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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0권 (16)

카지모도 2025. 6. 27.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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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말해도 소용도 없지만, 고보를 막 졸업한 그해에, 바로 취직이 되었던 전주

부청 학교과에서 회식이 있다고 하여 모두 함께 갔던 고사정의 이급 요릿집 '모찌즈

끼' , 망월. 그 곳에서 나는 가난에 팔려 와 빚에 묶여 있단 여자, 오유끼를 만났

다. 그리고 그네를 풀어 주기 위하여, 내가 관리하고 있던 돈 삼백 원을 덜어냈

다. 그것은 흑심이 따른 유용이나 결국은 문책을 당했던 횡령이 아니라, 얼마든

지 지금 당장 곧바로 채워 넣을 수 있는 돈을 우선 잠시, 눈에 뜨이는 데서 빌

려 쓴 것이었다. 나는 정말 조금도 악의는 없었다. 돈 삼백 원 쓴 것이 '공금'인

줄을 나는 몰라서... 언제나 하시라도 옮겨 놓기만 하면 되는 내 돈이 있길래...

물론 그 내 돈이라는 것이 '우리' 집의 돈이었지만... 그 개념의 구분이 필요없었

던 나에게 그 '잠시'를... 감사는 용서하지 않았다. 마치 자연 속의 생물이 흐르는

물과 서 있는 바위가 서로 다투지 않고, 우거진 가지의 과일이 그 스스로 무르

익으면 떨어지듯이, 그저 나는 생의 광활한 텃밭에서 이리저리로 가벼이 날아다

니는 자연아의 날개인 줄만 알았던 시절, 그 시절이 끝나는 조종을 나는 내 손

으로 쳤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세상의 재물에 구분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었다. 모든 것은 할머니의 것이었고, 아버지의 것이었고, 그

것은 곧 우리의 것이었다. 그것은 어린 탓이었으리라. '어리다'는 것은 어리석다

는 말과 같다고 들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리석은 객기에 불과한 행위였는

지도 모르겠다. 그때로서는 마치 그물에 포박당한 것만 같았던 자신의 운명을

풀어주는 심정으로, 무엇엔가 절박하게 쫓기어 오유끼를 모찌즈끼에서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오유끼는 강모 자신이었다. 풀지 못한 제 운명의 족쇠를 대신하

여 끌어낸 오유끼. 그러나 나는 자신을 풀어 준 것이 아니라, 결국 또 하나의 운

명을 차꼬처럼 뒤집어쓰고 말았던 것이다. 인생을 함부로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할머니한테 단 한 번, 한 마디도 말씀 드리지 못한 것이 강모는 가

슴아팠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떼어 받은 면죄의 삼백 원, 명주 수건에, 강모는

아무것도 담아 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못 들으셔도 말씀이나 사뢰어 볼 것을...

마음을 높이 닦으신 이들은 수족이 다 멈추어도 끝까지 심장은 따듯하게 살아서

뛰며, 뇌 기능만을 맨 마지막까지 작용을 하시니, 대답은 못해도 알기는 아신다

하던 것을.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회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아픔이 남기는 이 깊은 화상, 할머니. 왜 저한테 그 눅눅한 명주 수

건을 남기셨습니까. 차라리 부인의 성품과 기상대로 서릿발같은 채찍을 남기었

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이처럼 미어지는 상처로 남지는 않았을라는지. 강모는 그

아픈 부드러움이 서러워서 운다. 명치를 누르며 어금니를 물고 운다. 조부모의

상을 당하여, 손자로서 마땅히 복을 입고, 곡을 해야 옳을 것이나, 그는 마치 비

밀처럼 윽물린 신음 소리로 울었다. 옆에 함께 우는 부서방이 있었지만, 이제야

말로 온 세상에 오로지 혼자 남은 것 같은 고적감에 강모는 어깨가 시려, 차마

이 부음을 목놓아 발설할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

은 죽음. 할머니 청암부인을 잃은 그는, 자신이 흡사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거미

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씨 문중 대종가 종손의 몸으로 한 가문의 둥치가 되어

중심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는커녕, 달아나고만 싶어서, 저 광활하고 견고한 천장

을 이루는 조상들의 문명에 대동맥처럼 연결되지 못하고, 아주 버리지도 못한

채, 이처럼 불안하고 위태롭게 매달려 허공에 떠 있는 존재. 끊어질 듯 아슬아슬

한 거미줄 한 가닥에 저를 맡기어 명색이 새로움을 찾아서 떠나왔으나, 나는 아

직도 착지하지 못했다. 발바닥이 땅에 닿아 착지를 해야만 그때부터 실을 뽑든

집을 짓든, 어디로 도망을 가든 할 수가 있을 것 아니냐. 세계와 생의 어느 한

점에도 끈끈한 발을 내리지 못하여, 헛되이 절지의 마디발로 낯선 허공을 저으

며 헛발질하는 한 마리 거미. 그것이 나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의 지상에서 단

하나, 흔들리고 출렁이는 물살 위에, 늙은 거북이처럼 떠서 그네의 넓은 등으로

받쳐 주던 착지점을 잃고 만 것이다. 청암부인은 그에게 속박이고 근원이었던가.

