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멍
울멍줄멍, 연고도 없이 들이닥친 남의 식구 한 떼거리를 끝내 떨쳐버리지 못
하고, 김씨는 할 수 없이 하룻밤 잠자리로 가게에 딸린 됫방 옆구리, 도저방 구
들 한 칸을 우선 내주었다.
"다 같은 조선 사람들끼리, 존 일 적선에 쫓아내지 말고, 우리 조께 살레 주씨요
예. 이? 우리가 오죽허먼 이 동낭치 꼴을 허고, 천리 만리 험악헌 질을... 오동지
섣달에 홑치매 홑바지, 맨발로 얼어터짐서.. 죽을라고... 죽을라고, 솔가도주를 했
것소잉? 여끄장은 어찌어찌 천행으로 간신히 목숨 붙어 왔지마는, 여그서 나가
라먼 우리는 모도 인자거리 구신 골송장이 되고 말 것인디, 어찌 꺼이요... 인간
구제 조께 해 주시기라우, 예? 야들을 데꼬 어디로 갈 꺼이요오."
점방 바닥에 다리를 뻗으며 주질러 앉아 버렸던 아낙이,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가다시피하여 김씨 앞에 고부라지며, 낯바닥만 쳐들고 흐느끼는데, 삼눈이 돋은
것일까. 핏발이 뭉쳐 시뻘겋게 구르는 아낙의 두 눈알은 신열에 들떠 것불이 타
는 것처럼 보였다. 김씨는 난감하여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외로 했다.
"야는 시방 귀때기도 진작에 떨어져 부렀다요. 어디서 어뜨케 떨어졌능가도 나는
모르겄어... 시상에 이런 일이 있으까. 얼매나아 오다 오다 봉게 야 귀때기 한 짝
이 없드라고요."
붉은 눈물이 질펀한 눈자위로, 금방 등에서 풀어 내려놓은 서너 살 계집아이를
가리키며 아낙이 한숨을 뭉갰다. 푸르딩딩 부은 아이는 정말 오른쪽 귀가 없었
다. 참혹한 정경이었다. 동상에 걸린 계집아이 어린 귀때기 한 개는 아마 재 어
미 써늘한 등판에 대고 자면서 비비다, 보채다, 어쩌다가, 어느 이름 모를 길가
나 얼음바닥 아니면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의 이 만주 벌판 삭풍 속에 소리
도 없이 떨어져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짚신조차 밑이 닳아져 총만 남은데다가,
발을 감은 걸레 같은 헝겊 감발이 다 헤어져 너덜너덜 드러난 아낙의 발뒤꿈치
도 하얗게 얼어서 껍질이 이들이들 벗겨진 채 켜켜이 결이 일어나 부스러지고
있었다. 점방 바닥에 퍼벌리어 앉고 선 다른 사람 누구라고 니보다 더 나을 것
도 없는 일가족의 험악한 주제산이 몰골에, 김씨는 이제 무슨 말로 토를 달 엄
두마저 나지 않는지 연신 혀만 찼다. 그는 이런 조선인 표랑민들을 한두 번 겪
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동안 물끄러미 허연 국수 둘기 면발만 바라보고 있
던 그가 결국은 이 떼거지들 몰골을 외면하지 못하여,
"우선 하룻밤 냉천이나 피하구서리, 날이 밝거든 무슨 방도를 찾아 봐야지 뭐.
몸이 녹거든 누구네 집 마당쓸이라두 해 보든지요. 남이 다 파 갔겠지만, 언 땅
에 백힌 게 아직 좀 남아 있는 데두 있기는 있겠디. 어느 구석엔가."
하고 말았다. 그 '하룻밤'이 몇 날 며칠 밤이 될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이었지만.
"마당쓸이요?"
얼른 말뜻을 못 알아들은 남정이 이 총중에도 그것이 무슨 '일'인가하여 되받아
물었다. 마당쓸이는 주로 한족의 지주 집에서 지난가을 추수에 탈곡을 하고 난
뒤, 마당에 떨어진 낱알을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이 긁어모아 주워다 먹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만주땅 추위가 이게 얼마나 무서운데, 들은 말두 없었어요? 겁도 없이 동삼에
이 어린것들을 몽땅 데리구..."
김씨가 눅은 말끝을 흐리자, 그 측은히 여기는 기색이 매달리어, 이제는 살았구
나, 싶었던가, 아낙이 그만 목을 놓아 대성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게 웬 난리야?"
