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前 後 -파트릭 모디아노- (1,4,3,3,1)

카지모도 2016. 6. 18.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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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前

-파트릭 모디아노 作-

 

***동우***

2015. 1. 20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지난 달의 책부족 독서과제였는데, 새해들자 심신 두루 어수선하여 독후감 과제수행이 이리 늦는다. 

 

책부족 추장께서 이 책을 선정한데에는 필시 2014년도 '파트릭 모디아노'가 수상(受賞)한 노벨문학상의 후광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모디아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 준 이유인즉슨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인간의 미묘한 운명을 환기하는 기억의 예술을 높이 샀다>는 것이었다.

흐음, 표현하기 매우 어려운 인간의 운명 그리고 그것을 환기하는 기억의 예술이라.... 

수상(授賞) 덕담 자못 몽롱하도다. 

노벨문학상에 대하여 무식한 소회 한마디 하련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예술적 몽환성('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하여), 그 가벼움(?)에 방점을 찍는 노벨은 '밀란 쿤데라'의 예술적 명료성 그 무거움에 대하여는 어이 하려는지. ㅎ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김화역 옮김, 문학동네, 2014년 출판)

이 소설은 기억을 잃어버린 한 사나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도정을 그린 기억에 관한 작품이다.

 

기억에 관한 소설이라면, 들은 풍월로라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을것 같다.  

주인공 마르셀의 과거로의 여행은 어떤 사건이나 지적계기가 단초가 되었다거나 과거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의 작용에 의하여 촉발된 것이 아니었다.

그건 기억중추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후각이라는 감관기관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다.

홍차에 적신 마들레느과자가 자극한 냄새가 홀연 무의식의 근저에 묻혀있던 기억들을 자극하여 과거를 건져올리는 것, 시간적 순서라던가 논리적 서사로서 기억을 더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심상에 떠오르는 '의식'에서 '의식'에로의 여행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내면에 흐르는 찰라적으로 나타났다 스러지는 의식, 그것도 문화풍토가 다른 의식의 흐름을 쫓아다닌다는 것은 때로 얼마나 지겹고 난망한 노릇인지, 그 방대한 작품을 내 수준으로서는 읽어내기에 벅찼다.

그 대하소설의 1편 격인 '스완의 집 쪽으로'를 책장만 들썩이다가 말았음을 고백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모디아노의 기억여행은 프루스트와는 아주 달랐다.

물리적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존재하였던 사실들을 더듬어 퍼즐을 맞추듯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종의 추리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확실한 삶의 궤적을 더듬어 자신의 정체성을 드디어 획득하였는가. 

파트릭 모디아노는 몽환적인 분위기로서 얘기하고 있다. 

'아니라고', 그것이 이 소설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하여 이렇게 마무리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프롤로그->

<잠시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계의 끝, 오랜 옛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소녀가 멀어져 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 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에필로그->

 

종전 얼마후인 1955년도 쯤,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파리의 안개 속을 더듬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흥신소를 찾아갔는데, 과거에 대하여 그와 동류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흥신소 소장 '위트'는 그에게 신분증과 여권이 들어있는 큰 봉투를 내밀며 말하였다.

<이제부터 당신 이름은 '기 로랑'이오>

10년 동안 흥신소 직원 '기 로랑'으로 살아왔던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 기간 뿐, 1965년에 위크가 은퇴하자 그는 자신의 과거를 찾아 나선다. 

주인공 일인칭 시점으로 들려주는, 과거 추적과정의 내러티브는 무슨 리포트처럼 단순하고 명료하였다.

270 여 페이지의 짧은 소설이지만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은(반쪽에도 못미치는) 47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주인공 1인칭 시점 (두어 장 쯤은 전혀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이동하기 하기도)의 구성이고, 실존인물의 이름들 (마릴린 몬로, 에릴 프론, 아서 밀러, 앙드레 모로아, 서머셋 모옴, 심지어 유명한 갱 럭키 루치아노도)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거기에 무슨 추리소설처럼 객관적 논리로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하는 따위 작가의 의도는 추호도 있지 아니한듯 보였다.

