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졸곡
어머니를 여읜, 슬픈 아들 고애자 이기채는 이마를 조아리어 절하고 통곡으로 아뢰나이다.
이 몸은 죄역이 태산같이 깊고 무거워 스스로 죽음으로써 멸하지 못하옵고, 오히려 그
화가 돌아가신 어머니께 미치었으니, 가슴을 두드려 울부짖고 머리를 부딪쳐 몸부림하며
오장이 무너지고 흩어져 가누지 못하도록, 땅을 치며 하늘에 외쳐도 이 울음이 닿을 곳
없습니다.
해와 달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지라 무정한 세월은 빨라서 어느덧 어머니 가신 지 석
달이 지났는데, 이 불효 자식은 혹독한 벌로 죄를 받아 차마 살아 남기를 바랄 수 없사오
나, 이토록 서러운 궤연을 받든 채 구차히 살아 있으니.
존자께서 위문하여 주시는데도 애감 극통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고 호소할
수도 없어, 오직 까무러칠 지경이옵나이다.
보내주신 위소를 소중하게 받았으나, 황미하여 순서도 없이 삼가 소장을 올립니다.
참으로 원통하여 창자를 찢으며 울어도 시원치 않을 일이 벌어진 끝에, 오늘 새벽은
졸곡이어서 제사를 올리는 날이었다.
울음을 마치다니.
이기채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상례 절차의 이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 기가 막혔다.
졸곡이라 무시애곡을 마친다는 뜻이었지만, 그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며칠 전에 당한
일이 그만큼 억색을 할 것이어서 정말이지 목을 놓아 울기라도 했으면 그나마 좀 흉중이
풀릴까 싶은 판에, 밤새 짓이긴 쓴울음이 칡즙같이 목에 찬 새벽.
하필이면 그는 졸곡을 당한 것이다.
졸곡은 삼우를 지낸 후 반드시 삼 개월이 지나고 나서 거행하는 것이 예인데, 날짜의
천간에 갑.병.무.경.임이 들어 있어 양의 날인 이 강일을 택해서 행하였다.
오늘은 계미년 병진삭 삼월 초엿새 무술일이었으니. 어머니 청암부인의 삼우제를 지낸 지
꼭 백 일이 되는 날이었다.
어린아이 세상에 갓 나온 맨 처음에는 그저 다만 핏덩이라, 아직 사람이라고는 하기는
어렵지만, 어느덧 석 달이 지나 백 일이 되면 이제 비로소 사람으로서의 형상을 갖추어
이목구비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하는 짓도 눈에 띄게 달라져 재롱이 는다.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날을 축하해서 잔치를 한다.
백은 이 세상의 수 가운데 가장 큰 수이며, 많은 수, 완전수로서, 모든 것을 이루어 스
스로 가득 찬 수다.
그래서, 소원을 이루고자 드리는 기도와 치성을 백 일 동안 올리는 것이다.
이제부터 백 년을 살 인생에 백일기도를 마친 날이 바로 백일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백 날이 이처럼 의미 깊듯이, 사람이 죽어서도 백 일이 되면 졸곡
을 한다.
유혼은 이미 무덤 속, 우주 자연의 태 안으로 돌아가서, 저 세상에 다시 났을 것이니.
그 혼백도 이제 백일이 되면 안혼정백, 혼돈과 슬픔과 낯설음을 가라앉혀 다스리고 이제
는 올바른 신명으로서 자신의 모양을 갖추게 되리라.
그러니 이제는 울음을 거두고, 신명이 편안히 자리잡고 안신하시도록, 졸곡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기채는 이제부터 울 일이 북바쳐 창자가 미어진다.
그래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조석 상식을 올리고 그 궤연 앞에서 울 수 있을때, 그 눈물
을 타고 어머니와 아들은 교혼할 수 있엇는데, 한 몸으로 흐를 수 있었는데. 자신의 뺨을
적시는 눈물이 유체의 체온 같아서, 자신을 쓰다듬어 주시는 어머니의 손길을 감득할 수
있었는데. 그리는 마음의 골을 타고 내 속으로 스며드신 어머니가 눈물로 현신하여 하염
없는 슬픔을 이루어 주셨는데 이제는 울지도 말라 한다.
어머니는 자식의 몸에서 눈물을 거두어, 이제는 당신의 질서 속으로 홀연히 가신다 한다.
허전하고 차가운 뺨.
눈물은 얼마나 따뜻한 것이었던가.
이기채는 목메인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멀리 가지 마소서. 제 안에서 머무소서.
비록 이제 울음을 끊는다 하나, 내 어찌 울음을 끊을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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