점방에 표랑민 한 떼가 죽으로 앉아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다는 점원의 말에, 불
때던 부지깽이를 든 채로 튀어나온 김씨 아낙이 앙바트게 두 다리를 멀리고 서
서, 한 손을 허리에 짚고, 한 손은 부지깽이를 치키며 까뀌눈을 뜬다. 거꾸로 꽂
히게 모가 선 눈으로 한 바퀴 훑으며 점방 바닥에 즐비한 사람들 일가족을 내리
쏘아 본 김씨 아낙의 심사가 대체 편치 않은 것 같다. 김씨가 그런 제 아내의
위세를 달래려는 것인지 혼잣말로,
"그저 하룻밤이니꺼니."
들으란 듯 중얼거린다. 김씨 아낙은 어림도 없다는 낯색으로 고개를 쳐들어 김
씨를 외면하며 허, 하더니,
"소곰이 쉬었단 말을 내가 믿지. 저 하루가 맻 하루가 될른지 누가 알어?"
해 버린다. 건들하니 키가 크고 살이 흰 김씨와는 대조적이라 할까. 김씨 아낙은
작달막하면서 어깨가 딱 벌어진데다 다리가 짧고, 상체에 비해서 하체가 실팍한
체구라, 당차다고 해야 할는지 억세다고 해야 할는지, 단단하고 검붉은 실빛이
그런 인상을 더하게 해 준다. 생김새 구먹 구먹은 밉상이랄 수 없었지만 숱많고
검은 눈썹이며 쫑쫑히 박힌 위아랫니가 결코 만만한 성격 아닌 것을 알게 했고,
무엇보다 새까만 동자를 쉴새없이 굴리는 눈이 쌍꺼풀 졌으면서도 두덩은 쏘복
하게 부은 듯하여, 불안하고 사나워 보인다. 음성 또한 꺽쉬어, 난들난들한 김씨
와는 사뭇 달랐다.
"뭐이 먹을 게 없나아, 눈을 뒤집어도 시원찮은데 거저 뭐를 퍼다 멕일 게 없나
하구시리 일만 저지르무, 치다꺼린 누가 해."
악을 한 번 쓰고는 제 남정을 향하여 흰자위가 뒤집힐 만큼 눈이 돌아가게 흘긴다.
"누가 왁새 아니라나, 원."
김씨는 왁왁대는 마누라 면상을 슬몃 피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런데 밤이 되
어, 이 떨거지들이 천만 뜻밖에도 강모네 마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다시 한바탕 모두 다 생난리가 나고 말았다. 김씨는 아이구, 내가 하마트면 죄를
지을 뻔했다. 고 천만다행이라는 말을 몇 번씩이나 했는데, 김씨 아낙은 아무래
도 아는 면이 한 집에 살고 있으니 여차하면 비빌 언덕이 생긴 셈이라, 아까하
면 막 퍼붓지 않고 얼굴을 확 펴며,
"한 동네 살았으므 친척이 아니요? 그래, 친척을 찾아 이 먼 데르 왓소?"
하고는 강모네와 부서방네를 얼른 친척으로 묶어 버렸다. 졸지에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말을 겁없이 하는 김씨 아낙한테 부서방은 황망히 손을 저으며 무어라 말
을 떼려 하는데, 김씨 아낙은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본 척도 안하면서,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가 반갑다는데, 여기는 되놈의 땅이라 조선 사람만 봐두
애간장이 녹지요 머. 하물며 한 마을에 살던 친척을 만났으니."
덮어씌우듯 되뇐다. 그네는 속셈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여기다 대고 강모는 굳
이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금 친척이냐, 아니냐, 족보를 따질 계제
가 아니려니와 굳이 관계를 밝힐 필요도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고, 묵묵히 이
참담한 일가족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부서방은 물론이고, 그 식구들은 마치 저
승사자에게 끌려가던 사지에서 보살을 만난 것처럼 제 정신을 못 차리게 흥분하
여, 이제는 살았구나, 이제는 살았다고 울부짖었다. 좋아한 것은 김씨 내외도 마
찬가지였다. 주인 김씨는 우선 사람 짐을 떠맡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홀가분했
고, 김씨 아낙은 만에 하나 여차한 일이 생겨 이 표랑민 가족이 몇 날 며칠 공
밥을 먹는다 해도 밥값 받을 곳이 바짝 가까이 있으며, 어쨌든 친척이라고 얽어
놓았으니 이런 저런 수고를 해 주면 강모네가 모르쇠하지는 않을 것이어서 마음
이 낙낙해진 것이다.
"참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녁은 있능게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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