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8권 (20)

카지모도 2025. 2. 14. 04:45
728x90

 

강모의 전주고보 역사선생은 말했었다.

임금이 나실 땅은 지령이 역시 다른가. 물맛조차 예사롭지가 않아서 녹두묵도 이 오목

대 이목대 아래 자만동의 묵샘골 물로 빚으면, 그 빛깔이 하도 곱게 물들어 차마 먹기 아

까울 만큼 선명한 노랑색으로 맑고 깊어지는데, 어찌 이런 조화가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

었다.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애련하다 할까, 난들 난실 묵채를 썰어서 가지런히 놓고 파,

마늘, 참기름에 고춧가루, 깨소금 갖은 양념 다하여 섞은 간장을 얌전하게 얹거나, 다른

음식 웃저지로 살짝 몇 닢 고명 올릴 때, 자칫 스러질까, 먹기도 전에 바라만 보아도 입

안에서 녹아 버리는 전주교동 녹두묵, 청포.

이는 천하의 진미라 해서 강호에 이미 알려진 바.

음식 사치 유명한 전주부성의 전주 팔미 혹은 전주 십미 맛깔진 음식들 중에서도 뽄이

나게 이름 높은 묵샘골 녹두묵은, 이 동네 샘물이 아니면 도저히 이 빛깔과 찰기와 연함,

맛을 낼 수 없다 하였다.

물이 이처럼 영특하여 이곳 물로 기른 콩나물 역시 사정골 노내기샘 콩나물과 더불어,

부성 인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나라의 미식이란 이름을 얻을 만하였으니.

구성없이 막대기처럼 자라 뻗치지 않고, 잔뿌리 터럭 하나 달지 않으면서, 작달막하고

통통하며 고소한 전주 콩나물.

여기다가 매콤하고 빨갛게 갖은 양념 고춧가루, 간장에 파, 마늘, 참기름을 넣고 무쳐

서 끓이든지, 그냥 소금에다 파만 살짝 송송 썰어 넣어서 말갛게 끓이든지 간에, 한 숟가

락 후루룩, 목을 넘어가면 막혔던 오장이 다 시원하게 풀리며 머리 속이 명쾌해지는 이

콩나물국은, 외지인한테는 별미였지만 전주 사람들에게는 필수 음식이었다. 콩나물은 전

주만의 독특한 바람과 토질 탓으로 자칫 생기기 쉬운 풍토병을 달래어 순화시켜 주는 음

식이기 때문에, 전주 사는 사람들은 이를 상식하였던 것이다.

온 고을의 체질에 끼니마다 스며들어 병을 미리 막아 주고 소리 없이 다스려 주는 인덕

이야말로, 어찌 한낱 물의 작용이며 콩나물의 성분만이겠는가.

이미 왕재를 품음직한 모태 지당으로, 만복이 우러나는 복지 아니고서는 이만한 물과

음식을 낼 수 없으리라.

이런 곳이어서일까.

옛날에 이야기책 그 재미난 춘향전의 완산판 목판본을 찍어내던 자리 또한 곧 여기 아

니면 저기일 것이라고, 나이 자신 노인들은 손가락을 들어, 즐비한 교동 기왓골 지붕 위

를 가리키며 짚어 보곤 하였다.

아 저 망헐 놈의 왜놈들이 기냥 저 좋은 경기전을, 이까짓 게 다 뭐냐고, 이태조 수용

(초상화) 뫼신 전각이나 한 채 허고 그 옆에 재궁이나 조께 게우 냉게 놓고는, 싸가지 없

이 반절 넘게 모도 싹 안 헐어 부렀능가잉. 그러고는 서쪽으로는 터를 뭉개서 즈그 보통

학교 터억 지어 앉히잖었어? 저것. 시방은 또 무신 심상소학굔가 머잉가람서? 썩을 놈들.

오목대를 거쳐서 쉬엄쉬어 소풍 삼아 이목대까지 놀러 나온 노인들은, 굽어보이는 발

아래 경기전 수풀을 아쉬웁게 내려다보면서, 단발령에 머리가 깎여 버린 뒤통수처럼 베어

넘겨진 학교터의 회색 양회 우람한 교사를 두고, 수군수군 한탄하곤 하였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야 감히

지차계하마 잡인모득입.

