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차라리 훨훨
(암만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때가 언제라고 열두백 번이나 다녀갔을 황아장수는 그날 이후 거짓말처
럼 발을 딱 끊어 버린 채 매안에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으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아궁이 앞에 넋 나간 사람마냥 멍하니 앉아 시름시름 타오르는 저녁 밥솥
불땀을 부지깽이로 일우며, 오류골댁은 정지문 바깥에서 무슨 기척이 들리
는 것 같아 흠칫 놀란다.
흐드득.
누가 왔는가.
등걸처럼 쭈그리고 앉은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부엌 바라지를 잡고 마당
을 내다본 오류골댁 눈길이 사립간에 머물다가 맥없이 걷힌다.
투두두둑.
이번에는 뒤안에서 비 듣는 소리가난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오류골댁 눈에 비긋이 열린 뒤안바라지
너머로 두꺼운 잎사귀 무성한 감나무 둥치가 들어온다. 땅거미 어스름까지
머금어 흑록이 더욱 짙은 감나무잎 그늘을 헤집어 훑으며 마침 바람이 이
는가. 연노랑 미색의 감꽃들이 빗방울 후드기듯 저문 땅에 떨어진다.
어른의 엄지손톱만한 통꽃이 암수 한 그루에 피어나 가루받이를 끝내고 나
면 저렇게 우수수 흰 별같이 쏟아져 지는 감꽃.
감꽃이 떨어지면 계절은 성큼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매안에는 대나무도 흔하지만 감나무도 많았다.
사람들이 집집마다 뒤안이나 마당 귀퉁이에 한두 그루씩은 묵묵히 기르는
것이 감나무였으며, 고샅과 언덕바지 뒷동산 기슭에도 이 나무들은 오랜
세월 묵은 기침 서너 자락은 넉넉히 삭이어 드리운 것 같은 가지를 하늘로
벋고 있었다.
그러니 감꽃은 또 얼마나 흔하겠는가. 음력 사월에서 오월로 가며 이꽃들
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감꽃은 고운 꽃이 아니었다. 모양이 화려하지
도 않았으며 빛깔도 무심했다. 별다른 향기도 없었다. 누가 따로 그것을 꽃
이라고 여겨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다운 꽃이었다.
특히 계집아이들한테는 아주 좋은 놀잇감이어서, 강실이도 어려서는 늘 이
맘때면, 호젓한 뒤안 마당 가득히 하얗게 진 이 감꽃들을 제 앙징맞은 치
마폭에 주워담아, 야물야물 하나씩 먹기도 하고, 무명실 가닥에 졸졸이 꿰
어 목에 걸고 다니며 놀기도 했다. 톳톳한 감꽃은 땅에 떨어져도 금방 시
들지 않는데다 지천으로 흔해서 탐스러운 목걸이 타래를 몇 겹이고 감아
늘일울 수 있었으며, 사금파리 소꿉장난 꽃밥에도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예닐곱 살 어린 나이 강실이가 꾀꼬리색 저고리에 다홍색 치마를 입고, 이
끼 돋은 감나무 아래 조그만 등허리를 굽힌 채, 지난 밤 비에 진 감꽃들을
꼬막 같은 손으로 공들여 주울 때. 곱게 땋은 새앙머리 까만갈피 결을 두
드리며 토독, 톡, 떨어져 얹히던 그 흰 꽃.
그 꽃이 오늘도 지고 있는 것이다.
바라만 보아도 미소롭던 강실이는 어느덧 자라서 성년이 되었으나.
한번도 화사한 낯빛을 피워 보지 못하고 저 명색 없는 감꽃처럼 땅위에 구
르며 흐트러진 여식. 강실이. 내 새끼.
생각이 강실이에 미치자 우욱, 진울음이 치미는 오류골댁 젖은 눈에 정처
도 없이 어디론가 후줄근히 걸어가는 강실이가 헛것처럼 밟힌다.
불쌍한 것.
너를 어쩔거나.
억장이 무너져 미어진 틈바구니로 쓴물이 올라 창자를 할퀸다.
세상에는 에미 두고 죽은 자식도 있다더라.
망연히 혼자서 중얼거리는 그네의 눈앞에, 막 물이 올라 솜털에도 윤기가
흐르며 무지개 맺히던 강실이 열다섯 살, 다시는 볼 수 없이 놓쳐 버린 모
습이 떠오른다.
몹쓸 놈의 자식.
내가 이럴라고 너를 낳았더란 말이냐.
