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성세의 백제 왕국, 부여의 반월성 일만 삼천여섯 척에 비긴다면 다소 모자라지
만, 병산성과 청산성에 견준다면 예닐곱 배나 되는 길이요, 웅주 공산성에 댄다면 거의
두 배에 이르는즉.
두 나라 역사의 길고 짧음과, 문화 깊고 낮음을 생각한다면, 그 규모 방대함이 어떠하
였으며, 견훤의 야심은 또 얼마나 만만하였던가, 그리고 하늘의 가슴을 때리는 백제 유민
들 사무침은 어느만 하였던가, 알 수 있겠건만.
결과적으로 후백제는 졌다, 진 것은 열패다, 졌으면 없어져도 좋은 것이다, 라고 이건
고려는 못난 후백제는 문질러 버렸다. 날파리 하루살이나 개미 한 마리처럼. 그리고 후백
제를 역사 속에 야유거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제군이여, 과연 그러한가. 조선은
망했고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유린하며 짓밟아 국호마저 빼앗았다. 지금 이순간만 본
다면, 조선은 지고 일본은 이겼다. 그러니 조선은 못났고 열악하며 깡그리 없어져도 좋은
나라인가? 빗자루로 쓸어 버리듯, 이 한 나라를 역사 속에서 슬어내 버려도 좋은가 말이
다. 또 일본이 어찌 되었든 이 나라를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으니, 일본은 강하고 아름답
고 옳은가? 만일에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라진 백제와 후백제에 대해서도
반드시 마음을 조아리고 엄숙하게 그 진정을 다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역사선생의 이름은 심진학이었다.
나루의 학, 참 절묘하지.
라고, 첫 시간에 자신의 이름을 툭, 툭, 툭, 백묵으로 칠판에다 써 주고는 혼자말처럼 탄
식인 양 내뱉던 선생의 음성과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나는, 시간과 역사의 나루 위를 날아다니는 한 마리 학이다.
역사선생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지었다.
그것이 어디 비단 나만에 그치는 일이겠는가. 시간의 아들인 우리 모두의 운명이리라.
그리고 그는 유리창 바깥에 누런 아지랑이가 부옇게 드리워진 사월의 낮은 봄 하늘을
내다보았다.
저것은 황사다. 저 황사는 중국의 대륙 북부나 몽고 만주 황토가, 봄이면 이만 때쯤,
바람을 타고 온 하늘에 가득 끼여 노란 모래 흙먼지로, 여기 우리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
까지 누렇게 밀려오는 것이다. 겨우내 얼어붙어 잠자던 바람이 흙을 깨워 데불고 날면 이
토록 수만 리를 머다 않고 뒤덮으며 흔드는 것이다. 저것을 그저 봄바람 한때라고 생각해
버리면 일과성으로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이 먼지 하나가 중국의 몽고 만주 어느 산맥과
들판에서 홀연 바람에 말려 떠오른 끝에,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대동강 건너, 한강을 건
너고 금강을 건너서, 이역 만리 타국땅 조선의 산천 초목을 온몸으로 쓸면서, 지금 이 남
방의 전라도 하늘을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몸소 느끼어
보라. 아마 이 바람과 먼지가 무심히 스치면서 내 몸에 끼치는 감촉이 완연 다를 것이다.
국경을 넘어온 바람.
제 나라 땅을 떠나 남의 나라 땅으로 날아가는 흙.
유리.
나는 왜 그런지 봄이 와서 목련꽃 피고 황사 아득히 흩날리는 사월이 되면, 회색으로
내려앉은 하늘의 먼 자락에 누런 먼지바람 회오리치며 몰려오는 이 풍경이 사무쳐 피고
설레곤 한다.
내 아직 가 본 일도 없는, 이야기 속의 중국과 몽고 만주가 육화 체감되어, 내 살에 실
제로 파고드는 전율을 소스라치게 느끼는 것이다. 그때 나를 떨게 하는 것은 연결감이다.
내가 바둑알처럼 따그락, 따그락, 따로 떨어져 뒹굴면서, 흑이냐 백이냐로 명확하게 갈라
져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경계를 넘나들며 섞이는 황홀
감을 나는 맛보는 것이다.
