 군사들을 데리고 고개 밑으

로 내려갔다. 유복이가 그제야 앉아서 두 다리를 뻗고 머리를 젖히어 들고 해를

치어다보니 벌써 한낮이 훨씬 기울었다. "오주가 올 때가 지났는데 혹시 오다가

군사들 섰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구 의심이 나서 도루 갔나. 허허실수루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 " 유복이는 혼자 말하고 조금조금 기다리는 중에 곽오주가 터덜

거리고 고개 위로 올라왔다. "자네 인제 오나? " 유복이가 언덕 위에 일어서니 "

많이 기다렸소? " 오주가 언덕 아래서 치어다보았다. "어서 이리 올라오게. " 유

복이는 오주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같이 나란히 앉았다. "자네 오다가 포도군사

들을 만났나? " ”군산지 깨묵인지 복색 다른 것들이 많이 갑디다. 그놈들 어떤

놈한테 가서 경을 흠씬 치구 가는 거야. 그렇기에 골통이 터진 놈두 있구 얼굴

바닥이 깨진 놈두 있구 한짝 눈이 깨물어진 놈까지 있지. " "그놈들이 자네보구

실랑이 않든가? " "어디 사느냐구 묻구 어디 가느냐구 묻습디다. " "그래 어딜

간다구 대답했나? " "묻는 것이 수상하기에 금교 뒷장 보러 간다구 했소. " "자

네두 거짓말할 줄 아네그려. " "나를 거짓말두 못하는 밥병신으로 알았소. " "자

네 같은 사람은 거짓말 아니하려니 생각했네. “ "거짓말할 줄 아는 사람이 어디

따루 있소. " "그래 뒷장 보러 간다니까 다른 말 없이 놔보내든가? " ”댓가지

가진 도둑놈이 있다구 가지 말랍디다. 나는 도둑놈이 무섭지 않다구 그대루 와

버렸소. " "그놈들 말하는 도둑놈이 날세. " 하고 유복이가 군사들과 싸우던 것

을 일장 다 이야기하니 오주가 듣고 나서 "그런 줄 몰랐더니 흉악한 대적놈이구

려. " 하고 껄껄 웃었다. 유복이가 오주의 말을 듣고 역시 웃으면서 "좀도둑도

채 되기 전에 벌써 흉악한 대적이 된 모양일세. 내가 오늘날 이렇게 된 일생 경

력을 이야기할께 들어보려나? " 하고 오주의 말을 기다리니 "사내자식이 도둑질

한다면 대적놈이 되지 좀도둑놈이 되어서 쓰겠소. " 오주가 먼저 도둑에 대한 소

견부터 말하고 그 다음에 "왜 도둑놈이 되었나 이야기 좀 하우. 들읍시다. " 유

복이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였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자면 이야기가 길어. "

"듣다가 듣기 싫으면 고만두라고 말하리다. " 유복이가 오주의 솔직한 말을 듣고

한번 웃은 뒤에 자기 아버지가 남의 모함에 죽은 일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하여

자기가 서울 행랑에서 나서 자라던 일과 맹산 두메서 병으로 고생하던 일과 강

령 큰골서 원수 갚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고, 또 덕물산 장군당에서 장군 마누라

를 가로 차지하고 맹산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오가의 집에 들어가서 같이 있게

된 곡절까지 속임없이 다 이야기하였다. 유복이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오주는

줄곧 유복이의 입을 바라 보고 있었는데, 부모의 원수를 못 갚고 앉을뱅이로 고

생하는 토막에는 닭의 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원수의 목을 잘라가지고 부

모 무덤에 오는 토막에는 곤댓짓을 하며 싱글거리고 또 귀신의 마누라를 가로채

는 토막에는 너털웃음을 내놓았다. "군사 녀석들 때문에 막걸리 한 사발을 못 먹

게 되어서 분하구려. " "배가 고픈가? 안주루 가지구 온 것은 여기 있으니 먹으

려나? " 유복이가 품에서 어물쪽을 내놓으니 "속시원한 이야기를 들은 끝에 술

한 사발을 들이키었으면 좋겠단 말이오. " 오주는 그 어물쪽을 돌아다도 보지 아

니하였다. "인제 자네 이야기 좀 듣세. " “나는 이야기할 것 없소. 그럭저럭 나

이만 스물네 살 먹었소. " ”자네 나이 한 삼십 된 줄 았았더니 겨우 스물댓밖에

안 되었어? " “박서방은 몇 살 먹었소? ” “서른넷일세. " ”서른넷이면 내게

십 년 맏아니오? " "그렇지. " “우리 둘째 형하구 한 나이구려. " 이 말 저 말

묻는중에 유복이는 오주의 신세 이야기를 대강 듣게 되었다.

