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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권 (46)

카지모도 2025. 5. 28.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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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골댁 머리 속이 무서우리만큼 조용해진다.

검불을 뒤집어쓴 채 그을음 범벅이 된 몸은 흡사 알맹이 빠져 나간 허물처

럼 가벼이, 바스라질 듯한 거푸집으로 이만큼에 앉아, 주홍으로 불타는 한

세상의 정짓간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든다. 그 정짓간은 아

득한 이승이요 알맹이고, 감나무 밑에 몸을 부린 오류골댁 육신은 허울이

며 저승에 와 있는 혼백도 같아진다.

안서방과 안서방네, 그리고 넙댁이, 키녜, 콩심이까지 어둠에 잠기는 오류

골댁 초가 삼간 부엌문 앞에서 훌떡훌떡 뛰고 뒤에서 덤비며, 물동이를 이

어 나르는 형용들도 검은 제웅 허수아비 그림자들만 같다.

그 무리 가운데서 기응의 그스른 목소리도 들려온다.

저 냥반은 큰집 사라에 있다가, 별안간 집에 불이 났다는 전갈을 듣고 놀

란 입을 못 다문 채 숨이 턱에 차 내달아 왔으리라.

눈앞에서 가장이 느닷없는 이 불을 끄느라고 허깨비 뛰듯 집 안팎을 맴돌

며 사람들과 함께 물벼락을 내는데, 오류골댁은 그저 감나무에 기대어 먼

고을 저쪽 일을 보는 사람인 양 멀거니 앉아만 있다.

평소의 오류골댁 사려 깊고 음전한 거동에 오늘 일은 도무지 모두가 당치

않았다.

"작은어머님, 어쩌다 그러셨던가요?"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뒤, 사람들은 머릿수건 목수건들을 벗어 탁, 탁, 그

을음을 털고는 옷에 밴 연기 냄새를 맡아 보면서 흩어지고, 효원은 오류골

댁을 부축하여 작은집 방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불길은 더 번지지 않았으나, 정짓간은 온통 물바다로 죽이 되어 발

을 디딜 수가 없고, 살강이며 부뚜막은 검불투성이였다.

"이런 부엌바닥이라야 잘 살고 복 받는 것이다."

벼룻돌처럼 매끄럽고 찰지며 흑단 같은 흙바닥을 손으로 쓸어보면서, 시어

머니 이울댁이 전에 말했는데, 이 집 부엌바닥은 꼭 검은 달걀들이 땅 속

에서 봉긋봉긋 솟아나는 것마냥, 둥근 흙알들을 무수히 품고 있었다.

"이것이 복알이거든."

다치지 말아라.

부엌바닥 빗지락으로 싹싹 깎어서 쓸어내지 말고.

칼 같은 것 겁없이 쓰다가 툭, 툭, 떨어뜨리지도 말고.

알 깨진다.

"왜, 음택에서도 명당 찾을 때 자라가 알을 낳고 있는 형국이라느니, 금계

포란이라느니 하지 않더냐? 이 볼록볼록 볼가진 알들이 이를테면 양택에서

도 그와 같은 것이다. 이쁘지?"

이울댁은 새각시였던 오류골댁한테 몇 번이나 당부하고 일렀다. 그 말씀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는 오류골댁이 평생토록 부엌바닥을 기름 칠한 듯 윤

이 나게 가꾸었건만. 그것들이 이제는 물에 퉁퉁 불어 밟혀서 짓뭉개지고,

터지고 깨져 버렸으니.

밑알을 어디 가서 다시 구하리.

오류골댁은 효원과 마주앉아서도 입을 떼지 않는다.

어쩌면 그 밑알은, 강실이가 낯선 곳에서 이 마을로 찾아드는 황아장수 아

낙을 따라 허청허청, 보퉁이 하나 끼고 떠나가던 그 순간에 이미 이 집안

으로부터 구렁이 업 빠져 나가듯 어디론가 굴러가 버렸거나, 아니면 그때

이미 벌써 형체도 없이 박살이 나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어머님, 저 소두방들 아까워서 어쩌까요? 그렇게 반짝반짝 흑경같이

질을 내놓으셨는데, 아까 그만 날벼락을 맞어서."

효원은 일부러 오류골한테 우스개처럼 말을 에돌린다.

그네는 오류골댁이 밥솥단지, 국솥단지, 군불 때며 물 데우는 큰솥단지들을

아침 저녁으로 닳아지게 매만지며 얼마나 지극정성 애지중지 손질하는가를

옆에서 보아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오류골댁은 매안으로 시집온 이래 지난 이십여 년간 애오라지, 그 어떤 금

붙이 보패보다 이 새까만 무쇠솥을 끌어안고 길들이는 것을 기도로 알고

재미로 알았던 것이다.

평생에 단비 하나 두지 못한 살림인지라 단출해서 식객이 들끓는 것도 아

니었지만, 오류골댁 살림집은 정짓간 넓이가 넉넉한 편이었다.