의식의 흐름이 용해된 문장이라고 하면 좋을런지, 모디아노는 지극히 주정적(主情的)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

쓸쓸함, 상실감, 허망함, 허무함.. 어떤 분위기 만이 넘실거리는, 그가 구사하는 문체와 형식은 짧고 몽롱하고 생략적이었다.

소설은 시간과 시점과 공간을 모자이크하여 그 사이를 몽환적으로 헤매일 뿐이다.

 

이 소설을 읽기전 '파트릭 모디아노'의 다른 소설 두권을 먼저 읽었다.

'팔월의 일요일들'과 '슬픈 빌라'.

'파트릭 모디아노'는 다른 형식으로는 소설을 쓸수 없는 작가인가.

모두 한결같은 분위기, 소설마다 색감을 달리하는 유니크한 형식과 내용을 찾을수 없는 똑같은 색조의 소설들.

 

'팔월의 일요일들' (김화영 옮김, 세계사, 1991년 출판)

니스의 작은 마을, 아지못할 비밀을 간직한 젊은 사진가와 유부녀 실비아의 사랑, 불한당 빌쿠르, 그의 아내, 미국인 닐 부부, 그리고 다이아몬드... 종장에는 연인을 비롯하여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몇 대목을 발췌한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게되는 것은 막연한 죄의식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채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우리들 인생의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였다. 우리는 이곳 니스에 와서 낙착되기 전까지 그 도망의 길을 따라 숱한 여러 장소들로 이끌려 다녔다.>

<내 삶의 여러가지 사건들은 차츰차츰 안개에 뒤덮히면서 결국은 용해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오직 그 순간들,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 큼직한 벽난로, 벽에 걸려있는 모조품 구아르디 그림, 두런거리는 목소리..오직 그 순간들 밖에 남은 것이 없다.>

<다이아몬드가 그의 살갗위에서 달무리처럼 빛을 발했다. 이 부드러운 살갗에 비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단단하고 싸늘한가, 이 가냘프고 가슴을 흔들어 놓는 육체 위에 얹혀있는 보석은 얼마나 영원하고 견고해 보이는 것인가, 방의 냄새보다도 더. 우리들 주위에서 배회하고 있는 빌쿠르보다도 더.>

<비가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저 끝날줄 모르는 오후면 우리는 버림받은 듯한 느낌으로 방의 누기와 곰팡이 냄새 속에 묻힌채 남아있는 것이다. 나중에는 그런 생각에도 길이 들었고 이제는 시간이 정지해 버린 이 유령들의 도시에서도 마음이 편안할수 있다.>

<나는 프롬므나드를 따라 천천히 행렬을 지어 지나가는 저 사람들처럼 내 속에서 어떤 용수철 하나가 부러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렇다 나는 니스에 다른 주민들과 더불어 허공에 떠서 부유한다>

<그 시절에는 그런 상태가 우리들에게는 낯설었고 우리들을 사로잡는 무기력 상태에서 단단하고 알맹이가 있는 단 한가지, 불변하는 단 한가지 표적은 바로 그 다이아몬드였다. 불운일까?>

<모든 것이 내 앞에 굳게 잠져졌다.  내가 미끄러져 들어갈수 있는 아주 작은 틈바구니 하나 없었고 아주 작은 접촉부분 하나 찾을 길이 없었다. 모두가 돌이킬수 없이 굳게 잡겨 있었다....실비아에 대하여 최근 내 생활 속에 일어 난 그 모든 사건들에 대해 내가 그에게 무엇을 정확하게 진술할수 있겠는가? 너무나도 산산조각나 있고 너무나도 불연속적이어서 나 자신도 이해할수 없는 그 사건들을 말이다... 다이아몬드가 사라졌으니 영원도 사라진 것이다.>

실비아를 찾아나서는 주인공의 기억마저 환각처럼 모호하기만 하다.

등장인물이 악한인지 사기꾼들인지. 신분도 캐릭터의 정체성도 안개 속이다.

