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여기서 망한 것을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지난날 성인들의 공통돈 규범이었다.
일이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사책에도 전해오는 것이기 대문에, 전 백
제왕 부여융을 세워 웅진 도독으로 삼아 자기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여 상자를 보전케
하는 것이다. 라고도 했다.
상자란 뽕나무와 노나무(가래나무)를 말하는데, 옛날에 무릇 어버이 된 이는 담 밑에
이 두 가지 나무를 심어서 자손에게 물려주어 생계의 자료로 쓰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손이 이것을 보면 부모를 생각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다. 나중에는 이것이
변하여 조상 대대의 고향을 이르는 말이 되었으니, 향리라는 뜻으로 쓰였다.
문무왕은 이어 백제가 신라에 의지해서 길이 우방으로 될 것이요, 제가끔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호를 맺으면서 화친하게 지낼 것이다.
신라는 중국의 소명을 삼가 받들어 영원히 그 변방국 번국이 될 것이다. 서로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를 소중히 여기는 표시로 희생 짐승을 잡아 피를 머금었으니, 언제나 함께 친목할 것이다.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서로 구제하여 형제나 다름없이 사랑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삼가 받들어 함부로 실수를 하지 말며, 이미 맹세한 뒤에는 함께 변하지
말도록 힘쓸 것이다. 하는 여러 맹세들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하고자 한 말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만일 백제가 어기고 배반하여 이 맹세의 덕을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서 우리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는 때에는, 신라를 지키는 신명이 굽어 살피시어, 백 가지 재앙을 내리고,
자손들도 키우지 못한 채, 사직도 물론 지키지 못하여 제사는 끊어질 터이며, 남는 씨가
없게 될 것이다. 이 저주를 통하여 그는 백제 유민을 경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때문에 여기에 금 글자와 쇠 문서를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 두는 것이니, 자손은
만대가 되도록 감히 어기지 말라. 신은 이를 듣고 부디 흠향하시어 복을 베풀어 주옵소
서.
지금 이렇게 승자의 서슬이 시퍼렇게 날 서, 부여융의 덜미를 고누고 있는 문무왕 법
민, 그는 김춘추의 아들이요, 김유신의 생질로서, 그의 외고조부 역시 부여융처럼 망한
나라 가야의 왕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것이 있다면, 부여융은 언제라도 유민들이 치열한 항쟁을 일으킬 수
있는 백제의 위험한 가왕이요, 법민의 외고조부,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는 정벌당하여
무너지는 나라를 버리고 법흥왕 19년, 신라에 스스로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라는 점
이다.
저항과 투항. 저항한 것들의 운명과 투항한 것들의 영화.
투항한 구해왕은 신라의 귀족인 진골 계급으로 편입되었다. 꼭 경순왕이 고려에 그러했듯이.
구해왕의 아들, 김유신의 조부는 이름이 무력이었으며, 구해왕의 손자, 김유신의 아버
지는 서현이었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만명부인으로 신라 갈문왕 입종의 손녀이다. 서현을 흠모한 만명은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둘이서 야합하였는데, 만명의 아버지 숙홀종은 만명을 광에 가
두어 쇠통을 채우고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당시 아무리 금관가야의 김씨들이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 계급이 되었다고는 하지
만, 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혼인하여 아들 김유신을 낳앗으니, 금관가야의 왕족에서 신라의 왕족으
로 발을 벋어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피를 섞어라. 씨를 섞어라.
만명이 서현과 다시 만나 파격적으로 어려운 혼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하늘이
도우사 벼락이 쳐서 갇혀 있던 광 문이 쪼개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만명은 탈출했던 것이다.
김유신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김유신은 신분을 뛰어넘어 상승시키는 그 일을 신통한 꾀로서 능히 이루었으니.
누이동생을 교모히 김춘추에게 권하여 혼인 전에 드나들며 사통하도록 한 다음, 임신한
누이를 태워 죽이겠다고 분노하여 발을 구르며, 온 나라 안에 이 소문을 퍼뜨린 뒤, 어느 날,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둥하는 것을 미리 알아두었다가, 이 틈을 타서, 마당 가운데 장작더미를 높이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검은 구름처럼 매운 연기가 일어나서 멀리 여왕이 있는 곳까지 진동하여 번지매, 여왕
이 놀라서 바라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어인 까닭이냐.
그 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누구의 소행이냐?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옆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하였다.
그것은 네가 한 짓 같으니 빨리 가서 구하라.
왕의 명령을 받고 춘추공은 망설일 것도 없이 황급히 말을 달려 유신에게로 가 죽이지
말라.
왕명을 전하고는, 버젓이 혼례를 치르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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