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귀밑머리 허옇게 늙어.
가을 풀벌레 소리 스산한 심회(心懷)에는 아아, 그 옛날 소년들의 푸르름 희미한 자취나마 묻혀있을까요.
허지만 고교친구 옥영재, 당당하게 시인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칠십세 장수(長壽) 쯤은 이제 옛말이 되었습니다만.
일흔살 넘은 詩의 열정은 그야말로 고래희(古來稀. 자고로 드물도다)가 아닐수 없습니다.
영재.
문예지 '문장 21'의 '시부문 신인상' 수상 진심으로 축하하네.
더욱 건필하여 잿빛으로 식은 내 가슴에도 불을 지펴주게.
꿈
옥영재
에덴이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낙엽이 강변의 기억을 세운다.
기억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동안 잠복하고 있던 철지난 분노가 인다.
그건 그리움이다. 세월 뒤에서 서성이고 있던 그리움이다. 모텔의 불빛들이 죽어가고 있다.
기억이 지워지고 있다. 발화되지 못한 꿈이 바닷가 바위 되어 해수에 잠기고 있다.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까맣게 밤이 익는다. 목과 눈이 도륙된 하얀 볼락이 모래알처럼 입속을 뒹굴고,
수족관에는 박피剝皮된 추억이 침묵하고 있다.
굴절된 분노가 입술을 깨문다. 알코올에 저려진 정액이 에덴공원의 여백으로 곤두박질친다.
하와가 사라진 에덴에서 아담이 피血를 토하고 있다.
지워졌다.
되돌아 갈 수 없는 리듬. 엉켜버린 멜로디. 스피커는 운율韻律없는 밤을 쉴 새 없이 두드린다.
도로를 질주하는 불멸의 고독. 에덴을 버린 아담들이 연리지連理枝에 매달려 출렁거렸다.
혈맥처럼 돋아나는 욕정, 가로등에 밟히며 바람이 된다. 가로등이 꺼진다. 모든 게 지워졌다.
꿈이다.
-기억이 꺾이지 않는 꿈은 현실이다-
검은 꽃
옥영재
"오늘 밤을 넘길 수 없으니 집으로 모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화면이 떨린다
섬광이 일고 번개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번져오는 두려움
문드러진 오감 앞에
운율도, 리듬도 없이 한 박자씩 빨라지는 괴성
가난해졌다.
이승과 저승이 곡예를 반복하는 동안
닭 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지고
어디선가 염불소리는 깊은 저음이 되어 깔린다
하늘에 별들이 총총한데도 어둠은 깊고
어둠의 깊이 속으로 별이
별이 떨어진다
화면의 온도가 내린다.
죽음이 주검 속으로 들락거리고
앰뷸런스가 토해낸 죽음의 피 냄새
택배 주소지에 그녀의 이름이 반듯하게 누워 있다
"어머니"
고향집 툇마루에는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화면이 꺼졌다
낙동강 둑에서
옥영재
강둑
그녀의 입술
욕정이 불빛에 휘청거렸다
어둠에 발목이 잡혔다
개짓는 소리가 들린다
목이 마르다
여인의 한恨. 낙동강
물줄기에 바람이 일고
주검보다 더 진한 통증이 소름처럼 돋아난다
물소리가 뼈 속을 흔든다
강은 밤이 되어야 늙는다
강은 늙어가는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푸른 기억에 갇혀 있던 욕망이
발기
발기된다
젖은 달빛에 욕정이 솟고
정액이 왈칵 죽음을 쏟았다
둘둘 말아 강물에 던졌다
몸부림했던 꿈. 10년의 갈망이
낙동강으로 떠내려가고 있다
붙잡지 않았다
죽음도 그녀를 버렸다
옥영재
그녀가 웃었다
하늘을 향해 내민 목
골절된 허공 속으로 추락한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얼굴
그녀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진지한 영혼의 소란
무덤을 흔들어
한恨이 원怨을 깨워
한 자락 혼魂을 불러낸다
굽지 않는 기氣로는
저승의 계단에 오를 수 없잖아!
절규를 외면한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다
이승에서 저승을 흔들고
삶이 죽음을 흔들어도
무당의 대나무 끝에서 목숨이 흔들린다
죽어라고 죽겠다는 그녀는 죽지 않았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유영하고 있었을 뿐
죽음도 그녀를 버렸다
죽음이 죽은
얼굴에 윤潤없는 현재가 하얗게 흘렸다
그녀가 웃었다
바다 그리고 어머니
옥영재
새벽
자동차 페달 밟는 소리가 뼈 속을 흔든다
어둠 속에서
비가 내렸다 비는
리듬 없는 건반을 요란하게 더듬고
파도는
여전사의 칼날이 되어 춤추고 있다
어체魚體의 혈맥이 바다에 쏟아지고
바다를 지우는 바다와의 사투, 바다를 향한
몸부림이 서럽다
비바람이 세상을 흔들고 있다
하늘은 꾸역꾸역 바다를 토해 낸다
얼었던 삶이 풀리고
기름에 덧칠된 바다와
허기진 영혼을 묶어
물결위로 하얀 깃발이 되어 흔들린다
어머니가
버선 없이 촉촉이 젖고 있었다
새벽같이 달려와
포옹도 엎드리지도 못하고
폭포처럼 쏟아내는
비
그리고 바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어머니의 첫 생일성묘
생전에 끔찍이도 사랑했던
어머니의 바다
비는
피아노 건반이 되어 바다를 두드리고 있다
당신의 무덤을 두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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