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9권 (47)

카지모도 2025. 5. 29. 06:26
728x90

 

오류골댁은 그 검정을 제 솥전과 뚜껑에 바르고 꼼꼼히 문질렀다. 검은색

을 먹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기름수건으로 매끄럽게 닦았다.

새각시 제금 나서 살림을 맡아, 맨 처음 솥을 닦던 그날로부터 이날에 이

르기까지 어느 한 날 빼놓지 않고 항상 되풀이해 온 일과, 그것은 한없이

경건하면서도 엄숙하고 곰살겨운, 오류골댁만의 의식이었다.

솥단지는 날이 갈수록 질이 났다.

무쇠 속에 깊이 배어 톡톡한 검은 빛이 교기로울 만큼 자르르 두텁게 윤택

하고, 솥뚜껑 감촉 또한 쇠가 아니라 살인 것처럼 체온이 어려, 오류골댁은

어느 날 마음이 산란하다가도 이 솥전을 어루만지면 저절로 푸근히 가라앉

곤 하였다.

이렇게 오랜 세월 길들인 오류골댁의 솥뚜껑에는 물이 떨어지면 또르르,

방울져서 구슬처럼 굴렀다. 그러니 때가 낀다거나 더께가 앉고 메마른 솥

뚜껑은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 솥에 지은 밥을 수북수북 충실히 먹고, 우리 식구 모두가 무병장수 수

복강녕 건강다복하게 하여 주옵소사.)

남모르게 빌면서 밥티 한 톨 국물 한 줄 잘못 붙게 하지 않았다.

공 들이는 것은 솥단지뿐만이 아니었다.

초벌 재벌 단단히 황토를 바른 부뚜막에, 마무리로 거죽을 곱게 먹여 바르

는 매흙을 몇 번이고 입혀서 계란같이 매끄럽게 매흙질하는 것도 큰 일거

리였다. 봄날에 날씨 좋아 다닐 만하면 깔끔하고 부지런한 아낙네들은, 묵

은 겨울 켜켜이 내려앉은 재검불에 회색이 되어 버린 부뚜막을 새 단장 시

키려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물 캐러 가듯이, 벼슬봉 아래 소복히 묻혀

있는 매흙을 캐러 갔다. 그것은 아주 몽글고 찰지고 하이얀 흙이었다.

"맥질 잘 해 놓은 부뚜막 얼굴은 열일곱 살 아가씨 살결보다 희고 부드럽

다."

는 말은 사실이었다.

맥질은 부뚜막뿐 아니라 바람벽에도 하였다. 그 결 고운 흙을 분처럼 바르

고 보얗게 피어나는 벽이나 부뚜막은 사람 사는 살림살이의 알뜰한 재미와

공력을 함께 느끼게 하였다.

그 중에도 티 한 점 묻지 않게 하얀 부뚜막에 새까만 무쇠솥이 기름이 흐

르도록 매끄러운 자태로 걸려 있는 부엌은 삼엄하도록 정결하고 아름다웠

다. 거기에 불을 때고 밥을 할 때 황홀한 너울을 일으키며 타는 불꽃, 그

흰 빛과 검은색과 붉은 불빛의 조화로움은 자지러지는 교태마저 느끼게 하

였다.

오류골댁은 조왕신 모신 부뚜막에, 그런 일은 별로 없었지만 기응이 출타

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은 끼니 때, 겨울이면 샛노란 놋주발에, 여름이면 흰

사기 밥그릇에 기응의 밥을 꼭 떠 놓았다. 오류골댁이 혼인하여 기응의 아

내 된 후, 그네는 단 한번도 밥 때에 대주인 남편의 밥그릇을 비워 둔 일

이 없었다.

그것은 아낙의 간절한 정성이고 기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부뚜막 조왕신 그늘 밑에 강실이의 합에다 밥을 담아 바

쳐 놓는다. 강실이를 그렇게 담아 놓는 것이다.

