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방은 온몸에 박힌 얼음이 녹아 내리듯 걷잡을 수 없도록 흐르는 눈물을 그
치지 못하는 제 아낙을 도장방 구들칸에 앉혀 놓고, 조심스럽게 강모의 거처로
건너왔다. 어려운 말 모르는 부서방은 이것이 곧 기적이라는 것인가 싶고, 또 마
치 전생의 무슨 인연이 압록강 넘어 환생을 한 것인가도 싶어, 반갑고 좋기는
말로 다 할 수 없었지만 창황중에도 어리떨떨, 눈앞에 닥친 일들이 얼른 실감나
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매안의 도적놈을 살려 주신 청암마님이 안 계셨더라면
아마도 그날 밤에 치도곤이 뭇매를 맞고 온 동네 회술레를 돈 후에, 죽을 지경
이 되게 두들겨 맞고는 넝마 걸레가 다 된 몸을 이끌고 식구들과 함께 꼭 팔도
거러지 신세로 쫓겨났을 것을, 쌀가마니까지 지워서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돌려
보내 주신 그 은혜를 쌀가마니처럼 지고, 한 번 살아보겠다고 박지짝 쪽지게에
매달고서 다 떨어진 이불 봇짐 머리에 인 채, 남부여대하고는 새끼들 앞 뒤 세
워 보듬고, 업고, 얼어붙은 강을 짚신 감발로 울며 울며 건너와, 생전에 보도 못
한 땅, 물 설고 말도 선 남의 나라 눈보라 천지를, 죽을 길인지 살길인지 모르고
헤매며 어디로 누구를 찾아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인지 물을 곳도 없었던 부서방.
말을 아는가. 아는 사람이 있는가. 벙어리 시늉으로 길을 물어 한 걸음 가고 또
한 걸음 가며, 그저 다만 죽지 않고 하루를 버티는 것만이 가장 큰 일이었다. 그
야말로 남대문입납이요, 서울 가서 김서방 찾거나 마찬가지 만주가 어디라고 걸
어 걸어서 막연히 살길을 찾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 '막연히'에 그들은 온 식구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기차를 타지 않고 왜?"
강모는 겨우 그렇게 물었다.
"아이고, 서방님. 다리 뒀다 머에 쓴당가요."
부서방은 몸을 움찔하며,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말 막는 시늉을
했다. 열 식구 가차운디 금쪽 같은 돈 한 푼, 차비로 다 써 불면 참말로 만주서
는 송장이 되겄지라우. 죽을라고 고향땅 떠나온 것도 아닌디. 살라먼 종자씨 애
끼디끼 종자돈이 엽전 반 토막이라도 있어야 안허겄능기요잉. 그러고 서방님. 이
거이 어뜬 돈잉기요? 청암마님께서 작고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저 같은 놈한테
덜어 주고 가신, 당신 목숨이신디요. 저는 꼭 그렇게 생각헝만요. 그것은 절대로
쌀 한 톨 값도 헤푸게 쓸 수가 없었지라우. 그래서 차비 대신 제 새끼 얼어 터
진 귀때기를 길바닥에 떨구고, 부서방은 봉천 땅에 다다랐던 것이다. 봉천이 어
딘지 부서방이 알 리가 있는가. 다만 볼 수 없는 상거지 꼴을 하고, 무조건 봉천
에 가면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산다더라. 하고는 죽을힘을 다하여 낮에는 걷고 밤
에는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하며, 몇 날 며칠을 발가락이 떨어지게
가고 또 가서, 닿고 보니 웬 정거장이었는데, 이 곳이 봉천이라는 것이었다. 부
서방은 구 말에 그냥 무너지듯이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부서방네도 그의 아이
들도 썩은 짚둥우리처럼 푸석 쓰러졌다. 역광장에 쓰러지고 무너진 사람들은 그
들만이 아니었다. 둥그런 무덤의 봉분마냥 뚜껑을 뒤집어쓴 정거장의 청동 지붕
이 새파란 뗏장 같은 녹을 서슬 푸르게 돋우고 있는 위용이, 낯설면서도 어마어
마하게 커다란 봉천역 역사는, 붉은 벽돌과 흰 화강석이 켜를 이루며 무늬를 짜
고, 시계탑에 걸린 시계의 눈금과 바늘은 칼침처럼 날카로운 각도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황량할 정도로 드넓은 역 광장이 비좁을 만큼 즐비하게 앉고, 서고, 드
러누워 있었다. 제 몸뚱이보다 큰 자루나 보퉁이, 혹은 남루한 짐보따리를 깔고
앉은 더벅머리, 베고 누운 중늙은이, 보듬은 채 쪼그리고 웅크린 아낙네, 잠든
어린아이, 서서 무엇인가 음울하고 심각하게 수군거리는 사내들, 그들은 하나같
이 언제까지나 움쩍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부옇게 먼지를 일으키는 그들
의 거무튀튀한 자루와 짐보따리는 너무나도 무거워 비쩍 마른 이 사람들 힘으로
는 도저히 들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간장 빛으로 졸아든 낯색과 움푹 들어간
눈이며 툭 불거진 광대뼈, 검은 옷에 퍼런 색 다부산즈를 입은 중국인일 것이다.
