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유랑민
제나라 잃고 제 땅 떼우며 가노라 간다 주림에 밀려
가노라 간다 총칼에 쫓겨 이고 지고 고달픈 흰옷의 무리
깨여진 쪽박에는 꿈이 서럽고 괴나리봇짐에는 꿈이 무거워
타관의 고갯마루 해 저무는데 바람 찬 이 밤은 어데서 묵노
"긍게 시방 지가 아랫몰 떠난 거이 거자 한 석 달 가차이 되야강만요."
부서방은 강태와 강모를 따라, 동문사 인쇄창에 기거하는 심진학의 방으로 들어
서서 엉거주춤, 어떻게 공례를 갖추어야 할지 눈치를 보다가,
"선생님께서는 우리 스승이시오."
라고 이르는 강태의 말에,
"아이고, 그러싱가요?"
하더니 그만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며 절을 하였다. 미처 자세를 갖추지 못한
심진학이 당황하여, 부복한 부서방의 구부린 팔굽을 두 손으로 붙잡아 일으켰다.
"아 이게 웬일이십니까. 사람 놀라게."
심진학이 부서방을 등판 없는 동글의자에 앉히며 모처럼 웃는데, 누렇게 여윈
그의 얼굴에 메마른 결주름이 접힌다. 이제 사십 중반, 장년이 분명한데 안색은
빛이 바랬다.
"여기는 조선이 아닙니다."
부서방은 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궁둥이 끝만 겨우 붙이고 앉은 의
자가 뒤뚱 앞쪽으로 거꾸러질 것 같은데도, 그는 송구스러운 듯 무릎에 더욱 힘
을 주며 바싹 붙이고 앉아 두 손을 비비니, 앞으로 쏠리는 그 모습이 몹시 불안
정해 보였다.
"근본이 어디 가간디요? 개꼬랑지 삼년 묻어 놔도 쪽제비 터럭 안되고, 까마구에
분칠해 봤자 백로 안되지라우. 땅이 암만 넘의 땅이라 해도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램인디... 하물며 반상이랴. 그러고... 그께잇 노무 압록강 조께 넘어왔다고, 사
람의 자식이 되빤대기맹이로 은혜를 잊어 부러서도 안되고요잉."
부서방이 고개를 조아렸다.
"서방님들 스승이시먼, 저 같은 놈은 여그가 어디라고 요렇게 떡하니 텍아리 쳐
들고 앉어 있을 수도 없는디... 안 그렁교? 참말로 죄송시럽습니다."
본디 매안의 사액서원에 누대 일꾼붙이로 있던 할아비와 아비가, 삼엄한 훼철령
을 어기지 못하고 서원을 헐어 내자, 저절로 동네 노역을 하게 되었는데, 세월이
더 무르게 흐르면서 부씨네는 종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신분으로 유야무야 아랫
몰 언저리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이씨 문중을 상전처럼 극진히 받드
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더욱이나 부서방으로서는, 청암부인의 은이 간폐에 사
무친 전 일이 있는지라, 그 문중이나 강모에 대하여 마음속에 느껴 품고 있는
생각과 인정이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런 만큼, 강모와 강태, 그리고
그들의 선생인 심진학과 이처럼 무람없이 탁자에 마주앉아 '하시오' 받아가며 동
좌석한다는 것이 도무지 당치않아 꺼끄럽고 어색하여 몸둘 바 모를 일이었으나.
선생은 네 사람 앞앞이 놓인 찻잔에 고루 뜨거운 차를 따른다. 을씨년스럽게 이
빠진 찻잔에서 오르는 김이, 시린 외풍을 받아 흔들리며 스러지는데. 부서방은
마치 불을 쪼이듯 갈퀴 같은 두 손을 엉덩하게 펴 찻잔을 잡는다. 검붉은 그의
손등은 소나무 껍질처럼 갈라지고 터졌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거의 연배 비슷한 처지라, 심진학은 강모 강태와의 전차야 어찌 되었든 부서방
에게 평교 언사를 쓴다. 그러나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부서방이 애꿎은 찻잔만
두 손으로 투박하게 감싸쥔 채, 조마조마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는 듯 만지작거
렸다. 이런 모습에 강모는 문득 한 이야기가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여나믄 살
시절, 할머니 청암부인이 그날따라 어머니 율촌댁과 무슨 일이었는지, 햇빛 드는
장지 아래 고부 웃음에 섞인 옛이야기들을 몇 자리씩이나 나누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과공은 비례라."
지나치게 공손한 것은 오히려 예의에 벗어난다는 말이니,
"무엇이든지 정도에 맞아야 어색하지 않은 법인데, 안하던 짓 하면 귀신도 놀래
서 밥을 굶어."
"예?"
"너, 이런 이약 들어 봤냐?"
샛노랗게 광채 나는 놋화로에 담긴 잿불을 다둑이며 청암부인은 말했다.
"전에 어느 아무 문중에 명색 없는 종이 하나 있었는데, 평생토록 뼈가 빠지게
일만 하다가 죽었더란다. 그것이 하도 서러워서 종의 자식이 불쌍한 아배 원혼
을 달래 주려고, 죽어서나마 어디 양반 대접 한 번 받아보시라고, 제사 때를 당
하여 무슨 수를 썼는지, 마음씨 좋은 샌님한테 통사정을 해 가지고, 신주는 감히
못 쓰니 지방 한 장 써 주시라. 필적을 얻어서는 제상을 차릴 적에, 홍동백서,
어동육서를 제가 어찌 알 것이랴. 얻어 온 과일인가, 꾸어 온 생선인가, 종놈의
신분에 정성만은 갸륵해서 상이 넘치는 것을 샌님이 기특히 여기고 한 장 자알
써서, 유우세에차아 모년 모월 모일... 낭랑하고 엄숙하게 읽었더란다."