내 새끼 어디 가도 밥 굶지 말고, 언제라도 네 밥그릇 예 있으니, 돌아와,

돌아와서 네 밥 먹어라.

부뚜막에 행주질할 때 눈물이 떨어져 어룽어룽 강실이의 밥그릇은 눈물에

잠기지만, 그래도 내 새끼 신체가 담긴 밥그릇이 조금은 마음을 달래어 위

로했으나, 이제 강실이의 밥그릇은 뚜껑이 뒤집혀 나뒹굴고, 흰 밥은 검불

에 비벼져 저만큼 짓밟힌 채 부엌바닥 물 젖은 진창에 곤죽이 되었다.

그 솥뚜껑들이 시방 크고 작고 간에 모조리 잿바가지 삼태기처럼 되어 버

리고 말았으니. 모든 것이 심란하였다. 부뚜막도 물캐져 버렸다.

기응은 어쩌다 이런 일이 났느냐고, 당연히 추궁하여 물음직했지마는 오히

려 이쪽에서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로 단 한 마디 벙긋도 하지 않은채, 대

청 건너 기응이 거처하는 방으로 휭 들어가 버렸다.

(자식을 잃고도 무엇이 귀한 게 더 남아 있어서, 불 나면 안되겄소? 나는

다 타서 없어져도 아까울 것 없겄소.)

만일에 기응이 한 소리 하면 그렇게 대거리하려고 오류골댁은 미리 별렀

다. 그러나 저렇게 아무 말이 없는 건넌방이 쇳덩어리보다 무거운 것을 보

면, 기응도 그네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훨훨 타서, 집이고 사람이고 다 재가 되면, 거칠 것도 없고 괴로울

것도 없어 좋았을란지. 살어서 무엇 해. 죽어도 여한 없다.)

"어쩌다 마침 그때 자네가 거그 왔으까. 꿈만 같으네."

한참 만에 오류골댁이 효원을 보고 혼자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린다.

"작은 어머님, 저녁 진지를 짓다 말고 이런 일을 당하셔서..."

"솥단지 속 형편은 참 나도 모르겄그만."

"많이 놀라셨지요? 지금 안서방네한테 일러두었으니, 요기하실 것 준비를

할 겝니다. 그냥 계시어요."

"안 그래도 되는데. 이 경황 중에 무엇이 목에 넘어가겠는가."

오류골댁이 시름없이 고개를 떨군다.

"아이고, 나 좀 보소. 이 옷 꾀벗고 고쟁이바람으로 앉었는 것...참말로 망

신이로세. 질부 볼 낯이 없그만. 체신도 말이 아니고."

"제가 남인가요. 아무 걱정 마시고 우선 어서 좀 누우시지요."

반닫이 위에 얹힌 이부자리에서 베개를 끌어내리는 효원의 손을 오류골댁

이 붙잡는다. 거센 악력이다. 효원이 놀라 얼른 방바닥에 베개를 놓고 오류

골댁 눈을 들여다본다.

아니. 이 양반이 언제 이렇게 늙어 버리셨는가. 허깨비 같구나.

오류골댁눈에 눈물이 돈다.

"나 암만해도 이것한테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서 질정을 못허겄네. 차마

내가 안행사까지 가 볼 수도 없고, 왜 온다는 황아장수는 늘 오던 걸음을

갑자기 씻은 듯이 끊고 안 오는지. 애가 말러 못 전디겄어."

좀 알아봐 줄텐가?

벌겋게 상한 눈빛이 묻고 있었다.

"오늘도 내가 그 생각을 넋 나간 사람모냥 골똘히 허다가, 않던 짓을 저지

르고 말었네그려. 내, 전에는 어뜬 넋 빠진 예펜네가 불 때다가 불을 내는

고 했더니. 얼마나 의젓잖고 칠칠치 못하면 그래 아궁이 불에다 치맛자락

을 태워...허고는...사람으로도 안 봤는데. 내가 그 짝이 되고 말었어. 흉 많

이 보소."