그들의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선 사람이 여그는 많이 산다는디. 여그서
누가 조선 사램인지 알 수가 있능가. 이 중에도 있기는 있을 거인다잉. 뚤레뚤레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는 말 붙일 만한 사람이 눈에 뜨이지 않아, 큰마음 먹고
부서방네한테 단단히 일렀다.
"여그 똑 가만히 있어엉? 어디로 가먼 우리는 그만잉게. 못 만난다고. 생이벨이
란 말이여. 살어서는 못 만나. 누가 무신 소리를 해도 따러가먼 안되야. 내가 오
란다더라고 해도 믿으먼 안되야. 잉? 내가 죽는다고 해도, 잉? 내가 쩌어짝으로
조께 가보고 올랑게로. 머, 무신 방도를 찾어야 어디로 가든지 오든지 헐 거 아
니여? 긍게 내가 시방 여그저그 가서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조께 들어 볼랑게,
당최 아디 가들 말고 여가 말뚝맹이로 딱 붙어 있으라고."
부서방은 그 말을 못 맺어 자리를 못 떴다.
"알었응게 후딱 갔다 오시요예. 당부허다 날 새겄소. 나 귀 안 먹었어. 저승사자
가 와서 가자고 해도 안 가고 있으께 얼릉 갔다 와아. 무단히 질 잊어 부지 말
고 똑똑이 잘 보고 댕기여. 잉? 가는 질, 오는 질."
오히려 부서방을 핀잔하는 아낙과 줄남생이 새끼들을 광장에 부러 놓고, 부서방
은 역 구내로 들어섰다. 구내 대합실은 바깥보다 더 굉장했다. 발 디딜 틈도 없
이 들어찬 사람들은, 몇 개 안되는 의자는 언감생심 차지할 엄두도 못 내고, 바
닥에 아예 틀고 앉아서, 사람들이 지나가려 해도, 내 등 밟어라, 하고는 옴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로 떠나려 하는 것보다는 갈 곳이 없거나, 이 대합실이
목적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냥 속수무책으로 나뒹굴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 그
추운 날에도 훅, 훅, 끼치는 사람들 숨과 열에 부서방은 안 추워서 다행이 아니
라 멀미가 나서 어지러웠다. 아이고오, 인내야. 봉천이 크기는 큰 곳이구나. 왁자
지껄 쉴새없이 떠드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부서방은 이렇게
사람수가 많은 것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누구를 만나도 만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부서방이 태어나서 이처럼 넓고 큰 건물 안에 들어서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 꼬
투리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켰다. 사람 키 몇 배는 되게 높아서 벌판 같은 천장
은 기차 철로처럼 까만 선을 죽죽 그어 아홉 칸으로 나뉘었는데, 그 끝은 소실
점 너머로 가뭇 스러지리만큼 길었다. 그리고 좌우 네 칸씩 나눈 천장 가운데 칸
은 책보만씩한 진홍색 네모 속에 연두색 마름모 무늬 색칠이 고운 연속짜임이
되어 있는데, 그 연두색 마름모마다 넝쿨 같은 놋쇠 장식이 금빛으로 번쩍이는
전등불이 휘황하게 아홉 개씩이나, 전구가 피어나는 꽃숭이어리처럼 박히어 거
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눈부시었다. 어쩌면 그 샨데리아 등불들은 이 남루
한 군중들을 위해 달아 놓은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턱없이 화려해서 제 몫이