죄가 많아 여자로 태어나 남의 집에 시집와서, 남 다 낳는 아들 하나 낳지
못하고, 시집가면 출가외인 소용도 없는 딸자식 한 마리 삼시랑이 점지하
사 보도시 얻었더니, 삐비속같이 여리고 보드랍고 희고 맑아, 해당화 곱다
하나 너에게다 비기리야. 어루만져 품고 안고 한 세월을 금지옥엽 길러 냈
건만.
너는 에미를 버리고 어디 가서 무엇을 허고 있는고.
날카로운 돌덩이가 부서져 마치는 것만 같은 통증이 명치를 친다.
오류골댁은 가슴을 누른다.
후드득.
감나무는 대답 대신 저무는 마당에 감꽃을 뿌린다.
순간 오류골댁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탕, 탕, 세차게 발을 굴렀다.
넋을 놓고 선 그네의 발치 아궁이 언저리에서 날름날름 가리나무를 핥던
불 혓부리가 정지바닥으로 기어 나오다가, 굴뚝에 들이는 바람을 타고 거
꾸로 휘익 밀려 그만 오류골댁 치맛자락 끝에 옮겨 붙은 것이다.
아이고, 이런. 이런...
남평댁한테 얻은 쪽을 아껴 엷은 회청색 물을 놓은 미영치마 끝자락이 버
르르 소리를 내며 벌벌벌 타들었다.
오류골댁 등골에 식은땀이 쫘악 흘렀다.
주황의 불너울은 순식간에 그네의 치마폭을 휩싸며 화염을 일으킨다.
오류골댁은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아랫도리를 후려친다. 퍽,퍽. 매맞은 불
티가 냇내를 토하며 공중에 뜬다.
이게 웬일이여, 아이고.
당황한 오류골댁이 그제서야 문득 정신을 차리고 치마 말기를 허둥지둥 풀
어젖히는데, 정지바닥 불길은 어느결에 밥을 하려고 풀어 둔 솔가지 나무
바짝 마른 잎과 가지를 휘감아 태우며 싯벌겋게 물어뜯고 있었다. 그 기세
가 거세다.
오류골댁은 불붙은 미영치마로 솔가지 나무 불더미를 두드린다.
불똥이 튀고 그을음이 날며 연기가 차 오르는 정지 안쪽에 커다란 물독아
지가 있었지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않아 큭, 큭, 매운 숨을 참
으며 옷자람만 휘두르던 그네는 기어이 미영치마를 놓아 버리고 만다. 뜨
거워서 더 견딜 수가 없는 탓이었다.
치마는 불더미 속으로 떨어졌다.
오류골댁 혼자서는 이미 이 불을 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네는 불이야,
비명도 못 지르고 얼른 정짓간 바깥으로 뛰쳐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앞뒤가 꽉 막혀 아무 중정도 서지 않아서였다
그저 발바닥에 아교 붙은 사람처럼.
어쩌꼬, 어쩌꼬잉.
선 자리에서만 동동거리며 맴돌았다.
"작은어머님."
아니, 이게 웬.
놀라서 말을 자른 효원의 목소리가 밖에 들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
"대실 질분가?"
오류골댁이 연기 속에서 다급하게 물었다.
매운 눈물이 그네의 목을 메게 한다.
효원은 대답조차 할 것 없이 단숨에 오류골댁한테로 달려들어, 고쟁이 바
람인 시숙모를 보듬어 안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몸을 돌
려 뒤안 마당을 홱 구르다시피 튀어나갔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도 그때 눈 깜짝할 사이, 정짓간의 불길은 한꺼번에
날개치며 새떼 나는 소리로, 물독아지 옆에 높다랗게 쌓아 둔 솔가지 나뭇
단을 한 입에 삼키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오류골댁은 후들후들, 감꽃을 깔고 주질러 앉는다. 도무지 다리가 떨리고
힘이 없어 입도 벌어지지 않아서였다. 그저 얼빠진 낯빛으로 효원에게 무
슨 말을 해 보려 입시울을 움직였으나, 효원은 벌써 큰집으로 올라가 버렸
는지 아무데도 안 보인다.
이러다 내가 죽을라는가.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9권 (47) (0) | 2025.05.29 |
---|---|
혼불 9권 (46) (1) | 2025.05.28 |
혼불 9권 (44) (1) | 2025.05.26 |
혼불 9권 (43) (1) | 2025.05.25 |
혼불 9권 (42) (0) | 2025.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