이라고 두 줄기 선명한 글씨로 화강암에 각인하여

누구든지 이곳에 이르러는 말에서 내려야 하며, 잡인들은 들어갈 수 없다.

고 홍살문 입구, 돌사자 등판에다가 경건 우뚝하게 세워 놓은 하마비 비석의 위용이 삼엄

한 경기전을, 감히 언덕 위에 놀면서 장난같이 내려다볼 수가 있었으랴만, 국망은 무상하

여 촌로 아동들마저도 조선 개국시조의 할아비 탯자리 이목대 옛터에서 잔디풀 뭉그러지

도록 깔고 비비고 뒹굴어 노니나니.

목조 유아시에 동네 아이들과 진법놀이를 유난히 즐기사, 매양 이목대 둘레 남천 냇

가 자만동 언저리, 산 좋고 내 흘러 경치가 빼어난 이 동천에, 한 그루 커다란 둥구나무

를 본부로 끼로 놀았대서, 훗날 사람들이

장군수.

라 이름 붙인 나무, 그 오래고 묵은 둥치만이 몇 백 년 세월에도 죽지 않고 아직 살아,

그을음 같은 가지끝에 여린 잎을 피웠다, 졌다, 숨쉬고 있을 뿐.

조선이 참으로 있었던가.

꿈결을 더듬는 듯하다만.

한 나라가 일어서고 무너지는 것은 늘 톱니를 물고 있어, 고려 말엽, 고려는 기울고 이

성계는 웅비할 때.

오목대 축연에서 바야흐로 흥겨운 승전의 잔치가 무르익을 제, 솟구쳐 터져 오르는 야

망의 회오리를 미처 가누지 못하고 이성계가 기염을 토하자.

같은 자리에 종사관으로 함께 종군하였던 포은 정몽주 공은, 나라를 훔치고자 하는 참

람한 이성계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보다못해 분연히 자리를 차고 일어나, 홀로 구월장천

가을 바람에 갈기 날리며 말을 몰아서, 전주 남천 자만동 목조가 멱감던 냇물을 건너, 동

서학동 좁은목 병풍리를 휘돌며, 드높은 남고상 산성의 낡은 옛 성터에 이르러.

비로소 목을 놓았다.

층운이 감돌다 흩어지는 산 상봉에 우뚝우뚝한 바위 덩어리, 튀어나올 듯 거꾸로 쏟아

질 듯 기괴수장한데. 수십 명 장정이 떼를 지어 걸터앉을 만한 만경대 너럭바위, 절경으로

빼어난 산마루에 서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흐르는 물, 바람 소리까지도 내 인군

그리어 외오는 듯 애절하여. 아득히 저 먼 송도, 북쪽 하늘 우러르며 무릎 꿇어 절을 하

고는, 창자 에이게 통곡을 쏟아 소리 높여 울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긴 호읍 끝에 저미는 절통한 심사를 피로써 먹물 찍어, 남쪽 바위 벼랑 가파

른 석벽에다 한 자 한 자, 새기어 남기니.

쇠하여 스러지는 왕조를 한 조각 단심으로 곧추어 버틸 수만 있다면, 그 한 몸, 천 년

이라도 바람닫이 낭떠러지 깎아질러 울며 울며 서 있었으련만.

만고의 충절로도 움터오는 여린 잎 맹아를 막을 길이 없었던가.

그저 다만 애오라지 규암석 돌벽에다 슬피 남긴 석벽제영 우국시 한 수만이, 조선 왕조

오백 년 다 지나고. 그 나라도 망하여, 같은 시름 끌어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표표하

게 한 점 한 획 지워지지 않는다.

천인강두 석경횡

등림사아 불승정

청산은약 부여국

황업빈분 백제성

구월고풍 수객자

백년호기 오서생

천애일몰 부운합

교수무유 망옥경

천 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홀로이 다다르니 가슴 메는 근심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누른 잎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구월의 소슬바람 나그네 시름 짙고

백년 기상 호탕함을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지고 뜬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

하염없이 고개 들어 송도만 바라본다

이 우국시를 지은 지 십이 년 만에 고려가 망하는 국난을 당하여, 끝끝내 일편단심 충절

을 지키던 포은 공은 이성계 일파의 일격에 개성 선죽교 다리 위에서 피를 뿌리며 순하였다.

그때 흘린 핏자국이 세월과 빗물로 쓸어도 쓸어도 지워지지 않고 오늘까지 선연히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고려의 마지막이었다.