사건의 인과도 관계의 체계도 의미도 없다. 

엉성하게 직조된 구성이지만 그 단절된 편린들이 모여서 독특한 분위기를 이룰 뿐이다.

망각 상실감 허망함 허무함...

 

슬픈 빌라 (신현숙 옮김, 책세상, 2001년 출판)

칸느 근방의 온천도시, 열여덟짜리 소년, 실종된 부모, 익명으로 숨어 귀족 행세하며 빈둥거며 살아간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아지못할 피해의식, 이본느, 앙리 맹트, 맹트의 가스자살 (슬픈 빌라'는 자살한 맹트의 별장의 이름). 그러나 미국으로 함께 가기로 한 이본느는 파리행 역으로 나오지 않았다..

등장인물의 정체성은 모호하기 짝이 없고, 회상과 현재가 어우러진 시제는 혼란스럽다.

해설을 보니 1950녀대 말 알제리 전쟁 당시의 불안과 공포과 도피의 분위기 운운하던데. 전쟁을 존재의 근원적 암흑으로 은유하여 현재의 뿌리없는 삶의 실존을 분위기로써 그려 보여주는겐가.

몇 대목 발췌한다.

<어둠은 바로 시간의 파괴력이다. 모든 생생한 현재는 하나씩 하나씩 심연 속으로 무너진다. 그 어둠속에서 때때로 기억의 편린들에 잠시 빛을 발하며 떠돌고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의 사라짐에 우리가 가슴 저려 하는 것은 사실 그와 우리 사이에 존재해 잇던 그 암호 때문이었는데 한 존재의 사라짐과 더불어 그 암호가 무용하고 텅 빈 것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슬픈'이라는 수식어가 그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픈이라는 말 속에서 감미롭고도 투명한 그 어떤 것을 꿰뚫어볼수 있게 되자 맹트의 생각이 옳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 작은 별장의 문턱을 넘어섰을때 나는 왠일인지 말갛게 떠오르는 서러움 같은 것에 사로잡히고 말았으니까.>

<우리는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이본느와 나는... 우리의 제스처들은 무한히 느렸고 .... 저녁이 서서히 베란다로부터 밀려 들어올때면 나는 공기중에 수많은 먼지들이 떠서 정지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 주위로 모든 것이 떠다니고 있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後

 

***동우***

2015. 1. 21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구멍뚫린 과거, 

바스라져 희미한 단서들. 

스스로에게 마저 익명(匿名)인 이름, '기 로랑'이라는 사나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과거를 더듬는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는 파편화되고 형해화된 과거들이 흩어져 있다.

사나이는 그것들을 주어모으며 퍼즐을 맞춘다.

많은 낯선 인물들, 낡은 고문서들, 빛바랜 사진들, 인물들이 살았던 거리나 주거지, 옛날 전화번호부, 주소록, 증언문서, 기록들..

나는 누구일까. '기 롤랑'과 '메케무아'와 '페드로'... 자신이 사랑하였다는 '드 뉘즈'라는 여인의 정체는..

어떤 데자뷔를 경험하기도 하고 때로 야릇하게 감성을 적시는 정서기억도 떠오르는듯 하지만, 어두운 거리는 확실하지 않은 가설들과 몽롱한 해답들이 널려있을 뿐이다.

 

<그때 내 속에서는 무언가가 덜컥하고 걸리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이 방의 정경이 어떤 불안감을, 이미 내가 경험한 일이 있는 섬뜩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저 건물의 전면들, 인적없는 거리들, 황혼녘에 보초를 서고 있는 실루엣들이 옛날 익숙했던 어떤 노래나 어떤 향기와 마찬가지로 은근히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건물들의 입구에서는 아직도 옛날의 습관적으로 그곳을 드나들다가 그 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 같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위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수 있는 어떤 파동이.>

 

<하워드 드 뤼즈란 이름의 -나?- 남자와 모스크바에서 태어나고 팜 아일랜드에서 러키 루치아노를 알았던 옛날 댄서는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할수 있었을까?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 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그들은 어느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 버린다.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이 떠올라 얼른 책갈피를 편다.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 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그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아. 역사는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지만 참 이상해.... 그렇게 멋진 시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온갖 아름다운 가능성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잠겨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러나 모디아노의 과거는 아무것도 확고하지 않은 허망함이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 깃든 것이 과거 존재의 자취라 할지라도 과거란 그다지 강인한 것이 아닌가보다.