차진 흙을 반죽하여 만든 부뚜막에 걸린 솥단지는 세 개였다. 솥마다 아궁

이가 달려 있는데 밥솥 국솥은 큰방 쪽으로 나란히, 물 데우는 솥은 왼손

편 쪽에 붙었다. 그것은 도장방으로 골이 난 아궁이다.

이 대수롭지 않은 기역자 부뚜막이 오류골댁의 세상이었다.

그네는 여기에 조왕신을 모셨으며, 이날까지 새벽이면 으레 단정한 첫 우

물물을 길어 정화수로 올리었다. 그리고 봄에는 진달래, 가을에는 올벼를

꺾어다 바쳤다. 그뿐 아니라 밤이건 감이건 그해 들어 첫 번때 익은 것은

이 조왕에 절을 하고 놓아 드렸다.

그리고 그네는 무쇠솥을 길렀다.

처음, 오류골댁이 친정에서 이울댁으로 갓 시집을 왔을 때, 시어머니는 뿌

듯한 심경을 누르고

"나중에 네 살림 제금나면 저 솥을 가지고 가라."

하며 투실투실한 새끼줄로 누렇게 퉁퉁히 묶은 무쇠솥을 가리켰다. 솥은

아직 한번도 쓰지 않은 것이라 표면이 거칠고, 빛깔 또한 까칠한 흑회색이

었다. 그것은 거멍굴 성냥간에서 맞춰 온 것이라 했다.

"평생 쓰고도 대를 물릴 수 있을 게다. 쇠가 좋거든."

시어머니 이울댁과 시숙인 수천댁 양주 모시고 한 집에 함께 거처하며 오

류골댁은 속으로

(한 부엌에 달아도 되는데, 저렇게 우리 줄 솥단지까지 미리 맞춰다 놓으

시다니, 어머님 성품이 무던하신가 보다.)

짐작하였다.

과연 오래지 않아 기응과 오류골댁은 시댁의 바로 밑엣집으로 새살림을 났

다. 그들은 비로소 그때서야 무쇠솥에서 새끼줄을 풀어내고, 부뚜막에 솥단

지를 걸었다. 이제 자기들의 솥이 생겼던 것이다.

둥그렇게 뻥 뚫려 스산한 아가리를 큼지막히 벌리고 있는 부뚜막에 솥을

맞추어 끼운 뒤, 틈서리는 시룻번처럼 황토흙을 개어 붙이고, 몇번씩 몇 번

씩 물칠을 하며 곱게 발라 마무리하던 날을 오류골댁은 잊지 못한다.

드디어 어른이 된 것 같은 감회가 느껍고 벅찼던 것이다.

"새 솥을 걸고 나서는 뭉근한 불에 물을 한 솥씩 가득 두세번 데워 내야

한다. 그래야 쇳내도 빠지고, 성냥질할 때 묻은 잡것도 다 씻어지지. 솥단

지는 처음에 질 잘 내야 한다."

이울댁이 며느리네 아궁이에 불을 넣으며 말했다.

"아나. 이것 한번 끓여 봐라."

새 솥 건 부뚜막에서 젖은 흙이 달구어지며 익어가는 냄새가 퍼져, 살 속

으로 구수하고 안온하게 스며들었다.

오류골댁은 이울댁이 건네주는 돼지고기 덩어리를 받아 대강 씻어서 솥에

넣고 삶기 시작했다. 기름이 많은 부위였다. 둥 둥 둥 둥, 기름진 기름이

끓는 물 위에 떴다. 둥글둥글, 기름은 둥그렇게 퍼져 나가며 쇳속으로 스며

들어 새 솥을 미끄럽게 하였다.

"자, 네가 해봐."

오류골댁은 시어머니 말씀대로 건져낸 고기에서 기름을 잘라내 솥전과 뚜

껑 표면을 문질렀다. 기름을 먹이는 것이다. 기름은 안에서 끓고 밖에서 배

어들었다. 그네의 콧등에 땀이 송송 열렸다.

"어느 집이고 부엌에 들어가서 소두방 척 보면 그 집 주부의 격을 알수가

있느니. 부지런하고 깔끔하며 정성스러운 부인은 이 솥뚜껑 꼭지에 절대로

먼지 않게 두지 않는다."

기름을 먹어 윤기가 생긴 솥에 이번에는 다시 맑은 물을 끓였다. 한 번 끓

은 물은 모두 퍼내고 또 부어 끓이기를 두세 차례 했을 때. 지금거리며 가

라앉은 이물이나 쇳가루 없이 깨끗한 물을 보고서야

"됐다."

이울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부터는 네가 이 솥을 잘 질내 보아라."

신불을 공경하듯이, 자식을 사랑하듯이.

그 다음날 아침밥을 짓고 나서 아궁이가 식을 무렵, 오류골댁은 이울댁의

아궁이 앞에 납작 엎드리다시피 하고, 대접에다 시어머니의 묵은 솥 엉덩

이에 푹석푹석 하도록 묻어 있는 검정을 한 대접이나 긁어냈다.

"애쓰네잉."

수천댁이 동서가 똑 재강아지같이 되어, 턱이며 이마에 검댕이칠을 한 모

습을 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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