내가 비록 이곳에 있지만 분명 저곳과 이어져 있구나 하는 실감.
보이지 않는 진맥의 실낱이 떨리면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그 존재의 밀의를 어떻게 설명
할 수가 있을까.
역사에 대한 인식도 나는 마찬가지라고 본다.
내 시간 위를 흘러 지나가는 저 봄날의 흙먼지 한 무리처럼, 역사라는 것을 한낱 하잘
것없는 잡담으로 치거나 번거로운 바람, 혹은 털어내 청소해 버릴 흔적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나와 무관하여, 이미 죽어 버린 자들의 잠꼬대 같은 기록에 불과한 것이 되겠지만.
티끌같이 작은 일도 내가 온몸을 열어 놓고, 오관을 다하여, 마음으로, 느낌으로 받아
들인다면, 역사는 바로 그 순간에 나와 한 몸을 이루어 체화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나로부터 엮어 보는 역사.
역사의 현장을 교과서에서 찾지 말라.
바로 나 자신에게서 역사를 찾으라.
내가 없는 역사를 무엇에 쓸 것이냐.
까마득한 고조선의 단군 할아버지로부터 몇 천 년을 편년체로 지루하게 엮어 내려오는
역사는, 나한테까지 당도하기도 전에 기진맥진 지치고, 외우기 너무 멀어 오다가 길을 잃
어버린다.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누구인가.
정말 궁금하여 아버지, 아버지가 살던 땅,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살던 시대, 증조부,
고조부, 선세 옷깃을 찾아 오르고 오르면서 드디어 단군 할아버지에 도달하는 길은 절실
하고도 구체적이다.
내가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 동화같이 소박한 의문을 가진 까닭에, 자라서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제군들도 일찍이 낙화암과 삼천 궁녀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백제 후
인 아니라도 삼천리 강토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지.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성품이 음탕하여, 궁녀는 삼천이나 거느리고 주지육림에
서 호화 방탕 헤어나지 못한 채, 정사를 돌보지 않아 국정이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임금을
떠났다, 고 하며, 나당 연합군에게 결국 백제가 망하게 되자 이 삼천 궁녀는 스스로 낙화
암 절벽에 몸을 날려 백마강 푸른 물로 떨어져 죽었다, 는 이야기 말이다.
나는 처음 그 이야기를 사랑방 어른들한테서 듣고, 놀랐다.
궁녀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삼천 명이나 되는
여인들이 한자리에서 모조리 죽어, 꽃 같은 목숨을 가차없이 깊은 물 속에 떨어뜨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는 말에 놀랐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장의 목을 껴안고 진주 남강 푸른 물에 몸을 던진 논개부인, 단 한 여
인의 죽음도 청사에 길이 남는데, 삼천 명이라니.
달아나다 붙잡혀서 참수 능욕을 당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 못하는 짐승 벌레들도 살
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본능이거늘, 영리하고 꾀 많은 사람이 삼천 명씩이나 한꺼번에 그
처럼 스스로 제 목숨을 초개같이 내버릴 수 있는 나라. 백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승의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에 인산인해를 이루어도, 정승이 죽으면 지나가던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것이 통상 권력의 속성이 아닌가. 그런데 이미 망
해 버린 나라의 일개 궁녀들이, 삼천 명 모조리, 제 임금을 기리어 목메이게 부르며 물에
빠져 죽을 만큼 사모할 만한 왕이라면, 의자왕은 결코 소문난 것처럼 패덕하지 않았을 것
만 같았다.
궁녀들 또한 의혈 남아나 조국을 위해 비밀 결사를 한 조직원들도 아니면서, 황음한 임
금 곁에서 사치와 음욕과 분냄새, 비단옷 허영에 길들여진 노리개라면 도저히 그러할 수
없는 절개 지조로서 결연히 투강하여 백제와 임금과 자신을 끝내 지켰으니. 이는 의인들
중의 의인이 아니겠는가.
논개만 못할 것이 무엇이랴.
궁녀가 이러할 때, 백성들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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