삶이 그러한데 하물며 기억임에랴.

삶의 순간마저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않았다는데 기억이란 가냘프게 빛을 발하는 촛불의 한낱 파동일 뿐일진저.

잃어버린 시간들은 산산조각난 삶의 편린, 그냥저냥 슬프고 아름다운 기억의 모둠.

페이소스 가득 담겨진... 그러한가.

 

<따지고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무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흩어진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종장, '위트'에게 보낸 편지.

 

<지금까지 모든 것이 내게는 어찌나 종잡을수 없고 어찌나 단편적으로 보였는지.. 몇개의 조각들, 어떤 것의 한 귀퉁이들이 갑자기 내 수사의 과정을 통하여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에필로그를 다시 베껴 쓴다.

 

<잠시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계의 끝, 오랜 옛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소녀가 멀어져 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 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으흠, 어쩌면 삶이란 착각이고 몽상이란 말가. 

우주의 중심, 철철 피흐르는 목숨의 주체.

'나'라는 존재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한 줌 따뜻함의 정체를 나는 어떻게 납득하고 있으런가.

 

파트릭 모디아노는 1945년생, 나보다 2년 연배의 전후작가이다.

해설에는 세기말적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단절적 허무, 아버지..등을 얘기하던데 사유가 유장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런 낌새를 눈치채지는 못하였다.

 

그냥 존재의 모습이 쓸쓸하고 가엾고 슬플 뿐이었다.

내가 읽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그런 <분위기>의 소설이었다.

  

***동우***

2015.01.20 04:43

 

책부족의 독후감 과제,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그의 몇권의 소설을 진작 읽었는데 오늘 새벽에야 시작하는 게으름.

책부족 추장님은 지금 팔라우공화국에 거하고 있지만 1월의 독서과제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독후감까지 올리셨는데.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에는 탱자탱자 휴양함이 아니라 부군 조교수님의 연구 조수로 간 것임을 부언합니다)

오늘이 마감일인지라 일단 발걸치기입니다.

나 마감일 넘기지 않았어욧.

  

***무위당***

2015.01.20 11:37

감사합니다.

스크랩합니다.

 

***┗동우***

2015.01.21 04:25

무위당님.

감사합니다.

청련도관, 동양고전 향기 더불어.

  

***송명숙***

2015.01.20 17:52

 

몽롱함이 딱 맞는 표현입니다 저도 안개속에서 앞뒤가 분간이 안가는 흐릿함을 절실히 맛 보았거든요

재미도 없고 숙제라서 겨우 읽고 그냥 몇자 적어 놓았을 뿐 그 사람의 다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없네요

대부분 프랑스 작가가 쓴 소설들이 내가 접해 본 몇 안되는 소설들이 어려워요

이름도 길고 딱딱하다고 할까요 레미 제라블도 시대상과 사회현상을 엮어놔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휠씬 어려윘던것이 사실이예요 ㅎ

그래서 저는 미국 작가나 일본작가에 편한 소설을 좋아하나 봅니다 아직 어린아이 수준이라서. ㅎ

늘 정성이 들어간 후기 제가 선생님이면 투뿔 줄 수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동우***

2015.01.21 04:32

 

교활하게도 내가 마감일을 20일로 미루어놓았지요. ㅎ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말씀처럼 몽롱하지만, 좀 쓸쓸한 소설이었습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인과도 관계도 성격도 없이, 단절된 장면들만 흩어져 있는.

그 산만한 듯한 편린들이 묘한 분위기로 통일을 이루고 있는듯.