오주는 강령 향나뭇골 농민의 아들인데 오형제 중 막내아들로 부모의 귀염을

받아서 어렸을 때는 별로 고생을 몰랐고,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 살에

아버지를 마저 여읜 뒤로 맏형수에게 눈칫밥을 얻어먹게 되어 고생맛을 알기 시

작하였었다. 맏형수가 위인이 좋지 못하여 없는 말 있는 말을 맏형에게 지껄이

면 안해 말을 잘 듣는 맏형이 오주를 못살게 굴었었다. 오주는 맏형도 밉거니와

맏형수가 더욱 괘씸하여 버룻을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있는 터에, 어느 날 형수

가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 나무 아니 해온다고 잔소리하는 것을 오주가 뺨을 치

고 머리채를 끄들르고, 그날 저녁때 맏형 내외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따로 살림

나서 사는 둘째 형에게로 갔더니 간 지 며칠 못 되어서 벌써 둘째 형수도 눈치

가 좋지 못하여 그래서 아버지 죽던 이듬해부터 남의집살이하는 것이 오늘날까

지인데, 열다섯 살에 해주로 나와서 한 집에서 한 삼 년 살고 그 뒤에 연안으로

나와서 이 집 저 집 옮아다니며 대여섯 해 살고 연안 있을 때 자라을 사람 하나

를 친하여 그 연분으로 자라 서울에 들어와서 일 년 지내고 개래동 정첨지 집에

와서 머슴살이한지는 일 년이 채 못 되었었다. 오주의 맏형 일주는 향나뭇골에

눌러앉아서 농사짓고 둘째형 이주는 등산곶으로 이사 가서 어부 노릇하고 셋째

형 삼주와 넷째형 사주는 장가도 들지 못하고 죽었었다. 맏형, 둘째형이 살아 있

지만, 서로 연신을 끊고 지내는 까닭에 지금 오주에게는 형제가 없느니나 진배

없는 터이었다.

유복이와 오주가 서로 사귄 뒤에 유복이가 오주를 사랑할 뿐 아니라 오주도

유복이를 좋아하여 한 장도막에 한두 번씩 자리를 맞추고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난 뒤로부터 두어 장 지난 때다. 유복이가 오주를 만나서 "나는 아우 없는 사

람이구 자네는 형들이 있지만 실상 없느니나 다름없다니 우리 둘이 의형제를 모

으구 지내보려나? " 하고 오주의 의향을 물으니 오주는 대번에 일어서서 "형님,

절 받으시우. " 하고 너푼 절을 하였다. "우리가 인제부터는 각성바지 형제다. "

"각성바지 할 것 없소. 내 성을 박가루 고치든지 형님 성을 곽가루 고치든지 맘

대루 고치구서 참말 형제루 합시다그려. " "성이야 고칠 수 있나. 지내기만 우애

있는 참말 형제같이 지내세. “ "아무리나 형님 말대루 합시다. 그렇지만 그까지

성은 아주 떼버려두 아깝지 않은데 다른 성으루 고치지 못할 거 무어 있소. " "

성이 뗀다구 떨어지구 고친다구 고쳐지나, 또 우리 부모가 각각 다른 바에 한

성을 가진다구 피차간 피가 같아지나. " "피가 다른 거야 누가 모른다우? 성이나

같이 하잔 말이지. " "피가 달라서 성이 다른 것을 억지루 어떻게 하나. " ”성

이 피에 붙은 것이오? " "붙은 셈이지. " "그럼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 피를 다

받았으니까 성을 둘씩 가져야 하지 않소. 하필 아버지 성만 가질 것 무어 있소.

" "아버지 성 갖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법이야. " "도둑질은 하라는 법 어디

있소? 하라는 법이 없어두 하면 되는 것 아니오. 아따 이렇구 저렇구 그까지 성

은 박가 곽가루 내버려둡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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