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는 강태가 "자." 하면서 손을 짤막하게 들어 보이고는
우중충한 시칸방 쪽으로 가고, 강모는 혼자서 휘적휘적 서탑으로 돌아오는데, 제
일면점 잡화 점방 안이 전에 없이 우글우글 사람들로 시끌짝하다. 강모는 골목
에서 힐끗 안을 들여다본다. 웬 사람들인가. 차마 옷이라고 할 수 없는 무명 홑
저고리에 홑치마 홑바지들을 꿰어 입은 남정과 아낙, 그리고 조물조물 고만고만
한 아들 따로 보이는 남녀아 예닐곱 명, 도합하여 열 명에 가깝거나 넘칠 것 같
은 일가족 떼거리들이 온통 땟국에 절어서 꾀죄죄, 흥보 새끼들 마냥 낯바닥도
씻진 않은 채 엉거주춤 앉고 서 있으니, 흡사 무슨 난리가 난 것 같았다. 주인
김씨는 느닷없이 점방 안으로 들이닥친 이 낯선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라서 통
사정을 하다시피 몇 마디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 이 많은 어린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자고,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만주 땅까지 무턱대고 찾아온단 말이에요? 여기서는 장사를 하자고 해도 밑천이
있어야 하고 품팔이를 하려 해도 조선 사람은 일 시킬 사람이 많지 않답니다.
거지 노릇을 하더라도 제 고향에서 하는 것이 낫지 그래. 말도 안 통하는 중국
땅에서 이 어린 자식들을 무슨 수로 먹여 살리려고 이런 곳을 다 찾아왔습니까?
만주가 어디라고요. 오늘 아침에도 저 노도구 파출소 건너 하늘다리 아래서 사
람이 하나 뻣뻣하게 얼어죽었는데."
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는 전라도 남원에서 왔는디, 고향에서는 이런 저런 허드렛일을 하고 살았
소. 그러고 나는 참빗 같은 것도 맹글어 팔았지라우. 우리 고장은 대나무가 많아
갖꼬요잉. 여그서도 그거이라먼 내 얼마든지 솜씨좋게 만들 수 있을 거이요. 그
걸로 장사를 허면 될 것 아니요? 오죽허면 이 엄동설한에 이 새끼들을 다 몰고
ㅁ 천리 질을 걸어 걸어서 여그까지 왔겄소잉? 우리 조께 살게 해 주시오. 예?"
"그것도 생각뿐이지요. 이 좁은 구역에 조선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참빗 같
은 것이 팔리겠습니까아. 더구나 참빗은 한 개 사면 여러 해 두고 쓰는 물건인
데, 먹어 치우는 것도 아니고."
"중국 사람들도 머리를 빗을 거 아닝가요?"
이번에는 아낙이 낯바닥을 들고 애걸한다.
"하, 중국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빗을 좋아하지 조선에서 만든 참빗은 잘 안 써
요. 촘촘해서요. 네? 설사 그것이 팔릴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다음 물건을 또 만
들 밑천이 있습니까?"
"삼태기도 짤 지 알고요. 빗자락도 맹글 수 있는디요."
"아이구우. 그것도 조선서 살 때 이야기지요. 어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세요."
"사람들이 봉천에 서탑거리만 찾아가먼 살 수 있다고 허든디이..."
아낙은 아예 점방 바닥에 다리를 뻗으며 주질러 앉았고, 남정은 모가지를 툭, 떨
구어 꺽은 채 두 눈만 꿈뻑꿈뻑 하고 서 있다. 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 서탑 거리에 조선 사람이 많이 사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봉천이라는
대도시로 볼 때는 뒷골목 한 자락에 불과해요. 그러니깐 여기에는 주로 아편쟁
이나 거지, 기생, 품팔이꾼 같은 최하층 빈민들이 살고 있다고 보면 되요. 나도
나 사는 곳을 이렇게 말허고 싶지 않지만."
갈 곳 없는 이 남도 유민 일가족 떼거리를 우선 이 집에서 나가게 해야 하므로,
김씨는 좀 과격한 언사를 쓰는 것 같았다.
"두고 보면 알겠지만 인제 겨울이 다 가고 삼월말이 되도 봄은 멀고 거리 골목
어두운 구석쟁이에는 밤새 굶어 죽거나 얼어죽은 시체들이 디글디글 굴러 댕기
군 할 테니. 내 말이 거짓말인가 참말인가 보구려. 아마 오늘 낼 사이에도 뭐 시
체 서너 개 보기는 그닥 어렵잖을걸."
그 말이 듣기에 섬ㅉ하기는 해도 전혀 거짓은 아니었다. 아아. 서러운 조국. 비
렁뱅이 나나. 강모는 망연히 서서 김씨와 유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러지
와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초라하고 참담한 짐보퉁이를 묶은 끈에는 어김없이 이
빠진 바가지 디룽디룽 매달려 있었다. 저것이 무슨 의관이라고. 시큰 콧물이 메
어 울적하게 돌아서는 강모의 심사가 찢긴다. 오랜만에 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고향이 묻어서일까. 전에 없던 연민이 처음으로 그의 가슴을 싸아 물들이며 서
글프게 한다. 희끗희끗 눈발 날리는 봉천의 하늘이 황량하게 보인다. 아까는 심
진학 선생을 만난 기쁨으로 빈 하늘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저 거러지와 다를 바
없는 남루한 일가족의 비참한 정경이 눈에 들어온 순간, 가슴이 시렸다. 그는 외
투 깃을 여미며 돌아선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고오. 서방니임. 서방님 아니싱교잉?"
누군가 다급하게 튀어나와, 돌아서는 그의 뒷덜미를 나꾸어채듯 부른다. 하도 찰
지게 낯익은 전라도 가락의 남원말이라, 강모는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인가 싶어
펀듯, 고개를 돌린다.
"맞그만이요오. 이잉. 서방님. 새서방니임."
그만 감격에 숨이 차서 울부짖듯이 고꾸라지며 길바닥에 털퍽, 무릎을 꿇고 엎
드리는 사람은, 점방에서 ㅉ아나온 부서방이었다.
"누구시오?"
강모가 얼른 그를 못 알아보고, 절하는 남정을 내려다본다.
"저요잉. 저 아랫몰 부서방인디요오."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쳐든 부서방이 목을 놓아 운다.
"오오. 부서방. 그렇구만..."
"어쩐 일인가. 자네가, 여기."
강모는 반갑기보다는 웬일인지 가슴이 철렁하여, 순간 그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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