...내 삶의 여러가지 사건들은 차츰차츰 안개에 뒤덮히면서 결국은 용해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오직 그 순간들,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 큼직한 벽난로, 벽에 걸려있는 모조품 구아르디 그림, 두런거리는 목소리..오직 그 순간들 밖에 남은 것이 없다....

투뿔 주신다니, 탱큐.

 

***홍애(虹厓)***

2015.01.21 11:46

 

소설의 플롯이란 이야기를 문학적이게 하는 수단이라고 단순히 말해ㅜ버리고 나면,

동우님이 다듬어ㅜ놓으신 이 소설의 원래ㅜ이야기가 보다ㅜ더 명확하게 다가옵니다.

그러고보면, 소설이 되고 안 되고는 결국 붓을 쥔 화가처럼

작가의 펜이 어떠한 연장인가에 따라 달라지는군요. 이ㅜ작가의 이ㅜ만한 이야기 소재라면

우리 범인들의 삶 어느 부분을 건드리면 나오는 거니까요.

 

***송명숙***

2015.01.21 06:34

 

느끼는 감정은 거의 비슷함을 봅니다

저는 리스본을 제쳐두고 마음을 먼저 읽었습니다

얼마나 편하게 읽었는지 머리가 다 맑아지는 느낌

모디아노의 흐릿함 하고는 비교가 되어 기분마저 업 되는것 같은 착각을 ㅎ ㅎ

동우님 덕분에 저는 매일 업그레이드 되는것 같아 벗이라 칭하면 실례가 될까요

나눌 수 있으면 다 벗이라 생각하는 저로서는 위 아래를 떠나 존경을 올리는 좋은 벗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년도를 보니 저보다 한참 어른이시네요 ㅎ

글로써 만나다보니 저는 늘 저와 비슷한 연배로 생각이 드는데 ㅎ 그래서 글이 좋은것 같네요

실례의 말을 많이 한것같은..

늘 감사합니다

 

***┗동우***

2015.01.22 01:26

 

하하, 송명숙님.

벗이 문제리까, 같은 부족인걸요.

송명숙님 연배에 날더러 어른이라 하시면 서럽다오.

송명숙님은 홍애님 또래일터인데, 오라비 뻘쯤이면 여하?ㅎ

그리고 송명숙님, 프랑스 소설이 어렵다고 하셨는데, 여기 리딩 북 태그 검색하여 모파상 찾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마 송명숙님 소설 취향에 맞을듯 싶어요.

  

***홍애(虹厓)***

2015.01.21 11:56

 

독서평을 잘 쓰기도 어려웠고, 읽을 때도 에피소드가 많아 읽기 편한 소설이진 않았으나

지금 살던 곳에서 비켜나 있고,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비로소ㅜ이제야 이 소설이 그립습니다.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도않고,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요즈음

새벽 꿈에서는 오래전 내 인생에 함께 하였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알 수 없는 사람이 된 그들이 나타납니다. 어두운 기억의ㅜ거리에서ㅜ헤매는 느낌이지요.그리고, 어느 시간에 내가 무엇이었든 그것들은 내 기억으로부터ㅜ먼저 지워지고 있으며 조금 더ㅜ시간이 흐른 뒤에는 내가 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조차 지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 소설의 백미입니다.

  

***┗동우***

2015.01.22 01:35

 

‘ㅜ’가 빈번한걸보니 모바일로 쓰신거로군요. ㅎ

내알거니와 홍애님의 어떤 주기, 기억과 추억을 향한 비애의 감정...

모디아노의 정서에 부합되는바 없지 않을듯.

모디아노의 삶에 대한 통찰이 저토록 허허한 것이라면 현존하는 우리의 실존은 못견디게 슬픕니다.

해설을 보면, 다르게도 읽힐수 있을 터인데.

이를테면 기분과 정서에 따라 접수되는 색감을 달리하는게 문학, 뿐 아니라 모든 예술의 속성이 아닐런지.

심수봉의 노래에서 힘을 얻는 사람과 절망하는 사람...

남국의 에메랄드빛 바다, 그것만 느끼시기를.

언제쯤 귀국하실 건지?