이만하면 생전에 못 살아 본 양반의 세상을, 귀신이 되어서라도 흉내내 보았으
니 여한이 없으렷다.
"샌님이 돌아가고, 종의 자식은 흐뭇하여 깊은 잠이 들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꿈
속에 봉두난발 머리를 풀어헤친 제 아배가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나타나 두려워
서 벌벌 떨며, 배가 고파 못 견디겄다. 식은 밥 한 술만 달라. 고 우는 게 아니냐."
종의 자식이 이 말에 소스라쳐 깜짝 놀라며,
"아니 아배, 이게 무슨 말씀이요, 그 맛난 떡에, 국에, 온갖 전이며 붉은 사과 흰
배, 그리고 생선, 고기, 술과 포, 식혜를 다 어쩌고, 무엇을 먹었길래 배가 고프다
하십니까... 했겄지?"
종의 아배는 갈고리 같은 손으로 잔뜩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영문을 몰라 어리
둥절한 자식놈한테 하소연을 했더란다.
"말도 마라, 야야."
송췽이는 솔잎을 먹어야고, 물괴기는 물속으서 살어야는디. 이날 펭상에 넘의 집
종노릇 이골이 나서 손바닥에 굉이가 백이드락 일만 허다 죽은 내가, 오늘은 귀
신이 되야 느그 집에 제삿밥 조께 얻어 먹으러 왔다가, 기절 초풍을 해서 똑 두
번 죽는 지 알었다. 느닷없이 생전에 못 먹어 보던 음석들이 울긋불긋 그뜩그뜩
채려진 제사상도 당최 나 멕기에는 낯설고 겁나는디. 내 가서 앉어야 헐 자리에
는 대관절 무신 소린지 알도 못헐 먹글씨 진서로 쓴 지방이 몬야 와 터억 붙어
있길래, 나는 무섭고 주눅이 들어서 벙거충이맹이로 그 저테 차마 가들 못허고
빙빙 돌기만 했니라. 그거이 꼭 나 쫓아낼라는 부적맹이드라. 그러다 하도 배가
고파서, 머이라도 한 덤벵이 먹어 보까아... 싶드마는, 아이, 야. 그 서릿바람 호랭
이 같은 샌님은 또 왜 어디로 가도 안허고 그렇게 사청왕맹이로 상 옆에 딱 버
티고 서서, 사람 에러와 죽겄는디 숨도 못 쉬게, 귀신보고 이래라아, 저래라아,
점잖허신 문자를 우렁우렁 외어댄다냐이. 종놈은 본대 상전이라먼 죄 진 것도
없이 오갈이 들고, 쌍놈은 그저 양반이라먼 갓끈 비쳐도 몸썰이 나지 않냐, 왜.
그런디 상전의 샌님이 유식허게 문장 격식을 갖촤 축그장 읽어 주싱게로, 좌불
안석, 몸둘 바를 몰라 나는 무색허고 횡송해서 진땀이 다 나드라. 엥게붙은 목젖
에 물 한 모금 못 적시고, 저 멀고 머언 황천길을 터덕터덕 갈랑게, 배도오 고프
고 다리도오 아퍼서, 가다가 기양 도로 왔다. 아이고, 나 밥 한 숟구락만 도라.
"아니, 이거이 먼 소리여, 시방."
종의 자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에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혼곤
히 젖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훑어 닦으며,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짚신을 꿰어
신고 잰걸음을 놓아 샌님에게로 내달아 갔다. 큰 일이 난 것이다. 오밤중에 들이
닥친 종의 자식이 하는 말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샌님은, 그 길로 다시 종의
집으로 가, 제상을 새로 차리라고 일렀다. 헌데 이번에는 아까와 사뭇 다를 것
이, 홍동백서, 어동육서는 물론 따질 것도 없어 무조건 수북수북 담아다가 아무
렇게나 상 가운데 놓아두고, 떡이며 전도 귀 맞추어 모양 나게 담지 않고 마구
섞어 고깔을 만들었다. 나머지 제수며 나물들도 마찬가지로 그저 허벅지게 퍼담
기만 하였다. 그리고는 지방도 모시지 않았다. 종의 자식은 이 두서없는 제상 앞
에 빨깡 쪼그리고 앉아 향을 피우고 술을 따랐다. 그러자 샌님은 뒷짐을 지고
벽력같이 큰 소리로
"바우야아."
호령을 하듯이, 귀신이 된 종의 아배 생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가 딱 한 마디.
"많이 처먹어라."
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휭 자리를 떠버렸다. 이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종놈
의 제사라도 제사는 제사인데. 종의 아들은 몹시 마음이 아프고 처량도 했으나,
도리가 없어서, 그냥 밤새도록 상을 뻗대 놓고 앉았다가 새벽녘에 그만 깜박 잠
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또 웬일인가. 주린 배를 갈고리같이 움켜쥐었던 아까
의 얼굴은 간 곳이 없고, 어느결에 화안히 밝아진 낯색으로 웃으며 나타난 종의
아배는, 모름달같이 둥시르르 부른 배를 낙낙하게 두드렸다.
"어이, 자알 먹었다. 나는 갈란다."
"그래서 종의 자식이 크게 깨닫고, 이후로는 않던 짓은 안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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