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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0권 (44)

카지모도 2025. 8. 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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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봉천의 봄

 

봉천의 봄은 아무래도 남만주 의과대학 정원에서 만개한 것 같다. 겨우내 웅

크리고 있던 우중충한 대학병원과 학교의 건물들은 저만치 물러나 보이도록, 눈

가까이 짙푸른 정원의 송림에서 지금 막 새로 돋는 연둣빛 바늘잎을 소복하게

뿜어내는 소나무는, 해묵은 솔잎 꺼끌하고 뻗센 암록조차 생기로 물들게 한다.

수령이 한 백 년은 되었을까, 붉은 갑옷 입은 몸에 푸른 머리를 구름처럼 우람

하게 드리운 나무도 있고, 이제 겨우 뼘치를 막 벗어난 다복솔이 어린 가지마다

다보록한 담록을 머금은 것도 있지만, 대개는 어씩어씩 비슷한 동배들끼리 한

무리가 기골차게 모여선 대학병원 울창한 송림. 조선에서 보던 그대로인 홍송들

이 그 잘생긴 용의 몸통을 미끈하게 굽이틀며 치솟아오를 때, 투둑, 툭, 기름지

게 굵은 비늘이 소리 없는 폭죽처럼 봄기운에 터진다. 용솟음이 저러하리. 실감

나게 하는, 헌헌장부 선비들이 밀밀히 들어차 기상을 자랑하는 것 같은 소나무

숲은 남만주 의과대학 정원의 압권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그것뿐이라면 이 정원

은 기개가 뛰어난 웅문이 분명하되 화려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저만큼 서 있는

대추나무 몇 그루 순박한 무더기 건너서, 일본 사람들이 심은 벚나무가 줄지어

선 정문 쪽에 탄성을 지르게 할만큼 화사한 벚꽃잎 한꺼번에 피는 것도 장관이

지만, 그 아래 영산홍, 자산홍, 철쭉꽃들이 희고 붉은 꽃점같이 부푼 망울을 자

지러지게 터뜨리면, 솔숲은 그만 일시에 휘황한 성장을 하니, 꽃 없는 나무는 과

연 단조롭다 싶어진다. 하지만 아, 저 꽃 좀 보아. 온 하늘이 부색하게 피어나는

도화꽃 진분홍 어지러이 애절한 복숭아나무가 없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 봄날

의 남만주 의과대학 정원 송림이 이다지도 저며들게 아름답지는 않았으리라. 조

선에서보다 봄이 훨씬 늦은 북방의 황사 자욱한 하늘 아래, 도홍색 꽃무리 소문

처럼 흐드러져 난만한 정경은 나른하면서도 도발적이어서, 겨우내 가라앉아 잠

긴 피를 흔든다. 예전에 선비들은 마당에 지나치게 고운 꽃은 심지 않았다 하는

데, 그 중에서도 특히 복숭아나무는 들이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 까닭은 복숭아

꽃 요기로운 자태가 글 읽는 선비의 마음에 색정을 돋우어 음탐하게 될까 보아

저어한 것 아니었던가. 혹은 그 꽃 진 후에 무르익은 열매의 탐스러운 형상이

영락없는 음성을 띄우고 있어, 보는 눈을 미리 삼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흔히

'도색'이라 하면, 글자 그대로 복숭아꽃 같은 분홍빛을 가리키기도 하나, 사실은

남녀간에 색정으로 얽히는 일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니, 복숭아꽃과 열매의

본질이 원래 음란하고 방탕한 것일까. 하기는 분홍이나 백황색 아니면 노랑 복

숭아 열매가 물 많고 달면서 살이 부드러워 녹아들며, 과육 푸짐한 맛이 육덕

있는데다 풍요롭고 관능적인 생김새 역시 여성성을 드러내매, 예로부터 이를 생

산과 생명력에 결부시켜 한 상징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기에 진나라 때 시인 도

연명의 글 도화원기에 나오는 도원경도 그와 같은 상징 중의 하나라고 보는 이

도 있었다. 어느 한 날, 무릉의 어부가 골짜기 물살의 흐름을 타고 가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는데, 뜻밖에도 복사꽃 만발한 숲 속의 동굴을 지나서, 평화로운

별천지 도원경을 발견하였다. 그 도화 핀 마을에는 진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이

곳으로 왔다는 사람들이 세월도 근심도 모두 잊고, 평화로이 소박하게 살고 있

었다. 여기서 어부는 마을 사람들한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 동안 아무 걱

정없이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 잊지 못하여 다시 그곳을 찾아가려고, 어부

가 표시해 둔 길을 따라갔으나, 끝내 그 이상향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도화원

기. 그리운 무릉도원. 그곳에는 왜 복사꽃이 아득히 피어 있을까. 복사꽃은 촉나

라의 도원에서도 분홍의 구름머리로 피어난다. 장엄한 역사의 서막에 천하를 꿈

꾸며 큰 뜻을 품고,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세상의 기화요초 온갖 꽃을 다 두고,

농밀한 봄날 복숭아꽃 흩날리는 도원에서 의형제 결의를 하였던 것이다. 뿐 아

니라 일찍이 시경의 주남편에서도,

"도지요요작작기화."