 

***eunbee***

2015.01.21 12:11

 

2014년 노벨문학수상자가 발표되자 얼른 서점으로 달려가 저 책을 사다가 읽었어요.

그해 보졸레 누보가 나오면 얼른 사다가 마셔보듯, 그해 노벨문학상 발표가 나면 하는 일(괜히 그래야 직성이 풀려서)

아둔한 글읽기의 내실력으로는 아슴프레 뭔가가 잡힐듯말듯한 소설이지만

그래도 문체의 간결함이 상큼했고, 안개서린듯 아른거리는 아름다운 분위기가 깃든 글발들이 좋았어요.

다 읽고는 오클랜드 나타샤님께 다른책들에 섞어 보냈더니, 이제 동우님의 저 훌륭한 후기를 읽고서

다시 읽고 싶어지는 마음을 달래고 있습니다.ㅎ

교보문고에 가서 다시 읽을 욕심이에요. 동우님이 읽으신 <팔월의 일요일들>도 읽고 싶던 책이었으니

이참에 손에 들어볼 생각이구요. 동우님의 책부족 과제 읽으니, 보다 밝아진 눈으로 더듬을 수 있을듯도 해서요.

동우님처럼 읽어낼 재주 없으니, 남의 글을 찾아 읽어봤어요.

읽은 것 중, 동우님만큼 내독후감상과 비슷한 것은 찾을 수 없었고

아래 글을 옮겨놓을게요. 나는 동우님 외 그 어떤 독후감도 찾아읽지 않는 게으름쟁이지만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독후감은 찾아 읽고 싶어지던걸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었나 해서.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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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속에서 고통받는 개인을 그려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기의 유럽이다.

주인공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프랑스에서 하루하루 불안과 초조함에 떨면서 살아간다. 시대와 세계의 무게감이 개인을 처참한 고통 속으로 서서히 밀어넣는다. 그 개인들은 서로 의지하기엔 너무 나약한 상태로 남아 떠돌면서 방황하고 괴로워 한다. 전쟁이 낳은 거대한 비극을, 작가는 한 사람의 시선을 빌려서 담담하게 풍경을 조망하듯 묘사한다.

그림으로 묘사하면 수채화 같다고 할까. 파트릭 모디아노는 짧고 밋밋한 단어를 조합하여 문장을 만든다. 그 문장들이 그려내는 색채는 짙거나 강렬하지 않지만, 두고두고 오래 곱씹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신기루처럼 서 있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과거를 찾아서, 독자는 어느샌가 주인공 기를 따라서 시간을 거슬러 가게 된다.

이 책에는 전쟁에 의해, 한 인간의 정체성이 통째로 붕괴되는 과정이 슬프도록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소멸된 과거를 찾아서 되살리는 일을 이어나간다. 어쩌면,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려는 의지에 달려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인간성이라는 것 말이다.

모여서 놀던 아이들이 해질녘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뒷모습에서 느낄 수 있던 상실감, 그 어릴적을 떠올릴 때의 아련함을 글로 옮겨 이야기에 담은 듯하다. 기억의 파편들을 조각조각 모아서 재구성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한 번의 죽음 뒤에 자신의 생을 되찾는 과정으로도 보인다.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본문 247쪽 중에서)

한 남자의 내면에 뚫린 커다란 구멍, 메우지 못할 빈 공간을 작은 기억의 조각들로 채워나가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독자를 충분히 매혹할 힘을 지닌 소설이다. '기억'과 '망각'으로 '존재'를 말한 이 책을 읽는다면,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가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것에 충분히 수긍하게 될 것이다.

[김준수(deckey) 기자]라는 분의 글.오마이뉴스에서는 글을 올리는 모든이들을 '기자'라고 칭하지않나요?

 

***┗동우***

2015.01.22 01:38

 

새삼 느낍니다.

은비님의 감성과 지성과 무릇 문화를 대하는 열정과 성실.

함께 해요, 책부족.

추장님. 은비님 이 분 팔 좀 당겨요, 우리 부족으로.