언제라도 자기를 받쳐 주고받아 주었던 그 한 점 등판을 순식간에 영영 잃고,

허공의 허방에 거꾸로 매달린 강모는, 닿을 곳 없어 시린 발을 외롭게 웅크린

제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울음을 죽인다. 아 나도 할머니 곁을 떠

나올 때, 단 한 마디 작별의 말씀도 없이, 몸짓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 죄

물으시는가. 하지만, 난 죽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죄 많아도 이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원망하시라고 나는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

는 존재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살아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강모는 처

절하게 느낀다. 살아만 계신다면.

"그래. 언제 일을 당하셨던가."

돌아가리라. 내 가서 덕석말이 몰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매안으로 돌아

가리라. 우리 할머니 단 한 번이라도 그 모습을 뵈오리라. 이 세상에 아직 육신

이 머물고 계실 때, 혈손도 없이, 빈 세상. 이런 소용도 없는 종손 하나 빌려다

가 가문에 끼워 넣으신 것으로 다시없는 보람을 삼으셨던 내 할머니... 임종을

못 했으면 시신이라도 뵈오리라. 그도 만일 늦었으면 입관이라도... 아니, 그도

늦었으면 다만 하관이라도... 나는 뵈어야겠다. 우리 할머니 몸담으신 관이나마

손대서 만져 보면 내 덜 서러울까... 관 실으신 상여나마 보면 내 덜 서러울까...

몸 덮으신 흙이라도 내 가서... 부서방이 불원천리, 이 안 좋은 날씨에 눈보라 얼

음 구덩이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이 부음 때문이었구나. 그래서 아

까 나를 보자마자 대성통곡, 벼가 녹게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로구나. 강모는 혼

자서 짐작하고, 결연히 마음을 다잡아 당장에 행장을 꾸려서 매안으로 떠날 태

세를 하였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이게 웬일인가. 부서방의 대답은 강모를 그

만 털썩 주저앉게 만들고 말았다.

"시방이 이월잉게 벌써 한참 되얐그만이요. 작년 시안 동짓달에 일을 당허겼거등

요. 지가 거그 있을 적으는 초하루 보름이먼 삭망에 가서 수차례, 절이라도 꼭

올리고 왔는디."

"그럼 거년 동짓달에 작고를 허셨단 말인가?"

"그러시구만요."

"아아. 그랬어..."

강모의 허리가 툭 꺾인다. 나는 몰랐네. 무너져버린 강모는 이제, 그래도 양반이

라고 부서방 앞에서 짐짓 체모를 지키면서 막을 칠 필요도, 매안에 소식을 돈절

하고 사는 것을 굳이 감출 필요도 없게 되어 버렸다. 나를, 사람의 자식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창자가 훑이는 통증에 강모는 제 가슴을 움켜잡으며 비로소

어윽, 어윽, 상한 짐승같이 복받쳐 울었다. 생살 뜯기는 울음이다. 만주의 눈바람

이 그의 울음에 맞으며, 어두운 바람을 헤치고 강태한테로 간다. 할머니 돌아가

신 것을 지체없이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고단할 테니 기다리지는 말고 먼저 자."

어려워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생각해. 나는 형님한테 다녀오겠네. 부서방이 도무

지 몸둘 바를 모르면서 두 손을 맞잡고 비비는 것을 젖은 눈시울로 바라보며 강

모는 집을 나섰다. 부서방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태는 강모와 달리, 청암부인

의 부음에는 눈시울로 바라보며 침통한 표정으로 묵묵히 있다가,

"좀 더 수허실 줄 알았는데."

짤막하게 한 마디 하고는, 곧 말머리를 바꾸어 물었다.

"부서방이 조선을 떠난 게 언제라 하더냐?"

"올 정월에 설 막 쇠고는 떠났다대요."

"가솔들은 어쩌고? 다 끌고 왔어?"

"거지 거지 상거지 꼴을 하고 왔습디다."

"그래?"

"미리 와서 살 만한가도 좀 보고, 먹고 살 자리도 어지간히 잡은 다음에 식구들

을 데리고 올 것이지. 그냥 무작정하고."

"참 기가 막힌 일이다. 이러다가는 조선 사람은 다 유랑민이 되고 말겠구나. 아

니, 그런데 어떻게 너를 딱 찾아온 것이냐? 주소 한 장 없이.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도 조선에는 없는데."

"모르지요. 그런 얘기 자세히 헐 겨를이 어디 있고? 계제도 아니고. 할머니 작고

허신 말씀끝이라 뭐."

내가 지금 그 사정 듣게 생겼소? 강모는 강태의 반응이 섭섭하고 마땅치 않아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촌수로 치자면야 강모와 강태가 청암부인에게 꼭 같은 길

이고 마디였지만, 정신줄의 흐름은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피톨 하나 섞이지 않

은 강모는 흡사 부모를 여읜 고애자처럼 머리를 찧으며 질정을 못하겠는데, 강

태는 지친의 죽음보다 아랫것 부서방의 일에 관심이 더 많다. 부서방을 제 방

구들칸 한쪽에서 자라고 이른 뒤, 강모는 부리나케 칠흑 같은 밤길을 가르며 시

칸방의 강태한테로 내달아 왔던 것이다.

"할머님이 돌아가셨답니다."

이보다 더 급한 전갈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라도 영연에 가 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근심스럽게 묻는 강모에게 강태는 잘라서 말했다.

"산 부모를 버리고 온 자식이, 죽은 할머니를 뵈러 간단 말이냐?"

"그래도 자손으로서 도리가 있지 않습니까. 돌아가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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