아닌 줄을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유리 창문 칸칸 사이사이의
벽에 걸린 수박등도 마찬가지였다. 두 개씩 한 쌍인 전등이 정교한 장식물로 받
쳐올린 받침대 위에서 수밀도 같이 농익어 탐스러운 불빛을 노랗게 발하는 것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그것을 누릴 만한 일본 사람들을 위
해서, 계획된 국제도시 봉천답게 꾸며진 것일 뿐, 제 인생을 몽땅 꾸려서 이 한
보따리에 구겨 넣고, 거기 제 목숨을 부지해 넝마처럼 널부러져 있는 유랑민, 떠
돌이, 쿠리와 식민지의 백성들한테는 한낱 절박한 생존 너머 빛나는 노리개 장
난에 불과한 장식물로 보였으리라. 흐릿한 눈동자가 허공에 풀려 맺힌 곳 없는
노인네 곁에서, 깡마른 청년이 안내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전국 철로 주요
역의 열차 발착 시각표와 요금표가 대문짝만한 판대기에 깨알같은 한문자로 씌
어 있었지만, 부서방은 읽을 줄도 모르고 읽을 필요도 없었다. 북경방향, 목단길
림방향, 대련방향, 합이빈방향... 새빨간 글씨가 걸린 현판 앞에도 사람들은 몰려
있었다. 검은 안경을 끼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 하나가 푸른빛 도는 보라색 짙은
중국옷을 입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아래층에서는 누군가 올라온다. 층계 계단 옆구리 창문은 기다란 말발굽 모양인
데 창살을 빗금과 곡선으로 장식해서 이국적이었다. 저 아래층에는 끝간 곳 모
르게 길고 거창한 규모의 동굴 같은 지하도가 있다고, 여기가 봉천역이라고 일
러준 사람은 말했었다. 부서방은 그 아래쪽으로 가는 계단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땅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도 없었고, 설령 정말로 길이 마치 그곳에
뚫려 있다 할지라도, 무슨 무덤 속 구천이나 되는 것처럼 으스스하고 두려웠던
것이다. 한 번 들어가면 못나올 것 땅속은 그에게는 죽음이었다. 행여 누가 그
속에서 잡아당기기나 하듯이 부서방은 지레 질겁을 하며 황망히 뒷걸음질을 쳐,
대합실 밖으로 나왔다. 살이 아프게 때려치는 바람이 얼음조각같이 부서졌다. 역
광장에는 벌써 어둑발이 내리고 있었다. 빈터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의 무리는
어느새 꾸역꾸역 어디론가 밀려들 가고, 한데 나앉아 가장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부서방네 가솔 한 무더기는 드문드문 몇 남지 않은 사람들 한쪽에 잔뜩 웅
크린 채 오글오글 붙어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고 있다가는 밤새 얼어죽기 딱
좋은 난장에 천막은커녕 나뭇잎 하나 가릴 것도 없이 헐벗은 식구들이 눈에 들
어온 순간 부서방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천지에 오직 이것뿐인 피붙이들. 오
늘밤에 안 죽을라면 그래도 그 지하돈가 머잉가 그리 기어 들어가는 거이 낫을
랑가. 거그는 암만해도 저 바람닫이보돔은 좀 갠찮을 거이여. 아이고, 그러다가
떼로 죽으먼 어쩌 꺼잉고. 묏동 속으가 옴시레기 도레도레 찌고 앉었는 꼴이 될
랑가 어쩔랑가. 이렇게 갈 곳이 없는 세상도 있구나. 만주만 가먼 산다등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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