"별 말씀을 요..."

사람 사는 것이 어찌 이리 누추한가.

내 지금가지 살면서 남 못할 짓 시킨 일 바이 없는 것 같고. 남한테 모진

소리 그닥 한 일도 없는 것 같건마는, 귀신이 시기할 만한 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닌 사람을 이토록 갈갈이 찢어 처참하게 만드는 까닭이 무엇

이란 말일까.

이제는 집구석에 불이나 내고.

질부 앞에 낯 들고는 나설 수도 없으면서, 또 다시 매달려 신세를 지고자

하는 자신의 몰골이 하도 처량하여, 고개를 떨군 오류골댁은 그래도 눈물

만은 보이지 않으려고 눈시울을 실룩인다.

"암만 해도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어. 꿈자리도 사납고."

"꿈자리가 안 좋으세요?"

"응."

"어떤 꿈이길래...?"

"그저 어지럽지머. 한번은 어디 무슨 들판 같은 데 망망천리 천지사방으로

는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고, 마냥...가시덤불인가...쑥굴헝인가...억새풀인가...

엉크러진 잡초더미가 시들어서 금방 귀신 나오게 스산허드마는, 저만큼 먼

데로는 시커어머니 산들이 우뚝우뚝 그림자마냥 둘러섰고...길도 없드라고.

그런데 거기 아조 흰 꽃이 만발헌 고목나무가 우람허게도 가지가 우거져

서, 한복판에 별스럽게 눈에 띄어. 잎사귀는 하나도 없드만...그래서인가, 그

것이 환헌 느낌이 아니고 왜 무슨 못 필꽃이 못 필 데 핀 것처럼 괴괴허기

도 해. 나는 그런 꽃은 처음 보았네."

무너지게 함성을 울리며. 어두운 지하의 습진 수액을 빨아올려 황량한 벌

판에 단말마로 핀 것도 같고, 반면에 쓸쓸하기 그지없이 고요하고 잠잠하

여 그 화려한 만발이 귀기를 머금고 있는 것도 같던 고목나무 흰꽃들.

오류골댁은 그 몇 아름드리 나무가 억센 뿌리를 꿈속의 벌판이 아니라 자

기 가슴 복판에 사나운 발톱처럼 박으며 뻗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여,

숨을 멈춘다.

"그래서요?"

"꽃들이 왁자허니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었어."

"꽃들이요?"

"역력헌데.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나무에 웬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지

않어? 꽁꽁 묶여서. 발가벗겨진 채로. 뒷모습인데...누군지는 얼른 모르겄지

만...젊은 여자 같었어...태도 곱고...머리카락을 꺼꾸로 쏟아 산발을 헌 것이

시꺼멓게 내 가슴으로 쏟아지데...물살마냥...그것이 어느 틈에 검은 강물이

되어 버리더니 한꺼번에 큰물난 것처럼 덮치면서 나를 휩쓸어. 그만 나는

그 검은 강물에 빠져 허우적이며 떠내려가다가...깼어."

"그러셨구만요."

효원은 낯빛으로 그 말을 삼킨다.

흉몽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큰 나무가 광야에 홀로 우뚝 서있는 것을 보면 고

독 심노할 징조이며, 이 나무에 사람이 올라가 보이면 남의 말 구설이 있

게 마련인데. 그나마 손발이 꽁꽁 묶이어 오도가도 못하게 잡힌데다가 거

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을 보았다니. 참으로 흉참한 꿈이었다. 그것은 뭇사

람들한테 조롱을 당하며 손가락질 받는 망신 우세의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

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9권 (49)  (1) 2025.06.01
혼불 9권 (48)  (2) 2025.05.30
혼불 9권 (46)  (1) 2025.05.28
혼불 9권 (45)  (0) 2025.05.27
혼불 9권 (44)  (1) 202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