기묘한 우연이라 할 것인가, 역사의 필연이라 할 것인가.

이성계가 성씨를 바꾼 개국의 포부를 공고히 다진 곳은 오목대, 자신의 조상이 태어나

신 태실이었다.

그리고 포은이 선 만경대 남고산성 자리는, 멸망한 후백제의 왕 견훤이 천하 강산을 얻

고자 철옹성을 굳게 쌓으며 왕건에게 대적하던 견훤산성이었다.

만년을 가라 하면 길다 했으랴.

그보다 더 창창히 우거져 뻗어 나가고 싶었을 후백제.

분하고 억울하다. 때를 얻지 못한 천고의 영웅이, 좀처럼 세상에 나기 어려운 불세출

호걸로서, 웅대한 한 나라를 꿈꾸었으나, 정사에도 제대로 남지 못하고 한낱 역사 속의

야담이나 설화 전설처럼 떠도는 견훤. 조롱당하며 몰매 맞는 역사의 미아. 일어서다 부러

진 왕국의 꿈이 나는 오늘도 아깝고 서럽다.

전주고보 역사선생은 목울대에 걸린 비분을 삭이지 못하며 말했었다.

그런데도 고려의 아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의 후백제, 견훤편에 태조 왕건의 편지를 빌

어 이와 같이 적었다.

(견훤은) 털끝 같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버리고 임금(경애

왕)을 목 베어 죽이며, 궁궐을 불사르고, 재상과 대신을 몰살했다. 또한 백성들을 상하

없이 도륙하였으며 임금의 후궁들이면 붙잡아 능욕하고, 보물이면 빼앗아 바리바리 싣고

갔다. 원흉으로 친다면 걸, 주보다도 지나치고, 잔인한 것으로 친다면 흉악한 짐승보다

더 심할 것이다.

이 글은 포석정 사건을 두고 쓴 것이다.

오욕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마디 변명할 기회도 가지지 못한 견훤.

그때 학교에 갓 입학한 까까머리 학생들은, 영문을 다 알 수 없는 숙연함에 휩쓸리어

선생과 함께 잠겨들면서 침묵하였다.

그 견훤왕 당년에 후백제 왕의 터, 도읍을 견고하게 다지고, 백세, 저 만세 후 자손 대

대로 백제같이 강성하며 융흥한 나라 이어지이다. 도읍지 완산에 성첩을 쌓을 때.

완산 동편 기린봉 ㅈ은 어머니 가슴 같은 봉우리 바로 옆에, 규암 돌이 뾰죽뾰죽 창끝

인가 칼끝인가, 첩첩바위 겹겹으로 온 산을 뒤덮어서 하늘이 준 천연요새를 이른 중바우

산, 흑운모 검은 갈색 번뜩이는 편안들이 천 장 만 장 방패처럼 날카로이 둘러선, 이 승

암산에다, 견훤은 동고진을 두고 동고산성을 쌓았다.

기린봉에 달 뜨는 밤이 오면, 동고산성 굽이치는 성벽들은 달빛에 푸른 몸 드러내며,

산꼭대기 휘감아 넘실대는 성곽들의 강물을 아득히 이루었다. 여기서 기린봉 능성을 가파

르게 타고 내린 산성은 다시 동정리 인후동 동쪽을 엮어서 휘엇하니 반달을 그리며 진안

가는 길목 서낭당이를 감싸고 돌아, 그 안에 물결치는 산과 내 보듬어서 뺑 돈다. 그리고

는 견훤의 왕궁터였다는 물왕멀 동네에 잠시 머물어 한숨 돌리다가, 이제 남고산 남고진

에 길고 긴 용의 꼬리를 힘껏 쳐올리니, 이것이 남고산성이었다.

역사 속에 단 사십 년 살고 갈 한세상의 후백제로서, 그 도읍지 서울인 전주 완산을 이

토록 반월성으로 드높이 단단하게 쌓은 성축은, 여덟 자 높이에 길이 물경 팔천구백삼십

척이나 되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8권 (22)  (0) 2025.02.17
혼불 8권 (21)  (0) 2025.02.15
혼불 8권 (19)  (0) 2025.02.13
혼불 8권 (18)  (0) 2025.02.11
혼불 8권 (17)  (0) 2025.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