라 읊조리어, 글자마다 복사꽃이 활짝 핀 정경을 찬탄으로 새겨 놓았다. 꿀벌이

닝닝거리는 한낮의 노곤한 과수원이나 해 저무는 다무락에 기대어 핀 복사꽃 진

분홍 물든 꽃은, 바라보고 있노라면 숨이 막힌다. 보는 이의 눈빛에 꽃빛은 도장

의 인주처럼 선명하게 지문을 찍는다. 그 꽃빛은 사람한테 한 번 묻으면 파고들

어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넋을 흘리어 흔들며 사로잡는다. 그것은 짙

은 주술을 머금고 있다. 주사같은 빛이다. 새빨간 빛이 나는 육장정계의 광물인

주사는 수은에 황을 섞은 것으로, 정제하여 물감을 만들거나 한방약에 넣는데,

특히 궂은 일을 물리치고 소원을 비는 여러 부적을 쓸 때는 꼭 주사로 한다. 그

런데 굳이 선비의 조촐한 뜨락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이 나무가 집안에 있으면

좋지 않다고, 복숭아는 으레 울 밖에다 심곤 하였다. 귀신이 붙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숭아나무에 귀신이 붙는다고 꺼리는 것은, 오히려 이 나무가 옛날부터

마를 쫓는 힘을 가진 신비스러운 선목이라 전하여 오는 속설이 역으로 작용한

금기일 것이다. 전에 보면 무당이 굿을 할 때 복숭아 나무 가지 꺾은 것을 요긴

하게 흔들고 휘둘러 귀신을 멀리 보내거나, 문간의 어디에 꽂아 두곤 했는데, 아

무리 귀신을 쫓아내는 나뭇가지라 하더라도, 어쨌든 귀신이나 마와 가까이 상관

있는 나무 언저리에는 그것들이 묻거나 맴돌게 마련이어서, 그렇게 미리 조심하

는 것은 아니었는지. 귀신의 요기가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 복숭아. 한편 중국에

서는 복숭아나무로 얇고 길쭉한 널판을 만들어 신상을 그리고 주문과 축수의 글

귀를 써서, 정월 초하룻날이면 꼭 대문에 내다 붙였으니 이것이 도부였다. 복숭

아나무 부적인 것이다. 도부는 해마다 새것으로 바꾸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점점

나무 구하기도 어렵고, 간편한 것을 쫓는 시속에 그 형태가 변하여, 근자에는 복

숭아 나무판 대신 종이를 쓰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본디 복숭아나무가 선목인

것은, 중국의 육조 시대, 호남성과 호북성을 중심으로 하는 형초 지방의 연중 세

시풍속을 기록한 형초세시기에도 그 연유가 적히어 있거니와, 도삭산의 커다란

복숭아나무 아래 '신도'와 '울루'라고 하는 두 신선이 있어서, 지나가는 귀신을 잡

고 지킨다는 전설을 사람들은 오래도록 믿어왔다. 그러기에, 옛 그림이나 민화

속에 신선도를 보면 상서롭고 인자한 수염을 마알갛게 늘이운 노인들 머리 위로

복숭아 열매 볼그레 터질 듯이 요염무쌍하게 매달려 있는 형상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고. 서유기의 손오공이 천제가 잡수시는 천궁의 복숭아를 걸신들린 것처럼

훔쳐 먹었다는 이야기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 복숭아는 삼천 년만에 한

번씩 열매가 연다는 반도로서, 사람들이 장수를 빌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

세상 삼백 년을 살기도 어려운데 삼천 년에 한 번 나는 복숭아를 어이 먹으리.

사람의 한 살이는 덧없어서 순간이나, 천도가 아니면 또 어떠랴. 하늘끝 속자락

을 살포시 훔친 듯 오련히 봄빛에 취해 젖은 복사꽃잎 한 줌씩 곁들이어 청주를

빚어내면, 도화주 맑은 무릉도 가깝고, 해 지면 달 떠서 시흥 또한 도도하여, 구

차한 인간세 시절을 잊게 한다. 열매를 먹자고 심은 나무가 아니라 다만 꽃을

보고 싶어 기르는 복숭아나무도 있어, 이를 따로 화도라 하는데 그 종류가 다양

했다. 진분홍 잦아드는 홑겹꽃이 조선에 주로 많은 복숭아꽃이지만, 그 외에도

흰 겹꽃 소담스러이 송올송올 핀 겹백도, 반겹꽃이면서 짙은 빨강색으로 피는

홍도, 진분홍색 겹꽃인 겹홍도, 반겹꽃에 분홍물 도는 반겹도, 연분홍색 겹꽃은

겹도, 빨간 꽃잎이 가늘게 갈라진 겹꽃이라면 국도, 휘늘어진 가지에 흰 꽃이 하

얗게 피어나는 백수양. 이들은 어디에 어떻게 피든지 하나같이 사람의 눈을 사

로잡았다. 남만주 의과대학 정원에는 저마다 자색을 한껏 뽐내어 휘황히 만개한

이 복숭아꽃들이, 아픈 사람 어쩌라도, 아낄 것 없이 흐드러졌다. 애초에 복숭아

나무 원산지는 중국의 서부 황하 상류 감숙성과 섬서성 같은 고원지대라 하던

데. 조선에서도 남부지방 따뜻한 곳 마을마다 각시봉숭아 저절로 떨어져 어느덧

꽃 피고 또 나무로 자라나니, 그것은 조선의 자생종이었다. 꽃은 여느 것보다 더

선연히 고왔지만 열매는 작고 단단하여 먹지 못했던 각시복숭아 나무는 매안의

뒷동산과 언덕빼기에서도 피고 졌지. 강태는 문득 유정해져서 대학병원의 정원

에 핀 복숭아꽃들을 올려다본다. 조선에서라면 이미 꽃잎이 다 지고 말았을 터

이지만, 만주라서 이제야 한창인 복숭아꽃 꿀을 따러 벌들이 날아드는 오후. 꽃

구경이 당치않은 엉뚱하고 어이없는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 강태는 오히려 거꾸

로 꽃구경을 하게 된 셈이었다. 심진학 선생이 개한테 물린 것이다.

"내가 박해규군을 꼭 좀 만나 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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